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탕부(蕩父) 이야기
김태정 목사누가복음 15:11-12약 8분 분량
2011.1.9.(주일설교)
<성경> 속에는 방탕한 사람들이 많아 등장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사사에서부터 방탕한 왕, 방탕한 남편과 아내, 방탕한 아들과 딸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 중 몇 사람만 거명해 보자면, ‘삼손’, ‘솔로몬’, ‘다윗’, ‘고메르’, “사마리아의 여인”(요 4), 그리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요 8)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탕자 또는 탕녀로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아무나 조건 없이 사랑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마구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사랑에 관한 한에 있어서 절제가 없고, 헤프고,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은 어떻습니까? 특히 이야기 속의 아버지 말입니다. 그 역시 방탕한 자로 부를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본문의 제목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탕자 이야기>가 아니라 <탕부 이야기>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방탕한 아버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주인공이 두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미칠 듯이 사랑하고, 또 두 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는 것을 보고 책망하자 들려주신 세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논쟁을 하는 대신 이들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 이야기, 그리고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뒤지는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 다음으로 이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는 기쁨 때문에 그가 사라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오고 있는 아들을 보고 바로 뛰어나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그가 무어라고 한 마디 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용서해 버립니다.
이것이 방탕한 아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편하고 불쾌한 소식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용서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서로서로에게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때 느끼게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용서란 용서받은 자로 하여금 신선한 새 출발을 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란 죄에 대한 용서이고 죄란 나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용서하기 전에 죄지은 사람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고백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용서해 주는 이 아버지의 이야기는 결코 정당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듣는 이들을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을 두 아들에게 맞추려 합니다. 방탕한 동생과 그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맞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못마땅해 하는 형에 관한 비유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어두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대는 남동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징적으로 볼 때 그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보다 그의 자유를 더 존중하셨는지 자기 새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과는 작별 인사를 고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집을 나가 모든 것을 탕진하고 어느 날 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바로 그 때가 그가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결심한 날입니다. 우리는 그의 결심을 회개에 적합한 행동으로 보려고 합니다만, 실은 그는 마음속으로 아주 약삭빠른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돌아가는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그가 아들이 아닌 하인으로 산다 할지라도 최소한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몫은 방탕한 생활로 탕진해 버리고 이제 형의 유산에 빌붙어 살아보려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그를 보고 달려 나와 그를 맞이하였으며, 곧바로 형의 살찐 송아지를 잡아 축하연을 벌입니다. 그 사이에 아무런 별도의 조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잘못을 물어 일주일간 골방에 들어가 반성문을 쓰게 한다든지, 형의 밭에 나가 한 달 동안 노동을 하게 한다든지 등의 체벌 조항 같은 것 말입니다. 그냥 그에게 새 옷을 입혔고, 손가락에는 멋진 반지와 새 신발만 대령해 주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며 바로 축하연을 시작합니다. 조금 후 큰 아들이 밭에서 돌아와 노래와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는 이 형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 주어야 하는 종이 아닌 것을 아주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해진이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해진이를 화나게 하는 것은 엄마나 아버지가 늘 해운이 편만 든다는 것입니다. 동생이 아무리 잘못해도 늘 “네가 누나니까” 하며 자기만 나무라는 것에 대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는 같이 잘못했는데도 늘 나만 야단칩니다.
이처럼 맏아들은 종종 가혹한 대우를 받습니다. 지금 이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말입니다. 지금 형이 화가 난 것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것도, 아버지가 그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은 잔치입니다. 뉘우치는 자가 집에 돌아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잔치가 아니라 적어도 회개와 그에 따른 응분의 조치를 받고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이런 잔치에 무슨 도덕적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만사 자업자득(自業自得) 아닌가요? 부모님을 존경하고 따르며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도 있는데 어찌 그들은 그대로 두고 죄인들만 환영 잔치를 받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입니까?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 깨어진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등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왜 이런 사람들은 아무런 칭찬도 주목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 인권위원회가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그토록 목청을 높이면서, 정작 그 피해자나 그 가족의 인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목도 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처럼 왜곡된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들 피해자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이들이 성폭력 가해자가 되면 어떨까? 큰 아들이 아버지의 잔치를 받기 위해서 그도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큰 아들은 집으로 들어올 생각도 않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의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큰 아들은 동생을 “이 아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형은 이미 자신을 그 가족으로부터 제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은 나하고는 아무 혈연관계도 없으며, 아버지가 계속 그를 감싸고돈다면 아버지 역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는 통첩입니다.
아버지의 대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하며 주먹을 휘둘러 큰 아들의 면상을 후려 패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고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이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직함을 얻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두 아들을 잃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방탕한 삶에 잃어버렸습니다만, 큰 아들은 더욱 심각한 운명으로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큰 아들은 작은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차라리 먼 타향에 가서 돼지를 기르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고, 옳은 일을 했기 때문에 응당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 역시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아들이 한 행위 때문에 작은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어떤 아들도 그들이 행한 행위나 자격에 따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그냥 사랑했고, 그것은 아들이 어떤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즉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는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탕한 죄인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열심히 일하는 의인도 함께 기뻐하기를 기대하는 그런 사랑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집 밖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집 밖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밖에 서 있습니다.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초청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탕자로 불러 마땅할까요? 적어도 그의 사랑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을 주는 데 있어 결코 지치는 법도 없습니다. 어찌 방탕한 자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를 “아들”하고 다시 부르며,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한 아들에 대한 사랑이 다른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형의 독선이나 동생의 무모함이나 모두 그 사랑을 피할 수 없습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해야겠습니다. 이들은 한 가족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속해있고 가족 한 사람을 위한 잔치는 모두를 잔치입니다. 사랑 많은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내 아들이 아닌 네 동생-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의 이 말은 가족 관계를 회복하라는 초청입니다. 동생은 물론 사랑 많은 아버지와의 관계도 단절한 채 살아가던 큰 아들을 향한 초청인 것이지요. 큰 아들은 이 초청을 받아들였을까요? 예수님의 이야기만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는 집 안에서 진행되는 잔치 소리를 들으며 집밖에 서 있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는 것일까요? 결론은 우리들 각자에게 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주장하며 집밖에 계속 서 있을지, 또는 내 권리를 버리고 안으로 들어가 온갖 방탕한 자들, 의로운 성인들, 그리고 악당들이 가득한 잔치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실 것인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