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1과
아브라함을 부르심
김태정 목사창세기 11:27-12:9약 34분 분량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11:27)
문학과 역사
<아브라함 순환, Abraham cycle>은 <창세기>에서 여섯 번째의 ‘톨레돗’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11:27)
이 구절은 분명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기는 하나, 과연 <아브라함 이야기>의 시작으로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흔히들 12장부터 <아브라함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가족의 배경을 다루고 있는 “데라의 족보”(11:27-32)가 없이는 ‘아브라함’의 고향이나 기타 가족관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아브라함’의 전체 여정(旅程)도 결국 ‘갈대아 우르’(11:28)에서 시작하여, ‘하란’을 거쳐(11:31; 12:4), ‘가나안’(12:5)에 정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북으로는 ‘세겜’에서부터 ‘베델’을 거쳐 남으로는 ‘네게브’에 이르고 있습니다(12:6, 8, 9). 이렇게 볼 때 ‘데라’의 계보 역시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 포함시킴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데라의’ 계보가 없이는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 출처가 애매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단락과 구조. 다만 <아브라함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한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데라의 족보”(11:27-32)와 “아브라함의 소명”(12:1-9)을 각각 <아브라함 이야기>의 처음과 두 번째 에피소드로 보기도 하지만, 이 두 내용을 함께 하나의 단락으로 취급하여 전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하나의 에피소드로 구분이 가능해 집니다:
(1) 가족의 배경(11:27-32)
(2) 하나님의 약속(12:1-9)
앞에서도 밝혔듯이 각 <족장 이야기>는 해당 족장의 아버지의 이름을 거명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순환은 ‘데라’가 열고 있습니다. 본문은 전체 <아브라함 이야기>의 서막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두 가지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을 통해서 전체 이야기의 핵심 주제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각 단락이 그 내용에 있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시적 유사병행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 단락은 각각 주인공의 여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11:31; 12:5), 첫 번째 단락에서 두 인물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11:28, 32),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두 번의 계시와 그에 따른 두 번의 대응과 여행을 다루고 있습니다(12:1-9).
첫 번째 단락은 “데라의 족보”를 언급함으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참고로 <노아 이야기>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6:8)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족장 이야기인 <야곱 이야기>도 그의 아버지 ‘이삭’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고(25:19), <요셉 이야기>도 그의 아버지 ‘야곱’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서술 방식은 <창세기> 특유의 서술 기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37:2).
이왕 <데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왜 그렇게 일찍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칠십 세에 세 아들-‘아브라함’, ‘나홀’, ‘하란’-을 낳고 이백 오세까지 살았으니 <아브라함 이야기>가 한참 진행된 후에 기록해도 될 터인데,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32). 이것은 <창세기>를 기록하는 또 다른 특징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나 인물을 먼저 기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마엘’의 가족사가 <이삭 이야기>보다 앞서서 등장하고 있고, ‘에서’의 가족사가 <야곱 이야기>에 앞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25:12, 19; 36:1; 37:2). ‘데라’ 역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뚜렷한 역할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죽음을 미리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가나안’이고,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서 떠나기는 했지만 ‘하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
첫 번째 단락이 두 번째 단락을 위한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다면, ‘아브라함’의 여행을 다루고 있는 두 번째 단락은 인류 역사상 또 다른 큰 전환점을 이루는 이야기가 됩니다(혹자는 ‘아브라함’을 ‘아담’과 ‘노아’에 이은 세 번째 ‘아담’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여행은 계시와 대응이라는 주제 하에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각 주제는 다시 그 내용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계시: 하나님(1-3절)
명령(1절)
약속 1(2절)
약속 2(3절)
2) 반응: 아브라함(4-9절)
여행 1(4-5절)
여행 2(6-7절)
여행 3(8-9절)
두 단락은 각각 “계시와 대응” 또는 “명령과 순종”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걸맞게 그 형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세심한 배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로써, 1-4절 사이의 문장 형식이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Wenham, 270쪽.
두 단락은 각기 동일한 동사 “떠나다”(1, 4절)로 시작하고 있으며, 유사한 단어가 마지막 구절에서 마치 ‘수미상관’을 이루듯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4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9절)
언어의 유희(遊戱) 또한 놓칠 수 없습니다. 예로써,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축복(ךרב, 바라크)은 주인공 ‘아브람’(םרבא)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숫자 일곱의 모티브도 예외 없이 등장하고 있는데,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일곱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2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3절)
일곱 절로 된 하나님의 축복은 비단 ‘아브람’ 뿐만 아니라, ‘이삭’과(26:3-4) ‘야곱’에게도(27:28-29)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표현 방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로써, ‘바울’은 성도의 연합을 강조하면서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이며, 주도 한 분이시라”고 일곱 번에 걸쳐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엡 4:4-6).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구절에서 축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창세기(1)> 에서 다섯 번에 걸친 하나님의 저주를 의식적으로 상쇄하려는 화자의 의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3:14, 17; 4:11; 5:29; 9:25.
두 번째 단락을 통해서 드러나는 주제는 결국 <족장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핵심 단어와 주제를 요약해 봅시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 외에도 전승이나 자료와 관련해서 구분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가 혼재해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으로서,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참고: <창세기 1부-문학과 역사>
(1) 사제(P) 자료: 11:27, 31-32; 12:4절하-5
(2) 야훼(J) 자료: 11:28-30; 12:1-4절상, 6-9
<사제 자료>에는 특유의 어휘들이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족보나 연대기를 다루는 방식들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제 특유의 용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계(תךלות); (2) 낳다(ךילוה); (3) ‘가나안’ 땅. <야훼 자료>에서는 당연히 특유의 이름 ‘야훼’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2:1, 4, 7, 8). 그러나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가 늘 그러하듯이 연구의 결론이 단정적일 수 없으며, 본문의 최종 편집에 대한 결론 역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구성하는 두 단락 역시 하나의 이야기로서 거의 완벽할 정도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비평적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의 전승과 후대의 삽입이나 신학적 재해석 등과 같은 편집 작업 사이에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배타성이 명확하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연구의 결론은 더욱 애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오랜 <족장 이야기>를 사용하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함으로써, 이것이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가족의 배경(11:27-32)
화자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가족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자 합니다. 처음 세 절은 ‘데라’의 가족에 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27-29절).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세 인물, ‘아브라함’, ‘사라’, ‘롯’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11:27-29)

여기서 ‘사라’가 아이가 없다는 점도 알게 되는데, 이 역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30절).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25년 후)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그 동안 이 문제로 ‘아브라함’은 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하란’의 때 이른 죽음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31-32절)
그는 자신의 아버지 ‘데라’보다 앞서서 죽게 되는데, 그가 죽을 때 남긴 세 자녀, ‘밀가’, ‘이스가’, ‘롯’은 추측컨대 ‘데라’ 앞으로 입양이 되었을 것이며, ‘데라’가 죽은 후에는 ‘아브라함’이 입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중 ‘밀가’는 그녀의 삼촌 ‘나홀’과 결혼을 하지만, ‘롯’은 계속해서 ‘아브라함’ 집에 남아 가나안을 향해 떠날 때 동행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근동지방의 관습으로 볼 때, 조카 ‘롯’이야말로 ‘아브라함’의 법적인 아들이자 상속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참고 14장). 이렇게 볼 때 ‘하란’의 죽음에 관한 언급은 바로 이 자식의 문제에 대한 복선이 되는 셈입니다.
‘데라’의 가족이 살았다는 장소, ‘갈대아 우르’ 역시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이곳은 아마도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우르파’로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서, 주전 3000 년경부터 이미 근동 사회의 정치나 종교의 중심지였을 추정됩니다. ‘아브라함’ 당시 이곳은 ‘아모리’ 족속의 근거지였던 것 같은데 그는 이곳을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Wenham, 272-273쪽.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그의 이복동생으로(20:12), 아마도 ‘데라’의 다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듯합니다. 이러한 결혼은 분명 <구약>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만(레 18:9; 20:17; 신 27:22), 족장시대 당시에는 아직 근친결혼에 관한 규례가 없었던 듯합니다. 두 자매와 동시에 결혼하는 것도 <구약>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만(레 18:18), ‘야곱’은 ‘레아’와 ‘라헬’ 모두와 결혼했습니다.
‘사래’의 이름이 나중에 ‘사라’로 바뀝니다만, 그 어원은 둘 다 공주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한 편 ‘밀가’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2. 소명(12:1-9)
1) 계시(1-3절). 두 번째 단락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로서, 앞에서 보았듯이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계시(1-3절); (2) ‘아브라함’의 반응(순종)(4-9절). 이 두 관계는 1절과 4절에서 나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4절)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이어 일련의 약속들이 두 절에서 뒤따르고 있습니다: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2-3절)
불과 한 절로 이루어진 짧은 하나님의 명령과, 일곱 절로 이루어진 긴 약속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런 대조를 통해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 안에 이미 그 땅에 대한 약속이 암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 관심사임이 처음부터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말씀은 “떠나라”는 명령입니다(1절).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여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와 같이, 이 명령은 믿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떠나라”는 명령 속에는 그가 가야할 미지의 땅을 위하여 지금 누리며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소유와 지위와 관계 등을 모두 포기해아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문제와 관련해서 동일한 믿음의 시험을 받을 때도 역시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22:1-2), 이 명령은 분명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혹자가 주장하듯이 무슨 위기나 돌발 상황이 생겼을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데라’는 고향을 떠나 그냥 ‘하란’에 눌러앉아 살았지만(11:31-32), 유독 ‘아브라함’만이 ‘가나안’을 항해 나아갔다는 사실은 상기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삭’이나 ‘야곱’이 모두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고향 ‘하란’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족장들의 심리적인 본거지는 ‘가나안’이라기보다는 ‘메소포타미아’임이 분명합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400년 후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예표(豫表)해 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세 번에 걸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마치 음악에서의 crescendo를 대하는 듯합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혼자서) 너의 본토 (너의) 친척 (너의) 아비 집을 떠나”(1절). 이와 같은 수사적 기법이 주는 효과는 무엇일까?
이 단순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따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장소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보통 장소가 아니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장소이자, 소유이며, 최후의 보루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어지는 일련의 약속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중심 주제로 발전하게 될 일곱 절로 이루어진 이 약속은 순종에 따른 희생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언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절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는 일방적인 언약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태초에 ‘아담’과 맺은 언약(1:28), 그리고 ‘노아’와 맺은 언약(9:1)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을 세 번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연찮게도 이 세 번의 언약 모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밝고도 긍정적인 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축복”(ךרב)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만 동사와 명사로 형태로 다섯 차례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단어가 언약의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12:2-3).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88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며, <구약>의 다른 책에서 310번이 등장합니다. <구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건강”, “장수”, “재산”, “자녀”, “평화”, 등입니다. 오늘날 흔히 “행운” 또는 “성공적인 삶”으로 부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그 자체가 모든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락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언약은 다시 네 개의 다른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봅니다. 즉 언약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1) 큰 나라; (2) 큰 이름; (3) 복의 근원; (4) 하나님의 보호. 참고로 <개역성경>에는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로 되어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내가 너로 큰 국가를 이루겠다”입니다.
내가 너를 큰 국가로 만들겠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국가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은 이어지는 <족장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표현을 조금씩 달리한 채,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18:18; 17:20; 21:18; 46:3). 그리고 먼 훗날 ‘모세’에게도 이와 거의 동일한 약속을 하시는데, 이때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세’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니다(출 32:10). 물론 이러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진노하신 가운데 ‘모세’에게 말하신 것으로, ‘모세’의 중보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취소하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듣고 있는 이 언약은 사실 당시 모든 왕들의 한결같은 소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삼하 7:9; 시 72:17). 따라서 독자들은 이곳에서 왕으로서의 ‘아브라함’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의 세 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으로 볼 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전체적으로 보면 이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으며. 여기서 이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길은 없습니다만, 하나님으로부터 큰 국가를 이루겠다는 약속을 받은 자체가 하나의 큰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큰 국가가 한 두 사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따라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이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큰 이름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관련하여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구약>에서 위대한 이름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하여 쓰이고 있습니다(수 7:9; 삼상 12:22; 시 76:2; 말 1:11). 그러나 유명해지고 싶다는 왕들의 욕망은 ‘다윗’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대 왕들의 비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 이 말씀을 첫 번째 명령, “떠나라”에 이은 두 번째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두 명령은 원인과 결과라는 상관관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문법적인 형태와 해석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구구한 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예로 이 문장이 명령문이 아니라, 보다 완곡한 이인칭 완료형 동사로써,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You shall be a blessing)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란’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면, 그는 복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떠난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언약의 내용을 일곱 구절로 나누었을 때,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또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3절과 연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위대한 국가, 큰 명성,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브라함’ 혼자에게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혼자서 하나님의 축복을 고스란히 누리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는 명령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단순히 축복의 최종 수혜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축복이라는 샘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절의 의미는 아주 명쾌해 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좋을 것인지 아닌지는,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를 멀리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대하실 것이고, 그를 가까이 하고 축복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고 가깝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가까운 미래에 곧 성취될 것이었습니다(참고: 창 12:10-20).
그렇다면 이 모든 관계가 순전히 ‘아브라함’이 아닌 타인들의 태도에 따라 이루어질 문제인가?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축복과 동시에 책임 또한 져야 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12, 20장).
2) 순종(4-9절).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관한 좋은 설교 한 편을 소개하자면 ‘위어즈비’ 목사님의 <Be Series: Be Obedient>가 있습니다(생명의 말씀 사). 지나치게 알레고리적인 부분도 없지 않으나 좋은 참고는 될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4절)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다는 언급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기 60년 전에 그를 떠났다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11:26, 32). 다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족에 대한 헌신이나 충성보다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암시입니다. 혹자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아주 흥미로운 대칭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한 75년
아버지나 아들 없이 지낸 25년
아들과 함께 한 75년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난다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첫 번째 단락에서 그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을 향하여 떠났다는 이야기와 일종의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대조를 이루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즉 그의 아비는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기는 했지만, 끝까지 가지는 못하고 ‘하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죽었으나, ‘아브라함’은 목적지까지 도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데리고 떠났지만, ‘아브라함’은 가축을 포함한 모든 소유와 하인들까지 다 데리고 떠났습니다:
5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5-6절)
그가 가진 이 모든 소유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또는 ‘하란’에 있을 동안 그가 모은 것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앞으로 그가 방문하는 지역마다 추가로 획득하게 될 재산을 예고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12:16; 20:14). 앞 구절(4절)에 이어 이곳에서도 조카 ‘롯’이 함께 동행 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아들이 없이 죽는다면 당연히 이 사람이 법적인 상속자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땅에 들어온 후, ‘아브라함’이 최종적으로 정착하기 위하여 거쳐 간 경로를 일별해 보면, ‘다마스커스’ 남쪽으로부터 ‘갈릴리’ 호수를 지나, ‘세겜’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겜’은 그 땅의 한 한 가운데 위치한 곳으로서(수 20:7),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아주 중요한 장소로 부각됩니다.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는 어려우나, ‘모레’가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선생”으로서, 아마도 신탁(神託)을 받았던 장소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에서도 이 나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삿 9:37). 돌과 나무가 근동 신화에서 종종 제사 의식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으며, <구약>의 몇몇 책에서도 이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창 28:18-22; 35:8; 수 24:26; 삿 6:11, 19-20), 분명 거룩한 제의와 관련되어 있었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근동 지역에서 이런 성스러운 나무가 존재한다고 합니다(오래 된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풍습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 알려져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아브라함’이 도착한 그곳은 허허벌판이나, 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에덴’동산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이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가나안 백성이 살고 있었다”는 언급입니다(6절). 기대와 긴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언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 땅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법적 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암시입니다. 그가 그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가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7절상)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면 그만일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족장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참고: 17:1; 18:1; 26:2, 24; 35:9; 48:3). 하나님의 ‘현현’(顯現)은 앞으로 ‘시내’ 산이나 장막에서 나타나실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출 3:2, 16; 16:10; 레 9:4). 땅과 후손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생생하게 재확인시켜주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은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순례자에서 개척자 또는 건설자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7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7하-9절)
그가 건설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한 ‘바벨’탑이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장막과 제단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홍수 이후 ‘노아’의 행동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8:20), 이후 그의 여정에서나, <창세기>의 나머지 족장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전형이 되는 것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여러 곳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그의 행동은 훗날 후손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다윗’ 왕국의 건설을 예견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거쳐 간 곳은 ‘세겜’에서 ‘베델’을 거쳐 남쪽 ‘느게브’까지 인데, 훗날 ‘야곱’이 그대로 이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더 훗날에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 경로를 따라 정복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후대 화자의 “현재화 작업”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화 작업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한 바 있습니다(참고: <가인과 아벨 이야기>).
교훈과 적용
부르심. ‘바벨’탑 사건이후 오래 동안 잠잠하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역사의 무대 위로 다시 나타나십니다. 관심 1호의 대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왜 하필 ‘아브라함’인지 신비한 섭리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냥 숨어계시지 않고 다시 나타나신 것일까? 온 인류가 ‘바벨’탑 사건 이후 그냥 뿔뿔이 흩어져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이들 질문에 대해서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질문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가?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을 때,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 곳에 살고 있을 때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상).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하신 첫 말씀은 “그곳을 떠나라”입니다(1절).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해서 도무지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어디를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가 지금 살고 있는 곳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그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노아’ 역시 계속해서 살아야 할 곳은 배 안이 아니라 밖입니다.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산 정상에서 기념비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산(下山)해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가 버리고 떠나보내야 할 것은 단순히 장소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점을 화자는 일종의 문학적 crescendo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는 (혼자서) (너의) 본토 (너의) 친척 (너의) 아비 집을 떠나”(1절).
장소뿐만 아니라, 친척과 가족들도 버려야 합니다. 결국 그 모든 이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에 따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삶의 의미이자 최후의 보루이며 안식처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보다 더한 가치와 의미는 내 인생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다니! ‘아브라함’도 나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주저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속내를 아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황홀한 장미 빛 약속을 숨 쉴 틈도 없이 쏟아내십니다. 거대한 축복의 용암이 분출해 나오는 듯합니다. 순종에 따르는 희생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것임을 인식시켜주기 위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약속의 내용을 문법적으로 보면 전체 일곱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2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3절)
이곳에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 약속은 분명 언약으로 불러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태초에 ‘아담’과 맺은 언약(1:28), 그리고 ‘노아’와 맺은 언약(9:1)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세 번째 ‘아담’으로 간주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 같은 엄청난 축복의 약속 앞에 다소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약속이 그대로 실현만 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명예나 명성만 해도 그렇습니다. 명성에 대한 욕망은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절실합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없는 사실도 있는 것처럼, 하지 않은 발견도 했던 것처럼 날조하고 과장하기도 하며, 충분한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서둘러 발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 명성 때문에 인생 전체를 날려버린 유명 과학자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바벨’탑 사건도 역시 이 명성에 대한 집착이 빚은 비극일 것입니다. 명성 자체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다만 진정한 명성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벨’탑 사건의 주역들과 ‘아브라함’의 태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연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과 제단의 차이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가 하면, 복의 근원이 되라고 명령하시기도 합니다. 이 명령은 “떠나라”는 첫 번째 명령에 이은 두 번째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두 명령은 각기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란’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면, 복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떠난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는 이 명령은 실은 언약의 핵심처럼 보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전체 일곱 구절 중에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3절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고 있는 약속은 위대한 국가, 큰 명성,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2절). 분명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약속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혼자서 그 모든 축복을 고스란히 누리도록 계획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순히 축복의 최종 수혜자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 또는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참고. 3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좋을 것인지 아닌지는, 그들이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멀리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저주하고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가까이 하고 축복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가깝게 하실 것입니다. 이 예언은 가까운 장래에 어김없이 성취될 것입니다(참고. 창12:10-20).
그렇다면 이 모든 관계가 순전히 ‘아브라함’이 아닌 타인들의 태도에 따라 이루어질 문제인가?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결코 그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그 때문에 큰 낭패를 겪어야 했던 ‘바로’ 왕과 관련한 일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아브라함’ 때문에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과연 ‘바로’와 ‘이집트’ 백성이 누구 때문에 하나님의 재앙을 받게 되었을까?
반응.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흔 다섯의 나이에 놀라운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참고. 4절). 당시 ‘데라’의 나이가 115살이었으니(11:26, 32),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가 죽기 60년 전에 ‘하란’을 떠난 셈입니다. 화자가 구태여 이 나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결정이 현실적으로 아주 힘들었을 것임을 시사해 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내린 결정의 동기가 가족이나 다른 요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히브리서>도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아브라함’이 보였다던 ‘믿음’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으며, 어디서 온 것일까? 사실 나는 믿음이 없이는 단 하루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의 일상생활에서 늘 작동하는 일종의 윤활유와 같은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를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하는 한, 약속한 장소와 시간에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나갑니다. 영화표를 예매한 사람은 상영 시간에 맞추어 그 표를 가지고 갑니다.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외국으로 비행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목적지에 무사히 정해진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탑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사람은 다음날 아침에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렇게 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지극히 자연적인 내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이고 있는 믿음도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적인 것이었을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역시 이런 부류의 것이었을까? 어느 날 누군가 내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도두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으로 행동에 옮길 것을 주문했다 칩시다. 백번 양보하여 그가 낯선 자가 아니라, 오래 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나 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선뜻 말도 안 되는 주문에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 그 말도 안 되는 주문이란 다름 아닌 나이 일흔 다섯에 고향과 가족을 떠나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낯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주문과 요구에 그저 저녁에 잠자리에 들듯, 버스로 직장에 출근하듯, 이웃 집 놀러가듯, 그저 평범하고도 자연적인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 그런데 화자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다고 전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일까? 이와 비슷한 일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그물을 깁고 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막 1:19-20)
혹시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낯선 자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쫓아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들에게 일어난 것입니까? 단순히 이들의 행동을 놀라운 결단이라든지 또는 용기 있는 순종이니 하는 등의 수식어로 미화시키기에는 너무나 석연찮은 데가 많습니다. 무슨 동기나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습니다. 설령 있었다고 하드라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투자나 결단을 내릴 때 불안이나 두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죽어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그분의 절대적인 은혜였다면, 그 부름을 들을 수 있고, 또 부르심에 반응하여 나아올 수 있게 한 것도 그분의 기적이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고 생명에서 단순한 유기물로 분해되고 와해되어가던 ‘나자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 하며 그를 다시 살아 걸어 나오게 했던 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르심도 은혜요, 믿음도 은혜요, 순종도 은혜의 결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순례. ‘아브라함’의 믿음의 첫 걸음은 이처럼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부터 믿음의 순례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 땅 여기저기를 나그네처럼 돌아다녀야 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9-10).
이 순례의 끝은 어디일까? 그가 여러 지역을 거쳐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어디이며, 그곳에는 누가 살고 있었던가?
‘아브라함’이 ‘다마스커스’ 남쪽으로부터 ‘갈릴리’ 호수를 지나, 지리적으로 그 땅의 한 가운데쯤이 되는 ‘세겜’ 땅에 도달해보니,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허허벌판도 아니었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에덴’동산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 ‘가나안’ 족속들이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6절). ‘아브라함’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기대하고 여기가지 내려온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긴장과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그러면서도 기대 또한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400년 후에 그의 후손들도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모세’를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도달해 보니 약속한 젖과 꿀은커녕 거대한 ‘네피림’ 족속들이 이미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위풍당당했던지 ‘모세’가 보낸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이 자신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민 13:27-29, 31, 33).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포기하고 주저앉았습니다. 그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오직 두 사람만 빼고 이들 모두 살아서 그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어갔습니다. 결국 ‘모세’마저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지요.
‘아브라함’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후손들과는 달랐으며, 아주 독특했습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바벨’탑이나 성이 아닌 장막과 제단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7하-9절). 홍수가 끝난 뒤, ‘노아’가 했던 것과 똑 같습니다(8:20).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행동만이 아닙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 입고 있는 의복, 이 모두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적어도 이곳 ‘가나안’ 주민들에게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알 리가 없고,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리가 없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순례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며, 「천로역정」의 “허영의 시장”(Vanity Fair)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저런 잡다한 자신의 언어가 아닌 신령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며, 자기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며,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입니다.
‘가나안’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살면서 투쟁하여 얻어내야 하는 권리이자 유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늘 이처럼 양면성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런 유별난 짓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분의 약속과 은혜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7절상). ‘아브라함’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먼 훗날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윗’ 왕국의 출현을 예견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베델’을 거쳐 남쪽 ‘느게브’에 이르는 그 땅을, 손자 ‘야곱’이 그대로 따라갈 것이며, 먼 훗날에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 경로를 따라 정복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기록이 우연일 수는 없습니다. 화자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화 작업’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를 읽고 있을 독자들이 ‘다윗’ 왕조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그 기분이 어떠했을까? 아니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라면 어떠했을까? 오늘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연습과 토의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즉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불러내었다”는 말 속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를 묵상해 봅시다.
2. 소위 “‘아브라함’의 언약”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언약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이것이 앞선 일련의 언약들 즉 “창조의 언약”, “‘아담’의 언약”, “‘노아’의 언약” 등과 어떤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토의해 봅시다.
3.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의 순례를 “출애굽 사건”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을까?
4. ‘아브라함’ 자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스라엘’(영적/육적)의 모델이자 표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상황은 물론, 그 이후의 상황, 그리고 그가 보여주었던 순례자의 삶을 통해서 이점을 토의해 봅시다.
5.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갈대아’입니까? ‘벧엘’ 동편입니까? 내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나를 메뚜기처럼 느끼게 하는 ‘네피림’ 족속은 아닙니까?
6.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나는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대해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