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2과
명목주의 반박(1)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3:19-25약 29분 분량
율법의 목적과 기능
(3:19-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15절)
<갈라디아서> 제 2부(1:6-4:11)는 “책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 네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R. N. Longenecker, 목차 참고.
(1) 서론(exordium)(1:6-10): 서신의 동기와 배경
(2) 해설(narratio)(1:11-2:14): 자전적 변론
(3) 명제(propositio)(2:15-21): 서신의 명제 선언
(4) 검증(probatio)(3:1-4:11): 명제에 대한 예시와 검증
이 모든 단락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율법주의”(legalism)와 “명목주의”(nomism)임을 보았으며, “명제”와 “검증” 단락에서 이 둘을 반박하는 변론과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검증 작업이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또한 본 바 있습니다. 이 두 주제들이 상호 연결되는 방식을 다시 한 번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검증” 작업은 주제에 따라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첫 번째 단락(3:1-18)의 중심 주제는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내용으로서, 검증 작업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이상이 지난 세 과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들이며, 이어지는 네 과에서는 “명목주의”를 반박하는 내용들을 다루게 될 것인바, 그 내용에 따라 네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과 기능(3:19-25)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3:26-29)
(3) 두 관계에 대한 예시(4:1-7)
(4) 사도의 염려(4:8-11)
“율법주의”와 “명목주의”는 모두 율법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명목주의”와 관련된 위의 내용(3:19-4:7)은 불필요한 반복이나 또는 부수적인 첨가 정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자(前者)가 “율법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後者)는 “율법과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도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최소한의 규례들을 지켜야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명목주의”입니다. 따라서 “명목주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유대인이 되라고 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완벽주의자”가 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율법의 목적과 기능”이라든지, “신자와 율법과의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같은 주제는 “율법주의”에서 이미 다룬 바 있는 내용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명목주의”를 다룸에 있어 피해갈 수 없는 내용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3:19-4:11의 본문을 읽어가야 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은 구조적으로 세 개의 소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관한 질문
(2)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관계에 관한 부차적인 질문
(3)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논쟁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첫 두 질문은 그 형식에 있어 유사한 수사적 질문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절); “그런즉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21절). 이들 질문들은 3:1-18에서 사도가 밝힌 바 있는 “율법주의”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 질문은 적어도 ‘유대’인들의 “명목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질문이 제기되는 방식이 이전의 문장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보다는 다소 갑작스러우며, 그 대답 또한 분명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기는 하지만 짧고 다소 신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하는 23-25절은 앞의 내용(두 번의 질문과 대답들)과는 접속사 “δέ”(데)로 연결되면서, 일부 영어 번역본에서는 이를 “그러나”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만(예: RSV; KJV), 대개 생략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체 논의에 대한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절정에서 사도는 논쟁의 핵심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은 “율법 아래”(under the law)입니다. “율법 아래에 산다”는 표현을 통해서 사도가 보여주는 유비(analogy)는 귀족 내지는 특권층 속한 가정에서 사는 모습 그것입니다.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다루고 있는 본문이 종종 앞에서 사도가 다룬 바 있는 “율법주의”에 대한 부록 내지는 색인 정도로 취급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본문이야말로 사도가 당면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이곳에서 율법에 관해서 총괄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서 볼 때 본문의 내용은 그 목적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신학과 신앙
1. 율법과 약속(19-20절)
“율법주의”에 대한 사도의 반론은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목주의”에 대한 사도의 반론은 우리는 “율법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반론을 듣는 독자라면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이냐(19절상)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그렇다면 왜 율법이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이나 기능을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이런 유의 수사적 질문에는 동사가 생략된 경우가 많은데 이 질문 역시 그러합니다.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종종 “왜”라는 의문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3:7; 14:10; 고전 4:7). 사도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절하)
그런데 이 대답에는 여러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사도의 대답에는 다섯 가지 정도의 강조점이 있습니다(Longenecker): (1) 율법은 더하여 진 것이다; (2) 범법 때문이었다; (3) 약속의 씨가 올 때까지 만이다; (4) 천사들을 통하여 베푸신 것이다; (5) 중보자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이 문장이 전체적으로 갖는 의미는 분명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관한 것이지만,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강조점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나씩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이 더하여졌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동사의 시제와 태는 각기 과거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율법이 기능하는 바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어떤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라, 추가로 더하여진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보조적이며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율법이 더하여 진 것은 “범법 때문이었다”는 표현은 첫 번째 표현에 비해서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기서 “범법”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표준이나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 또는 “규범을 무시하는 행위” 등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율법이 더해진 이유를 “죄를 죄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롬 3:20; 4:15; 5:13; 7:7). 또 하나는 “죄를 더 짓게 하고 확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롬 5:20). 따라서 율법의 목적은 전자(前者)의 해석에 따르면 예방과 방지의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후자(後者)의 해석에 따르면 오히려 조장하고 확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문맥의 상황에서 보면 전자의 입장이 더 그럴 듯해 보이지만, “...때문에”가 가지는 이중적이고 애매한 의미 때문에 어느 한 쪽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의 입장에서 보면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하려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율법은 범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든지 또는 완벽한 신앙인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기한 율법의 두 가지 목적 외에 율법이 기능하는 바를 열거하자면, 앞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저주와 감독의 기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셋째, “약속의 씨가 올 때까지”는 율법의 한시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씨”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입니다. 사도에 의하면 율법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사도의 견해가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갈리고 있습니다. 율법의 통용시한을 한시적으로 보는 어떤 유대인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유대인 학자 ‘필로’는 율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변치 않을 것이다.”
넷째, “율법이 천사를 통하여 베풀어진 것”이라는 사도의 언급을 역사적인 관점과 그의 개인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따져볼 조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사도의 인식을 지지하고 있을까요? <맛소라> 사본은 ‘시내 산’에서 율법 수여와 관련해서 천사가 있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출애굽>(19: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연기와 천둥소리와 함께 “불 가운데서” 시내 산에 강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명기>(33:2)는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실 때,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불타는 율례”(또는 번쩍이는 불)를 가지고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편>(68:18)에서는 율법 수여와 관련하여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병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직접적으로 천사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율법 수여와 천사와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는 <칠십인 역>이 처음입니다. <칠십인 역>은 <신명기> 33:2에서 그 의미가 다소 애매할 수밖에 없는 표현, “그의 오른 손에는 그들을 위해 불타는 율례(번쩍이는 불)가 있도다”를 번역하면서 “그의 오른 손에는 그들을 위해 천사가 있도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훗날 ‘랍비’들에게는 <신명기> 33:2보다 더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시편>(68:18)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병거”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병거”가 다름 아닌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호위했던 “천군 천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칠십인 역>이나 랍비들의 사상이 사도 당시 율법과 천사와의 관계에 관한 지배적인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3);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초기 “유대주의” 진영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의 주요 계시의 사건에까지 천사의 역할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과 천사의 등장을 연계시키고 있는 것은 ‘시내’ 산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역시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20절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율법 수여와 관련해서 정 반대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중재자를 통해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계시의 질적 차원에서 보자면, 천사라는 중재자를 통해 주셨으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율법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계시보다는 열등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 논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바탕 위에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사도의 수사가 다시 한 번 돋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율법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있는 점은 그것이 “중보자의 손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서 중보자는 ‘모세’를 지칭하고 있습니다만, ‘오리겐’, ‘크리소스톰’, ‘제롬’, ‘루터’, ‘칼빈’ 등은 <신약>에 기초하여 이 중보자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딤전 2:5; 히 8:6; 9:15; 12:24.
<칠십인 역>에서는 “중보자의 손”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의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으로” 준 것이 율법과 계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고: 레 26:46; 민 4:37, 41, 45, 49; 9:23; 10:23; 15:23; 17:5; 33:1; 36:13; 수 21:2; 22:9; 삿 3:4; 대상 16:40; 대하 33:8; 시 76:21.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중보자의 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모세’의 중보자적인 역할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중개되었다는 점입니다. 19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 때, 사도가 중보자인 ‘모세’나 “중보자의 손으로” 전해진 ‘모세’의 율법을 경멸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20절에서는 그런 의도가 분명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절)
이 구절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듯이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가장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에 관한 최고의 주석가로 알려져 있는 ‘라이트풋트’(Lightfoot)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무려 250-300여 가지에 이른다고 했고, 또 다른 한 주석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430 가지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Longenecker). 이들 학자들의 주장은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이 구절이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실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중보자를 언급함으로써 율법에 대해서 무언가 부정적인 느낌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즉 율법이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개입시킴으로써 마치 율법 수여에 복수(複數)의 인물이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복수의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중보자가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는 말 속에는 두 당사자가 있다는 암시인데, 그 두 당사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놓고 적어도 세 가지 해석적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두 당사자는 하나님과 유대 백성을 지칭한다.
(2) 두 당사자는 두 집단으로서, 천사집단과 유대 백성을 지칭한다. 이 두 집단 사이를 왕래하며 조정의 역할을 하는 자가 중보자이다.
(3) 중보자 그 자체가 이미 복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세 번째 해석은 중재자(또는 매개자)를 필요로 하는 거래는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는 거래보다 열등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설명 중에서 첫 번째가 가장 그럴듯해 보입니다. 두 번째 설명을 배제하는 이유는 천사 집단을 율법과 관련하여 주요 당사자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 전통에서 ‘시내’ 산 율법 수여에서 천사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도구 내지는 수단에 불과한 존재들이며, 율법 계약의 한 당사자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설명의 또 다른 문제는 만일 천사를 율법 계약의 한 당사자로 인정하게 되면, ‘모세’는 중보자가 아니라 천사들의 한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에서조차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세 번째 설명 역시 그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중보자가 개입된 거래는 열등하며 중보자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모세’를 율법의 중보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유대’ 전승치고 어느 곳에도 ‘모세’나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만일 중보자 ‘모세’를 깎아내리려고 시도하고 있다면, 그는 그동안 집중해 왔던 논쟁의 초점을 흐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공격의 대상은 율법이었지 ‘모세’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해서 첫 번째 설명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게 됩니다. 물론 이 설명에도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논의의 초점이 천사나 ‘모세’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대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이 강조하고자 바는 율법이 약속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제 삼자의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시내 산 에피소드”에 대한 사도의 입장이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등하게 보는 것은 천사나 ‘모세’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입니다.
이제 사도는 20절 후반에서 ‘이스라엘’의 그 유명한 ‘쉐마’를 인용함으로써, 전반부와 극적인 시적 “대조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 이시니라”(29절하). 이는 모든 ‘유대’인들의 신조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되고 지속적인 한 분 하나님의 속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함이 아니라”(20절상)에서 율법의 간접적이고, 계약적인 측면과 계약 당사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20절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강조한다면 열등한 것을 따르는 것이고, 약속을 강조한다면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직접적으로 거래하고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초기의 일부 “유대주의”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중보자가 개입된 계약은 보다 열등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직접적으로 거래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칠십인 역>과 같은 곳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듯한 구절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사 63:9)(Longnecker, 142-143쪽).
2. 율법과 저주(21-22절)
율법은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이미 인정한 바 있고(3:15-18), 이제는 중보자의 손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신 약속에 비해 계시의 질적 측면에서 열등할 수밖에 없음도 살펴보았습니다(3:19-20). 그렇다면 율법에 대해서 남은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21절상)
이 질문은 19절에서 물었던 첫 번째 것에 비해 부수적인 질문 같기도 합니다만, 율법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율법이 약속과 반명제(反 命題)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극단적인 “율법폐기론자”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절하)
논리적으로 볼 때 대답은 “그렇다”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는 율법과 약속을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두고 논리를 전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아주 강력한 부정(不定)입니다. 일부 번역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를 거부하신다”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어서 그는 왜 그런지 자신의 논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논지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제(“유대주의”이든 “명목주의”이든 상관없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율법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약속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아주 강력한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전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22절)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는 율법이 생명을 주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아마도 특정 구절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예컨대, 사도가 3:10에서 인용한 바 있는 <신명기> 27:26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믿음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율법은 약속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을 기다리며 기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약속을 더욱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기초한 약속을 말합니다(21절하).
사도는 이곳에서 마치 두 가닥의 끈을 꼬아 하나의 줄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의 끈은 “하나님의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전자(前者)가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고 모든 인간을 저주 아래 두고 있다면, 후자(後者)는 ‘그리스도’의 믿음(순종)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들의 믿음의 반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면, 약속은 우리를 이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율법과 약속”은 동일하지도 않으며,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상보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마치 하나처럼 융합된 것도 아니면서도, 하나의 공동 목적을 위해서 상호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율법과 초등교사(23-25절)
율법의 역할과 관련하여 사도의 논지는 23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3절)
이 구절은 22절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동일한 동사 “매다”(또는 “가두다”)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동사가 22절에서는 능동 과거 완료형으로, 23절에서는 현재 수동 분사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구절에서 공히 “기독교 복음”을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23절에서는 “믿음”을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은 문장의 주어와 율법의 기능과 관련한 묘사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22절에서는 모두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반해, 23절에서는 “우리” 즉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율법의 보호와 관찰 아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기능과 관련해서 전자가 율법의 저주를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율법의 감독(관찰)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넓게 보자면 ‘유대’인 또한 2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인류” 속에 포함되어야 하고 이들 역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더하여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보다 특별한 방식으로 “율법 아래”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특별한 방식이 무엇인지 24-2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절)
율법이 ‘유대’인에게 기능했던바 특별한 방식이란 “초등교사”(παιδαγωγὸς, 파이다고고스)의 노릇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교사” 내지는 “선생”(διδάσκαλος, 디다스칼로스) 정도가 될 것이나, 당시에는 이와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해서 Longenecker는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146-148쪽).
후자가 주로 교육적이고 지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면, 전자는 주로 보호 감독 및 훈련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이나 지위도 주로 노예로서 그들이 섬기는 주인의 아이들에 대한 훈련과 보호 및 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는 실질적인 교육을 맡아 했던 교사가 아니라 주인의 아이들을 교사에게로 데려다주는 자였습니다. 그나마 그 역할도 한시적이었는데,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만이었습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εὶς Χριστόν, 에이스 크리스톤)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의 이동과 관련된 의미의 “그리스도에게로”(to Christ)가 되며, 또 하나는 시간과 연관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until Christ comes)가 되기도 합니다. 두 해석 모두 율법의 기능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문맥 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23절과 25절에서 각기 “믿음이 오기 전에”와 “믿음이 온 후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더욱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역할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초등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왔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동안 율법이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리지 않고 했던 역할이 있다면, 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며, 죄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율법의 역할이 있다면, 모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역할과 관련하여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초등교사”와 같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명목주의”에 대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5절)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로 비롯된 기독교 복음의 도래로 초등교사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이 문화적, 민족적, 또는 실용적 이유 등으로 해서 계속해서 율법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이 모든 ‘유대’적인 전통과 관습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든 종교적인 의식이든 또는 그 무엇이든 ‘유대’적인 생활 방식과 관계된 그 어떤 것들도 믿음의 생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점은 이방인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진영 내에서 어느 누구도 “율법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을 뿐이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이후의 삶은 어떠합니까? 종교적 성취나 완성을 위하여 율법이나 계명을 쫓아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그래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찌 그 정도도 지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의 대답은 “절대 그럴 수 없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종교적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서, 불가능한 목표 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약속에는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순종의 행동을 요구합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더 지키기 쉽기 때문에 율법을 버리고 약속을 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언약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이를 고치거나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약속이 율법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언약은 한 번 확정되면 고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또 다른 극단으로 비칩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율법을 하루아침에 폐기처분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조차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주장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당연히 “그러면 율법은 왜 필요한가?”일 것입니다.
1. 율법과 약속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단순히 약속이 이어 추가로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보조적이며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둘째, 이 율법이 더하여 진 것은 범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율법이 더하여진 것은 “죄를 죄로 인식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속도 제한 표지판이 하는 역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고속도로 상에서 속도 제한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속도위반을 했을 때 벌금을 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목적에 따르면 율법이 하는 역할이란 예방과 방지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역설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율법을 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더 짓게 하고 확산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위와는 정 반대로 오히려 죄를 조장하고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마치 교통순경이 속도 표지계를 들고 숨어 지키는 목적이 속도위반을 방지하려는 목적보다는 오히려 운전자가 속도위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기막힌 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이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 오히려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며,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범죄 했을 때 처벌하는 것이 고작이라니 말입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율법은 범죄와 연관이 있으며, 의로움이나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셋째, 율법의 유효 기간이 한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기간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통용시한을 한시적으로 보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 학자 ‘필로’에 따르면,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변치 않을 것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율법은 천사를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베풀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 개인의 신학적 입장도 아니고 성경적 근거도 없는 진술입니다. 오래된 ‘유대’ ‘랍비’의 사상일 뿐입니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는 율법과 천사의 등장을 연계시켜서 ‘시내’ 산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율법 수여와 관련해서 정 반대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중재자를 통해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계시의 질적 차원에서 보자면, 천사라는 중재자를 통해 주셨으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율법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계시보다는 열등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 논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바탕 위에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사도의 수사가 다시 한 번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율법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있는 점은 그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중개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율법이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개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보자가 개입된 거래는 열등하며 중보자 또한 그러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약속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제 삼자의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시내 산 에피소드”에 대한 사도의 입장이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등하게 보는 것은 천사나 ‘모세’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입니다.
율법은 일종의 계약으로서 중보자를 필요로 하며, 중보자는 양 편을 오가며 타협과 절충을 모색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약 당사자의 책임 준수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늘 깨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분의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것이며, 그래서 율법보다 훨씬 탁월하며, 지속적이며 일관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중보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과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2. 율법과 저주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앙숙처럼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가 보여준 태도나 논리에 따르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는 율법과 약속을 늘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두고 논리를 전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지 이유를 밝히면서 이번에도 그의 논리는 ‘유대’인들의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율법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약속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이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신명기> 27:26만 하드라도,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믿음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율법은 약속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을 기다리며 기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또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에게 저주를 내려, 그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가서 이렇게 묻게 만듭니다: “누가 이 사망에서 나를 구원할꼬?” 즉 율법이 주는 사망의 늪 속에서 약속이 주는 생명을 갈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기초한 약속을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기능입니다. 그러니 어찌 율법이 약속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은 약속을 더욱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21절하). 이처럼 율법과 약속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율법과 초등교사(23-25절)
모두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면, “우리” 즉 ‘유대’인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보다 특별한 방식으로 “율법 아래”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방식이란 율법이 ‘유대’인들에게는 “초등교사”의 노릇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초등교사”란 로마 시대 당시 주인의 신임을 받는 노예로서, 주인의 아이들에 대한 훈련과 보호 및 감독의 역할을 했습니다. 무슨 실질적인 지적 교육을 맡아 했던 교사가 아니라 주인의 아이들을 교사에게로 데려다주는 자였습니다.
그나마 그 역할도 한시적이었는데,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만이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until Christ comes) “초등교사”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왔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율법이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리지 않고 했던 역할이 있다면, 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며, 죄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율법의 역할이 있다면, 모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역할과 관련하여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초등교사”와 같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로 기독교 복음이 왔고, 따라서 초등교사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이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유대’적인 전통과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그런 생활 방식은 기독교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에 대해서도 이러할진대 이방 기독교인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수없이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 교회가 만들어 놓은 것들도 있으며,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명목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라든지 또는“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느냐?”입니다. 이 모두 그야말로 “명목론”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율법은 외적 책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내적 원리를 말합니다. 율법은 의문의 죽은 것이지만, 성령의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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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율법과 약속에 관한 사도의 논지를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3. 율법이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4. 율법이 초등교사로서의 역할은 무엇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