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분열의 전도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40-52약 10분 분량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것들을 분리하셨습니다: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별과 달과 해; 낮과 밤; 남편과 아내; 사람과 짐승. 우리가 이해하건대 이들 모든 분리는 조화와 질서를 위한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요즘 유행어로 소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안전장치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질서와 조화가 너무 밋밋하고, 단조롭다고 느꼈음일까요? ‘아담’은 왠지 모험을 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무엇인가 더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솟아 오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왜냐하면 그는 창조력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산을 더 멋있고, 더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할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은 그 자체로서 더 이상 무엇인가 보탤 것이 없는 완벽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아담’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놀고먹는 일밖에는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담’이 보탠 것은 “타락”, 즉 새로운 분리와 분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묶어놓으신 것이 풀어져 버렸으며, 하나로 있던 것들이 둘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짐승; 형과 동생; 이웃과 이웃; 언어와 언어; 민족과 민족;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조화는 부조화와 되어버렸고, 화음은 불협화음이 되어버렸으며, 질서는 무질서로 돌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는 다시 원래의 모습,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즉 태초의 무질서로 돌아 가버렸습니다(참고. 창 1:2).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면, 두 번째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은 그 두 계보의 분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영구화(永久化) 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계보는 타락 이후 마치 기차 철로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역사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초막절에서 보게 되는 장면도 바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화합과 화평의 전도사가 아니라, 분리와 분열의 명수(名手)라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도 이점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결국 진리가 있는 곳에 분리와 분열과 소요와 논쟁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탁월한 침례교 목사였던, ‘찰스 스펄젼’도 종교적 갈등과 분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갈등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가치 있다고 여기는 종교적 진리가 없거나, 아예 아무런 종교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즐기고 싶지는 않다.” 사실 양보나 타협은 잃어도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명예나 재산이나 또는 생사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나 또는 <성경>을 변론하느라 누구와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싸워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피 흘려 지키고 싶어 했던 지고의 가치는 아니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의 분리. 내 이웃에 사는 한 분은 나 같은 목사를 본 적이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자기에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없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를 정말 존경한다고 합니다.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려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 살려면 이렇게 살면 됩니다.
예수님도 나처럼 했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막절에 참여해서 그냥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갔어야 했습니다. 잠시 하나님 아버지 생각은 접어두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다가 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어려운 사람,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냥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고, 고쳐주면 됩니다. 아, 그분 스스로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했으면, 그분도 나처럼 사람들로부터 아주 겸손하고, 속이 깊다는 칭찬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참지 못하고 꼭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합니다. 특히 이런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한다면, 좌중의 분위기는 완전히 꽝이 됩니다. 그 주제가 나와야 될 자리가 아닌데 나왔으니 당연한 결과인 것이지요.
즐거운 초막절에 예수님이 했던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분 역시 그냥 조용히 있지 못하고 결국 사단(事端)을 일으키고 맙니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물이 넘쳐나는 이 축제에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 정말 사람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분은 이웃과 평화롭게 사는 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샬롬’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의 분리.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누군가 돌출적인 발언을 해도 대충 눈감고 넘어가줍니다. 괜히 거들었다 분위기만 어색해질 테니 참는 것이지요. 하나 만일 그런 자리에 종교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나, 또는 반대로 종교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관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냥 참고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날 축제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죽이 끓듯 여기저기서 소요(騷擾)와 분쟁(紛爭)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자기네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무리”라 함은 “뱀의 후손”이거나 “어둠의 자식”에 대한 통칭일 것입니다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리 중에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를 일러 “그 선지자”라고 합니다. ‘모세’가 일찍이 예언했던 선지자를 일컫는 것이지요(참고, 신 18:15). 또 한 무리는 그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무리는 이에 반대하며, 그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기준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올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성경>에따르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이며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합니다(참고, 믹 2:5-6). 이래저래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분열의 전도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까!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출생이나 신분에 대해서 그토록 잘 알고 있다고 핏대를 올리며 싸우고 있으나, 정작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아이러니는 이들 무리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임스 패커’(J. Packer)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패커’나 ‘요한’ 화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며, 만남이며, 교제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순종에 이르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 점에서 이날 예수에 대해서 쟁론을 벌이고 있는 이들 무리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종교의 분리.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에 대해서 무성하게 말만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에 대한 추측과 이론과 주장과 설명들 말입니다. 분쟁과 소요는 무리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종교 전문가들과 ‘유대’교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성전 치안을 맡은 사람들 말입니다.
종교나 이념은 한 가지 점에 있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코 양보나 타협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에 더 나아가 상대를 굴복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살(射殺)도 불사합니다. 이 역시 ‘샬롬’을 위해서입니다. 종교적 ‘샬롬’ 말입니다. 거룩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스도’를 위해서 따로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할 사람들이, 지금 ‘그리스도’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잡아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 치안을 맡은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으며, 심지어 압도되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이 말은 전적으로 타당한 평가이긴 하지만, 이렇게 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기는 고사하고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본인의 경우를 반추해보더라도 이들의 심성은 정말 부드럽고 경건하기까지 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브루스 밀른’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명령을 수행하는 로마 병정들과는 달리, 아주 평화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경건한 ‘레위’ 인들이었습니다. 어찌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올 수 있겠습니까? 사실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운 사람일수록 남의 이야기에 잘 속아 넘어가는 법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일수록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순진하거나 무식한 사람들이나 예수를 쉽게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왜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무식하다거나 순진하다고 조롱을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너희들이 정말 율법에 대해서 무식하기 짝이 없구나! 율법을 모르는 너희들은 저주를 받아야 해”(참고. 47-49절).
아, 이거 정말 입에 담지 못할 모독이군요. 교인들을 얼마나 우습게 알았으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흥분할 것 없습니다. 조롱과 욕설과 모독이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식하고, 저주를 받을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이 아니던가요!
그들 중의 한 사람 ‘니고데모’가 이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무식하게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자들은 이 무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구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판결부터 먼저 내릴 수 있는가?’’(51절). 그의 질책은 지극히 율법적이며 성경적이라 아무도 반박할 근거가 없습니다(참고. 신 19:15-19; 17:2-5). 바로 여기에 ‘니고데모’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 절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면서 마지막 안간 힘을 써보지만, 이 역시 자신들의 무지를 또 한 번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겼던 무리들의 무지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교회의 연합. 이쯤 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주목해 봅시다. 그 중에서 화평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무슨 위선이며 모순입니까! 초막절을 온통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지금 우리에게 화평을 주문하다니요! 분열과 갈등은 나 하나로 족하다는 말씀이신가? 아니면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라”는 억지입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말씀은 정작 우리 자신에게는 위로나 마음의 평화보다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세상에 검과 분열과 갈등을 가져다주었다면, 우리 역시 그분과 운명 공동체가 됨이 마땅하지 않은가! 어찌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로 가라고 하시는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갈등이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아야 하는 험난함이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마 10:16).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거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