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추수감사절을 맞으며
김태정 목사살전 5:16-18약 21분 분량
본문: 시 91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추수감사절 설교 본문으로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우리가 지난 주 시은이를 통해서 목도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11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떨어졌는데도 죽기는커녕 경미한 골절과 타박상만을 입고 지금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는 시은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 시편 11-12절의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11-12절)
여러분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높은 아파트 11층에서 떨어지고 있는 시은이를 보고 하나님께서 놀라 그분의 천사들을 급히 보내어 이 아이를 붙들어 돌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시는 장면을 말입니다. 시은이는 이 사건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TV 뉴스로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물론 제가 아는 사람들도 모두 이 일을 알고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놀라들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이런 일은 흔하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간혹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그저 “와!”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찾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적적인 한 사건을 목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체험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시은이의 생명을 건져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부모의 가슴에 “부흥”의 불길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영적 부흥”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병원을 찾았을 때 시은이의 애비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만 살려놓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생명도 살리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정말 한심하고 부끄럽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시은이 애비의 신앙고백입니다.
대개 목회자의 자녀들은 그들 부모에 비해 신앙이 열심이지 못하거나, 또는 회의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부모의 열심에 기가 질려 신앙을 고의로 거부하며 방황하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아이들도 그런 세월을 거쳐 왔습니다. 시은이 애비도 이런 과정을 거쳐 왔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렇지 않다 해도 이번 사건은 분명 새로운 부흥을 가져다 준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너져 내리던 성벽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시은이 애비에게 한 마디 덧붙여주었습니다. 감사해야 할 분들이 또 있다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 황 목사님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본인이 계셔서 들으시기가 다소 민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양심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들려줄 수 있었던 말이 있습니다. 즉 황 목사님께서 그동안 하나님 앞에 살아오신 삶의 궤적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은이는 그 할아버지가 살려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은이를 나 몰라라 하고서 어떻게 황 목사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감사해야 할 사람은 또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 집 교회> 성도 모든 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시은이를 살렸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 년 삼백 육십오 일을 한 결 같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여러분들의 기도를 무시하고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 말씀이 참으로 참담하다고 느끼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향해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모세’의 계명을 상기시키면서 그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룻’이 ‘보아스’를 향하여, “나는 당신의 여종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하) 하며 요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읽어봅시다. 이 시는 다른 시들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마귀가 유일하게 인용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4:6; 눅 4:10-11).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천사가 그로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이라고 했으며,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말했습니다(11-12절). 그러나 마귀는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살이든 의도적이든 부문별하게 뛰어내리는 사람을 결코 보호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일반 신자(1-2절). 즉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1-2절)
나도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황 목사님?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시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풀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화자 자신(3-13절). 시인은 일반 신자가 자신에게 적용한 바 있는 신앙고백을 이제 우리에게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너”라는 이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온갖 상상력과 비유나 은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그분의 약속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환난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비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3절);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5절);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찾아오는 재앙(6절); 사자와 독사(13절).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이들 환난에 굴복하게 될 것이고(7절), 악인들이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지만(8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결코 화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은 힘주어 약속합니다(9, 10절).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보호할 것입니다(11-12절). 시은이를 보호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14-16절). 이 모든 약속들도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셨음일까요? 마침내 하나님 자신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나에게 직접 말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4-16절)
하나님은 두 번이나 “내가 그를 건지리라”고 약속하십니다(14, 15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역시 두 번에 걸쳐 밝히고 계십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그가 내 이름을 안즉”(14절).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꼭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게으르거나 무위도식하며 지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날이 갈수록 더욱 사랑해야 하며, 기도로 나의 믿음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며 요구해야 합니다. 그분의 숙제를 알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것은 “장수”와 “구원”입니다(16절). 이 약속이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기도합시다.
<유호준 목사님 추수감사절 설교>
[설교전문]
오늘은 전국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각자의 예배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지난 한 해 동안 그들이 받은 많은 축복들과 은덕들에 대해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주일입니다. 우리도 영으로 마음으로 다른 교회들의 성도들과 함께, 자칫하면 잊기 쉬운 하나님으로부터 온 수많은 혜택들과 은덕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들의 받은 수많은 은택(恩澤)들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함께”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감사: 필요한 전통]
적어도 일 년에 한차례씩이라도 이렇게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실하게 “필요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일은 쉽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불평하기는 쉽습니다. 불평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불평하는데 탁월합니다. 불평은 우리의 몸속에 박혀있는 유전인자처럼 자연스럽게 배어나옵니다. 그러나 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감사를 탁월하게 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감사하는 일은 훈련을 배워야합니다. 배우되 자연스럽게 몸에 밸 때까지 노력해야합니다. 감사하는 습관을 터득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절은 “필요한 전통”입니다.
[감사: 국가적 전통]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미(歐美) 선진 국가에서는 일 년 중 하루를 감사일로 정해 놓고 지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구감사절의 유래는 백 여 년 전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님들을 통해서였습니다. 한국인의 고유한 명절인 추석이 이교적 제사와 조상숭배를 의미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적 유래를 갖고 있었던 자신들이 추수감사절을 전래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우리의 고유한 명절인 추석을 기독교적 세례의식을 거쳐 우리의 추수감사절로 지켜야하는지, 아니면 미국 크리스천들의 추수감사절을 그대로 지켜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감사하는 날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국가적 정통입니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은 1621년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동부 플리머스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이었던 청교도들이 고난의 겨울을 보낸 후에 추수한 곡식을 갖고 그 지역의 인디언들(Wampanoag Indians)을 초대하여 함께 감사의 축제와 예배를 드린 것이 효시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 주지사가 감사일을 선포하였으며 당시 식민지 개척자들은 전통적인 영국식 추수축제로 지켰습니다. 시기는 추수를 모두 마친 후에 식민지 전역에서 지켜졌는데, 1777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미국 동부의 최초의 주들인 13개주가 모두 지키게 되었습니다. 조지 워싱톤은 1789년에 국가 공휴일로 선포한 초대 대통령이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1863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전국적인 휴일로 선언하게 됩니다. 남북 전쟁(1861-1865)이 마친 그 다음해에 있었던 감사절 선포는 매우 뜻 깊고 감회가 깊은 일이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온 나라가 상처투성이지만 새로운 희망을 보았고, 그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이 선언한 “감사절 선언문”을 보시겠습니다.
Lincoln's Thanksgiving Proclamation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올 한해는 들판의 풍성한 곡식들과 맑고 푸른 하늘들로 가득한 축복들로 채워졌습니다. 지속적으로 누렸던 이러한 풍요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더욱이 어떤 축복들은 항상 깨어서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습관적으로 무감각한 마음까지도 깊이 파고들어 부드럽게 할 만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축복들도 있었습니다.
………
그 어떠한 인간의 모략과 지혜도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계획하지도 못했고 그 어떠한 인간의 손도 이러한 위대한 일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때때로 우리의 죄들에 대해 분노하시면서도 긍휼을 기억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들입니다.
나는 모든 미국인들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하신 일들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하는 것이 마땅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미국 어디 곳이든지 그리고 타국에 있는 나의 모든 동료 시민들께서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따로 떼어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의 날로 지킬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특별한 구원들과 축복들에 대해서 마땅히 그분에게 돌려드려야 할 송영을 드리면서 또한 우리의 국가적 완악함과 불순종에 대해 겸손하게 참회의 기도를 드리기를 요청합니다. 또한 피치 못하게 치룰 수밖에 없었던 통탄할만한 내전(內戰)으로 인해 남편과 아버지를 잃게 된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상을 당한 자들과 고통 하는 자들을 그분의 자애로운 돌보심에 맡기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이 나라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되는 때가 속히 와서 평화와 조화와 안온과 통일을 충만하게 누리는 날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미국독립 88주년의 해인 1863년 10월 3일에 워싱톤에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감사: 기독교적 전통]
이처럼 감사에는 국가적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감사하는 일은 매우 기독교적 전통입니다. 기독교의 전통 안에는 감사를 표하는 전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감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드려야하는지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적 전통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는 감사에 관한 가르침이 많지만 오늘은 그 중에 신약 성경 중 한 구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방금 전에 읽은 내용은 감사하는 일에 관한 기독교적 전통을 가리키는 본문입니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니라.”(18절)
“범사”(凡事)란 모든 환경과 모든 처지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든 환경과 처지 안에서(in) 감사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먼저 이 말은 모든 환경과 처지들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감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즉 어둡고 괴로운 날들과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어느 경우는 환하고 밝은 날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밝은 날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몇 가지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면서 감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사도 바울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을 때는, 모든 환경들과 처지들 “때문에”(for) 감사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환경이나 처지들은 너무도 끔직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처지는 너무도 악하고 나빠서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환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모순이고 불합리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for) 감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하게 되는 환경이나 처지들 중 많은 경우는 악마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을 파멸하는 암의 경우, 희망을 파괴하고 죽이는 우울증과 낙심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런 형편이나 처지에 빠졌을 때 분명코 그것들은 악마적이고 마성적인 것이지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 대해서도 감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암 때문에, 암을 주신 것이 고마워서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암(癌)아, 고맙다!”라고 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울증과 낙심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우울증아 고맙구나!”라고 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혹은 그런 것이 고마워서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환경 “안에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환경들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성적인 형편들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것을 읽어보시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善)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감사드리는 그 이유와 그 목적과 그 내용이 깨끗하고 정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이유와 목적과 내용이 세속적인 영역에서 신성한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며,
•건져냄을 받지 못한 세상에서 건져냄을 받는 세계, 즉 구속의 세계로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식사할 때마다 “주님, 이 음식을 축복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음식은 깨끗하고 거룩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추수감사절의 떡들이 세속의 영역에서 하나님 왕국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오늘 우리가 가져온 과일과 무와 배추들을 격상시켜 장차 오는 세계에 참여하게 만들 것입니다.
감사절에 먹는 음식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감사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경험도, 비극도, 질병도 하나님께 바쳐질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 않게 되는 어떤 문제도, 어떤 병고도, 어떤 불행도, 어떤 비극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오직 감사를 통해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들 안에서(in), 모든 처지들 가운데서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마치 쟁기질 하는 농부의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쟁기질 하는 농부는 쟁기를 끌지(pull) 않습니다.
•쟁기질 하는 농부는 쟁기를 밀지(push) 않습니다.
•쟁기질 하는 농부는 쟁기를 인도(guide)할 뿐입니다.
정확하게 이것이 환경들이 우리의 삶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이며 길입니다.
•우리는 환경들을 끌고 갈수 없습니다.
•우리는 환경들을 밀고 갈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이라는 것은 그것들만의 타성(惰性)과 여세(餘勢)(momentum)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쟁기질하는 농부처럼 우리는 그 환경들을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그 환경들을 하나님께 바쳐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감사를 통하여 환경을 거룩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감사를 드림으로써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방향으로 인도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것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방향으로 환경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들을 붙잡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감사를 계속해서 바침으로써 모든 환경들을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사로잡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알아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숙제만을 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그분이 하실 숙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핍과 비참을 더 잘 이해하시는 영원하신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이여, 모든 환경에서, 모든 처지에서 감사하십시오. 그 처지와 환경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십시오.
- 마치 쟁기질 하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아멘.
[참고]
Lincoln's Thanksgiving Proclamation
Washington, DC—October 3, 1863
The year that is drawing toward its close has been filled with the blessings of fruitful fields and healthful skies. To these bounties, which are so constantly enjoyed that we are prone to forget the source from which they come, others have been added which are of so extraordinary a nature that they can not fail to penetrate and soften even the heart which is habitually insensible to the ever-watchful providence of Almighty God.
In the midst of a civil war of unequaled magnitude and severity, which has sometimes seemed to foreign states to invite and to provoke their aggression, peace has been preserved with all nations, order has been maintained, the laws have been respected and obeyed, and harmony has prevailed everywhere, except in the theater of military conflict, while that theater has been greatly contracted by the advancing armies and navies of the Union.
Needful diversions of wealth and of strength from the fields of peaceful industry to the national defense have not arrested the plow, the shuttle, or the ship; the ax has enlarged the borders of our settlements, and the mines, as well as the iron and coal as of our precious metals, have yielded even more abundantly than heretofore. Population has steadily increased notwithstanding the waste that has been made in the camp, the siege, and the battlefield, and the country, rejoicing in the consciousness of augmented strength and vigor, is permitted to expect continuance of years with large increase of freedom.
No human counsel hath devised nor hath any mortal hand worked out these great things. They are the gracious gifts of the Most High God, who, while dealing with us in anger for our sins, hath nevertheless remembered mercy.
It has seemed to me fit and proper that they should be solemnly, reverently, and gratefully acknowledged, as with one heart and one voice, by the whole American people.
I do therefore invite my fellow-citizens in every part of the United States, and also those who are in foreign lands, to set apart and observe the last Thursday of November next as a day of thanksgiving and praise to our beneficent Father who dwelleth in the heavens.
And I recommend to them that while offering up the ascriptions justly due to Him for such singular deliverances and blessings they do also, with humble penitence for our national perverseness and disobedience, commend to His tender care all those who have become widows, orphans, mourners, or sufferers in the lamentable civil strife in which we are unavoidably engaged, and fervently implore the imposition of the Almighty hand to heal the wounds of the nation and to restore it, as soon as may be consistent with the divine purpose, to the full enjoyment of peace, harmony, tranquillity, and union.
In testimony whereof I have hereunto set my hand and caused the seal of the United States to be affixed.
Done at the city of Washington, this 3d day of October, A.D. 1863, and of the Independence of the United States the eighty-eighth. Abraham Lincoln
By the President:
William H. Seward,
Secretary of State.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