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0과
율법주의 반박(2)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3:6-14약 29분 분량

성경을 통한 검증
(3:6-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갈라디아서>에서 “검증”(檢證)에 해당되는 본문은 넓게는 3:1-4:11 사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이 행하고 있는 바는, “율법주의”(legalism)와 “명목주의”(nominism)에 대해서 그가 2:15-21 사이에서 천명한 “대명제”(大命題)들을 검증하고, 관련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명목주의”는 보다 완벽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 외에 “율법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3:1-4:11 사이에서 이 두 신학 사상에 대항해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주제에 따라 본문은 다시 크게 두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3:1-18율법주의 반박
(2) 3:19-4:11명목주의 반박
그리고 3:1-18 사이에서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검증 본문을 다시 세분해 보면, 검증 작업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짐도 보았습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이 과에서 다룰 내용은 두 번째 검증 작업에 관한 것으로서, <성경>을 통한 검증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원래 그러한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성경> 해석 방법들은 그것이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혹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간에 해석학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오히려 <구약>의 본문으로부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고, 또 당대의 삶에 대한 교훈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면 가치 있는 해석 방법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비평학적 입장에서 평가할 때, 초대 교회 시대의 해석 방법은 본문 자체로부터 의미를 뽑아내는 ‘exegesis’가 아니라, 본문 자체에 자신의 사상을 집어넣으려는 ‘eisgesis’에 가까웠습니다. 즉 자신의 사상을 논리성이 결여된 채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소개하는 무모한 “본문 인용”(text-proof)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이와 같은 성경 해석 방법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그가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현대 해석학에서는 지양(止揚)되어야 할 자세임에 틀림없음에도, 본문에서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여섯 구절의 <구약> 본문은 사도가 의도하고자 했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리고 본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직전의 검증 내용(3:1-5)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사도는 앞 단락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반 율법주의”(反“律法主義)에 대한 검증”(probation)을 시작한바 있습니다(3:1-5). 이제 이곳에서는 그 두 번째로 “성경을 통한 검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은 모두 여섯 구절로서, 핵심 내용이나 주제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신의 통상적인 관례에서 볼 때, 독자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하여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너희들도 아는 바라”(7절)를 “아브라함 언약”과 함께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7절을 6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창세기> 15:6의 본문에 대한 결론으로 삼고자 함입니다.
수사학적(修辭學的)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을 믿음의 전형(典型)으로 제시하면서 논증을 시작하고 있는 점은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의 기법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논의가 전개되면서 <성경> 본문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무리한 성경 본문 인용”의 전형입니다(위 설명 참고).
구조적으로 볼 때, 사도는 첫 번째 단락에서(6-9절)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에 초점을 맞춘 다음, 두 번째 단락으로(10-14절) 논의를 발전시켜갑니다. 우선 10-12절 사이에서 매 절마다 율법과 관련한 사도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킨 다음, <구약>에서 한 구절씩을 인용함으로써 증거 본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1) 10절: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 27:26) 하였음이라;
(2)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하였음이라;
(3) 12절: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러나)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레 18:5) 하였느니라.
이들 각 절은 모두 등가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만(괄호 속의 접속사), 13절에서는 이를 생략한 채 마지막 논점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 21:23) 하였음이라.
이런 “생략”의 기법이 주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강조를 위한 것인데, 그가 인용하고 있는 이 마지막 구절(13절상)은 ‘바울’ 이전부터 유대∙기독교인 사이에 회자(膾炙)되던 유명한 신앙 고백문(告白文)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사도는 이 고백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진리의 일단을 ‘갈라디아’의 현 상황에 적용하면서 14절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믿음”과 “성령”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검증”을 위한 두 본문(3:1-5; 3:6-14)이 적어도 주제에 있어서는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본문이 분위기에 있어서나, 접근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앞 단락에서(3:1-5) 제시한 바 있는 “믿음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에 대한 논의가 이곳에서 다시 마지막 구절에서 등장함으로써, 주제에 대한 논의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바울’의 <성경> 해석 방식입니다. 그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리한 “본문 인용”의 전형이라고 언급하였듯이, 누구나 사도와 동의할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어떤 합리성이나 일말의 권위를 가지려면 이 문제가 우선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본문의 서론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믿음과 축복(6-9절)
사도가 <성경>에서 이끌어내고 있는 첫 번째 사례는 ‘아브라함’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kaqw;" jAbraa;m”(카토스 아브람). “카토스”는 “...처럼” 또는 “...와 같이” 등의 의미를 갖는 부사로서 흔히 비교를 위해서 <성경>으로부터 특정 구절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흔히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기록 된 바”로 번역하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 마 26:24; 막 1:2; 14:21; 눅 2:23; 행 15:15; 롬 1:17; 2:24; 3:10; 4:17; 8:36.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자면”, “아브라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또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라” 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경험을 통한 검증에서 <성경>의 예를 통한 검증으로 옮겨가면서, 수사적(修辭的) 방식 또한 그리스∙로마 방식에서 ‘유대’ 식 성경해석의 전형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후부터 그가 전개하는 성경 해석의 논리는 모두 이와 같이 소위 “무리한 본문 인용”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가 처음으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5:6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6절; 창 15:6)
그 많은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서 왜 하필 이 구절인가?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이 구절에 대한 가능한 다양한 의미나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의 <창세기> 교재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적어도 “유대주의자”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표상 내지는 전형(典型)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이 있기 이전에 이미 할례까지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마도 <창세기> 17:4-14 사이에 소개하고 있는 “할례 의식”을 예로써 제시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사는 <창세기> 17장의 “할례 의식”에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러한 믿음이 끼친 효과 내지는 결과에만 국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주의”를 반박하기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유대주의” 식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할례”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소개되고 있으며, ‘아브라함’이 언약의 당사자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한 한 전제 조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하여 이후에 언급되고 있는 추가적인 규례나 조건들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15:6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는 현상적인 것일 뿐 실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며(갈 5:5), ‘아브라함’ 역시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도에게 있어,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독교 복음에서 요구하고 있는 믿음과 질적인 면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동일한 성격의 반응인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의 반응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정하셨습니다”(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헬라’ 문헌에서나 <신약>에서는 공히 “간주하다”, “여기다”, “측정하다” 등인데, <칠십인 역>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 “하삽”(בשׁח)을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유대’인들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언급할 때면 주로 <창세기> 15:6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의”는 “의로운 행동”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람어’로 된 <탈굼>의 경우만 하드라도, “아브라함의 의”를 <창세기> 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 즉 ‘아브라함’이 동방의 네 왕들과의 전투에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한 일과 연관 지워 해석하고 있습니다(Longenecker). 그러나 ‘바울’ 사도는 <창세기> 15:6을 인용하면서 14장의 사건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으며, 17장의 “할례 의식”을 언약의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전후문맥에 대해서 전혀 고려함이 없이, 이 구절만을 인용함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로운 행동도, 할례도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은 그의 후손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가 <창세기> 15:6을 인용한 것은 이어지는 7절에서의 주장에 대한 증거 본문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7절)
이 문장의 형태는 일부 영어 번역본에 따르면 단순 서술형으로 볼 수도 있으나, 대개 명령형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구절은 그 내용에 있어 6절에 대한 논리적인 귀결 내지는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란 신자 개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에 의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주장일진대, 이 표현은 당연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구약>을 근거로 소개하거나, 그들이 ‘아브라함’이나 ‘유대’ 민족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유대주의자”들의 그동안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이 표현을 차용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포함될 수 있는가? 사도의 대답은 단순히 “그렇다”를 넘어, “<성경>에서 이미 예언한 바 있다”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8절)
사도에 따르면 그 예언의 말씀은 다름 아닌 <창세기> 12:3입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전체 “아브라함 언약”의 일부로서, 언약의 세 요소인 땅과 후손과 축복 중에서 세 번째 요소인 “축복”과 관련된 것입니다. 비교를 위하여 “아브라함 언약”을 이곳에 다시 한 번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사도가 논증을 위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포함되느냐에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 속에 이방인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마땅하지만, 사도는 이 표현 대신에 “이방인”(ἔθνος; 에트노스)이라는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그의 대답으로 삼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8절은 문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7절과 연결되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 6절로부터 당연히 유추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이방인은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대상으로서, 이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 전체에 걸쳐 드러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써, 바울은 <로마서> 15:9-12에서 이방인에 관해서 쓰면서 <구약>의 다양한 본문들을 인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시 18:49; 삼하 22:50; 신 32:43; 시 117:1; 사 11:10.
그리고 바로 이점을 그의 이방인 독자들이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아브라함’을 잇는 연결 고리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점을 9절에서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보다 정확하게는 “믿음에 의지하는 자”를 말하며, “율법에 의지하는 자”,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 또는 “할례를 받은 자” 등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자를 말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동등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며(7절), 이곳 9절에서처럼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2. 율법과 저주(10-14절)
이 두 번째 단락은 또 다른 후치접속사(後置接續詞) “왜냐하면”(γάρ,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어, 첫 번째 단락에 대한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첫 번째 단락의 핵심어가 “믿음과 의”인데 반해, 이곳에서의 핵심어는 “율법과 저주”로서, 이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고자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향해서 노골적이고 신랄한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율법 책 중의 율법 책”으로 알려져 있는 <신명기>와 <레위기>입니다. 우선 “율법의 행위”와 관련하여 그가 내리고 있는 진단은 단순 명쾌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10절상)
“율법의 행위”와 저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그 첫 번째 성경적 증거를 <신명기>에서 찾고 있습니다:
기록 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0절하, 신 27:26)
그러나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 본문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리한 본문 인용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마소라>나 <칠십인 역>과도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고의로 본문 변조를 했을 수도 있고, 또는 사도 당시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역본(譯本)으로부터 인용했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임의로 인용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들이 그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가 강조를 위해서 절대적인 의미로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pa'“); “모든 일”(pa'”); “항상 행함”. 이 구절은 <신명기> 27:9-26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 배경은 ‘이스라엘’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매년 “모세의 언약”을 갱신하면서, 행하는 서약 의식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각 여섯 지파 씩 축복의 산 ‘그리심’과 저주의 산 ‘에발’에 나누어 서서 저주의 율례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저주의 선언은 열두 가지로서(신 27:15-26절), 그 마지막 저주가 26절에 등장하면서 앞선 모든 저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6절).
따라서 이러한 배경 하에서 보자면 당연히 강조점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데 있고, 이것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 올바르게 이해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바울’의 이해는 무리한 본문 인용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반 율법주의”에 대한 <성경>의 예로 인용할 수 있는 근거는 ‘바울’의 전제(前提) 때문입니다. 그의 전제란, “어느 누구도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이 설명형 접속사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다면, 11절은 반어적 접속사 “그러나”(δέ, 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절은 상호 반명제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절)
사도가 이곳에서 반명제를 위하여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그 유명한 <하박국> 2:4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불행하게도 사도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래 두 사본의 예에서 보듯이 정확한 의미를 도출해 내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마소라>: 의인은 그의 믿음(또는 신실함)으로 살리라
<칠십인역>: 의인은 나의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살리라; 나의 의로운 자는 믿음(또는 신실함)에 근거하여 살리라
논란의 핵심은 이 구절을 “구원론”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구원 받은 자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는 듯합니다. ‘도드’(C. H. Dodd)는 전자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에 따르면,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구원론”의 증거 본문으로 삼았던 것으로서,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서>(1:17)나 <히브리서>(10:38) 등과 같은 <신약>의 다른 문맥적 상황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두 동일한 “구원”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처럼 논란이 많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을까? 이 구절이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모두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그의 방점(傍點)은 오히려 “믿음”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11절은 10절과는 반명제의 관계에 서게 됩니다. 10절이 “율법과 저주”를 말하고 있다면, 11절은 “믿음과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어지는 12절에서 다시 율법에 관해서 언급함으로써, 이번에는 11절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반어적 접속사 “그러나”가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δέ 와 άλλά).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러나)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절)
그러니까 11절이 10절과 반명제의 관계에 있고, 다시 12절이 11절과 반명제의 관계에 서게 됨으로써, 12절은 결국 10절과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11절이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한 쪽 진영(陣營)의 핵심어가 “율법과 저주”라면(10, 12절) 다른 진영의 핵심어는 “믿음과 의”입니다(11절).
사도가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은 <레위기>(레 18:5)로서, <하박국> 본문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레 18:5). 이런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오직 행함에 있는 것이지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래저래 “유대주의자”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모세의 율법”은 믿음이 아닌 행위를 요구함으로써, 기독교와 나란히 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13절에 이르러 “율법과 저주”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에서 갑자기 이탈하여 주제를 바꾸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는 “구속”(ἐξαγοράζάω, 엑사고라조)입니다. 그동안 10-12절 사이에서 각 절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접속사의 부재(不在)가 이런 변화를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절)
이 단어는 <신약>에서 4 회, 모두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갈 3:13; 갈 4:5; 엡 5:16; 골 4:5). 이 단어가 그려주는 이미지는 시장에서의 상거래로서, 노예의 값을 치르고 구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 스토트’(J. Stott)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화해”, “구속”, “칭의”, “화목”의 네 단어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새롭게 소개하는 내용은 두 가지 점에서 각별합니다: (1) ‘그리스도’가 행한 구속의 행위에 대하여 지극히 짧고도 함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 (2) 일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갈라디아서> 내에서 “우리”는 때로 유대∙기독교인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갈 2:15; 3:23-25; 4:5), 이곳에서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관한 짧은 선언은, 그것이 짧고 함축적이라는 점에서 ‘바울’ 이전부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있어왔던 신앙 고백으로 보여 집니다.
이 고백과 관련하여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성경적 근거는 <신명기>입니다(신 21:23).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의 인용은 무리한 것이며, <칠십인 역>과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배경 설명을 위하여 <신명기> 21:22-23을 다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법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은 대개 돌을 던져 죽이는데, 그 후에는 말뚝에 묶거나 나무에 달아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징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 함은 그가 나무에 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써 그가 그렇게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앞에서 외적 표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런 행습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치욕을 더하는 것이며, 이를 보는 자들에 대해서는 경고가 되는 이중적인 포석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약>적 배경을 지닌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메시아’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고전 1:23; 갈 5:11). 모든 유대∙기독교인들이 당면했던 핵심 문제는, 어떻게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입니다.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본문은 이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결론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은 십자가의 저주는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해서 받은 것이다(고후 5:21). 따라서 사도가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본문도 초대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에서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율법주의”의 제반 요구 조건들을 무위로 돌리고 있으며, 동시에 ‘아브라함’의 축복과 “성령의 약속”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이 구절은 <성경>을 통한 논증의(3:6-14) 결론이자 절정으로서, 사도는 이곳에서 두 절을 모두 “...하기 위하여”(ἵνα, 히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3:6-14의 본문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두 단락의 핵심 주제가 이 한 절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의 축복; (2) 성령의 악속. 구조적으로 볼 때 두 절은 종속(從屬)의 관계가 아닌 등위(等位)의 관계에 있으며, 문법적으로 볼 때는 두 절은 각기 고유한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과 관련하여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1) 이방인에게도; (2) 그리스도 안에서. 서신 내내 사도의 관심사는 이방∙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아브라함’이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두 번째 절에서 “성령의 약속”과 관련하여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믿음으로”입니다. 사도는 그의 첫 번째 검증에서(3:1-5)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해서 “성령의 행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검증에서도 “성령의 약속”을 언급함으로써 <성경>을 통한 논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도는 성령의 임재와 내주하심에 대해서 늘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과 관련해서 사도가 강조하는 바는,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14절이 기능하는 바는 이중적으로 보이는데, 좁게는 <성경>을 통한 논증에 해당되는 본문(6-13절)의 결론일 뿐 아니라, 보다 넓게는 그동안의 “검증” 전체(3:1-14)에 대한 결론도 된다는 점입니다. 즉 14절의 두 절이 그동안의 논증 전체의 주제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훈과 적용
“율법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바 있습니다: “너희들이 믿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너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믿음의 행위 때문이었는가?” 이제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질문으로 “율법주의”를 반박하고 나섭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그가 말하는 <성경>은 물론 유대인들의 <성경> 즉 <구약>을 말합니다.
그가 <성경>을 토대로 “율법주의”가 틀렸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체험”은 그것이 아무리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반해서, <성경>은 이러한 경험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영구화 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효과적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관록이나, 경험이나, 또는 세속적 논리로 기독교 진리를 설명하거나 대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점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크게 다릅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있어 호흡이며 생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나름대로 독특한 성경 해석 방법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것이 현대 성경 해석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따져보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이점 ‘바울’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유대’인으로서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성경>적 증거들을 자유자재로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무리한 “본문 인용”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성경 해석은 당대 유대인들조차도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본문은 마치 성경 해석의 미로(迷路)와도 같습니다. 수수께끼와도 같은 <성경> 인용과 예시, 자의적인 해석 때문입니다. 그는 아홉 절에 불과한 본문 가운데서 무려 여섯 구절을 <구약>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기독교 복음의 핵심 주제들이자 동시에 그의 논쟁적 관심사와 관련 있는 것들입니다. 사도의 독특한 성경 인용 방식으로 인하여 본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음의 행위와 축복(6-9절).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믿음의 행위와 칭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성경>적 근거로서 제시하고 있는 사례는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한 구절은 <창세기> 15:6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창 15:6).”
왜 사도는 그 많은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서 유독 이 구절에 관심을 쏟는 것일까? 아마도 “믿음과 의”의 관계에 대해서 이 구절만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는 곳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구절 속에는 ‘아브라함’의 행위와 관련해서 그 어떠한 언급도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그의 “믿음의 행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아브라함’의 의에 대해서 다르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표상이지 전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구절을 이해하는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다른 행적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14장에서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보여주고 있는 영웅적인 행동이라든지, 또는 <창세기> 17장에서 그려주고 있는 “할례”를 통한 순종 등에도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도는 이들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설령 있다고 하드라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과 의”의 관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유독 <창세기> 15:6만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의 또 다른 관심사는 이방인입니다. 과연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가 아니면 이방인도 포함되는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그가 <창세기> 15:6을 언급한 것도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7절에서 그 대답을 듣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7절).”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이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는 주장까지 펼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하).” 이것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벽두에 소개된 바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특별히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 ‘아브라함’ 언약 속에 포함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9절).
율법의 행위와 저주(10-14절). “믿음의 행위”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입니다. 이 두 행위는 각기 “칭의”와 “저주”를 파트너로 삼고 있습니다.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율법의 행위와 저주”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과연 “율법의 행위와 저주”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증거를 위해서 <성경> 중에서 가장 율법적인 두 권의 책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여섯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의 인용과 해석 방식은 자의적이고 일방적이며, 당대 ‘유대’인들 사이에서조차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율법주의”는 저주를 잉태할 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가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27:26이나(10절) <레위기> 18:5(12절) 등은 원래의 의도와는 정 반대의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두 구절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그분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도, 사도는 그 의미를 뒤집어 “율법의 행위”는 저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을 따라 열심히 살다보면 ‘아브라함’의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사도와 “율법주의”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부분입니다.
어째서 이처럼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것일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사도의 전제 때문입니다. 그의 전제란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있는 자란 없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7:26를 인용하면서 일종의 본문 변조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모든 일을”; “항상”.
사도는 한 술 더 떠서, <구약>의 선지자들조차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친 바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사도가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아마 당시 기독교도는 물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이해는 역시 서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차이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믿음”과 “구원”의 관계이며, 이 둘 사이를 연결시켜줄 수만 있다면 어떤 구절이라도 제시할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율법의 저주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그것을 폐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가 즉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저주를 부른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스도’를 단순한 죽음이 아닌 나무 위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다만 사도가 이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21:23 역시 전통적인 ‘유대’적 해석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사실은 이곳에서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가 13절에서 느닷없이 주제를 바꾸어 “십자가와 구속”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동안의 논증에 대한 결론을 14절에서 이끌어 내기 위함입니다. 두 핵심어는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입니다. 종합해 볼 때, 그의 신학 사전에는 “믿음의 행위”, “의”, “성령의 행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가 일단의 동의어 군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사도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여섯 개의 <구약> 본문은 과연 그가 펼치려고 하는 논지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예가 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의 성경 인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3. 본문 14절의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습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