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과
아침 기도
김태정 목사시편 3:1약 17분 분량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6절)
시 3편의 장르는 무엇입니까? 이 시를 “아침의 기도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시를 시 4편과 함께 나란히 등장시키고 있는 편집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시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이 보여주고 있는 극적인 반전은 무엇이며, 왜 그러한 반전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이를 통해서 이 시가 주려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있어 알아봅시다.
문학과 역사
양식. 시 3편은 그 장르에 있어 “개인적인 애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는 완전한 의미에서 “애가”가 아니라(즉 이미 일어난 재난에 대한 시가 아니라) 현재의 위험이나 임박한 위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는 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면한 위험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곧바로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과 이를 위한 기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전체적으로 군사적인 용어가 다수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가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애가 이상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하는 일종의 “궁중 시”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군사적인 용어나 표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적들(3:1)과 원수들(3:7)
(2) 승리(3:2, 7)
(3) 하나님을 "방패"로 묘사함(3:3)
(4) “사람들”(3:6)은 실은 “군대”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예: 민 20:20; 삿 5:2; 시 18:43)
(5) 포위(3:6)
(6) "여호와여 일어나소서"(3:7)(참고. 민 10:35)
(7) 전시에 이스라엘이 부르짖던 함성: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3:8)
따라서 이 시인이 당면한 위기는 본질상 군사적인 것이며, 군대의 지휘관이나 왕이 부르짖는 기도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인 용어나 표현들은 이 시의 제목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이처럼 이 시를 “궁중 시”로 간주할 때, 그 배경은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 군사적 위기에 직면한 왕이 승리를 위해서 거행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시 4편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이 두 시가 많은 병행구들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 3편은 5절에서 암시받을 수 있는 바처럼, 이 시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아침 예배 시에 정기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반면 시 4편은 저녁 예배 시에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4:8). 따라서 이 두 시가 나란히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즉 시편의 편집자들은 각각 아침과 저녁에 사용하였던 두 편의 표준적인 시들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형식과 구조. 이 시는 일반적으로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 번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셀라”라는 후렴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첫 부분>: 많은 적들에 대한 불평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둘째 부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셋째 부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5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넷째 부분>: 하나님께 승리를 구하는 기도
7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배경. 이 시의 제목이나 또는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 등을 근거로, 이 시의 역사적 기원과 그 후 용도에 관해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시의 기원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아들로부터 버림받고 도망치는 '다윗'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삼하 15-16장). 이런 역사적 사건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언급들을 시 안에서 찾아 열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신학과 신앙”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윗' 이후 이 시는 “개인적인 애가”에서 왕들이 군사적인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궁중 시”로 바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애가”로 변모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왕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결국 모든 성도의 보편적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이 시가 궁중의 아침 예배 시에 사용했던 일종의 찬송가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셀라. 이 용어는 이 시에서 세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2, 4, 8절). 그리고 <시편> 전체적으로 71회 등장하고 있으며, <하박국>의 시문에서도 3회 등장하고 있습니다(합 3:3, 9, 13). 이 용어의 어원과 정확한 의미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때로 절(節)이나 연(聯)의 마지막에(예: 시 3:2, 4) 사용하거나, 혹은 시의 마지막에 두거나(예: 3:8), 또는 인용문으로 보이는 것 다음에 사용하기도 합니다(시 44:9). 그러나 그 위치를 일정하게 규정지울 수 없는 곳에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고대 '히브리' 시의 인용문으로 보이는 시문의 한 가운데에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시 68:8). 한 가지 분명하게 보이는 사실은 이 용어가 <시편>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점입니다.
또한 이 용어가 <시편>을 노래로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반주와 관련된 음악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 용어는 대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시와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목들은 이 용어를 '레위' 지파의 가수나 '다윗'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제목들의 약 75%는 “음악 지휘자”나 “합창 지휘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 지금까지 아주 다양한 견해들이 알려져 있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것들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Craigie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8).
(1) <헬라어 구약성경>은 이 '히브리'어 단어를 '디아프살마'(διάψσλμα)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쉼”이나 “간주곡” 또는 “더 큰 소리로”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2) <탈굼 성경>이나 '제롬'(Jerome) 등과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입장은 이 용어를 “영원히”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용어가 등장하는 곳에서 축도 합창이 행해졌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이 용어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예배 시에 시를 노래할 때, 이 용어가 등장하는 곳에서는 회중들이 복종의 표시로 땅에 부복하는 시점을 지적한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의 정확한 어원과 용례에 관해서 어떤한 단정적인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용어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일으키다” 또는 “높이다”를 의미하는 어근(語根) '살랄'(ללס)에서 파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1) “목소리를 높이다”(혹은 “큰 소리로 부르다”), 또는 (2) “(악기들의) 음조를 높이다”는 뜻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다른 어근에서 파생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지식으로 <시편>을 해석함에 있어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반주에 맞추어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말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목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비록 <시편>의 제목이 그 시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시편 연구에 여전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또는 “노래”라는 용어는 '히브리'어로 '미즈모르'(מזמור)로서 내용상 기도문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을 실제 노래로 불렀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렴같은 “셀라”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도(3, 5, 9절), 이 시가 음악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셀라”에 관한 논의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한편 시의 제목에 “다윗”이 등장한다고 해도 이 시를 반드시 그가 지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그 저작 연대 또한 확실치 않다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제 1부 참고).
제목의 나머지 부분은 '다윗'의 생전에 있었던 어떤 특정 사건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사건 즉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피해 도망간 사건과 이 시의 내용 사이에는 분명 유사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유사성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시의 배경과 관련한 논의 참조).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의 내용과 역사적 사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첫째,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도망하던 그 시기 또는 이후에 '다윗'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다. 둘째, 익명의 저자가 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후대에 지은 것으로서, 이 때 “다윗의”(לדוד, 레 다윗)이라는 표현은 “다윗에 관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셋째, 시의 내용과 역사적 사건 사이의 이러한 유사성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이 시의 내용과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주 흡사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 세 견해 중에서 첫 번째 견해는 입증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2. 불평(1-2절)
시의 처음 세 행들은 유사반복의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세 번째 행에서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시인의 불평은 그가 현재 대적들과 맞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의 적의(敵意)는 그들 자신의 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2절하).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말로만 자신들의 적의를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6절에서 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만). 이들은 시인을 포위하여 자신들의 희망 사항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을 거야.” 승리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적어도 대대적자들이 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대적자들은 마음 놓고 시인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시인이 '다윗'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불평하고 있는 시기가 언제인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밧세바'를 범한 이후의 시기일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통치 기간 동안에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으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으로 여기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개인적인 “애가”가 아니라, 적국과 전쟁 중에 있는 '다윗' 혈통의 왕에 관한 “궁중 시”로 본다면, 대적자들의 말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신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국가는 상대방 국가의 신(들)이 그 국가를 저버렸다는 말로써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조롱은 오늘에도 그렇지만 상대편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합니다.
3. 확신(3-4절)
시인의 어조(語調)가 이 시의 두 번째 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달라지고 있습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시인이 그의 시선을 대적자들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신명기>에서도 선언하고 있는 바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적들과 그 세력을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그 마음속에 그들은 더욱 거대한 존재로 부각될 것이며, 그들의 성채는 더욱 높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신 1:28)
그러나 그 시선을 하나님, 즉 그들을 위해서 전쟁을 직접 수행하시는 하나님에게로 돌릴 때, 대적들의 힘은 산산히 부서질 것입니다:
29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29-30)
따라서 왕의 영광은 과거의 업적이나 현재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만군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즉 그의 영광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나의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라는 시인의 묘사는(3절)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시인을 '다윗'으로 본다면 '감람산'에서 수치로 인하여 머리를 가린 그가(삼하 15:30)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하여 이 위기의 순간에 다시 그의 머리를 높이 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일반적인 궁중 시로 간주할 때, 이 표현은 왕이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로 인하여 이전의 지위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예: 창 40:20-21). 보다 보편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해 본다면, “머리를 든다”는 것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합니다(눅 21:28).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도 합니다(4절).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대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궁중 시”와 관련해서 아주 중대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산”이 이스라엘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시 2:6). 거룩한 산에서 왕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 산에서 도움의 손길을 펼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4. 신뢰(5-6절)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그동안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자들로 인하여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잠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것이 시인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신뢰의 말은 그가 아침에 일어나 한 말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날 밤에 이미 잠들었으며, 하나님께서 지난 밤 동안에 그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이 경험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또 다른 날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잠 못 자게하고, 불평하게 했던 그 적들은 이제 아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6절)
적들은 시인을 항하여 악의에 가득 찬 말만 하였을 뿐만 아니라(2절), 그를 포위하여 전쟁을 벌일 준비까지 하고 있습니다만(7절), 이런 위기의 절정에서조차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그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하고 조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간구(7-8절)
시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기도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는 전쟁에서 승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오직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7절).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터에 나갈 때, “야훼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하고 외쳤으며, 그 언약궤를 앞세우고 다시 돌아올 때에는 “야훼여, 이스라엘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외쳤습니다(민 10:35-36). 시인은 지금 이 옛 기도문의 첫 구절을 사용하여 “야훼여, 일어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조 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오래 된 신학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서 대적들의 “뺨” 치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7절). 이 말은 상징으로서, 그들에게 큰 모욕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왕상 22:24; 욥 16:10; 애 3:30). 시인 자신이 대적들에게 큰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한(2절) 보복으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욕을 가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유사병행 구절,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는 단순한 반복에서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표현 또한 상징으로서, 이빨 빠진 맹수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사나운 이빨을 제거당한 맹수가 더 이상 다른 짐승들에게 위협이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대적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가 등등하여 사납고 사악한 말로 시인을 모욕하고 위협하였으나(2절), 이제 이가 부러진 입으로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 “승리는 오직 주께만 있다”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8절)
그가 바라는 것은 올바르고 적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것을 주실 수 있는데, 여기서 승리는 단순히 적들을 정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거룩한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신약>의 기자들은 전쟁에 관한 용어들을 영적인 전쟁과 마귀에 대한 투쟁을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비단 <신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즉 <시편>이 <성경> 속의 책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왕들이 적들과의 전쟁에서 겪었던 특별한 경험들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영적인 경험을 상징하거나 비유하는 표현으로 인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원래의 목적과 의도 또한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변형이 <시편>를 탈역사화 시켜주는 보편적 경험으로 현대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시 3편도 편집자들이 자신의 의도나 관례에 따라 시 4편 앞에 둠으로써, 전자를 아침 예배를 위한 것으로, 후자는 저녁 예배를 위한 것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이 시는 아침 기도문으로 사용하도록 특별한 지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자에게 있어 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에 집착하면 할수록 근심은 깊어만 가고,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납니다. 그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이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면증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이를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오죽했으면 시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겠습니까!
이 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필자의 아내는 무슨 큰 인생의 고민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적으로(아마 육체적 질병 때문이겠지만) 수시로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루 저녁을 불면으로 보내고 나면 다음 날은 그런대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필자도 다른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로 큰 낭패를 당한 적이 한두 번 있습니다. 그 때마다 고민과 염려로 잠을 설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원체 낙천적인 체질이라 여태 불면으로 고생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어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잠이 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수면을 취한 후에는 감사와 신뢰의 이유를 갖게 됩니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잠자는 동안에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켜 주시고 유지시켜주시는 까닭에, 무의식의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우리 모두에게 시선을 어려운 문제들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통하여 근심과 불안의 상태에서 벗어나 장래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을 간구하라고 말합니다.
이 시인의 영적 여정은 곧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 가운데서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시편>에 포함된 것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이 시를 가지고 그분과 대화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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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토의
1. 이 시를 개인적인 애가로 부를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동시에 “궁중 시”로 부를 만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2. 이 시를 “아침의 기도”로 부를 만한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시 4편과 함께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의도를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3. 나의 새벽 기도는 어떠합니까? 그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 나누어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