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또 다른 보혜사(5)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6:12-15약 9분 분량
마침내 성령님에 관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강론에 이르렀습니다(참고. 16:12-15). 이 마지막 강론에서 성령님의 관심은 세상에서 다시 교회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본문 중에 사도들을 지칭하는 “너희”가 여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傍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12-15절).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 마지막 강론이야말로 성령님에 관한 전체 강의의 절정에 해당하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지난 네 번의 강의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했던 것일까요?
아닌 게 아니라, 단 번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두 군데입니다: (1)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니라”(12절); (2)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3절). 이 두 구절은 앞의 내용을 반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예컨대, 두 번째 강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그리고 또 다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하).
요약하자면,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대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못다 한 말씀들이 남아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나머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실 것인가? 모든 진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계시와 섭리. 유명한 신약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漸進的)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계시(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진리)”라는 점입니다. 원칙적으로 이 두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로써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이 두 선언을 본문 해석에 적용하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이므로, 늘 현재 진행형이며, 시대를 두고 확장되어간다. 마치 하나님의 계시가 진화론적(進化論的)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듯한 표현입니다. 그는 또 주장합니다. 새로운 계시는 이전 것들을 수정하거나 대체할 수 있으며, 지금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한 요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위 “새로운 계시” 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을까?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그야말로 모든 영역, 모든 분야를 다 포함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비단 영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지적․예술적 활동 영역까지 다 포함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예컨대, ‘헨델’(Handel)의 그 유명한 작품 ‘메시아’(The Messiah)는 성령님의 계시로 탄생한 것이어야 합니다. ‘바클레이’가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헨델’의 회고담이 그와 같습니다: “나는 하늘이 열리고...하나님이 보좌 위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 신앙심이 깊은 자라면, ‘헨델’의 간증에 그야말로 ‘할렐루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루어 ‘노벨’ 상을 수상한 사람도, “강남 스타일”의 가수 ‘싸이’도,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모두 같은 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을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攝理)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啓示)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계시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향한 것이기에, 그 내용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애매모호하거나 헷갈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클레이’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계시, 세 가지 방식.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을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여러 차례 배운 바 있습니다만, 워낙 중차대한 질문이라 복습하는 요량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참고. 히 1:1), 편의 상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현(顯現, manifastation); 감동(感動, inspiration); 조명(照明, illumination).
우선 “현현”이라 함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사건, 음성, 꿈, 환상 등을 통칭(通稱)하는 계시의 방식입니다. 이 때 계시의 통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현현은 주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탄생 시기에 집중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사도행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현은 글로 기록된 <성경>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한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감동”(感動)(혹은 “영감”(靈感))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의미론적으로 이들 단어는 하나님의 호흡이나 숨결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계시의 통로는 성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감동을 받은 인간입니다. 예컨대,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이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신탁(神託)을 전하는 행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이 구절 자체가 <신약>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결국 전체 <성경>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대적으로 영감은 <성경>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는 그동안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사건이나 현상, 역사나 이야기, 노래와 시, 그리고 교훈들을 문서로 기록하고, 수집하여, 보존하고, 가르치는 그 모든 작업들이 필요했을 것인데,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 특히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사도들을 계시의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감”의 시대에 성자(聖子) 하나님, 즉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그분 역시 대제장이요, 사도라고 말합니다(참고. 히 3:1). 계시의 통로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분은 스스로 계시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요한’ 화자는 서막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자는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영광”(dovxa, 독사)은 “평판”이나 “명성”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광을 드러내다”는 말은 “본래의 명성이나 평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었다. 즉 그분은 스스로 복음이 되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였다.”
두 번째 보혜사. 이제 계시의 세 번째 방식, “조명”에 대하여 말할 차례입니다. 조명이란 말 그대로 “밝게 비추다”, 또는 “분명하게 하다”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누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조명하는가?”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두 번째 보혜사”가 조명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과연 그분이 무엇을 조명하겠다는 것인가?”입니다. 첫 번째 보혜사인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했다면, 두 번째 보혜사는 누구를 계시할 것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14절상). 그렇습니다. 두 번째 보혜사가 계시할 인물은 첫 번째 보혜사, 즉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할 것입니다. 즉 복음을 복음 되게 할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드러내고, 성령은 아들을 드러냅니다.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처럼, 조만간 성자(聖子)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즉 성령(聖靈) 하나님을 보내셔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언급하고 계신 “모든 진리”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그 모든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새로운 진리”나 또는 “우주의 모든 진리”가 아니라, 아들에 관한 모든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명”의 방식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까?
그것은 당연히 초자연적인 “현현”이나 “감동”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계시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면, 이제 성령께서는 “조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완성된 <성경>을 밝게 비추어주어, 교회로 하여금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읽거나 들을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조명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사역은 오늘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직도 이를 것이 많다”든지, “장래 일을 알리실 것이라”는 등의 언급이 바로 이점을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12-13절). 이는 예수님께서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들을 성령님께서 추가로 계시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전의 강의에서 분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즉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점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하).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그 모든 진리를 알려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동일한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회를 가르치고 훈계하며 바르게 하십니다.
본문의 결론을 위해서 캐치프레이즈를 하나 만들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 그리스도를 알라!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가? <성경>을 알라! <성경>을 알고 싶은가? 성령님을 모셔라!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