설교
가나의 결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1-12약 9분 분량
서막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한 장엄한 선언에 이어, 이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이 이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들과 함께 2:1-4:42의 본문 사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두 번의 기적 사건과 두 번의 담론을 담고 있습니다만, 이들 각각은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니라, “새 창조”라는 동일한 주제 하에 구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학적 대가로서의 화자의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창조(2:1-12)
(2) 새로운 성전(2:13-22)
(3) 새로운 탄생(2:23-3:36)
(4) 새로운 예배(4:1-42)
이 모든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는 이들 사건과 담론의 주인공입니다. 화자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그의 독자들이 ‘예수’가 과연 누구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를 새로운 창조와 관련하여 선언한 바 있습니다(고후 5:17).
1. 기적의 필요성(1-3절)
이야기는 “사흘째 되던 날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관한 이와 같은 언급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어떠한 기능과 의미를 지닐까요?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만,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 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가장 단순한 해석은 이러합니다:
즉 “사흘 후”는 아주 짧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에게 약속하셨던 “더 큰 일”(1:50-51)이
지체 없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이들도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잔치에서 맡게 될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3포도주가 떨어진지라(2-3절상)
그런데 이 신나는 축제 한 마당에서 아주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술이 떨어진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술 가게가 따로 있지도 않았을 터이니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개 일 주일씩이나 걸리는 ‘유대’ 식 결혼 풍습을 생각한다면 술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접대 상 심각한 결례로서, 신랑 측에 나쁜 영향을 주었으며 때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W. Barclay).
예수님의 어머니도 잔치에서 손님 접대하는 일을 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합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3절하)
왜 그녀는 이 문제를 예수님에게 알리고 있는 것일까? 아들이 무슨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을까?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지극히 순진하며,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극적 효과라 함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창조의 기적”으로 시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그분의 어머니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이야기의 흐름은 논리적 일관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기적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일어나기 위한 당위성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지금 기적을 기대하고 있기보다는 술이 없기 때문에 그녀 역시 매우 당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을 가중시켜주는 요소는 하나 더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존재입니다. 이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무슨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주인에게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제자들 역시 앞에서 전제한 바대로 잔치 집 주인과 친척관계에 있었다면, 당시 유대관습에 의하면 이들 역시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을 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아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어머니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예수님의 어머니의 당황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은근히 예수님의 기적을 기대하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수사적 기법은 <요한복음>의 화자가 다른 곳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서, 한 예로,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을 소개함에 있어서도 사전에 길고 상세한 정황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5:1-7).
2. 기적의 때(4-5절)
그러나 이어지는 단락은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답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이 구절을 삭제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혹자는 이 구절을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화자가 <기적 전승>의 자료에 이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학자도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원래부터 <기적 전승>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야기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은 예수님의 답변 태도를 놓고 서로 상반된 극단적인 입장을 유지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즉 前者가 예수님의 답변을 부드럽고 평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해, 後者는 다소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답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구약>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두 경우 모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삿 11:12; 대하 35:21; 왕하 3:13), 이 한 문장만으로 화자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가려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열왕기>는 흥미로운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왕하 3:13)
이곳에서 선지자 ‘엘리사’는 왕의 요청에 거부 의사를 드러내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 요청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어머니의 요청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요청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답변 속에는 또 다른 애매모호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때”와 관련된 언급 때문입니다. 과연 그 때가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 때를 그분의 죽음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연관 지어 말씀하시긴 하지만(7:30; 8:20; 13:1; 17:1),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화자의 의도를 추측해 보건대, “하나님 나라”나 공생애의 시작은 그 시기를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문제이지 어느 누구도(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을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강조가 지나쳐 이처럼 불필요한 곳에서 무리한 표현이 삽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기적의 발생(6-8절)
마침내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그야말로 “창조의 기적”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모리스’(H. Morris) 박사는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기적을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소위 “창조의 기적”(흔히 등급 A 기적으로 불림)과 “섭리의 기적”(등급 B 기적)이 그것입니다. “창조의 기적”이라 함은, 전문적인 용어를 빌자면, 현재 가장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열역학의 두 법칙”에 반하는 기적들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섭리의 기적”은 딱히 “열역학의 두 법칙”에 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의 발생 시기나 장소 등과 관련해서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할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본문의 기적은 “창조의 기적”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기적이 갖는 상징성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새로운 창조”와 함께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천지창조 즉 “첫 창조”로 시작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창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기적의 발생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특유의 대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과 포도주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각기 ‘유대’교와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와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물이 종교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포도주는 기쁨과 환희를 상징합니다. 물이 잔치에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듯이 종교 또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줄 수 없습니다.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전달해 주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6절)
숫자 “여섯”은 화자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즐겨 사용하는 완전수 “일곱”에서 하나가 빠진 숫자입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무미건조한 종교에 대한 이미지라 할 것입니다.
기적의 발생과 관련해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무명의 하인들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7-8절)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의 “순종”이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순종을 통해서 직접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잔치에 기쁨을 더해주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4. 기적의 확인(9-10절)
연회장(그가 누구든)의 탄성을 들어봅시다: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9-10절)
연회장의 칭찬은 당시에 회자하던 일종의 경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완벽한 기적에 대한 비유적 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행태는 변한 것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술집 주인들은 손님들이 거나하게 취하기 시작하면 물 타는 짓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의 초점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기적,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자연적인 기쁨은 “포도주가 떨어지듯” 한계가 있고 그 끝이 있습니다. 기쁨이 더 충만한 기쁨으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언젠가는 소진되고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공허와, 상실과, 허무가 따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기쁨이 날로 풍성하고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10:10하).
5. 기적의 목적(11절)
마지막 구절은 기적의 목적과 관련한 화자 자신의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교훈과 적용
1. 그리스도와 기적
2.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3. 그리스도와 기독교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