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0과
야곱과 에서: 속임수
김태정 목사창세기 26:34-28:9약 72분 분량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26:1)
본문은 <야곱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합니다. ‘에서’의 결혼에 관한 언급이 이야기의 서두와 말미에 마치 수미상관처럼 전체 이야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야곱’이 속임수로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빼앗는 이야기가 다섯 개의 장면에 걸쳐 상세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이 한 조를 이루고 어머니와 작은 아들이 한 조를 이루어, 하나님의 축복을 놓고 벌인 한바탕 사기극이 이야기의 핵심 내용입니다. 당연히 무대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갈등과 음모와 배신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 안입니다.
‘야곱’이 속임수로 하나님의 축복을 탈취해 간 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을 것인가? ‘에서’는 과연 선의의 피해자인가? 왜 그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었을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셨을까? 본문은 <오경> 전체의 핵심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이들 질문들이 본문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관전 포인트들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야곱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를 26:34-28:9로 정하는 데에는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세 이후부터 단락 구분의 한 전형으로 자리매김 해온 장별(章別) 구분 방식과 최근의 소위 자료비평적 구분 방식 사이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데서 오는 모호함 때문일 것입니다. 우선 새로운 단락을 27장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26:34-35에서 시작하고 있는 데에는 내용과 형식에서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26:1-33) 전혀 등장하지 않던 ‘에서’가 이곳에서 갑자기 다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그의 등장과 관련하여 문장의 형식 또한 새로운 이야기의 전개를 알리는 전형적인 표현인 “그 때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들: 25:20; 26:1.
그러나 ‘에서’와 이방 여인과의 결혼 이야기는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26:34), 27:46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 사실상 27:46-28:9 사이의 내용의 주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27:46이 아닌 28:9가 됨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결혼 이야기는 세 번째 에피소드의 수미상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안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주제 “(야곱의) 속임수”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단락 구분은 유대 문헌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주석가들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Wenham). Wenham, 202쪽.
그러나 본문을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로 보기에는 전체 <야곱과 에서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본문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 즉 쌍둥이의 출생과 유년 시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25:20-34)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해주는 장면은(27:27-29)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25:23), ‘에서’가 ‘야곱’의 이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나 장자 권을 뺏긴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장면(27:36) 역시 이전 이야기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25:26, 28-34). 실로 본문을 지배하고 있는 갈등의 분위기도 결국 첫 에피소드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는 부모의 편애에서(25:28)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삭’이 ‘야곱’에게 전수해주고 있는 축복의 내용도(28:4)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으로서 이 역시 두 번째 에피소드(26장)의 핵심 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특히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은 두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28:2-4; 26:22, 24).
본문이 <야곱 이야기>와 연결되고 있는 부분은 지난 이야기들만은 아닙니다. 본문의 내용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들을 예고해주고 있기도 한데, 특히 여행 이야기, ‘라반’의 딸들과 결혼하는 이야기, 그리고 궁극적인 귀향에 관한 이야기들이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파생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동심원적인 구조를 이루는 전체 <야곱 이야기>의 형식에서 볼 때, 본문은 훗날 ‘야곱’의 “귀향 이야기”(32-33장)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의 단락은 ‘에서’의 결혼을 전후하여 다섯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단락 구분은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미미하나마 일부 이견들이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이삭’과 ‘에서’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리브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27:5) 일종의 전환 구절로 볼 수 있으며, 두 번째 장면에 포함시킴이 마땅해 보입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배경에 해당하는 첫 번째 장면의 마지막 구절로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두 번째 장면은 27:6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27:41-28:5)은 다시 27:41-45와 27:46-28:5의 두 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으며, 만일 등장인물 중심으로 단락을 구분하자면 세 개로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27:41-45‘리브가’와 ‘야곱’
(2) 27:46‘리브가’와 ‘이삭’
(3) 28:1-5‘이삭’과 ‘야곱’
그러나 이 장면은 전체적으로 그 내용에 있어 복수심에 불타는 ‘에서’로부터 ‘야곱’을 구하려는 ‘리브가’의 계획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단위로 취급함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내용은(27:1-40) 소위 “임종-축복”의 전형(典型)에 해당하는 장면입니다. 즉 왕이나 족장 또는 지도자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들을 불러 축복을 주는 장면을 말합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창 48-49; 50:24-25; 신 31-34; 수 23-24; 왕상 2:1-9). 그러나 이곳에서 ‘이삭’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두 자식 중 하나에게만 축복을 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절차는 처음부터 어딘지 정당하지 못하며 결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자료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입장은 <사제 자료>와 <야훼-엘로힘 자료>가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전자(前者)에 속하는 본문은 26:34-35 및 27:46-28:9이며, 27:1-45의 본문은 후자(後者)에 속합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 어떤 부분이 <야훼 전승>에서 온 것인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엘로힘 전승>에서 온 것인지 분간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27:1-45의 본문이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의 두 자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해 온 이유는, 두 전승 모두 ‘밧단-아람’으로 떠난 ‘야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데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 내에는 일련의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짝을 이루어 등장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 속합니다: (1) 21-23절//24-27절상; (2) 30절상//30절하; (3) 33-34절//35-38절. 즉 한 쌍을 이루는 두 이야기는 각기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지요. 또한 본문 속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7, 20, 27절)와 ‘엘로힘’(28절)의 두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두 전승이 혼재해 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자료 비평적 입장과는 달리 현대 학자들은 27:1-45의 본문이 하나의 전승 즉 <야훼 전승>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짝을 이루고 있는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전승을 부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기보다는 <창세기> 화자의 독특한 서술 기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사제 전승>의 범위(26:34-35; 27:46-28:9)에 대해서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이견은 없는 듯하나, 이 경우 역시 논리가 다소 취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두 본문을 같은 <사제 전승>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그 내용과 형식이 흡사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본문은(34절) ‘에서’의 나이와 가계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전형적인 <사제 전승>으로 볼 수 있으며, 이와 함께 두 번째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28:9) ‘에서’의 “본처”들을 언급함으로써 내용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사제 전승>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논리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같은 전승이라 해서 같은 내용이나 어휘를 사용하라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제 전승>으로 잘 알려져 있는 36:2-3에서 ‘에서’의 두 아내를 ‘오홀리바마’와 ‘바스맛’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유딧’과 ‘바스맛’(26:34-35) 그리고 ‘마할랏’(28:9)으로 소개하고 있어, 본문이 <사제 문서>가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본문 내용 중의 일부가 <사제 전승>이 아닌 다른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어 혼란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에서’가 나이 40에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는(26:34) ‘이삭’이 같은 나이에 결혼한다는 이야기와(25:20) 맥을 닿고 있는가 하면, ‘리브가’가 아들의 결혼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은(27:46) 자신의 뱃속에서 두 아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놓고 걱정하고 있는 모습과(25:22) 유사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25:20-22의 본문은 <사제 문서>는 아닙니다.
결국 <사제 전승>을 가려내는 작업은 전적으로 두 번째 본문인 28:1-8의 내용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사제 전승> 특유의 용어나 어휘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나안 여자들”(1, 6, 8절); “밧단-아람”(2, 5, 7절); “전능하신 하나님”(3절); “생육하고 번성하여”(3절); “여러 족속”(3절); “네가 거류하는 땅”(4절); “하나님”(4절); “아람”(5절). 그러나 여전히 어려움을 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용어들조차도 다른 <사제 문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비(非) 사제 문서>에서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여자들”이나 “여러 족속” 등은 이곳 외에 다른 <사제 문서>에서 단 한 번씩만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36:2; 48:4). 그리고 “밧단-아람”, “생육하고 번성하여” 등의 용어들은 <비(非) 사제 문서>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예: 25:20; 26:4, 22, 24; 31:18, 20, 24). 따라서 “네가 거류하는 땅”이라든지 “전능하신 하나님” 정도만 <사제 전승>을 지지하는 증거로 남게 됩니다(참고, 17:8; 36:7; 37:1; 17:1; 35:11; 43:14; 48:3). 그러나 이들마저도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우선 “너와, 너와 함께 한 네 자손에게도 주사”라는 표현은 <사제 자료>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17:8) <야훼 자료>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12:7; 13:15; 15:7; 22:17; 24:7, 60; 26:3, 4). 그리고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라든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에 관한 언급은(28:3)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26장의 <이삭 이야기>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28:1-5의 본문의 자료적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 이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소위 문학적 상수들만 가지고서는 <사제 전승>인지 또는 <야훼 전승>인지 가려내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이전의 문서들을 단순히 인용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은 본문의 자료적 특성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본문의 형식 내지는 장르상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용어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다른 전승(즉 다른 작가)들이 혼재해 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고, 이들 용어들을 채택함으로써 드러내려고 하는 화자의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흔히 28:1-9에서는 ‘에서’와 ‘야곱’의 적대감이나 갈등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어서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27장과는 다른 전승일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가 어떤 내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무지와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인 침묵일 수 있거나 또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에서’가 ‘이스마엘’ 족속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의 부모가 ‘가나안’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언급을 통해서(28:8-9) 형제간에 적대감은 몰라도 적어도 경쟁심이나 갈등 정도는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서 위하느라 그렇게 한 것이 아님은, 그가 이전에 그 어머니의 근심에도 불구하고 ‘헷’ 여자들과 결혼을 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에서’가 진정으로 어머니를 위했다면 이들 여자들과 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7:46). 이와는 반대로 ‘이삭’의 경우를 보면, 그는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면서, ‘브두엘’과 ‘라반’을 가리켜 각각 외조부와 외삼촌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리브가’는 물론 아들 ‘야곱’에게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두 아들에 대한 편애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데, ‘야곱’은 ‘리브가’의 아들이요 ‘에서’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무언의 선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 모두 두 본문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반증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Wenham). 두 본문간의 연결성을 볼 수 있는 예는 또 있습니다. 즉 화자는 28:5에서 ‘라반’을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는 28:2 뿐만 아니라 27:43의 내용을 종합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 다시 한 번 두 본문의 연결성을 강조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아래 세 구절에서 28:5의 내용이 어떻게 나머지 두 절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28:5)
(리브가):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27:43)
(이삭):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28:2)
28:7의 내용은 이런 주장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야곱’이 그의 어미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에 쫓아 ‘밧단-아람’으로 갔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28:7). 이런 저러 주장들을 종합해 볼 때, 26:34-35와 27:46-28:9의 두 본문이 같은 전승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더 나아가서 ‘이삭’이 ‘야곱’을 불러 축복하며 ‘가나안’ 사람 중에서 아내를 맞지 말고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는 명령은(28:1-2), 내용상 이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지시했던 명령이나(24:3-4), 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삭’에게 나타나 축복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약속의 땅에 머물라는 명령을(26:3-4, 24)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흔히 24장과 26장은 <야훼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본문으로서, 28:1-9의 본문이 이들과도 문학∙신학적인 상수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발견을 통해서, 26:34-35와 27:46-28:9의 두 본문 역시 최소한 동일 화자의 편집적 손길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에서: 결혼(26:34-35)
흔히 <이삭 이야기>로도 알려져 있으며, <야곱 이야기>의 막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26:1-33의 조용한 분위기가 막을 내리고,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다시 싸우고 갈등하는 쌍둥이 이야기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26:34)
이 구절은 구문(構文) 상으로나 그 내용에 있어서나 <야곱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의 시작으로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그리고 그 때에”라는 표현은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 히브리 화자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며, 내용 또한 <야곱 이야기>의 한 주인공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나이 사십에 두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언급은 단순히 그의 이력에 대한 간략한 기술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도 사십에 결혼하였고(25:20), 나이 백세에 ‘에서’를 통해서 두 며느리를 보게 되었습니다(25:26하). 이점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는 사실과 흥미로운 비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인공의 나이와 결혼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화자가 의도하는바 전부일까? 그는 왜 이런 내용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을까? 이 첫 번째 장면이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들 질문은 자연스럽게 ‘에서’의 결혼과 ‘이삭’의 결혼을 비교해 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두 결혼은 여러 가지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결혼시킬 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진행시켰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여자가 아닌 그의 친척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이하기 위하여 멀리 ‘밧단-아람’까지 하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가나안 여자들과 결혼을 할 때 ‘이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서 화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어떤 여자와 결혼하든 개의치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에서’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결혼을 하는 동안에 말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든 이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결혼에 관한 가족의 전통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28:6-9) ‘에서’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상대가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입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28:9). 그러나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는 ‘에서’의 결혼에 대해서 다소 다른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36:2-3). 이처럼 ‘에서’의 결혼을 다루고 있는 세 본문을(26:34; 28:6-9; 36:2-3) 비교해 보면 아내들의 이름이나 가족 관계에 대한 언급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과연 몇 번이나 결혼을 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아마 그의 결혼과 관련해서 별도의 전승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들 부자(父子)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가족의 다른 구성원 즉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하여 속임수로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에 대해서 비난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화자가 의도하는 바일까요? 즉 ‘이삭’과 ‘에서’가 ‘아브라함’이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했던 가치나 규범들을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면, ‘에서’가 그 모든 것들을 빼앗긴 것도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이니 축복이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이들에게는 과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추측컨대 화자의 이런 의도를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5)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영혼에 쓰디쓴 상처를 받았다”는 뜻으로서, ‘한나’나 ‘욥’이 겪었던 것과 같은 정도의 상처를 말합니다(삼상 1:10; 욥 7:11; 10:1). 그러나 이런 고통은 ‘이삭’의 무관심과 ‘에서’의 방종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과연 ‘리브가’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2. 이삭과 에서(27-1:5)
화자는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대신, 새로운 장면을 열면서 ‘이삭’과 ‘에서’가 대화를 나누고 있고, 이를 무대 뒤에서 ‘리브가’가 엿듣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긴장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부터 분위기는 이전과는 뚜렷하게 대조를 보이게 될 것인데, 그동안 고통을 받은 쪽이 ‘리브가’였다면 이제는 ‘에서’가 될 것이며, 아들이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면 이제는 그 어머니가 아들을 울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계획에 대해서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쌍둥이의 전쟁”은 바야흐로 제 3라운드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자궁 속의 혈투”였고(25:21-28), 두 번째가 “떡과 팥죽의 유혹”이었습니다(25:29-34). 첫 번째 전쟁이 출생을 놓고 싸운 것이었고, 두 번째 전쟁은 장자 권을 놓고 벌인 ‘야곱’의 사기극이었고, 이제 세 번째는 “언약의 축복”을 놓고 벌이게 될 한바탕 전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전쟁은 이전과는 달리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고 간여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 이야기를 위하여 27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으며, 전체 이야기를 여섯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매 장면마다 두 사람 씩 번갈아 등장시키면서 이야기의 긴장과 갈등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1) ‘이삭’과 ‘에서’(1-4절); (2) ‘리브가’와 ‘야곱’(5-17절); (3) ‘이삭’과 ‘야곱’(18-29절); (4) ‘이삭’과 ‘에서’(30-40절); (5) ‘리브가’와 ‘야곱’(41-45절); (6) ‘리브가’와 ‘이삭’(46절). ‘이삭’이 네 장면에서, ‘리브가’와 ‘야곱’이 세 장면에서, 그리고 ‘에서’는 불과 두 장면에서 등장할 뿐입니다. 각 인물들의 등장 횟수만 비교해 볼 때, 이야기의 핵심 인물은 ‘이삭’이며, ‘에서’가 상대적으로 가장 덜 중요한 인물로 비칩니다.
이야기의 첫 장면은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임종(臨終) 장면의 전형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본 바 있습니다. 즉 주인공 ‘아브라함’이 며느리 감을 찾기 위하여 그의 하인을 ‘하란’으로 보내는 장면이 그것인데, 두 장면에서 일부 용어나 어휘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나이 많아 늙으매”; “축복”.
1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3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1-5절)
그러나 이 장면은 정형적인 임종 장면과는 상당히 이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구약>에서 대개의 경우 임종은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모든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유언과 함께 축복을 하면서 유업과 전통을 계승하게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예: 창 49; 50:24-25),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 단 한 사람만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의문이 많이 남습니다: “왜 ‘이삭’은 관례를 깨고 ‘에서’만을 부르고 있으며, ‘야곱’도 쌍둥이로서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외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의 이런 행동은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에서’의 방종한 행동과 가족의 전통을 무시한 결혼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도 그를 축복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삭’의 태도는 ‘아브라함’과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며느리를 구하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서가 아니라 먼 고향 ‘하란’까지 하인을 보내어 친척 중에서 합당한 여자를 구하려고 애썼던 ‘아브라함’이 아닙니까! 그리고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야곱’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기도 했습니다(25:23). 그런대도 그는 애써 이를 무시하고 장자인 ‘에서’를 택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이삭’은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면서(2절), 마치 임종을 당장 맞이한 것처럼 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속의 등장인물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식구들을 불러 모아 유언을 남기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47:29; 50:24; 수 23:14). 이런 간절한 소망에 부응이라도 하듯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나이 든 지도자들에게 죽음이 가까웠음과 그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예: 민 20:24; 27:13; 신 31:14). 그런데 이곳에서 ‘이삭’은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그가 언제 죽을지 몰랐을까? 그렇다면 왜 때 이른 유언을 벌써부터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까? 그래서 두 자식 모두를 부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삭’의 진심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곱’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주고 싶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만이 아닙니다. ‘야곱’을 ‘에서’로 착각할 정도로 시력이 멀고, 기억력이 쇠퇴해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상실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식욕과 음식 맛이 그것입니다. 이점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3-4절). ‘이삭’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25:28). ‘이삭’의 왕성한 식욕과 관련해서 Wenham은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식욕은 그의 신학이나 신앙심을 능가하고 있다.” Wenham, 206쪽.
현실적 욕심 때문에 마땅히 행해야 할 하나님의 신탁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는 그의 태도를 꼬집는 말일 것입니다. 현실은 늘 약속보다 가까이 있는 법이지요. 그가 얼마나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 했는지는 그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가 아니라,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2:20; 14:26; 시 84:2).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다는 열망이 담긴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이런 소망은 물론 하나님과 ‘리브가’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 성취될 가망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에서’가 아버지 말을 듣고 사냥을 위해서 뛰쳐나가는 모습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청중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어느 편이 승리할까? ‘이삭’과 ‘에서’일까 아니면 ‘야곱’과 ‘리브가’일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짐승을 잡아 죽이기 위해 뛰쳐나가는 ‘에서’는 조만간 동생을 죽이려고 달려올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원인 제공자는 지금 이 장면을 엿듣고 있는 ‘리브가’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그의 시어머니 ‘사라’처럼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이삭’의 음모를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무위로 돌릴 행동에 착수하게 됩니다.
3. 리브가와 야곱(6-17절)
젊은 시절 ‘리브가’를 떠올리는 특징으로 활력과 단호한 결단력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24장). 그녀의 이런 기질은, 지금 위기적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관례를 깨고 두 자식 중 하나만을 불러 축복하려는 계획에 대해서 분노하고 실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어 앞을 잘 못보고 죽어가는 남편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하는 ‘리브가’ 자신은 과연 남편에 비해 나을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해 화자는 이런저런 여러 말로 대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자신의 입장을 엿볼 수 있도록 일련의 단서를 마련해 놓고 있음을 봅니다.
우선 화자가 ‘야곱’을 어떻게 칭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6절)
즉 ‘야곱’을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에서’를 ‘이삭’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것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입니다(5절). 더 나아가 ‘이삭’과 ‘리브가’조차도 각기 ‘에서’와 ‘야곱’을 부를 때마다 “내 아들아”하고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27:1, 8, 18, 21, 26, 37). 한 집안에서 아버지는 장자를 향해서 “내 아들아”하며 친밀함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면, 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향해서 “내 아들아”하고 맞불을 놓고 있는 상황은 분명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리브가’가 ‘야곱’을 위한 자신의 음모를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를 자기의 아들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험한 계획을 수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했음인지 ‘야곱’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나 봅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말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전하지 않고 슬쩍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7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사냥에 필요한 장비들 즉 활이나 전통 등에 대한 언급은 삭제하고 있으며,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는 말 대신에 단순히 “내가 너를 축복하게 하라”는 말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여호와 앞에서”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 바꾸기를 통해서 ‘리브가’가 의도하는 바는,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 하는 ‘이삭’의 간절한 염원에 대해서는 별 것 아닌 듯이 말하면서, 축복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것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이삭’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리브가’ 역시 어머니로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위를 가지고 ‘야곱’에게 자신의 계획을 따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통 털어 여자가 주어가 되어 이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참고, 에 4:5):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8절)
‘리브가’가 ‘야곱’에게 내리는 명령은 단지 염소를 잡아 오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9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9-10절)
‘이삭’이 ‘에서’에게 요구한 것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리브가’는 왜 ‘야곱’에게도 같은 일을 하도록 시키지 않는 것일까? 미덥지 못했음일까? 너무 시간이 많은 든다고 생각했음일까? 아니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동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야곱’의 차례입니다. 어머니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어머니를 따를 것인가 또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구약>의 일부 기록을 보면 고대 근동 사회의 관습과는 달리 어머니의 권위를 상당히 인정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출 20:12; 21:15, 17; 잠 1:8; 6:20), 보다 정확하게 말자하면 한 가정에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태도나 방침은 일치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생각이 서로 다를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야곱’의 경우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시 사회의 통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머니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11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 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11-12절)
일견 어머니의 지시에 저항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계획이 탄로가 나서 보복을 받을 가능성입니다. 그의 형을 가리켜 “털의 사람”(ר, 사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에서’의 또 다른 이름 ‘세일’에 대한 언어의 유희임에 분명합니다. ‘야곱’의 “속임수”(원형: עעת)는 이곳과 <역대하>(36:16)에서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단어로서 아주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야곱’의 행위는 지극히 부적절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그는 단순히 자신의 아버지를 속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참고, 레 19:14; 출 21:17), 앞도 못 보는 한 늙은이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신 27:18). ‘야곱’이 저주를 받을까 걱정하고 있는 모습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를 걱정할 ‘리브가’는 아닙니다. 아들을 향한 집념으로,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려진 저주를 대신 받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13절)
그러나 이런 일은 어디까지나 실현 불가능한 가정으로 들립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주려는 것이 축복이지 저주가 아닙니다. 만일 계획이 성공하다면 ‘에서’에게 갈 축복을 가로채게 되는 것이고, 설령 실패한다 하드라도 축복을 받지 못하면 그만입니다. 다만 ‘야곱’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수사일 뿐입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히고 염소 가죽으로 피부를 위장하겠다는 계획을 사전에 알려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그냥 가져오라고만 명령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처는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야곱’이 한 일이라고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것뿐입니다. 히브리 문장으로 단 세 개의 동사로 그의 행동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4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15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17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14-17절)
화자의 관심은 ‘야곱’이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리브가’에 있는 듯합니다. 화자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야곱’은 그저 수동적으로, 큰 관심이나 흥미도 없이 그 어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 어미는 이 음모를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기력이 쇠하여져 가는 남편이 혹시라도 눈치 챌까봐 ‘야곱’으로 하여금 그 형의 옷을 입고, 염소 가죽으로 위장시키고 있는 모습은 실로 섬뜩함과 냉혹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삭은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감각마저 무디어져 있습니다. 화자가 전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삭’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야곱’의 “아비”이며, ‘에서’는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맏아들”일 뿐입니다. 자기 아들은 오직 ‘야곱’ 밖에 없습니다. 화자가 ‘리브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케 하는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4. 이삭과 야곱(18-29절)
‘이삭’과 ‘야곱’만이 등장하고 있는 이 네 번째 장면은 전체 이야기기의 백미에 해당하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어머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속이는 일에 말려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제 적극적이며 공세적인 태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에서’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말을 하면서 전력질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중에서 이삭이 여덟 번, 그리고 야곱이 그 절반에 해당하는 네 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목소리는 ‘야곱’의 것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고 하면서(22절), 진정으로 ‘에서’가 맞느냐고 물었을 때(24절), ‘야곱’은 “그렇다”는 단 한 마디로 대답한 후로는 말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목소리를 변조했던 것 같은데, 곧 들통 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 장면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긴장과 갈등입니다. ‘이삭’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음식을 준비해서 가져온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집요하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비록 앞은 잘 안 보이지만 다른 감각들은 ‘리브가’나 ‘야곱’이 예측했던 것보다는 나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바라봅니다: “과연 이들의 정체나 계획이 드러날 수 있을까?” 긴장은 계속됩니다. ‘야곱’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말을 절제하고 있는 순간에도 ‘이삭’의 말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계속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가까이 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21, 25, 26절). 그를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분명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확인한 후 그에게 축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23절), 또 물어봅니다(24절). ‘야곱’이 퉁명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만, ‘이삭’의 추궁은 집요합니다. 자기에게 가까이 와서 포옹도 하고 입도 맞추어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25-27절). 이 모든 확인 과정을 통해서 긴장은 그 도를 더해가다가, 마지막으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에서(27-29절) 마침내 풀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그가 원하던 바를 얻어내며, 이야기의 구성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처음부터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18절)
아버지를 부르는 자는 ‘야곱’임에 분명하나, ‘이삭’이 의심스러운 듯이 “네 아들아, 네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계획은 ‘리브가’가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야곱’ 역시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대답이 과장되고, 필요 이상의 수사(修辭)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9절)
우선 그는 이전에 ‘이삭’이 ‘에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에서’라고 속이는 표현도 수사적 과장인 것이, ‘야곱’의 대답에 담긴 히브리 문장의 의미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 ‘에서’입니다.” “맏아들” 역시 불필요한 수식임에 틀림없습니다. 흥미롭게도 “맏아들”(רכב, 베코르)과 “축복”(ךרב, 바라크)은 철자 바꿈(anagram)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속임수를 써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이 장자의 축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중에 삼촌 ‘라반’으로부터 같은 속임수로 원하지도 않았던 장녀 ‘레아’를 먼저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보상으로 귀결될 것입니다(28:26).
‘이삭’은 아들의 대답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깜짝 놀랍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20절상)
아들이 아무리 훌륭한 사냥꾼이라 해도 이처럼 빨리 잡아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삭’이 ‘리브가’나 ‘야곱’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의식 상태마저 가물가물한 것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당황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당황한 끝에 또 다른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20절하)
그러나 이번의 거짓말은 그의 전 생애가 걸린 위험천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십계명 중에서 적어도 두 계명을 동시에 어기고 있으며, 아버지를 속이는 것까지 합친다면 세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행동은 실로 통렬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야곱’은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도 정작 하나님의 축복을 얻지 못한다면 그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지금 아버지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야곱’의 모습과, 훗날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처절하게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32장)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만일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까지 누렸던 그 모든 유익들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사울’ 왕처럼 말입니다. 그는 왕이 될 모든 조건들을 다 갖추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자였습니다.
이제 ‘이삭’은 다시 한 번 자기 앞에 서있는 아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맹세했는데도 말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21절)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그리고 목소리만 가지고는 ‘야곱’처럼 들리니,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번에는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까?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22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또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2-23절)
그러나 ‘이삭’의 확인 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더욱 당황스러워졌고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입니다. ‘리브가’의 계획이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삭’을 속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축복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2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놓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24절과의 관계 때문인데,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이삭’이 ‘야곱’을 향해 그가 진정 ‘에서’가 맞는지 물어보고 있어, 앞뒤가 맞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혹자는 23절을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한 일종의 요약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실제 축복의 내용은 이 장면의 마지막에 가서야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7-29절).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두 내용이 서로 다른 전승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일관성을 갖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각기 그 의미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의 완전한 의식으로서의 축복의 내용은 27-29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이고, 23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보다 일반적이며 단순하게 “받아들이다” 내지는 “감사하다” 등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이런 의미로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일부 영어 번역본에서는(NEB, NAB) 그 의미를 이렇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23절하).
아무튼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시 긴장은 재개되고 있습니다. ‘이삭’은 세 번째로 야곱이 누구인지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4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24-26절)
그러나 이 마지막 확인 시험에도 ‘야곱’은 무사히 통과합니다. ‘이삭’이 이번에는 술까지 마셨으니 그의 감각은 더욱 무디어졌을 것이 뻔합니다. 술이 깨어 다시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시험은 없을 것이고, 이제 축복은 그가 차지할 것이 확실시 됩니다.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
이 축복의 장면에서 그동안의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습니다. 축복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야곱’에 관한 진술(27절); (2) ‘야곱’이 받게 될 축복의 내용에 관한 진술(28절); (3) ‘야곱’과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진술(29절). 이처럼 모든 일의 결과가 ‘야곱’에게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입고 있는 옷과 그의 피부를 두르고 있는 염소 가죽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원래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이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묘한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축복의 내용도 마치 ‘에서’와 ‘야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선 “향취 나는 밭”은 목축에 적합한 들이나 초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에서’와 같은 사냥꾼에게 적합할 것이지만,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는 흔히 가나안의 풍요로움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목록으로서, 참고: 신 7:13; 28:51; 33:28; 왕하 18:32; 호 7:14; 요 1:10.
이들은 나중에 그 땅에서 정착생활을 할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기도를 담고 있는 29절에서 축복의 내용은 땅의 풍요로움에서 보다 정치적인 것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열방과 민족들이 그를 섬기고 그에게 굴복할 것이라는 표현은 <야곱 이야기: 에피소드 1>에서 등장한 바 있는 “출생의 신탁”(25:23)을 연상시켜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동일한 단어 “열방/민족”(םאל, 람)이 두 곳에서 공히 나타나고 있으며, “섬기다”(דבע, 아바드)는 단어 역시 두 구절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는 언급은 내용 상 애매모호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나 또는 왕정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라는 표현 역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출생의 신탁”(25:23)을 연상케 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는 축복의 핵심 내용으로서 이삭이 나중에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한탄한 것이기도 합니다(27:37). 이어지는 구절은 더욱 애매모호합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창세기> 어디에도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야곱’과 ‘에서’ 외에 다른 자녀들을 두었다는 기록이 없음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창 27:37; 31:46).
문맥 상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또는 시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애매모호함이 남습니다. 이 구절을 <야곱 이야기>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실제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이들은 ‘리브가’의 손자들(즉 야곱의 아들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33:3, 6-7)( Wenham). 아무튼 이 예언 역시 ‘에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의도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야곱’에게 전해지게 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의미가 애매모호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예언은 ‘요셉’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절하는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37:7, 9, 10; 42:6; 43:26, 28).
이런 배경을 전제로 축복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전형적인 “아브라함 언약”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땅과 후손과 축복”을 담고 있는 소위 삼 중적 언약의 요소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중 두 가지는 ‘야곱’을 향한 두 번째 축복 장면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지만(28:3-4), 이곳에서 이들 내용이 빠졌다는 사실은 이 축복이 원래 ‘야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에서’를 위한 것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만 축복의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는,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는 언급 정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두 언약의 내용을 면밀히 비교해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b)
어떤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 파악해 보고, 나름대로 화자의 의도를 파악해 봅시다.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이삭과 에서(30-40절)
네 번째 장면의 핵심은 “축복”에 있으며, 이제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얻어내어 축복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은 <창세기>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안타깝고, 처절하면서도, 애끓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마 이 장면만큼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두 주인공 ‘이삭’과 ‘에서’ 모두 분노와 허탈과 절망으로 치를 떨며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해당 장면을 찾아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즉 ‘이삭’의 축복은 그것이 아무리 속아서 한 것이라 할지라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이나 ‘에서’ 모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화자는 ‘에서’와 ‘야곱’의 운명이 어떻게 간발의 차이로 엇갈리고 있는지, ‘에서’가 어떻게 축복의 자리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지, 뛰어난 상황 묘사를 통해서 훌륭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30절)
‘에서’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도... ‘이삭’이 조금만 천천히 식사를 했더라도... 그러나 ‘에서’가 아버지 장막에 도착했을 때는 야곱’은 떠나고 난 뒤였고, 모든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설명은 더욱 독자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절)
그는 정녕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음식을 만드는 동안 기대와 흥분으로 그의 가슴은 얼마나 뛰고 있었을까? 음식을 들고 아버지 장막 안에 들어서며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음껏 축복해 달라고 흥얼대는 모습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 이미 빗나가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32절)
‘이삭’은 지금 ‘에서’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듯합니다. 이에 당황한 듯 ‘에서’는 그가 아들임을 밝히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자, ‘에서’라고 힘주어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삭’이 큰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33절)
‘이삭’의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상상해 보기 위해서 성경 기자들이 같은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고 있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곡식 자루에 돈을 넣은 것이 탄로되었을 때 이처럼 떨었으며(42:28),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현현에 역시 떨며 반응했습니다(출 19:16). 그러나 놀란 쪽은 ‘이삭’만이 아닙니다. 화자는 충격에 떨고 있는 ‘이삭’의 모습과 짝을 이루기 위함인지 ‘야곱’의 절규 내지 포효를 나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34절)
‘이삭’은 그가 직전에 물었던 질문,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가져온 자가 누구냐?”(33절)에 대해서 스스로 답하며, 왜 ‘에서’의 처절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35절). 이 문장에서 화자가 사용하고 있는 명사형 단어 “속임수”(המרמ, 미르마)는 “배반하다” 또는 “속이다”는 동사형 ‘라마’(המר)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약> 내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지만 가장 흥미롭게는 훗날 ‘야곱’ 자신에게 지금 그의 형이 당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지금 둘째 아들인 ‘야곱’이 첫째 아들 ‘에서’를 속여 그 축복을 강탈하고 있습니다만, 훗날 그 자신도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간절히 원했던 둘째 딸 ‘라헬’이 아니라 첫째 딸 ‘레아’를 첫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쓰라린 배신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29장). 심은 대로 거둔다는 화자의 암시일까요?
‘에서’의 절규는 계속됩니다. 이 절규는 히브리 식 두운법이나 유사 반복 등과 같은 절묘한 수사와 함께 더욱 처절하게 느껴집니다. 쌍을 이루고 있는 두운법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자 권(י, 베코라티)//내 축복(י, 비르카티); 또한 “취하다”(חקר, 라카흐)는 동사가 두 행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과 관련한 언어의 유희 또한 돋보이고 있음을 놓칠 수 없습니다: ‘야곱’(בקעי)은 흔히 “속이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과연 그의 이름이 “속이다”(בקע, 아카브)와 어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 <구약>에서 ‘야곱’의 행동과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곳은 이곳 외에 단 두 곳 뿐이기 때문입니다(렘 9:3; 호 12:4).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 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 권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6절)
만일 ‘이삭’이 그의 임종 시에 정상적인 유언을 한다면, 자기 두 아들 모두에게 돌아갈 축복의 몫이 있을 것이며, 지금 ‘에서’의 요구는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원래 ‘에서’만을 불러 모든 축복을 전수해 주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결과는 그가 원하던 대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야곱’에게 주었던 그 축복을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뿐입니다. 약간의 말 돌리기가 보이기는 하지만 ‘에서’에게는 불공정만 더할 뿐입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절)
그의 이 말 속에 ‘에서’를 위한 그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있다면 ‘야곱’이 누구이며, ‘야곱’을 위해서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 세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문장의 형식 또한 倒置형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삭’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에 ‘에서’는 다시 한 번 크게 소리 높여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 높여 우니(38절)
이에 대해 아버지 ‘이삭’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예언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39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39-40절)
그 내용은 철저하게 ‘야곱’에게 주었던 축복과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것들뿐입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의미하는 “땅의 기름짐이나 하늘의 이슬”은 이미 앞에서 ‘야곱’에게 주어졌던 것으로서(28절), ‘에서’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에서’의 운명은 ‘가인’이나 ‘이스마엘’처럼 이 땅 저 땅을 전전하는 방랑자가 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에돔’ 족속의 거주지가 된 사해(死海)의 남동쪽은 ‘가나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훨씬 메마르고 황량한 곳입니다. ‘에돔’ 족은 호전적이며 적대적인 세력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고통스러운 존재였습니다(민 20:18; 삼상 14:47; 왕상 11:14-16; 왕하 14:7-10; 오바드; 시 60:10-11). ‘다윗’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제국 속에 잠시 포함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세력을 얻어 독립을 했으며(왕하 8:20-22),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는 ‘유다’를 향해 복수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오바드; 시 137:7). “네가 메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는 예언도(39절)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 정도가 그나마 ‘에서’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저주받은 형”의 모티브를 대하고 있습니다(참고;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6. 리브가와 야곱(41-28:5)
여섯 번째 장면에서는 네 명의 주인공 모두가 등장하고 있지만, 주도적인 인물은 ‘리브가’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일을 꾸미고 계획했던 당사자이자 주인공이었습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창세기>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만, 다시 한 번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조종하여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성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야곱’을 잠시 피신시킴으로써 그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염려했던 바는 두 아들을 동시에 잃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역설적으로 이 염려는 결국에는 현실이 되어 돌아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브가’는 <족장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서 큰 기대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시작했습니다만, 이처럼 초라함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장면은 성난 ‘에서’가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41절)
‘에서’가 품고 있는 이 “미움”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상당히 지속적인 것입니다(참고, 50:15; 시 55:4; 욥 16:9; 30:21). 예컨대 ‘요셉’의 형들도 ‘요셉’이 이와 같은 복수심에 가득 찬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충동적이며 단순한 ‘에서’가 왜 복수를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대신해서 동생을 저주해 주기를 바랐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서’의 분노가 지금 극에 달해 있어 동생을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종족 살해로서, ‘에서’는 지금 두 번째 ‘가인’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서’의 결심과 관련해서 이어지는 화자의 해설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42절)
‘에서’가 심중에 한 말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 들었을까? 아니면 ‘에서’가 공공연히 그의 계획을 자랑하며 돌아다녔을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선지자적인 예견으로 아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을까? 화자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전해들은 내용이 다소 부정확했던지 또는 의도적인지는 몰라도 ‘야곱’을 불러 신속하게 대응토록 지시를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에서’의 생각을 읽었다면 이처럼 서둘러 ‘야곱’을 떠나보낼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은 이어집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43절)
그녀는 다시 한 번 간곡하게 그러나 명령조로 ‘야곱’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는 명령의 강도는 이전에 ‘야곱’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속이라고 명령할 때와 같습니다(8, 13절). 한편으로 아들에게 닥친 치명적인 위기를 알리면서, 또 한 편으로는 그가 피신할 곳은 다름 아닌 외삼촌 집이라고 말함으로써 혹시 집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들의 마음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외삼촌이라면 조카인 자기를 친절하게 보호해 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 있더라도 그 기간은 며칠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야곱’을 더욱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녀 자신의 희망 사항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44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내가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44-45절)
‘리브가’의 관심사는 또 있습니다. 즉 두 아들을 동시에 잃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에서’가 동생을 죽인다면, 한 아들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한 ‘에서’ 역시 저주를 받아 추방을 당하여 마치 ‘가인’처럼 떠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처럼 강력한 탄원이 담긴 명령, 즉 지금 이 위기를 피하여 외삼촌에게 가면 그가 환대해 줄 것이고, 또 그 기간도 며칠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약속에 대해서 ‘야곱’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전에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속일 때와는 다소 동떨어진 모습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어머니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 어머니가 사태를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음일까? ‘하란’으로 도망하고 싶지 않았음일까? 설령 가드라도 서둘러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음일까? 여전히 화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심정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야곱’이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설득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인지 남편 ‘이삭’을 부추겨 자신의 목적을 성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46절)
‘리브가’는 과연 설득과 음모의 대가입니다. 그녀의 진정한 의도는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에서’가 그의 동생을 죽이려 하니 지금 당장 ‘야곱’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남편에게 둘째 아들은 큰 의미가 없을뿐더러, 아내가 작은 아들만을 편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사실을 듣는다 해도 그냥 무시해 버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에 그녀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에서’의 아내들, 즉 ‘헷’ 족속 며느리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화자도 두 사람의 인생이 이들 때문에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26:35). ‘리브가’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혐오하기까지 되었다고 남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워하다”(ץןק, 쿠츠)는 “매우 싫어하다” 또는 “소름끼칠 정도로 싫어하다” 등의 아주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레 20:23; 민 21:5).
“그런데 만일 작은 아들마저 형의 전철을 밝는다면...” ‘리브가’의 말은 여기서 그칩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서’에 대한 비난이나 원망도 없습니다. 남편이 싫어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과연 원하는 바를 이루었습니까?
1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2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28:1-2)
그렇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불러 비난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축복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결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여자가 아니라 ‘하란’의 여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지시하는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하인을 ‘하란’으로 보내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24장).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아버지가 하인이 아니라 결혼 당사자인 아들을 직접 그 땅으로 보내고 있으며, 결혼의 상대를 단순히 ‘하란’ 여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라반’의 딸 중에서 취해야 한다는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지시에 따르면 ‘야곱’은 그의 외사촌과 결혼을 하게 되는 셈인데, 이런 결혼은 유전적으로나 윤리․도덕적인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금기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세계를 포함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외사촌과의 결혼은 그나마 이방인과의 결혼을 피하면서 동시에 친족 간의 결혼을 피해가는 절묘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듯합니다(Hamilton).
이 장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삭’이 ‘브두엘’과 ‘라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들을 ‘야곱’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장인이자 처남이 되는 사람들을 왜 이렇게 부르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자신과의 관계는 쏙 빼어버리고 ‘야곱’과의 관계만을 강조함으로써 무엇인가 그로 하여금 집을 떠날 결심을 굳히는데 필요한 용기와 도움을 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을 향한 축복의 내용도 이전에 ‘에서’에게 주려고 의도했던 축복의 내용과는(27:27-29) 현저히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삭’은 이 축복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3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4절)
사실상 축복의 내용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사용한 바 있는 어휘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12:2-3, 7; 13:15, 17; 15:7-8, 18; 17:1, 6, 8, 16, 20; 22:17; 24:7), ‘이삭’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전해진 바 있는 것입니다(26:3-4, 24).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처음으로 ‘야곱’도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로 지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야곱 이야기>에서 이 언약의 일부 내용들이 다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35:11-12; 48:3-4).
마침내 ‘야곱’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응하여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갑니다: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5절)
그러나 그가 급히 고향을 떠났다는 암시를 주는 언급이 없는지라, 이전에 그의 어머니가 급히 떠나라고 재촉할 때는 다소 머뭇거리며 불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리브가’는 이렇게 해서 ‘에서’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는데 일단 성공을 거둔 듯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라반’이 누구인지 다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앞으로 ‘야곱’이 앞으로 겪게 될 순탄치 않은 일생에 대해서 묘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7. 에서: 결혼(28:6-9)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에서’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동생이 도망을 갔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세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반응을 상당히 이례적으로 아주 장황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6-7절)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장황한 설명을 통해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야곱’의 축복과 그가 하란으로 가서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에서’가 파악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8절)
‘에서’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 왜 내가 그동안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아.”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일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무감각하게 살아왔는지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장자 권도 축복도 모두 동생에게 빼앗긴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늦었지만 그가 취할 수 있는 차선의 길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관심을 되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어머니의 생각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봅니다(26:35; 27:46). 다시 한 번 가족 구성원 사이에 있는 분열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관심을 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야곱’처럼 친족 중의 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인데, 그가 선택한 여자는 ‘이스마엘’의 딸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의 친 삼촌이므로, ‘마할렐’은 친 사촌이 되는 셈입니다. 이점이 외사촌과 결혼한 ‘야곱’의 경우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는 ‘에서’가 결혼한 ‘이스마엘’의 딸을 ‘바스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36:3). 따라서 두 기록이 같은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26:34에 의하면 ‘바스맛’을 ‘헷’ 족속 ‘엘론’의 딸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同名異人으로 보아야 할지 또는 ‘바스맛’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붙여준 일종의 애칭 내지는 별명으로 보아야 할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제 전승>으로 알려져 있는 26:34와 28:9의 본문에서는 ‘에서’의 아내로 ‘유딧’과 ‘바스맛’과 ‘마할랏’을 거명하고 있는 것에 비해, 36:2-3의 본문에서는 ‘아다’와 ‘오홀리바마’와 ‘바스맛’으로 소개하고 있어, 후자의 본문이 다른 전승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9절)
그러나 이 결혼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결혼으로 아버지의 축복을 돌려받았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축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 사람의 아내와(두 사람의 ‘가나안’ 여인과 한 사람의 ‘이스마엘’ 족 여인), 자신을 철저하게 배제시켜버린 세 사람의 가족(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 뿐입니다.
이제 독자들은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이처럼 ‘에서’의 결혼 이야기로 수미상관을 삼고 있는 화자의 의도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들과의 결혼이 부모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당연히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했을 모든 축복을 빼앗아 가게 한 원인이 되었다면, ‘이스마엘’의 딸과의 결혼은 빼앗긴 축복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자구책이었습니다만, 이미 때늦은 시도였음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교훈과 적용
한 회사의 경영권을 놓고 법정 공방을 벌이는 이야기는 오늘날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공방을 벌이고 있는 당사자가 부자(父子)간이거나 또는 형제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나 두산, 동아제약 등과 같은 굴지의 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어 신문 지상을 요란하게 장식한 바 있기도 합니다. 관련 당사자들은 최고의 변호사들을 총 동원하고, 이들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온갖 지략과 계책들을 동원하며 때로는 음모와 술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 승자가 누가 되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개 이런 일을 통해서 가족은 해체와 분열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평생 원수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피를 나눈 한 가족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만일 이들이 하나님의 가족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타협과 양보로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하려 할까?
<야곱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러한 기대는 환상이고 착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에 환멸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네 사람의 등장인물 즉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만들어 내는 이 한 편의 드라마가 어떻게 <창세기> 전체를 통해서 가장 안타깝고도 애처로운 이야기로 평가받게 되었는지 감상해 볼 일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해 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자식 사랑에 눈이 먼 어머니가 작은 아들과 공모하여 늙어 눈먼 남편을 속여 큰 아들에게 가야 할 그 모든 축복을 빼앗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장(家長) ‘이삭’과 큰 아들 ‘에서’는 불쌍하게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이 이처럼 안타깝고 애처롭다는 말은 단순히 버림받은 장자 ‘에서’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둘째 아들 ‘야곱’을 축복하시겠다고 <야곱 이야기>의 벽두부터 선언하셨으니, 결과만을 놓고 볼 때 하등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극적인 요소는 다른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언을 성취해 가시는 방법이나 그 과정에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야곱’이 장자 권과 그 모든 축복을 승계하는 것이 아무리 당연하다 치더라도 어떻게 이런 치사하고 야비한 방식으로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야곱을 축복하실 요량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도덕인가?
리브가와 야곱. 우리는 그 일차적인 책임을 맹목적인 어머니 ‘리브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의 분위기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주도해가는 것이 상례입니다만, ‘리브가’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 반대 방향으로 집안 분위기를 주도해 가고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불신의 쓴 뿌리가 모두 그녀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봅니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서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자기를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27:12). 두 형제들 사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한 집안에서 아버지는 장자를 향해서 “내 아들아”하며 친밀함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면 어머니는 작은 아들을 향해서 “내 아들아”하며 맞불을 놓고 있는 상황은 분명 정상적인 가정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가족이 아닐 수 없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탐욕스럽고, 속이기를 잘 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 싶어 하는 한 여인 ‘리브가’가 그 집안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Boice).
‘리브가’하면 떠올리게 되는 덕목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아름답고 활기가 넘쳤으며, 낯선 자들에게도 친절하고 자상하였으며, 단호한 결단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분명한 가치관과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큰 아들 ‘에서’가 이를 우습게 알고 내버리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작은 아들에게 대신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냄에 있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리브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더 나은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두 가지 옵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하나님의 축복은 그냥 ‘에서’에게로 갑니다. 바라지 않는 상황 전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꼼수를 써는 것인데, 이럴 경우 하나님의 계획은 원래대로 이루어지겠습니다만 선(善)을 이루기 위하여 악(惡)을 행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진퇴양난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리브가’가 처한 딜레마를 ‘라합’의 경우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라합’ 역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으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잘한 일이었으니, ‘리브가’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겠지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롬 3:7-8)
그러나 ‘리브가’의 딜레마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축복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리브가’가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상황 즉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야곱’은 생전에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큰 아들 ‘에서’와는 한 집안에 같이 살면서도 서로를 경계하고 혐오하면서 내내 원수처럼 살게 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머니로서의 권위는 물론 아내로서의 신뢰도 다 잃게 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편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에게도 적어도 한 가지는 칭찬받을 만한 자질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에서’가 우습게 여겼던 영적 축복의 의미를 익히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 비해서 크게 잘못한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애가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나이가 일흔 일곱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음모에 단순 가담한 정도가 아니라, 눈먼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으며, 가증스럽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를 했습니다. 뜻하지도 않았던 20년에 걸친 객지 생활이 ‘야곱’이 치러야 했던 대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 역시 외삼촌에게 철저하게 속고 이용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할 수 있으며, 또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고 싶을 때가 있겠습니다만, 악을 도모할 때 그 결과는 이처럼 혹독할 수 있다는 것이 화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관리를 죽인 것도 그 동기는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려 했다는 점에서 ‘리브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희망했던바 개혁이나 혁명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의 망명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생전에 “내 때가 아니다”고 자주 말씀하시면서 마치 그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신비한 “시간표”에 따라 행동하시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그 반대, 즉 신비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 즉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의 뜻을 알며 이룰 수 있다고 공언하는 자칭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이 시대에도 범람하여 교회와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대개 이런 자들일수록 자신의 영적 통찰력을 과시하며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위협합니다. 종말이나 귀신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부류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때”와 “뜻”을 다 알 수 있다고 공언하는 순간 그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입니다.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이야말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이삭과 에서. ‘리브가’와 ‘야곱’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거부했으니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자신들의 때에 맞춰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키려 했습니다. 화자도 이들이 이후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에서’는 그들이 받은 피해에 대한 무슨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들은 뺏고 빼앗기는 싸움에서 상대방의 반칙 플레이 때문에 억울하게 진 자들로서 동정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흑백 논리가 아니라 양비론으로 등장인물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삭’이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에서’의 결혼을 언급하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그가 과연 몇 번이나 결혼을 했으며, 아내는 몇이나 두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에서’는 다름 아닌 ‘가나안’ 여인을, 그것도 두 사람씩이나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이것이 이후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물론 ‘리브가’도 이방인 며느리들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와 고통을 받았습니다(26:35). ‘이삭’이 아들과 같은 나이에 결혼을 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수 천 킬로 떨어진 고향 ‘하란’까지 하인을 보내어 며느리를 맞이했으니 말입니다. ‘에서’ 역시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나 그는 결혼에 관한 가족의 전통을 무시하고 깨뜨려 버렸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돌아보면 도대체 그가 중요시 여기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있기나 한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들이 이처럼 가족의 귀한 전통을 깨고 멋대로 행동할 때 ‘이삭’은 아버지로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에서’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할 때 나이가 사십이었다는 언급이(26:34)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나이 사십에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전에 신부를 준비해 놓았습니다(25:20). 왜 ‘이삭’은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에서’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지 않았을까? 이는 책임회피가 아닌가? 그는 체질적으로 소극적이며 가나안 이웃 이방 족속들과 다툼보다는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질적인 축복과 하나님의 언약을 보장받았다고 화자는 오히려 그를 칭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의 덕목은 오히려 비난받고 있습니다. 화자의 침묵을 통해서 추측해 보건대, ‘이삭’은 온유와 관용이 지나쳐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듯 보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 역시 아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전통을 멋대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오면 모든 자식들을 불러 골고루 적절한 축복과 유언을 남겨주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인데도, 이를 무시하고 ‘야곱’은 배제시킨 채 ‘에서’만을 부릅니다. 그 동기도 참으로 한심한 것이, 큰 아들이 사냥해 온 고기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7:4). 참으로 유치한 아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늙어 앞이 보이지 않아 누가 누구인지조차도 제대로 구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입맛은 살아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내던지고 있는 것은 가족의 전통과 관습만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말초적 만족을 위하여 원칙을 버리고 있으며, 이기적 쾌락을 위하여 공평과 정의를 버리고 있으며, 일시적인 만족을 위하여 보다 긴 안목의 영적 가치를 내버리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육체적 감각은 마치 대낮처럼 예민하게 작동하며 살아 있으되, 영혼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그가 무시하며 저버리고 있는 것은 단순히 가족의 전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신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들 부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원하신다고 말입니다(25:23).
그러나 너무 오래 된 일이라 ‘이삭’이 혹시 잊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의 나이 거의 백 팔십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그러나 이 역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신통하게도 그의 아내 ‘리브가’가 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남편의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하나님의 준엄한 신탁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큰 아들을 축복하려 한 것은 노인의 고집으로 볼 수밖에는 없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재앙이 되기도 하는데, 판단이 흐려진다든지 고집불통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그랬나 봅니다. 그는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며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호 통재라!
‘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애초에 유업이고, 장자 권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고, 축복이고 간에 아예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가 지닌 사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25:32). 어쩌면 이렇게 부자(夫子)가 닮은꼴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고상하고 거룩한 가치보다는 말초적이며 순간적인 유익과 쾌락을 더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영적인 가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그가 가족의 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어쩌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원하지도 않았던 경쟁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어머니나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가만있어도 그 모든 축복들이 그냥 굴러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축복의 가치를 알고 아버지에게 찾아와 울부짖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 애처로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아버지여 내게도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15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5-17)
그는 단순히 축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되찾거나 나중에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영원히 날려버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값을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것을 영원히 갖지 못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에서 복음과 신화의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이야기이며, 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화는 우리를 단순히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감상하는 구경꾼으로 만들며 교훈을 주려는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로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참여를 주장한다. 유진 피터슨.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종태․양혜원 역: 한국기독학생 출판부(2006).
그렇습니다. 참여는 그 이야기를 듣는 자가 보여주는 동의이자 호응입니다. 이것은 강요나 협박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부과된 유일한 책임입니다. 결코 무겁고 힘든 짐이 아니었음에도 ‘에서’는 그 초청을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그랬습니다. 나중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크게 애통하며 울었으나, 눈물은 그저 눈물일 뿐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좌절과 원통함의 눈물이었지 진정한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이스마엘’의 딸들과 결혼함으로써, 부모의 마음을 되돌려 놓으려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에서’의 모습은 우습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두 번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복음의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하셨습니까? 적극적으로 이 일에 개입하여 잘못을 바로 잡거나 말리거나 하셨습니까? 놀랍게도 아무 것도 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셨을 뿐입니다. 화자는 그분의 무기력함을 마치 광고라도 하듯,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한 가족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편애와 무관심, 가족의 전통과 가치에 대한 경멸, 아집과 탐욕, 음모와 속임수. 이런 것들이 지금 이 가족을 그려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가족은 분열과 해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경>을 흐르는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보이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려함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치 여러 갈래의 하천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들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이,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계획을 세우든 결국에는 하나의 원대한 목적으로 귀결됨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이점은 ‘이삭’의 한탄스러운 고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실수로 작은 아들 ‘야곱’을 축복했던 그의 유언을 되돌리고 되 물릴 수 없느냐는 ‘에서’의 절규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족장이 임종 시 그 자식들에 대해서 들려주는 유언은 그 자체로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족장 이야기>가 확인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제는 ‘리브가’가 ‘에서’대신 ‘야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왜 그처럼 처절하게 매달렸는지, 그리고 ‘에서’가 왜 그토록 울며 매달렸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족장이 유언으로 전해주는 축복은 단순히 자신의 희망을 담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탁이자 예언인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야곱’의 출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신탁과 마찬가지로(25:23), ‘야곱’과 ‘에서’의 미래 관계에 대한 ‘이삭’의 예언도 동일한 효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에서’과 ‘야곱’은 각기 ‘에돔’과 ‘이스라엘’이 되어 나름대로의 정해진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큰 자인 ‘에서’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배회하는 유목민이 되어 ‘가나안’에서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게 될 작은 자인 ‘야곱’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유언은 단순히 두 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에서’가 아닌 ‘야곱’의 계열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 번째 에피소드를 통해서 보게 되는 바는 탐욕과 거짓과 당파로 분열되고 해체되고 있는 하나님의 가족과 그 구성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쓰레기 같은 자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 30)
연습과 토의
1. ‘리브가’와 ‘야곱’의 행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계획”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이삭’과 ‘에서’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이들은 진정 동정 받아 마땅한 억울한 피해자들입니까?
3. 하나님은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과연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상충되는 것입니까? 복음과 신화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