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인사 및 소개
김태정 목사로마서 1:1-17약 50분 분량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론(1:1-17); (2) 본론(1:18-15:13); (3) 결론(15:14-16:27). 그리고 서론 부분은 다시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사말과 자기소개(1:1-7)
(2) 서신의 목적과 동기(1:8-15)
(3) 서신의 주제 요약(1:16-17)
이곳 제 1과에서는 이중 첫 번째 단락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 짧은 인사말 속에 기독교 진리에 관한 일련의 중요한 단어들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복음; (2) 사도; (3) 부활; (4) 성도; (5) 은혜; (6) 평강.
이렇게 볼 때, 본 서신은 혹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도가 급하게 서둘러 쓴 것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쓴 글에 이처럼 많은 주제들이 질서정연하게 등장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 서두(序頭)의 양식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오래 동안 하나의 전형(典型)으로 굳어져 내려오던 통상적인 서신의 양식입니다: A가 B에게 C를 (참고. 행 15:23; 23:26; 약 1:1). 사도는 이 통상적인 문구를 사용하면서, 각각의 요소에 긴 수식어(修飾語)를 공들여 덧입히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1절), 이와 같은 자기소개는 이례적으로 장황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신의 수신자들이 대부분 그와는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로마교회 회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의도적인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수신자들에 대한 묘사도 그렇게 짧은 것은 아닙니다만(참고. 7절상; 갈 1:2), 사도의 다른 서신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긴 것도 아닙니다(참고. 고전 1:2). 그리고 인사말의 마지막은 그의 대부분의 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례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7절하).
그런데 이 서두에서 특기할 만 점은 1절과 7절 사이, 즉 자기 소개와 안부 인사 사이에 마치 괄호로 묶어놓은 듯한 긴 설명을 삽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그의 복음과 사도 직분에 대한 설명입니다(참고. 2-6절). 그의 수신자들이 혹시나 가질지 모를 그의 믿음과 사도직분에 대한 의구심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들의 오래된 신조(信條) 내지는 복음에 관한 전형적인 신조를 함께 곁들이고 있는 것은(참고 3-4절), 그가 로마 교회 교인들과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바울’ 특유의 양식들을 대하면서 그가 진정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 즉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자격으로 서신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1, 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지극히 유대적입니다. 예컨대, 그는 복음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1-2절), ‘로마’ 교회의 이방인 교인들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7절). 이 같은 표현은 즉각적으로 어떤 신학적 역동성 내지는 긴장감이 들게 합니다: “과연 이방인을 위한 유대인의 복음은 이방인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들 질문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서론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 즉 “이방인”, “믿음”, 그리고 “순종” 등이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배경. 복음과 관련해서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3-4절의 선언은 사도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일종의 신조로 알려져 있던 것을 사도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대로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Dunn). 대조병행(對照竝行)을 이루고 있는 두 관계절의 형식이나, 사용하고 있는 어휘나 용어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보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 참고도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참고. Dunn (참고 도서 1, 5-6쪽).
신학과 신앙
1. 발신자-바울(Pau'lo")
<로마서> 제 1장 1절의 발신자에 관한 자기소개는 단어 하나하나 마다 결코 예사롭게 다룰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절)
바울. 사도는 그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사울’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가 회심 이전에 ‘사울’로 불렸음을 알 수 있으며, 회심 이후에도 한 동안 같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참고. 행 9:1, 4, 13:1-2, 7). 하지만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행 13:9),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두 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헬라’ 권에서는 처음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이름은 로마 시민으로서(로마 시민권은 많은 유대인들이 누리고 싶어 했던 일종의 특권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법적이고 공식적인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사울’은 그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친숙하게 사용했을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전환되는 곳이 있는데, 그 시기가 이방인을 향한 그의 선교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울’이라는 이름이 유대권역 밖에서는 거의 생소한 이름이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변화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친숙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유대적 배경의 이름(참고. 빌 3:7-11) ‘사울’을 버리고, ‘바울’로 완전히 바꾼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인즉, 하나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결심이나 결단에 의해서 비롯된 것일 것이며(참고. 롬 1:5; 갈 1:6), 다른 하나는 서신의 수신자들과 맺게 될 새로운 관계에 대한 의지나 염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소명과 헌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가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바가 있는 듯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수식하는 타이틀, “그리스도 예수의 종”(dou'lo" cristou' jIhsou)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종”은 유대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단어인데, 유대인 예배자는 자신을 항상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해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참고. 느 1:6, 11; 시 19:11, 13; 27:9; 31:16 등). 더 나아가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참고. 신 32:36; 렘 46:27; 겔 28:25). 그리고 ‘모세’나 선지자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야훼의 종”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왕하 13:12; 느 9:14; 시 105:26; 단 9:11; 말 4:4; 렘 7:25; 25:4; 35:15; 겔 38:17; 단 9:6; 암 3:7; 슥 1:6; 스 9:11). 따라서 “야훼의 종”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명예이자 영광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의존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자신을 종으로 칭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들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종으로서의 헌신과 충성과 주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친숙한 유대적 단어를 동원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데,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특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를 대입시켰다는 점은 그분을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며, 이는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도의 헌신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종”은 또한 이방의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노래하고 있는 <이사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참고. 사 49:1-8). 이방인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서신의 수신자들이 느꼈을 거부감에 관한 것입니다. 고대 동서양의 신비 종교에서 신적 존재에 헌신해 있거나 또는 특정 사상에 충실한 자들을 일러 “신의 종(노예)” 또는 “화신”(化身) 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자유나 해방을 궁극적 이상으로 성취하기 원하는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일반적인 시대정신으로 비추어 볼 때, 사도가 자신을 “노예”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썩 편치 않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도 사도가 자신의 주인으로 치켜세우고 있는 자가 다름 아닌 범죄자 내지는 노예의 죽음을 죽었던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니, 상당히 곤혹스러워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 “종”(dou'lo", 둘로스)은 당시 계급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지위, 즉 자신의 생명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신분의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종”과 함께 ‘바울’이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또 다른 타이틀은 “사도”입니다(ajpovstolo", 아포스톨로스). 이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종”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나 권위를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그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로 규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의 사도 직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았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사도 직분이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참고. 1:5). 물론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그 혼자만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동참했던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다는 점에서(참고. 고전 4:9; 15:7; 살전 2:6), ‘바울’의 사도직분을 배타적으로나 좁게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참고로 좁은 의미의 사도는 그야말로 열두 사도로서,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함께 동참했던 자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던 자들을 말합니다(행 1:26). 하지만 <성경>은 보다 넓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한데, 예수님을 사도로 부르는가 하면(히 3:1), 더 넓게는 신자 일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고전 4:9).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사도직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그 직분의 기원 및 권위가 초자연적이고 신적이라는 사실입니다(갈 1-2).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 내의 기능과 목적과 관련해서인데, 사도는 복음 전도와 교회의 터전을 세우는 일, 교회 개척자로서의 소명을 받은 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고전 12:28; 고후 10:13-16).
동사 “부르심을 받다”(원형: kalevw)는 원래 “식사에 초대하다”는 정도의 가벼운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참고. 왕상 1:41, 49; 마 22:14), 왕이나 신적 존재의 호출이라는 보다 강력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마 22:3, 9). 더욱 강력한 의미는 이 단어가 기독교적 용어로 사용될 때입니다(예. 롬 4:17; 9:11-12). 이곳 서신에서도 사도는 ‘로마’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로 부르고 있는데, 이들은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정된 뜻에 따라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6-7; 8:28, 30; 고전 1;2, 9, 24; 7:15, 17-24; 갈 1:6; 5:8, 13).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를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목적 즉 또 다른 “부름”을 위한 사역으로의 초청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1:1; 고전 1:1). “또 다른 부름”이란 모든 인류를 향한 부름 즉 열방을 위한 복음 전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도는 지금 <이사야>에서 다루고 있는 “열방의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사 41:9; 42:6; 43:1; 45:3-4; 48:12, 15; 49:1; 51:2).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동사 “택정함을 입다”의 원형 “택정하다”(ajforivzw)는 “분리하다” 내지는 “따로 떼어놓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거룩함”(a{gio")이나 “거룩하게 하다”(aJgiavzw)와 맥을 닿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는 아마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여기서 “구별” 또는 “거룩함”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거룩이며, 다른 하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거룩입니다. 소극적이라 함은 “거룩을 지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다소 폐쇄적이며 닫힌 순종을 연상시켜줍니다(참고. 고후 6: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구약>에서 방점(傍點)을 두고 있는 거룩도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은 단순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롭게 창조해가고 이루어가는 열린 순종이 되어야 하며, ‘바울’의 이해도 그러합니다. 즉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써 “이방인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거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방인을 위하여 분리되었다”는 자기 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eujaggevlion)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순수한 기독교적 용어로 볼 수 있습니다만, <구약>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이사야> 본문에서도 등장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관련해서 이 구절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참고. 눅 7:22; 행 10:36; 마 11:5):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바울’은 아마도 이와 같은 복음의 연속성을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깊이 깨달았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복음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언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그 기원이자 최종 권위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에게 있어 이 복음은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라고 밝히고 있는 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이 복음은”
이어지는 단락(2-6절)에서 사도는 자기소개를 잠시 멈추고, 그가 소개한 복음에 대하여 부연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이 단락의 특징은 여러 개의 관계 대명사로 연결되어있는 한 개의 구문(句文)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2-6절)
2절. 사도는 2절에서 복음에 관하여 사중적(四重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복음은 “미리 약속된”(원형: proepaggevllomai)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이곳을 포함해서 단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후 9:5.
앞에서 복음의 연속성과 관련해서 언급했던 바처럼, 이 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전에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의 기원에 관해서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dia; tw'n profhtw'n aujtou)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선지자들”이라고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신탁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복음의 연속성 또한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구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모든 희망과 궁극적 지향점이 결국 복음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이 약속은 “성경에”(ejn grafai'" aJgivai")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기록물”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성경>을 이 같은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약속의 연속성과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이 약속은 “(그의) 아들”(uiJov")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에 관해서는 3절에서 설명을 이어갈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복음”(1절)은 결국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복음에 관한 정의(定意)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거듭 밝히지만 사도에게 있어 복음에 관한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늘 균형 잡힌 두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3절. 사도는 3-4절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부차적으로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계란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독교회 내에서 잘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신조(信條)입니다. 3-4절에서 시적 대조병행(對照竝行)으로 드러나고 있는 부분을 말합니다. 사도는 이것을 여기에 차용(借用)하고 있습니다. 이중 3절은 대조병행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이 신조에 따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란 한 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비단 ‘바울’의 서신에만 나타나는 사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이 두 호칭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예. 1:4, 9; 고전 15:28). 물론 다른 경우에도 이 두 호칭을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할 때(예. 8:29; 고전 1:9; 고후 1:19), 특히 하나님의 관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예. 5:10; 8:3, 32; 갈 1:16; 2:20; 4:4; 골 1:13; 살전 1:10). 당시 사람들은 이미 각별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바, 3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그의 아들”(uiJou' aujtou') 즉 “신의 아들”로 부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의 아들”이란 호칭은 ‘바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폭넓게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신의) 아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근동 지역에서 왕이나 지배자를 뜻하기도 했고(예. 삼하 7:14), 위대한 철학자나 ‘랍비’를 지칭하기도 했으며, ‘스토아’ 학파나 유대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아들로 지칭하기도 합니다(참고. 출 4:22-23; 렘 31:9; 호 11:1). 또한 의인(義人)을 지칭할 때도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Dunn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8:15-17; 갈 4:6-7),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참고. 1:4); (2)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면서 비롯되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즉 아들)이며, 넓게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3) 그분의 신적인 기원 즉 천국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참고. 8:3; 갈 4:4).
사도는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칭하면서도, 곧바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Daui;d kata; savrka)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시적 대조병행의 신조(3-4절)는 사도 자신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던 예수님에 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오래 동안 다윗의 가계(家系)에서 ‘메시야’가 나와 현재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소위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간직해 왔습니다(참고. 사 11; 렘 23:5-6; 33:14-18; 겔 34:23-31; 37:24-28). 사도는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조를 빌어 예수가 바로 그러한 인물임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공관복음>을 비롯한 <신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인 확신이기도 합니다(참고. 마 1:1-16, 20; 눅 1:27, 32, 69; 2:4; 3:23-31; 딤후 2:8; 행 2:30; 계 5:5; 22:16; 마 1:1; 9:27; 12:23; 15:22; 20:30-31; 21:9, 15). 다만 이곳에서 사도가 로마 교인들을 향해서 이점을 다시 한 번 재확인 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즉 예수님이 “다윗의 씨”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해야 할 어떤 배경이나 이유가 있었을까? 그분이 ‘다윗’의 후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로 강변(强辯)할 어떤 필요성을 느꼈음일까? 아닌 게 아니라, <히브리서>에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댁’의 계열을 쫓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칭하고 있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도가 예수님을 “다윗의 씨”로 부르는 것은 어떤 신학적 변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배경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즉 유대 민족주의적 뿌리가 강한 초대 기독교회 (로마 교회를 포함해서) 내에서 이 같은 호칭은 일종의 안전한 접점 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는 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굳이 “육신”을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한함을 드러내고자 함일 것입니다. 즉 연약함이라든지, 필요라든지, 또는 욕구 등을 포함한다 할 것입니다. 사도의 서신서에서 “육신”은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부터 부정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치중립적이라 함은 그야말로 인간의 육체라든지, 물리적 관계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참고. 11:14; 고전 6:16; 15:39; 골 2:1), 부정적이라 함은 하나님에 대항하며 적대적이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참고. 8:5, 7, 12; 13:14; 갈 5:13, 24; 6:8; 골 2:11, 13, 18, 23). 그런데 3-4절에서처럼 “육신”(savrx)이 “영”(pneu'ma)에 대한 반명제로 함께 사용될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참고. 2:28; 8:6, 9; 갈 3:3; 5:16, 17, 19; 빌 3:3, 4). 따라서 예수님에 관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라고 말할 때, 사도는 내심 부정적인 의미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물론 처음부터 이 구절이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회자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즉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필수적인 요소이긴 해도 “성결의 영”으로 규정되는 예수님의 정체성만큼이나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본 서신서 내의 다른 곳에서도 “육신”을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4:1);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3, 5). 여기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유대적 혈연관계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식으로든 결정적인 변수(變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참고. 4:11-12, 16-17; 9:8). 이 같은 사실은 본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복음은 이미 유대주의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으며(5-7절), 그리스도는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야’ 그 이상의 존재라는 식의 선언(3-4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자신의 편지가 로마 교회로부터 거부당하고 배척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육신”과 “성결의 영”이 일정 부분 대조와 대척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사도는 후자(後者)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4절. 4절은 시적 대조반복의 후반에 해당되며,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절에서 대조되는 용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신”/“성결의 영”; (2) “다윗의 씨”/“하나님의 아들”; (3) “태어나다”/“인정되다.”
대조반복의 전반부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은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대조는 “육신에 관하여”와 “성결의 영에 대하여는”(kata; pneu'ma aJgiwsuvnh")(4절) 입니다. “성결의 영”이라 함은 “거룩한 영”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사도 자신에게 있어서나,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령님”을 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단도직입적으로 “성령님”이라 하지 않고 이처럼 다소 느슨한 표현을 쓰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격이나 사역에 대하여 아직은 명확하게 정립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대조는 “다윗의 씨로 태어난”(3절) 것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oJrisqevnto" uiJou' qeou' ejn dunavmei)(4절)것입니다. 여기서 이 문장의 동사 “인정하다”(oJrivzw)는 “임명하다”, “선포하다”, 또는 “지정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행위를 반영하고 있으며, 자연적인 출산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을까? 적어도 4절의 선언만을 볼 때, 그 계기는 “부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 처음부터 이미 “예정”(豫定)되었던 것인지에 관해서는 특별한 암시가 없습니다. 이 구절 자체만으로 추측해 볼 때, 예수님은 이전에 가지고 있지 않던 신분이나 역할 등을 새롭게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신분이나 역할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능력으로”입니다. 다시 풀어보자면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는데, 단순히 그 지위만 새롭게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능력과 권위마저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능력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서 사도가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롬 8:10; 고전 15:45; 갈 2:20; 골 2:6-7). 거듭 강조하거니와, 사도에게 복음이란 단순히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일부 표현에 따르면,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므로(참고. 삼하 7;14; 시 2:7),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표현은 지극히 당연한 자격 요건으로 인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가 아니라(참고. 대부분의 한글 번역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ejx ajnastavsew" nekrw'n)입니다. 아무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분에게만 국한되는 단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있을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참고. 행 4:2; 23:6).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참고. 고전 15:20), 실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성도들의 부활이 뒤따랐다는 초기 기록도 있습니다(참고. 마 27:52-53). 아무튼 부활은 예수께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5절. 4절은 시적 대조반복의 후반에 해당되며,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절에서 대조되는 용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신”/“성결의 영”; (2) “다윗의 씨”/“하나님의 아들”; (3) “태어나다”/“인정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3. 문안-“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괄호로 묶어놓은 듯한 복음에 관한 긴 설명(2-6절)을 마치고, 사도는 마침내 서신의 수신자에게 도달했습니다. 이 구절은 5-6절에서 시작한 정상적인 형태의 인사말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절)
로마에 있는 모든 자.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교회”가 아닌 “모든 자”입니다. 이는 그가 다른 서신에서 수신자를 교회로 부르고 있는 것에 비하면 다소 각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참고. <립보서>; <골로새서>). 모르긴 해도 당시 로마에는 단 하나의 교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는 이들에게 두 가지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입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비유대적 사회에서도 특정인을 가리켜 “신(들)의 총애를 받은 자”로 부르는 일은 흔했습니다만, 사도는 이곳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뜻하는 단어 ‘아가페’(동사형: ajgapavw)를 사용함으로써, 유대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이는 수신자들에 대한 두 번째 호칭입니다. 부연 설명하자면,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구별해서 불러낸”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거룩”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고 앞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에는 양면성 내지는 이중성이 있음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일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의미에서 소극적인 의미의 거룩과, 특별한 목적을 위한 분리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인 거룩이 그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문안 인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은혜”(cavri")와 “평강”(eijrhvnh)입니다. 은혜는 기독교 특유의 용어로서, 이를 만일 유대적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갈 6:16; 유 2). ‘헬라’어 고전에서 이 단어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컨대, “신들의 호의”나, “좋은 선물”, “좋은 뜻”, “기쁨”이나 “기쁘게 하는 것” 등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는 190여 회 정도 등장하는데, 여러 ‘히브리’어 단어들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호감”, “의향”, “기호”, “매력”, “아름다움” 등을 의미합니다(참고. 시 45:2)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족스러움을 뜻하는 ‘라촌’의 번역어로(잠 10:32), 하나님의 은총을 뜻하는 ‘헤세드’(참 11:27; 에 2:9, 17), 우애감을 뜻하는 ‘라함’(단 1:9), 선함을 뜻하는 ‘토브’(잠 18:22), 영예를 뜻하는 ‘게둘라’(에 6:3) 등의 번역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용례 외에 <신약>에서는 155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평강”은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유대 특유의 인사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예. 삿 19:20; 삼상 25:5-6; 단 10:19; 약 2:16). 이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히브리’어 ‘샬롬’에 대응되는 단어인데, 유대적 개념은 생각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안녕이나 평화의 개념을 넘어서는 사회나 국가 전체의 안위와 안녕 그리고 번영과 평화 등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적이고 물질적인 범위를 다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 모두를 총괄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풍성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신약> 속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전 포괄적이고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결코 지나침은 없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기독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빚진 바 크다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모두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신서 외에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곳은 단 세 곳뿐입니다(참고. 벧전 1:2; 벧후 1:2; 계 1:4).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 즉 세상의 조물주이자 인류의 아버지로 인식하는 사상은 고대 세계에서부터 친숙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은 비단 고대 그리스의 ‘소트아’ 학파나 신비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한 나라의 아버지로 이해하는 사상은 유대 특유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부를 때, 이들은 그분의 권위와 자비와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참고. 신 32:6; 사 63:16; 렘 3:4, 19; 31:9; 말 1:6). 더 나아가 후기 유대 지혜문학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의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참고. 눅 11:2; 롬 8:15; 갈 4:6).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일종의 고정된 형태의 표현이 마치 주문(呪文)처럼 ‘바울’의 <서신서>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참고. 고전 1:3; 고후 1:2; 갈 1:3-4;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3; 살후 1:1-2; 몬 3), 기독교인들 사이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인식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퍼져있었는지를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표현 역시 ‘바울’ 서신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더하여 추가적인 호칭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위와 권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승천하신 예수님과 나누어가지고 계신다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제 2과: 목적과 동기
2
서신의 목적과 동기
(1:8-15)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문학과 역사
양식. 당시 일반적인 관례를 따라 사도 역시 자신의 수신자들을 위하여 감사와 기도로 서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의 인격과 각별한 개인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로마에 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절).
수사학적(修辭學的) 관점에서 볼 때, 이 단락은 서론 내지 서두(書頭)의 한 부분으로서, 그 주된 목적은 수신자들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사도 자신에 대해서 관심과 호의를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그의 인사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고 정교한 언어로 조합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는 이곳에서 과분할 정도로 로마의 성도들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 싶다는 다소 궁색한 이유를 들어 로마를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고 있으며, 어찌 하든지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신자들의 마음에 동정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어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의 진심을 의심할 하등의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다소 수줍고 고지식한 그의 성격 탓 때문일지언정, 마음에도 없는 공교(工巧)한 수사(修辭)로 수신자들을 현혹하려 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성도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그의 일관된 심정은 서신의 본체(1:18-15:13)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는데, 이 역시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즉 그의 궁극적이고 원대한 목표는 스페인 선교를 위한 전진 기지로서 로마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로마 교회와의 긴밀한 교제는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롬 1: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롬 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신학과 신앙
1. 감사: 대상과 이유
바울 사도는 먼저 자신이 감사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감사는 그에게 늘 가장 우선 되는 순위입니다. 일부 번역본은 8절을 “(내가) 먼저 감사함으로...”로 8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절)
감사와 관련한 그의 표현은 다른 서신에서 반복해서 드러나는 사도 특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예. 고전 1:4; 엡 1:16;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몬 4). 여기서 사도가 “내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헌신 및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하는 것이지, 당연히 자신만이 독점하고 있는 자신만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바울의 감사와 관련해서 주목할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는 표현입니다. 이 역시 전형적인 바울의 표현으로서(예. 5:11; 7:25; 고전 15:37; 골 3:17), 그는 감사를 받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감사를 받아야 할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중보자 내지 중재자로서의 역할입니다. 참고로 유대교에서는 중보자로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중재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로마’ 성도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이 같은 표현 또한 여러 바울 서신에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예. 엡 1:15-16; 골 1:3-4; 살전 1:2-3; 살후 1:3-4). 여기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에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공식적으로 “선포하다”(또는 “발표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울 사도는 지금 로마 성도들의 믿음과 관련해서 상당히 의도적이고 의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의 믿음에 관한 이와 같은 자신의 견해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증인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더욱 공식화 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절)
그는 자신의 발언에 무게를 더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증인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유대적일 뿐만 아니라, 당시 헬라의 문헌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친숙한 표현이기도 합니다(예. 삼상 12:5-6).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같은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예. 고후 1:23; 빌 1:8; 살전 2:5, 10). 그렇다면 로마 성도들의 믿음과 관련해서 바울은 왜 이처럼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장된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추측건대, 행여나 한 번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로마 성도들이 자신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거나, 또는 자신의 말을 동정적으로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맹세나 서원(誓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 5:33-37; 참고, 약 5:12)을 알고 있었다면, 이 같은 상투적인 표현을 꼭 사용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는 증인으로 내세우는 하나님을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섬기다”(latreuvw, 라트류오)는 표현은 유대적 배경을 지닌 것으로,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제사나 예배 등의 제의적(祭儀的)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같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눅 2:37; 히 8:5; 9:1, 6, 9; 13:10; 계 7:15), 바울은 여기에 “심령으로”(pneu'ma, 프뉴마)를 덧붙임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확대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제의적 요소 외에, 복음을 위하여 그가 헌신하는 사역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의 아들의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복음”(1:1)이거나, “그리스도의 복음” 즉 “그의 아들에 관한 복음”(1:2)으로서,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2. 동기와 목적
이어지는 단락(2-6절)에서 사도는 자기소개를 잠시 멈추고, 그가 소개한 복음에 대하여 부연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이 단락의 특징은 여러 개의 관계 대명사로 연결되어있는 한 개의 구문(句文)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2-6절)
2절. 사도는 2절에서 복음에 관하여 사중적(四重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복음은 “미리 약속된”(원형: proepaggevllomai)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이곳을 포함해서 단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후 9:5.
앞에서 복음의 연속성과 관련해서 언급했던 바처럼, 이 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전에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의 기원에 관해서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dia; tw'n profhtw'n aujtou)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선지자들”이라고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신탁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복음의 연속성 또한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구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모든 희망과 궁극적 지향점이 결국 복음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이 약속은 “성경에”(ejn grafai'" aJgivai")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기록물”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성경>을 이 같은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약속의 연속성과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이 약속은 “(그의) 아들”(uiJov")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에 관해서는 3절에서 설명을 이어갈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복음”(1절)은 결국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복음에 관한 정의(定意)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거듭 밝히지만 사도에게 있어 복음에 관한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늘 균형 잡힌 두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3절. 사도는 3-4절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부차적으로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계란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독교회 내에서 잘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신조(信條)입니다. 3-4절에서 시적 대조병행(對照竝行)으로 드러나고 있는 부분을 말합니다. 사도는 이것을 여기에 차용(借用)하고 있습니다. 이중 3절은 대조병행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이 신조에 따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란 한 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비단 ‘바울’의 서신에만 나타나는 사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이 두 호칭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예. 1:4, 9; 고전 15:28). 물론 다른 경우에도 이 두 호칭을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할 때(예. 8:29; 고전 1:9; 고후 1:19), 특히 하나님의 관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예. 5:10; 8:3, 32; 갈 1:16; 2:20; 4:4; 골 1:13; 살전 1:10). 당시 사람들은 이미 각별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바, 3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그의 아들”(uiJou' aujtou') 즉 “신의 아들”로 부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의 아들”이란 호칭은 ‘바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폭넓게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신의) 아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근동 지역에서 왕이나 지배자를 뜻하기도 했고(예. 삼하 7:14), 위대한 철학자나 ‘랍비’를 지칭하기도 했으며, ‘스토아’ 학파나 유대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아들로 지칭하기도 합니다(참고. 출 4:22-23; 렘 31:9; 호 11:1). 또한 의인(義人)을 지칭할 때도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Dunn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8:15-17; 갈 4:6-7),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참고. 1:4); (2)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면서 비롯되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즉 아들)이며, 넓게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3) 그분의 신적인 기원 즉 천국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참고. 8:3; 갈 4:4).
사도는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칭하면서도, 곧바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Daui;d kata; savrka)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시적 대조병행의 신조(3-4절)는 사도 자신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던 예수님에 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오래 동안 다윗의 가계(家系)에서 ‘메시야’가 나와 현재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소위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간직해 왔습니다(참고. 사 11; 렘 23:5-6; 33:14-18; 겔 34:23-31; 37:24-28). 사도는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조를 빌어 예수가 바로 그러한 인물임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공관복음>을 비롯한 <신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인 확신이기도 합니다(참고. 마 1:1-16, 20; 눅 1:27, 32, 69; 2:4; 3:23-31; 딤후 2:8; 행 2:30; 계 5:5; 22:16; 마 1:1; 9:27; 12:23; 15:22; 20:30-31; 21:9, 15). 다만 이곳에서 사도가 로마 교인들을 향해서 이점을 다시 한 번 재확인 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즉 예수님이 “다윗의 씨”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해야 할 어떤 배경이나 이유가 있었을까? 그분이 ‘다윗’의 후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로 강변(强辯)할 어떤 필요성을 느꼈음일까? 아닌 게 아니라, <히브리서>에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댁’의 계열을 쫓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칭하고 있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도가 예수님을 “다윗의 씨”로 부르는 것은 어떤 신학적 변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배경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즉 유대 민족주의적 뿌리가 강한 초대 기독교회 (로마 교회를 포함해서) 내에서 이 같은 호칭은 일종의 안전한 접점 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는 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굳이 “육신”을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한함을 드러내고자 함일 것입니다. 즉 연약함이라든지, 필요라든지, 또는 욕구 등을 포함한다 할 것입니다. 사도의 서신서에서 “육신”은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부터 부정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치중립적이라 함은 그야말로 인간의 육체라든지, 물리적 관계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참고. 11:14; 고전 6:16; 15:39; 골 2:1), 부정적이라 함은 하나님에 대항하며 적대적이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참고. 8:5, 7, 12; 13:14; 갈 5:13, 24; 6:8; 골 2:11, 13, 18, 23). 그런데 3-4절에서처럼 “육신”(savrx)이 “영”(pneu'ma)에 대한 반명제로 함께 사용될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참고. 2:28; 8:6, 9; 갈 3:3; 5:16, 17, 19; 빌 3:3, 4). 따라서 예수님에 관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라고 말할 때, 사도는 내심 부정적인 의미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물론 처음부터 이 구절이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회자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즉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필수적인 요소이긴 해도 “성결의 영”으로 규정되는 예수님의 정체성만큼이나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본 서신서 내의 다른 곳에서도 “육신”을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4:1);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3, 5). 여기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유대적 혈연관계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식으로든 결정적인 변수(變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참고. 4:11-12, 16-17; 9:8). 이 같은 사실은 본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복음은 이미 유대주의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으며(5-7절), 그리스도는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야’ 그 이상의 존재라는 식의 선언(3-4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자신의 편지가 로마 교회로부터 거부당하고 배척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육신”과 “성결의 영”이 일정 부분 대조와 대척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사도는 후자(後者)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4절. 4절은 시적 대조반복의 후반에 해당되며,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절에서 대조되는 용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신”/“성결의 영”; (2) “다윗의 씨”/“하나님의 아들”; (3) “태어나다”/“인정되다.”
대조반복의 전반부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은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대조는 “육신에 관하여”와 “성결의 영에 대하여는”(kata; pneu'ma aJgiwsuvnh")(4절) 입니다. “성결의 영”이라 함은 “거룩한 영”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사도 자신에게 있어서나,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령님”을 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단도직입적으로 “성령님”이라 하지 않고 이처럼 다소 느슨한 표현을 쓰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격이나 사역에 대하여 아직은 명확하게 정립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대조는 “다윗의 씨로 태어난”(3절) 것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oJrisqevnto" uiJou' qeou' ejn dunavmei)(4절)것입니다. 여기서 이 문장의 동사 “인정하다”(oJrivzw)는 “임명하다”, “선포하다”, 또는 “지정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행위를 반영하고 있으며, 자연적인 출산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을까? 적어도 4절의 선언만을 볼 때, 그 계기는 “부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 처음부터 이미 “예정”(豫定)되었던 것인지에 관해서는 특별한 암시가 없습니다. 이 구절 자체만으로 추측해 볼 때, 예수님은 이전에 가지고 있지 않던 신분이나 역할 등을 새롭게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신분이나 역할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능력으로”입니다. 다시 풀어보자면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는데, 단순히 그 지위만 새롭게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능력과 권위마저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능력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서 사도가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롬 8:10; 고전 15:45; 갈 2:20; 골 2:6-7). 거듭 강조하거니와, 사도에게 복음이란 단순히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일부 표현에 따르면,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므로(참고. 삼하 7;14; 시 2:7),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표현은 지극히 당연한 자격 요건으로 인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가 아니라(참고. 대부분의 한글 번역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ejx ajnastavsew" nekrw'n)입니다. 아무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분에게만 국한되는 단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있을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참고. 행 4:2; 23:6).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참고. 고전 15:20), 실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성도들의 부활이 뒤따랐다는 초기 기록도 있습니다(참고. 마 27:52-53). 아무튼 부활은 예수께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5절. 4절은 시적 대조반복의 후반에 해당되며,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절에서 대조되는 용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신”/“성결의 영”; (2) “다윗의 씨”/“하나님의 아들”; (3) “태어나다”/“인정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3. 문안-“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괄호로 묶어놓은 듯한 복음에 관한 긴 설명(2-6절)을 마치고, 사도는 마침내 서신의 수신자에게 도달했습니다. 이 구절은 5-6절에서 시작한 정상적인 형태의 인사말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절)
로마에 있는 모든 자.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교회”가 아닌 “모든 자”입니다. 이는 그가 다른 서신에서 수신자를 교회로 부르고 있는 것에 비하면 다소 각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참고. <립보서>; <골로새서>). 모르긴 해도 당시 로마에는 단 하나의 교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는 이들에게 두 가지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입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비유대적 사회에서도 특정인을 가리켜 “신(들)의 총애를 받은 자”로 부르는 일은 흔했습니다만, 사도는 이곳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뜻하는 단어 ‘아가페’(동사형: ajgapavw)를 사용함으로써, 유대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이는 수신자들에 대한 두 번째 호칭입니다. 부연 설명하자면,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구별해서 불러낸”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거룩”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고 앞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에는 양면성 내지는 이중성이 있음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일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의미에서 소극적인 의미의 거룩과, 특별한 목적을 위한 분리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인 거룩이 그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문안 인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은혜”(cavri")와 “평강”(eijrhvnh)입니다. 은혜는 기독교 특유의 용어로서, 이를 만일 유대적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갈 6:16; 유 2). ‘헬라’어 고전에서 이 단어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컨대, “신들의 호의”나, “좋은 선물”, “좋은 뜻”, “기쁨”이나 “기쁘게 하는 것” 등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는 190여 회 정도 등장하는데, 여러 ‘히브리’어 단어들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호감”, “의향”, “기호”, “매력”, “아름다움” 등을 의미합니다(참고. 시 45:2)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족스러움을 뜻하는 ‘라촌’의 번역어로(잠 10:32), 하나님의 은총을 뜻하는 ‘헤세드’(참 11:27; 에 2:9, 17), 우애감을 뜻하는 ‘라함’(단 1:9), 선함을 뜻하는 ‘토브’(잠 18:22), 영예를 뜻하는 ‘게둘라’(에 6:3) 등의 번역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용례 외에 <신약>에서는 155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평강”은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유대 특유의 인사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예. 삿 19:20; 삼상 25:5-6; 단 10:19; 약 2:16). 이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히브리’어 ‘샬롬’에 대응되는 단어인데, 유대적 개념은 생각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안녕이나 평화의 개념을 넘어서는 사회나 국가 전체의 안위와 안녕 그리고 번영과 평화 등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적이고 물질적인 범위를 다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 모두를 총괄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풍성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신약> 속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전 포괄적이고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결코 지나침은 없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기독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빚진 바 크다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모두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신서 외에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곳은 단 세 곳뿐입니다(참고. 벧전 1:2; 벧후 1:2; 계 1:4).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 즉 세상의 조물주이자 인류의 아버지로 인식하는 사상은 고대 세계에서부터 친숙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은 비단 고대 그리스의 ‘소트아’ 학파나 신비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한 나라의 아버지로 이해하는 사상은 유대 특유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부를 때, 이들은 그분의 권위와 자비와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참고. 신 32:6; 사 63:16; 렘 3:4, 19; 31:9; 말 1:6). 더 나아가 후기 유대 지혜문학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의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참고. 눅 11:2; 롬 8:15; 갈 4:6).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일종의 고정된 형태의 표현이 마치 주문(呪文)처럼 ‘바울’의 <서신서>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참고. 고전 1:3; 고후 1:2; 갈 1:3-4;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3; 살후 1:1-2; 몬 3), 기독교인들 사이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인식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퍼져있었는지를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표현 역시 ‘바울’ 서신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더하여 추가적인 호칭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위와 권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승천하신 예수님과 나누어가지고 계신다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제 3과: 서신의 주제
3
서신의 주제
(1:16-1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론(1:1-17); (2) 본론(1:18-15:13); (3) 결론(15:14-16:27). 그리고 서론 부분은 다시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사말과 자기소개(1:1-7)
(2) 서신의 목적과 동기(1:8-15)
(3) 서신의 주제 요약(1:16-17)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