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7과
요셉 가족:이집트 방문(2)
김태정 목사창세기 43:1-45:28약 164분 분량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43:15)
‘요셉’ 형제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을 담고 있는 본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요셉 이야기>의 절정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가 <창세기>의 한 부분으로서 충실히 기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서 세부 주제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요셉의 꿈”과 관련된 것으로서, 가족 간의 “용서” 내지는 “화해”입니다. 본문을 <요셉 이야기>의 절정으로 규정하는 것도 바로 이 주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즉 ‘유다’가 이복동생 ‘베냐민’을 위하여 대신 인질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으며, ‘요셉’은 이에 감동하여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장면은 배다른 형제들이 오랜 갈등과 불신을 끝내고 마침내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내는 극적인 절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언급하거니와 <창세기> 내의 모든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전체적인 이야기 틀 안에서 이해하고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족장 이야기>를 대하는 가장 우선적인 감상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상호관계나 심리적 변화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특정 에피소드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즉 왜 그 이야기가 그곳에서 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세기>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일 것입니다. 본문 감상 역시 이러한 순서에 따라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열두 족장의 아버지인 ‘야곱’으로 시작해서 ‘야곱’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벽두에,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자식들을 ‘이집트’로 다시 보낸 사람도 ‘야곱’이며(43:2), 말미에 “내가 죽기 전에 내 아들 ‘요셉’을 보러 가리라”고 결정한 자도 그입니다(45:28). 그는 여전히 한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매사의 주도권과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자입니다. 즉 그는 이전에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베냐민’만을 ‘라헬’의 유일한 아들로 여겨 그에 대한 총애와 편애를 숨기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요셉’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44:27-30), 나머지 자식들에 대해서는 불신과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43:6; 54:26). 물론 자식들의 강권에 못 이겨 ‘베냐민’이 ‘이집트’ 여행에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는 해줍니다만, 이 역시 나름대로의 계산과 기대에 따른 것입니다. 계산이라 함은 ‘베냐민’을 보내되 많은 선물도 함께 딸려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선물이나 뇌물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입니다. 이전에 그의 형 ‘에서’로부터 극적인 “용서”와 “화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뇌물 덕분이었습니다. 기대라 함은 그가 그동안 인생의 위기 때마다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번에도 그가 준비한 선물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람” 즉 ‘이집트’ 총리의 자비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43:11-14), ‘베냐민’을 보내는데 합의를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자식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과거 속에 살고 있을까? 그들의 애비 ‘야곱’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입니다. 모두는 아니라 해도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유다’만큼은 달라져 있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지난 날 그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털어놓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야곱’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아직도 과거에 저질렀던 죄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지요. ‘요셉’이 자신들을 심하게 다룬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참고. 42:21). 그들의 양심의 가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점차 고조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일차 여행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각자의 곡식 자루에 돈이 든 것이나, 두 번째 여행에서 ‘요셉’이 초대한 점심 식탁에서 나이 순서대로 앉게 된 사실 등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銀盞)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충격은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유다’는 자신들이 저지른 집단적인 죄를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들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44:16). 이는 마치 자신들이 그 은잔을 훔쳤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죄악은 이전에 그들이 ‘요셉’에게 저질렀던 바로 그 죄악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탄원을 하는 자리에서 이처럼 자신들의 지난 잘못까지 들추어내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뉘우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베냐민’이 ‘야곱’에게 의미하는 바는 이전에 ‘요셉’이 ‘야곱’에 대해서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있어 마치 유일하게 남은 유복자와 같은 존재였으며, 두 사람은 마치 삶과 죽음의 고리로 연결된 것 같았으며, 당연히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는 ‘야곱’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며, ‘요셉’을 기꺼이 노예로 팔아 그 대가로 돈을 챙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37:27).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가로 기꺼이 노예를 자청하여 나서고 있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44:33-34)
진정으로 회개한 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만 아니라면 이보다 더 극적인 회개의 예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37장에서 잠시 소개하고 있는 그의 어린 시절만 아니라면 ‘요셉’은 이상적인 인물의 전형(典型)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실함과, 근면함과, 현명함과, 활기참과, 그리고 신앙적인 경건함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적어도 그가 형제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요셉’은 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의도적으로 함정을 파서 형제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혐의로 투옥시키려 드는 무자비한 독재자의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요셉’의 형들의 눈에 비친, 다분히 의도된 것이지 그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라는 점은 화자나 독자 모두 익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형들 앞에서는 짐짓 엄하고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시로 혼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42:24; 43:30), 형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그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대성통곡을 하기에 이릅니다(45:1-2, 14-15). “용서”와 “화해”의 눈물이 마치 봇물 터지듯 흘러내리는 장면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피해자의 몫이라면, 회개와 뉘우침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용서”와 “화해”가 <요셉 이야기>의 표면적인 주제, 즉 ‘요셉’의 “꿈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화자의 관심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보다 큰 주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이미 일찍부터 이 주제에 대해서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즉 ‘요셉’이 노예로 있을 때에나 감옥에 갇혔을 때조차도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39:2, 21, 23). 동일한 주제를 이제는 ‘요셉’ 자신의 입으로 직접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네 번에 걸쳐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45:5, 7-9)
더 나아가 ‘요셉’의 청지기를 통해서도 강조점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43:23). 이 청지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주인 ‘요셉’의 명령으로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했을 텐데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해서 ‘요셉’은 다시 한 번 동일한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처럼 <요셉 이야기>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무대 위에 등장하고 있는 그 모든 인간 주인공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는 무대 밖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비단 <창세기>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나 화자들의 대 전제이기도 합니다. 아래 두 본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5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사 10:5-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예수님이나 사도들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 26, 30)
25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5, 28)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역사와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능력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겠으며, 병자를 낫게 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중보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의 그 모든 주인공들이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연극에서 맡은 역할만을 충실하게 연기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 못지않게 “인간의 책임”을 꼭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의 형들이 증오심으로 그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결코 정당화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가족 간의 증오심과 편애는 ‘요셉’으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부당한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장장 22년에 걸쳐 고통과 비탄에 잠겨 살게 하였으며,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잊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기억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42:21);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44:16상).
온전한 용서와 화해는 ‘유다’가 “대속적 희생”(代贖的 犧牲) 즉 ‘베냐민’의 석방을 위하여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는 등 온전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형들이 행한 악을 선으로 바꾸시면서 까지 그분의 선을 이루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없었던 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련의 긴 장치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아수르’ 왕을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로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수르’ 왕 역시 교만과 거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사 10:12)
<아모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읍을 치신 것과 똑 같은 이유로 열방들의 성들을 치실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암 3:14)
예수님은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그분의 제자 ‘가롯 유다’에 대한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될 것입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눅 22:22)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신비한 영역 속에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나 의사나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마치 기계가 작동하듯 무심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고백하였듯이, 그분의 언약은 항상 ‘헤세드’ 즉 자비와 긍휼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45:5, 7)
더 나아가서 ‘헤세드’의 언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그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주변 모든 민족들 즉 양식이 없어 ‘이집트’로 몰려든 열방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요셉 이야기>의 일차적인 주제가 “회개”와 이에 따른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에 있습니다만, 이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그분의 섭리였다는 이차적인 주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 언약”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고, 너는 열방의 축복이 될 것이라”는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장치였다는 심층적인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43-45장)은 ‘야곱’ 자식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으며, <요셉 이야기>의 한 절정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42장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장면이 동심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도표):

또한 본문은 구조적으로나 그 내용에 있어 42장과 아주 흡사합니다:
이 도표에서 보듯이, 두 번째 ‘이집트’ 여행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중요한 고비마다 첫 번째 여행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예. 43:27, 29; 44:19-23), 둘 사이의 비교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참고: 두 이야기를 비교할 수 있는 본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43:1-2//41:57-42:2; (2) 43:3-8//42:12-20; (3)43:11-12//42:25-28, 35; (4) 43:14-15//42:19, 24, 36; (5)43:16//42:7; (6)43:18//42:28, 35; (7) 43:20-23//42:25-28; (8) 43:23하//42:24; (9)43:26, 28//42:6; (10)43:27-28//42:11; (11) 43:29//42:13, 15; (12) 43:30-31//42:24; (13) 43:33//42:28, 35; (14) 44:1-12//42:25-28; (15) 44:14//42:6; (16) 44:16//42:21; (17) 44:17//42:19; (18) 44:18-23//42:10-20; (19) 44:24-31//42:29-38; (20) 45:1//42:24; (21) 45:3//42:13; (22) 45:4-5//42:21-22; (23) 45:21-23//42:25.
이뿐 아니라 본문 중에는 <요셉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와도 연결될 수 있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 구절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 43:11‘’37:25; (2) 43:26//37:7, 10; (3) 44:19, 28//37:3, 33; (4) 44:31//37:35; (5) 45:4-5//37:27-28; (6) 45:6//41:26-30; (7) 45:8-9//41:38-46.
이로 미루어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는 세 장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43:1-45:28), <요셉 이야기> 내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문학 단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43-44장을 하나의 단위로, 그리고 나머지 45장을 별개의 단위로 구분하기도 하나, 이는 이들 세 장이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구조적이고 수사적인 특징을 무시하고 단지 자료적 특징만을 고려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참고로 45장은 <엘로힘 자료>, 그리고 43-44장은 <야훼 자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에 따르면, ‘요셉’ 형제들의 ‘이집트’ 여행은 원래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두 번째 여행 이야기(43-44장)는 <야훼 자료>로서, 실은 <엘로힘 전승>에 속한 첫 번째 여행기(42장)에 대한 “야훼 버전”(J version)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훼’ 기자는 45장에서 일부 수정을 거쳐 <엘로힘 전승>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이들 주장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보다 최근에는 다른 견해들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 예컨대, 42장과 45장은 <엘로힘 전승>에 속하는 초기 <요셉 이야기>이며, 여기에 43-44장의 <야훼 자료>가 첨가된 것이라는 주장을 말합니다(Redford). 이와는 정 반대의 주장도 있습니다. 즉 43-44장이 초기 <요셉 이야기>에 속했던 것이고, 42장과 45장이 후대의 첨가라는 것입니다(Schmitt).
하지만 이들 자료비평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42-45장을 관통하고 있는 통일성과 일관성입니다. 사실 자료비평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일관성에 있기보다는, 각 본문들 사이에 있지도 않은 차이나 또는 내적 모순을 과대하게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42-45장 사이에 흐르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예컨대, 두 번의 ‘이집트’ 방문은 모두 실제적인 것이며, 이야기의 긴장과 절정을 고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두 번째 여행은 첫 번째 것을 전제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42장과 43장에서 형제들을 대하고 있는 ‘요셉’의 태도는 아주 다르며 대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화자는 42장과 43장이 불가분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43:1-14)
본문 이야기의 첫 장면은 이야기의 배경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그 기능에 있어 지난 에피소드 첫 장면과 병행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곧 있을 ‘이집트’ 방문을 앞두고 가족 간에 있었던 대화에 관한 것입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야기의 분량 즉 대화의 내용이 이전보다 훨씬 더 길고 상세하다는 것인데, 참고로 (1) 42:1-2과 (2) 43:1-14의 두 본문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서 극적인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느리고 완만하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예의 그 친숙한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1절)
이 같은 표현은 <족장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아브라함 이야기>의 벽두에서(12:10), 그리고 직전의 에피소드에서(41:57) 이미 관찰한 바 있습니다. 이어서 이야기의 초점은 그 땅에 내린 기근에서 ‘야곱’ 가족과 그들 사이의 대화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2절)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말할 것도 없이 ‘야곱’과 그의 자식들로서, 화자는 이들을 삼인칭 “그들”로 총칭(總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직전의 에피소드와 연결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난 번 ‘이집트’ 방문에서 가지고 온 양식 모두를 다 “먹었습니다”(lk'a, 아칼). 문자적으로 이 단어는 “끝내다” 또는 “해치우다”는 의미로서, “(기근이 그 땅을) 망하게 했다(hl;K, 칼라)”(41:30)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동사입니다. 먹을 것을 모두 소진한 ‘야곱’ 가족의 현재 상황을 기근이 덮친 그 땅의 상황에 비유하고 있는 화자의 수사(修辭)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야곱’은 자식들을 채근하기 시작합니다. “양식을 조금 사오라”는 그의 어조는 마치 ‘이집트’가 금방이라도 다녀올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듯한 태도입니다. 혹시 ‘야곱’은 ‘이집트’의 최고 실력자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시므온’을 풀어주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잊은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식들을 다시 사지(死地)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정말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면, 지난 번 방문에서 자식들이 사온 양식이 풍부해서 그 일을 잊을 정도로 오래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자식들의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 이번에도 다시 양식을 구하러 떠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희망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에 불과했습니다. ‘유다’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애비에게 상기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3-5절)
‘유다’는 지금 형제들의 대변인 역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에게 ‘요셉’이 제시한 조건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조건은 ‘야곱’도 모르지 않습니다. 이전에 큰 아들 ‘르우벤’을 통해서 이미 들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42:29-35). 그러나 ‘야곱’이 ‘르우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참고. 42:37-38). 그는 이미 장자로서의 신뢰나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였습니다(참고. 35:22; 49:4). 그렇다면 둘째 아들 ‘레위’가 맏아들 노릇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셋째 아들 ‘시므온’은 지금 ‘이집트’에 잡혀있는 상황에서, 아버지와 그렇게 나쁜 관계에 있지 않는 ‘유다’가 장자의 역할을 자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아버지를 설득시켜야겠다는 그의 마음은 대화의 처음과 끝에 ‘요셉’이 위협적으로 제시한 조건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는 데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 5절; 참고 42:15, 20).
‘야곱’이 순순히 응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당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 똑똑해지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6절)
‘야곱’이 겉으로는 자식들이 저지른 무분별한 행동을 나무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실은 ‘베냐민’을 보내기 싫어 시간 끌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나머지 형제들이 모두 합심해서 ‘유다’를 지원하고 나섭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7절)
마치 ‘요셉’의 교묘한 유도질문에 걸려 넘어갔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계 바늘을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려보면 ‘요셉’이 지금 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야곱’과 ‘베냐민’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42:10-16). 오히려 그들 스스로 자원해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 이들이 묻지도 않은 정보를 술술 진술하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씌워진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기에도 이 사람이 자신들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유다’가 아버지의 부성애(父性愛)에 호소하며 결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들의 애비 ‘야곱’이 자신들에게 ‘이집트’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8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 하리이다. 9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8-10절)
자기 요청을 들어주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8절)는 말은 이전에 ‘야곱’이 자식들을 ‘이집트’로 가라고 재촉하면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42:2). ‘유다’는 똑같은 말로 애비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결정에 그의 손자들을 포함한 온 가족의 목숨까지 걸려있음을 강조하면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즉 ‘베냐민’이 나중에 그들과 함께 돌아오지 못할 경우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실현 가능할 것인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이 제안은 실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2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15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잠 6:1-2, 11, 15). <잠언>의 이와 같은 경고는 비록 그 경우가 다른 것이긴 하지만 <창세기>의 다음과 같은 “피의 보복”에 대한 경고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만일 ‘유다’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할 경우 그의 아비 ‘야곱’은 ‘유다’에게 그 책임을 물어 생명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유다’는 분명 한 평생을 동생 ‘베냐민’에 대하여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유다’도, 그의 애비 ‘야곱’도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을 상황에서 ‘유다’는 더욱 ‘야곱’의 결단을 재촉하고 있으며,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그동안 두 번이나 갔다 왔을 것이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재촉에 마침내 ‘야곱’은 결심을 굳히고 이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전에 그가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 당면했던 것과 유사한 위기 앞에서(32-33장), 그는 자신의 결단과 하나님의 섭리에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11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1-14절)
그의 “결단”이라 함은 사전 계획과 의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가 준비한 예물을 말합니다. 흉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의 아름다운 소산”들을 마련해 보냅니다. 이들 선물 목록은 그가 ‘에서’를 만날 때 준비했던 것에 비해서는 훨씬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의도는 이전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32:20). 마찬가지로 이번 예물도 총리의 환심을 사기 위한 뇌물성 선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재촉에 못 이겨 마지못해 ‘베냐민’을 이들 예물과 함께 딸려 보내기는 하지만, 그를 보내기 싫어하는 마음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예물들을 언급한 후에 마지막으로 ‘베냐민’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13절).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은 예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비록 아주 짧기는 하지만 그의 기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이전에 형을 만나기 전 드렸던 기도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32:9-12). 두 경우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으며,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지칭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전능자”(yD'v la, 엘 샤다이)는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도 수차례 등장한 바 있습니다(17:1; 28:3; 35:11; 48:3,; 49:25).
그러나 ‘야곱’은 자신이 드리는 기도에 큰 확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는 믿음의 기도라기보다는 포기나 감상에 더 가까운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감상은 이전에 그의 어머니 ‘리브가’를 연상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전에 그녀의 장자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일 게획을 꾸미고 있을 때, 이와 같은 자포자기적인 감상을 내보인 일이 있습니다(참고. 27:45).
2. 이집트 도착(15-25절)
두 번째 장면에서 이야기의 진행은 다소 완만하게 진행되면서 긴장감은 오히려 더 상승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이 그 형들을 환대하는 장면은 화자가 첫 번째 여행에서는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으로서, 융숭한 환대가 오히려 더 거북하고 불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특히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일말의 죄책감에 시달려 온 형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초조하게 ‘요셉’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두 번째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15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15-16절)
‘요셉’이 성대한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킨 것은 동생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요셉’의 행동이 지나치게 과분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저 내심 바라기는 한 시라도 빨리 ‘시므온’을 데리고 양식과 함께 떠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신학자 ‘해밀턴’(V. Hamilton)은 ‘요셉’이 청지기로 하여금 짐승을 잡는 등 성대한 점심 식사를 준비시키고 있는 이 장면을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눅 15:23). V. Hamilton. 549쪽.
돌아온 둘째 아들이나 ‘요셉’의 형제들이나 굶주림에 찌든 모습으로 상대방의 자비를 바라며 나아오고 있는 모습이나,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베풀고 있는 아버지나 ‘요셉’의 모습은 아닌 게 아니라 대동소이하다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주인의 명을 받은 청지기가 이들 형제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17-24절). ‘히브리’ 식 이야기의 전형을 따라 우선 화자는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했다”고 먼저 요약한 후, 다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23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17-24절)
형제들은 완전히 달라진 청지기의 환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방문 때에 그들이 받았던 의심과 적대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신들이 함정 속으로 끌려들고 있으며, 결국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될 정도였습니다. 위기 상황을 반전시켜보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들은 청지기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네 봅니다. 그리고 지난 번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최고의 예의를 갖춘 것이었지만, 동시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곡식 자루에서 발견한 돈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형제들의 설명은 화자가 그리고 있는 같은 장면에 대한 서술에 비해 지극히 절제되어 있고 간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돈은 훔친 것이 결코 아니며 다시 그 돈을 가지고 왔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돈 뿐만 아니라 “양식 살 다른 돈”도 더 가지고 왔음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들 듣고 난 청지기의 반응은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독자들은 형제들의 곡식 자루에 돈을 넣은 자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자신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는 형제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돈을 자루에 넣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지기의 이러한 진술은 그가 의도했던 아니 했던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조금 뒤 ‘요셉’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우리는 이곳에서 한 ‘이집트’인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형제들을 ‘요셉’의 집으로 데리고 가 목욕을 하게하고 말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 그들이 받는 대접이 진심임을 보여주며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비로소 경계심과 두려움을 풀고 안심하는 모습입니다. 청지기의 안내를 받아 목욕 재개하고 가지고 온 예물을 정돈 하는 등 ‘요셉’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25절)
3. 두 번째 대면(26-34절)
세 번째 장면은, 지난 이야기의 세 번째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참고. 42장), ‘요셉’이 그 형들을 대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장면에서 모두 형들이 동생인 ‘요셉’ 앞에 부복(俯伏)해 있습니다.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26절)
다시 한 번 두 형제들 사이의 달라진 위상(位相)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힘과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즉 동생은 자기 앞에 부복해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나, 형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전에 ‘요셉’이 형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였다”고 화자가 기록한 바 있습니다(42:9). 하지만 꿈의 내용과는 다소 달랐습니다. 그의 꿈에 따르자면 그의 부모와 열한 명의 형제들이 와있어야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열 명의 형들만이 그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한 명입니다. ‘베냐민’이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부모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나자 물어보는 질문도 바로 부모에 대한 안부입니다. ‘요셉’이 처음 대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 꿈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형들을 대하는 ‘요셉’의 태도는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요셉’은 형들에게 아주 매몰차고 엄하게 대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아주 은근하고 다정한 모습입니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27절)
형들은 그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가 왜 자신들의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8절)
형들로부터 원하던 대답을 들은 ‘요셉’은 곧바로 한 낯선 인물, 즉 첫 대면 때에는 없었던 새로운 한 인물 위에 눈이 머뭅니다. 다름 아닌 ‘베냐민’입니다. 화자가 이 순간을 얼마나 극적으로 포착하고 있는지를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절)
즉 화자는 ‘요셉’이 “눈을 들어 ...보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제 곧 펼쳐질 장면이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대목입니다(참고. 13:10; 18:2; 22:4, 13; 33:1, 5; 37:25). 그가 눈을 들어 본 것은,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입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보게 된 것은 그토록 몽매에 그리던 ‘베냐민’이었다는 강력하고도 극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화자는 ‘요셉’이나 그의 형들을 “그 사람” 및 “그들”로 지칭해 왔을 뿐, 이들 사이의 혈족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베냐민’에 대해서만큼 “자기 어머니의 아들”이니 “자기 동생”이니 하는 수식어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 사이의 관계가 어떤 정도인지를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속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실을 형들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가 과연 ‘베냐민’이 맞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냐민’을 실명(實名)으로 지칭하는 대신, “너희 작은 동생”, “이 아이”, 그리고 “소자”(@B, 벤) 등으로 부르면서 그의 신분을 계속해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은가 봅니다. 적어도 그의 형들 앞에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동생을 향한 끓어오르는 사랑과 연민을 주체할 수가 없어 황급하게 그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북받치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30절)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마음은 마치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두 경우 모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왕상 3:26; 호 11:8; 애가 5:10). 혼자 방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의 외면의 모습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분을 형제들에게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이러는 동안에 형들은 잘못된 판단이긴 하지만 잠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만 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31절)
지난 번 방문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이 남자의 태도 때문입니다. 거듭 회고해 보건대, 그 때만 해도 식사는커녕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 자신들을 간첩으로 몰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그가 이번에 태도를 돌변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식사를 하려고 준비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 사람들은 외국인과 식사를 하는 것을 혐오했다 합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32절)
이날 차려진 식단도 ‘이집트’인들의 이런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부정을 입음이라”는 매우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데, “가증스럽게 여기다”(hb'[e/T, 토에바)는 뜻입니다. 때로 이 단어는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종교 행위 등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레 18:22, 26, 29). ‘이집트’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또 다른 관습들은 “목축”(46:34)이나 “야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출 8:26) 등이 있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식단에 나누어 일정 거리를 두고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위한 식단; 그의 형제들을 위한 식단; ‘이집트’인들을 위한 식단.
‘요셉’이 형제들과 따로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은 이곳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래 전에 ‘가나안’의 ‘도단’ 광야에서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내던져진 채 형들이 식사하는 것을 절망 가운데 지켜보아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37:25).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완전히 역전된 상태에서 형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패배자로서가 아니라 승리자로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형들이 먹을 것을 빼앗고, 자기를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것처럼, 형들에게 똑 같이 복수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별도의 식단이긴 하지만 자신들을 위해서 식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란 형들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을 나이 순서로 자라에 앉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측컨대 ‘베냐민’이 ‘요셉’ 식단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배치했을 것을 보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33절)
그들은 충격 가운데 서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여기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충격을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요셉’은 다시 한 번 특별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4절)
‘베냐민’을 향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다섯 배나 더 많은 음식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날 ‘요셉’ 자신이 아버지를 편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형들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의 친 동생을 향한 각별한 애정의 표시였을까?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요셉’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특별히 연회장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모두들 먹고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4. 체포(44:1-13)
‘요셉’의 형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해 가는 동안, ‘요셉’은 그의 청지기들과 함께 이들을 체포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지난 번 첫 번째 방문 때와 흡사한 모습이지만(42:17), 이번에는 훨씬 상세하고 세부적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1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2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3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1-2절)
적어도 1절에 따르면 ‘요셉’은 아주 관대한 모습입니다. 각자의 자루에 양식을 넘치도록 넣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양식의 대가로 가지고 온 돈도 되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수상한 점은 그가 쓰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속에 넣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하필 ‘베냐민’을 선택하고 있는지 당장은 알 길이 없습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서로 자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식도 얻었겠다, ‘시므온’도 풀려났겠다, 그리고 ‘베냐민’도 여전히 곁에 있겠다, 그들이 이곳에 목적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4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6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4-6절)
“선을 악으로 갚는다”는 비난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가장 큰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타격이기도 합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주던 그 주인이 이런 식으로 비난을 하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갑작스러운 일격에 어안이 벙벙해 있는 그들에게 청지기는 은잔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형제들의 충격을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마치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은잔에 물이나 포도주를 넣어 점을 치는 일은 잘 알려진 풍습이었겠습니다만, <성경>은 이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레 19:26; 신 18:10). 청지기가 은잔으로 점을 친다고 언급한 것은, 그것이 ‘요셉’에게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럼 중요한 물건을 훔쳤으니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혐의에 대해서 형들은 극렬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7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7-9절)
이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혐의가 불가하다는 증거로 그들이 되가지고 온 돈을 제시합니다. 이 돈은 첫 번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요셉’이 슬쩍 이들의 자루에 넣어주었던 그 돈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서원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만일 훔친 자가 있으면 그는 죽을 것이며 나머지는 노예가 될 용의도 있다는 서원입니다. 그만큼 자신들의 무죄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이야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노예 생활과 죽음은 이전에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그 일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그동안 ‘요셉’이 당했던 그 모든 고초를 자신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공평한 제안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즉 이들이 이전에 그를 희생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을 희생물로 내어놓을 것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청지기의 말이 그의 의도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모두를 노예로 삼으라는 제안은 무시한 채, 은잔을 훔친 그자만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10절)
형제들은 기꺼이 청지기의 수색을 허락합니다.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싶은 열망에서입니다.
11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12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11-12절)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두 절은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이 “급히” 자루를 내려놓았다는 언급과 청지기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차례로 한 사람씩 조사를 했다는 언급이 주는 대조를 말합니다. 화자는 이런 대조를 통해서 이 장면에 긴장감을 더해주고 싶은 듯합니다.
이 장면은 이전에 ‘라반’이 ‘야곱’을 쫒아와 수색하던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가족을 데리고 ‘라반’으로부터 도망쳐 나올 때, ‘라반’이 자기가 아끼던 물건 ‘데라빔’ (가족의 수호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조각품)을 찾았습니다만(참고. 31:23, 25, 33, 35), ‘라헬’의 장막 속에 숨겨든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요행히도 들키지 않았습니다만, 그녀의 아들 ‘베냐민’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의 자루 속에서 은잔이 발견된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가 그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도 모른고 만일 훔친 사람이 있다면 죽음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의 형들이 그때와 비슷한 저주를 자신들에게 돌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이 ‘베냐민’의 자루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13절)
화자는 그들의 말 대신 그들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더 크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요셉’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슬퍼한 사람은 ‘야곱’ 뿐이었습니다만(37:34), 이번에는 모든 형제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이처럼 한 마음이 되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로 파는 일에 공모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을 데리고 자원해서 ‘이집트’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그들이 서원했던 바대로(9절) ‘이집트’의 종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5. 요셉이 자신을 드러냄(44:14-45:15)
이 장면에서 <요셉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데, 동생을 위한 ‘유다’의 눈물겨운 호소가 그 계기를 마련한 셈입니다. 즉 그의 호소는 ‘요셉’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마침내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장면에 들어 ‘요셉’의 형제들 중 ‘유다’가 돋보이고 있는 것도 그의 이러한 역할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14절)
이 구절은 ‘유다’가 이 단락에서 맡게 될 중요한 역할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이 여전히 연회장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형제들이 아주 신속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이들이 땅에 엎드린 것은 단순히 존경 이상의 굴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과시함으로써, 형제들을 더욱 압박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15절)
즉 자신을 신통력을 가진 점쟁이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말한 것도 없고 독자들 모두 이들 형제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할 아무런 수단도, 능력도 없이 위협 앞에 속수무책 떨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재판관의 정의가 아니라 자비를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를 ‘유다’의 하소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16절)
그는 지금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들의 유죄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집트’ 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고백은 단순히 이번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전에 그들이 저질렀던 모든 잘못들을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 저질렀던 죄악이라 함은 ‘요셉’에 대한 것이며,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도 첫 번째 방문 시에 그들이 당했던 혹독한 시련 때문이었습니다(42:21-23). 따라서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도 지난 잘못에 대한 당연한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다시 한 번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들의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는 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 형제들을 이십이 년 전에 자신들이 겪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17절)
즉 이전에 자기를 버려두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베냐민’을 내버려두고 그들의 애비에게로 되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견 관대한 ‘요셉’의 제안은 ‘유다’의 하소연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히려 연설에 가까운 ‘유다’의 하소연은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연설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감동적입니다. 그의 연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단순히 요약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기분을 거스를 만 한 일체의 이야기들은 생략한 채,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 더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릴 것으로 기대했던지, ‘유다’는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열네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연설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8-29절과거에 대한 회고
30-32절‘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결과
33-34절‘유다’가 자신을 내놓음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상당히 공식적이며 의례를 갖추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주여”;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 우리 아버지.” 하지만 연설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직접적인 대화로 그 형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34절).
회고. ‘유다’는 먼저 ‘요셉’에 대해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찬사와 예우를 갖춤으로 그의 회고담을 위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
특히 ‘요셉’이 ‘바로’ 왕과 같다는 그의 말은 ‘요셉’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방면할 수 있는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유다’는 자신들의 첫 번째 방문에 대한 회고로 나아갑니다.
19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19-23절)
하지만 그는 이 부분에서 ‘요셉’이 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감옥에 가둔 일이나,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둔 사실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했던 ‘요셉’의 명령조차도 “내가 그를 보게하라”는 훨씬 온건한 표현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이 표현은 “돌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참고. 렘 24:6; 39:12; 40:4). 반면에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나이와 ‘베냐민’에 대한 그의 애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노인이요”;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떠나면 그가 죽겠나이다.” 하지만 ‘유다’가 지금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언급하면서 ‘요셉’에게 자비를 간구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들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를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베냐민’을 향한 아버지의 그 사랑이야말로 ‘요셉’이 ‘베냐민’을 풀어주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계속해서 ‘가나안’ 집에서 아버지와 그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 ‘야곱’의 편에 서서 그의 감정이나 기분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4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24-29절)
‘유다’의 연설에는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야곱’이 그들에게 했다는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실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은 ‘라헬’ 외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던 ‘야곱’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야곱’이 이를 명시적으로 천명한 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유다’는 아버지의 속내를 자신의 말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이어서 ‘야곱’이 ‘요셉’이 없어진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28절). 이제 ‘요셉’은 처음으로 지난 날 자신이 팔리고 난 후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됩니다.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이어온 아버지의 비탄과 슬픔, 그리고 “그가 찢겨 죽었도다, 찢겨 죽었도다”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절규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절규는 비단 ‘요셉’ 뿐만 아니라 그의 나머지 형제들 역시 지금까지 들어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상되는 결과. 이제 ‘유다’는 ‘베냐민’이 함께 돌아가지 않았을 때 그들의 아버지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예단하고 있습니다.
30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 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30-32절)
그는 ‘야곱’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그의 아버지가 자식을 보지 못하면 슬퍼 스올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는 호소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언급을 덧붙여,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묶여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희생의 결단. 그리고 마침내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하여 볼모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섭니다. 자기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며 그의 심정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33-34절)
‘유다’의 감동적인 연설로 이야기는 절정에서 일순 긴장감으로 멈추어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연설은 나머지 형제들이나 ‘요셉’에게 각기 다른 반향을 끼치면서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에 대한 참회의 고백이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더욱 큰 낭패와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이지만, 반대로 ‘요셉’에게는 더 이상 형제들을 시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감동으로 다가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요셉’이 느끼는 한에 있어서, 이들 형제들은 이제 이전에 자기를 대하던 태도에서 돌변하여, 진심으로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대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마침내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1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45:1-2)
그는 이전에도 형제들을 만났을 때 두 번이나 운 적이 있습니다만(42:24; 43:30), 형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대화를 이제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문은 곧바로 궁중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었습니다.
눈물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는 법, 돌변한 ‘요셉’의 태도는 형제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요셉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3절)
‘요셉’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만 않았더라도, 형제들은 “내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니이까?”라는 질문은 다소 뜻밖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시종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요셉’의 주된 관심사가 가족과의 재회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의 연설을 통해서 ‘요셉’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도 바로 이 문제, 즉 자식을 잃었을 때 아버지가 겪게 될 충격과 고통을 염려하는 ‘요셉’의 심중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너무 놀라서 할 말조차 잊는 형들에게 ‘요셉’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4절)
하지만 형들은 더욱 큰 충격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다름 아닌 그들이 ‘이집트’에 판 ‘요셉’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들의 충격과 공포를 감지한 듯 서둘러 형들을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에서 시작하여, 일이 그렇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고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4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5-8절)
‘요셉’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결국 <요셉 이야기>의 거대한 신학적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즉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그곳으로 먼저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야기>의 각각의 에피소드는 이 거대한 주제와 연결되면서 모자이크의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보고 싶은 일념에서 형들과 재회의 감격을 나누는 일(14-15절)은 뒤로 미룬 채부터, 형들로 하여금 속히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말도, 마지막 말도 모두 그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오년 동안의 흉년 기에 좋은 방목지와 거처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약속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9-13절)
‘요셉’이 언급하고 있는 ‘고센’은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왕궁이 있는 ‘멤피스’나 ‘아바리스’ 근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요셉’이 가족과 수시로 왕래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훗날 ‘모세’가 ‘바로’와 “출애굽”을 놓고 담판을 벌이던 곳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이 땅을 제공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 땅에 닥치고 있는 흉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는 것은(참고. 6절), 그의 아버지가 오기를 주저할까봐 안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흉년이 들면 가난한 자는 자신들의 땅을 저당 잡히기도 하고 심하면 가족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노예로 팔기도 했으며,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굶어죽기도 했습니다(참고. 47:13-26).
‘요셉’은 거듭해서 형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하는 약속은 통역인과 같은 제 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 아닌 그들 모두가 증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12절). 증인 중에 ‘베냐민’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행여나 ‘야곱’이 다른 자식들의 말은 믿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처음부터(3절) 끝까지 ‘요셉’의 최대 관심사는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 있습니다.
마침내 감격의 포옹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요셉’과 ‘베냐민’ 만이 울었다고 전합니다.
14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절)
나머지 형제들은 여전히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기뻐할 준비가 아직 안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기쁨을 나누기에는 아직도 이들은 정서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마침내 그들도 입을 열고 맙니다. 그리고 이십이 년의 긴 단절의 벽이 허물어 내리고 있습니다(37:4).
6. 이집트를 떠남(16-24절)
여섯 번째 장면은 ‘바로’ 왕이 ‘요셉’의 형들을 접견하고, 이들에게 더 관대한 약속을 제공해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6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17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20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16-20절)
‘바로’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 오는 것에 대해서 환영하고 동의하고 있습니다(참고. 41:37).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센 땅에 자기와 가까이” 머물기를 원했습니다만, 지금 ‘바로’는 더욱 관대한 모습입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을 줄 것이며, 가장 기름진 수확을 먹을 것이며, 온 나라의 땅의 좋은 것이 그들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절).
그는 단순히 약속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 가족을 데리고 올 운반 수단까지 제공하고 있습니다(19절). ‘요셉’은 형제들에게 단순히 “빨리 돌아가라”고만 했습니다만, ‘바로’는 “수레를 타고 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에 비해, ‘바로’는 “자녀와 아내”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왕은 아주 사려 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왕도 ‘요셉’처럼 이들이 행여나 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와도 좋다고 말하면서, ‘이집트’ 온 땅의 좋은 것들이 모두 그들이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20절).
‘요셉’은 왕의 지시에 따라 형제들에게 양식과 수레와 갈아입을 옷을 줍니다.
21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21-22절)
‘요셉’이 마련해 준 “옷”(hl;m]c, 시믈라)는 일종의 겉옷 즉 외투나 망토 같은 것으로서 밤중에 담요 대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출 22:27). 고대 근동 지역에서 “베옷” 즉 “세마포”(@ydis, 사딘)는 상당히 좋은 선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만(삿 14; 왕하 5),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옷”은 일종의 화해의 징표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요셉’의 형들이 그를 팔아넘기고 그의 “겉옷” 자락을 아버지에게 보여줌으로써 비극의 단초를 마련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베냐민’을 향한 각별한 애정 표시가 두드러집니다. 지난 번 식사 때처럼(43:34) 그에게 다섯 벌의 옷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돈도 추가로 더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도 선물 보내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23절)
이 선물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바로’ 왕이 약속했던 “그 땅의 모든 좋은 것”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암 나귀는 우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내면서 ‘요셉’이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주는 당부가 하나 있습니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24절)
“서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라가즈’(zg'r)로서, “떨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격노(분노)하다”, “흥분하다”, “동요하다” 등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신학자들은 이 문장의 의미를 단순히 형제들 간에 돌아가는 길에 지난 일을 놓고 서로 “싸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잠언서>의 한 구절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잠 29:9).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단어는 “두려움”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어(축 15:14), 많은 ‘랍비’ 학자들도 이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형들에게 노상에서 강도 만날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양식과 재물을 나귀 등에 잔뜩 싣고 가는 그들이 강도를 만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장래 문제 즉 ‘이집트’에 돌아와 살면서 닥칠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해석은 반드시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7. 귀향 보고(25-28절)
마지막 네 절에서 그리고 있는 형제들의 보고 장면은 이전에 우리가 보았던 두 번의 보고 장면과는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십이 년 전 이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후 그들의 애비에게 돌아와 ‘요셉’의 겉옷을 보여주었을 때,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37:33-35). 그리고 첫 번째 ‘이집트’ 방문에서 ‘시므온’을 남겨두고 돌아온 자식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요셉도 없어졌고...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42:36-38). 이제 세 번째 보고를 들을 차례입니다.
25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27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25-28절)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28절) 그는 지금 단순히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26절), “(심장의 고동이) 멈추어 섰습니다”(gWP, 푸그). 자식들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다시 “기운이 소생하게” 되었습니다(27절). 그의 마지막 언급은 이야기의 절정에 걸 맞는 승리의 환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1. 하나님과 양심: 궁핍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사기>의 문학적 구성은 직선적이기보다는 전형적인 “순환과 반복”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위하여 열세 개의 에피소드가 마치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듯 차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러 구성을 두고 이들 열세 개의 에피소드가 “신학적 윤회”(輪回)를 이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학자 ‘테리 홀’(T. Hall)은 그의 책 <Bible Panorama>에서 이 윤회를 다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아래 그림에서처럼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순환의 매 단계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모두 ‘S’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견은 아주 재치 있고 통찰력 넘치는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그림은 <사사기>의 신학적 주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변치 않는 두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철학자 ‘헤겔’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두 본성이 있는바, 선한 하나님의 본성과 악한 인간의 본성이 그들이다.” 따라서 <사사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일관성”에 관한 한에 있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열세 번에 걸쳐 이 순환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나 목적을 한사코 알기를 원하지만, 적어도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겪는 비참한 노예 생활, 즉 고난은 순전히 자신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즉 정해진 절대적인 규범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신 즉 “양심(?)의 법”에 따라 행동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은 주변 이방 족속의 침공입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간구와 기도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구원의 감격은 잠시, 이내 망각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구원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국가적 환란은 물론 자신들이 자초한 결과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그분의 백성을 위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채찍이자 몽둥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음을 그동안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우고, 가족 구성원간의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사용하신 채찍도 다름 아닌 궁핍과 환란이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계속해서 일관되게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첫 번째 채찍은 그 땅에 기근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궁핍입니다. 이로 인해 이들 형제는 고향에서의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떠나 이국땅으로 양식을 구하러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이 이들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더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채찍인 셈이지요. 즉 형제들은 ‘요셉’을 만나긴 하지만 동생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생은 형들에게 ‘가나안’의 첩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형들은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그들이 ‘가나안’에서 누리던 명성과 존경이 이곳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대우를 여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터라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가 하나님의 두 번째 채찍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하셨음인지 세 번째 채찍을 그들에게 더하십니다. ‘요셉’이 형들을 모두 감옥에 구금시켜버린 일이 그것입니다. 육체적 감금과 고통 그리고 고독의 시기를 거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얼마나 오래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좌불안석, 전전긍긍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시기도 이때쯤일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내 양심의 가책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시작된 것이지요. 감옥 안에서 서로를 쳐다보며 이렇게 고백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고백은 자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회개로 볼 수가 없다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모두들 “우리 탓”이라고 하지, “내 탓”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편리한 고백입니까? “우리가 범죄했다”는 말은 실은 “아므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나도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암시입니다. 설령 잘못이 있다 해도 그 일로 나 혼자 처벌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크게 두려워 할 일도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잘한 것은 “내”가 한 일이고, 못한 것은 “우리”가 한 것으로 돌려대는 데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의 고백에는 더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고백의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정작 고백을 듣고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할 ‘요셉’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가해자들끼리 모여, “우리가 범죄했다”고 백번 고백을 해본들 무슨 의미와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피해 당사자 ‘요셉’에게 이 고백을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예물을 제단에 가지고 갈 정도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 속에 있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아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고난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정도는 단순히 “인과응보” 수준이지 “하나님의 인과응보”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하나님은 또 다른 채찍을 꺼내 보이십니다. 네 번째입니다. 이들은 유여곡절 끝에 양식을 겨우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여관에서 자신들의 양식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돈은 이집트에서 곡식을 사기 위해 그들이 가지고 간 돈입니다. 따라서 양식을 살 때 마땅히 지불했어야 할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그들 자루 속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들은 아연실색합니다. ‘이집트’ 총리가 자신들을 도둑으로 몰 것이 뻔합니다. 인질로 남겨두고 온 ‘시므온’을 데려오는 일은 고사하고, 나중에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는 자신들마저 다시 사로잡힐 것이 뻔합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터져나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절하).
하지만 그들의 양심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을 불렀지만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기 위해 불렀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괴롭고 힘들어서 엉겁결에 한 번 불러보았을 뿐입니다. 그들의 양심은 이미 아주 딱딱하게 굳어있고 꽉 막혀 있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혈관 속에 노폐물이 오래 동안 쌓이면, 혈관 벽이 돌처럼 굳어져서 나중에 가위로 혈관을 잘라내려고 해도 잘리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형들의 양심이 지금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의 양심은 이제 웬만한 일로는 끄덕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래 동안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버려 둔 결과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더 이상 그 문제로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요셉’에게 저지른 그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먹을 것이 있고, ‘이집트’와 그 나라 총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위협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요?
어느 때까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귀찮고 성가시게 해야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다름 사람 아닌 ‘야곱’ 즉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하나님은 다시 ‘야곱’의 삶에 채찍을 들고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라기 보다는 “계속해서 일관되게”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전보다 더 심하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양심에 내성(耐性)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병도 육체의 병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치료하다 그만두면 이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우리네 속담도 이런 체험에 근거를 둔 경고로 보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첫 번째 채찍은 이번에도 자연적 재해 즉 기근(饑饉)입니다. 당연히 이전보다 더 심한 기근이었을 것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43:1).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기근이 그 땅을 다 삼켜버리고”, 또는 “기근이 그 땅을 다 먹어 치워버리고”입니다. 언제라고요?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양식을 “다 먹어치운 후”입니다. 여기서 화자의 해학(諧謔)에 가까운 수사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즉 기근이 이들을 다시 덮친 것은 그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행복의 조건이 다 소진된 이후였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찾기 위한 일체의 노력이나 시도가 먹혀들지 않을 때였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인도나, 아프리카나, 중국 내륙을 덮치고 있는 기근이 얼마나 극심하고 대규모적인 것인지 둘러보면 당시 그 땅의 기근의 정도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극심한 기근을 보내신 것일까요?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변화를 위하여. 올림픽 기록이 깨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인생의 각종 고난이나 궁핍은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시는 것도 “변화”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가’ 성 여인의 삶에 개입하신 것도 그녀의 삶에 “변화”를 보고 싶어 하신 때문입니다. 과연 여인은 변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참고. 요 4:26-29).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분이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인생의 질고 앞에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과연 변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적어도 두 사람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다’의 변화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 에피소드에서 ‘르우벤’의 변화를 목도한 바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이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야곱’이 반발하자 ‘르우벤’이 개입하여 자기 자식들을 담보로 남겨두겠다고 서원하는 장면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42:37). 물론 ‘르우벤’의 말은 과장된 것으로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려면 할아버지가 손자를 죽이겠습니까? 이점을 감안한다 하드라도 ‘르우벤’의 당시 심정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처럼 동생 ‘베냐민’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 ‘유다’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8-9절).
‘유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요. 자식들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마음이 굳은 자 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난생 처음으로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각오를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유다’의 이러한 모습은 나중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텐데, 동생 ‘베냐민’이 ‘요셉’의 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받았을 때 그의 방면을 위해서 호소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44:1-34).
그러나 가족 구성원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 더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야곱’ 자신입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베냐민’을 결코 ‘이집트’로 보낼 수 없다고 했던 그가 아닙니까! 그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했습니다. 오히려 불평으로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원망했습니다: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사실 그동안 그는 하나님과 힘든 씨름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전에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경들이 인생의 경륜으로 작용했으며, 이들을 통해서 마침내 교훈을 체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그리고 인내가 연단이 되어” 지금 그가 처해있는 새로운 역경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훔쳐봅시다:
11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1-14절)
우리는 여기서 의미심장한 두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전능자 하나님”(엘 샤다이)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이자 언약의 이름이며, “전능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호소와 간구를 드리고 있는 이름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고 난 이후 옛 이름이 다시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야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얍복’ 강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만, 이후에도 새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전 이름으로 더 자주 등장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새사람 이스라엘로서보다는 옛 사람 ‘야곱’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일 것입니다.
그렇던 그가 마침내 새사람으로서 현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일까요? 화자는 갑자기 새 이름으로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전능자 하나님”으로 다가와야 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마지막 선언이 이러한 생각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에스더’의 결단을 보는 듯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로다.”
나의 이름은.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내 앞에 닥친 이런저런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과 힘든 씨름을 벌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얍복’ 강에서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내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즉 “언약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힘든 씨름도 그를 내 속에서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더욱 힘차게 붙들어서, 하나님이 ‘엘 샤다이’ 즉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욥’이 그의 세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친구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직접 말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친구들이 신학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면 그는 신학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역경이나 궁핍의 이유나 목적을 알고자 한다면, 나는 ‘욥’의 친구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문제의 해답을 찾기는 고사하고 번번이 실망과 좌절로 끝나고 맙니다. 설령 답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도 역경을 헤쳐 나가는 데에는 그렇게 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지요. 내 몸에 난 조그만 상처는 때가 되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 고통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이점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장장 13년에 걸친 도피와 망명의 괴로움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부활과 영생의 엄청난 약속이 현실의 고통을 즐거운 체험으로 바꾸어주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떠한 고난에도 함께 아파하시며, 그분의 이름은 “엘 샤다이”이며, 내 이름은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2. 하나님과 양심: 바람이 아닌 햇빛
스웨덴에서 열린 학회 참석 길에 ‘노르웨이’의 빙하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한 지역에 이르렀을 때, 때마침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계곡 아래 호수 속으로 떨어지는 장관을 목격하는 행운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빙하의 일부가 아니라, 겨우내 쌓였던 눈 덩어리가 녹아 떨어져 내린 것이라는 관광 안내자의 설명이었습니다. 사실 빙하는 그야말로 만년설로서 잘 녹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빙하가 녹을 때에는 마치 얼음이나 유리가 갈라질 때 나는 “쨍”하는 아주 기분 나쁜 소리가 먼저 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12초 후에 그렇게 떨어져 나온 거대한 빙하 덩어리는 호수 위로 떨어지고, 곧이어 주변 수천 평방미터는 물바다가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며 녹기를 거부하던 만년설도 삼사백 년 전부터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인은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지구 온난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나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 양심의 모습이 빙하와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즉 내 양심이 죄와 허물이 두꺼운 빙하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빙하는 수만 년에 걸쳐 쌓였다고 하는데, 이제 겨우 육십여 년에 불과한 죄와 허물의 벽은 빙하보다 더 단단하고 요지부동이라 깨끗하고 순수한 양심을 좀처럼 드러내 주지를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양심도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죄와 허물이 그 위를 덮고 또 덮어서 거의 아사 직전에 이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환경이 주는 재해나, 인간이 주는 핍박 등에 대해서 웬만해서는 끄덕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가 더해질수록 내심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이 그에 비례하여 커 갔던 것은 숨길 수 없었나 봅니다. 양식을 얻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이집트’로 내려오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떨고 있습니다.
요셉의 파티. 이와 같은 상황, 즉 두려움과 죄책감에 떨며 불안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요셉’이 베풀어주는 궁중 잔치가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빙하를 녹이려는 햇빛으로 비유할 수는 없을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햇빛 말입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바람과 햇빛”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고 말입니다. ‘노르웨이’의 만년설을 녹아내리게 하는 것이 겨우내 불어대는 찬바람이나 눈보라가 아니라(이들은 오히려 빙하를 더 두껍게 할 뿐입니다), 봄철 따뜻한 햇빛 이듯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 형제들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입고 있던 죄와 허물의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순수하고 깨끗한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상같은 채찍보다는 햇빛 같은 은혜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요셉’이 베풀고 있는 이 잔치가 바로 그런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들고 계셨던 채찍을 내려놓고 당근을 주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그동안 사용하신 하나님의 채찍이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며, 그분은 모든 것을 협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지난 10여 년의 세월동안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채찍이나 당근의 양자택일을 하려는 무익하고도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양자택일에 구애받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셉’ 형제들에게 당근을 주신 적이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이들 형제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처음 왔을 때, ‘요셉’은 이들에게 양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주었습니다. 곡식 자루 속에 돈을 넣어준 것이지요. 하지만 귀환 길에 형제들은 이 돈을 곡식 자루에서 발견하고는 혼비백산 놀랍니다.
왜 ‘요셉’은 형들이 가지고 온 돈을 되돌려 보냈을까요? 무슨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야기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는 없습니다. 비록 형들은 이 일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벌벌 떨고 있습니다만(42:28), ‘요셉’은 그야말로 이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무슨 음모니 공작이니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본문 이야기 여러 곳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요셉’의 청지기가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즉 형들이 두 번째 여행에서 ‘요셉’의 청지기에게 지난 번 귀환 길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먼저 고백합니다. 그러자 청지기는 짐짓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하나님께서 그 돈을 자루에 넣어주신 것이며, 그리고 돈은 이미 받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43:23). 돈에 관한 한 이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청지기는 이들을 안심시킨 후에 ‘시므온’을 그들 앞에 데리고 옵니다(23절). 그동안 ‘시므온’은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것이 뻔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의 진심을 알 리가 없는 형제들이 짐작할 수는 전부일 것이겠지요. 그리고 자신들도 곧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갑니다. ‘시므온’은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고, 총리는 약속대로 그를 형제들 앞에 다시 돌려보냅니다.
여전히 ‘요셉’의 진심에 대해서 궁금한가요? 청지기는 이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당나귀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줍니다(24절). 당시 이러한 행위는 손님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입니다. 즉 청지기는 이들을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요셉’도 같은 마음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먼저 안부를 묻습니다. 형들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물어봅니다(27절). 그리고 ‘베냐민’을 가리키며 그가 ‘베냐민’이 맞는지 물어봅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하자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줍니다(29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북받치는 감정을 자제하면서, 은근하고도 애틋하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그토록 알고 싶었던 소식 하나 하나를 확인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도나 음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베냐민’을 확인하는 순간 참고 참았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 방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30절).
한참을 울었을까요? 얼마 후 돌아와서는 충격에 빠져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잔치를 열어줍니다(31절). 그것이 잔치든 단순한 점심 식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그들 모두 ‘가나안’에서 기아(饑餓) 직전까지 내몰린 바 있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을 두 번째 찾아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집트’의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기분은 어떨까요? 여전히 총리의 진심을 알지 못한 채 두려움과 의구심으로 좌불안석(坐不安席)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무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거지? 이와 같은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화자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다음과 같은 해설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4절).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냥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총리의 호의를 그냥 있는 그대로 즐겼습니다. 그들에게 이처럼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는 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햇빛을. 그렇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다른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common grace)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 6:26)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마 6:30)
하지만 지구상에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선남선녀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누가 따뜻한 해를 비추는지, 누가 마른 땅에 비를 내리는지, 누가 공중의 새들을 거두는지, 누가 들풀을 자라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길 뿐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처럼 말입니다.
‘요셉’의 파티는 그가 형제들을 위하여 베풀어 준 것이지 형들이 그에게 베풀어준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호의를 입은 사람이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파티는 그야말로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상식을 벗어난 대접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무슨 신세나 빚을 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분은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심심하고 외로워서,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빚을 져서 소위 “보편적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식사를 대접해야 할 쪽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라고요! 그런 점에서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는 “보편적”이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이며, 비상식적이라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더욱 비상식적인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그분을 대적하고 거부하며 미워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비정상적인 “보편적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누구나 개죽음을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서는 혹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나마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義士)를 의사로 부르는 것도 그분의 죽음이 대의명분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분의 선택이 정말 용기 있는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죽음은 대의명분과는 거리가 한참 먼, 소위 개죽음이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동기를 단순히 ‘헤세드’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너무나 신비하고, 경이로울 뿐입니다.
돌이켜 회개에 이르도록. 정말 그분은 왜 날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찬송가 143장) <관계중심 전도>라는 책에서 저자는 그가 가르치던 한 학생이 수업 시간 중에 간증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학생은 직장에 늘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어느 날 자기 것과 똑 같은 오토바이가 주차장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오토바이에는 거울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가 주차장에 와서 보니 자기 오토바이의 거울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오토바이가 세워진 장소로 가보니 그 오토바이에 아침에는 없던 거울이 달려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그 거울을 다시 뽑아냈지만 그래도 화를 참을 수 없어 그 오토바이에 물을 뿌려놓고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다고 오토바이가 고장 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동을 거는데 적어도 30분은 족히 걸렸겠지요. 그런데 그는 집에 돌아와서는 영 마음이 편치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내 친한 친구처럼 대해야 해. 그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 있어. 내 거울을 훔친 것을 보니 그가 거울이 필요한 것이 분명해.” 그래서 그는 가게에서 자기 것과 똑같은 거울을 사서 그 사람 오토바이로 가서 꽂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쪽지를 남겼습니다. “당신이 내 거울을 훔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 오토바이에 물을 뿌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저는 예수님이 나의 그러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쪽지에는 자기 이름과 연락처도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사람이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제 평생 수없이 도둑질을 했어도 이런 반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제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날 밤, 그 사람은 이 친구 아파트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레미제라블>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 ‘장 발장’이 훔쳤던 은촛대를 그에게 선물로 되돌려 준 신부님 이야기 말입니다. 그는 도둑에서 훗날 파리 경찰 대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도 이와 같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요셉’의 형제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모습이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어야 할 이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있다니요! 그것도 ‘요셉’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요셉’을 능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들이 어디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회개나 간증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 모습은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 신애를 실족시켜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그 뻔뻔한, 자칭 그리스도인 살인자와 영락없이 닮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셉’의 형제들과는 다릅니까? 이들 형제들은 정말이지 ‘이집트’ 총리가 자신들의 동생인 줄을 꿈에도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도 오래 전에 지은 죄라 회개할 기회도, 상대도 지금으로서는 찾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나마 핑계할 근거라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들에게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등 “보편적 사랑”을 베푸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다 알고 있을까요?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 부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그래서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들만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시 14:1)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도무지 핑계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러나 잠간! 이 사람들의 무지(無知)에 내가 일조한 책임은 없습니까?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 내 책임 말입니다. <로마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런 나를 향해서 이렇게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나도 이 세상의 무지에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나, 제자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것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게으름이나 무관심에 대해서도 오래 참고 계시는 줄 어찌 모른다는 말입니까?
나는 정말 회개한 자입니까? 우리는 <로마서> 2장 4절을 좀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일견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비와 인자를 베푸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는 자비의 결과인 것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햇빛이 비취니까 얼음이 녹는 것이지,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 햇빛이 비취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자비와 인자는 하나님의 본성이자 체질입니다. 빙하를 녹이는 햇빛이자 죄와 허물을 벗겨내는 능력이자 힘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비를 맛본 사람이라면 돌이켜 회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회개는 믿음이고, 결단이고, 간증이며, 행동입니다. 어떠한 주저함도,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 안에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면, 여전히 주저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부끄러운 그 무엇이 있다면, 지금 당장 헌신하고 앞으로 걸어 나오시기를 촉구합니다.
3. 하나님과 양심: 햇빛의 조건
“6∙25 전쟁” 60 주년을 맞아 국내 한 신문사에서 이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체험담과 회고담을 기획 연재한 바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도 이 신문사에 체험담을 보낸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 신문사의 기자가 추기경에게, “천주교에서 용서란 어떤 의미입니까?”라고 묻자, 그분께서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제가 종교인이니까 조건 없이 용서해줘야 한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용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도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건이 있습니다. 죄의 인정, 잘못했다는 자기반성,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는 뉘우침, 공개적 자백, 그리고 보상입니다. 집안에서 꼬마가 아무도 안 보는데 꽃병을 깼다고 합시다. 우선 자기가 깼다고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뉘우친 후, 가족들에게 고백하고, 꽃병을 새로 마련하는 단계라고 보면 되지요. 이 다섯 가지 요건을 다 포함한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용서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상대가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테고요.
“6∙25 전쟁”과 관련해서도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불의한 공격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도 불의한 공격입니다. 불의한 공격자가 용서받으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렇습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휴전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향해서 저질러왔던 수없이 많은 만행들, 예컨대, “1∙21 무장공비 침투”(1968), “아웅산 폭탄테러”(1983), “KAL기 폭파”(1987), “강릉 잠수함 침투”(1996), 그리고 “천안함 폭파”(2010) 등, 어느 것 하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6∙25 전쟁”이 남침(南侵)이 아니라 북침(北侵)에 의해서 저질러 진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오고 있으며, 당연히 “천안함 폭파”도 남한과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것은 더욱 황당하게도 남한 내에서조차 이에 동조하는 정신 나간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상당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이 같은 상대에게 햇빛, 즉 용서와 화해가 의미가 있을까?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바람이 아니라 햇빛을 계속해서 보내주어야 할까? 민족의 이름으로, 평화공존을 이유로 지난 10여 년간 남한에서 보내준 당근과 햇빛은 과연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었을까? 김정일과 그의 추종자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외쳐대는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의 제단 앞에 회개의 번제물을 바치기라도 했던가? 그것이 비단 악어의 눈물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오만(傲慢)과 기만(欺瞞). 우리는 지금 ‘요셉’의 형제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날 분에 넘치는 식사 대접을 받으면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한 번 화자의 묘사를 들어봅시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4절). 그저 마냥 즐거워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으로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총리가 이전에 요구했던 대로 막내 ‘베냐민’을 이번 방문 길에 데리고 가기는 합니다만, 과연 자신들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줄 것인가? 그들이 간첩이 아니며, 자신들이 말한 그 모든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인가? 인질로 잡아두었던 ‘시므온’을 풀어줄까? 과연 우리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이처럼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마 모두들 양손을 벌여 어깨를 으쓱하며 서로를 향해서 눈짓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거봐,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잖아. 그가 우리의 과거를 낱낱이 알 리가 없지.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거야. 울고불고 하며 지난 잘못 들추어 낼 필요가 없는 것이지. 우리 신분이나 가족에 대해서 그 정도 밝힌 것만 해도 어딘데. 그리고 가지고 온 선물이나 돈이 얼만데. 고백은 무슨.” 파티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 원하는 곡식을 나귀 등에 싣고 성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이처럼 확신에 차있었으며, 의기양양하기까지 했습니다. ‘시므온’도 돌려받고, 동생도 인질로 남겨두지도 않았고,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무사히 귀환 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던 일말의 죄책감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까? 정말 햇빛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채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일까? 만일 ‘요셉’ 형제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오만한 생각이며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대해서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요셉’ 형제들은 번제단(燔祭壇)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참고. 히 9:22).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 모두는 양의 피를 그 제단 위에 뿌린 후에 성소 안으로 들어갔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희희낙락했습니다. 혹시 알고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의 양심은 여전히 두꺼운 빙하 속에 갇혀있어 햇빛만으로 녹아 나오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충격요법이 특효약입니다. 심장 박동이 꺼져가는 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듯이 말입니다.
무너지는 자아. ‘요셉’이 마침내 그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 위함입니다. ‘베냐민’의 곡식 자루 속에 은잔(銀盞)을 몰래 넣도록 조치를 한 것이지요. 아무 것도 모르고 득의만만(得意滿滿)하게 돌아가고 있는 형제들 앞에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떨어집니다. “왜 도적질을 했느냐?” “왜 선을 악으로 갚느냐?” 청지기의 호통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며,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억울한 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극렬하게 거부하고 반발합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7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7-9절)
정말 당당하고 도도(滔滔)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청지기를 몰아붙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누군들 이러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그 물건을 훔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도적이라고? 내가 살인자라고? 내가 죄인이라고? 어림없는 말씀!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다는 것이야? 내가 뭐 살인을 했어, 도적질을 했어, 남에게 피해를 주었어? 나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요셉’ 형제들이 ‘요셉’의 청지기를 몰아세우듯 말입니다. 어느새 나도 그들처럼 “자칭 의인”(self-righteous)이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죄입니다. 하나님은 은잔을 훔친 것과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가지고 나와 논쟁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이런 저런 잘못된 모습을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대드는 그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아세우는 그 태도가 죄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죄하다는 그 태도가 유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만만한 나를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실까? 그대로 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더욱 기고만장할 것이 뻔합니다. 지금 형제들의 모습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만일 그들 중 누구라도 은잔을 훔쳤다면 그자는 죽게 될 것이고, 나머지 모두는 노예가 되겠다는 서원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서원입니까? 하지만 청지기는 이들의 서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잔을 훔친 자만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참고. 10절).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요? 문제의 은잔이 발견된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베냐민’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냐민’에게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형제 사이의 문제에 있어서 ‘베냐민’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우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가 말입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흠이 없고 죄가 없는 그에게 말이지요. 아버지 ‘야곱’이 극진히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말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 ‘요셉’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이끌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가족 간의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는 마지막 관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나아온다면 말이지요.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형제들의 반응을 통해서입니다. 즉 이들이 이전에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베냐민’을 이집트에 내버려두고 떠나는지, 아니면 그를 구하러 나아올 것인지를 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형제들은 ‘베냐민’를 버리고 떠나지 않고 그를 구하러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노예로 바치기 위해서 이집트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모두들 마치 자기가 은잔을 훔친 것처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옷을 찢고” 슬퍼하는 모습이 이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13절). 이전에 ‘요셉’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슬퍼한 사람은 ‘야곱’ 뿐이었습니다만(37:34), 이번에는 모든 형제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이처럼 한 마음이 되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로 파는 일에 공모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을 데리고 자원해서 ‘이집트’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그들이 서원했던 바대로(9절) ‘이집트’의 종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장면입니까? 특히 ‘유다’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이십 년 전에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자고 제안했던 그가 아닙니까! 그렇던 그가 이제 ‘베냐민’을 위하여 노예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의 죄가 그들 모두의 죄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16절)
사도 ‘바울’은 ‘아담’의 범죄가 곧 나의 범죄이며, 인류 전체의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인류의 결속성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유다’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야곱’의 열두 형제는 열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변화입니까? 누가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자의 자아(自我)를 깨부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죄로 찌든 양심을 드러내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빛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이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라나 개인이나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칙은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밝히는 자가 항상 손해 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사코 잘못을 숨기고 억지 주장을 부립니다.
세상의 진실은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지는 것이야말로 이기는 것입니다. 무겁고 힘든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진정 인생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흠 없고, 죄 없는 ‘베냐민’을 통해서 형제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고자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해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베냐민’과 자신을 동일시했을 때 ‘요셉’의 용서를 이끌어낼 수 있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분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4. 유다의 연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연설이나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우리네 격언입니다. 특히 서양 세계에서 이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였으며, 특히 명연설은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 감동을 이어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서양 문학은 명연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컨대,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대국민 라디오 연설 중에 행한, “피와 땀과 눈물”에 관한 연설이라든지, 그보다 앞선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케티스버그’의 연설,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로 유명하게 된,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물어라”는 연설문,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킹’ 목사의 연설, 또한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의 고별사 중에 등장한 바 있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 등의 연설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면서 감동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창세기> 화자가 44장 절반을 할애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유다’의 연설 역시 명연설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가 44장의 절반을 ‘유다’의 연설로 할애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유다’의 연설이 <요셉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요셉’을 감동시키고도 남았습니다.
時宜適切. 왜 ‘유다’의 연설이 그토록 감동적입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이유를 연사 자신과 그리고 그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다’가 이전의 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다’가 어떤 인물입니까? 이십이 년 전에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을 주도했던 당사자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베냐민’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유다’가 ‘요셉’을 팔아넘기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를 두둔하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즉 ‘유다’가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던 것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를 죽이자고 하는 마당에 그를 죽이기보다는 노예로 팔아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게 하자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성경> 본문이 전해주는 내용과는 다소 다릅니다. ‘요셉’을 살려주고 싶어 했던 자는 ‘유다’가 아니라 ‘르우벤’이었습니다(참고. 37:21-22). 그리고 ‘유다’가 ‘요셉’을 살려두고자 했던 동기도 실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37:26-27)
‘유다’의 동기는 경제적인 데 있었습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유익도 없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그를 살려두어 노예로 팔아 이득을 챙기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음흉하고 위선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물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베냐민’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 긴박하고 절박함이 절절이 베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연설이라기보다는 호소나 간구에 더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아테네’ 언덕에서 한가하게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철학자의 연설도 아니고, 짐짓 즉흥연설로 보이려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수사(修辭)로 가득 찬 정치인의 연설도 아닙니다. 연사(演士)는 마치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 사전 준비도 없이 심중에 있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돌변하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의 위기가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해보는 질문입니다. 최근 수 년 동안만 해도, 가뭄과 굶주림, 억울한 누명과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바로 직전에는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들이 그와 나머지 형제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닥친 환난은 이전 것들에 비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큰 어려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왜 이처럼 ‘유다’가 돌변하고 있는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동생 ‘베냐민’을 그토록 위하고 챙기게 되었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아무튼 지금 그의 모습은 절박하며, 그동안의 자존과 자신감은 다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연설을 내용에 따라 구분해 보면 대략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상대를 추켜세우면서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으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주의 귀에 한 말씀 아뢰게 하소서...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 이는 상대의 마음을 여는 적절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면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총리가 이전에 그들을 어떻게 대해주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 관계라든지, 동생에 대해서라든지, 그의 지금 형편 등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었던 질문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19-23절). 형제들은 대부분의 질문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주었으며, 총리는 이들 정보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총리의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상대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소개하는 비법 중의 하나가 상대로부터 긍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총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언급하고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가 계속 자기 말에 동의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어서 ‘유다’는 총리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즉 지난 번 여행에서 돌아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입니다. ‘요셉’으로서야 알 재간이 없겠습니다만, 총리 자신이 그 이전에 이들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형제들이 집을 돌아갈 때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요구한 사실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알렸다는 사실이나, 그 요구를 받고 아버지 ‘야곱’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슬퍼했다는 사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이 죽어버릴 것이라고 절규했던 일 등을 알려줍니다(27-29절). 지금 ‘유다’는 막내아들을 놓고 비탄에 잠겨있는 늙은 애비의 심정을 그려 보임으로써 듣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총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을까요?
넷째, ‘유다’는 이제 한 가지 곤경(困境)을 다루고 싶어 합니다. 그 곤경이란 ‘베냐민’이나 자신들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남아있는 늙은 아비의 목숨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연설의 백미(白眉)에 해당되는 부분이라 본문을 인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30-31절).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동생을 살리려 간구하는 동안 어느덧 ‘유다’ 자신도 그의 늙은 아버지를 깊이 동정하고 사랑하게 된 모습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 이전에 ‘야곱’과 그의 혐오스러운 자식들 사이에 이미 화해의 대 서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유다’는 자기 개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유다’에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베냐민’을 살리려고 발 벗고 나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연설의 말미에 두는 조심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밝히는 개인적인 이유란 아버지와 맺은 약속을 말합니다. 즉 만일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는 아버지에게 영영 큰 죄를 짓게 되며, 자기 목숨을 대신 취해도 된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고 말합니다(32절). 그래서 ‘베냐민’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면서 최후의 진술을 마칩니다(34절). 그리고 이 최후의 진술은 ‘요셉’을 향한 마지막 압박이기도 합니다.
이제 공은 ‘요셉’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가 처음에 의도하고 바라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무엇을 계획했던, 어떤 결과를 기대했던, 지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이 ‘베냐민’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하고 변론하고 있는 이 상황. 그리고 ‘유다’조차도 ‘베냐민’만 무사히 풀려난다면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며 자청하고 나서고 이 상황 말입니다.
모세의 연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연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를 죽여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의사(意思)를 담은 연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와 유사한 감동적인 설교나 명연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첫 번째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을 즈음 그는 산 정상에서 사십 일을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출애굽” 이후 이곳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분노를 샀습니다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듯싶습니다. ‘모세’가 머물던 산 정상은 구름과 연기와 천둥과 화염으로 뒤덮여, 이를 바라보던 백성들은 처음 한 동안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냉소적으로 변하면서, 그들의 하나님 ‘야훼’를 버리고 ‘금송아지’ 신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출 32). 그들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최근의 생생한 기억보다 그보다 오래 된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더 기억하며, 그들에게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찬송을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조차 이 예배에 동참하기에 이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역설입니까! 지금 산 정상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율법을 ‘모세’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대제사장을 포함한 온 백성이 송아지를 향하여 난장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장면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극적 대조를 위해서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십계명의 일부를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2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2-5)
굳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더라도 그분의 실망과 분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성의 진영으로 돌아온 ‘모세’의 행동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새긴 돌 판을 던져 부셔버리고는 대제사장 ‘아론’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그리고는 ‘레위’ 지파를 시켜 이 반역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쳐 죽이라고 명하는데, 이 때 죽은 자들의 수가 삼천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이스라엘 백성의 약 1.5%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적어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모세’는 그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을 처벌하였고, 백성들의 충성심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되돌려 놓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모세’는 단순히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백성들의 죄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노 가운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반역한 백성을 멸할 준비를 하면서 말입니다. ‘모세’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밤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립니다.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위하여 신원(伸寃)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장면은 이튿날 아침 그가 하나님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1-32)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동시에 자기 백성이기도 합니다. 이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다’가 지금 ‘베냐민’을 위하여 간청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각오는 ‘모세’나 ‘유다’가 유일한 인물은 아닙니다. 민족의 불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각오 또한 그에 못하지 않습니다. ‘모세’처럼 반역적이고 불순종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각오입니다.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 9:1-4)
그리스도의 영. ‘유다’나 ‘모세’와 ‘바울’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이들 모두가 형제나 민족을 위해서 보여주고 있는 헌신이나 각오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 모두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입니다. ‘유다’는 진정 거듭난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진정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하여 전심전력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가 대신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간청하고 있습니까?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5. 나는 요셉이라
모든 이야기에는 절정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어지간한 독자라면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서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서 주변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듯이, 이야기의 절정에서 그 주제나 저자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게 됩니다. <요셉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이야기의 절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의 편에서 보자면, 그가 형제들 앞에서 마침내 자기가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마치 화산 폭발로 거대한 용암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듯, ‘요셉’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을 일시에 분출시키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함께 느껴 봅시다: “요셉이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1-3절).
이 장면을 이야기의 절정으로 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실 이야기 전체적으로 볼 때, 지금 이 장면보다 더 극적인 순간들이 여럿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순전히 형식적인 면에서만 볼 때, 이야기의 반(反) 절정은 바로 직전의 에피소드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요셉이야기>는 일곱 개의 작은 에피소드가 동심원적 구조 내지는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으며, 직전의 에피소드 즉 “형들의 체포” 장면이 교차대구의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셉이요”하며 외치는 이 장면은 신학적 주제의 기승전결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절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주제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일대 전환을 이루고 있습니까?
<요셉 이야기>를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은 그 주제가 어떻게 절정에 이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알리는 방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type)으로 그리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즉 가족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요셉’이야말로 인류의 구원자로 자신을 드러내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우리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향해서, “내가 그라”고 밝히고 계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이스’ 목사님은 몇 가지 관점에서 ‘요셉’이 어떻게 예수님의 모형이 될 수 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점을 이곳에서 소개하는 것도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알아보다. 첫 번째 유사성은 ‘요셉’이 그의 형들을 먼저 알아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실은 보편적인 세태(世態)를 반영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개 학생이 선생을 찾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대학원도 이와 같습니다. 한심스럽게도 요즈음 학생들은 어떤 교수가 조금이라도 인건비를 더 많이 주는지, 어떤 연구실이 더 편한 곳인지, 졸업 후 취업은 어떤 분야가 더 유리할 것인지를 곰곰이 저울질 해 본 다음에 지도교수를 결정합니다. 특히 지방대학의 경우 대학원 입학생의 수가 늘 정원보다 미달이다 보니 주도권은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생이 먼저 선생을 평가해 본 다음에 자신의 지도교수로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목자가 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선택하는 것 말입니다. 양이 목자를 선택하게 되면 처음부터 기독교 교육은 싹수가 노란 것입니다. 왜일까요?
물론 오늘날에도 예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나 다른 예술 분야에서는 대가(大家)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몇 년이고 참고 견디며 심지어 인격적 모독까지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연예 기획사를 보십시오. 가수나 연예인이 되겠다고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며 기획사 간부나 사장의 눈도장을 받으려 안달입니다. 심지어 성(性) 상납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에서 목자 예수님의 선택은 세태의 흐름과는 정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양들의 자질과 형편과 인품을 아셨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양들이 그분을 알아보기 전에 그들을 알아보셨습니다. ‘요셉’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베냐민’을 보는 순간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르우벤’이나 ‘유다’나 ‘시므온’이나 ‘레위’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형제들은 그가 누구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화자도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42:8).
이는 마치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가 진정 누구인지, 왜 세상에 왔는지 모르던 것과 같습니다. 어찌 예수님의 형제들뿐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4, 15)
‘다윗’의 고백인 즉은 하나님이나 주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형제들을 바라보는 ‘요셉’이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그의 형들은 지난 날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서로 간에 나누고 고백했지만, 그들이 아닌 어느 누가 자신들의 잘못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밝히 드러낼 수 있을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잘못을 공공연히 밝혀 치부를 드러내거나 또 화를 자초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 외에는 누가 그들의 은밀한 비밀이나 죄악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도 어제 오늘이 아니라 이십 년 전에 한 일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도 ‘요셉’처럼 나의 모든 잘못들을 다 알고 계실까요? 내가 아무리 그들을 감추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사랑하다. ‘요셉’을 ‘그리스도’와 나란히 비교해 싶은 동기는 또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먼저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먼저 사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나중에는 형들도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고 또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이십 년 전에 형들은 오히려 그를 증오했으며,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제 죽었을 것으로 믿고 지금까지 지내왔을 것입니다.
다만 최근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이것이 지난 날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부분적이긴 하지만 과오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끼리 있을 때만의 이야기이지, 그렇다고 해서 ‘요셉’을 그리워한다거나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죽어버린 동생을 사랑할 수도 기회도 없을 테니까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형제들하고만 있고 싶은 마음에서 주변의 시종들로 하여금 물러나 있도록 명령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고독한 이방인이었고 방랑자였습니다. 언감생심 어찌 가족들을 만나리라고 기대라도 했겠습니까!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난날을 회개하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동안의 그리움은 이제 연민과 사랑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울고 계신 그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
형제들을 향한 ‘요셉’의 연민의 정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시는 주님의 그것보다 어찌 더 깊고 크다 할 수 있겠습니까?
떨리는 구원. ‘요셉’의 형들이 그의 눈물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제는 살았구나 하며 환호(歡呼)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들은 동생의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을 받았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요셉’을 예수님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세 번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요셉’의 형들에게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장치였음을 이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지금 이 순간 ‘요셉’의 눈물을 보면서, 비로소 그 모든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구나!”
그래서요? 상황이 전보다 나아졌습니까? 이제는 살았구나 하며 안도했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그 세월이 훨씬 더 나았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요셉’에게 저질렀던 그 모든 일에 대한 보복을 지금 받는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하며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순간 그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심판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는 말이지요. 왜 구원이 이처럼 환호나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죄가 비로소 죄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까?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밤이 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던 그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환호하며 즐거워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베드로’는 환호하며 날뛰는 대신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하면서도 같은 편지 안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구원이 값을 매길 수 없다 해서,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는 당연한 보상 같은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두려움과 자책으로 떨지 못하는 자식은 아직 제대로 된 자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비 오는 날만 되면 울어대는 개구리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죽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나는 얼마나 헤아리고 있습니까? 전율하며 떨고 있습니까? 닭이 세 번 우는 것을 듣고 몸부림치며 울었던 ‘베드로’처럼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가롯 유다’처럼 자신이 한 일을 놓고 비통해 하며 치를 떨어 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가 감사와 감격의 시간으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월요일 아침의 학교 조례 시간만큼이나 따분하고 지루합니까? 정말 복음에 빚진 자로 여기고 세상을 향해 그 복음을 선물하려고 안달하고 있습니까?
예수께로 가까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나의 대답이 “그렇습니다”가 아니라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그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그들을 알아보았으며, 형들이 그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사랑하였으며, 형들이 구원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구원을 베풀었으며, 형들이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그들을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4절)하며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도 이와 같습니다.
두 사람의 초청 방식 또한 유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를 알리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물린 것처럼 예수님의 부르심 또한 이와 같습니다.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내 영혼을 향해서, 내 양심에 대고, 들릴 듯 말 듯, 나와 단 둘이 독대하시길 원합니다. 분주하고, 시끌벅적한 가운데서는 그분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알 수 있듯이, 주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흥집회나 대중 기도회 또는 통성기도회와 같은 요란한 방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조용하고 은밀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바람 소리 가운데 ‘야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조용한 골방을 찾습니까?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드리는 대표 기도가 전부입니까? 하나님은 언제 내 기도에 귀 기울고 들으실 것 같습니까?
짐작컨대 ‘요셉’이 그 형들을 부를 때, 열한 명의 이름을 일일이 다 불렀을 것입니다. 나중에 보게 될 것입니다만, 그는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고, 형들과도 입 맞추며 안고 울었습니다(14-15절).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어떻게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습니다. 그분이 부르시는 이름은 내 선조도 아니고, 내 이웃도, 내 가족도 아니며, 이순신 장군도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그는 주님에게 되물었습니다. 왜 다른 친구들은 부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음성이 들립니까? 지금 당장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당장 앞으로 걸어 나와 그분의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되는 특권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요셉’이 그 형들을 부를 때,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하고 밝혔듯이, 예수님 또는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 즉 그의 형제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종이 아니라, 그의 친구로 부르고 있습니다(요 15:15).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6. 하나님이 나를
한 번은 캐나다에 있는 둘째 녀석과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교회를 옮겨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한인 교회에서 ‘캐나다’인 교회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잘 한 결정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이 되라”는 경구가 있듯이, 그 나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에 가서 교제의 폭도 넓히고, 보다 폭넓은 신앙의 경험을 쌓는 것이 앞으로의 신앙생활에도 훨씬 도움이 되겠기에 동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교회는 작게는 서너 명에서 많아야 일이백 명 정도의 이민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성장보다는 현상 유지에 더 급급한 실정입니다. 선교나 지역 봉사 등의 활기 찬 기독교 사역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니, 늘 기존 신자들끼리의 교제나 기도회 등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침체되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교회가 갖는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모이기를 자주하고, 상호 부조나 교제가 깊어진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학우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를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회다 뭐다 하면서 이런 저런 교회 모임에 늘 참석하라고 하니 질렸나봅니다. 사실 교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모임이 기도회 아니겠습니까? 아마 이런 모임들이 그에게 너무 근본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툭하면 하나님 이야기, 기도 응답 이야기, 헌신과 결단 이야기만 해대니 기가 질릴 것은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고 간증해대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십니까? 상대의 기분을 생각지도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 이야기를 해대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같이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기가 질려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까?
범사에 하나님이. ‘요셉’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요셉’이야말로 말끝마다 하나님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열일곱에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온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 초지일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요셉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봅시다. 우선 ‘보디발’의 아내가 잠자리를 함께 하자고 유혹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이 하나님 때문에 간부(姦婦)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감옥에 갇혀있던 ‘바로’ 왕의 두 관리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다시 하나님 이름을 입에 올립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이뿐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왕의 꿈을 해몽해주면서도 역시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41:16);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41:25);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41:28);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41:32).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지을 때도 예의 하나님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41:51-52).
<창세기> 거의 끝 무렵에 형제들을 앞에 놓고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지사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미래지사까지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50:24-25).
말끝마다 하나님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거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무슨 광신자도 아니고, 최근에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죽는 날까지,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 이야기 일색입니다. ‘요셉’이 우리 교회 식구라면, 내가 속한 목장 식구이거나 나의 목자라면,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정말 피곤하고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그 밑에서 그를 섬기고 있었을 부하들의 고충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런 상관이나, 목자나, 목사 만나면 정말 힘듭니다. 나는 도무지 할 이야기가 없는데, 상대는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니, 하나님의 섭리니, 기도의 응답이니 하고 설쳐대면 영적으로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말끝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는 ‘요셉’의 모습은 본문(45:5-9)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다섯 절 안에서 네 번에 걸쳐 하나님을 반복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이...나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가 겪은 그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일들의 궁극적인 원인은 결국 하나님이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태도이며 간증입니다.
악과 고통마저. 이처럼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때, 무슨 유익이 그에게 있었습니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이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온갖 악한 일들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그에게 쏟아져 내렸습니다. 형제들의 미움과 배척, 노예 생활, 유혹과 감금, 배신감과 고독, 등등.
따라서 그의 고백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악한 일들을 그에게 쏟아 부었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의 창조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악한 계획도, 사악한 자들의 사악한 행위마저도 말입니다. <욥기>에서 ‘욥’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하도록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범죄하는 순간에는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그냥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왜 그를 말리지 않으셨을까?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을 “섭리”(攝理)라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이나 고통의 창조주는 아니지만,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궁극적인 통제와 책임을 지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고백도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선(先)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그렇다면 ‘요셉’이 간증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께서 ‘요셉’의 고통과 섭리를 한데 버무려서 이루어내신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합력시켜 이루어내신 일이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대략 세 가지 정도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즉 그를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9절). 다름 아닌 ‘이집트’ 총리입니다. ‘요셉’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애굽 전국의 주(@/da, 아돈)”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the Lord”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지칭하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노예에서 그 나라의 주인이 되었으니, 신분상승의 예로서 이보다 더 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그가 ‘이집트’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가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가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겸손이라는 양식을 먹고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겪었던 광야 40년의 세월, ‘다윗’이 보내야 했던 질시와 인고의 13년의 세월이 모두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격은 그냥 형성되는 것은 아닌 가 봅니다. 인생의 고해(苦海)를 항해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도구 중의 하나가 인내(忍耐)일 것인데, 인내는 인격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인내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토양은 다름 아닌 환난(患難)일 것입니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선언으로 이 교훈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롬 5:3하)
그러니까 내가 온전한 자아와 인격을 갖기 위해서는 환난을 거치는 길 외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을 “애굽 전국의 주”로 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섭리가 이루어내실 두 번째 일은 애비와 형제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은 ‘요셉’이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불러낸 것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를 ‘이집트’로 불러낸 것은 이들로 하여금 번성하고 번창하게 만들어 큰 민족과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래 전에 이미 약속하신 것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요셉’ 가족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내어 목숨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절)
셋째, 하나님의 관심사는 ‘요셉’과 그의 가족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 열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내실 세 번째 일은 열방에 관한 그분의 계획입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절).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생명이 누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인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 주변에 살던 여러 족속들이 극심한 기근을 겪었으며, 이들 모두 ‘이집트’로 몰려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한 사람의 고난을 통해서 그의 가족은 물론 온 민족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그 답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로마서>는 이스라엘도 ‘요셉’과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롬 11:11-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의도하시지는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실패와 좌절과 고난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방을 구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원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유명한 “종의 노래”를 통해서 오래 전부터 이를 예언한 바 있습니다: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2-5)
여기서 “그”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 중 어느 누구도 이 노래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지칭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노래를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 노래가 자신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적용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해석이 가능했을까요?
<전도서>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와 ‘모르드개’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악한 ‘하만’의 간계로 ‘페르샤’ 왕국에 살고 있던 모든 이스라엘이 멸절의 위기를 만났을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찾아가 그 유명한 도전으로 왕비 ‘에스더’의 영혼을 일깨웁니다.
13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 4:13-14)
우리가 알다시피 <에스더>에는 하나님 자신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이 말속에 역사와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대한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개인과, 나라와, 우주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잣대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그의 안경입니다. 그는 이 안경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심은”하고 확신합니다.
어떻게 입만 열었다 하면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까? <잠언서>는 “너는 범사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서>는 “항상 기뻐하라...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 18)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매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매사에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무슨 비결이 없을까? 무슨 신비한 체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서양 속담에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Easy come, easy go)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부자 3대 못간다”는 경구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신비한 체험이나 비결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래갑니까? 우리네 속담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습관입니다. 습관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그리고 습관은 체질이 됩니다. 우리가 체질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요셉’과 ‘모르드개’와 예수님 모두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심은”하며 꿈과 비전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111 사역”입니다.
헌신을 위하여.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당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합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게 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왜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요셉’의 안경을 쓰고 있습니까? ‘모르드개’의 도전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두신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제 내가 답할 차례입니다. 결단하고 헌신합시다. 그리고 고백하고 간증합시다.
7. 요셉의 날
나라마다 국경일이나 기념일이 있습니다만, 사람 이름을 기념하는 날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본인이 기억하기로는 전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에는 사람 이름을 기념하는 날이 상당 수 있습니다. 미국에 특히 이런 기념일이 많은데, 최근에도 미국 LA 의회는 2010년 8월 7일을 “김연아의 날”로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정말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영광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 정부가 이 날을 제정한 것도 아니고 외국 정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그녀만큼 크게 국위를 선양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어린 여학생이 이룩한 업적과 성과는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LA 시민들이 김연아를 기념한다면 분명 그녀가 이룩한 기념비적인 업적을 기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그녀를 앞섰던 어떤 선수도 이루지 못한 그 업적을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날 날은 많겠지만, 지금 본문 속에 그리고 있는 이 장면, 이 순간 역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 감격적이고 격동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절). 형제들이 구원을 받고, ‘야곱’의 가족 모두가 이집트로 이주하는 전기가 마련되는 역사적 순간입니다.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출애굽”에서 시작된다고 한다면, 이 장면은 “반(反) 출애굽”을 알리는 서막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 날을 기념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는 어떻습니까? ‘이집트’ 역시 그네들의 역사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했을 위대한 재상(宰相) ‘요셉’을 기려 이날을 “요셉의 날”로 제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이 단순히 자기 가족들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주변 모든 민족들을 구원해 냄으로써 ‘이집트’의 위대함을 만방에 드러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입니까? 이스라엘이든 ‘이집트’든 ‘요셉’을 기념해야 할 이유가 모두 자신들의 이름을 만방에 알려주었기 때문입니까? 감사의 표시로 말입니다.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할 사실도 이것이 전부입니까? 언젠가 한 TV 방송국에서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서 연습 중 넘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 선수가 오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무려 4만 번인가를 빙판 바닥에 쓰러졌다고 언급하면서, 제대로 성한 구석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그녀의 몸도 함께 비춰주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녀의 영광은 온통 상처뿐인 영광이었습니다.
‘요셉’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스라엘이든 ‘이집트’든 “요셉의 날”에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들이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과거사가 아니라, ‘요셉’ 의 생애를 돌아보는 것, 특히 그의 몸에 남겨진 “영광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환란에서 연단으로.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감격적인 장면으로 되돌아가보아야 할 것입니다.
14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절)
친동생 ‘베냐민’ 뿐만 아니라, 나머지 이복형들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껴안고, 입 맞추며, 눈물 흘리고 있는 ‘요셉’을 보며 갖게 되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이십년 만에 가족을 만나는 기쁨의 눈물일까요?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요셉’의 눈물입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시에 특히 북쪽 가족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실로 처연(凄然)하고 처절(凄切)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단순한 재회의 기쁨이 아닙니다. 매우 절제되고 통제된 감정의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그들이 흘려내는 눈물 속에는 지나간 수십 년 동안 겪어왔던 고통과 좌절이 뒤섞여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들과 생이별하여 생지옥과도 같은 낯선 동토(凍土)에서 억압과 감시 하에서 꼭꼭 누르고 숨겨왔던 두려움과 외로움과 서러움의 눈물이 그렇게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요셉’의 눈물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 말입니다. 나이 불과 열일곱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이국으로 노예로 팔려왔을 때 그가 겪었을 심적 충격을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겪었을 충격은 문화 충격과 언어 충격까지 겹쳐 실로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충격은 또 있습니다. 정직함과 신실함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모함과 배신과 투옥이었습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사회적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이년을 감옥에서 홀로 지낼 때 그의 유일한 친구는 고독과 절망이었습니다. 그 이년 동안에 잠시 소망의 빛이 비추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때는 다름 아닌 같은 감옥에 왕의 고위직 신하 두 사람이 투옥되었을 때입니다. 이들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주고 이들로부터 곧 풀려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빛도 잠시. 그는 다시 잊혀 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런 상태로 영원히 지하 어두운 감옥에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이전보다 더한 절망감과 외로움이 그를 죽음보다 더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월이 전혀 무익했을까? “우연”이 그를 재상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겠습니다. 실로 환난은 인내를 낳았고, 인내가 연단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여기서 “연단”이라 함은 ‘헬라’어로 “품성”이나 “인격” 또는 “인정받은 자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참고 견디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진정한 자아가 형성되고, 성숙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곰과 호랑이가 겪어야 했던 인내와 연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곰은 인내하여 새로운 연단 즉 환웅(桓雄)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인내하지 못하여 그냥 원래의 짐승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야수(野獸)의 본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입니다.
훗날 ‘이집트’의 후손이든 ‘이스라엘’의 후손이든 “요셉의 날”을 기념할 때, 주인공 ‘요셉’이 겪었던 환란과 인내, 그리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운명이 된 인격을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복이 아닌 용서. 후대가 “요셉의 날”에 기념해야 할 또 다른 기억은 무엇입니까? 역설적입니다만 ‘요셉’의 망각 즉 “기억 상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첫 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고 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는 이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41:51).
우리는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잘못된 과거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시효 만료되어 해체되었습니다만, 과거사위원회에서 한 일도 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벌 줄 자는 벌주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만든 위원회였습니다. 이런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과거사 정리는 자칫 미움과 보복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요셉’이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망각의 강 속으로 흘러 보낼 때 함께 흘러 보낸 것이 바로 증오와 보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사전에서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라든지 와신상담(臥薪嘗膽) 등과 같은 그 유명한 중국의 고사 성어가 자리할 여지가 없었다 하겠습니다. 다시 재회의 장면으로 되돌아가 봄으로써 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동생 ‘베냐민’을 얼싸 안고 우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만, 나머지 형제들과도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지요. ‘요셉’이 이렇게 했을 때 나타나는 형들의 반응에 대한 화자의 묘사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더니.” 비로소 ‘요셉’의 진심을 파악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정말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을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언론을 통해서 해외 입양아들이 고국을 찾아와 과거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들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기를 고아원에 버린 그 부모를 미워하기는커녕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하고 말입니다. 이들이 부모를 찾는 것은 그들을 찾아내어 과거사를 따지고 앙갚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만나서 ‘요셉’처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성한 모습, 자랑스러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입양아들은 자신의 혈육의 부모들보다 훨씬 더 큰 그릇으로 성장해 있는 것입니다.
‘요셉’ 역시 이들 입양아들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야곱’보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보다 더 큰 그릇으로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의 끝에 “야곱의 예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만, ‘야곱’은 임종 시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독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만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와 분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49:6-7)
‘야곱’은 죽는 순간까지 이 두 아들이 이전에 ‘세겜’에서 ‘디나’의 일로 저지른 잔학한 복수극을 기억하고 용서할 수 없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37장).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두 형제는 ‘요셉’을 팔아넘기는 일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자들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훗날 “모세의 축복” 속에도 ‘시므온’ 지파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신 33). ‘모세’ 역시 역사를 통해서 그의 악행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지금 이들 모두를 끌어안고 용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야곱’이나 ‘모세’는 ‘요셉’과 비교가 될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날. 다만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그를 능가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팔아넘긴 제자 ‘가롯 유다’마저 받아들였고, 마지막 성찬 때에는 떡 한 조각을 떼어 그의 입에 넣어주는 등의 각별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마지막 배신의 날 밤에 ‘유다’가 로마 병정들을 데리고 와서 누가 예수인지 일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볼에 입맞춤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은 결코 그의 뺨을 돌리지 않고 허용했습니다.
나를 찾아오셨던 분도 바로 이 주님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였을 때나, 알고 난 뒤에나,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배반하고 거부하고 등을 돌렸습니다만,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내 속에서, 그리고 나와 함께, 또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하여, 울며, 기다리며,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면, 무엇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까요? 성탄절입니까? 부활절입니까? 주님께서 직접 그분의 제자들에게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대답해 봅시다.
8. 왕의 好意
<요셉 이야기>에서 ‘바로’ 왕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특히 그가 꾼 두 차례의 꿈은 이야기의 극적 반전을 이루게 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본문에서 보다시피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을 하는 기틀을 그가 마련해 준 셈입니다. 그가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고서는 결코 내릴 수 없는 결정임에 분명합니다. 그는 ‘요셉’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고, ‘요셉’의 마음이 곧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만일 신하들이 “요셉의 날”을 제정하자고 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 질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대뜸 <에스더>에 등장하고 있는 ‘페르샤’의 왕 ‘아하수에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역시 ‘모르드개’라 불리는 한 신하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이름을 높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 때문에 암살의 위기에서 구사일생 벗어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은 자신의 구상을 최측근 신하 ‘하만’에게 드러내며 그 방안을 타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자는 왕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 인줄 알고 한껏 들떠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줍니다:
7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8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9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 6:7-9)
착각도 자유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가히 예술적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왕이 자신이 아닌, ‘모르드개’에게 이와 같이 행했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과 실망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엄한 약속. 만일 누군가가 ‘바로’ 왕에게 “요셉의 날”을 제정하자고 하며, 왕이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하수에르’ 왕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조치와 그에 따른 약속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17-18절).
왕의 말은 곧 법이고, 고로 그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다름없습니다. ‘요셉’이 그동안 왕과 ‘이집트’를 위해서 한 일에 비하면 이 같은 조치는 일견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인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 왕으로부터 이 같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대우는 고사하고 당장 처형을 받아 마땅합니다. 왕이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왕의 오른 팔 ‘요셉’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넘긴 자들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다니요! 당장 잡아다가 요절을 내야 하지 않을까요?
왕의 인품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가나안’에 있는 그들의 모든 가족을 불러내려 ‘이집트’에서 함께 살게 하는 데에는 솔직히 정치적인 부담이 없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요셉’의 정치적 지위나 영향력을 지금보다 더욱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입지나 권위는 약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독재자는 자신을 이을 제 2인자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차세대 주자가 자기보다 대중들의 인기를 더 끌게 되면 가차 없이 그를 숙청해 버리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동생에게 권력을 승계시키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북한이나 ‘쿠바’에서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바로’ 왕이 자신의 혈육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에 대해서 이와 같은 독재자 특유의 시기심이나, 경계심을 보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요셉’과 함께 기뻐하고 있으며, ‘요셉’의 소원을 자신의 소원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데려오고 싶은 ‘요셉’의 마음이 곧 자기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대신해서 그들을 데려다 그 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한 지역에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가족이 이주하여 살게 될 ‘고센’ 지역은 ‘나일’ 강 하류에 위치한 곳으로서, 우리가 알다시피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로운 곳입니다. 이제 7년의 대 기근이 끝나고 나면 아마 ‘이집트’에서 지상 낙원으로 변하게 될 땅이 바로 ‘고센’인 것입니다. 이 땅을 ‘요셉’의 가족을 위해 내놓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에 대한 보장. 왕의 약속은 결코 빈 말이 아닙니다. 미래의 약속에 걸 맞는 가시적인 보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페르샤’의 ‘아하수에르’ 왕이 ‘모르드개’에게 해 준 것처럼, ‘바로’는 이들 가족에게 약속과 함께 하사품(下賜品)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옷이며, 수레며, 말이며, 양식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오라... (중략) 또 그들에게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중략)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19-23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수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보잘 것 없는 소달구지가 아닙니다. 왕의 부와 권력에 대한 최고의 상징입니다. 오늘로 치자면 최고급 자동차나 점보 비행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무도 왕 외에는 그와 같은 수레를 소유한 자가 없었습니다. 중동의 최고 권력자가 시골 ‘가나안’에 살고 있는 한 촌부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서 자신의 수레를 보내고 있다! 청와대에 계신 대통령이 남산면 시골에 살고 있는 나를 초청하기 위해서 대통령 전용기를 대구 비행장에 착륙시키는 행위에 맞먹는다 하겠습니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사실 이들은 그냥 걸어와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것이지요.
왕이 왜 이처럼 쓸 데 없는 짓을 한 것일까? 왜 이와 같은 과소비를 한 것일까? 왜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짓을 한 것입니까? 아들과도 같은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요셉’을 사랑하였고, 그를 존귀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아까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의 동기는 그야말로 ‘헤세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행여나 ‘야곱’이 의심하여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들이 살아있으며,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자식들의 보고를 어찌 순순히 믿을 수 있을까요?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보듯이, 아닌 게 아니라 ‘야곱’은 자식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왕의 염려는 단순한 기우(杞憂)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전용기 ‘점보’ 비행기에 가득 선물을 실어 함께 보낸 것도 행여나 ‘야곱’이 의심하여 오기를 거부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왕은 정말 ‘요셉’을 사랑하였고,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던 가 봅니다.
간절한 부탁. 그래도 여전히 왕은 불안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왕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재차 다짐을 받고 싶습니다: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라”(20절). 무슨 말입니까? ‘가나안’과 그곳에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아무 미련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무거운 가방이나 짐들을 고생스럽게 들고 다니지 말고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지니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흥미롭게도 <신약>에 이에 대응되는 유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솔직히 여행에서 지나치게 무거운 가방은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하는 경우라면 무거운 가방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짐”은 사전적 의미 외에도, “부담” 또는 “장애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그분의 제자들이 ‘가나안’의 그 모든 불필요한 짐들을 다 벗어던져버리라고 애절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중략)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주님의 말씀인 즉은 여행에 필요한 가방까지 다 던져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에 왜 가방이 필요 없겠습니까? 가방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방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내가 가방의 주인인 것이지 가방이 내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집이나 재산이 왜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것들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나를 소유한다는 말은 내가 그것들에 집착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공의 조건들로 “인맥”(person)이나 “지위”(position), 그리고 “재물”(possession)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만, 이들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나를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소유하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면, 항상 만족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내 속에 없으면, 그냥 좋거나 아주 좋은 것들로는 만족할 수가 없도록 우리는 설계되어 있습니다. 최고급 세단에 디젤유를 넣게 되면 차는 덜커덩거리다가 얼마 못가 망가지게 되지요. 내 인생이 늘 힘겹고, 불만족스러운 것은 그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신호를 신체 감응 장치가 보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잔. ‘바로’ 왕은 ‘야곱’이 그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소유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그의 가족을 왕궁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냥 말로만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온갖 진기한 선물로 가득 찬 그의 전용기를 보냅니다: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21-23절).
온갖 진기한 선물은 ‘야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품 옷과 맛있는 음식에다 그야말로 그들의 잔이 넘칠 정도입니다.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무려 다섯 배나 더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이 이를 두고 이전에 ‘요셉’에게 보였던 시기심이 다시 발동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잔이 넘치는 판에 다른 사람의 잔이 좀 더 넘치는 일 따위는 이제 크게 개의할 일도 못됩니다. 동생과 화해도 했겠다, 자신들의 이전 죄도 용서받았겠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오늘 내 잔(盞)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로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들이 부럽고, 탐이 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혹시 갖지 못한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내 잔이 흘러넘치고 있음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왜 사랑하나. ‘바울’ 사도의 말인 즉은, ‘야곱’과 그 자식들이 왕으로부터 무슨 선물을 얼마나 받았건, 우리가 만왕의 왕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이 그토록 큰 호의를 ‘야곱’에게 베푼 것은 순전히 ‘요셉’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호의와 특혜를 주신 것도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바로’ 왕은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18절). 하지만 예수님은 이보다 다한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우리는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산해진미를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두 왕이 제시하는 엄청난 약속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만이 아닙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지금 ‘가나안’에 살고 있는 동안 벌써 온갖 진기한 선물들을 이미 받았다고 서술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요 10:10하).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 덕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가 누릴 천국에 대한 보장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중략)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중략)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중략)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5, 7-8, 13-14)
‘바로’는 또한 ‘야곱’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고 속히 ‘이집트’로 내려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20절).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바로’는 ‘야곱’에게 여행에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수레와, 당나귀와, 의복과, 양식 등등. 우리 역시 그러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인즉 이를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마 6:11). 그분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나의 신분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9. 복음의 不可思議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까 염려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즉 다음날 일어나지 못할까 염려되어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밤에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은 다음 날 아무 일 없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 즉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술을 앞두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수술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 여부에 상관없이 불안하고 긴장이 됩니다. 이는 의사를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수술 중에 마취가 깰까 봐 걱정이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불안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과 염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의사나 현대 의술에 대한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수술을 앞둔 내 기분과 감정이 나의 믿음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감성, 신앙과 불신.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부활을 지지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감정들이 수시로 나의 믿음에 반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술의 경우를 다시 예로 들자면, 수술을 앞두고 내 속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나의 “이성(異性)과 믿음”이 한 편을 이루고 있다면, “감정(感情)과 기분”이 반대편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성이 믿음을 지지해주고 있다면, 감성이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동안 우리가 공유해 왔던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믿음과 이성이 서로 대척점에 서있다고 인식해 왔습니다.
교부 ‘터툴리안’도 이점을 분명하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철학과 종교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신학과 신앙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루이스’(C. 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정반대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즉 이성과 믿음은 오히려 한 편에 서있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한 편에 서서, 감정이나 느낌(즉 기분)에 대항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인정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기분이나 느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기분이고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훈련이 필요할 것인데, ‘루이스’는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 그 답이라고 말합니다. 감정이나 느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믿음은 인위적이며 의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믿음과 느낌은 상충되는 영역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진리나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우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만 그나마도 마음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내 감정을 속이는 일만큼 더 쉬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吉兆가 아닌 凶兆를. 이처럼 믿음은 이성의 영역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그 때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좌지우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늘 우울하고 슬픈 사람은 좋은 소식을 믿기보다는 나쁜 소식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긍정의 힘을 믿기 보다는 절망하고 좌절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런 모습은 굳이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하드라도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일종의 질병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 있어 ‘야곱’은 우리의 대변자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누굽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씨름을 통해서 하나님마저 손들게 했던 투사요 전사(戰士)입니다. 영적(靈的)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라면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일관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요요’(yoyo)처럼 감정과 기분이 요동쳤고, 그 때마다 믿음 또한 오르락내리락 파도타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절망의 계곡에서 신세를 한탄하며 자기 연민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그의 자식들이 첫 번째 ‘이집트’ 여행에서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고 돌아와서 ‘베냐민’을 데려가야 되겠다고 했을 때 그가 무어라고 했습니까?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야곱’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길조(吉兆) 즉 좋은 소식보다는 흉조(凶兆) 즉 나쁜 소식을 더 쉽게 믿으려한다는 것입니다. 예는 또 있습니다. 자식들이 ‘요셉’이 입던 옷에 염소 피를 발라 들고 왔을 때, 그는 대뜸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이 찢겼도다”(37:33). 아니, 어떻게 제대로 확인 한 번 해보지도 않고서 이처럼 확신에 가득 찰 수 있을까! 자식이 정말 짐승에 물려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있는지 사람들을 시켜 조사 한 번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처럼 쉽게 단정해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포기했고, 나쁜 소식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즉 더 쉬운 쪽을 선택했습니다. 포기하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개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다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즐거운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을 더 쉽게 믿게 되지요. 어차피 인생이라는 것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실망을 덜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일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체념하거나 우울한 소식을 믿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야곱’도 험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체질적으로 이렇게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인생이 꼬이게 된 데에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일 때부터 그의 인생은 역경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도망자로 삼촌 ‘라반’의 집에 노예로 살면서도 그는 속고, 속이는 일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초래한 일로 생명의 위기를 넘겨야 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삼촌의 추격을 받을 때에도 그랬고,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에도 그랬습니다. 삼촌을 피해 도망가는 중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형의 보복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얍복’ 강가에서 밤새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의 형은 그를 너그럽게 맞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분에 넘치는 제안, 즉 함께 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남을 쉽게 믿지 못하는 그는 형을 떠나 ‘세겜’으로 떠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행한 결과입니다. 이곳에서 노후를 좀 편안하게 보내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딸 ‘디나’의 문제로 ‘세겜’ 족들의 원한과 보복이 두려워 다시 한 번 방랑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번 꼬인 ‘야곱’의 인생은 계속 꼬이기만 했습니다만, 그가 겪은 고통은 아들 ‘요셉’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순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관된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신앙이 무엇인지 배워도 한 참을 배워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일관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일관된 신앙이 아니라 기분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훗날 ‘이집트’ 왕을 만난 자리에서 나이를 묻는 왕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나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불과 백삼십 년 밖에 살지 않았는데도 온갖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기 연민이나 신세 한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지금 무슨 격식이나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는 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엄(至嚴)한 왕 앞에서 보일 태도입니까? 아니 누가 그렇게 살라고 억지로 시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자기는 그냥 선하게 살려고 했는데,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괴롭혔다는 말입니까? 그의 믿음은 정말 별 볼일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복음을 의심함. 이런 그에게 자식들이 들려주는 길조 즉 복음의 소식은 이것입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절). 이 무슨 충격적인 복음입니까! 그의 믿음과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분고분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26절하). 아니나 다를까! 길조보다는 늘 흉조를 믿고 살아왔던 그가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는 속으로 이렇게 되 뇌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가 없어! 나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가 없어!”
아, 통재라! 불행하게도 ‘야곱’의 이성적 판단 능력은 이미 마비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굴곡 된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처럽 보입니다.
오늘 세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복음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엠마로’로 가던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며칠 전 ‘예루살렘’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직접 체험한 것이라고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이 비극적 종말을 고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유월절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어두운 골방에 모여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마리아’가 그들에게 달려와 복음을 전했을 때, 즉 “주께서 살아나셨다. 그가 여전히 살아계시다”고 외쳤을 때, 한 줄기 섬광이 그들의 어두운 영혼을 갈라놓았습니까? 그들이 이 여인의 말을 믿었습니까?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까? 다시 살아나신 주를 보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까? 아닙니다. 각자 짐을 챙겨 원래의 생업(生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그렇지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들 왜 이럴까? 복음이 그냥 좋은 소식이 아니라, 가장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한 번도 경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수석입학이나 수석졸업의 영예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수석 하는 기분이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마라톤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 기분을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인지 그것을 받아보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동안 복음이라는 선물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롬 1:4)는 가장 좋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빌 2:9-10) 하셨다는 가장 좋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인가 이스라엘인가. 나는 어떻습니까? 나 역시 ‘야곱’처럼 “험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입니까? 그래서 체질적으로 기대보다는 체념을, 소망보다는 포기를, 좋은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을, 약속보다는 상황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평생을 ‘야곱’으로만 살아가지는 않은 듯합니다. “아들이 살아 총리가 되어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보리라 하니라”(28절).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 ‘야곱’의 이름이 다시 언약의 이름 ‘이스라엘’로 바뀌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님이 다스림”, 내지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이라면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의 만남 이후 그를 이스라엘로 불러주었습니다만, 그는 여전히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화자가 다시 그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 마침내 그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어떻게 그가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자식들로부터 개인적인 간증이나 고백과 더불어 ‘요셉’이 그들에게 부탁한 그 모든 말을 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들이 과연 어떤 말들이었는지 그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살아있다”는 복음의 소식은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들도 함께 왔습니다. 수레와 그 위에 실은 각종 다양한 선물들이 그 증거입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우울하고 침울하기만 하던 ‘야곱’의 구겨진 얼굴이 마침내 환하게 펴지는 순간입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야곱’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식과 만족과 감사보다는 불평과 한탄과 자기 연민으로 하루를 맞고 또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마치 사막의 전갈처럼 내 몸속의 독기를 뿜어낼 그 누군가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의 간증과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수레”와 각양 선물들, 즉 부활의 증거들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주의 날”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수레”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날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부활의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약 1:17)을 확인하고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내가 족하도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보리라 하니라.” 오늘 나는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그리스도의 날을 제정하여 기념한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은 무엇입니까? “고독”을 하나님의 은사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나는 그것을 은사로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각자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은사를 나누어봅시다.
2. ‘요셉’과 ‘야곱’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인생을 바라보는 자세나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며 흥미롭습니다:
‘요셉’: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야곱’: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괴로움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까? 그 대책은 무엇입니까?
3.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으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