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역사와 문학과 신학
김태정 목사약 92분 분량

서론
모세는 교육을 받지 않은,
상식만을 가진 모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대중적인 문체로 썼다.
존 칼빈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우주의 시작, 인류의 시작, ‘히브리’ 민족의 시작, 등.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의 시작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모든 권세와 지위, 주권, 능력이 생겨났습니다”(골 1:16; 쉬운 성경).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창조와 함께 시작된 “창조의 언약”, 타락(반 창조)과 함께 시작된 구속 즉 “재창조의 언약”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주제는 비단 <창세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면서 다른 모든 주제들의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재창조의 선적인 역사의 흐름은 “새 창조”라는 역사의 정점에 이를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는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 일회적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재현하거나 반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창세기>는 <성경>의 어느 책보다 역사적, 과학적, 그리고 신학적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고, 그런 전투 중의 어떤 것들은 교회와 신학교를 넘어서 학교와 법정에까지 비화되기도 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접점은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 시대 이후 급속도로 이루어진 인류의 지적,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창세기>를 역사적, 과학적 테두리 안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소위 “일치론”적인 시도가 교회 안에서부터 먼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의 위력 앞에 신학자들이 서둘러 타협을 시작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 진화론의 태동은 아예 <창세기>의 기록을 허구 내지는 신화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무신론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해석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논쟁들 중의 많은 것들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기게 된 것입니다. 즉 원래 <창세기> 화자들에게는 주변적인 관심사로 남아있었을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질문들, 예컨대 창조의 시기나 방법 등이 현대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본질적인 문제로 부각시킨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창세기>의 화자(또는 편집자)나 당시의 청중들이 원래 의도하고 이해했던 바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주변 국가들의 다신론적인 세계관과 싸우고 있을 때, <창세기>는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세기>의 교훈과 적용에 관한 질문, 즉 “오늘날 후기 기독교 문화의 신들과 가치들이 교회에까지 침투하고 있는 이 시대에 <창세기>의 의미들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의 과학과 역사에 관해서가 아니라 신학과 신앙,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교훈과 적용의 문제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문학 양식으로 볼 때 하나의 <기원 이야기>(origin narrative)이지 “기원 과학”(origin science)이나 “역사”(history)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사실(facts)로서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기원과학이라는 용어는 Geisler가 그의 저서「Origin Science」에서 상세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18.
화자는 이곳에서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관한 사실적인 보고서가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동시에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다시 한 번 아래 질문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이들 질문에 대해서 후에 다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지만, 우선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책의 기록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즉 공동체가 당면한 실존적인 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원인론적으로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적이고 문학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창세기>는 기원(우주/지구/생명체/인류 등)에 관한 과학 책인가?
(2) <창세기>는 민족이나 국가(이스라엘을 포함한)에 대한 역사책인가?
(3) <창세기>는 ‘히브리’ 민족의 족장들의 영웅담인가?
이들 질문과 씨름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문제는 성경해석 내지는 성경비평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석과 비평
비단 <창세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적 작업을 위해서는 “종합적 해석” 체계가 절실하다고 서문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제반 성서 해석 방법들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성경 해석” 내지는 “성경 비평”이라 부릅니다. 성경 해석학(또는 성경 비평학)은 신학의 한 분야로서, 보다 상세한 별도의 공부를 위해서는 이형원의 「구약성서비평학입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도서 20.
<성경>은 그동안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읽혀진 적이 없고, 끊임없이 해석되고 비평되어 왔습니다. <구약>을 비평적 관점에서 연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기는 어려우나,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적어도 기독교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 시대부터 아주 초보적이긴 하지만 일련의 시도가 있었음을 아래 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전체 기간을 <구약>이 정경화(正經化) 되는 시기에서부터 현대 “성경 비평학”의 틀을 제공한 계몽주의 시대까지 대략 일곱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학”(hermeneutics) 또는 “성경 비평학”(biblical criticism)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된 학문의 한 분야를 지칭하는 용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을 인간이 비평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그 반대로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평에 대한 ‘웹스트’ 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술이나 문학 작품들의 장단점에 대해서 지적, 논리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시도는 도덕적 가치들이나, 과학적 가설, 및 그것들을 진행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등을 평가하는 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해서 구약성경 비평학을 이해하자면, 구약 성경을 보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생겨난 여러 비평 방법들을 소개하고, 각 방법의 특징과 장단점을 평가하는 학문의 한 영역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곳 서론에서 구약 해석사(解釋史) 전반에 걸친 모든 내용들을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고, 이 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비평학의 배경과 발전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구약> 해석사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은 참고 도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참고 도서 20, 제 1장.
계몽시대 이전의 성서 해석 방법은 주로 종교적, 즉 신앙 고백적이거나 기능적인 것으로서, 이 때 해석의 주체는 교회나 기타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종교개혁 이루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 교회의 양 진영에서 일련의 교리적 해석 방법들을 채택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 한계는 성서의 권위를 능가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종교적 해석으로부터의 일탈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라 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본문비평(本文批評)과 같은 합리적인 성서의 본문 연구는 ‘마소라’ 학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가긴 했지만, 이 역시 성서를 완성된 하나의 책으로서 그 권위를 인정하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흔히 하등비평(下等批評)으로 불리는 이 방법의 주된 관심사는 첫째, 현존하는 여러 ‘히브리’어 사본과 번역본을 연구함으로써, 본문의 난해한 구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아울러 수 세기동안 ‘히브리’어 본문에 섞여진 오류들을 제거하여, 원 형태나 원 의미에 가깝게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본문비평을 흔히 하등비평으로 부르는데, 이는 계몽시대 이후 발전해 온 소위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해 온 용어로서, 그 가치가 열등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고등비평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적게 끌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작업은 난해한 구절들에 대하여 여러 사본, 번역본, 그리고 현대 본문 비평학자들이 보여주는 차이점 등을 비평적 관주로 소개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 비평은 여러 사본과 번역서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가능한 가장 오래된 사본을 추정하며, 아울러 오랜 역사를 거친 본문의 변천사를 소개하는 작업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1. 통시적 비평(痛視的 批評)-본문의 역사
그러나 18세기 이후 <성경> 연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는데, 흔히 역사비평(歷史批評)으로 불리는 새로운 일련의 해석적 방법론들이 도입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방법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교회가 기존 사실로 받아들이던 것들-성경의 저자나 그 내용 등-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실제 출처를 확인하고, 본문이 말하려는 사건들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 발생했을 개연성을 평가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본문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동시대 또는 동일한 유형의 다른 문서들과의 비교 연구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역사비평적 방법이 교회의 문서들을 포함해서 그리스와 로마 문서들, 그리고 고대 문서로 추측되는 모든 자료들에 대해서 적용한 바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던바, 신성한 책 성경에 대해서는 감히 적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서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세속적 역사비평의 방법을 <성경> 본문에도 적용하도록 자극하였으며, 이러한 운동은 계몽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만개(滿開)하게 되었고,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성경> 연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역사비평의 대 전제(前提)는 <오경>을 포함한 <구약>의 많은 책들이 단일 저자의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로 완성되었다기보다는,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자료들을 후대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수집하고, 편집 및 배열한 채로 자신들의 독창적인 작품 속에 함께 삽입한 결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도표: 오경의 형성 과정).
결론적으로 역사비평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성경> 본문이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제반 역사적, 자료적, 구전적, 사회적, 편집적인 의문을 해결하여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교훈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사는 원저자나 편집자의 의도와 사상이나 상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기록했을까?’
이러한 역사비평은 그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1) 양식비평(樣式批評), (2) 자료비평(資料批評), (3) 편집비평(編輯批評)의 세 가지 방법론으로 구분됩니다(그림 참고). 이형원, 제 3-5장(참고 도서 20).
위 그림에서 보듯이 우선 양식비평의 주된 관심 분야를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경> 본문에서 나타나는 문학 양식을 결정하는 일; (2) 각 양식이 거치고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는 일. 이러한 작업을 연구의 주된 목표로 삼게 된 데에는 이 방법에서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대 전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구두(口頭)로 된 전 역사(前歷史)의 존재; (2) 양식(genre)의 형성과 발전; (3) 각 양식의 독특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
이들 전제들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구약> 저자들은 본문을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기록하면서 오래된 구두로 된 전 역사를 가진 자료들을 모아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표-오경형성과정 참고). 두 번째로, 이렇게 <성경>의 본문으로 채택된 하나의 본문 양식은 문자화(文字化) 된 이후에도 계속 남아 그 전통을 계승해가면서, 동시에 시대․사회적 상황에 따라 일련의 양식상의 변천을 거쳐 갔을 것이라는 점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두 가지 상반되는 특성-불변과 변화-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양식은 독특한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경우 삶의 자리에 대한 범위를 놓고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넓게는 사회 및 시대적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좁게는 독특한 제도적 위치(예: 제사)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양식비평이란 <성경> 본문에서 도입하고 있는 문학 장르를 규명하고, 각 장르의 역사나 발전 과정 등을 추정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동시에 각 문헌의 독특한 장르와 관계되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적인 상황이나, 또는 삶의 자리를 유추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나 목적, 기능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업을 포함하게 됩니다.
양식비평 학자들의 관심사가 주로 본문의 전 역사 즉 구두 전승사에 관한 것이라면, 자료비평의 관심사는 기록된 자료들의 기록 연대, 기록자, 기록 당시의 상황, 기록 목적, 각 자료의 문학 및 신학적인 특징 등을 추정하는 데 있습니다. 자료들의 형성 시기나, 각 자료가 <오경>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범위나, 기타 이들 자료들을 구분하여 찾아내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오경> 전체적으로 크게 네 개의 자료가 산재해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는 듯합니다: (1) 야훼 자료(Y 또는 J); (2) 엘로힘 자료(E); (3) 사제 자료(P); (4) 신명기 자료(D). 각 자료의 형성 시기와 특징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Hamilton이나 Wenhem의 저서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1 & 3). 더 나아가 Wenhem은 자료비평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소상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Wenhem, xxv-xlii.
이처럼 한 책에서 상이하다고 판단되는 자료들을 발견하고 구분해 낼 수 있게 된 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당대의 지적․사상적 영향력도 있었지만, <성경> 자체의 증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오경>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했을 때, 이 책이 동일인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논리적인 의문점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료비평의 목적은 이들 자료들에 대한 연구 결과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본문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데 있습니다.
자료비평과 양식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구약>의 완성 단계 이전에 국한한 것이어서 해석학적인 한계가 노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성경> 본문이 형성되는 모든 단계가 최종 단계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방법론적인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는 주장이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제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이루게 한 구두적인 형태나 기록된 원 자료가 중요한 것만큼, 그러한 자료들을 취사선택하고 편집하여 <성경>의 최종 본문으로 정경화 하는 과정과 편집의 과정에 참여했던 자들의 신학적 의도 역시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이 새로운 방법론을 편집비평이라 부릅니다. 편집비평의 기본 전제를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일련의 편집 과정; (2) 창조적 저자; (3) 특정 전통(또는 학파)의 신학의 반영. 이들 전제들을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구약> 본문이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기까지 여러 편집 단계를 거쳤을 것이라는 전제는, 양식비평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전제이기도 합니다. 단지 편집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원 자료나 구전 자체라기보다는 각 편집 단계와 본문의 최종적인 편집 형태를 연구하는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두 번째로 편집자들은 단순히 과거의 전통들을 기록하거나 보존한 필경사들이 아니라, 이들 역사나 전통들에 대한 수정 및 보충, 더 나아가서 재해석까지 시도했던 창조적 저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대의 신앙 공동체가 당면한 제반 신학적이고도 신앙적인 대안이나 교훈을 주고자 했던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편집자들은 대개 특정 전통이나 학파의 구성원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들은 이들이 속해있던 공동체나 학파의 사상과 신학, 언어나 문체 등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전승이나 학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야훼 전통; (2) 엘로힘 전통; (3) 신명기적 전통; (4) 예언자적 전통; (5) 현인적 전통; (6) 사제적 전통; (7) 역대기적 전통.
결국 대부분의 <구약> 본문은 이상의 전통 가운데 하나에 속한 저자나 편집자가 완성한 것이며, 이들이 속한 전통이나 학파가 무엇인지 알아내면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의 주제는 신명기적 역사관을 따른다고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공시적 비평(共視的 批評)-완성된 책
17세기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성경 해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통시적 비평의 제 방법들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는 학문적인 관심사 때문에 <성경>의 대부분을 파편화(破片化), 비정경화(非正經化) 시키는 오류를 저질렀다. 그 결과 오랫동안 신앙 공동체(교회)의 삶과 신앙의 표준이 되어 온 <성경>의 권위가 학문적 비판과 해부의 대상이 되어 그 고유한 권위를 상실해 온 것이 사실이다.
공시비평은 이에 대한 반동과 반성으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게 된 비평의 제방법론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인식은 <성경>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간주하고, 본문과 독자 및 해석 공동체에 대한 연구로 국한하자는 것이다. 공시 비평의 제 방법에는 정경비평(正經批評), 사회학적 비평(社會學的 批評), 구조주의적 비평(構造主義的’ 批評), 서사비평(徐事批評), 신문학 비평(新文學 批評) 등이 알려져 있다(도표). 각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참고 도서와(20) 다음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이형원, 6-8장; (2) “서사비평과 신약성서 해석”, 『복음과 실천』18(1995), pp.11-30.
그러나 공시비평의 제 방법들 역시 주된 관심의 대상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기에, 전인적(全人的)인 의미나 교훈을 이끌어내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3. 종합 비평- 대통합
“성경 종합 비평”이란 새로운 하나의 비평 방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올바른 자세나 태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성경> 고등비평의 두 방향-통시적 비평과 공시적 비평-에 대해서 개괄해 보았고, 이들 각 방법들의 주요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각 방법은 나름대로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올바른 <성경> 해석이란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비평의 제 방법들을 총괄하면서 동시에 이들 방법들이 소홀히 했던 영역들을 새롭게 포함시키는 접근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도표 참조).
종합비평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대 전제는 아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성경>-완성된 문학작품. 다른 공시비평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의 완성된 문학작품으로서 독자들에게 의미나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형성 과정과 관련된 제반 역사적 질문들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오직 독자가 현재 접하고 있는 <성경> 본문의 신학적 주제, 신앙적 교훈, 그리고 정서적 감동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들은 본문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흔히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으며, 현재의 본문들(예: 다양한 번역본들)보다 원 자료가 더 중요하다는 자료비평의 입장보다 더 포괄적이며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
(2) 문학화 된 역사. <성경>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해 주는 역사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교훈을 전해주기 위한 아름다운 문학작품이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문이나 ‘비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스테인 글래스’나 거울처럼 과거의 역사를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3) 정서적 감동도 함께. 종합비평은 <성경>을 단순히 신학과 신앙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해 놓은 구약신학 내지는 조직신학 교과서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한다. 신학적 교훈을 찾아냄과 동시에 본문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서 정서적인 감동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훌륭한 고전은 독자들에게 정서적 즐거움과 지적 교훈을 둘 다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의 주제나 결말만을 보기 위해서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다.
(4) 독자 중심 비평. 본문 자체의 연구와 함께 독자에 대한 연구도 본문의 의미를 산출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어떤 문학 작품이든지 그것이 한 번 저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그 작품의 최종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는 독자들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자가 본문을 통해서 의도했던 의미는 그 많은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특히 <구약>의 경우 대부분 원래의 저자나 저술 목적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 의지해서 최종적인 의미를 산출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사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은 언어 철학자에서부터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정경화 과정을 회고해 볼 때 충분히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경화의 주체는 당대의 신앙 공동체 또는 해석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성경>의 각 책은 신앙 공동체라는 독자들이 신앙적인 판단과 필요에 따라 기록했고, 그 책의 가치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공동체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정경>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경> 해석에서 독자의 상황 이해가 중요함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결과 각 책의 “처음 독자”(original reader)나 “의도 된 독자”(implied reader)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비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맞게 되는 한 가지 긴장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부여한 의미가 본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성경>의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충돌될 때입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성경>의 의미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본문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현실화 시킬 것인가? 이러한 긴장은 독자비평을 시도하게 될 때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긴장이자 갈등이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5) 문학 양식과 의미 전달. 본문의 특정한 문학 양식은 그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의미를 드러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장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듀브로우’(Heather Dubrow)는 「장르」라는 책에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아래 인용문을 <마플토프의 살인>(Murder at Marplethorpe)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읽어봅시다.
벽로 선반의 시계는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최근에 그 시계가 고장 났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은 듯한 여자의 형체가 거실의 침대 위에 드리우자, 그녀만큼 음산한 모습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재빨리 그 집을 빠져 나갔다. 그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와 어린 아기가 크게 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 그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은 누구인가? 그 어린 아기는 왜 울고 있는가? 그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글의 제목은 이 인용문이 살인 추리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죽은 여인이 살인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또 그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이 살인자일 것이라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아이는 갑자기 침입한 살인자 때문에 놀라서 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살인이 일어난 시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계의 정확도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플토프의 이력서>(the personal history of Marplethorpe)라는 제목으로 읽어 봅시다. 그리고 위에서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들을 해봅시다. 전혀 다른 대답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전기(傳記)들이 흔히 그 영웅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아이는 바로 ‘마플토프’일 것입니다. 죽은 여인은 애석하게도 아기를 낳다가 죽은 그의 어머니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은 아마 산파였을 것이며, 그 시간은 이 아이가 출생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전제들을 바탕으로 성경 종합 비평 작업을 이해하자면,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성경> 해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성경 해석자의 태도 등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진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방법론도 이에 걸맞게 본문의 역사와 문학과 신학과 신앙에 대한 단계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연구를 통해서, 현재를 위한 교훈과 적용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래 그 단계 내지는 내용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1) 역사와 문학
본문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위에서 밝힌 바대로(도표 참고) 다양한 통시적 비평 방법론을 동원하며, 이곳에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문학과 관련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문학 양식. 올바른 <성경> 해석의 첫 단계로서 본문의 문학 장르 구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위에서 ‘듀브로우’의 인용문을 예로 잘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예로써 시는 시로써 이해하고 감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구성(plot)과 수사(修辭, discourse). 학자들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이 둘은 이야기를 이루는 핵심 요소라고 합니다. 예로써, 서사비평(敍事批評, narrative criticism)에서는 저자가 서사를 통해서 어떻게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거나 영향을 주려고 하는가를 연구하는데, 이 경우 서사를 이루는 두 부분으로 서사의 “이야기”(story, 서사의 내용)와 “담론”(discourse, 서술 방법)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구약> 문학의 경우 구성상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평행(a-b-c-d); (2) 대칭 및 교차(a-b-c: a'-b'-c' 또는 a-b-c-c'-b'-a'); (3) 반복(또는 순환)(a-b-c-a-b-c). 고대 근동 언어들은 전형적으로 상형문자의 회화적(繪畵的)이며 시청각적(視聽覺的) 특징을 염두에 두고 감상해야 합니다. 근동의 언어는 읽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보고 듣는 대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저자들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화자(話者)요 화가(畵家)입니다. 구약성서의 장과 절의 구분은 현대의 독자들이 첨가한 것으로서 고대의 독법(讀法)을 살린 것이 아닙니다. 고대 사본들은 한 결 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기록함으로써, 제목이나 부제나 들여쓰기와 같은 어떤 시각적인 구조 표시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단순히 열을 채워나갔습니다. 이것은 저자들이 그들 언어의 회화적이며 시청각적인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이들 특징이 문장의 이면에 강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적인 틀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틀의 특징은 (1) 평행(parallel), (2) 반복(repition), (3) 교차(chiasmus)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반복은 다시 역반복(antistrophe), 평행은 (1) 유사평행(synonymus parallel), (2) 대조평행(antithetic parallel), (3)종합평행(synthetic parallel) 등을 포함하며, 교차에는 (1) 역순환(palistrophe)과 원형구성(ring-composition) 등이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함에 있어, 어느 한 구성의 형식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구성들을 다양하게 혼합시켜 무미건조함으로 피했고, 더 나아가 나름대로 독특한 심층 구조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주제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결말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가는가 하면, 때로는 시적인 반복 평행의 기법처럼 순환적인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또는 음악에서처럼 절정(絶頂)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그 절정에서(최고 또는 최저)에서 다시 그동안의 과정과 대칭(對稱)을 이루면서 결말을 향하여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 경우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그 절정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1) 구성의 원형(原型)은 무엇인가? 즉 비극으로 끝나는가(∩字型 구성), 아니면 희극인가(∪字型 구성)?; (2)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주인공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3) 반복되는 행동이나 대화 또는 이미지 등을 통해서 형성되는 모티브(motifs)는 무엇인가?; (4) 이야기의 해설자는 누구이며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과 더불어 수사적 기법에 대한 질문들 역시 본문의 문학과 관련된 연구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성경>의 화자들은 다음과 같은 아주 다양한 수사적 기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비유; 은유; 이미지; 역설; 해학; 침묵; 오해; 과장; 언어의 유희; 등. <성경> 본문을 통해서 이들 각각에 대한 예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 신학과 신앙
이상과 같은 작업이 끝나고 나면 본문에 대한 신학적 주제가 마치 결론처럼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이러한 결론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사건, 문체, 그리고 구조와 배경 등이 함께 어우러져 총체적인 조화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신학적 주제 도출과 관련해서 대상이 되는 본문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는지 여부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이 부분은 <성경> 해석의 절정이자 궁극적 목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인즉, 그 첫 단계로서 본문의 첫 독자 내지는 의도된 독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 독자들이 처해있던 삶의 자리 또는 실존적 상황에서 주어졌을 것으로 기대되는 지적 교훈, 정서적 감동, 그리고 의지적 결단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을 위한 적용과 구체적인 행동 지침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질문해 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종합비평 방법은 종교개혁 이후 계몽시대를 거쳐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져 온 통시비평의 학문적 업적과 가치를 인정하며, 이러한 바탕 위에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등장한 공시비평의 제 방법들의 관심사들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저자에 대한 것이었다면, 공시비평의 관심사는 주로 <성경> 본문 그 자체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문학비평의 관점이 고조되면서 독자 연구 중심으로 변해왔습니다. 당시의 청중에게 그 본문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지나친 독자 비평의 추세는 본문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부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종합비평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본문의 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는 <성경> 본문이 해석학에서 갖는 권위를 계속 옹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방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이 단순히 역사나 과학 또는 사회학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주는 문학적 도구, 즉 성문학(聖文學)으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종합비평의 관심사가 신학과 신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주는 시청각적(視聽覺的)이고 회화적(繪畵的)인 효과를 통해서 정서적인 감동을 얻는 데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독자의 전인적인 반응, 즉 정서적, 의지적 반응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종합적 접근 방식을 요한다는 사실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상당한 문학적 자질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자질이 결핍된 가운데 해석자들이 자유스러운 해석을 시도할 때 혼돈과 주관적 독단주의로 흐를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러므로 문학 비평을 시도하는 해석자들은 일반 문학에 대한 이해나 그 방법론에 대해서 부단하게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건전한 해석 공동체의 역할도 필수적인데, 이를 통해서 각 해석자가 주관에 빠져 해석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위에서 제시한 종합 비평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창세기>에 대한 개론적인 작업을 아래와 같이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1. 책 이름
<성경>의 책 이름과 관련해서 늘 두 가지 이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바, ‘히브리’ 식 이름과 ‘헬라’ 식 이름이 그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름들은 모두 ‘라틴’어 번역, <벌게이트>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Vulgate는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LXX)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히브리’ 식 이름은 항상 <성경> 본문의 첫 글자를 따서 짓는 것이 상례이지만, ‘라틴’어 번역은 책 내용 전체를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의역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헬라’어 명칭: <창세기>(Genesis). 자료, 기원 등의 의미를 지닌 ‘헬라’어의 음역.
(2) ‘히브리’어 명칭: “태초에”(bereshith). 처음에 있었던 일.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서도 일부 중세 시대의 번역본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른 이름들도 발견되기도 합니다: (1) 첫 번째 책; (2) 천지 창조의 책; (3) 의인(義人)의 책.
어쨌든 이 책은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시작에 관한 책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 너머에 그 모든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궁극적인 존재,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 구조
<창세기>의 구조 분석은 학자들마다 다소 다를 수 있으나, 크게 ‘히브리’ 식 분류 방식과 소위 개신교 식의 단락 구분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식이라 함은 책 전체적으로 열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그 유명한 표현, “~의 계보가 이러하니라”(ʾ톨레돗)가 나타날 때 마다 독립된 단락으로 취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1) 히브리 식 분류
1:1-2:3 서론
① 2:4-4:26하늘과 땅의 계보
② 5:1-6:8아담의 계보
③ 6:9-9:29노아의 계보
④ 10:1-11:9노아의 후손들의 계보
⑤ 11:10-26셈의 계보
⑥ 11:27-25:11데라의 계보
⑦ 25:12-18이스마엘의 계보
⑧ 25:19-35:29이삭의 계보
⑨ 36:1-37:1에서의 계보
⑩ 37:2-50:26야곱의 계보
열 번의 ‘톨레돗’을 보다 상세히 분석해 보면, 흥미롭게도 이 중 다섯 번은 그 문학적인 형식이 이야기(설화)체로 되어있습니다: #1(창조 이야기); #3(홍수 이야기); #6(아브라함 이야기); #8(야곱 이야기); #10(요셉 이야기). 한 편 나머지 다섯 번은 그야말로 계보(또는 족보)에 대한 내용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아담의 후손); #4(노아의 후손); #5(셈의 후손); #7(이스마엘의 후손); #9(에서의 후손).
더 나아가 족보를 다루고 있는 이 두 번째 ‘톨레돗’ 방식은 다시 그 계보를 다루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후손들의 이름을 수직적으로 소개하는 것으로서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0대의 계보에 대한 소개나(#2) ‘셈’에서 ‘아브람’에 이르는 10대의 계보(#5)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의 ‘톨레돗’은 모두 마지막에 세 아들을 둔 아비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1) 노아: 셈, 햄, 야벳
(2) 데라: 아브람, 나홀, 하란
나머지 방식은 위에서처럼 후손을 그 장자를 따라 수직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난 여러 명의 후손들을 수평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햄’과 ‘야벳’의 족보를 열거하고 있는 것이나(#4), ‘이스마엘’의 열 두 아들의 계보에 관한 것이나(#7), 또는 ‘에서’의 가계를 다루는 방식(#9)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구조에 따르면 서막은 ‘톨레돗’ 공식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열 번의 ‘톨레돗’ 중에서 첫 번째 것이 가장 흥미롭고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계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즉 이 구절을 서막에 대한 회고(또는 요약)로 보아서 서막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전망 내지는 사전 정리로 보아서 두 번째 단락 즉 첫 번째 ‘톨레돗’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가 양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란은 결국 개개 ‘톨레돗’을 앞 단락에 대한 요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어지는 단락의 소개 내지는 서론적 언급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해밀턴’(V. Hamilton), 2-11쪽(참고도서 3).
즉 모든 ‘톨레돗’은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제목으로 간주한다는 입장입니다.
2) 개신교 학자들의 분류
한편 개신교 식 분류 방식은 보다 단순하게 책 전체의 신학적 주제나 내용에 따른 구분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래와 같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11장기원 이야기
② 12-50장족장 이야기
이와 같은 단락 구분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각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연대 길이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분량으로 볼 때 전반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약 1/5로서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계보는 ‘아담’에서 ‘아브람’에 이르는 20 세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족장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후반부는 책 내용의 4/5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실제 다루고 있는 계보 수는 네 세대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창세기> 화자가 원 역사보다 오히려 <족장 이야기>를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내용 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두 장에 그치고 있는 것에 반해, <아브람 이야기>는 무려 열 세장에 걸쳐 기술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타락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불과 한 장에 그치고 있는데 반해,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전체 분량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가 이처럼 원 역사보다 <족장 이야기>를 훨씬 비중 있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의 실마리는 두 단락이 다루고 있는 내용, 즉 신학적 주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다 상세한 신학적 주제는 신학과 신앙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원 이야기>(1-11장)는 언약의 필요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당면한 제반 실존적인 질문들, “우리와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왔는가?” “왜 모든 것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되어버렸을까?”에 대한 답변을 원인론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제 2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즉 훼파된 언약을 부분적이긴 하지만 “선택”의 행위를 통해서 회복해 가는 과정을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구조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간과한 또 다른 흥미로운 구분 방식이 있는데, 지리적인 구분이 그것입니다. 즉 <창세기>의 전체 이야기가 크게 세 개의 다른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원 역사>(1-11장)의 배경은 ‘바벨론’이며, ‘아브라함’에서 ‘에서’까지의 <족장 이야기>의 주된 무대는 ‘가나안’ 땅(12-36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37-50장). 이 세 지역은 각 이야기의 중심 무대가 되고 있으며, 특히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두 번째 이야기의 중심 무대 ‘가나안’은 두 인근 지역 ‘바벨론’과 ‘이집트’에 의해 마치 괄호처럼 둘러싸여 있는 형국입니다. 사실 이 두 지역과 국가는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야기의 본류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적어도 신학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여 ‘가나안’으로 불러내신 것도 이 두 지역과 그 거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3. 양식
<창세기>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문학 양식이 등장하고 있는데, (1) 설화, (2) 시와 노래, (3) 족보입니다.
1) 설화(narrative)
(1) 종류. 설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으나 <창세기>에서는 두 종류를 만나게 됩니다. 원 역사를 다루고 있는 전반부는 성격 상 “기원설화”로 분류할 수 있고(우주의 기원; 타락의 기원; 민족의 기원; 등), 후반부는 일종의 “영웅설화”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아브라함’, ‘야곱’, ‘요셉’). 후에 이들 각각에 대한 문학 비평적 작업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2) 설화의 기법. 적어도 신학적 목적과 관련해서 <창세기> 전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의 기법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① 반복(recursion); ② 현재화(contemporization); ③ 예시화(foreshadowing).
(3) 반복(recursion). 한 설화의 전개에 필요한 일련의 요소들을 다른 설화에도 계속 반복해서 도입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이러한 반복된 기법이 주는 효과는 그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흔히 설화세계로 부름)가 실제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아래 도표에 나타낸 것처럼 <창조 설화>와 <홍수 설화>의 두 경우를 비교해 봄으로써 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설화 사이에 유사성을 통해서 기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두 사건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결국 같은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 당시의 세계와 홍수 이후의 세계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과 섭리(우리는 그것을 언약이라 부릅니다: 창조의 언약; 섭리의 언약) 하에 보존되고 운행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히 1:3).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화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신학을 드러내거나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독자들은 이 두 기사를 그냥 읽기만 함으로써, 그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각 주인공의 실패담을 비교해보면서 반복적 기법의 또 다른 예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4) 현재화(contemporization).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묘사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첫 살인에 관한 <가인과 아벨 이야기>(창 4:1-24)를 읽는 독자라면 필경 <오경>의 끝 부분에 가서야 등장하고 있는 <도피성 이야기>(민 35:9-34; 신 19:11-13)를 쉽게 연상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건은 연대기적으로 전혀 다른 시대에 속해 있음에도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는 것을 봅니다. 즉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피의 복수에 대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요?
이와 유사한 예는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동방 네 왕들 간의 전투에 관한 것으로서(창 14), 이 전쟁의 성격을 이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후대에 주어진 신명기적 규례(신 20)를 통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재화 작업을 통해서 현재의 독자들, 즉 ‘아브라함’과 같은 생활 규범을 지니고 살아가고자 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정서적이고도 심리적인 동질성을 갖게 해주고, 나아가 위로나 편안함을 갖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5) 예시화(foreshadowing). 이 기법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를 통해서 뒤에 일어날 사건을 예시하고 예증해 주는 효과를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심주제가 더욱 발전되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목적론적인 역사관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처음 일어난 사건은 마지막 사건을 예시해 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아담’의 타락과 ‘노아’의 실패담에 관한 이야기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 표를 통해서 <노아 이야기> 속에서 <아담 이야기>의 모티브가 녹아있음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예는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기착한 장소로서 ‘세겜’(창 12:6), ‘베델과 아이’(창 12:8), 그리고 ‘네게브’(창 12:9) 등 세 곳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 지역은 훗날 ‘야곱’이 ‘하란’으로부터 돌아와서 방문한 곳이며(창 34-35), ‘여호수아’ 군대가 전쟁을 통해서 점령한 곳이기도 합니다. ‘야곱’과 ‘여호수아’는 이 세 곳에 하나님의 제단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방문한 이야기는(12:10-20) 훗날 그의 아들, ‘이삭’이 역시 ‘이집트’를 방문한 이야기와(20, 26장) 여러 부분에서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훗날 ‘야곱’과 이스라엘이 같은 지역을 순례하는 이야기에 대한 예시가 되기도 합니다(창 41-출 12).
2) 시와 노래
시와 노래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양식으로서, 결국 <성경>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취향을 따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시와 노래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창조의 노래. 인간의 창조를 노래한 이 시는 형식적으로 ‘히브리’ 특유의 교차대구 내지는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영어 번역을 통해서 이 형식을 조금이나마 느껴봅시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도다(1:27).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2) 아담의 노래. 이 시에서는 유사반복의 기법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 해당하는 유사한 발음의 ‘히브리’ 단어의 사용을 통해서 일종의 언어의 유희(word play)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ishi)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isha)라 칭하리라(2:23)
(3) 라멕의 칼의 노래. 역시 ‘히브리’ 시 특유의 동의 반복(同意反復) 또는 유사 반복(類似反復)의 기법을 통해서 ‘라멕’의 뻔뻔스러움과 타락한 동 시대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다와 실라여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4:23-24)
3) 족보
족보를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족보가 차지하는 역할은 <성경> 전체적으로 지대하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1) 창 4:17-24
(2)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2장
이들 족보는 나름대로 화자의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4. 문학적 배경
1) 창세기와 근동문학
고대 근동 문학에서도 <창세기>의 창조나 <대홍수 이야기>와 유사한 창조 신화나 서사시 등이 많이 있습니다(도표 참조): 이들 이야기들은 모두 전형적인 고대 근동문학의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을 포함한 ‘셈’ 어족의 문장들은 (1) 반복(repitition), (2) 평행(parallel), (3) 교차(chiasmus)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은 다시 역 반복(antistophe), 평행은 (1) 동의(synonymous)와 (2) 반의(antithetic) 및 (3) 종합(synthetic)을, 그리고 교차에는 (1) 역순환(palistrophe)과 (2) 원형구성(ring-composition)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조문은 반복과 대조(contrast)와 비교(comparison)로, 문장 구조의 변화는 평행과 교차와 두문되풀이(anaphora)로, 그리고 문장들은 (1) 동위(coordination)와 (2) 동격(apposition)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엄원식. 「구약성서 본문의 문학구조」. 금성출판사: 대전(2003).
그리고 이들 이야기들은 그 형식에 있어서도 ‘셈’어족 특유의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창세기>가 근동문학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졌든지 아니면 그 반대이든지 일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근동문학의 그것들에 비해서 시기적으로 훨씬 후대의 것임을 감안한다면, 합리적인 결론은 영감 받은 창세기 기자(또는 편집자)가 근동 문학의 틀을 빌어 자신의 신학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를 따른다고 해서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초자연적인 계시라는 특징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이야기들은 그 내용에 있어 유사성보다는 상이성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아래 내용 참고).
2) 에뉴마 엘리쉬
(1) 기원. 주전 1792-1750년경 ‘함무라비’ 왕이 그의 군사적 위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수호신 ‘마르둑’(Marduk)을 모든 신들의 최고신으로 정하고 이에 <에뉴마 엘리쉬>를 발간토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2) 내용. 신성한 물의 신 ‘압수’(Apsu)와 짠물의 신 ‘티아맛’(Tiamat)의 결합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아들 및 딸의 신들이 탄생되었습니다. 자식 신들이 서로 싸우며 소란스럽게 하자 이들을 죽이려고 두 신이 계획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안 자식 신들이 ‘압수’를 죽이고, ‘티아맛’은 이에 격분하여 자식 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자녀 신들은 그들의 대표로 ‘마르둑’을 선출하여, 만일 그가 이기면 신들의 왕으로 섬기도록 하는 요청을 수락하고 ‘티아맛’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마르둑’이 승리 후에 ‘티아맛’의 시체를 둘로 쪼개어 반으로는 땅을, 나머지 반으로는 하늘을 삼습니다. 그 후 신들을 다 불러내어 ‘티아맛’으로 하여금 전쟁을 하도록 교사한 ‘킹구’ 라는 신을 찾아 그의 핏줄을 끊어 죽인 후, 그 피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신들을 섬기도록 의무를 부여합니다. ‘마르둑’은 모든 신들의 주인이 되어 다른 신들에게 각기 일정 영역의 지배권을 허락하였습니다.
(3) 창세기와의 비교. 아래 도표를 통해서 두 이야기의 특징적인 차이와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 연구를 통해서 <창세기>의 문학적 배경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의 기원 설화(1-11장)는 그 내용에 있어 주변 근동문학의 창조 신화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학적 배경이 이들 근동 문학에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족장 설화(12-50장)의 경우는 그 내용이나 강조하는 바가 기원 설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부분의 자료는 기원 설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아마 이스라엘 부족 사이에서 구전이나 기타 양식으로 전승되어 오던 자료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3)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1) 기원. 초기 ‘수메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후에 ‘바벨론’과 ‘아시리’아 언어로 번역 개작된 유사한 사본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2) 내용. 이 이야기는 주로 인간의 창조와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태초에 신들만이 살고 있었는데, 점차 신들의 숫자가 늘어가면서 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신들이 그들에게 부과된 사역(신들 세계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Ea-Enki로 부르는 신이 이들 신들과 협상을 벌여 인간을 창조하여 그 귀찮은 일들을 대신토록 하였습니다. 늙은 신들은 회의를 통해서 이 협상 안을 받아들이고 Nintu-Mami라는 신이 이 일을 떠맡게 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2:4-3:20의 내용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용 속에서는 <홍수 이야기>도 등장하고 있는데,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 <길가메쉬> 서사시와 유사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은 홍수의 원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홍수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데 반해, <아트라-하시스>에서는 땅의 인구 증가로 말미암은 소요가 신들을 괴롭히고 귀찮게 했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역병이나 기근 등의 방법으로 이 소란을 완화시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대홍수를 내려 <아트라-하시스>와 그의 방주 속에 들어온 자들만 살아남도록 선처했습니다.
5. 자료와 편집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했을 때, 이 책이 동일인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할 수 없는 일련의 논리적인 의문점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저자에 대한 본문의 언급 또는 암시. ‘모세’는 그가 말할 때를 제외하고는 3인칭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극히 제한된 일부분만이 ‘모세’ 자신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예: 출 17:14; 24:4; 34:27, 28; 민 33:2). 따라서 ‘모세’가 <오경> 전체의 저자가 아니라 내용 중의 일부 자료들에 대해서만 저자로 간주한다는 기자의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2) 문학적 표현의 문제. 문체가 판이하게 다른 구절들에서 종종 인물과 장소 및 사물에 대하여 어휘 변화가 일종의 문학적 상수(文學的常數)로서 일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로서, ‘야훼’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언약의 산 이름이 ‘시내’ 산으로, 약속의 땅 주민의 이름은 ‘가나안’ 인으로,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르우엘’(또는 ‘호밥’)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들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으로, 언약의 산은 ‘호렙 산’으로, 그 땅 주민은 ‘아모리’ 인으로, 그리고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이드로’입니다. 이와 같은 어휘상의 변화는 문체와 개념과 역사적 관점의 차이점들과 아주 규칙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자가 단순히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나 특별한 강조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3) 문학적 불연속성.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이야기와 율법에 관한 내용은 부드럽게 연결이 안 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단점과 모순들이 단일 저작자의 관점을 나타낸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1) 가인은 그의 아내를 어디서 구했으며, 아벨을 죽인 후 누가 그를 죽일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모세’는 과연 ‘시내’ 산에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가?; (3) 홍수는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가? 왜 동일한 사건에 대한 두 번의 기록이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가?; (4) ‘아브람’과 ‘이삭’은 과연 몇 번이나 자신들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까?
(4) 신학적 불일치. 하나님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속성에 대한 다양한 차이점들이 여러 부분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자료비평의 연구를 수행한 결과, <창세기>를 구성하는 있는 자료들의 형성 시기나, 범위 등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나,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 전체가 네 개의 자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자료마다 독특한 문학적 상수(常數)나 신학적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는 듯합니다: (1) 야훼 자료(Y 또는 J); (2) 엘로힘 자료(E); (3) 사제 자료(P); (4) 신명기 자료(D). 여기서 <신명기 자료>는 <신명기>에만 국한하여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창세기>를 구성하고 있는 자료는 세 개로 국한할 수 있습니다(도표). 그리고 각 자료의 특징도 아래 표에 함께 요약해놓았습니다. <창세기>에 대한 자료비평의 연구 결과는 Wenham과 Hamilton의 저서를 통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참고 도서 1 & 3.
<표>
1) 야훼 자료
이 자료는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הוהי)로 나타나는 부분을 포함하는데, 이스라엘의 위대한 네 가지 전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 이전에 처음으로 ‘야훼’의 이름이 보존된 곳이기도 합니다(창 4:26). <야훼 자료>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천지 창조에서부터 적어도 ‘가나안’ 정복 직전까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일련의 이야기들입니다. 이 자료는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민수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이 자료가 ‘가나안’ 정복까지 계속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이 이야기의 일부 요소들은 상당히 개정된 형태로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 발견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자료는 주로 이야기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型論的)으로서 <창세기> 2-3장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며,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동산을 거니시며, 인간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는 아주 친밀하신 하나님입니다. 사건에 대한 묘사도 아주 생생하고 극적인데,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사건에 대한 진솔한 묘사가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며(창 12), <요셉 이야기>의 극적인 반전 부분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전승의 탄생 시기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솔로몬’의 치세 기간인 주전 960-930 년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야훼 전승>을 수집 및 기록한 사람은 실제 궁정 관리는 아니었을지라도 왕궁의 총애를 받고 일종의 민족 서사시를 지어 ‘다윗’과 ‘솔로몬’의 신흥 왕국에 바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 전승의 화자(또는 편집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야훼’라는 원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흔히 ‘야훼 기자’(J 기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유다’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따라서 ‘유다’ 부족 중심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J라는 문자는 우선 ‘야훼’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다’ 부족과도 이중적으로 연관이 되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2) 엘로힘 자료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םיהלא)으로 나타나는 곳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족장들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복 직전까지(<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계속되거나 또는 ‘가나안’ 정복 그 자체(<여호수아>와 <사사기>)까지로서 <야훼 전승>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거의 동일하게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는 ‘야훼’라는 이름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해 준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모세’ 이전 시대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흔히 ‘엘로힘’ 기자로 부릅니다.
<엘로힘 전승>의 하나님은 아주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꿈이나 환상 등을 이용하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실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이기 때문입니다(20:12).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도덕적인 면이 격하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이 자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근거도 이곳에서 꿈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에서 ‘르우벤’은 ‘요셉’을 보호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주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엘로힘 자료>는 은연중에 북쪽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쪽 지명인 ‘벧엘’이나 ‘세겜’ 등이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 자료는 <창세기> 1-11장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족장 이야기>나 <출애굽기>와 <민수기> 일부에서 <야훼 자료>와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엘로힘 자료>에서 가장 극적이면서 감정적인 묘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일 것입니다(20:1-19).
이 기자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북 왕국에 살고 있었으며, 통일왕국이 분열된 이후 주전 900-850 년경에 또 다른 일단의 기자가 이스라엘의 초창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이 왕국은 남쪽 ‘유다’왕국과는 별개로 주로 ‘므낫세’와 ‘에브라임’ 부족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북 왕국 전체를 ‘에브라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J가 ‘야훼’ 혹은 ‘유다’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E 역시 ‘엘로힘’ 혹은 ‘에브라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전승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일한 역사적 기간을 다루는 두 번째 이야기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 사실 E전승에는 J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 또는 전승 단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전승은 동일한 내용을 다루면서도 문학적인 양식이나 신학적인 주제에 있어 특기할 만한 차이들을 보이고 있어 나름대로의 배경이나 의도를 다르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E기자는 ‘야훼’와의 언약으로 인해서 종교적, 윤리적 의무를 지게 된 공동체로서의 초기 이스라엘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E기자가 보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는 정치적인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나 또는 최근 세워진 북 이스라엘 보다도 역사가 깊고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J기자와 가까운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왕실 인사들이었다면, E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존경받던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 집단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J기자에 비해 왕실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E기자는 당시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을 초월하고, 또 이 둘을 비판하는 이스라엘 규정 척도를 제시함에 있어서 매우 분명하다고 봅니다. 요약하자면 E문서는 J문서를 의식하고 그에 대한 교정 내지는 보완책으로 쓴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3) 신명기 자료
E전승 외에 북 왕국에서 생겨난 전승으로 <신명기 전승>(D 전승)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전승가 집단들은 사회 정의와 종교적 신실성에 관한 옛 율법으로 표현된 ‘야훼’와의 계약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백성들에게 이해시키는 교육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D자료의 주된 문학 양식은 주로 설교와 권고로 가득 찬 것인데,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계약 갱신을 축하하는 정기적인 공식 집회를 통해서 발전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전승은 이스라엘 왕들과 갈등하고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을 <신명기 전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전승이 <신명기>나 <전기 예언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며, 이들을 기록, 편집한 학파들의 사상과 잘 일치하고 있습니다.
<오경> 내에서는 <신명기> 전체와 <출애굽기>의 일부분에서 이 자료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 12:24-27; 13:1-6; 15:25-26; 32:7-14.
이 자료는 주로 설교 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율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기억하라”; “자신들을 주의하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 “계명을 지키라”; 이 자료의 독특한 사상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입니다(신 28:1; 28:15). <신명기>에 나타나는 모든 축복과 저주의 내용도 모두 언약의 양면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하나의 성소에 대한 개념도 이 자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후대인들은 이 장소가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주전 722년 북 왕국이 멸망했을 때, <신명기>적 전승은 남 왕국의 동조자들에 의해서 보존되다가, 약 1세기 후(주전 622년)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에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는데, <신명기>의 서론 부분과 율법 준수를 호소한 설교 형식의 결론 부분 사이에 위치한 <신명기> 12-26장의 율법이 바로 그 개혁의 기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시아’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을 때, <신명기> 사가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치적을 이 언약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여부에 따라 해석하는 여러 전승들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 전승들은 DH로 표현되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Deuteronomic History)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의 <신명기>d[서 <열왕기> 사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동안에 <신명기> 사가들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이 서술한 역사를 개정하게 됩니다.
<신명기>적 역사는 ‘모세’기 죽기 직전 ‘요단’ 강 건너편에서 율법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가나안’ 정복과 통일왕국 및 분열 왕국 이야기로 나아가다가 포로기 중간에서 끝나는데,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건은 주전 561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DH전승의 역사 기술 내용은 전격적인 ‘가나안’ 공격과 부족들 간의 영토 분배(<여호수아>) 그리고 각 부족들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사사기>)로 배열시켜놓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DH가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작성할 때 J와 E가 아닌 다른 자료들을 사용하였다고 믿습니다. 매우 엄밀한 문학적 근거에서 보면 이 주장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책에서 J와 E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휘나 문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J와 E가 현재와 같이 <민수기>를 끝맺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J와 E에서 예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직 땅을 소유하지 목한 채 <민수기>가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엄숙한 명령과 율법으로 역사를 시작하기 원하는 DH는 JE의 옛 정복 전승들을 그 본래 위치에서 옮겨 새로운 구성의 일부로 개정키로 결정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DH는 ‘여호수아’의 휘하에서 일사불란하게 감행된 초기의 정복 이야기를 먼저 서술하고, 그 다음에 패배를 언급한 후 사사들의 지휘 아래 그 땅을 되찾기 위해 투쟁을 벌인다고 말함으로써 완전 또는 부분적 승리에 관한 모순되는 전승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4) 사제 자료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소위 민족 서사시를 이루는 네 개의 중요한 자료들 중에서 <사제 문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중요한 공헌을 한 문학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사제 기자의 활동 시기를 포로 말기나 수복 초기인 주전 550-450년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옛 땅을 회복하고 정착한 ‘유대’인들이 새로운 ‘유대’ 공동체를 건설하고, 율법에 입각한 이상적 신정국가(神政國家)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신학적이고도 이념적인 기틀과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사제 계급 출신들로 이루어진 일단의 사제 학파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 학파의 주된 관심사는 당연히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율법을 새롭게 정비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나 제사를 확립하며, 일체의 이방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등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사제 중심의 계급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나, 율법이나, 기존의 전승들에 대한 재해석 내지 수정은 불가피 했을 것이며, 사제 전승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특징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잉태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 사제 기자들은 <오경> 내에서 안식일 준수, 할례, 음식물 규정, 질병 취급법, 제사장 직분과 희생 제물에 관한 규례 등과 같은 의식적인 특징들을 크게 발전시켜, 후대의 독자들은 이들 내용들을 사제 전승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상수(常數)로 부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후반부의 대부분과 <레위기> 전체가 사제 기자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사제 자료>에는 설화 요소가 아주 적지만 오랜 역사 기간 동안에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들의 긴 족보와 부차적인 연대기 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 궁극적으로는 구전 자료에 기초를 둔 것 같은 옛 전승들이 사제 자료 안에서 발견되며, 그것들은 군주제 이전 시기를 조명함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사제 기자들이 기본적으로 활용했던 기존의 옛 전승이라 함은 흔히 <야훼 자료>와 <엘로힘 자료>의 복합 자료로 알려져 있는 <야훼-엘로힘 자료>(JE materials)로 볼 수 있습니다. ‘갓 월드’에 의하면, 분열 왕국 시절에는 이 두 자료는 상호 경쟁 관계에 있다가 주전 722년 북 왕국이 멸망하자, <엘로힘 전승>의 정치․사회적 배경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남 왕국의 한 편집자가 두 문서를 결합시켜 새로운 하나의 전승인 <야훼-엘로힘 자료>를 탄생시키게 된 것입니다(참고: <오경> 형성 과정 도표). 즉 <엘로힘 자료>들을 이용하여 광범위하게 <야훼 자료>를 보충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엘로힘 자료는 야훼자료에 비해서 보존 상태가 불완전하다고 합니다. 야훼자료와 <엘로힘 자료>를 결합시킨 결과는(<JE 자료>) 전자(前者)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확인하는 동시에, 후자(後者)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성향이 전자(前者)에 스며들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와 같은 곳에서는 두 전승을 따로 떼어놓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합병된 <JE>는 <P>와 다시 결합하여 소위 <JEP 전승>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편집 작업의 주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갈립니다만, 사제 기자이거나 또는 독자적인 제 3의 편집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JE>와 <P>를 결합시킨 결과는 <JE>의 정치적, 종교적 옛 경향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경향을 사제 전승의 신학적 관심사에 종속시킨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원래의 독립적인 사제 전승이 <JEP> 속에 들어오게 되면, 편집 후의 문서 속에서 발견되는 <사제 자료>가 원래의 <사제자료>-흔히 <기초 사제 자료>(<PG>)로 부름-에서 온 것인지, 또는 수정 및 보완 된 자료-흔히 <보충 사제 자료>(<PS>)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원래 <G 전승>으로 부르고 있는 이 자료는 <야훼>와 <엘로힘> 자료가 형성될 때 각각 공통으로 참고했을 옛 전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래 <J>와 <E>는 각기 다른 시기와 배경 하에서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내용이나 줄거리에 있어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자료가 모두 이전의 옛 전승 군(<G>로 불림)을 참고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전승들은 이스라엘 왕정국가 형성 이전에 부족 공동체 사이에서 존재해왔을 부족 전승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PG> 역시 사제 기자가 <G>전승을 토대로 탄생시킨, <PS>보다는 다소 오래된 자료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가 적어도 세 개의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자료비평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본문의 편집과정에 대한 질문, 즉 “이들 자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민수기의 최종 본문으로 정착되었을까?”, 그리고 “최종 편집자들은 누구였을까?” 또한 “편집자들은 어떤 전통이나 학파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일까?” 등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편집비평 학자들의 몫이지만, 이곳에서는 지면 관계상 간단히 결론만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에 대한 편집 작업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를 거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오경> 형성 과정 도표).
(1) 구전의 형성. 작은 단위의 이야기로 된 구전들이 주전 1800-1200년 기간 동안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2) 구전의 결합. 이들 작은 단위의 이야기들이 보다 큰 단위의 이야기 단위로 합쳐지고, 이들이 신앙 공동체의 예배 의식에서 믿음의 고백으로 나타나게 됨(주전 1200-1000년 사이).
(3) <야훼 자료>의 등장. 구전들이 문서로 기록되기 시작하면서 첫 기록 문서로 <야훼 자료>가 등장하게 됨(주전 950년 경).
(4) 엘로힘 자료의 형성. <야훼 자료>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엘로힘 자료>가 탄생하게 됨(주전 850년).
(5) <야훼-엘로힘 자료>의 탄생. <야훼>와 <엘로힘> 두 자료에 대한 편집 작업의 결과 새로운 <야훼-엘로힘 자료>가 등장하게 됨(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슴).
(6) <사제 자료>의 형성. 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는 역시 앞에서 다룬 바 있슴(주전 550년 이후).
(7) <야훼-엘로힘-사제 문서>(JEP)의 출현. 세 자료에 대한 편집 작업은 사제 기자에 의해서건 또는 다른 독자적인 편집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됨(주전 400년).
<오경>의 편집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가설에 대해서 지난 한 세대 동안 많은 반론이 제기되면서, 이 이론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져왔고, 심지어는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음 참고도서의 해당되는 부분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참고 도서 20-22.
신학과 신앙
<창세기>의 신학을 다루는 문제 역시 <창세기>의 역사(내지 傳承史)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힘든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창세기>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다양한 자료와 여러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편집의 산물인 이 책으로부터 단 하나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 작품으로 보고 그 자체로부터 심미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신학과 신앙적인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최근의 종합비평적 관심사는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된 주제를 생각해 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창세기>는 <기원 설화>와 <족장 설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므로, 각각의 이야기로부터 중심 되는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여러 다양한 주제들을 1-11장의 설화의 구성(plot)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만, 우선 <창세기> 전체를 언약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을 것인 바, 제 1부의 <기원 이야기>는 언약의 배경 내지는 언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 2부는 그 언약의 수립과 점진적인 성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이 언약과 관련된 여러 주제들, 즉 하나님, 인간, 죄, 은혜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기원 이야기(1-11장) 이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D. J. A. Clines의 글에서 따온 것입니다: 참고 도서 11, 285-309쪽
1) 죄-말씀(선언)-심판의 주제
타락 ⇒ 가인과 아벨 ⇒ 하나님의 아들들 ⇒ 대홍수 ⇒ 바벨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 구성의 한 원리를 따라 핵심 주제들이 마치 신학적 윤회(輪回)처럼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Claus Westermann). 위 제목에서 보듯이 반복되는 주제의 흐름인 즉은,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고, 이 두 행위 사이에는 항상 하나님의 설명 내지는 처벌에 관한 결정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도표 참조).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2) 죄-말씀-은혜-심판의 주제
그러나 Westermann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또는 용서)가 그것입니다(D. J. A. Clines).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은 항상 선고와 심판의 행위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합니다(도표 참고).
물론 각 이야기가 모두 같은 형식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볼 때 일반적인 형식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각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형식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첫 두 범죄의 경우, 타락과 <가인 이야기>에서 범죄자는 개인들인데 반해 나머지 이야기에서는 단체(또는 공동체)가 범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처음 두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범법자들을 먼저 찾아 나서는 분으로, 그리고 나머지 세 이야기에서는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처벌의 대상과 내용이 이야기마다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함
이 주제는 ‘von Rad’가 제창한 것으로서 <원 역사>의 구성을 반복적인 것으로 보기 보다는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인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주제의 내용과 진행 방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인간의 죄악. ‘에덴’에서의 타락에서 시작한 범죄는 ‘가인’과 ‘아벨’, ‘라멕’,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대홍수에 이은 ‘바벨’탑의 반역을 통해서 점점 더 창궐하고 만연해 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인간과 하나님의 분리는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아담’과 ‘하와’의 단순한 불순종에서 시작한 범죄는 ‘가인’에 이르러 충동적 살인으로 발전하게 되고, ‘라멕’의 시대에 가서는 무자비한 살인을 자랑하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범죄는 이제 한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적으로 펴져 가면서 거대한 탐욕과 욕정, 부패와 폭력, 인류 전체의 타락으로 발전해 갑니다.
(2) 하나님의 반응.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역시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는 단순히 그들이 살던 동산과 경작지로부터 추방당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점차 갈수록 인간의 수명도 제한을 받게 되고, 대부분의 인류가 멸절을 당하는 처벌로 확대되다가, 종국에는 그나마 남은 인류마저 함께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상호 간에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점증하는 인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그 도를 더해가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분의 은혜 또한 더욱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보호를 약속하신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살인자 ‘가인’에 대해서도 아무도 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조처하셨으며, 대홍수로 거의 멸절이 되다시피 한 인류의 조본을 위해서 ‘노아’의 가족을 남겨두십니다. 다만 이러한 구성적 원리에 예외적인 에피소드가 있는 바, <바벨탑 이야기>로서 이곳에서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4) 앞선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 <기원 이야기> 전체의 구성을 이처럼 직선적으로 보는 데에는 일단의 이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성의 바탕 위에서 <창세기> 1장과 나머지 장들(2-11) 사이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 진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점이 될 수 있는데, 둘 사이는 일종의 정(正)과 반(反)의 관계에 서 있습니다. 인류의 창조를 절정으로 하는 하나님의 질서 있는 창조가 죄로 인하여 와해되고 소멸해 가다가, 대홍수(6장)와 바벨탑 사건(11장)에서 반 창조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1장이 순종에서 오는 축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나머지 장들은 불순종의 저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폰 라드’의 구조 분석이 주는 두 번째 유익은 이야기 전체에서 신학적으로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두 번에 걸친 족보 기록(4:17-26; 5; 11:10-26)마저도 신학적 의미를 지니게 한다는 점입니다. 즉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는 선언이 가능해 집니다. 이 두 족보는 죄와 은혜의 확산이라는 주제를 이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계속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족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1:28; 4:1; 4:25; 5장을 통해서 반복되는 양식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족보에서 또 다른 면, 즉 하나님의 저주를 읽을 수 있는 바, 그것은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점진적으로 단축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예: 홍수 이전 수명 = 800~900; 셈의 수명 = 600년(11:10); ‘데라’의 수명 = 205년(11:32)). 4장 역시 이상에서 제시한 신학적 주제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1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국가의 이름들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질문, “10장에도 신학이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이 되고 있는 점은, 10장이 ‘바벨’탑 사건 이후(11:1-9)가 아니라 그 이전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 서술의 순서 상 논리적으로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 위치해야 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10:5, 32, 18, 20, 31). 그렇다면 10장의 기록이 11장 이전에 위치했을 때 그 신학적 의미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도 동시에 물어야 할 질문이 됩니다(참고, 1:28; 9:1). 덧붙여 11:1-9의 신학적 기능은 이러한 주제와 관련 지워 볼 때 양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4) 창조-반 창조-재창조
이러한 구조 역시 전체적인 구성을 하나의 선적인 흐름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래 도포를 통해서 전체 이야기가 어떻게 이런 흐름에 부함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5) 기원 이야기와 족장 이야기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창세기>에서 다루는 기원 이야기의 분량은 전체의 1/5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모두 <족장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화자의 주된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원 이야기>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기능은 <족장 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족장 이야기>를 위한 서론 내지는 배경의 기능을 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기원 이야기>가 끝나는 곳과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곳의 무대 분위기를 비교해봄으로써도 이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확인해 봅시다.
화려하고도 질서정연하며 모든 관계가 친밀하여 아무 것도 숨길 것도 부끄러워 할 것도 없던 <창세기>의 첫 두 장을 지나자말자, ‘에덴’동산은 죄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죄의 결과는 분리와 분열입니다. ‘아담’과 하나님의 분리에서 시작하여 남편과 아내, 인간과 피조세계, 피조세계와 피조세계 사이에 분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발전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은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남편과 아내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장에서 ‘가인’의 살인을 통해서 죄가 그 심각성을 더해가면서,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도 점차 가증스러울 만큼 대담해 지고 있는 것을 ‘라멕’의 “칼의 노래”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갈수록 인간 사이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고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서, 한 가지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바, 분리되고 섞이지 말아야 할 것이 섞이고 혼돈과 무질서로 치닫게 되는데,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결혼이 바로 그것입니다(6장). 드디어 <대홍수>는 땅과 물의 경계를 모두 지워 버리고 온 세상을 태초의 그 어둠과 혼돈과 무질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반창조의 행진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노아’는 여러 가지 점에서 두 번째 ‘아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 인류의 조상이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조의 언약을 새롭게 받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대에 율법을 지키고 의롭게 살아가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마저도 한낱 포도주 몇 잔에 취하여, 사소한 실수로 그 아들 ‘함’을 저주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의 저주가 앞으로 인류의 미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을 그가 알았을 리 없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불구대천지 원수로서 악역을 담당하게 될 민족과 국가들-이집트, 아시리라, 가나안-이 이 저주받은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9:24-27; 10:6-20). ‘노아’의 범죄로 흠집이 나기 시작한 신세계도 다시 죄로 타락해 가는데, 이번에는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실로 오래 만에 모든 인류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 벌이는 거대한 사업이 하나 있었으니 ‘바벨’탑 공사가 그것입니다. 이들이 벌이는 사업의 동기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두 사람의 그것과 대단히 유사한데,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사가 얼마나 느렸던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 탑을 허물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화자는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의 문명과 종교를 통렬하게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쟁을 대 실패로 끝나고, 그동안 마음과 언어가 하나로 일치되었던 인간들을 이제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그 결과 서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온 땅에 갈기갈기 분리되고 흩어져서 다시 한 번 혼란과 어두움 가운데 내던져진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종말이 온 것입니다.
<족장 이야기>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12:1-3). 그를 부르시면서 주신 다섯 번에 걸친 축복의 약속은 직전의 인류에게 내렸던 다섯 번에 걸친 저주의 약속과 아주 흥미로운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축복의 약속은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축복은 제 1부의 <기원 이야기>에서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태초에 ‘아담’을 향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던 약속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제 성취될 참입니다. 그를 통해서 적어도 한 국가가 나타나고 왕과 귀인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17:6, 20).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단순히 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칠 것이며, 모든 인류가 그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원 이야기>는 <족장 이야기>를 위한 배경이자 서론으로서 <족장 이야기>의 의미를 증진시켜주며, 더 나아가 <창세기> 전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줍니다. <창세기> 3-11장의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구속이라면 <기원 이야기>는 왜 우리 인간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를 원인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은 원래의 세상이 어떠했으며, 우리가 구속된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6) 기원 이야기의 삶의 자리
<기원 이야기>는 처음 누구에게 필요한 것이었을까? 즉 의도된 독자는 누구였으며 의도된 저자는 누구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두 가지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
(1) 사제자료 설(주전 550년경). ‘바벨론’ 포로 이후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과 ‘야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필요하다는 자각에 따라, 종교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새롭고 질서 있는 유대 공동체 창출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자는 메시지를 <기원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유대’ 공동체는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도 볼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 율법이나 안식일과 예배 등을 극도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보건대, 포로기 이스라엘은 마치 대홍수 때처럼 무질서와 혼돈과 방황의 시기였으며, 따라서 대홍수는 이스라엘이 반 창조의 절정에 놓여있던 시기였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 내려지는 일련의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은 왕조시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민족적 죄악에 대한 의로운 심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도 살아남은 ‘노아’ 가족은 포로기 이후 살아남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로서, 이제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명령이 이들을 통해서 재창조의 명령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하는 소명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2) 야훼자료 설(주전 1000-900년). ‘다윗’ 이후 이스라엘은 정치, 문화, 및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만, 이에 따른 종교적 이완과 세속화 현상 역시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시점에 화자는 현재 백성이 누리고 있는 제반 축복의 근원이 ‘야훼’ 하나님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충성과 책임을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할 뻔 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계속되고 성취될 것인즉, 국가적인 경각심과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기원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7) 기원 이야기의 교훈
현대 사회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언급할 수 있겠으나 세속화와 다원화 및 상대화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체와 속성,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기원과 그 의미 등에 관한 수많은 세계관들이 난무하며 대립하고 있는 세상 속에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시내’ 산과 ‘가나안’과 ‘바벨론’을 두루 거치며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이 겪었던 온갖 종류의 종교들, 미신, 거짓 철학들이 과학과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그 모습과 형태를 달리한 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홍수의 혼란 속으로, ‘바벨’탑의 그 반역 속으로 동참시키지 못해 안달입니다. <기원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소감과 실천 방안을 적어봅시다.
2. 족장 이야기(12-50)
<창세기>의 전체 분량 중에서 4/5를 차지하는 <족장 이야기>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있다면 언약이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약의 종류, 내용이나 형식 등에 대해서는 다음 저서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Robertson, P.「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2) 김태정, 「구약 이야기: 문학과 역사와 신학」. 대구: 기독교육 및 학문 연구소. 2003.
그렇다고 모든 장마다 이 주제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각 <족장 이야기>의 근저에는 늘 하나님의 약속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면서 언약의 계승과 발전 그리고 성취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족장 이야기>마다 흩어져 있는 여러 약속들이 처음부터 <족장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아니면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의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만일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소위 자료비평적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후자의 견해를 취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Hamilton은 그의 책에서 이 질문에 대해서 상세하게 답변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Hamilton, 52쪽.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성경>을 최종적으로 완성된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대하는 것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주제들 역시 최종 본문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부분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이후 해당되는 본문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므로, 이곳에서는 개괄적으로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Lasor의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라솔(참고도서 10), 177-184 쪽.
1) 선택과 약속들
족장들의 이야기는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고 선택을 입은 것으로 시작됩니다(12:1-3). 그에 대한 부르심은 마치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 양 갑작스럽고 간결합니다. 이 갑작스럽고 새로운 시작은 마치 <기원 이야기>로 끝나가던 서막(序幕)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직도 채 걷히지도 않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무대 위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비치면서 다음 이야기를 위한 새로운 막(幕)이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담고 있는 이 세 구절은 <족장 이야기> 전체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포괄적인 약속은 <족장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 결여하고 있는 은혜라는 단어를 대신하고 있으며, ‘바벨’탑 사건을 끝으로 청중들이 절망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던 질문, 즉 “그렇다면 이제 인류의 역사는 여기서 끝인가?”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선택하고 그에게 복을 준 것과 땅과 민족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약속을 한 것은(1, 2절)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거대한 전망을(3절)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그 마지막에 해당되는 말, 즉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그 구원이 전 인류를 포함하리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로 인류 전체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생긴 자신과 사람들 사이의 분리와 단절의 틈을 복구하시려고 새롭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족장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세절은 문학적으로 두 이야기를 잇는 일종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도록 기막히게 구성해 놓은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마치 크게 붉은 글씨로 쓴 제목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족장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학 화 한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을 부른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일단 깨닫고 나면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해 집니다. ‘아브람’은 큰 민족이 될 운명이었습니다(12:2). 그러나 ‘사라’는 애를 밸 수 없습니다(11:30). 또한 그가 가는 땅은 그의 후손들이 차지하게 될 예정입니다(12:7). 그러나 그 땅은 ‘가나안’ 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12:6). 서두에서 화자(話者)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람’이 처한 상황을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이 상반되는 두 요소가 <아브람 이야기>(12-21장) 전체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약속은 아주 엄청난 표현들(수사적 과장법), 즉 땅의 티끌(13:6)과 하늘의 별들(15:5)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식이 없자 스스로의 수단을 강구해 냅니다. 자기 집에서 기른 노예를 양자로 삼습니다(15:2, 3). 아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은 ‘사라’는 자신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주고, 그를 통해서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16장). 그러나 이 두 가지 시도 모두 ‘사라’를 통해서 후손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지 못했습니다(15:4; 17:18, 19). 이 모든 인간적인 시도가 실패로 끝났을 때, ‘야훼’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야훼’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21:1).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약속은 이후세대의 족장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재확인 됩니다: ‘이삭’에게(26:2-4); ‘에서’를 피하여 도망가는 ‘야곱’에게(28:13, 14);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목 ‘벧엘’에서(35:11, 12);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게(48:1-6). 이 약속이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주제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이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출 6:4-8).
그러나 여전히 ‘가나안’ 땅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이 소유했던 땅이라고는 고작 ‘막벨라’의 들과 동굴이 전부였으며(23장), 바로 이 동굴에 ‘아브람’(25:7-10), ‘이삭’(35:27-29), 그리고 ‘야곱’(49:29-31)이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방랑생활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족장 시대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 땅에서 사는 것조차 어려워 ‘이집트’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이 한 가정에서 한 독립 민족으로 확대해 가는 첫 단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이나 ‘야곱’ 이야기와는 매우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는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계시는 찾을 수 없고 대신 무대의 배후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대하게 됩니다. 따라서 요<셉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이야기 내용 중에서도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만(50:20),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처럼, 모든 일(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을 자신의 의도에 맞도록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2) 믿음과 의
<아브람 이야기>에서 무수한 후손들에 대한 약속은 아들 하나가 과연 태어날 것인가 하는 흥미진진한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상하리만치, 정도(正道)를 벗어나면서 지연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화자는 부차적인 주제를 이끌어 내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편에서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그가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통해서 엿볼 수 있게 됩니다(12:4). 화자가 이 주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씨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곳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22장). 여기서 이야기의 초점은 어린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 과연 윤리나 도덕적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삭’의 희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의 시험에 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극적 요소는 ‘아브람’이 처한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그는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또는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만, 어떠한 선택을 하건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는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후대의 믿음의 백성들에 대한 모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의(righteousness)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데 있습니다(15:6). 만약 의를 현대의 서구사회에서 인식하고 있는 바처럼 일정한 도덕률에 따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의와 믿음을 동일시하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법에 의해서 미리 지정된 윤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 또는 관계에 충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부터 그분의 언약이 실현되는 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불변하는 인간과 하나님의 두 속성의 차이 때문에 끊임없이 긴장과 충돌이 발생합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이러한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늘어진 자로서(25:26), 그의 어머니나 삼촌을 닮아 지극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간교하고 책략을 수시로 도모하는 자입니다(27:5-17, 41-45). 삼촌 집에서 봉사한 20년의 세월도 서로를 속이고 이기려고 음모를 도모한 두 사람의 갈등과 싸움의 기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극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도 그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음이 소위 ‘얍복’ 강 에피소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이겼다”(32:2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삶이 변한 점을 통해서나, 이스라엘(“하나님이 이기실 것이다”)의 이름을 통해서 볼 때, 실제로는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후 ‘야곱’의 달라진 모습은 그의 나머지 생애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예컨대 ‘에서’와 화해를 하고(33:1-11), 아들들의 행동에 대해서 번민하며(34:30), 우상들을 제거하고(35:2-5), 잃어버린 아들 ‘요셉’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37:33-35), 마지막으로 ‘이집트’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46:1-5) 등의 일련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막벨라’ 동굴에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49:29-32)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의 이 마지막 유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는 소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의문들
1. 창조의 날들
<창세기> 1장의 해석에 관한 한 가장 치열한 논쟁의 핵심은 “날”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지질학 분야에서의 발견과 진화론을 포함한 과학의 발달로 더욱 가열되었으며, 그 결과 아주 다양한 해석의 스펙트럼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는 <창세기> 내용 자체를 전적으로 근동 신화문학의 한 아류로 치부해버리려는 자유주의적 견해가 포진하고 있는가 하면, 우편 중간 어디쯤에는 과학과 조화 내지는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소위 일치론자(concordist)들이 보이다가, 동일한 스펙트럼의 또 다른 한 쪽 끝에는 ‘터툴리안’의 반어적(反語的) 질문, 즉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를 연상시키는 “과학과 <창세기> 1장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는 극단적 문자주의적 견해가 상존하기도 합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에게 해석의 모델이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느 모델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을 구분하고 종합하는 작업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설명의 편의를 위해 나름대로 요약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해석적 입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문자적 해석; (2) 역사․과학적 해석; (3) 문학․신학적 해석.
1) 문자적 해석
문자적 해석의 입장은 스펙트럼의 가장 오른 쪽에 위치해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즉 <창세기> 1장의 “날”은 문자 그대로 오늘날의 24시간 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144 시간(24 시간 곱하기 6일)에 걸쳐서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 내내 창조 활동을 하신 것인지, 아니면 이 중 일부만 사용하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진영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다수의 보수 및 극단적 근본주의 교회를 총망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의 정당성을 성경적․논리적 관점에서 설명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로 ‘모리스’(H. Morris)나 ‘윗트콤’(J. Whitecomb) 등의 저서들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도서 11-14.
이들에 따르면 인류의 연대기는 대략 6,000-7,000년 정도가 되는데, 그것은 <창세기> 1장의 “날”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5장에서 홍수 이전의 연대기와 11장의 홍수 이후의 족보 기록에 대해서도 빠진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전제하에 도출된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지구의 나이나 인류의 역사에 관한 지질학의 주장과는 결코 타협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대로라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저자들은 지질학적 연대는 단지 분류법에 불과하며, 모든 화석 기록과 지층은 노아의 대 홍수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성경의 “날”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근거를 <성경> 자체의 증언이나 또는 논리적 접근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주장의 일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날의 의미. “날”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욤’(םי)은 <구약>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예컨대 ‘욤’은 “시간”(창 4:3)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불특정한 시기나 기간”을 의미하기도 하며(사 2:12; 4:2), 혹은 계절을 뜻하기도 합니다(수 24:7).
<창세기> 1장에서처럼 제한을 가하는 형용사(첫째 날, 둘째 날 등)와 함께 쓰일 경우와, 마침을 의미하는 언급-“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이 있을 경우에는 <성경>은 항상 문자 그대로 24시간의 날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빛을 낮(욤)이라 칭하시고...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욤)이니라”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날”은 빛의 기간이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2) 성경의 다른 본문. “날”이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야밈), 이 형태는 <구약>에서 수백 번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항상 문자적인 하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 20:11). 여기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문자적인 6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도 이 6일이 문자적인 날이 아니라면 그 다음 날의 안식일에 대한 선언도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3) 기타 논리적인 이유들. 만약 <창세기> 화자가 창조의 기간을 더 오랜 기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예: 올람, 오랜, 일정치 않은 시기).
2) 역사․과학적 해석
지질학이나 진화론 등과 같은 과학의 발전으로 <창세기> 1장의 진실성이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또 다른 해석적 스펙트럼이 문자주의의 반대편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입장의 스펙트럼을 통칭해서 역사․과학적 해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해 낸다면, <창세기>의 기록을 과학적 발견과 어떠한 식으로든-성경 우위든 과학 우위든-상호관계성을 규명해 보자는 점입니다. 입장의 차이에 따라 대략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날-시대 이론; 간격이론(아담 이전; 아담 이후).
(1) 자유주의적 해석. 이 입장은 <창세기>의 기록이 허구라는 가정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2) 날-시대 이론. ‘히브리’어 ‘욤’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24시간 하루 외에도 불특정 기간이나 시대 등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6일이 아니라 6시대로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질학적 연대를 <성경>의 기록과 조화를 이루어보자는 것입니다만, 여전히 <성경>과 지질학적 발견 사이에 상당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비교 설명은 ‘모리스’(H. Morris)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도서 14, 145-150쪽.
(3) 간격이론. 간격이론에는 “아담 이전 간격이론”(pre-Adamic theory)과 “아담 이후 간격이론”(post-Adamic theory)의 두 가지 아류가 있습니다. 전자(前者)의 입장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지질학적 연대를 삽입함으로써 역시 과학과 <성경> 사이의 조화를 꾀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의 태초의 창조는 50억년이라는 지질학적 연대와 일치하며, 따라서 거대한 범세계적인 격변의 결과로 인하여 이 지구는 혼돈과 공허의 상태(1:2)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 격변은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반역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후자(後者)의 입장은 <창세기> 5-11장 사이의 인류의 족보에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다고 봄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문자주의에서 주장하는 소위 6000년 이상으로 늘려보자는 시도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이론에 대한 상세한 설명 역시 ‘모리스’의 저서를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14, 150-153쪽.
역사․과학적 해석은 <성경>과 과학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보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여러 가지 신학적이고도 과학적인 문제점들을 배태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다양한 입장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은 모리스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진술에 그치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이러한 견해들은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해답들, 즉 창조의 방법이나 시기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접근 방법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는 그 반대 되는 노력을 상정해 봄으로써 알게 됩니다. 즉 천문학에 관한 논문으로부터-이 저자는 자신의 철학을 그 논문에 주입하려고 한 것이 아님에도-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정보를 캐내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험멜’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지질학과 생물학을 가르칠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다.” Hummel, 쪽.
둘째로, 일치주의자의 견해는 본문과는 무관한 개념을 본문에 강제로 삽입시킴으로써 해석적 무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의 메시지를 현대과학과 조화시키는데 성공한 듯이 보이는 모든 시도는 현재 유행하는 과학 이론이 개정되거나 폐기되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원래 화자가 의도하지도 않았던 시합 속으로 밀어 넣고 거기서 기를 쓰고 과학을 따라가게 하거나, 또는 정 반대로 과학과 피나는 싸움을 한바탕 벌이도록 한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득세했음을 교회사나 과학사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셋째로, 만약 <창세기>가 현대의 과학적 개념을 가르친 것이라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최초의 독자들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며, 지난 삼천년 동안 거의 모든 독자들에게 <창세기>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과연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과학의 추상적인 용어를 이해하며 살아갑니까?
3) 문학․신학적 해석
일치주의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창세기>의 기록을 어떤 형태로든 과학적 사실과 연계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면, 이 세 번째 모델에서는 그러한 시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따라서 날의 의미에 대해서도 보다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창세기>를 기원에 관한 과학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로 보지 말고, 신학화 된 이야기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창조의 시기나 방법에 관한 질문은 주변적인 것이 되고 창조의 주체나 목적 배경 등에 관한 질문이 보다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경> 해석학의 방법론에서 본다면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종합적 해석을 시도하자는 말이 될 것입니다. 종합적 해석이란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창세기>에 대한 제반 해석적 방법론을 동원하자는 것으로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이러한 시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본문의 역사, 즉 자료와 양식과 편집 등에 관심을 집중하게 됩니다. 예컨대, 화자나 편집자들의 의도와 관련해서,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교적 다신론의 문화 가운데서 유일 신 ‘야훼’ 하나님의 창조와 그 특성, 인간의 의미와 목적 등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본문의 문학적 형식에 주목하게 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형식은 그 내용만큼이나 지극히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가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라면 <창세기> 사건들을 기술함에 있어 창조의 방법이나 과정과 시간 등 자연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택하며, 창조가 시공 속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그 기술도 엄격하게 연대기 순서를 따라 기록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화자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기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의 경우도 구성의 원리는 엄격하게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직선적 구성), 주제에 따라 재배치하고 있는 대칭반복의 구성(일종의 문학적 클럽 샌드위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 접근할 때에 우리는 그 사건이 엄격하게 연대기적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자의 강조점은 창조적인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여덟 번 등장하고, 그 각각의 경우에 여덟 줄의 시가 뒤따르고 있습니다(도표).
이 시들이 서술의 기본 구조를 형성합니다(세 번째와 일곱 번째의 말씀에는 마지막 연-‘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이 없는데, 이는 그 두 소절이 네 번째와 여덟 번째의 말씀과 결합되어 각각 셋째 날과 여섯째 날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덟 개의 시들은 길이가 다소 다르기는 하나 모두 동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시의 형식적 특징은 일종의 시적인 서술로서(tripartite; 3부로 이루어진 시), 병행하는 한 쌍의 세 절로 이루어진 예술적 틀로 짜여져 있습니다(도표).
우선 화자는 태초의 상황, 즉 6일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해결되어야 문제가 무엇인지 삼중적(三重的)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1:1-2): (1) 흑암(darkness); (2) 혼돈(formless); (3) 공허(emptiness).
두 번째로 이어지는 3일 동안 이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 날에 빛이 있어 어두움과 분리가 일어나고, 둘째 날에는 물로 뒤덮인 혼돈의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분리되면서 물도 각기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가 나누어지면서 공허한 땅에는 각종 식물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래의 3절에 해당하는 나머지 3일(4-6일)동안에는 마치 빈 집에 물건을 채우듯 채우는 작업으로 바쁜 나날들입니다. 넷째 날에는 하늘의 빛(해, 달, 별들)으로 채우고, 다섯째 날에는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땅의 짐승과 사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창조의 시는 첫 3일과 나머지 3일 간의 기막힌 대칭으로 문학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화자 자신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2:1). 이 때 천지는 첫 3일 동안의 창조의 결과요, 만물은 나머지 3일 동안 이루어진 창조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이처럼 창조의 내용만큼이나 그 형식도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순서가 반드시 연대기적일 필요가 없으며, 과학적으로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창조의 순서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넷째 날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셋째 날에 이미 땅에 온갖 식물들이 있었다는 모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날의 정확한 의미도 문맥과 저자의 용도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맥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반복 속에서, 그것은 문자적인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최초의 독자들에게 이 말은 분명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이 문맥은 어떤 기간이나 지질학적 연대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창조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엿새 동안에 일어났고, 그 다음에는 안식을 위한 일곱째 날이 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한 주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공식적인 표현이 비유적인가 아니면 문자적인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그 엿새가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대한 유비(analogy)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소요된 실제적인 시간에 대한 연대기적 설명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답은 전자(前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유비를 통해서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과 행동을 언급할 때마다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사용합니다(과학도 유비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 예를 들어 눈에 볼 수 없는 원자나 분자를 종종 당구공을 사용하여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모델로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그분의 창조 활동을 저녁과 아침으로 표시되는 엿새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쉬는 날이 뒤따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유비들에 비춰 볼 때, 마치 하나님이 실제로 엿새(또는 여섯 시기) 동안 일하시고 그 다음에는 쉬신 것처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왜 반드시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 도중에 갑자기 말을 바꿔 타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문자 주의를 채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쓸데없는 의문들을 제기하곤 합니다. 유비에 의한 계시의 전달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시계를 놓고 일하셨는가, 아니면 한참 만에 한 번씩 24 시간 동안 일하셨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빛을 순식간에 만드셨다면, 첫째 날의 나머지 시간 동안은 일곱째 날처럼 쉬셨는가? 그 뒤의 날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풀과 동물과 재생산 과정이 어떻게 그렇게 적절하게 시간 계획에 꼭 맞아 들어가게 되었는가? 등이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입니다.
본문이 24시간 하루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실제 기간을 의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일을 말할 때라도, 우리가 권력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의 중요한 행적을 보고할 때에, 그가 일하는 하루의 길이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역사가가 이렇게 기록할 수가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원자탄 생산을 결정하였고,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파를 명령하였다. 그 이틀은 현대전의 전체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명령들이 수년 혹은 수 주 동안에 걸쳐서 언제 어떻게 보완되었는가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누가 왜 그런 일을 하였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중심적 흐름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가, 며칠 동안인가, 몇 개의 긴 지질학적 기간인가 하는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중요한 요점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 과학적 관심은 해석을 한 옆으로 밀쳐놓으며,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 노선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하루의 길이에 관한 논쟁에서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이 날들이 당시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날들의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일 대 일의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는 유비에 있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는 생활의 패턴은 인간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양식입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시편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 역시 엿새 동안 일하고 안식일에 쉬는 인간 노동에 대한 유비이자 은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역사와 신화
창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인가 아니면 단순한 신화인가? 족장 설화는 역사적 사실인가? 우리는 앞에서 <창세기> 1장이 문학적인 형식에 있어 고대 근동문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진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문학․신학적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논의 자체가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해서는 상세한 논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Hamilton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3.
3. 족장들의 종교
족장들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들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모세’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 질문들 역시 이곳에서의 논의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이므로 생략하기로 합니다. Hamilton, 60-71쪽.
교훈과 적용
1. <창세기> 서론에 관한 필자의 글을 읽고 느낌을 말해 봅시다. 서론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해석과 비평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고 성경비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그리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입니까? 내가 그동안 참석했던 성경공부의 내용과 성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3. 하등비평(또는 본문비평)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부르게 되었습니까? 하등비평의 전제와 방법론, 목적 등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4. 흔히 역사비평 또는 통시비평의 제 방법론에 대해서 아는 바대로 분류해 보고, 각 방법론의 전제와 목적 그리고 그 한계 등에 대해서도 설명해 봅시다.
6. 공시비평이란 무엇입니까? 공시비평의 배경과 전제에 대해서 의논해 봅시다. 그리고 공시비평이 포함하고 있는 일련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7. <창세기>의 구조를 ‘히브리’식과 개신교 식으로 구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 단락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8. <기원 이야기>와 <족장 이야기>의 목적과 상호 관계성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이어서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는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9. <창세기> 1장의 날의 해석에 관한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고 하고 비평해 봅시다. 당신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10. <창세기>에는 흔히 문제가 된다는 본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인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가인의 아내”에 대한 의문이라든지,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동” 등이 있습니다. 이들 문제들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