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2과
죽음 앞에서
김태정 목사시편 22:1약 19분 분량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우리의 신학은 우리의 신앙적 체험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정통적인 신학은 과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즉 과거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고난이 닥칠 때마다 이전의 체험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인간의 상황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익한 장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현대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속화; 상대화; 다원화. 이처럼 어떤 절대적인 가치나 규범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사람들은 무엇으로 채울까요? 자신들의 허무와 공허를 채워 줄 초자연적인 존재와 진정한 공동체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리고 이 시의 해석과 관련해서 예수님이나 <신약>의 화자들이 보이고 있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들 질문들이 이 시의 감상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시 22편의 양식(樣式)을 결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시 안에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다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1) 애가(哀歌): 1-21절
(2) 애가 중의 기도의 요소들: 11, 19-21절
(3) 찬양과 감사: 22-23절
이처럼 다양한 요소들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을 결정하는 문제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 시의 애가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죽음이 임박한 사람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단의 사람들은 찬양과 감사의 측면을 강조하여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시의 제목을 어떻게 결정하든 이 시를 통해서 애가와 찬양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분위기의 차이로 인해서 일단의 학자들은 이 시가 원래 두 개의 다른 시가 결합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시편>이 형성되는 전체 역사의 틀 안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이 시의 현재의 형식과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에는 그렇게 설득력이 크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시는 제사나 예배를 위한 통일된 기도서로 처음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예배자는 우선 애가에서 기도로, 그리고 마침내 찬양과 감사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은 <시편>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친숙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시는 공동체 전체의 예배에서나 또는 개인의 찬양 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의 제의적(祭儀的) 성격은 그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애가(1-21절상): 병든 자가 자신의 슬픔을 밝힘
(가)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받음(1-10절)
(나) 도움을 위한 기도(11절)
(다) 고난으로 둘러싸임(12-18절)
(라) 구원을 위한 기도(19-21절중)
(2) 응답(21절하): 신탁을 전제로 함
(3) 감사(22-26절): 고난 받는 자가 선포함
(4) 감사(27-31): 회중이 선포함
이 시가 전체적으로 제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련의 단서가 있습니다. 가장 분명한 단서는 21절 마지막 행(行)에서 나타나는 예배자의 신뢰와 확신의 선언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이 말은 앞에 나온 애가나 기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에, 이처럼 돌발적인 확신의 선언을 하게 만들었던 치유와 건강을 알려주는 신탁의 선언이, 기도 후에(19-21절) 있었음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찬양 가운데서 예배자는 제의 절차의 보다 긴 부분을 차지하는 말을 두 번씩이나 회중에게 하고 있습니다(22, 25절). 마지막 부분(27-31절)에서 등장인물과 어조가 변하고 있는데, 회중의 응답과 제의의 결말을 암시해 주는 대목입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가 원래 개인적인 애가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혹자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모든 시를 그런 식으로 설명해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개인의 체험(애가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은 후에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자는 이러한 제의에 참여하여 자신의 간구에 합당한 제사장의 신탁을 기대했을 것이며, 예배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는 확신을 얻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자신의 서원(誓願)을 갚으려 했을 것입니다. <시편>을 오늘날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애가(1-21절상)
하나님의 遺棄(1-5절). 지금 예배자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예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 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 하시나이다
이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고통과 절망감은 예배자 자신이 역사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쌓아온 신학적 지식과는 상충되는 것이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라도 하듯 시인은 세 번에 걸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의 “언약”을 어기겠으며, 그분의 백성들을 실망시키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며 거룩하신 분”으로 칭송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3절).
그러나 지금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그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 온 신학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 옛날 조상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구원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까이 있기는커녕 더욱 “멀리 계시며”, 그를 도우러 오시기는커녕 아예 “들은 체도 아니 하십니다”(1-2절). 신실한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언약의 하나님은 이 예배자를 버린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도 질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지금 이 예배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동료 인간들의 遺棄(6-10절). 그러나 예배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질병이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에 이어 그를 괴롭히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고통은 동료 인간들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예배자에게 있어 하나님의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에서 찾을 수 있는 반면에, 동료 인간의 문제는 자신에 대한 경멸과 조롱에 있습니다: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병든 자는 심신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쇠약해져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변을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바라볼 능력도 떨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주변 동료들의 반응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예배자는 이웃이 그를 조롱하고 경멸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벌레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도 시인의 친구들은 더 이상 사람 구실을 못하는 그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이 시인을 조롱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개입시키고 있습니다(8절). 이 말은 비록 조롱하기 위해서 한 말이긴 하지만, 시인의 가슴 속에 심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조롱 섞인 말 속에 실은 진리의 본질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은 큰 충격과 함께 신학과 체험 사이의 모순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따라왔습니다(9-10절). 그러나 지금 위기의 순간에 과거의 경험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인간들은 가까이서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움을 위한 기도(11절).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인은 비탄을 그치고 기도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11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기도의 내용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치유나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는 아닙니다(비록 암시는 되어 있다 하드라도).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멀리 계시지 않으실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멀리 계신다는 느낌은 치유가 가능하겠습니다만, 그의 기도 속에는 보다 간절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즉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설령 병이 낫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만 해도 병과 죽음의 공포와 싸울 힘을 얻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고통에 둘러싸임(12-18절). 비탄이 계속됨에 따라 시인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대적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단락이 주는 인상은 시인은 지금 대적자들에게 둘려 싸여 그 어떤 도피처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공포 가운데 내던져 있는 상황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대적자들은 성난 황소처럼 그를 둘러싸고, 에워싸고 있으며(12절), 굶주린 사자처럼 그 입을 벌려 그를 집어삼키려하고 있으며(13절), 또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개처럼 그를 둘러싸고 물어뜯고 있습니다(16절). 이들 대적자들이 전달해 주는 이미지는 무지와 폭력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육체적인 병을 영적인 공포와 혼동하여 사람들을 위로해 줄줄 모릅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병든 친구가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죽은 것처럼 그의 옷을 나누어가지고 있습니다(18절). 이 구절 또한 대적자들의 무자비한 속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수사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면 시인은 이 단락에서 두 가지 대조되는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적자들의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고(12-13, 16절), 또 하나는 이러한 위협 앞에 속수무책 공포가운데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14-15, 17절). 그는 이 대조되는 장면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4-15절의 말들은 반드시 질병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인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는 대적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공포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공포에 대한 묘사 또한 두 가지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14절에서 시인은 공포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물흐물 무너져 내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반해, 15절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포 때문에 입술이 바짝 바짝 말라 타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음의 진토”속에 내던져진 느낌입니다(15절). 여기서 다시 한 번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인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록 그를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들은 그의 대적자들이지만, 그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기도(19-21상). 그래서 그는 다시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기 만을 간구하며 기도드리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조. 11절):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상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그가 기도하고 있는 구원은 병과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대적자들(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짐승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로부터의 구원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2. 신탁과 응답(21절하)
이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하며 예배자의 확신에 찬 선언이 들리고 있습니다:
21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의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의 확신은 제사장의 선언, 즉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신탁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사장(또는 예언자)이 이러한 신탁의 말씀을 직접 선포했다기보다는 단지 암시되고 있을 뿐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선언을 기도문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집례하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다가 그가 받은 말씀만을 선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이나 임박한 죽음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이런 선언은 기도문의 형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응답을 가능하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서는 처음에는 개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나중에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이 기도의 응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으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3. 감사과 찬양(22-26절)
구원의 확신 후에는 당연히 감사와 찬양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첫 부분은 하나님에게(22절),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회중 전체를 향하고 있습니다(23-26절):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예배자는 회중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기도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즉시 회중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뒤에 나오는 찬양은 공허하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찬양은 회중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처럼 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중에 대한 시인의 권유는 27-31절에서 다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곤경이 사라지고 형편이 완전히 역전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24절, 참고. 1-2절).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으로 시작하였으나(1절),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움을 외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2절).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의 절규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21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라는 25절의 선언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제사장의 신탁일 것입니다. 회중 가운데서 찬양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은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을 약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자의 신실함을 또한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이 시작될 무렵에 하나님께 행한 서원과 약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25절). 시인은 또한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6절). 이 말은 그가 예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 식사에 참여한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전에 경험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이었지만(6절), 이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앉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절기 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절)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동료들에게 준 빵-최근까지만 해도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사람이 주는 의미 있는 빵-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4 회중의 감사(27-31절)
시의 마지막 단락은 개인적인 감사가 이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7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이러한 변화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적절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개인적이고 특수한 구원의 사건을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왕이시며, 모든 인류와 열방의 일을 주재하십니다(28절).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버림 받았다는 인식 가운데서 이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습니다(1절). 그리고 대적자들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7-8절). 유기나 선택에 관한 이런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들 이제 보다 넓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조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나라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28절).
그러나 마지막의 찬양은 이 시의 또 다른 주제 즉 임박한 죽음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시인은 비록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임박한 죽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도 역시 우주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29절). 생명과 생존은 그 자체를 위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후손들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한 자”(29절0는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신탁을 받지 못한 자, 즉 죽음을 모면하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찬양의 동기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반 받는 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죽음을 초월하여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미래의 세대들에게까지 증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30-31절). 바로 여기에 이 시가 지니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구원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를 두고 이어지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결국 모든 인류에게 조만간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대대로 증거 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인간은 홀로 죽는다.” ‘파스칼’(Pascal)의 말입니다. 이 시의 시인 또한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외로움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외로움은 이중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인식과, 주변의 인생들이 위로는커녕 조롱하고 멸시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시인은 이점에서 <구약>의 다른 인물들 즉 ‘욥’이나 ‘예레미야’의 처지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욥 3:1-26; 렘 20:14-18). 이들과 마찬가지로 시인 역시 자기 출생의 때를 기억하며, 왜 그의 삶의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9-10절).
다만 이 시인이 지금 겪고 있는 체험은 ‘욥’이나 ‘예레미야’가 겪었던 바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인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용해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그에게는 그의 외로움에 반응하고 염려해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이 시의 제의적인 성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외로움 가운데서 그의 말을 시작한 시인은 동료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고함으로써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22절).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선포되는 배경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교제”즉 ‘코이노니아’는 나눈다는 의미로서,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소유를 나누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자신을 나누는 차원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성만찬 예배가 이점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입니다. 구원을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구원을 선포되는 곳은 공동체 안에서입니다.
이 시가 그 배경이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적’ 즉 ‘메시야적’인 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기자들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상에서 이 시인의 고난을 자신의 그것과 동일 시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마 27:46; 막 15:34). <복음서>의 화자들도 십자가를 해석함에 있어 이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마 27:39; 막 15:29; 눅 23:35. 참고. 시 22:8). 실제 이 시가 예언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 시인이 그리고 있는 대적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대한 바 있습니다(시 22:19; 요 19:24; 마 27:35; 막 15:24; 눅 23:34). 혹자는 그래서 이 시를 “제 5 복음서”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신약>의 시각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시의 시인과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서 십자가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재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서 대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한 인간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의 공포를 함께 경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고난을 그냥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계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고난 받는 자와 죽어가는 자와 동일 시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외로움과 공포를 경험하셨기 때문에, 이 시인과 동일한 처지에서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안식과 구원을 베푸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나 이 시인의 경험과 예수님의 경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이 시인은 지금 죽음을 모면했으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일부(21-31절)는 ‘메시야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확신에 찬 선언, 즉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21절)는 시인의 경우처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승리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 시인처럼 오늘날에도 고난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과(22-26절) “회중”(27-31절), 즉 교회 모두에게 찬양의 동기가 되는 구원인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제목은 시의 장르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제목을 달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시의 단락 구분과, 형식과, 수사적 기법(비우나 상징)에 대해서 연구해 봅시다.
3. 이 시를 ‘메시야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이 시가 공동체에 관해서 주는 교훈은 없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