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3과
아브람과 롯(1): 분리
김태정 목사창세기 13:1-18약 57분 분량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13:11)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 자연법칙과도 같은 경구(警句)임에 틀림없습니다. 완벽한 자유 의지를 지녔던 ‘아담’과 ‘화와’의 선택과 그 결과에 관한 <에덴 이야기>가 고전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실은 인류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결과는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후 모든 인류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 지워 버리는 실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그 결과를 이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못하든 말입니다.
타락의 결과는 무엇일까? ‘프란시스 쉐퍼’는 “분리”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발단으로 해서 연쇄반응처럼 이어졌던 일련의 분리와 분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피조세계; 피조물 대 피조물;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에 끝이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분리와 분열은 성자 하나님의 구속, 즉 재창조의 완전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속될 것입니다.
본문의 신학적 주제도 선택과 분리라는 <창세기>의 큰 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선택, 그리고 두 사람이 각자의 선택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의 배후에는 “창조”와 “언약”의 거대한 두 신학적 주제가 배경 음악처럼 흐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롯’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가 선택한 동기와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훗날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뻔도 했던 그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났다는 사실은 “아브라함 언약”의 큰 틀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에피소드에서 ‘롯’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아브라함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가 ‘이집트’를 떠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내와 모든 소유를 가지고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다는 설명은 앞 이야기의 마지막 서술과(12:20)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즉 이 두절은 두개의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12:20)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13:1)
다만 두 절에서 한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는 ‘롯’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될 때 처음 나타났다가(12:5), 이곳에서 다시 등장함으로써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주요 인물이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브람’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세웠다고 언급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여정(旅程)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절)
이것은 단순히 여정의 지리적 시작과 결말을 비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리와 연관된 신학을 고찰해 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12-13장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제단과 예배”는 마치 신학적 수미상관처럼 이야기를 감싸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에 있어서도 두 장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12장이 하나님의 축복에서 시작하여 갈등과 분쟁으로 끝나고 있는 것에 비해, 13장은 정 반대로 갈등과 대립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단락과 구조. 본문의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구조를 분석해 보면 여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귀환: ‘이집트’에서 ‘벧엘’로(1-5절)
(2) 갈등(6-7절)
(3) 선택(1): 양보(8-9절)
(4) 선택(2): 소돔(10-13절)
(5) 보상(14-17절)
(6) 결론(18절)
첫 번째 장면은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그 땅으로 돌아오고 있는 인물 중에서 ‘롯’도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곳에서는 ‘사라’가 아니라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롯’을 소개하고 있는 방식도 흥미로운 것이, 배경 설명의 처음과 마지막에 그의 이름이 마치 수미상관처럼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1절)//“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5절).
두 번째 장면에서 이야기는 다시 갈등구조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플롯(plot)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이야기에서 갈등의 원인이 자연적인 기근이었고 갈등의 당사자가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바로’ 왕이었다면, 이번에는 약속의 땅을 놓고 가족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 즉 두 사람의 가축이 너무 많아 그 땅에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이곳에서 예의 반복적인 서술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6절).
이와 같은 수사적 반복은 이전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서술할 때에도 사용한 바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12:10). 땅에 대한 약속은 자식에 대한 약속과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적인 두 요소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그 땅에서 함께 살 수 없었다는 설명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암시를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미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 두 주인공의 갈등과 충돌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편의주의 윤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이번에도 역시 영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도 없이 현실적인 이익을 따라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행보에 진전을 보일 것인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두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그에게 닥쳐온 새로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믿음의 영웅으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의 영웅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별 도움이 없어 보이는 “그 땅” 즉 ‘가나안’을 선택합니다. 반면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은 소돔”을 선택했다고 언급함으로써(10절하), ‘롯’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롯’의 역할은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보조적인 역할 그것입니다. 두 사람의 선택의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11절하).
“선택과 유기” 내지는 “죄와 분리”라는 <창세기>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의 흐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롯’은 ‘소돔’을 선택함으로써 영원한 “분리” 또는 “유기”를 체험하게 될 것임을, ‘소돔’이 어떤 곳임을 기술하는 것을 통해서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13:13).
반면 ‘아브라함’은 “버리면 얻을 것”이라는 금언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그 언약”을 재확인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그 땅과 후손에 관한 것으로서, 다섯 번째 장면에서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15-17절). 일종의 교차대구 내지는 동심원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이 약속의 문학적 특징 또한 흥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15절)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6절상)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16절하)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7절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네 번째 장면과 다섯 번째 장면을 서술하는 방식인데, 두 장면에서 유사반복처럼 동일한 단어나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표>
자료와 배경. 본문의 자료는 대개 <야훼전승>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일부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사제 자료>도 함께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6절, 11절하-12절상).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본문 속에 <사제 자료>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야훼전승>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본문에서 흔히 <G 자료>로 불리는 <야훼 이전 자료>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G자료>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민수기>의 서론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이 공통적으로 참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다 오래된 전승을 말합니다. 이 두 전승은 통일왕국 시대를 거쳐 북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재하다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야훼’ 기자에 의하여 <야훼-엘로힘>이라는 새로운 전승으로 출현하여(JE 전승), ‘바벨론’ 유수 때까지 존속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Kilian은 본문의 대부분이 <야훼 이전 자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몇몇 군데에서(3-4절, 7절하, 10절하, 14절상) 후대 기자의 편집적인 확장 또는 수정 작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Westermann도 <야훼 이전 자료>가 후대의 기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오래된 <순례 이야기>의 흔적이 1-5절, 18절 등의 <귀환 이야기>에서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역시 오래된 <가족 간의 갈등 이야기>가(21, 26장) 5-12절을 이루는 배경이 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14-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재확인해주고 있는 언약에 관한 부분도 후대 야훼기자의 편집적 삽입이라고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본문 전체 이야기를 오래된 기본 자료와 후대의 편집 자료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문학 비평적 작업이 필요한데, 예를 들어 14-15절 사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10-11절에 나타나는 ‘롯’의 선택에 관한 묘사 사이에서 존재하는 일종의 유사성을 확립하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두 이야기에 공통되는 일종의 문학적 상수(常數)들을 찾아내는 작업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확인해 본 바 있습니다. 사실 여러 학자들은(von Rad, van Seters, Coats, Alexander) 본문의 이야기가 하나의 독립된 개별 이야기로서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이기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은 전체적인 <아브라함과 롯 전승> 에 나타나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 하나의 독립된 전승으로 후대까지 전해져 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서,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구절들이 이미 앞의 이야기와 불가분 연결되어 있거나, 예를 들어 다음의 짝이 되는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될 것입니다: (1) 13:1과 12:20; (2) 13:2와 12:16; (3) 13:3-4와 12:8-9.
또는 이후 전개될 사건들을 예고해 주고 있는가 하면, 역시 다음 짝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13:10과 19:29; (2) 13:12와 14:12 및 19:1; (3) 13:13과 18-19장.
아예 과거와 미래 사건들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는 구절들도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짝들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1) 13:7과 12:6 및 15:19-21; (2) 13:15-17과 12:7 및 15:8-9, 19.
이러한 연구와 관련해서 이어지는 단락에서 보다 상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귀환(1-5절)
첫 번째 장면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벧엘’ 근처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아브람이 애굽에서...네게브로 올라가니, 3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 3-4절)
‘이집트’의 ‘나일’ 강 지역은 ‘가나안’ 지역에 비하면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으므로, 두 지역 사이를 여행하는 것과 관련해서 “이집트로 내려가다” 또는 “이집트에서 나와 올라오다” 등의 표현은 <성경>에서는 낯익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돌아온 곳은 이전에 그가 떠났던 바로 그 장소라고 하니, ‘아브라함’의 여정은 마치 제 자리로 돌아온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귀환 길에 거쳐 간 장소는 이전에 그가 내려갈 때 거쳐 갔던 장소들이었음을 3-4절의 설명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정의 끝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함으로써, 비록 일정 기간 세월이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강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지 나름대로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번의 귀환 여정과 관련해서 이전과 한 가지 다른 점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롯’이 그와 함께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언급으로써, ‘롯’의 소유에 관한 언급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두 번에 걸쳐 반복 기술하고 있습니다.
1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1-2절)
특히 2절에서 “풍부하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매우 풍부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전에 ‘가나안’에 “기근이 극심하다”는 표현과 동일한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갈 때의 상황과 다시 나올 때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나올 때 그 나라 왕으로부터 얻어가지고 나온 재물의 양이 엄청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떠날 때에 가축뿐만 아니라, 금과 은도 함께 가지고 나왔다는 언급은 출애굽에 대한 예시가 되기도 합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 역시 출애굽 시에 금과 은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출 12:35-36).
2. 갈등(6-7절)
두 번째 장면에서 가족 간에 갈등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단락의 끝에 이미 예고된 것으로서, 다름 아닌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그 모든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5-6절)
가족 간의 갈등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목민들에게 가축을 위한 충분한 방목지를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만, 그들이 동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축과 다른 소유가 많았다는 사실은 일찍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서두를 통해서 기억할 수 있는 언약의 성취에 대한 또 다른 강조이기도 합니다.
“동거”는 13장 전체를 통해서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고: 13:6, 7, 12, 18.
정작 축복의 당사자들은 벌써부터 “헤어짐”이라는 다음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자신들이 복의 근원이 되기는 했으나, 축복을 나눌 수도 없었고, 동거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이 화자를 분노케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를 더욱 노하게 하는 사실은, 이들이 한 가족으로서 함께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정작 주변에 있는 낯 선 ‘가나안’ 사람들과는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7절)
함께 살아야 할 가족이 그 땅에서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아옹다옹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을 때, 이방인들은 여유작작하게 그들 곁에서 살고 있었다는 화자의 조롱이자 해학이며, 두 사람을 항한 질타(叱咤)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3. 선택 1: 양보(8-9절)
특히 화자의 질타는 ‘아브라함’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롯’을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선택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 9절)
‘아브라함’이 ‘롯’을 부르면서 한 말, “한 골육”은 정확하게는 “동료, 형제”를 뜻합니다. 그냥 한 가족이라고 했어도 될 것을 구태여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좀 더 강력한 호소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이 본문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고 형제가 아니냐?” 즉 “우리가 사람이 아니냐?”는 표현이 대부분의 번역본에는 빠져있습니다. 이 표현을 그대로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이렇게 싸워서야 되겠으며, 하물며 골육 사이에서야 더욱 그렇지 아니하냐?” 다분히 이상론자의 공허한 외침 같기도 하지만, <시편>은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그러나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입니다. 갈등하며 함께 사느니 서로 헤어져 평화롭게 사는 것이 차선의 방책일 것입니다.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위대한 양보입니다(9절). 그가 양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에게 언약과 함께 주신 그 땅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주신 권리조차 기꺼이 내놓고 있습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집트’에 살러 내려갔을 때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이용하기도 했던 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아내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지금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가족의 영웅으로서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훗날 그의 아들, ‘이삭’이 우물을 놓고 ‘아비멜렉’과 갈등이 생겼을 때 보여주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창 26:21-22).
4. 선택 2: 소돔(10-13절)
그러나 ‘롯’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은 삼촌의 양보가 아니라, ‘베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 남쪽으로 펼쳐진 ‘요단’의 들과 계곡과 물입니다. 화자는 ‘롯’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절)
그 땅은 심히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화자는 ‘롯’이 그 땅을 바라보았을 때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다고 함으로써 <에덴 이야기>의 모티브를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 이야기>의 결말과 원인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런 표현을 통해서 일말의 긴장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여호와’의 동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에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이 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롯’이 바라보고 있는 ‘요단’ 들판은 태초에 ‘하와’가 ‘여호와’의 동산에서 바라보던 “금단의 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황홀했습니다. 화와는 그 나무의 열매가 만지고 싶었고, 먹고 싶었습니다. ‘롯’ 역시 저 땅을 차지하고 경작하고 싶습니다. 화자의 질문은 이런 것이지요: “과연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렸던 그 낙원을 ‘롯’은 되찾을 수 있을까?”
화자는 한 술 더 떠서 그 땅을 ‘이집트 땅’에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10절). 이 땅 역시 풍요와 힘의 상징입니다. ‘가나안’에 홍수와 기근이 있을 때마다 족장들은 이곳을 찾았고, ‘이스라엘’의 왕들도 정치적 위기시마다 이 나라를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비유 역시 강력한 신학적 암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이 점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이집트’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0-12).
이어지는 구절에서 화자는 ‘롯’이 선택한 그 땅의 성격에 대해서 보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1-12절)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인 ‘롯’의 선택과 소극적인 ‘아브라함’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롯’이 약속의 땅으로부터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돔’은 ‘가나안’에서 바라볼 때, 이방인의 땅은 아니라 할지라도 언약의 땅의 가장 변방에 위치해 있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삼촌의 법적인 상속자로서 그 땅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도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한 면을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즉 ‘롯’의 편에서 보면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내버린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롯’이 무슨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그를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롯’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 언약을 재확인 했을 뿐입니다.
‘롯’이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언급은 그가 앞으로 어떤 운명을 거치게 될지를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다음과 같은 진술때문입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13절)
그는 앞으로 이 사람들과 모든 운명을 함께 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5. 보상: 약속(14-17절)
조카의 운명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롯’이 떠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전체 장면 중에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직접 나타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14절)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으로부터 단어 하나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로 “제발”(영어의 please에 해당)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뺀 채로 번역하면 본문은 단순한 명령어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실은 이 구절은 간곡한 부탁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창세기>에서만 이런 표현이 약 60여 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이런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경우는 <구약> 전체적으로 네 번에 불과합니다. 이들 각각의 경우 하나님께서 부탁하고 계시는 내용들은 모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것들입니다: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5-17절)
이 언약은 ‘아브라함’이 이전에 받았던 것에 비하면(12:7),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은 그의 후손들 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차지하게 될 땅이 아니라, 그가 생전에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15절). 둘째, 다소 과장되긴 하지만, 땅의 티끌만큼 많으리라는 후손의 규모에 관한 약속입니다(16절).
6. 결론(18절)
이야기는 그동안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던 표현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참고: 12:6-9; 13:1-4.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돌아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18절).
이 같은 결론은 ‘롯’이 여행의 종착지로 어디를 택했는지에 관한 표현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롯’이 동쪽을 향해 갔던 것에 비해(동쪽은 <창세기>에서 늘 버림받은 땅을 의미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전에 그가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리던 바로 그곳입니다. 화자의 관점에서 볼 때, ‘헤브론’과 ‘마므레’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신학적 중심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으며(14-19장), 족장들이 모두 이곳에 장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멕벨라’ 동굴은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처음으로 구입한 부동산이었기 때문입니다(23:1-10). 이곳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았다는 언급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귀환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내려갔던 그 길을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이전에 그가 왔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을까?
이 장면은 묘하게도 훗날 ‘나오미’가 ‘룻’을 데리고 ‘모압’으로부터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과 ‘오버랩’(overlap)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두 경우 모두 의기양양(意氣揚揚)한 영웅의 금의환향(錦衣還鄕)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무슨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들도 아니고, 당연히 연도(沿道)에 나와 이 귀환을 열렬하게 환영해주는 인파도 없습니다. 비웃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오히려 연민(憐愍)을 받아 마땅한 귀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귀환(歸還)이란 단어에는 밝고 긍정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포로의 귀환; 철새의 귀환. 하지만, 이 두 쌍의 처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각기 원인은 다릅니다만, 모두 자발적인 귀환이 아니라 거의 내쫓기다시피 그 땅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두 쌍은 비슷한 처지에서 다시 그 얄궂은 “약속의 땅”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할 것입니다만, 두 쌍의 운명은 정 반대로 마무리 될 참이었습니다. 두 쌍 모두에게 인생 대 역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쌍은 비극의 대 반전이, 그리고 다른 한 쌍에게는 희극의 대역전입니다. 한 쌍은 상호 간에 분리(分離)와 결별(訣別)로 끝나게 될 것이고, 다른 한 쌍은 화목과 번창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흥미롭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기까지 합니다. ‘나오미’와 ‘룻’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나오미’는 스스로를 ‘마라’, 즉 “괴로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겠습니까(참고. 룻 1:20)! 그 이유인 즉은 “전능자”가 자기를 심히 괴롭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룻 1:20). 참고로 ‘나오미’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점에서는 ‘나오미’와 다릅니다. 그야말로 그는 대박의 횡재를 안고 귀향하고 있습니다. 잃기는커녕 거부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1-2절). 화자는 마치 노래하듯 두 번에 걸쳐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언급은 “출애굽”의 모티브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후손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빠져 나올 당시의 상황을 예고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 12:36, 38). 수백 년 노예로 살던 자들에게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푼 것일까요?
<창세기> 화자는 ‘아브라함’이 잃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듯,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가 ‘이집트’에서 잃어버린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을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명예와 신뢰가 아닐까? 이점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치명적이라 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잃은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즉 그는 명성(名聲)을 잃어버렸습니다. 개인적인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명성까지 말입니다. 한낱 이방인 왕으로부터 일장 훈시까지 듣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으니 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계명의 기본 정신을 세 가지로 요약하신 바 있습니다. 즉 정의(正義)와 긍휼(矜恤)과 그리고 믿음입니다(마 23:23). ‘아브라함’은 ‘바로’ 왕에 대해서는 물론, 사랑하는 아내 ‘사라’에 대해서조차 이 정신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보여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그는 짠 맛이 없는 소금이었고, 불 꺼진 등잔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였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바로’ 왕으로 하여금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범죄를 저지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산까지 축내게 하였으니, 그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큰 치욕스러운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치욕스러운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리고 이 같은 치욕은 ‘아브라함’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우리가 흔히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연구 보고서 중에 신뢰도 평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평가한 대상 열 개 기관 중에서 국회가 가장 꼴찌였고, 그 다음이 개신교회였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국회보다는 낫다고 세상이 평가해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는지요! 막연히 교회라고 하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장이나 동네에서 나를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요주의 인물로 선정한다면, 내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무덤덤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바둑 대회가 끝나면 기사는 복기(復棋)를 합니다. 자신이 두었던 한 수(手) 한 수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혹시 ‘아브라함’도 ‘이집트’에서의 일을 복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내 ‘사라’와는 한 마디 대화도 없이, 그저 묵묵히 ‘이집트’를 빠져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내가 그려볼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도 자존심과 체면은 영 말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재물들이 도무지 자랑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이것들마저 조만간 가족 간의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될 참이었습니다. 그 갈등의 싹이 서서히 커져가고 있음을 ‘롯’을 언급함으로써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긴 여정을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4절). 그는 단순히 그 땅에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겜’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장소를 염두에 두고 ‘이집트’를 떠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가 ‘바벨론’ 땅을 떠나 ‘가나안’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 즉 그 땅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 드렸던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이제 다시 그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작은 아들이 오랜 방탕과 방황을 끝내고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무슨 말을 아뢰고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서 계속 입속에서 되뇌던 그 말이 아니었을까? 탕자(蕩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작정하면서 독백하던 그 고백 말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8-19). 이 아들은 아버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사랑을 하고 용서를 함에 있어, 자기만큼이나 헤프고 절제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 아닌 자전부전(子傳父傳), 즉 아들인 내가 탕자로 불려야 한다면 내 아버지 또한 탕부(蕩父)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있어 그 아들을 능가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랜 세월 함께 한 경험적 지식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탕자만큼이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훼’ 하나님 말입니다. 당연히 지금 ‘세겜’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아브라함’이 무슨 고백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리스’(H. Morris)박사가 상상하고 있는바 그대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회개, 그것은 정녕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무슨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귀환입니다. 그것은 돌아서는 행위이자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의 출애굽도, 그의 후손 이스라엘의 출애굽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야훼’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가 자신의 힘으로 회개하려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사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회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분의 은혜가 그 능력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떠나 있었든,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 즉 그분의 은혜를 체험한 자에게만 그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감격과 환희와 눈물로 전율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얼마 만입니까! 훗날 그의 손자 ‘야곱’도 도망 중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 예배를 드렸으며, 침체와 방랑과 좌절 끝에 다시 회개와 재 헌신의 예배를 드린 곳도 이곳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 모든 것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을 가진 사람, 예배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는 이런 하나님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 4:23). 그분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2. 갈등: 소유가 많아서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영광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잠언은 얼마나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황당한 사건 하나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회사에 근무하는 아들이 엄청나게 많은 회사 돈을 몰래 빼돌려 숨겨놓은 것이 발각되었다는 기사입니다. 돈이 얼마나 많았던지 아들은 아파트를 따로 사서 그곳에 별도로 보관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졌습니다. 아버지 소유가 모두 자기 소유가 될 것이었음을 그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유하게 자랐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자 집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새로 들어온 여자에게 빠져 여자의 친정 식구들이 아버지 재산을 야금야금 빼내가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친구는 결혼하여 자식을 두고 독립적인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며, 자기 것인 줄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든 개의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필자의 또 다른 한 친구는 폐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당대 대부호로서 큰 사업체와 여러 곳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 같은 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이와 동생들이 죽어가는 이 친구를 찾아와 괴롭혀 댔습니다. 이 친구가 장남이라 아버지 사후에 그 모든 재산을 혼자 차지할까 걱정이 되어 그랬던 것입니다. 혼자 차지하지 말고 나누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작 죽어가던 아버지는 자신의 생전에 재산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 사후에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어느 곳에 땅을 얼마나 사두었는지 알 길이 없어 더욱 안달이었습니다.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삼촌을 바라보는 ‘롯’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그도 신령과 진정으로 삼촌의 예배에 동참하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그는 이 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곳에서 다시 ‘롯’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기에 던져보는 질문입니다.
‘롯’에게 ‘아브라함’은 사실 상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고향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동고동락(同苦同樂)해 왔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죽는다면 후계자는 ‘롯’이 될 것이고, 당연히 그 모든 재산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이 ‘롯’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음직도 합니다(물론 하나님은 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갈등의 원인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축복 때문이었습니다(6절).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세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동거”(同居)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동거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삼촌과 조카를 지칭하면서 말입니다. 한 가족이 동거할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가난해서 그럴까?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넘칠 정도로 풍부했고(2절),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3절). 그들은 너무 부유해서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인의 소유가 너무 많아서 하인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삼촌과 조카는 각자 가진 것들을 유지하느라 함께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역설은 또 있습니다. 핵심어가 세 번째로 그리고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고 있는 곳입니다: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7절).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가족들이 그 땅에서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아옹다옹 이전투구하고 있을 때, 이방인들은 여유작작하게 그들 곁에서 살고 있었다는 조롱이자 해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작 몰아내야 할 적은 옆에 두고 가족끼리 싸우다가 갈라지는 어리석음과, 무소신과, 비겁함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 주민들에게는 말 한마디 걸어보지도 못하고 삼촌과 조카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혹시 나도 이런 일로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과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와 유사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수시로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 중 가장 역동적이고 괄목한 만한 시기가 있었다면 지난 50년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거의 세계 꼴찌 수준이었던 경제력이 세계 12위까지 올라왔고, 자유와 민주화도 이룩했으며, 스포츠나 문화,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다투는 역동 한국이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2050클럽에 가입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2015년이면 3050 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3050이란 국민소득 삼만 달러, 인구 오천만 명을 말합니다). 온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같은 발전과 성장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들과, 이들이 지녔던 사상과 이념이 핵심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공유해왔던 것으로서, 정치적으로는 법치주의(法治主義), 입헌주의(立憲主義), 의회주의(議會主義)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는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롭고 공정한 게임과 경쟁을 인정하는 시장경제(市場經濟),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자발적인 공동체 주의였습니다(물론 같은 기간 동안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하여, 이 같은 견해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동적이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런저런 이유로 능멸과 매도를 당하고 있습니다. 독재정권과 산업화, 그리고 뒤 이은 민주화를 거치는 동안 이념의 시계추가 좌(左)로 향한 덕분입니다. 하지만 매사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그 정도가 지나쳐 정치적으로는 대중 선동적 포퓰리즘(populism)과 직접민주주의가 결합하는 소위 민중 민주주의와, 사회적으로는 획일적인 집단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의 경제관도 친(親) 사회주의적, 친 분배적, 친 평등주의에 경도되어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시장개방이라는 세계경제의 흐름을 거부하는 폐쇄적 민족주의의 정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49.3%가 기업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통계에 따르면, 부유세에 대해서는 찬성(62.3%)이 반대(26.5%)를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38.6%)보다 반대(52.8%)가 훨씬 많습니다. 반면 국내 자본이 외국 기업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77.1%)이 반대(14.6%)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2004년 5월 10일자 사설(A31).
지금 이 나라에서 쌀 개방을 반대하는 집회는 요란하게 울리고 있지만, 정작 공산품 수출에 반대하는 집회가 있었다는 보고는 들은 바 없습니다.
이런 국민 정서 위에서 국가경쟁력을 키우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꽃피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영합주의 정치가와 평등 구호에 마취된 국민이 결합하게 마련이고, 그 결과 기업과 재산가는 해외로 빠져나가고, 거리에 실업자가 넘치는 하향평준화는 국가 몰락의 길을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 정서와 관련한 몇 가지 충격적인 여론 조사를 살펴봅시다. 자본주의 하면 먼저 빈부격차를 떠올리는 사람이(36.3%) 가장 많습니다. 여기다 부정부패(10.5%), 인간성 상실(4.3%)을 더하면 과반수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가난을 제도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지난 2002-2004년 사이에 39.5%에서 52.9%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기업의 오너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91%나 됩니다. 몽땅 내놓으라는 주장이 8.2%입니다. 조선일보. 2004년 5월 31일자 강석천 칼럼 중에서.
최근 세계 학계에서는 한 나라의 가난과 그 나라의 문화, 즉 국민의 태도와 습관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활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계기는 ‘로렌스 해리슨’이 쓴 「저개발은 마음의 상태다-남미의 사례」라는 책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된 내용인 즉은 “가난한 마음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 실제 가난이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은 이 책이 제기한 주제를 놓고 99년 대규모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일이 어긋났을 때,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그럼 어떻게 고쳐야지 하는 순서로 생각하는 사회는 발전한다. 반대로 누가 우리에게 이러 짓을 했지, 누구의 음모야 하는 사회는 퇴보한다. 깔끔한 일 처리, 예절, 시간 엄수 등 작은 미덕을 중시하는 나라는 잘살게 되고, 혁명, 정의, 평등, 사랑 등의 거창한 단어만 들먹이는 나라는 가난해진다. 성직자들이 사회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영원히 가난에 빠뜨리는 법을 설교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가난한 사람을 영원히 가난에 빠뜨리는 가장 확실한 길이 사회주의 하는 것이라고 공병호 박사는 그의 저서 「10 년 후, 한국」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왜곡된 평등주의, 폐쇄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한마디로 “가난하게 살고 싶으면 사회주의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이미 수십 년 전에 폐기처분한 그 이상과 정신을 왜 굳이 지금 이 나라에서 시험해 보아야겠다고 우겨대는지 정말 한심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은 가진 파이를 나누어먹으려고 아옹다옹 할 때가 아니라, 그 파이를 더욱 크게 키우기 위해 분투할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그 옛날 ‘아브람’과 ‘롯’의 하인들이 벌이고 있는 이전투구(泥田鬪狗)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미래를 향한 꿈과 이상이 없어 보인다고 한탄하는 식자(識者)들이 많습니다. 정부나 국회가 우리 나라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겠다는 약속이나 청사진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있었다면 지난 시절 한 때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목으로 정부와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과거사 들추어내기 정도였습니다. 잘못 된 역사를 바로 세워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동기와 목적이 다분히 정략적이고 역사에 대한 한풀이 성격 같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일을 통해서, 또 한 번 같은 민족끼리 물고 뜯는 이전투구의 굿판이 벌어진 적이 있었고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친일반민족 특별법’ 입법을 추진했던 한 국회의원이 사람이 일본에 가서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법이 대외용이 아니라 대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의 목적에 대해서 그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대통령도 일본의 수상을 만나 이야기 했듯이 자신의 임기 중에는 양국 간의 과거사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않겠다던 그 과거사를 자국민에게는 문제를 삼아 따져보겠다는 것이 이 법의 숨겨진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얻어낼 것이 무엇일지 우리는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에게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하는 이 정부입니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요? 일제 치하의 어두운 역사를 따지고 싶으면 일본을 상대로 싸우고 따져야 할 일입니다. “너희들 그 때 왜 그랬느냐? 사과하고 마땅한 보상을 해야지.” 뭐 이런 외교적 공세를 취하면서 일본을 압박하면서 국가적 실익을 노리는 것이 한 나라 정부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두고 일본은 무어라고 할까요?
중국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앙 정부차원에서 “동북공정”이라는 거창한 사업 계획을 세워 조직적이며 체계적이고, 그리고 학술적으로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 속으로 귀속시키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작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북통일 이후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확보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북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의 외교부에서 우리 정부에 사람을 보내어 간도에 대해서 외교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을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 이 나라 정부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적인 대응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외교부의 담당 국장 한 사람을 중국에 보내어 항의 서신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항의마저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견했던 바이고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얼빠진 한량들은 우리가 가장 가깝게 해야 할 나라로서 중국을 꼽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60여 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중국 방문을 다녀왔을 정도로 중국 열풍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중국은 역사적으로 인권이니 민주니 개인의 자유니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한 번도 정책에 반영해 본 경험이 없는 나라라는 점입니다. 최근 미국의 한 대학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민주’나 ‘자유’나 ‘기독교’ 등과 같은 단어는 아예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중화 패권주의만 있을 뿐입니다. 남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쯤은 이런 거대한 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북한과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수년 전 서해에서 발생한 북한 함정의 NLL 침범과 거짓 무선 교신 사태에서 보듯이 정부는 북한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대통령에게 보고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합참의 최고위 담당자와 국방부 장관을 경질시켜버렸습니다. 국가보안법은 또 어떠합니까? 대통령까지 나서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적화통일을 명시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당 규약은 그대로 있는데도 말입니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준비 중이라는 외국 언론들의 보도가 나올 때마다, 그것은 미사일이 아니고 인공위성 발사용이라는 등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고 나서고 있는 쪽도 다름 아닌 이 정부입니다.
국내의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과거사를 들이대는 현 정권이나 수없이도 많은 민간단체들이 일본이나 중국이나 북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고분고분한지가 의문일 뿐입니다. 현 정권의 과거사 캐기는 유신 시대와 6․25를 넘어 일제 강점기를 관통한 뒤 동학농민혁명에까지 이를 기세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고자 함일까요? 기왕에 이렇게 스케일 크게 일을 벌일 요량이라면 아예 고구려 시대까지 파고들어 평양 천도의 책임자들을 가려내어 역사적 단죄를 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한 신문의 칼럼에서 조롱하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죄과로 따진다면 만주 땅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보다 더한 잘못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죠.
이 나라 교회는 어떠합니까? 목회의 세습화로 이 나라 많은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같은 교회를 마치 유산을 상속받는 것처럼 세습 받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목회를 하는 것이 소원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이 믿는다면 어디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 가서 개척을 하는 것이 더 보람되고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다 이루어놓은 터전 위에 그가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그가 교인들을 상대로 ‘아브라함’의 소명을 설교할 때 무엇이라 할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칭송하는 것도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땅과 가족과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낯선 곳으로 떠났던 용기와 믿음 때문입니다.
‘롯’에게는 바로 이런 개척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 넓은 땅, 발로 밟기만 해도 모두 그의 것이 될 뻔했던 그 땅을 버려두고, 현재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땅을 놓고 삼촌과 다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개척 정신만이 아닙니다. 도무지 인간적인 의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삼촌을 부모삼아 그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 편하게 지내다가 이제 좀 형편이 나아졌다고 해서 자기 것을 챙겨 혼자 독립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삼촌을 비난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심리 상태는 오늘날 우리의 소위 386세대가 미국을 대하는 것과 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고 있는 자유니, 민주니, 인권이니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들을 누구로부터 배운 것입니까? 일본이었습니까? 중국이었습니까? 아니면 같은 민족 북한 정권이었습니까? 그리고 일제와 6․25로 폐허가 되었던 이 나라가 세계 12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 누구의 덕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이없게도 역사의 반동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를 미국과 세계로부터 떼어내 다시 중국과 일본과 북한의 울타리로 되몰고 가려는 수구의 흐름을 봅니다. 그것도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기득을 타파하고 개혁을 도모한다는 명분소아병(名分小兒病)에 걸려 한국을 다시 동북아의 한 구성원으로 꾸겨 넣는 어리석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김 진홍 목사님이 얼마 전 이라크에 파병되는 군 장병들을 위한 설교에서 이런 설교를 했다가 신세대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자는 논쟁이 되는 주제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도 젊었을 때는 사회주의를 신봉했고 과격집회도 불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젊은이들을 향해서 외치고 있는 설교의 핵심은 바로 본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바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분이 훌륭한 것은 과거 자신이 신봉하던 그 이념이 틀렸을 때 그것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솔직하게 과오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촌과 갈라져 나오는 ‘롯’을 이웃의 이방인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삼촌의 큰 울타리를 헐고, ‘이제는 나도 어엿한 독립된 가정의 가장이다. 자주다, 독립이다’하며 큰 소리 치고 나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경계하였을까? 아니면 호시탐탐 그를 범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까?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듣게 됩니다. 재산은 고사하고 생명까지 위협받게 되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 그의 처량하고도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미동맹의 틀을 깨고, ‘우리도 이제는 어엿한 자주․독립 대국이다’하며 중국이나 일본에다 대고 큰 소리를 칠 때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 씨는 그의 칼럼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2004년 8월 11일자 A30면.
그렇게 반미하고 역 세계화해서 우리가 제대로 민족다운 민족을 얻어낼 수 있으며 아시아다운 아시아를 재발견할 수 있다면 모른다. 현 집권 세력은 중국으로 가자 일본과 손잡자며 김칫국을 마셔댔지만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은 일본과 중국의 냉랭한 멸시와 하대(下待)뿐인 것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우리 주변은 다시 복속을 얘기하고 조공을 거론하며 친일을 들먹이고 반민족을 외쳐대는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 우리의 외교는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가고 있다. 주한 독일 대사도 이와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반미하고 돌아서자 중국에 뺨맞고 일본에 무시당하며 러시아에 빈정거림을 당하는 처지다. 중국이 이 시점에 고구려 역사 왜곡을 들고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 정권이 과거를 묻지 말자고 일본에 웃음을 던져도 일본은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준비가 돼 있는 나라다. 중국이 우리를 대접하고 일본이 우리에게 미소 짓는 것은 우리가 세계 최강국과 친한 친구이고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을 때까지 만이다.’ 또한 그는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동북아에 갇혀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 지배의식과 우월의식에 젖어 있는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주의로만은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간단없이 조공을 거론하는 두 나라와는 영원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세계에 있다. 우리의 힘은 왕성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있다. 반미에 얽매인 부정주의(否定主義)와 맹목적인 민족주의는 일본, 그리고 누구보다 북한이 바라는 바다. 미국의 힘을 통해서든, 독자의 힘으로든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세계로 나가야 한다.’
왜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들어 볼 수가 없을까요? 영적인 영역이 아니라서 그런가요? 우리의 젊은 세대가 들어야 할 설교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혹시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특히 중고등부 교사들), 고등학교의 사회, 경제 관련 교과서에 무슨 내용들이 있는지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이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의 ‘만물상’이라는 코너에서 다룬 바 있는 한 글을 소개합니다. 조선일보, 2004년 8월 5일, A26쪽.
다산 정약용 선생은 「고구려론」에서 평양으로의 천도를 고구려 패망의 근본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압록강 북쪽은 기후가 일찍 추워지고 땅이 몽고와 맞닿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용감하였다. 또 강한 오랑캐와 섞여 살았기 때문에 사면으로 적국의 침입을 받게 되므로 방비가 매우 튼튼했다.’ 그러나 평양은 다르다: ‘압록강과 청천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산천이 수려하고 풍속이 부드럽고 연약했다. 그리고 밖으로 견고한 성과 큰 진이 겹겹이 방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의 이러한 조건들이 다산의 장탄식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아아, 평양은 믿을 수 있는 곳인가.”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고 성곽이 견고했던 까닭에 위정자와 백성들이 안이함에 빠져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입니다. 다산의 주장은 계속됩니다. 중국의 진(晉)나라와 송(宋) 나라는 양자강을 남하하는 바람에 천하를 잃었고, 백제는 한강을 건넌 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감행하지 않았다면 만주가 여전히 우리 땅으로 남아있었을지는 상상에 맡길 일입니다만, 묘한 것은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려는 순간에 ‘제 2의 고구려 침공’을 자행하고 있는 순간에 한국의 집권층은 수도를 한강 이남으로 옮기는 데 온통 몰두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에 학회 참석차 미국의 ‘산타바바라’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학회가 끝나고 근처 ‘캘리포니아’ 포도주 생산지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는데, 이 때 안내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좋은 포도주는 땅이 기름 진 밭에서 자란 포도에서 추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땅이 아주 척박하고 심지어 돌이나 바위틈에서 자란 포도나무에서 더 좋은 포도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모진 주변 환경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진액을 땅으로부터 뽑아내다보니 좋은 포도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하동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하동 배하면 맛있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하동에 가보면 배 밭이 길을 따라 양편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한 쪽은 섬진강에 가까워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진 반면, 반대 편에 있는 밭은 보다 메마르고 척박한 편입니다. 그런데 이 밭에서 난 배들이 더 크고 맛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패망한 원인과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로 들립니다.
이공계 위기에 대한 걱정들이 많습니다. 본인이 속해 있는 화학 및 화공 관련 분야도 예외는 아니라서, 지난 수년간 대학원생 진학 수를 보면 해마다 감소 추세에 있습니다. 아예 재학 중에 떠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당국에서는 지난 수년간의 자료를 근거로 학과별 학생 전원을 축소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본인이 속해 있는 학과 교수들도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정원을 다시 늘려 달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늘려주어도 다 채우지도 못할 정원을 왜 늘려달라는 것인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수들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해도 재조정은 학교 내의 전체 정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다른 학과의 정원 중에서 일부를 떼 내어 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전체 나누어 먹어야 할 파이는 그대로 일정한데 서로 큰 몫을 차지하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롯’의 요구와 같다는 것이죠. 본인은 수년전부터 이런 추세에 대비해서 자부담으로 외국 학생들을 불러다가 연구에 충원해 왔기 때문에 당장 큰 걱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왜 다른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구책을 마련해 가지 않는지를 묻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가는 ‘그래 너 잘났다’하고 맹수와도 같은 독설을 듣게 될 것이므로 그냥 혼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한 번역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입니다. 신문에 소개된 한 통계를 보면 한국인 70%가 한국에 미래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인 70%는 중국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미래가 없다고 답한 계층은 나이 든 노인네들이 아니라, 그 미래를 책임지고 가야 할 30-40대 젊은이들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무기력한 백성들로 만들어놓았습니까? 사태가 이러함에도 이 정부나 여당은 미래가 아니라, 오직 과거사 캐기에만 골몰하고 있을 뿐입니다. 친일과거사 규명이나, 의문사규명 등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얼마 전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의 CEO 1000여명을 대상으로 ‘휴가철에 읽을 책’ 10권을 선정했습니다.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야 하는 경영인들은 한 달에 평균 2~3권의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목적이 삶의 지혜(34.8%), 시대 경향의 포착(32.6%), 경영 아이디어(27.7%) 순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요즘 기업인들은 정부에 대해서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말로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지만 실은 자신들을 적대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들 기업인들이 선정한 10권의 책 중에서 제 1위는 「10년 후, 한국」(공병호, 해냄)이 차지했습니다. 앞에서도 잠간 소개한 바 있지만 이 책은 한국사회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이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적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한 사회의 미래도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롯’에게는 꿈이 없었습니다. 꿈이 없으니 아량과 덕이 없습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보이는 현실세계 뿐입니다. 꿈이 없으니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롯을 따라 행동했을 때, 그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소돔’의 결말이 해답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점에서 하나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아브라함 순환>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후대의 이스라엘, 특히 ‘바벨론’ 유수와 고토 회복을 거친 이 민족이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할 때, 이스라엘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을 때 마땅히 들쳐보아야 할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있어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은 없습니까? 오래 동안 나를 지켜주고 보해해주었던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혹시 내가 ‘롯’이 하듯 행동한 적은 없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입니다.
3. 선택과 유기
내가 만일 ‘아브라함’이라면 이처럼 싸가지 없는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싸워야 할 적들은 제쳐두고, 개척해야 할 광활한 땅은 내버려 둔 채, 이 비좁은 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덤벼대는 이 조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어차피 내 죽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텐데, 이 녀석이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분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다시 한 번 나를 사로잡아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선택 1. 그런데 ‘아브라함’은 “위대한 양보”를 선택했습니다(8-9절). 그가 양보하고 내려놓은 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땅”입니다. 그것도 언약과 함께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조차 기꺼이 내려놓았다는 말입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이용하기도 했던 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아내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지금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시편> 기자의 말대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일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일”(시 133:1)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입니다. 갈등하며 함께 사느니 서로 헤어져 평화롭게 사는 것이 차선의 방책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간에 있어서나 교회 성도 사이에서도 원용할 수 있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바울’과 ‘바나바’는 2차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하게 다툰 후에 갈라서서 각자 자신의 길을 걷게 됩니다(행 15:39). 부부 사이에 있어서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러 헤어질 필요는 없으나, 종교 문제로 심한 갈등이 노정되어 믿지 않는 편에서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면 갈라서는 편을 선택하라고 ‘바울’은 충고하고 있습니다(고전 7:12-15).
더 나아가 지금 한국의 남과 북이 고려해 볼만한 대안이기도 합니다. 민족도 좋고 통일도 좋은 것이긴 하지만, 서로 갈등하고 싸우면서 한 국가로 지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단순히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통일을 강행한다면 민족 외의 다른 모든 가치들은 위협받거나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종북 세력으로 규정받아 해체된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소위 진보라 자칭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이미 죽고 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느라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그를 친일파로, 독재자로, 오늘날 한국의 모든 악의 근원을 제공한 자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난 반세기 동안 삼 대에 걸쳐 백성을 토탄에 빠뜨리고 억압하고 있는 이북의 독재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그들을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부추겨 세우고 있는 것이 작금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자들이 지금 진보의 탈을 쓰고 민족 통일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내몰고 있는 자들이 통일과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차라리 그냥 나누어진 채로 평화롭게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브람’이 선택한 것도 바로 이 차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나 같으면 데려다가 일장 훈시로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해보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가족의 어른으로서 혼쭐을 내 주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른이 지나치게 양보하며 살아가다보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회는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해보는 말입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야단이나 훈계를 듣지 않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학교가 그 모양이 되었습니다. 요즘 선생님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매는커녕, 잔소리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 대학 구석구석에 온통 붉은 글씨로 된 운동권 학생들의 구호나 선동 문구들이 판을 쳐도 이에 대해서 어느 한 사람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자기들이 이 세상의 선지자나 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교수들이나 직원들을 알기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무기력한 기회주의자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학생들도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당연히 이들 운동권 아이들이 주장하는 구호가 사회의 철학이 되고 이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여론이 되고, 사회의 패러다임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처럼 사회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을까요? 이유 중의 하나로 어른들의 책임회피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육 철학 제 1조는 바로 ‘쉐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어른으로서 마땅히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아브라함’ 이 책임을 다 했는지 아니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가 선택한 것은 “위대한 양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양보하고 있는 이 땅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에게 언약과 함께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감하게도 하나님이 그에게 준 약속조차 기꺼이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이유를 상상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의 영웅으로서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롯’이 삼촌의 위대한 양보에 감동을 받았을까요?
선택 2. 천만의 말씀입니다! ‘롯’이 감동을 받았던 것은 삼촌의 양보가 아니라, ‘벧엘’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 남쪽으로 펼쳐진 ‘요단’의 들과 계곡과 물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절).
얼마나 그 땅이 탐스러웠으면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에덴 이야기>의 결말처럼 말입니다. ‘롯’이 바라보고 있는 ‘요단’ 들판은 태초에 ‘하와’가 “여호와의 동산”에서 바라보던 “금단의 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황홀했습니다. ‘화와’는 그 나무의 열매가 만지고 싶었고, 먹고 싶었습니다. ‘롯’ 역시 저 땅을 차지하고 경작하고 싶습니다. 화자의 질문은 이런 것이지요: “과연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렸던 그 낙원을 ‘롯’은 되찾을 수 있을까?”
화자는 한 술 더 떠서 그 땅을 “이집트 땅”에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10절). 이 땅 역시 풍요와 힘의 상징입니다. ‘가나안’에 홍수와 기근이 있을 때마다 족장들은 이곳을 찾았고, ‘이스라엘’의 왕들도 정치적 위기시마다 이 나라를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비유 역시 강력한 신학적 암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이 점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이집트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0-12).
이어지는 구절에서 화자는 ‘롯’이 선택한 그 땅의 성격에 대해서 보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1-12절).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인 ‘롯’의 선택과 소극적인 ‘아브라함’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롯’이 약속의 땅으로부터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돔’은 ‘가나안’에서 바라볼 때, 이방인의 땅은 아니라 할지라도 언약의 땅의 가장 변방에 위치해 있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삼촌의 법적인 상속자로서 그 땅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도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한 면을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즉 ‘롯’의 편에서 보면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내버린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롯’이 무슨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그를 ‘아브람’의 상속자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롯’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 언약을 재확인 했을 뿐입니다.
‘롯’이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언급은 그가 앞으로 어떤 운명을 거치게 될지를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다음과 같은 진술때문입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13절). 그는 앞으로 이 사람들과 모든 운명을 함께 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설령 알았다고 한들 크게 차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마음의 원대로 굴복하며 살아갔을 것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양보가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것입니다. 즉 ‘롯’은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내버림’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그 마음의 원대로 그냥 내버려 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그와 함께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을 두고 울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하여 울라.”
보상. 조카의 운명에 대해서 ‘아브라함’ 역시 예견(豫見)을 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오히려 다소 억울하고 허탈하기까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그냥 이 녀석을 무시하고 먼저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을 그랬나.” 이런 추측은 우리 모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본다고 양보도 해보고 참아보기도 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와 억울함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위대한 양보에 대한 보상은 없는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처럼 늘 양보하고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한탄을 듣고 계신 듯합니다. 직접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탁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분의 부탁인 즉은 “네 눈이 바라볼 수 있는 한도까지 그 땅을 둘러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분의 약속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믿음의 눈으로서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이전에 그가 받았던 것에 비하면(12:7)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아브람’이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은 나중에 후손들이 차지할 땅이 아니라 생전에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5절). 둘째, 다소 과장되게 들리긴 하지만, 후손의 규모에 관한 약속이 그것입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6절).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본질로 되돌아왔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까지 눈을 떠서 응시하고 있는 ‘아브람’과, 들리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음성뿐입니다. ‘롯’이나, ‘사라’나, 하인들이나, 가축들이나, 은금이나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주변적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궁극적인 언약에 비하면 단지 부수적인 장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분노도, 억울함도, 배신감도, 외로움도, 모두 한 순간의 고통일 뿐입니다. 오직 가슴 벅찬 감동과 기쁨뿐입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04).
결론. 감동은 예배로 이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감동을 받아 ‘롯’처럼 동쪽 ‘소돔’으로 갈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항상 약속의 땅 안에 머물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돌아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18절).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구조를 파악해 보고, 각 단락의 핵심어와 신학적 주제를 파악해 봅시다. 이곳에서 조연 ‘롯’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2. ‘아브라함’의 선택과 ‘롯’의 선택을 염두에 두면서 “두 선택”의 동기와 결과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3. 본문에서 “아브라함 언약”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