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날은 안식일이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9-18약 8분 분량
불편한 진실. 진실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신문이나 방송 보도를 믿기보다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런저런 설(設)들을 받아들이고 싶을 때는 언제 입니까? 누가 진실을 불편하게 느낍니까?
한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우리 정부는 천안함 피격에 대하여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에 대한 규탄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이끌어내려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서 중국은 마지못해 동의하는 듯하면서도, 용어의 선택에 있어 매우 고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천안함 피격”이 아니라 “천안함 사태”로 부르자는 제안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진실을 피해 가보려는 의도인 것이지요.
그래도 이것은 약과입니다. 처음 침몰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민노당의 강 기갑 의원이 보여주었던 행태가 걸작입니다. 당시 정부나 국민 대다수가 심증(心證)은 있었으나 물증(物證)을 확보하지 못하여 침몰 원인을 놓고 말을 아끼고 있을 때, 그는 북한이 했을 리가 없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아니, 누가 북한이 그랬다고 말했나요?
그리고 나중에 침몰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자 유 시민이라는 사람은 그 발표를 소설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습니다. 도올 김용옥이라는 자는 정부의 발표를 0.00001%도 믿을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정부의 발표에 대한 대부분 야당들의 공식 입장이라는 것도 인터넷에서 떠도는 괴담 시리즈의 종합 셋트 수준입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정부가 제시하는 여러 증거들을 일일이 확인해 보고, 반증할 수 있는 다른 증거들을 제시한 연후에 이와 같은 확신에 찬 말들을 했을까요?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왜 국내외 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 검토한 결과 발표한 내용을 믿기보다는 이러한 일에는 전혀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괴담 수준의 글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들 모두는 진실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철석같이 믿어오던 일련의 신념 체계를 수정하거나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무엇인가 목전의 이익을 위해서 고의로 거짓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토마스 쿤’은 그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과학자 자신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학자는 대개 나름대로의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어떠한 새로운 이론이나 발견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이나 사실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기왕에 천안함 이야기가 나왔으니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얼마 전 참여연대와 또 다른 한 시민 단체가 유엔 안보리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정부가 제시하는 증거들에 대해서 의문과 허점이 많으므로 재조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입니다. 언필칭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이들 단체들이 제시하고 있는 의문점들이란 것을 살펴보니 모두 인터넷에 떠도는 검증되지 않은 괴담들의 종합 세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들 단체들의 진정한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의심치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 가족 중에 누가 희생을 당했다 해도 여전히 진실과 정의를 외치며 이런 공문을 보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이익보다는 정의와 진실이 더 우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기적.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느끼던 불편한 진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사실이었습니까? 또는 병 고침을 받은 그 자가 안식일에 일어나 걸었다는 사실이었습니까? 적어도 이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언필칭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이루는 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는 것인 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무려 38년을 가망 없이 살아가던 한 병자가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들의 신학에 따르면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누군가 해 낸 것입니다. 도저히 가망 없다고 포기했던 그 일을 누군가 가능하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이, 그들의 종교가, 그들의 성전이 할 수 없던 그 일을 누군가 해낸 것입니다. 그들이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비루하고도 남루한 한 병자에게 누군가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누군가 해낸 것입니다. 그러니 그자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이게 싫은 것입니다. 속으로 이렇게 인정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소위 집단 사고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분노는 실은 질시와 질투의 다른 모습입니다. 안식일 운운은 자신들의 질투를 숨기기 위한 위선의 가면일 뿐입니다. 놀라운 기적에는 전혀 충격 받지 않은 것처럼 애써 외면하며, 관심은 안식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증스럽게도 안식일의 규례를 어긴 예수님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과 더불어 안식일에 대해서 논쟁을 벌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또한 이곳에서 안식일의 기원이나 의미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그럴 기분도 아닙니다. 안식일은 그야말로 ‘유대’인의 절기인 것이지, 기독교인들의 절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성경>에는 “주의 날”은 있을지언정 안식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든 우리가 개의할 바가 아닙니다. 중국인들이 그들의 “쌍십절”을 어떻게 지키든 우리가 개의할 바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언제, 어떻게 지키든 한국 사람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그들의 여왕 생일을 지키든 말든 우리의 관심사가 아닌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주의 날. 우리에게는 “주의 날”은 있을지언정 “안식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주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대해서 가졌던 오해만큼이나 깊고도 큰 오해를 나 역시 “주의 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에게 “주의 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의 날” 역시 오늘날 내가 지켜야 할 그 무엇은 아닙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 날”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을 목격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스스로 이날을 기념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제자들은 한 주간의 첫날을 “주의 날”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기념했습니다. <신약>에서 “한 주의 첫날”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쉐퍼’(L. S. Chafer)는 그의 책 <은혜>에서 적어도 열한 가지의 사건이 바로 이 “첫날”에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연구 결과라 이곳에서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주님의 부활이 이 날에 일어났습니다. 네 <복음서>를 위시한 <신약>의 대부분의 책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날에 주님께서 부활 이후 처음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참고. 요 20:17; 마 28:9; 눅 24:39).
셋째, 이날에 주님께서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평강 즉 ‘샬롬’을 기원하셨습니다.
넷쩨, 이날에 주님은 처음으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 일은 두 번에 걸쳐 있었는데, 한 번은 ‘엠마오’ 노상에서 두 제자들과 함께였으며, 또 한 번은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였는데, 부활 이후 첫 날 다락방에서였습니다.
다섯째,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열어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한 날입니다.
여섯째, 이날은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을 향한 선교를 위임하신 날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 요 20:21; 눅 24:48).
일곱째, 그리고 이 첫날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날입니다(요 20:22).
여덟 번째, 부활 이후 일곱 번째 첫날은 오순절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즉 이날은 성령의 강림으로 신약 교회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아홉 번째, 사도 ‘바울’은 이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행 20).
열 번째, 이날은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으는 날이었습니다(고전 16:2). 교인들은 이렇게 모아 둔 연보 돈을 ‘바울’을 통해서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가게 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인들은 주의 첫날에 하나님을 위한 헌금을 한 것입니다.
열한 번째,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밧모’ 섬에 유배 중이던 사랑하던 제자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위대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한 날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일들이 안식일이 아니라, 모두 한 주의 첫날 즉 “주의 날”에 있었습니다. 주의 날은 부활의 날이자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이날은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예배를 위한 훌륭한 모델이 된다는 점에 있어서도 의미심장한 날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의 날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들 열한 가지 위대한 사건이나 일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에 성도들은 함께 모였으며,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으며, 함께 떡을 떼었으며, 서로의 필요를 나누었고, 헌금을 모았으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였습니다(참고. 행 2:43-47). 오늘날 우리 역시 이와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어느 날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의 성도들이 처음서부터 행해왔던 전통이자 하나님의 형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또한 그분의 오심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우리 선조들의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우리 선배들의 전승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구원도 멀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율법의 안식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값없이 돈 없이 와서 그분의 은혜를 마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언을 받았으며,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되었으며, 오직 은혜로 거룩하게 될 뿐입니다. “주의 날” 예배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의 기적을 즐기고 찬양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그분의 돌보심과 섬김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할렐루야!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