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5과
신의 아들과 사람의 딸
김태정 목사창세기 6:1-8약 36분 분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2)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이 결혼은 <신약>에서도 심판과 관련해서 원용(遠用)하고 있어, 그 해석을 놓고 역사적으로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과연 이 결혼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신화나 전설로 치부해 버릴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적절한 선에서 타협안을 모색할 것인가?”
이와 같은 논쟁의 배후에는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비합리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본문은 <창세기>의 첫 번째 ‘톨레돗’과 불가분 연장선상에 놓여있고, 그 해석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시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라멕’이 부른 “칼의 노래”와 함께 ‘아담’에서 ‘노아’까지 치달아 온 반역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반절정기를 대표적으로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시대를 종말의 징표로써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바 있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한 마디로 반 창조의 절정, 즉 어둠과 혼동과 공허로서 인류역사의 또 다른 반절정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종말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창조 이전의 블랙홀(black hall) 속으로 소멸되어 마땅했을 그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희망”(또는 “안식”)을 뜻하는 한 사람 ‘노아’로 말미암아, 두 번째 창조로 새로운 역사를 펼쳐가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선언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두 번째 ‘톨레돗’은 구조적으로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 아담의 계보(5:1-32)
(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6:1-4)
(3) 멸망의 예고(6:5-8)
여기서 다루게 될 내용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입니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두 번째 ‘톨레돗’이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것으로서, 세 단락 간의 내적 관계성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첫 번째 단락을 ‘계보’(genealogy)라는 문학적 형식을 띄고 있고, 나머지 두 단락은 ‘이야기’(narrative)로 이루어져 있어,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각 단락 사이의 상관관계는 뚜렷합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드라도, 일련의 중요한 단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7내지 6의 배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통일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아담); “야훼”; “엘로힘”; “아들들”; “딸들”; “짓다”(만들다); “창조하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에서 다루었던 중요한 주제들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락인 “아담의 계보”에서 등장은 하고 있으나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딸들”이 이곳 두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점을 이야기의 서두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6:1). 그러니까 이 절은 기능적으로 볼 때, 두 번째 단락에서는 딸들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또 한 가지, 세 번째 단락의 끝에 가서 소개하고 있는 ‘노아’에 관한 이야기는(6:8),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도(5:29-32) 그의 계보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의(6:5-8) 주된 내용은 세상의 멸망에 관한 예고로서, 문학적 기능으로 볼 때 그동안 창세기 전체의 내용을 총 정리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예고해주는 것입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대홍수’와 새로운 세상에 관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락의 마지막에(6:6-7),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으시고 창조한 것을 한탄한다” 등의 표현은 첫 번째 단락의 서두에서(5:1-2),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등의 표현과 함께 형식적으로 ‘톨레돗’ 전체를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면서, 이야기 전체의 통일성을 더해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의 형식은 다소 느슨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하나의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A여호와께서... 보시고(6:5)
B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6:6)
C 이르시되 내가 쓸어버리되...(6:7)
B' 이는 내가...한탄함이니라(6:7)
A'여호와께서...보시기에(6:8)
이 구조에 따르면 세 번째 단락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세상을 멸하시겠다는 선언에 있습니다(참고. 6:7). 그러나 화자는 곧바로 이어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고 말함으로써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심판과 은혜라는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비취고 있으며, 그 한 가운데 ‘노아’라는 이름이 삽입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화자는 절묘한 음성학적인 유희(遊戱)를 통해서 이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이곳에서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세 개의 단어를 노아와 연결시킴으로써 또 다른 방식으로 단락의 통일성을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1) ‘노아’(חנ; nh); (2) 근심하다(םחנ; naham); (3) 쓸어버리다(החמ; malah); (4) 은혜(ןח; hen). 즉 이들 모두는 동일한 자음(nh)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항상 ‘노아’라는 이름이 연상되도록 고안하고 있습니다. 이들 단어를 사용해서 이 단락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심
그들을 땅의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것을 계획하심
그에게 은혜를 입은 노아는 구원하심
그러니까 우리가 맛볼 수 있는 바는, 하나님의 후회와 한탄, 멸망과 심판, 그 모든 와중에서조차도 구원을 위한 그분의 은혜는 마치 옷의 물감처럼 은은히 베어 나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톨레돗’은 첫 번째 ‘톨레돗’인 <에덴 이야기>과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덴 이야기>에서 “사람”(아담)과 “땅”(아다마)의 상관관계를 숙지한 바 있습니다. 화자는 이 관계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회고하면서 새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6:1).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서는 이 관계가 여지없이 깨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고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6:7).
두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의 일부 문장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반전되는 상황들이 상호 연관을 짓고 있음을 봅니다: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3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창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노아’는 당시 ‘네피림’이라 불리는 고대 영웅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6:8).
마지막으로, 학자들은 자료비평적 연구를 통해서도 본문의 두 단락이 하나의 단위로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인 “아담의 계보”(5:1-32)가 <사제 문서>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두 단락은 동일한 <야훼 문서>에 속한다고 학자들 사이에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세분해 본다면 두 번째 단락(6:1-4)은 ‘야훼’ 기자가 기존의 전승을 거의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낸 것이라면, 세 번째 단락(6:5-8)은 홍수에 대한 ‘야훼’ 기자 자신의 신학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인 자료 비평적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최근에는 보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도서 1, 137-138쪽.
본문의 출처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창세기> 그 어느 곳보다 더 신화에 가까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과 신적 존재 사이의 결혼에 관한 것으로서, 이러한 소재는 고대 근동 신화나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이미 친숙한 것이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1. 신의 아들/사람의 딸(1-4절)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1절)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혹은 지상위임령)은 모든 인류를 향한 그분의 첫 번째 명령이자 동시에 약속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오랜 세월을 다루고 있는 창조에서 대 홍수까지의 기간 동안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왔습니다.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의 계보”에서 보듯이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류는 결혼과 생식의 활동을 통해서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화자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이 점을 재확인해 주고 있습니다(1절).
그런 점에서 제 1절은 지난 이야기를 요약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전망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점입니다. “아담의 계보”에서 보듯이(5:1-3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관심의 대상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모든 결혼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리와 분열은 타락 이후에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도 구분되고 구별되어야 할 것은 있었습니다. “창조의 노래”(창 1)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늘과 땅이 구분되고, 식물과 동물이 구분되며, 각 생명체는 그 종류대로 존재하면서 그 종류 내에서 섞이고 혼합되어야만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를 노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리와 구별을 통한 질서와 체계를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서막에서 셋째 날에 대한 해설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어지는 구절은 위험을 알리는 자명고(自鳴鼓)의 경고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2절)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덴 이야기>에서 ‘하와’가 저질렀던 타락의 모티브를 발견하게 됩니다. “보고, 취하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결혼을 승인하실 리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결혼을 통해서 태어나는 후손들까지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결혼을 용납하실 수 없는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이 과연 누구이기에 이 결혼이 안 된다는 것일까?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해석이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이들이 왕이나 통치자와 같은 영웅호걸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견해는 초기 ‘유대’교 ‘랍비’들 사이에서 비롯되어 점차 기독교 진영 내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왕들이나 또는 영웅들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결혼을 하여 자손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으며(마 22:29-30; 막 12:24-25; 눅 20:34-36),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 잘못을 천사들에게 물어야지 인간들에게 묻는다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구약>의 사사들을 “신적 존재” 내지는 “지존자의 아들” 등으로 부르고 있는가하면(시 82), ‘다윗’ 왕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삼하 7:14; 시 7:14; 시 2:7). 그렇다면 이들 지존자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당시 사회 풍습인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통한 마구잡이 식 억지 결혼의 죄악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에 관한 두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 즉 ‘셋’ 계열의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견해는 오랫동안 기독교 진영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이던 것이기도 합니다. ‘노아’가 ‘셋’의 후손이고, <성경>은 ‘노아’의 먼 후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출 4:22; 신 14:1). 그리고 이 견해에 따르면 천사와 사람의 결혼이나 출산 등과 같은 신화와도 같은 요소를 배제할 수 있다는 해석상의 이점도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내에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나 마귀 등과 같은 영적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오래되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으로서,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비합리적이고 원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 견해를 선호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존재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시 29:2; 82:6; 89:7; 욥 1:6; 2:1). 두 번째 이유는 본문에서 비교하고 있는 두 대상이 너무나 뚜렷하고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여기서 만일 “사람의 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달리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해석의 일관성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본문과 고대 근동 문학과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로써, ‘유가리트’ 문헌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은 항상 신적인 존재를 지칭하고 있고, 본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네 번째 이유는 이 결혼으로 태어난 “거인”들에 관한 언급 때문인데, 이들은 초자연적인 결합의 결과를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독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결합만을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새겨봄직 합니다. 물론 <신약>에서 결혼은 마땅히 믿는 사람들끼리 하라는 권면도 있기는 합니다만(고후 6:14; 고전 7:39),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우주적인 심판을 초래할 정도로 심각하거나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는 아니기 때문에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이 결혼은 그냥 일상적인 인간들 사이의 결혼은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신약>의 일부 구절들은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결혼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이런 입장을 지지해 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1)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19-20); (2)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4-5); (3)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6).
물론 현대인들에게 영적 존재와 인간의 결혼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더군다나 아이까지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靈)이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어 성육신하셨으며(요 1:18), 그것도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본문의 이야기를 단순히 전설이나 신화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모리스’(H. Morris) 박사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결혼이라는 개념이 초래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고 있기도 합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사람의 딸들 모두 단순한 인간들이긴 하지만,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 이들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악한 후손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언급도(6:3)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귀신들린 자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고 있고, ‘사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서(엡 6:12), 택함을 입은 성도들을 동반 타락시키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사실은(벧전 5:8) 이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문화 예술 곳곳에 영매나 주술, 컬트(cult)의식 등을 통해서 ‘사탄’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의 동역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결혼을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버금가는 죄악으로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영생을 누릴까 두려워 동산에서 좇아내신 바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3:22-23상). 불순종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만큼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심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절)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여기서는 Wenham과 Hamilton의 주석을 참고하였습니다(참고 도서 1, 3). 즉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들과도 함께 하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들을 떠나셔야 했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는 어두움과 혼돈과 무질서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태초의 창조 시에도 하나님의 영이 본격적인 창조 활동을 위해서 수면 위를 운행하실 때, 지구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창 1:2). 하나님께서 이처럼 불경스러운 혼합과 만남을 가증스럽게 여겨 이제 곧 온 세상을 다시 태초의 지구의 모습인 그 어두움과 혼돈과 무질서의 깊음 속으로 되돌려놓으실 생각을 하고 계시다고 화자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신과 사람의 결합으로 용사, 즉 거인들이 태어났습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4절)
이 구절 역시 전후 문맥으로 볼 때 해석상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선 ‘네피림’의 기원과 정체에 관한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 구절만으로 볼 때, ‘네피림’으로 불리는 거인들이 과연 신과 사람의 결혼으로 탄생한 존재들인지 아니면 이미 그 시대에 함께 살고 있었던 존재들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네피림’의 존재에 관해서는 <민수기>에서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데(민 13:33), 이스라엘의 첩자들이 ‘가나안’ 정탐을 떠났을 때 그 땅에서 보았다고 하는 자들로서, 얼마나 덩치가 컸으면 이들 첩자들이 자신들을 메뚜기로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칠십인 역>이나 <벌게이트>에서도 이들을 “거인”(gigantes)으로 부르면서, 천사들의 후손 정도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이들 거인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그가 혼자의 힘으로 낳은 아들 ‘우라노스’(하늘)와의 결합으로 탄생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네피림’ 역시 이러한 결혼의 결과로 탄생한 자들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피림’의 어원에 대해서는 명확치가 않습니다. 만약 <에스겔서> 32:20-28와 본문(창 6:1-4)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네피림’의 어원으로 “타락한 자”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겔서>에서도 본문에서처럼 용사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전투에서 패하여 음부에 거주하는 자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거인’(gigantes)들은 그들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미움을 받아 대지(가이아)의 몸 속 깊은 곳 ‘타르타르’(일종의 음부)에 갇힌 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4절에서 남은 문제는 또 있습니다. 즉 “당시에”와 “그 후에도”는 과연 언제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아마 이러한 잘못된 결혼이 성행하던(1-3절) 홍수 이전의 시대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그 후에도”입니다. 우선 가능한 해석으로는 출애굽 이후까지 이들 ‘네피림’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민 13:33), 홍수 이후의 시대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홍수 이후에도 계속 살고 있었고, 이러한 결혼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온 대홍수 이야기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유대’교에서는 홍수 이전까지 시기 즉 일종의 은혜의 시대로 국한하고 있습니다.
이들 후손들이 용사가 아니라 다른 존재로 가정한다 하더라도, 일단 사람의 형태를 취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육체를 지닌 존재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호흡(영)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들 역시 종국에는 한낱 한줌의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결혼으로 인하여 앞으로 어느 누구도 120 년 이상은 살지 못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본문만을 놓고 볼 때 인간의 수명이 120년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는 다가올 홍수를 전제로 할 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만 하더라도 수백 년을 살았고(창 11), 족장들도 이보다는 훨씬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예: 아브라함 175세; 이삭 180세; 야곱 147세). 한편 ‘노아’가 그의 세 아들 ‘함’과 ‘셈’과 ‘야벳’을 출산하였을 때 이미 500살이었고, 홍수 당시에는 600살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120 년이란 인간의 수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홍수 때까지의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명이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는 ‘아담’의 경우를 보더라도(3:16-19)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점차적으로 실현되는 특징을 지니므로, 여기서 말하는 인간 수명 120년도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인간의 최대 수명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홍수 이후부터 인간의 수명은 짧아지기 시작하는데, 이후 120살 넘게 산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이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야곱’ 이후 가장 오래 산 사람을 예로 든다면 ‘요셉’이 110살(창 50:26), ‘모세’가 120살(신 34:7), ‘여호수아’가 110살(수 24:29)이었으며, ‘아론’만이 유일하게 123세를 살았습니다(민 33:39).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인간들은 자초해서 수명을 더욱 단축시켜버렸습니다. ‘모세’의 한탄이 이런 절망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2. 홍수와 노아(5-8절)
두 번째 단락은 내용상 세 번째 ‘톨레돗’, 즉 <대홍수 이야기>의 서막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두 번째 ‘톨레돗’의 결론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한 이야기의 결말은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 주제를 암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단락 역시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 ‘노아’를 등장시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해서 상세하지는 않지만 복선 정도는 깔아주고 있습니다.
화자가 이 단락에서 전하려고 하는 신학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먼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5-7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흔히 ‘칼빈’의 5대 교리 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는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입니다(5절하).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predestination)에 관한 ‘칼빈’의 5대 교리는 그 첫 글자를 따서 흔히 TULIP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Total depravity(인간의 전적 타락); (2) Unconditional predestination(무조건적 예정); (3) Liminted atonement(제한 속죄); (4) Irresi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5) Perseverance(성도의 견인).
당시 인간과 시대적 상황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봅시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5절). 밑줄 친 부분은 강조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타락하였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생각과 행동이 악한 것뿐이었으며,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개전(改悛)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더 이상 어두워질 수 없는 반 창조의 절정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는 인간과 그가 살던 시대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반응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행동하시기 전에 먼저 바라보시되, 한 가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동안 사람들을 지켜보시면서 말할 수 없는 근심과 후회로 가슴을 쓸어내리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상심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을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기막힌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조는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서 그들의 아내로 취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보시고 악하여 내버리려고 하십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음을 아시자, 절망의 끝에 서서 하나님은 한 가지 결정을 내리십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무슨 조처를 취하시든 그 동기는 처음부터 인간의 “죄”와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유사한 홍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나 <아트라시스 서사시>(Atrahasis Epic) 등과 같은 근동신화와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신들은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이나 인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고 후회하셨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6-7절). 이러한 언급은 분명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성경>의 다른 언급과는 상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그러나 이곳에서 화자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의 섭리나 속성에 대한 조직신학을 전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현재 기분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하여 같은 단어가 다른 곳에서 쓰이고 있는 예를 찾아보는 것이 유익할 듯싶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 그의 형제들이 드러냈던 분노가 바로 이것이었고(34:7),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느꼈던 감정이나(삼상 20:34),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보였던 감정 모두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삼하 19:3).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내가 느끼는 감정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시 78:40; 사 63:10).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들도 함께 땅 위에서 쓸어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은 그분의 후회와 분노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상실해버린 첫 번째 창조는 이제 바야흐로 다시 이전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의 심연(深淵)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재앙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큰 재앙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우며, 세상을 이보다 더 어둡게 그리기도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한 줄기 섬광이 어두움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마무리 선언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절망(絶望)과 희망(希望)은 분명 상반되는 의미를 지니기 있기는 해도, 각 단어 속에는 “바람”(望)이라는 동일한 글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한탄”과 “쓸어버리겠다”는 선언 가운데서도 “희망”을 뜻하는 ‘노아’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단어들의 음성학적 유사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노아’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선언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은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노아가 하나님의 총애를 입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서 이런 특혜를 누렸던 사람은 ‘노아’ 외에 ‘모세’가 유일합니다(출 33:17). 이 말은 ‘노아’는 ‘모세’와 함께 가장 위대한 성자의 반열에 오른 자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 두 번째 ‘아담’ ‘노아’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2005년 6월 캐나다 의회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동성애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는 법을 통과시킨 바 있습니다. 이날 그 나라 모든 신문들은 이 소식을 일면 톱기사로 비교적 담담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보도하긴 했으나, 대부분 시대의 요구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일부 보수 기독 단체들만 극렬한 항의를 한 정도였습니다. 같은 해 9월 미국의 ‘뉴올리언스’에서는 연례 동성애자 축제집회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이 축제는 매년 일주일 정도 계속되는데, 그 도시의 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시장까지 나와서 축사를 하겠습니까. 행사 기간 동안 참석자들은 나체로 시내를 활보하면서 주최 측이 마련한 갖가지 행사를 돌아보며 즐기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태평성대를 누린다는 두 나라의 현재 모습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이런 태평성대가 계속될까요?
대홍수 이전의 시대는 어떠했을까요?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기간은 인류 역사의 절정이었고 그야말로 태평성대의 시대였습니다. 물질적인 번영과 함께 과학과 문화는 지속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만 갔습니다. ‘아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후손들이 제한된 수명을 누리기는 했습니다만, 여전히 대부분의 인간들은 짧게는 700년, 길게는 900년 이상을 살았으며, 어떤 이는 아예 죽지도 않고 하나님께 바로 불려가기도 했습니다(창 5:1-32).
화자는 이것을 단 한 구절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6:1). 화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창세기> 1장의 모티브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창 1:28).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번영과 태평성대는 다름 아닌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번창하고 충만해 간 것은 하나님의 축복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인류의 역사는 동시에 반 절정(反 絶頂)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흔히 오늘날을 가리켜 ‘탈현대화’(postmodernization)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탈현대화란 한 마디로 기존의 질서와 체계와 관습 등을 모두 거부하고 부정하며 해체하자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탈현대화가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실은 까마득한 홍수 이전부터 이미 인간의 영혼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따르면 무슨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다원화), 있다 해도 상대적일 뿐이며(상대화), 하나님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는 있지도 않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뿐입니다(세속화).
창조의 질서만 하드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가 두 단계에 걸쳐서 진행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창조에 이은 구분과 구별화가 그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만드시고, 만드신 것을 나누고 구별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정체성과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낮과 밤; 해와 달과 별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물고기와 땅의 짐승들; 식물과 동물; 각 종류대로의 짐승들; 여섯 날과 일곱째 날; 남자와 여자; 등등.
이런 구분이 없었을 때 지구는 혼돈과 어둠과 공허로 뒤덮여 있었습니다(창 1:2). ‘아담’이 타락한 배경 뒤에도 이런 애매모호함이 있었습니다. 즉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동산 내의 다른 열매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했습니다. 이 나무는 매일 ‘아담’이나 ‘하와’로 하여금 그들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일종의 표지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구분을 항상 생각하며 지키는 한에 있어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은 항상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특별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냥 다른 열매와 함께 따 먹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흙으로부터 나왔지만 흙과는 완전히 구분된 존재로 살 수 있었음에도, 다시 그 흙으로 되돌아가 뒤섞이게 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오경>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창조의 질서, 즉 구분과 분리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레 19:1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신 22:9)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신 22:10)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11)
오늘날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유전자 조작이나 혼합 등을 통한 품종 개량이나 신품종 개발 또는 생명체 복제 등에 대해서 무턱대고 찬사와 경의를 표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는 이와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이 구절과 함께 <성경>은 결혼에 대해서 세 가지 분명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즉 결혼은 반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성 간에, 그리고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푸단’ 대학에서 “동성애 연구” 과목을 2005년 가을 학기에 처음으로 개설하였는데, 강의실이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내에서 동성애자들의 수는 500만에서 천만을 헤아린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일보, 2005년 9월 26일자, A18면.
얼마 전 로마 교황청은 동성애자들에게는 사제권을 주지 않겠다고 공표한 바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동성애자 사제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결정까지 내리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상황은 개신교 진영이라고 해서 나을 것도 없습니다. 미국이나 서구에서 동성애자 목회자들이 진보와 발전, 또는 사랑과 인권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그들의 권익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마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주장까지는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종(種)과 종이 서로 섞일 수 없다면 사람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결혼이나 결합은 반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래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도 짐승과의 결합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레 18:23)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레 20:15)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6)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1)
이런 일들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 지방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짐승과 사람의 결합으로 과연 어떤 존재가 태어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람과 짐승의 결합이 가증스럽고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또 다른 형태의 가증스러운 결혼이 있습니다.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과 사람의 결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6:2). 그리고 이들 사이에 괴물과도 같은 거인들이 탄생했다고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4).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들은 한계와 구분을 무시하였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후손들 역시 <창세기> 1장에서 규정한 바 없는 새로운 종(種)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잡종(雜種) 내지는 변종(變種)입니다. <창세기>는 이들의 출현에 대해서 예고한 바도 없고, 그 역할에 대해서 규정해 놓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만일 영생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셨던 것도 이들이 영생하는 열매를 따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용사들이 인간이든, 천사이든, 또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든, 영생을 누리게 된다면 ‘사탄’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죽게 될 운명이지만, 이들은 죽지도 않는 ‘가인’의 후예가 되어 ‘사탄’과 함께 영원히 반역의 전쟁을 수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2. 홍수와 노아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실 것인가? 언제까지 그런 상태를 내버려 두실 것인가? ‘뉴올리언스’에서 개최하기로 되어있었던 동성애자 축제는 행사 이틀 전에 노아 홍수를 방불케 하는 허리케인 ‘카탈리나’가 와서 온 도시를 완전히 집어삼켜버리는 통에 취소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인지는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타락한 이 시대를 향한 경고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처형되시기 이틀 전에 제자들이 그분께 멸망의 징조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마 24:3), 그분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노아’ 당시의 시대를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이 얼마나 역설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번영과 태평을 노래하던 ‘노아’의 시대가 그분의 한탄과 후회의 대상이었다니 말입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절). 심사가 뒤틀려도 아주 단단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달라 후회하시거나 변심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에도(삼상 15:29), 이곳에서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지금 우리의 화자에게는 그런 것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스 신들의 특징은 인간과 그 성정(性情)이 똑 같다는 점입니다. 변덕스럽고, 질투심이 많으며,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크기가 꼭 같아서 충분히 자신을 덮을 수 있는 하늘, 즉 ‘우라노스’를 탄생시키고, 그와 결합하여 열 두 명의 거인 ‘기간테스’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우라노스’는 이들 자식들이 너무 크고 흉측스럽게 생겨 미워한 나머지 이들 모두를 지하 음부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가족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생기고, 결국에는 죽고 죽이는 신들의 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야훼’ 하나님도 ‘우라노스’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신과 사람의 결혼으로 태어난 용사들이 거들먹거리며 땅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이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그것도 부족하여 이들 모두를 땅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신 것일까? 얼마나 원한이 깊었으면 아무 죄 없는 짐승들마저 다 없애버려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7절).
드러난 계획 만으로만 볼 때 하나님은 ‘우라노스’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렇게 하시겠다는 것은 무슨 질투심이나, 일시적인 충동이나, 또는 변덕스러움 때문이 아니라고 화자는 말합니다. 그분은 오래 동안 사람들을 지켜보셨고, 심사숙고 하셨으며,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음을 아셨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큰 후회와 근심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5-7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상심이 얼마나 크신지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을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이 얼마나 기막힌 대조입니까! 대조는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서 그들의 아내로 취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보시고 악하여 내버리려고 하십니다!
그분이 이처럼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게 되는 동기는 다름 아닌 인간의 “죄”때문이라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한 인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타락시킨 상태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는 것이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 3:13-15)
그야말로 개전(改悛)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결정, 즉 그분이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는 결정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창세기> 1장을 돌아보게 합니다.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상실해버린 첫 번째 창조는 이제 바야흐로 다시 이전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의 심연(深淵)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질 것이 없을 정도로 정점을 향해서 올라가던 그 시대는, 역설적으로 그보다 더 어두운 색으로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의 절정을 향해 내려가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결코 완전한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노아’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6:8). 이 이름은 하나님의 한탄이나, 후회나, 세상을 쓸어버리겠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도 마치 배경 음악이나 메아리처럼 들려오던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절망(切望)과 희망(希望)은 분명 상반되는 의미를 지니기 있기는 해도, 각 단어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바람”(望)이라는 동일한 글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등장하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이 은혜는 ‘노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같은 특혜를 누렸던 사람은 ‘노아’ 외에 ‘모세’가 유일한 인물입니다(출 33:17). 이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멸하신 후, 두 번째 ‘아담’ ‘노아’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입니다.
나는 과연 이 시대에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까? 모두가 쓸모없고, 하찮으며, 시시하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늘 품는 생각이라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뿐이며, 스스로 보기에 선하다고 느끼는 바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나는 과연 말과 경주하듯 탁월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있다면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마 22:21)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노아’처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신 바 있습니다. 내가 구별해야 하는 삶의 영역을 곰곰이 따져볼 시점입니다.
토의 문제
1.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무엇입니까? 본문이 앞선 이야기에 대한 회고와 이어지는 노아 대홍수 이야기에 대한 예고 내지는 전망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2. 본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봅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본문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화자의 의도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신의 아들들”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정도의 견해가 있다고 했는데, 각각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그리고 가장 타당한 해석은 어떤 견해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시다.
4. “신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왜 이것이 가증스러운 것입니까?
5. ‘라멕’이 그의 아들 ‘노아’에게 걸었던 희망은 과연 이루어졌습니까?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