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0과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김태정 목사시편 30:2약 17분 분량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2)
성도(聖徒)와 비성도(非聖徒)를 구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로마서>는 역사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1:19-21).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한 문둥병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눅 17:11-19). 그리고 그와 함께 고침을 받은 다른 아홉 명의 동료 문둥병자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신학(theology)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영성(spirituality)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E. Perterson) 목사님은 영성과 신학은 따로 노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E. H. Peterson,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종태•양혜원 역. 서울: IVP, 2006.
즉 하나님에 관한 사상(신학)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영성)은 결코 무관하거나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둘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해주는 구심점은 다름 아닌 공동체라는 점을 말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기 오래 전부터 이를 노래해 왔습니다. 시 22편과 마찬가지로 이 시 또한 신학과 영성에 대해서,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감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과 공동체 신학에 대한 감상이 이 시에 대한 감상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시 30편은 그 양식에 있어 “개인적인 감사의 시” 또는 “개인적인 찬양의 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찬양 시와 감사 시는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감사는 또한 탁식과도 불가분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감사는 탄식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월터 브루그만(W. Bruegemann)은 시를 크게 세 종류의 장르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1) 찬양 시-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방향 정립(orientation)의 시; (2) 탄식 시-혼란과 무질서(disorientation)의 시; (3) 감사 시-재정립(reorientation)의 시. 이러한 구분은 사실 <시편>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역동적인 주기이기도 합니다. 시 30편은 이 마지막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내용으로 하는 찬양의 노래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4절)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절)
또한 이러한 찬양을 유발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2절)였다는 점에서 감사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절)
이 찬송 시는 질병과 죽음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를 드릴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나 표현 방식에 있어 ‘히스기야’의 찬송 시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사 38:18-19와 시 30:4-5, 9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같은 양식에 속하는 다른 찬송 시나 감사 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1) 예비적인 선포(1절)와 예비적인 요약(2-3절); (2) 과거의 위기에 대한 언급(6-7절); (3) 지난 날의 비탄에 대한 회상(8-10절); (4) 구원(11절); (5) 최종적인 찬양의 선포(12절).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감사 또는 찬양을 드리는 개인적인 찬송 시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구조나 순서에 있어서는 시마다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의 문학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비적인 찬양의 선포(1-3절)
(2) 세부적인 찬양의 선포(4-12절)
이 두 단락은 모두 찬양으로 시작하고 있으며(1, 4절), 끝 부분에서 한 번 더 찬양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을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 근거는 4절과 12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절에서 각기 동일한 두 개의 동사 ‘rm'z:’(자마르; 찬양하다)와 ‘hd:y:’(야다; 감사하다, 찬양하다)를 사용하고 있으며, 양괄호(兩括弧括) 식으로 묶어주고 있습니다. 즉 시인은 첫 번째 단락에서 요약해서 진술한 내용을 두 번째 단락에서 다시 회고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찬양이며, 중요한 동사는 ‘hd:y:’(야다; 감사하다, 찬양하다)입니다(4, 9, 12절). 또한 이러한 주제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두 가지 다른 부제(副題)로 말미암아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두 가지 부제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임박한 죽음: 음부와 무덤(3-4절); 무덤과 진토(9절)
(2) 죽음에 직면한 시인의 울음(5, 9, 11, 12절)
시의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찬양은 이처럼 죽음에서 구원을 받고 비탄의 눈물이 사라진 것에 대한 회상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의 양식이 개인적인 찬양과 감사임에는 분명하나 제의적인 배경도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사제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 시의 내용은 이러한 추측에 관한 어떤 실마리도 제공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제물을 바친다거나, 서약을 하는 등의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참고, 시 66:13-14). 또한 이 의식이 식사 또는 연회에 참여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습니다(참고, 시 22: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표제-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나 내용은 이 시의 제의적 배경에 대해서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표제에 의하면 시와 노래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로 시(詩, 미즈모르)는 “노래하다”(자마르)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내용 중에 “성도들”(4절)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인은 지금 자신의 감사제에 공동체의 동료 지체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가 질병의 위기 가운데서 슬퍼하던 일을 추억하고 있는데(9-11절), 이는 지난날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일 즉 시 22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식을 상기시켜주는 언급입니다.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다”는 언급(11절하)이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즉 지난날 위기의 맞이했을 때의 의식에서 지금 감사와 찬양의 의식으로 변한 과정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예비적인 찬양의 선포(1-3절)
시의 첫 번째 구절은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시인은 이곳에서 죽음과 적들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에서 히브리어 동사(hl;D, 달라)는 우물에서 끌어올리는 행동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위기를 묘사함에 있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던 시인은 “우물”을 의미할 수도 있는 단어인 “무덤”(r/B, 보르)에 떨어지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끌어올리듯이, 시인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죽음의 구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원수들”(1절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혹자는 이 단어를 죽음을 의미하는 복수형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은 문맥 상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즉 병자가 자주 만나는 “대적자들”로 보자는 것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시 6편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질병임에 분명하지만, 그와 같은 시기에는 그의 친구들까지도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이들 친구는 그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속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했고, 그 결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2절은 성전에서 이전에 있었던 일(시 22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의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보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의식에 참여하여 기도를 했고 제사장이나 성전을 섬기는 자로부터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실 것이라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지금 현재 예배와 찬양을 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러한 신탁과 실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음부”(스올)의 의미는 시 6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시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2. 세부적인 찬양의 선포(4-12절)
이미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시인은(1절) 동료 예배자들로 하여금 같은 찬양에 참여하자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4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여기서 동료 예배자들은 아마 시인의 친구나 친척들일 것입니다. “성도”(ds'j, 하사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헤세드)와 연관이 있습니다. 시인의 동료 예배자들이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찬양의 예배에 동참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의 구원에 관하여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주된 분위기를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으로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찬양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선언에 가까운 것입니다:
5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유사반복과 대조반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선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특성을 묘사하는 신학적 진술에 가까운 것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고, 그분의 은총은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인간의 회개와 통한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 수 없는 까닭에 진노의 결과는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은총의 결과는 생명입니다. 이처럼 경직된 신학이 시인의 찬양 속에 부드럽게 녹아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저녁과 아침”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저녁과 밤의 도래는 진노에 대한 경험을 상징하고 있고, 동터오는 새벽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5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진술을 기정사실화 하듯, 자신의 몰락에 관한 진술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몰락은 대조반복을 통해서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6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그는 건강하고 번영하던 시절에는 과신에 빠져 모든 것이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명기>는 자기 과신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죄악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신 8:17-18). 그는 바로 이러한 자신의 지난 과오를 날카롭게 간파하면서(6절), 사물의 진상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7절). 그는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거대한 산처럼 우뚝 솟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시인이 감사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육체적 질병이 다 나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영혼의 치유를 가능하게 해준 죄 사함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는 의로운 수난자가 아니라, 다만 과신의 결과로 고통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된 지금 돌아볼 때, 그의 질병은 일종의 심판이었으며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건강했을 때 “나는 영영히 요동치 않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6절). 그러나 질병이 임하자 그의 영혼은 “스올(음부)”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3절).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시인은 질병이 그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해주었고,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게 해준 교정의 심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위기의 시점에서 그가 드린 비탄의 기도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그런데 8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을 것이며, 여호와께 간구하겠나이다.” 이로 미루어 그는 과거 위기의 시점에서도 성전 예배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기도는 일종의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용어에 있어서나 그 내용에 있어 이 기도는 다른 유사한 기도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예컨대 8절의 기도는 시 28:1, 142:1, 욜 1:19 등과 비교할 수 있고, 9절은 사 38:18-19, 시 6:5, 88:10-12, 115:17 등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9절의 내용은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실제적 요청에 대한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만, 논쟁적인 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자신의 죽음이 어떤 선한 목적에도 기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먼지로 변한 상태에서(즉 무덤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법의 본질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고 그 내용 속에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즉 이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6절과의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인이 회개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이 건강할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과신하고 찬양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6절). 만일 회개하지 않고도 건강을 되찾는다면 9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유익이나 또는 선한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회개한 자만이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신실하심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제 하에서 시인은 10절의 공식적인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어서 기도의 응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표현 방식은 5절에서 이미 살펴본 바처럼 대조 반복의 기법입니다:
11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저녁의 울음이 아침의 기쁨으로 바뀔 수 있듯이, 시인은 자신의 슬픔이 춤으로, 우울한 베옷이 찬양의 옷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동료 예배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면서 처음과 같은 결론을 다시 한 번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12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교훈과 적용
성도(聖徒)와 비성도(非聖徒)를 구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로마서>는 역사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1:19-21).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역사나 자연 속에서 놀이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 표현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저서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E. H. Peterson,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종태•양혜원 역. 서울: IVP, 2006.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 계시” 내지는 “자연 신학”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한 문둥병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눅 17:11-19). 그리고 그와 함께 고침을 받은 다른 아홉 명의 동료 문둥병자에 대해서도 대조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요지인 즉은 성도를 구별하는 특징은 감사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에 따르면, 감사할 줄 아는 자야말로 위대한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가 신학(theology)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영성(spirituality)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E. Perterson) 목사님은 영성과 신학은 따로 노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ibid.
즉 하나님에 관한 사상(신학)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영성)은 결코 무관하거나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둘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해주는 구심점은 다름 아닌 공동체라는 점을 말입니다.
시 30편도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는 듯 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은 축복을, 그리고 불순종은 저주를 자초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번영 앞에서 와해되고, 무기력해지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찾아온 번영과 축복은 그로 하여금 그릇된 자기 과신의 희생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확고하고도 안전하게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절).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질병은 이런 망상을 깨뜨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다 놓았습니다. 죽음에 직면하게 되자 비로소 그에게 죄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7절). 그는 지금 자신의 질병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코 공허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음부가 그의 거처가 된다면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자각도 생겨났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8절). 그는 정말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담대합니다. 그러나 그는 살고 싶습니다. 따라서 그는 경건하지만 공허한 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첫째가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고, 두 번째가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절). 이 감사의 시는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를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육체적 건강이 좋아져서 이전처럼 생기발랄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알게 된 것은 그의 건강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간섭의 결과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공식적인 행사는 공동체의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 위기의 때에 간섭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는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드리는 감사의 제사에 함께 참여하자고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이미 본 바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4절). 그러나 비록 이 시가 육체적 건강으로 돌아오는 여행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건강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첫 번째 단계를 반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건강의 원천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는 일은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남은 인생 내내 계속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절하).
오늘 우리도 시인의 이러한 감사의 제사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은 병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시인보다 감사할 제목이 더 크고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질병으로부터 회복되긴 했지만, ‘히스기야’ 왕의 경우처럼, 생명의 회복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뿐이었습니다. 생명의 시계를 영원히 거꾸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궁극적인 원수 즉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멸하시고 그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썩지 아니 함을 밝히 보이셨습니다(딤후 1:10).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방인들과 다른 이유를 다음과 같은 권고 속에 담고 있습니다: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연습과 토의
1.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을 가르는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각자의 견해를 피력해 봅시다.
2. 언약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과 죽음에 관한 유대인들의 인식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3. 이 시는 공동체나 성도 간의 교제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