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6과
제 8 幕
김태정 목사창세기 25:19-35:29약 49분 분량
이삭의 계보:
<야곱 이야기>
(25:19-35:29)
<창세기>에서 여덟 번째로 등장하는 <이삭의 계보>는 그 범위를 아래 두 구절 사이에 포함된 이야기로 정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25:19)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6:1)
<이삭의 계보>에서 주인공은 ‘이삭’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야곱’입니다. 이점은 <창세기> 화자가 다른 계보에서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형식상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즉 제 6막 <데라의 계보>는 <아브라함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제 10막 <야곱의 계보>는 <요셉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각 계보를 실제 주인공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버지가 한 가계의 실질적인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이야기의 주인공과 함께 생존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경우만 하드라도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그의 아버지 ‘이삭’이 살아있는 것을 봅니다(35:29).
그러면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야곱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11:27-25:11) 및 <요셉 이야기>(37:2-50:26)와 함께 <족장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이야기들의 구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제 6막 <데라의 계보>의 서두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일련의 유사한 공식을 따르고 있음을 봅니다. 특히 세 이야기 중에서 처음 두 이야기에서 더 많은 공통점과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요셉 이야기>는 나름대로 독특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이야기>는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 단위가 아니라 <야곱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더 정확하게는 <야곱 이야기>의 속편으로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사실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야곱-요셉 이야기>로 본다면, <야곱 이야기>를 제 1부로, <요셉 이야기>를 제 2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제 1부는 ‘야곱’과 ‘에서’가 그 어미 자궁에서 다투는 이야기로 시작하였다가(25:19-22), 제 2부에서 ‘야곱’의 유언과 죽음으로 끝맺고 있습니다(47:29-50:17).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보아 크게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는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야곱’의 생애를 기술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셈입니다. 화자가 ‘야곱’의 생애를 이처럼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유래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보는 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다. 두 이야기의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분쟁을 다루는 방식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등하고 있는 두 진영은 다름 아닌 ‘레와’와 ‘라헬’ 본인과 이들의 자식들을 말하는데, 이들 사이의 갈등은 두 이야기에서 모두 아주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도입하고 있는 모티브 또한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속임수”의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야곱’이 염소 털을 이용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였으나(27:9-17), 나중에 그 자신이 자식들의 염소 피를 이용한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37:31). 두 이야기가 이처럼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구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직선적이고 진행적인 구성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 이야기>가 ‘야곱’과 그의 자식들 간의 갈등으로 끝나고 있는 반면에, <요셉 이야기>는 가족 간의 갈등이 치유되고 화해하는 모습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창세기>의 앞선 이야기들에 비해서 탁월한 점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이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처럼 두 이야기는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일관성과 유사성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어 하나의 이야기로 취급함에 있어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더 나아가서 두 이야기 모두 <야훼 자료>에 속한다는 최근의 자료비평적 연구 결과도 이런 주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이야기를 한편의 <야곱-요셉 이야기>로 묶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전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둘 사이에 <에서의 계보>(36:1-37:1)를 삽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전체에 대한 형식적인 배려가 상당히 작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렇게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다섯 개의 <족장 계보>가 “이스라엘의 계보”와 “비 이스라엘의 계보”가 일종의 지그재그(zigzag) 형식으로 번갈아 나타나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1) <데라의 계보: 아브라함 이야기>(11:27-25:11)
(2) <이스마엘의 계보>(25:12-18)
(3) <이삭의 계보: 야곱 이야기>(25:19-35:29)
(4) <에서의 계보>(36:1-37:1)
(5) <야곱의 계보: 요셉 이야기>(37:2-50:26)
그리고 이들 세 개의 주요 <족장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련의 공식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각 이야기가 어떻게 <오경> 전체의 주제를 계승하고 발전시켜가는 가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의 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논의해 봅시다:
<오경> 전체의 주제는 언약의 틀 안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만,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작은 주제들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주제들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경우에서처럼(12:1-3), 각 이야기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경우 ‘리브가’는 자신의 태중에서 두 아들이 싸우는 것을 걱정하며 하나님에게 물어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신탁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아닌 게 아니라, 두 아들의 갈등과 분쟁에 관한 이야기가 <야곱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다투기 시작하여, 태어날 때에는 동생 ‘야곱’이 먼저 나오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으며, 성장해서는 형을 속여 장자 권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에서’의 복수심에 불타는 분노로 ‘야곱’은 ‘바단-아람’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20년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셉 이야기> 역시 그의 장래에 관한 계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계시란 다름 아닌 그 유명한 두 차례의 꿈으로서, ‘요셉’의 아버지와 형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일 것이라는 내용의 계시를 말합니다. 이 계시는 결국 46장에서 성취를 보게 되는데, 그가 ‘이집트’의 총리로 있을 때 가족들이 그를 만나러 ‘가나안’에서 내려왔을 때입니다.
이처럼 <족장 이야기>가 각기 서두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족장으로서 믿음의 조상이긴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이제 <야곱-요셉 이야기>의 제 1부에 해당하는 <이삭의 계보: 야곱 이야기(1)>는 대략 13개의 장면이 아래와 같이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도 이런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았습니다만, 이곳 <야곱 이야기>에서 그러한 구조를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대칭 구조는 C, D, E, E1, D1, C1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에서’를 만나 축복해 주고 있는 장면은(C1)(33:3), 20년 전 ‘에서’가 ‘야곱’을 축복해주던 장면과(C)(27:29) 거울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D와 D1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있는데, 한번은 그가 ‘가나안’을 떠나 때였고, 또 한 번은 그곳으로 되돌아올 때였습니다. 또한 그가 삼촌 ‘라반’을 만나고 헤어지는 두 장면(E와 E1) 역시 뚜렷한 대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혼하는 장면과 ‘라반’을 속이는 장면(F와 F1) 사이에는 어떤 뚜렷한 유사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 모두에서 일종의 계략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는 합니다. 즉 ‘라반’은 속임수에 가까운 계략으로 ‘야곱’과 ‘레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는가 하면, 후에 ‘야곱’은 역시 계략으로 ‘라반’이 그에게 임금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면 B와 B1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장면에서 뚜렷하게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삭’이 이들 족속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야곱’은 정반대로 적대적이며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을 봅니다. 처음과 마지막 두 장면은(A와 A1) 가장 느슨한 관계에 있습니다만, 처음과 마지막으로 두 형제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유사성을 찾을 수는 있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중심 무대에서(G) ‘야곱’의 자식들이 태어나는 이야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헬’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나는 장면은(30:22-24) 전체 <야곱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야곱’은 삼촌에게 귀향을 뜻을 밝히며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30:25). 물론 ‘라반’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이를 거부하지만, ‘야곱’에게 있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유일한 아내로 생각하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제야말로 (독립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이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룬다는 점은 유사한 대칭 구조를 가지는 <대홍수 이야기>의 중심 무대와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역사와 인간의 대소사를 섭리하신다는 화자의 선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8:1상)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30:22상)
<야곱 이야기>의 자료비평적인 연구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견해는 본문 속에 세 개의 자료가 혼재해 있다는 것인데, 혹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상대적인 분량까지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1) <야훼 전승>(60%)
(2) <엘로힘 전승>(28%)
(3) <사제 전승>(12%)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야기>의 경우에서처럼 <사제 전승>을 여전히 다른 전승이나 편집자의 작업으로 보기도 하지만, <엘로힘 전승>은 아예 전무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 28과: 야곱과에서-첫 만남
28
야곱과 에서: 첫 만남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25:19a)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야곱 이야기>의 첫 단락의 시작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단락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람마다 다소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를 따라 25장 끝(25:34)까지로 합니다. 범위를 이렇게 정하는 데에는 <데라의 계보>의 첫 번째 단락(11:27-12:9)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서론의 기능을 했던 것처럼, 이 단락 역시 <야곱 이야기>의 서론이자 핵으로 기능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는 향후 전개될 이야기의 방향과 성격을 예고하고 예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도표에서 보듯이 서론은 앞으로 <야곱 이야기>에서 펼쳐질 주제들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정보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어떤 주제들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시도해 보기 바랍니다.
우선 ‘이삭’의 가족 관계에 대한 언급에서 ‘라반’과 ‘바단-아람’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19-20절). 알다시피 ‘리브가’의 오빠 ‘라반’은 그의 딸들을 ‘야곱’과 결혼을 시키게 되며, 향후 20년에 걸쳐 주인공 ‘야곱’의 생애를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될 것입니다(29-31장).
‘리브가’의 불임(不姙)은 그의 시어머니 ‘사라’가 겪었던 고통을 기억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소개될 자신의 며느리 ‘라헬’의 불임도 함께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들 여 족장(女族長)이 겪는 유사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지만, 화자는 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이곳에서 화자의 관심사는 앞으로 태어날 두 아들 간의 갈등과 충돌에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 두 형제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모습은 이어지는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27, 32-33장). 이런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부모의 편애가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을 편애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27-28절).
그리고 장자의 권리에 대한 ‘에서’의 태도입니다. 그의 고유한 권리를 가볍게 아는 그의 태도는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는 하나님의 예언에 대한 사전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앞으로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29-34절; 27, 32-33장).
독자들이 본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정보는 이처럼 미래에 대한 전망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회고 또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첫 단락과 여러 가지 점에 있어 공통점이 많습니다:
(1) 그 족보가 이러하니라: 25:19; 11:27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5:19; 11:27
(3)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여: 25:20; 11:29
(4)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더니: 25:21; 11:30
(5) 하나님의 신탁(신탁을 향한 여정): 25:22; 11:31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25:23; 12:1
(7) 예언과 약속: 25:23; 12:1-3
(8) 첫 성취: 25:24-26; 12:4
(9) 첫 아들 탄생 시 당시 족장의 나이: 25:26하; 12:4하
(10) 두 번째 성취: 25:27-34; 12:5-9
(11) 아내인가 누이인가?: 26:1-11; 12:10-20
이런 구성이나 표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임을 <창세기: 서론>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설화의 세 가지 기법에 대해서 서론 부분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1) 반복(recursion), (2) 현재화(contemporization), (3) 예시화(foreshadowing)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삭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아브라함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은데, ‘에서’와 ‘야곱’의 장래에 관한 예언만 하드라도(25:23), ‘아브라함’에 관한 약속과(12:1-3) 연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실은 <아브라함 이야기> 내에서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의 신학적 배경을 이루는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는 신탁 역시 수많은 갈등 끝에 궁극적인 승리로 끝나게 될 ‘야곱’의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전승이나 역사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는 여느 본문과 마찬가지고 그 대답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크게 두 개의 자료가 본문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목과 가족 관계에 대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는 구절들은(19-20절, 26절) 전형적으로 <사제 문서>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어지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는 구절들에서는(21-2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언급하고 있어 <야훼 문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 번째 에피소드에(29-34절)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27:36과의 유사성을 들어 <엘로힘 전승>으로 보기도 하나, 또 한편에서는 별도의 독립적인 전승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 단락 역시 <야훼 문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일단의 학자들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는 21-34절 전체에서 한 구절(26절하)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일 전승 <야훼 문서>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사제 문서>로 규정한 바 있는 구절들에(19-20절, 26절하)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26절하)는 구절만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관한 사전 정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고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문의 역사와 관련한 최종적인 결론은 두 전승을 결합한 후대 편집의 손길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Wenham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참고도서 2, 173쪽).
신학과 신앙
1. 제목(19절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9절상)
‘이삭’의 이름은 27장 이후에는 거의 나타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 구절을 전체 <야곱 이야기>(25:19-35:29)의 제목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 다소 부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여전히 이 기간 내내 한 가족의 우두머리였으며, 따라서 두 아들의 행적은 실은 그의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취급함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은 다른 계보(톨레돗)와는 그 형식에 있어 사뭇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한 족장의 계보를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먼저 거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식이 기능하고 있는 바는 ‘이삭’의 출생과 관련해서 과거를 회고하고 동시에 미래를 전망해 보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이삭의 가족 관계(19하-20절)
19하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19절하-20절)
이 구절은 ‘이삭’의 직계 가족과 결혼을 통해서 맺어지는 친족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밧단-아람’과 ‘라반’에 대한 언급은 앞으로 ‘야곱’의 여정과 그곳에서의 결혼을 예고해주고 있기도 합니다(29-31장). 이곳에서 ‘라반’을 소개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삭’이 결혼할 당시 나이가 얼마였는지에 관한 정보도 이 구절이 유일합니다. 만일 <족장 이야기>를 단순히 연대기적으로만 이해한다면(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때), ‘이삭’이 결혼을 한 시기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기 35 년 전 쯤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측과 관련해서 24:62-67에 관한 해설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나이 60에 두 아들을 낳았다는 언급은(26절) 임신과 관련해서 ‘리브가’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밧단-아람’은 <창세기>에서만 등장하고 있는 이름입니다(28:2, 5-7; 31:18; 33:18; 35:9, 26; 46:15; 48:7). 이곳은 아마 ‘메소포타미아’ 북쪽, ‘하란’ 인근 지역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야기에 따르면 ‘브두엘’, ‘리브가’, ‘라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밧단’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 ‘들’이나 ‘도로’ 등일 것으로 추정되며 ‘하란’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브두엘’과 ‘라반’을 구태여 ‘아람’ 족속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만,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을 ‘아람’ 족속의 후손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 연계시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신 26:5).
3. 에피소드 1(21-26절)
첫 번째 에피소드는 ‘야곱’의 일생에 대한 일종의 풍향계 내지는 안테나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며, 세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장면 1이삭의 중보 기도(21절)
장면 2리브가의 임신(22-23절)
장면 3쌍둥이의 탄생(24-26절)
<창세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이삭’의 모습은 다소 소극적이며, 가족이나 기타 주변 인물들의 영향에 이끌려 살아가는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래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여자 족장의 불임은 <창세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자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21절상)
이 문장에서 그의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동사 רתע(아타르)는 기도를 나타내는 어휘 중에 다소 보편적이지 않은 단어로서, 심각한 질병이나 재난 시에 이들이 사라지기를 간구하는 행위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에서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을 제거해 달라고 하면서 이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출 8:4, 5, 24, 25, 26). 이 단어는 또한 기도를 드리는 자의 강력한 중보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과연 ‘리브가’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임신한 시기와 관련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이 이런 주장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절후)
아버지 ‘아브라함’의 기도와 마찬가지로(15:2; 20:17; 21:1-2), ‘이삭’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끈질기고도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쌍둥이를 허락하셨는데, 산모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큰 고통으로 나타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殆)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 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절)
어미 배 속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산모에게 육체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싸우다”(ץצר, 라자쯔)는 “후려치다” 또는 “분쇄하다”는 의미로서, 상징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행위와 관련해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는 “뼈들이 서로 부딪히다”거나(삿 9:53‘ 시 74:14), 또는 “갈대가 부러지다”(사 36:6) 등의 표현에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튼 두 아이가 배속에서 싸우는 것이 이처럼 극렬한 육체적 고통이었음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고통스러운 기도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 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절후). 마치 무슨 심상치 않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고통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자식들이 태어나 장성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27:46). 갈등과 분열은 비단 <창세기> 뿐만 아니라 성경의 화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쌍둥이의 갈등은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래하고 있지만, 이 둘은 어미 배속이 함께 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느꼈던지, 태어나기 전부터 어미의 자궁을 찢어놓을 정도로 극렬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결혼 후 20 년 만의 임신으로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어야 할 ‘리브가’의 한숨과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 이상의 절망과 비탄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갑니다. 그녀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신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3절)
운문 형식의 이 신탁은 두 쌍의 행(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행의 두 번째 절은 첫 번째 절을 반복하고 보강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로부터 열방이 나누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을 이미 받은 바 있어17:4-6, 16), 첫 번째 행은 그 내용 면에 있어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전 약속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두 국민이 태중에 있다”는 첫 절이 반드시 쌍둥이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두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는 두 번째 절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적어도 쌍둥이일 것이라는 암시가 드러나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하드라도, 과연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는 ‘리브가’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막 태어날 쌍둥이를 두 민족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중에서부터 두 민족이 나누인다는 말을 과연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두 번째 행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탁은 일반적인 내용에서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역시 신탁의 내용이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쌍둥이 중에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더 클 수(나이가 많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신탁의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내용인 즉은 ‘야곱’이 ‘에서’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인데, 즉 이스라엘이 ‘에돔’을 복속시키게 될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탁의 마지막 절은 특유의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야곱’(בקעי)과 ‘노예’(דבעי; 야바드)는 음성학적으로 아주 유사할 뿐만 아니라 한 단어 내에서 각기 세 개의 동일한 자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다른 이름 ‘세일’(ריעשׂ)은 ‘어린 자’(ריעצ, 차이르)와 유사한 언어의 유희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리브가’가 이 모든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예언은 쌍둥이가 실제 태어남으로써 그 의미가 다소 분명해집니다: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과연) 쌍둥이가 있었는데(24절)
비로소 두 민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소 분명하게 되었으며, 나이 많은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 역시 신뢰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태어나는 과정이 그 예언을 이룰 하나의 징조처럼 보입니다: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 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상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25-26상)
‘에서’의 모습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붉다’(ינומדא, 아드모니)는 표현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다윗’의 모습을 그리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한데(삼상 16:12; 17:42), 이곳에서는 ‘에서’의 피부색이 붉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머리털 등이 붉은 것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이 단어가 ‘에서’의 또 다른 이름 ‘에돔’(םדא)과 관련해서 언어의 유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털옷”(רעשׂ, 세아르) 역시 ‘에서’(ושׂע)를 연상시키는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털이 덥수룩하며 불그스레한 ‘에서’를 때로 <길가메쉬> 서사시의 난폭한 영웅 ‘엔키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만, 당시 근동문화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도 이런 모습은 야만성과 난폭함과 연계시키려는 편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에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화자 역시 그에 대한 편견을 숨기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에서’라는 이름은 다른 근동 문헌에서 그 유래를 찾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랍어’ 중에 ‘숨기다’ 또는 ‘덮다’라는 의미의 단어 ‘가시야’가 알려져 있으며, 개연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페니키아’ 신화에 등장하는 한 사냥꾼 ‘오우수스’와 연계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도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곱’의 기원에 대해서는 꽤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통상 이 이름은 주전 이천년 초반의 전형적인 ‘아모리’ 계열의 이름으로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다(또는 상주시다)”는 의미의 ‘야코벨’(לא-בקע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나 다른 지역의 비문에서 이런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기원이 어떠하든 화자는 그 기원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인물의 탄생에 얽힌 사건과 관련해서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야곱’은 ‘야켑’(בקע) 즉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이름이 상징하는 바는 다양합니다. 어미의 자궁안에서 시작된 형제간의 경쟁과 갈등은 탄생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것은 나머지 이야기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26절하)
<창세기> 화자는 여러 곳에서 첫 아들이 태어날 때 그 아비의 나이를 밝히고 있는데,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합니다(5:3, 6, 9, 32; 11:26; 16:16; 21:5). 그런데 이곳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그 출산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그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출생을 바라보는 부모의 즐거움이 ‘리브가’가 들었던 불길한 예언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쌍둥이의 순산(順産)은 아비 ‘이삭’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미 ‘리브가’의 임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4. 에피소드 2(27-28절)
첫 번째 에피소드가 쌍둥이의 임신과 출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출생 이후 쌍둥이 형제의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7-28)
두 사람의 기질은 그들이 성장하면서 더욱 극명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에서’의 기질이나 특성에 대해서는 크게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야곱’을 “조용한”(םת, 탐)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perfect)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만(참고, 욥 1:1, 8; 2:3), ‘야곱’이 이런 칭찬을 받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무흠한 자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도 과연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이었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야곱’이 활달하고 외형적인 형과는 대조적으로 내면적이고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타입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아마도 같은 기원을 가지는 다른 동사인 םמת(to complete)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또한 그가 “장막 안에 거주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후에 ‘이삭’이나 ‘아브라함’처럼 목자나 목동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두 형제의 기질뿐만 아니라, 부모들이 가진 또 다른 특성까지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그동안 이야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야곱’처럼 조용하고 수동적이며 평화롭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만, 이에 덧붙여 미식가 내지는 식도락가로 소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맛있는 고기를 가져다주는 아들 ‘에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두 형제간의 갈등은 악화되고, 이들의 어미 ‘리브가’는 반대로 ‘야곱’을 편애함으로써 그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왜 ‘리브가’가 ‘야곱’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조용해서 순종적이며, 주로 집안에서만 머물러 있어 그의 형보다 더 다루기가 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두 구절은 이어지는 27장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즉 ‘리브가’는 남편의 식도락과 아들 ‘야곱’의 다루기 쉬운 온순한 기질을 사용해서, 자신이 편애하는 아들이 장자 대신 축복을 받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지만 그 일로 해서 결국 아들을 잃고 맙니다. 이리하여 두 형제는 탄생 이후 성장해 가면서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예언을 신비한 방식으로 성취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5. 에피소드 3(29-34절)
앞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예언한대로, 두 형제 사이의 분열이 어떻게 심화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는 나머지 예언 즉 “큰 자가 어린 자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어떻게 그의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29절)
언제,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화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에서’가 심히 피곤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근동 지방에서 피곤은 주로 목마름과 허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삿 8:4; 사 29:8; 욥 22:7). ‘에서’ 역시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음식과 휴식입니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30절)
그러나 이 문장은 정확하게 분석하자면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서, ‘에서’는 그렇게 지쳐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한글 번역은 이런 과장된 표현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붉은 국”은 사냥꾼 ‘에서’가 군침을 삼키기에 충분한 훌륭한 고기 국이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이름을 “붉다”는 의미의 ‘에돔’(םדא)으로 불렀겠습니까! 화자의 언어의 유희가 다시 한 번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태도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31절)
무엇보다도 ‘에서’의 간절한 요구와는 달리 ‘야곱’은 아주 퉁명스럽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먼저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도 지금 당장 팔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First, sell me your birthright”(NIV). 이런 태도로 미루어 그의 요구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노려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이용하는 교활함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הרכב, 베코라)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장자는 아비의 능력의 상징이고(49:3), 하나님에게 바쳐야 할 첫 열매입니다(출 22:28). 그리고 부모의 유산을 나눌 때 나머지 형제들의 두 배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관습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친숙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이런 관습이 보편적으로 실시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야곱’의 이런 요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구가 무엇이든 간에 ‘에서’는 그가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특권들을 양보해야 할 판입니다. 그가 이 모든 권리들을 판다고 해서 장자로서의 위치나 입지는 변하지 않겠지만(27장 참고), ‘장자의 명분’이 <창세기>를 관통하는 주제 언약의 “축복”(הכרב, 바라크)과는 철자의 순서만 일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렇게 가볍게 여길 그 무엇은 아님이 확실해 보입니다. 언약의 축복은 실은 26-27장에서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에서’가 양도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엄청난 손실을 불러오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서’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허풍과 수다를 떨면서,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권리를 양도하려 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32절)
그럴수록 ‘야곱’은 냉혹한 치밀함으로 형의 어리석음을 한껏 활용하고 있습니다. 불과 세 단어로 이루어진 그의 말이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당장) 내게 맹세하라”(33절상).
화자는 이어지는 두 절에서(33하-34절상) 형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불공정 거래의 이중성을 교차대구의 형식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이 거래가 어떤 점에서 불공정합니까? ‘에서’는 팔았고 ‘야곱’은 주었다는 거래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장자의 명분의 대가로 ‘에서’가 얻은 것이 30절에서 기대할 수 있는바 맛있고 풍성한 고기 수프가 아니라, 한 접시의 떡과 팥죽이 고작입니다. 이런 불공정 거래에 대한 화자의 평가나 도덕적 판단을 듣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야곱’의 교활함과 ‘에서’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놀랍고 황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에서’의 행동은 독자들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합니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34절하)
불과 조금 전만 하드라도 크게 떠들며 과장된 언행으로 오히려 ‘야곱’을 압도하던 그가, 마치 홀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없이 동생과 맞바꾼 떡과 팥죽 한 접시를 받아 마시고는 그냥 떠나가다니 말입니다! 화자는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네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이 거래에 대해서 정말 아무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던 것일까?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도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화자는 이런 의문들에 대답이라도 하듯 지극히 이례적으로 ‘에서’의 행동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절하)
화자 역시 장자의 명분이 지극히 중요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번 거래에서 ‘야곱’의 야비한 행동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문제는 ‘야곱’이 아니라 ‘에서’입니다. 화자 역시 ‘야곱’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면서, 유독 ‘에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겠죠. 물론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야곱’도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문제의 핵심은 ‘에서’의 무책임한 선택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김으로써, 자신을 우습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마저 우습게 여겨버렸습니다. 결국 그의 자리는 ‘야곱’이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교훈과 적용
1. 야곱: 선택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정의가 실패하고 불의가 득세했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권력의 최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도 본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새 출발의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 이런 식의 취임사로 자신의 임기를 시작하는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의 역사 인식에는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늘 정의롭고 깨끗했던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들도 정의와는 거리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야곱 이야기> 역시 이점에서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주인공 ‘야곱’은 꿈꾸는 자나 예언자는 물론이고 용사, 정치가, 행정가라고도 불릴 수 없는 위선자였으며, 권모술수에 능한 자였고, 계략에 뛰어난 자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죽고 난 후에도 조상들의 무덤 옆의 넓고 안락한 곳에 묻힐 수 있었는데, 이 역시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 미리 준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폴 존슨). P. Johnson. 「유대인의 역사 1」유대인의 역사 1. 김한성 역. 서울: 살림, 2005.
그가 성공에 이르는 길을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에게 하나님은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성공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태어나기도 전부터 말입니다. 물론 자식이 어미의 배속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부모의 기대와 사랑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만, 문제는 그 배속에 혼자가 아니라 둘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배속에 몇 명이 들어 앉아 있든 부모는 태어나는 자식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자연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쌍둥이 중에서 하나 만을 선택하여 사랑하겠다고 미리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잘못을 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이것은 편애의 극치입니다. 이 세상 어느 부모도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또한 정의롭지도 못한 처사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처럼 교활하고 야비한 자가 득세하고 성공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세상의 법정에서도 이런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국가나 사회라면, 동생이 만들어놓은 허위 날조 계약에 속아 인생 전체를 날려버린 형 ‘에서’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 때문에 이성과 합리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걸려 넘어집니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편애와 불공정과 비 윤리와 모순이 승리하고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야곱’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런 영화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듯합니다. 쌍둥이 중에서 먼저 태어난 형 ‘에서’는 여러 면에서 ‘야곱’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야곱’보다 먼저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체력적으로나 성격에 있어 동생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활달하고, 단순하며, 잔꾀에 능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그는 장자로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는 모든 면에 있어 소위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자연 선택”(supernatural selection) 즉 하나님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합니다. 왜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일에 무슨 이유가 있고 권리를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같은 학과에 재학 중이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필자의 친구가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와 영문도 모른 채 한바탕 치고 받으며 싸움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를 빼앗겨 분하고 억울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일을 놓고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며 시기하고 질투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왜 나는 사랑하지 않는가?”하며 따지고 대든다면 혹시 이 친구와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이나 결혼은 서로를 택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상대를 싫든 좋든 버리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해서가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 들고 있는 것도 다소 조잡하고 억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에서’를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말 1:2).
이 같은 표현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 즉 일종의 시적인 대조 반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렇다 하드라도 부모가 여러 자식 중에서 어느 한 자식만을 편애한다면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미움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 9:14-15)
그는 지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하는 자를 꾸짖고 반박하며 우격다짐으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무슨 논쟁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더 이상 뾰족한 대답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랑과 선택에 무슨 이유와 논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른다든가, 직장을 선택한다든가, 또는 회사가 사원을 뽑는 등의 행위와는 전혀 다른 차원처럼 느껴집니다. “자연 선택”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항은 탁월함이나 우수함 등일 것입니다만, “초자연 선택”에서 고려 사항은 그런 것이 아닌 듯합니다. ‘바울’의 주장을 따르자면 그것은 오직 선택하는 자의 “자유의지”에 의할 뿐입니다. 무슨 특별한 논리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억울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집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특히 ‘에서’의 편에서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설상가상 바울 사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태어나기도 전부터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을 당해버렸는데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좌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에서’의 기분은 조금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야곱’의 편에 서서 이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그 역시 자기가 편애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복권에서 일등 당첨으로 대박을 터뜨린 자는 복권제도가 불합리하다든지, 당첨되지 못한 자들이 억울해 할 것이라든지 하는 등의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다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겠지만, 뜻밖의 횡재와 행운에 의기양양 하며 날뛰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경기는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습니다. 아무리 체격이 좋고, 실력이 좋으며, 많은 훈련을 쌓았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게임입니다. 게임의 법칙은 누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의 진행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의 후손들에 관한 사실입니다. 이들은 게임의 법칙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이나 의심도 없었으며, 경기에서 처음부터 패배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나 측은함도 보이지도 않고 수 천 년을 잘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은 ‘자연선택’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손 대대로 전수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축구대회 개최국에게 주어지는 자동 참가권 같은 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그 생각이 틀렸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친족이자 동료인 랍비로부터 말입니다:
6하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롬 9:6b-7)
예수님은 더 끔찍하게도 유대인들을 향해서 마귀의 자녀들이라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요 8:41). 청천벽력 같은 통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고, 마귀의 자손이라고 하니 눈알이 뒤집힐 일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스라엘’인가?”라는 질문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더 근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함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분노와 낙담 가운데서 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롬 11:1)
그러므로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롬 11:11)
질문의 요지인 즉은 과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폐기처분하셨으며, 이스라엘은 영영 구제불능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런 질문들과 힘든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모두는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익히 알게 되었지만, 아직 ‘야곱’의 후손들만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정작 궁금한 것은 어떻게 다른 민족도 아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일에 실패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롬 9:4-5a)
더 이상 무슨 계시가 필요 했겠습니까 만은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원인을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습니다: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1:2-3)
우리 모두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속성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의(義)는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율법과 그리스도. 그런데 ‘이스라엘’은 불가능 즉 전자(前者)를 택했고, 그것이 그들의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열렬히 좇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말할 것도 없고 <창세기> 화자도 결코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는 바는,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입을 육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송받던 ‘노아’도 홍수 후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아브라함도 이점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야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들 중 누구도 백합처럼 순결한 영웅이 아닙니다. 허물과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셨고, 선택하셨으며, 이들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하거나 좌절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처럼 정의를 원하나, ‘포르디아’가 말하고 있듯이 아무도 정의를 통해서 자비를 입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법과 정의가 판치는 곳에 심판과 처벌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법과 정의로써가 아니라, 자비와 은혜로 ‘아브라함’과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라디아’ 교회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다시 종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각종 절기 예배, 각종 헌금, 각종 헌신과 서원 등을 지금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나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은 냉소로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것이 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2. 에서: 遺棄
자, 이제 ‘아브라함’의 선택인 ‘에서’의 기분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야곱’의 후손이라 해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철저한 응징과 보복을 받게 된다는 선언을 듣고 있는 기분은 지금 어떠할까요? 여전히 우리나라 일부 좌파 인사들처럼 분노와 한(恨)으로 가득 찬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적어도 상대적인 박탈감은 해소되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배고픈 것보다는 배 아픈 것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우리네 심성과도 잘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 아픈 것이 해소된 것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곱’도 별 수 없구나. 그래서 고소하다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는 뜻이지요.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작 배고픈 것을 어떻게 해소하는가에 있습니다. 모든 잘못된 것을 오직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역사 인식을 버리고,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그 방법을 찾아나서야 할 때인 것입니다. 즉 어떻게 “선택”이라는 경기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연습도 필요 없고, 순위도 없는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 ‘에서’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 경기에 관심이 있기라도 하다면 말입니다.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과연 경기에 참여했습니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롬 9:19)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일을 누가 거역하며 바꿀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경건하고 예의바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제사장 ‘엘리’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섬기고 있던 ‘실로’의 성소는 부정부패로 들끓고 있었고, 종교적 배금주의의 도가니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하나의 거대한 벤처사업이었습니다(유진 피터슨). 그의 두 아들에게 있어 종교는 특권과 권력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기회였습니다. 백성을 감독하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는 자신을 감독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종교적인 지위 때문에 그 사람이 의로운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무명의 예언자와 ‘사무엘’을 번갈아 보내어,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말로(末路)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경고해 줍니다. ‘엘리’는 이에 대해 경외함으로, 심지어 용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 참으로 경견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만일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반드시 이루질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는 경건함이 아니라 태연한 척하는 것이며, 제사장의 허세를 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유진 피터슨).
하나님의 섭리나 예정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보편적인 반응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태도 역시 모든 잘못 된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역주행 하다가 앞에서 오는 음주 운전 차량과 정면충돌한 경우 책임 소재를 가릴 때, 상대가 음주 운전의 책임을 당연히 져야 하지만 나 역시 역주행의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나 섭리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형상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은 항상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고, 그가 가진 특권들을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후 재산의 대부분을 가지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며, 한 가계의 족장으로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아직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특권과 영예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말도 안 되는 거래에 그 모든 것을 넘겨주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웬만해서는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화자조차도 이 거래에 대해서만큼은 답답함과 절망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b)
구태여 화자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에서’ 자신의 발언을 통해서 그가 장자의 권리에 대해서 그동안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는데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25:32)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를 영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면서, ‘에서’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14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 12:14-16)
그에 따르면 적어도 세 무리의 사람들이 ‘에서’와 동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2) 음행하는 자; (3) 망령된 자. 성경 외의 유대 문헌에서도 ‘에서’를 가리켜 결혼한 여자들을 상습적으로 쫓아다니며 몰래 만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Hamilton). <히브리서>는 아마도 이런 전승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에서’의 내면세계와 행동을 설명하고 있는 16절을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1) 비윤리적이며 비종교적인 자(RSV, NIV); (2) 간음 내지 불경스러운 자(KJV, ASV).
‘에서’의 행동을 어떻게 표현하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영적 간음을 저지른 자라는 점입니다. 이런 표현은 <호세아>의 맥락에서 볼 때에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영적인 영역이든 육체적인 영역이든 간음이란 결국 가치 전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치가 전도되면 무엇이 진정으로 귀한 것인지 구분이 어려워지며, 따라서 다른 가치 없는 것들과 맞교환까지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처럼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고, 창녀와의 사랑에 빠져 아내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며, ‘가롯 유다’처럼 은(銀) 삼십 냥에 사랑하는 스승을 팔아넘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천원과 백 원의 가치도 구별할 줄 모르는 선천적인 기형이나 정신 장애자로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하기야 왕위와 이혼녀와의 결혼 중 후자를 택한 영국의 ‘심프슨’ 공(公)과 같은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에서의 선택”을 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잘못된 선택이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또는 인간입니까? 책임과 원인을 따지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인 듯합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그 모든 책임이 있다면(‘에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를 미워한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습니까? ‘에서’에게 사과하고 ‘야곱’의 족보 속에 포함시켜주었습니까? 한편 ‘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인생을 함부로 살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나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들을 우습게 알고 내팽개쳐도 되는 것입니까? 이 모든 논쟁이 부질없는 형이상학적인 노름 같기도 합니다만,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신학적 과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대답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책임 소재를 놓고 열렬히 공방을 벌이고 있는데도, <창세기>나 <히브리서> 기자들은 무심하게도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책임 소재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구도 ‘에서’나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권면을 주는데 있습니다.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든 ‘에서’는 자신이 가볍게 여겨 내팽개친 것들을 다시는 되돌려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에서’는 이방인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는 ‘이삭’의 아들이지 ‘아비멜렉’이나 ‘소돔’의 왕 ‘베라’의 아들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아브라함’이며 어머니는 ‘리브가’입니다. 그의 선조들은 모두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그는 ‘로얄 패밀리’에 속한 자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좋은 조건과 신앙적 유산을 가지고 태어난 자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모태신앙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던 자가 아니라, 그 축복 속에 태어난 자입니다. 다만 그 모든 축복들을 다 잃어버린 것이지요. 영영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에서’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 박았다니요?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우습게 여기고 있는 축복과 유산과 장자 권은 무엇입니까? 늘 내 곁에 지천으로 널려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습게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은 아닙니까? 집에 있든, 직장에 있든, 가게를 가든, 서점을 가든, 호텔을 가든, 군대를 가든, 외국 여행을 가든, 어디를 가든 <성경>은 널려 있습니다. 라디오나 TV, 잡지나 신문을 통해서 거의 매 순간마다, 거리 곳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나는 하루 24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하루의 몇 분의 일을 하나님과 대화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시간과 돈과 재능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일 년 중 단 한 번이라도 <성경> 공부를 위해 선생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라면 나는 ‘에서’보다 더 못한 자입니다. 그는 당시 <성경>은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하루의 몇 분의 일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고, <성경>을 살아내는 것이 기도의 궁극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 사도들과 주님의 모범이자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쁘고 중요한 일들 때문에 이를 생략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에서’와 다를 바 없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장 극적이고 궁극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유진 피터슨’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서 혼자서 드리는 삶으로서의 예배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진정한 것이었음을 드러내주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증거인 셈입니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예배를 드립니까? 주일 하루뿐입니까? 그렇다면 ‘에서’가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서>의 권면과 경고를 읽어봅시다:
18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25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 일까보냐(히 12:18-25)
연습과 토의
1. ‘이스마엘’의 탄생과 ‘야곱과 에서’의 탄생을 비교 설명해 봅시다. 이 탄생과 관련된 두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을 동시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신비하고 난해하기조차 합니다. 이를 각기 ‘야곱’과 ‘에서’의 편에서 설명해 봅시다. 로마서 9-11장을 함께 읽고 이해해 봅시다.
3.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프로그램이 성경공부와 기도회라는 自嘲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에서 교회”라고 명명해도 괜찮을까요?
4. 바람직한 새벽 기도회의 형식이나 내용은 어떤 것이 좋을지 토의해 봅시다. 당신은 홀로 앉아 하나님과 씨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