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필로그(2):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44-50약 13분 분량
예수께서 외쳐
(요 12:44-50)
이제 우리는 ‘에필로그’의 두 번째 단락을 읽고 있습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우리의 화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면서 이를 두 단락으로 나누어 요약정리하고 있습니다. 두 단락 모두에서 느껴지는 화자의 심정은 절박함과, 울분과, 그리고 답답함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화자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의 불신을 성토하고 있는가 하면(참고. 37-43절), 이곳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대중 집회(부흥 집회라고 할까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울분과 답답함을 간접적으로 분출하고 있습니다(참고. 44-50절).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대개 과학 논문이나 문학 작품들은 결론 부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요한’ 화자 역시 이곳 ‘에필로그’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즉 서막 이후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해 왔던 핵심 주제들을 다시 한 번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요한’ 화자가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복음을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다름 아닌 복음이기에 물어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며, 복음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잘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잠언서>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두 말 하면 잔소리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잠언서>가 본래 ‘유대’인들의 것이 아닙니까? 그들의 지혜 전승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아무리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미련한 자 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한에 있어 이스라엘을 능가할 인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자랑스러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자랑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있는 지식,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과연 타당하고 정확한 것이었을까? ‘바울’ 사도의 태도는 냉소적이고 회의적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의 지식은 착각이며 자기기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기서 한 걸음 더나가 이스라엘이 자기도취로 말미암아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착각 속에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그들은 보았고, 만났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기껏해야 ‘시내’ 산에서 천둥과 번개 가운데 들었던 음성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6).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때문에 볼 수가 없고, 그분의 음성은 기껏해야 나팔소리 정도로 들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즉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신비에 싸인 분이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계시하셨는가? 그분은 알 수 없는 분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했던 ‘모세’에게도, “나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면 내 눈이 상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겠지요.
이제 이스라엘의 자랑이 얼마나 공허하며, 자기기만적 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어떤 하나님을 만났던 것일까요? 혹시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님은 아닐까요? 이런 일은 정말 쉽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책에서 보는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공룡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공룡을 본 사람이 없으니 순전히 추측에 의존하여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이런 저런 취향이나 목적하는 바에 따라 다양한 하나님을 그려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해내는 것이지요.
우리시대의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도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인 즉은 하나님이나 종교는 우리의 환상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공회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에도 국가나, 민족이나, 교단이나, 교회에 따라 수없이 많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양산(量産)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 모두 하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은 계시는 것이며,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즉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을까? 이 질문은 실은 철학에서 중요한 두 질문으로서, 전자를 존재론적 질문, 그리고 후자를 인식론적 질문이라 합니다. <요한일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며, 만져보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다름 아닌 “성자(聖子) 하나님”(God the Son),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함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곳에서 동일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절).
세상의 빛.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선언이 왜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그분의 이어지는 선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46 절).
이는 <서막>의 유명한 선언 중의 하나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빛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구름 가운데 계시지 않고, 그분의 음성은 무슨 나팔소리나 우레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며, 번개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더 이상의 혼란이나, 애매모호함이나, 논쟁이나, 토론이나, 분열과 갈등이 있을 여지가 없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성품을 다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나님은 환상이 아니며, 우리의 기분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니며, 문선명 등과 같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이비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자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해도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가 진짜 그리스도라면, 그가 나타나는 그 시점이 곧 종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말의 시기를 놓고 예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종말을 가지고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스도도 가고 없는 이 시점에 말입니다. 흔히 <성경>과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 부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하고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빛은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 전체를 밝히 드러냅니다.
그런데 빛이 드러내 주는 것은 또 있습니다. 나 자신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비춰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합니다. 이 질문은 철학에서 세 번째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흔히 도덕론적 질문이라고도 하지요.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자는 것도 그리스도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자는 것입니다. 그 빛 속에 늘 거하고 어둠속에서 헤매지 말자는 것입니다(46절).
지난 9월의 책으로 소개한 바 있는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는 책은 그 구성이 참 흥미롭습니다. 작가는 그 책 안에 365가지의 유대적 가치관을 소개하면서, 매일 한 가지씩만 읽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읽은 것은 그날 꼭 실천해볼 것을 종용합니다. 만일 그의 권유대로 365일을 따라하게 되면 일 년쯤 뒤에는 성인(聖人)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대’ ‘랍비’ 정도는 되어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나도 그 책을 읽으면서 몇몇 군데에서 저자가 시킨 대로 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나쁜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정말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하루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요. 그러나 참으로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저자는 왜 이런 방식으로 책을 구성해놓았을까?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제 살았던 방식을 오늘도 그대로 따라하려 한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작가 김홍신 교수도 KBS의 “아침마당” 프로에 나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도전합니다: “사람에게 발전이 없는 것은 어제 살았던 방식대로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내일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같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말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는 것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단 하루라도 살아보는 것하고는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 주일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야고보서>도 이와 같은 괴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겠습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왜 이처럼 행하기가 어려울까? 이 책의 저자 랍비 ‘요셉 텔르슈킨’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게으름이란 어제와 똑 같이 살고 싶다는 일종의 관성작용(慣性作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어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정지되고 중지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빛을 받지 못한 자의 특징입니다. 여전히 심판 아래 놓여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누가 그를 심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빛이 그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닙니다. 빛 속에는 어둠이라고 전혀 없습니다. 스스로 그 어둠속에 갇혀 있기를 작정한 것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47절).
구원은 탈출이고, 해방이며, 독립이고, 광복입니다. 관성의 중력(重力)을 끊고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순리(順理)가 아닌 역리(逆理)입니다. “나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 어제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싶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며 순리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결정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48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아버지와의 하나 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심판하실 이”와 “내가 한 그 말”을 동격으로 놓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같은 경고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것이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상태로 계속될 줄로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종말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재지변이나 기근이나 전쟁을 종말의 징표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참고. 마 24:6-7).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본 것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더하고 계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디모데후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같은 현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이런 것들이 말세에 나타날 현상이라면, 나는 종말의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이미 심판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경고를 대하는 내 모습이나 자세가 어떻습니까? 혹시 별 관심도 없습니까? 별 의미가 없이 다가옵니까? 그렇다면 이미 내 속에 종말이 온 것이고, 나는 심판 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하지만 무기력과, 무관심과, 무의미의 관성에 사로잡혀 나에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쳐 부르십니다. 죽어 썩어가고 있던 ‘나사로’를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나사로’를 향해서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너 일어날래?” 그분은 명령했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지금 예수님은 복음은 초청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49-50절).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축복은 계명을 지키는 자의 것입니다. 듣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명령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뒤로 미루어 둘 여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 할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난 빛 아래 있습니까? 그 빛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내 삶은 살아서 역동하고 있습니까? 지금 헌신하고 결단하며 감사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