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5과
교인들을 위한 염려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4:8-11약 13분 분량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절)
사도는 그의 검증 작업의 마지막을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한 염려와 걱정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앞에서 했던 바처럼(3:1-5) 수신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 이르러 그동안 그가 대항해 왔던 두 주제 (1) 율법주의(3:1-18)와 (2) 명목주의(3:19-4:7)에 대한 검증 은 이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마치 법정에서 긴 법리 공방을 끝낸 변호사나 검사가 배심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최종 진술을 쏟아내고 있는 듯합니다. 배심원들은 대개 법정 논쟁과 관련해서 전문가들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드라도, 사람의 속성 상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적 호소에 설득당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입니다. 사도 역시 그동안 “율법주의”와 “명목주의”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적, 역사적, 논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열심히 반박해 왔습니다만, 이곳 최후 진술에서 수신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불타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목회자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혼을 향한 애타는 사랑과 근심 때문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이제 검증을 위한 사도의 모든 논쟁과 공방은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신자들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지위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염려를 들어내 보이고 있습니다. 즉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3:1-5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문 9절에서 다시 한 번 심문성(審問性) 질의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3:1-5와 4:8-11의 두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수사적 기법에 있어서나 “검증 본문”(3:1-4:11) 전체에 대한 일종의 수미상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와 계획을 되돌리는 일일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긴 법리 공방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분위기도 차갑고 공적인 연설이나 강의 대신에 보다 인간적이며 감성적인 호소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사도가 이처럼 직접 교인들을 상대로 가장 먼저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회심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신)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8절)
접속사 “그러나”가 이러한 대조를 분명하게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상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직전의 단락 6-7절에서 묘사하고 있는바 그것일 것입니다: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6-7절)
비록 ‘유대’인과 이방인이 회심 이전의 경험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두 집단 모두 한때는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구별이 없다는 것이 사도의 진단입니다: “종노릇하였다”(8절). ‘유대’인들이 율법의 종노릇을 하며 살고 있었다면,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종처럼 살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 단락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4:1-2, 3).
이방인들은 본질적으로 신이 아닌 것들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방인들의 예배와 관련해서 “소위 신들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고전 8:5), 이방인들의 희생 제사도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0:20). 이 구 구절 자체만으로는 사도가 이방신이라는 것이 그 실체가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지 또는 마귀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8절에 따르면, 비록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런저런 많은 “신”과 “주”를 만들어 내고 있기는 하지만(고전 8:6), 사도는 그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참고: 고전 8:5). 그러면서도 사도는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전 8:7)라고 말함으로써, 실제 이방신들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도 인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도의 두 번째 호소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현재 상태와 신분, 즉 그딜이 이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전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8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6-7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9절과도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
여기서 “알다”는 동사가 갖는 성경적 의미는 주로 “체험을 통해서” 인지하게 되는 경험적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 분사로서 체험적 지식이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체험적 지식이란 앞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든지(3:26), 또는 “그의 아들의 영”을 갖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접속사 “~라기보다는”(μάλλον δέ, 말론 데)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앞의 구절을 “~뿐만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내용이 더 중요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 모든 새로운 관계들이 하나님의 주도와 인간의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도 아니고(율법주의의 주장처럼), 인간이 찾아나서 된 것도 아니며(신비주의의 주장처럼), 인간의 지식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영지주의의 주장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을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다시 이전의 상태, 즉 아무 관계도 없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9절 후반의 수사적 질문이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하). 이 질문은 하나님의 주도 아래, 그리스도의 행위와, 성령의 증거로, 나 역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과 새롭고도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를 끊고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역설입니다. 여기서 “돌아가다”(ἐπιστεϕϖ, 에피스트레포)는 종교적 배교 내지 회심을 말하는 것으로서(살전 1:9; 눅 1:16; 벧후 2:21-22), 본문에서 그 시제가 현재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 행위가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 교인들은 이제 율법의 주목하게 되었고, 사도는 그것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경멸하고 있습니다. 앞에서(3절) 사도는 율법을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지칭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이 단어 앞에 “약하고 천박하다”는 두 개의 수식어를 덧붙임으로써 율법의 본질과 기능을 보다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약하다” 함은 아무런 실질적인 효력이나 능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의미이며, “천박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써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가 제공해주는 풍성함이나 다양한 색상의 꽃다발에 비해 율법이 제공해주는 텅 빈 광주리를 연상해 보면 쉽게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의 수사적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하). 이 두 번째 질문은 새로운 차원의 질문이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듯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다시 이전의 이방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이처럼 “유대주의”와 “이방 종교”를 거의 같은 수준의 종교로 매도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격한 주장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두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수준에 두다니 말입니다. 어찌 할례를 받는 일과 종교적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이방종교로 매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서 이전에 이방인으로서의 관습이나 생각들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도에게 있어 그 어떤 행동도, 그 어떤 선의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일 뿐입니다. 그의 행위에 무엇인가를 더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신이자 배교입니다.
그들이 더하고 있던 행위들은 예를 들어 어떤 것들을 말합니까? 아마 다음과 같은 종교적 행위들이 아닐까요? 비록 9절과 10절을 연결시켜주는 어떠한 접속사도 없지만, 코이네 그리스 문자에서 때로 강조를 위해서 앞 문장과의 연결 고리가 없이 독립적 절이나 구가 올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합니다.
10절은 이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던 일련의 종교적 행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10절)
여기서는 소개하고 있는 네 가지 행위들은 9절에서 사도가 언급한 바 있는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을 대표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유대’ 종교와 관련된 종교 절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날”(ἡμέρας, 헤메라스)은 아마 “안식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달”(μήνας, 메나스)은 매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월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사 66:23; 골 2:16; 민 10:10; 28:11; 대상 23:31), “절기”(καιρούς, 카이로스)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장막절, 그리고 “해”(ἐνιαυτούς, 에니아우토스)는 안식년이나 희년 등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구절 자체만으로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들 절기들을 다시 지키고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사도가 우려하는 바도 바로 이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절)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시작된 사도의 긴 책망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1:6-4:11). 현재형으로 묘사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심경 즉 “두렵다”는 표현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와 배신의 행위가 시작은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열심히 노력을 쏟았지만 무의미하게 끝날지도 모를 가능성”입니다.
교훈과 적용
‘바울’은 위대한 변증가이자 신학자이지만 동시에 따뜻하고도 다정다감한 가슴을 지닌 목회자였던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 2부인 “책망”의 단락에서(1:6-4:11)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신학적 오류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때로는 재판장의 자리에 서기도 하고, 검사의 자격으로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면서 피고를 꼼짝달싹 못하게 질타하는가 하면, 때로는 피고인의 변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배심원과 재판장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제 2부의 마지막 단락인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도의 모습이 바로 이 변호사의 모습입니다. 원고 측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재판장이나 배심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최종 진술을 쏟아내고 있는 장면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최후의 진술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강력한 논리나 증거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사도는 그동안 할 만큼 했습니다. 즉 “율법주의”와 “명목주의”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적, 역사적, 논리적, 체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열심히 반박해 왔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겪은 체험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어쩌면 이 신학적 공방에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논쟁의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체험이란 다름 아닌 “성령의 체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믿었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기억상실증 환자라면 모를까 누가 이를 부인함으로써 자기당착의 모순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께서 증인이 되어 이제 그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는 것이 됩니다. 즉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입양되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며 특별한 것이라 보편타당한 원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요. <성경> 어디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약속의 상속자라고 공언하고 있는가? 이 공박에 대해서 사도는 <성경>에서 한 예를 이끌어냅니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실 ‘이스라엘’의 모든 약속이 바로 이 이야기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약속의 시조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율법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브라함’이 바로 이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냐? <신명기>나 <레위기> 모두 ‘이스라엘’이 참된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제대로 된 “성경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사도는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는 일련의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율법 준수와 관련해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며 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깨달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자 기능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주장들이 사도의 독단적이고 독창적인 <성경> 해석의 산물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한 공동체가 있어왔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본문 여러 곳에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예: 3:1, 13, 26, 27-28; 4:4-6). 그가 전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실과 관련해서 사도 자신이 유일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초대교회에서 동일한 신앙과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가 됩니다.
이처럼 사도는 “율법주의”와 “명목주의”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적, 역사적, 논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열심히 반박해 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무슨 증거나 논리가 필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설령 더 이상의 논리나 증거들을 제시한다 하드라도, 사람의 속성 상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적 호소에 설득당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났던 전쟁을 보면 인간의 이성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성이 감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보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사도는 이곳 최후 진술에서 수신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불타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목회자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혼을 향한 애타는 사랑과 근심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열어 보이고 싶은 것이지요. “내가 너희를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그래서 이 절규는 그의 최후 진술로서 더 이상 적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울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울어줄 영적인 아들이나 딸이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문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서신의 단락 구분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봅시다.
2. 본문의 분위기나 톤은 어떤 것입니까?
3. 나를 매일처럼 가슴 절이게 만드는 영적 자식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 이처럼 절규하는 영적 애비가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