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김태정 목사요 1:14-18약 7분 분량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본인의 집 입구에 있는 소나무는 아름다운 성탄 트리로 탈바꿈합니다. 본인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몰려와 이런저런 장식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집뿐만 아니라,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 단체에서도 성탄 트리를 만들어 함께 축하해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언론은 이를 종교 간의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아주 의미 있게 보도합니다. 성탄의 의미를 세속 언론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성탄 하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상징이나 이미지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교회나 성당 등에서 전하는 성탄 메시지의 핵심 내용도 대동소이합니다. 전쟁 중인 국가들에서는 이날 휴전을 말하고, 화평과 화해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위로나 용서나 나눔을 말합니다. 연인들은 이날 선물을 나누며, 일부 국가들에서는 성탄 다음날을 ‘복싱 데이’라 하여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습니다.
과연 이와 같은 크리스마스 정신이 크리스마스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는 것은 아닐까? Let's read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Christmas: Jn 1:14-18.
<공관복음>은 성탄(聖誕)을 하나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들려주며,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하나의 신학적 선언으로 우리의 지성을 깨우치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요한’ 화자는 우리에게 어떤 일깨움을 주려는 것일까? 크리스마스에 관해서 말입니다. 나는 적어도 여섯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 첫째, 우리의 역사의 한 시점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들어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연말의 풍경에 맞도록 누군가 지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되다”(givnomai, 기노마이)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동사의 뜻은 “사람이나 사물의 속성이나 특징이 어떤 새로운 조건이나 상태로 변화거나 바뀐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변화된 새로운 그 무엇이란 “육신”(savrx, 사르크스)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당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입은 이단들,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나 가현설(假現說)의 잘못된 신학적 주장을 반박하고 교정하는데 있습니다.
실존적 체험. 둘째, 크리스마스는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보고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직역: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즉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라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크리스마스라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의 장막 위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처럼(출 33:7-11; 40:34-38), 우리는 ‘로고스’의 성육신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한 “재창조” 즉 구속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기껏해야 구름과 햇빛 속에 감추어진 영광일 뿐이었습니다만,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육신”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새 이스라엘 교회. 셋째,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우리”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입니다. 화자는 그 점을 본문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교회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것이며, 교회를 위한 것이며, 그리고 교회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교회가 경험하는 현실이고 실재라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모든 사역, 즉 일곱 가지의 기적과(예, 2:11), 십자가에서의 죽음과(19:35), 그리고 부활(20:24-29) 사건 역시 교회가 경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의 내용. 넷째, 그러면 교회가 목도하고 간직하고 있는 경험은 무엇인가? 즉 크리스마스가 보여주는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여기서 “독생자”(movnogenhv", 모노게네스)는 “유일한” 또는 “단 하나”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또는 사랑 받는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יחיך(야히드)를 번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삿 11:34). 따라서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사랑받는”(ἁϒαπητός, 아가페토스)다는 단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칠십인 역)(22:2, 12, 16)나 또는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의 독생자 ‘이삭’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헬라’ 단어 ‘모노게네스’와 ‘아카페토스’가 <신약>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예컨대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침례와 관련하여 그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수 차례 사용하고 있는 단어 “독생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3:16, 18, 요일 4:19).
크리스마스가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또한 “은혜와 진리”입니다. 이 표현은 <칠십인 역>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언약”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출 34:6). <요한복음>에서 “은혜”는 이곳 서문에서만 등장하고 있지만(14, 16, 17절), 이 단어 또한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에서 매우 소중하게 간직했던 경험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리”는 <요한복음> 내에서 핵심 단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로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우리 즉 교회가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구히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은혜”(cavri", 카리스)가 <요한복음>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점도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화자는 이 새로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옛 언약”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구원자”인 ‘모세’(적어도 ‘랍비’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라는 선물이자 영광의 계시입니다. “옛 언약”이 율법으로 상징된다면, 이제 “두 번째 구원자”이신 ‘로고스-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은혜와 진리”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새 질서이자 종말론적인 성취를 의미합니다.
독생자의 영광과 관련해서 화자가 서문의 마지막에 밝히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여태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4절과 17절에 이어 다시 한 번 이곳에서 “출애굽”의 모티브를 대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목도하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살아남은 자가 없다”(출 34:18-20).
‘유대’인이라면 이 사실은 불변의 원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출애굽>의 화자는 이 원칙을, “모세가 본 것은 고작 해야 하나님의 뒷모습뿐이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출 34:21-23). 그리고 ‘모세’는 이런 만남을 통해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자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자가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이런 기도를 한 적은 없습니까?
계시의 신빙성.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독생자가 인간에게 “나타내신”(ejxhgevomai, 엑세게오마이)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해석하다” 또는 “주석하다”는 영어 단어 ‘exegesis’(엑스제시스)가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생자가 드러내고 해석한 대상은 다름 아닌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 독생자의 해석은 얼마나 권위가 있으며, 믿을 만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분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독생자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13:23). 이런 관계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그리고 부활이후에도 영원히 이어지는 그런 관계를 말합니다. ‘로고스-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없을 것입니다.
성탄의 요구. ‘로고스’에 대한 침례 ‘요한’의 증언은 초대교회에서 핵심 설교(‘케리그마’)의 한 부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인데, 이를 화자는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 재확인 내지는 “로고스에 대한 교회의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15절).
크리스마스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증언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될 것이지만(1:30), 이 구절이 기능하는 바는 침례 ‘요한’의 사역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시기적으로는 ‘메시아’보다 앞서 등장하였지만, 그 능력이나 권위에 있어 “독생자”를 능가할 수 없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지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