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들의 영광, 아버지의 영광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31-32약 9분 분량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영웅 만들기”에 익숙해 있지 않는 듯합니다. 오늘날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순신 장군만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에는 칭송은커녕 옥살이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그의 전공(戰功)을 시기하고 질시하는 주변 인물들의 무고와 모함 때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네 속담에도,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무수히도 많은 영웅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명용사에서부터, 정치인, 과학자, 예술인,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나라 곳곳에 그들의 동상이나 비(碑)를 건립하기도 하고, 학교나 도서관, 심지어 공공건물에까지 사람의 이름을 붙여 그 공적을 기립니다. 할리우드 블루바드의 “명예의 거리”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곳에 가면 약 5 킬로미터에 달하는 보도 바닥에 미국 영화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배우들의 손바닥 도장이 그 이름과 함께 찍혀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영웅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동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 세워져있는 이수현 동상이 그중 하나입니다. 그는 수년 전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을 관광하는 중에, 한 전철역에 떨어진 일본인 승객을 구하고 대신 달려오는 열차에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그의 가족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여기에다 세운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십여 년이 가까이 됩니다만, 아직도 그 동상을 찾아 헌화(獻花)를 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가슴을 감동시키고,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거의 매일 노숙객들을 위해 무료 식사 나누어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라는 생각입니다! 아들 수현이는 죽어서 가문의 영광이 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그 희생적인 일로 해서 죽은 아들의 이름을 더욱 영광스럽게 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영광(榮光)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단어의 기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헬라’어로 ‘독사’(dovxa)라 불립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단어는 “드러내 보이다” 또는 “입증하다”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다” 또는 “견해를 밝히다” 등으로 그 의미가 다소 변천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입장”이나 “견해”에는 선의(善意)의 평가와 악의(惡意)의 평가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있었는데, 이중 좋은 의미의 평가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영광”의 의미가 “높이다” 또는 “찬양하다” 등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어의 어원과 관련한 이와 같은 고찰은 <성경>의 용어들을 이해함에 있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흔히 말하는 “정통”(orthodox; 오소독스)이란 단어도 결국 “올바름”을 뜻하는 ‘헬라’어 ‘독사’(doxa)와 불가분의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위 하나님에 관한 “정통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뜻하며, 이는 다시 하나님에 관한 찬양 내지는 높임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의 “예배” 즉 ‘worship’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worth)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영광의 반열에 오른다는 말은 무엇일까? 한 가문은 또 어떻게 영예스러운 가문이 될 수 있을까? 그 이름에 충실한 업적 내지는 족적을 남길 때가 아닐까?
아들의 영광. 같은 질문을 인자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자는 어떻게 “인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달리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자는 어떻게 인자로 증명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로마의 백부장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사실 지금 이 순간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은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을까? “그 된 일을 보고”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보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의 죽음, 즉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지금 다락방 강론에서 이점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가롯 유다’가 어두운 밤 속으로 떠나간 후에, 비로소 “인자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그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즉 서로 마음이 통하는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별로 가깝지도 않은 친구가 곁에 함께 있으면 말하기가 싫은 것처럼 말입니다.
대화의 초점은 “영광”(dovxa; 독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짧은 두 절에서 이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주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먼저 그분은 “인자의 영광”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증거는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얼마 전 ‘헬라’인들이 찾아 왔을 때에도 주님은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12:20-32). 전혀 상반되는 두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같은 단어 “영광”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한 번은 사랑하던 제자 ‘가롯 유다’가 그를 배신하며 떠났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이방인들이 그를 보러 찾아 왔을 때였습니다.
과연 이 두 상황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동일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를 제대로, 그리고 올바르게 보여주고 있으되,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지금”이 의미하는 암시하는 바는, ‘유다’가 떠남과 동시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입니다. 즉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라는 연쇄 작용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의 방문이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방식은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을 통해서입니다. 즉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세상의 주로 등극하게 된 방식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영광. 이와 같은 일련의 연쇄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들의 복종이며, 이 복종이야말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 즉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실로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실로 심각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인간의 근접이 불가능한 “빛”으로서, 구름이나 천둥 뒤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마치 태양의 광채가 태양으로부터 나오며 태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이며, 그분을 떠날 수도 없고, 또한 어느 누가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강론은 사뭇 다릅니다. 그분의 말씀인 즉은 “하나님의 영광”은 성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의존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의 영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영광과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광은 너무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실재(實在)이기 때문에 그 반대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 아버지가 아들과 같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태양과 태양 빛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 일을 좀 어려운 말로 “아버지의 아들 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이나, 공의로움이나, 전지전능함 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영광의 또 다른 얼굴, 즉 겸손과, 연약함과, 철저하게 의존적이며 의타적인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이와 같은 역설은 강보에 쌓여 속수무책으로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상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 ‘야훼’의 운명이 연약한 한 소녀의 손에 달려있었다니 말입니다!
모두의 영광.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니”(32절하).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았으니, 아버지 또한 아들을 영화롭게 하리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제 “곧”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즉 내일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결과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제 그분은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염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이제 기꺼이 즐거움 마음으로 짊어질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하지만 예수님이 간절하게 고대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입니다. 창세 이전부터 누리던 그 특별한 지위와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치 군 복무를 위하여 몇 년을 잠수함 안에서 근무하던 해군 장병이 고향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요. 예수님은 이 특별한 지위를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이라 칭한 바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영광의 자리를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우리는 이를 섭리(攝理)라 부릅니다. 두 가지 영역에서 그분이 섭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는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유지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작은 우주 즉 내 영혼을 늘 깨끗하게 유지시켜주는 일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리스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셨으므로, 이제 내가 그 영광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내가 없이는 영광스럽게 될 수가 없다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 없이는 정말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하). 모두 곤경에 빠진 하나님을 도웁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