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사건의 중심이 되는 “출애굽”은 ‘야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로서, 이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시내’산 아래에 진(陳)을 쳤다. 이 백성은 이 산에서 천둥과 번개를 보고 들었으며(출 19:16-19),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주셨다(20:1-17). 그리고 선언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스스로를 “언약”(言約)의 틀 속에 자신을 구속(拘束)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이스라엘도(자발적이긴 하지만) 당연히 그 틀 속에 스스로를 묶어야만 할 것이었다. 언약이란 앞에서도 밝혔듯이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 산에 머물 수가 없다. 그들의 목적지는 이곳 황야가 아니라 바로 “그 땅”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주변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구별된 삶, 즉 “거룩함”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삶”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즉 거룩한 삶의 가시적인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규칙적으로, 그리고 항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련의 제의(祭儀)를 통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께서 제정(制定)해 주신 제의를 통해서 (1)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식(the way to God)과 (2)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the walk with God)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레위기>의 문학
<레위기>의 문학적 특징과 관련된 질문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구조와 단락 분석에 관한 것으로서 전체 구조를 여섯 단락으로 볼 것인지 또는 두 개의 단락으로 단순화 시킬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1. 명칭
<오경>의 다른 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헬라’ 식 이름과 ‘히브리’ 식 이름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히브리’ 식 명칭은 책의 첫 문장에서 따온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와이크라)(1:1)이며, 책의 ‘헬라’ 식 명칭 <레위기>는 <칠십인 역>의 제목, “레위 족속에 관한 책”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는 책의 이름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 책의 중심인물이 ‘아론’이지 ‘레위’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론’이 ‘레위’족속에 속하긴 하지만,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은 ‘아론’과 그 후손이지 단순한 ‘레위’의 후손들을 망라한 것은 아니다.
책의 또 다른 이름으로 <모세의 세 번째 책>이 적절하다 할 수 있는데, <오경>을 ‘모세’의 일대기(一代記) 내지는 전기(傳記)라고 전제할 때, <레위기>는 <출애굽>에 이은 세 번째 책이 되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도 이 책은 <출애굽>의 이야기 순서를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출애굽> 25-31장은 이스라엘의 제의(祭儀)에 관한 제반 사항들, 즉 성막(聖幕)과 기구들, 제사장의 의복과 임명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어지는 35-40장은 성막과 기구들, 제사장의 복장들을 어떻게 만드는 지에 관한 규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안수(按手) 즉 임명에 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바로 이 부분에 관한 내용을 <레위기> 8-10장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모세’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레위기>가 단순히 제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예: 10, 24장). 더 나아가 이 책의 매 장(章)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레위기>가 기본적으로 “이야기”(narrative) 형식의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이 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모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음을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2. 양식과 문체
<레위기>는 문학 양식(樣式)에 있어 “이야기”인가 아니면 “율법”인가?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이 “제의”와 “거룩”에 관한 계명(誡命)과 율법(律法)으로 이루어져 있어, 당연히 후자(後者)를 택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안에서 이야기적 요소를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책의 벽두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 에피소드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이스라엘의 성막(聖幕)으로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에 대한 지침을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1).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8-10장 및 1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 역시 계명이나 율법이 아닌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볼 때, <레위기> 역시 <출애굽>에 이어 <오경>의 기본적인 문학 양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율법의 배경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과거사(過去史)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의 독자들에게 교훈과 경계를 주기 위한 신학적인 목적을 지닌 과거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학 화 된 역사” 내지는 “이야기 화 된 역사”이다. 신학자 Damroschk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역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율법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레위기>는 계명과 율법을 가장 명료하고 단순하게 제시하면서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일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애매모호한 문학적 수사(修辭)를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위기>는 <구약>의 모든 책 가운데 문학성이 가장 결여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책은 <구약>의 다른 책들에 비해, 독자들의 심미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정서적인 감동을 유발하는 일에는 다소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구조
<레위기>의 구조는 <오경> 내의 다른 책들에 비해 구조 분석이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새로운 단락의 시작과 끝이 표제어(標題語)와 그에 상응하는 마무리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웬햄’(G. Wenham)의 구조 분석 방식을 따라 개략적으로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다: 참고도서 2: ‘트렘퍼 롱맨’(Longman III, Tremper) 역시 기본적으로 유사한 구조 분석을 따르고 있다(참고도서 3,).
4. 이해와 해석
<레위기>는 ‘유대’인 자녀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책으로 중요한 책이긴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멀리하고 싶은 책이다. 오늘날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레위기>를 본문으로 설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는 참으로 딱하다 할 것인데, 이 책이야말로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약>에서 등장하는 “구속”(救贖; atonement)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레위기>가 없이는 이 개념을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현대 독자들이 <레위기>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할 것이다. 첫째,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일련의 종교적 “제의”(祭儀)가 시청각적인 설명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시적(可視的)으로 보여주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 제의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전혀 불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각종 제의나 의식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과거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 각종 제의나 행사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내용 분석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이 문제점들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가시적 표현. 현대 독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에 참여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각종 제사 의식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보기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히브리 성경>이 큰 소리로 회중 가운데서 낭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만큼, 이를 듣고 있는 회중은 각종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의 전체적인 과정은 물론, 특별히 각 제사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의식을 어떻게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해보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려보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한다 해도 여전히 고대 이스라엘이 이해하고 있던 것만큼은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레위기>에서는 희생제사에 바칠 짐승을 죽이기 전에 네 발을 묶어야 한다는 언급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했고,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도 같은 방식을 따랐음을 시사해주고 있다(참고. 창 22:9). 또 하나 <구약>에서 거의 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말이 오갔으며,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왜, 그리고 무슨 제사를 드리는지, 제사장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제사장들 역시 제사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과연 그 제사를 받으셨는지 그 사람에게 아무런 확언을 해주지도 않고 돌려보냈을 리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레위기>에서 볼 수 있는 바는 기껏해야 제의에 관한 일련의 규칙 정도이지, 이처럼 상세한 분위기나 절차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無知)하다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전 예배에서는 <시편>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인데, 이나마도 <레위기>에서는 아무런 힌트조차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그리고 있는 각종 제의나 행사의 분위기나 절차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의미와 의의. 현대인들은 <구약>에서 그리고 있는 각종 제사나 제의에 대해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온갖 도살(屠殺) 기구가 널려있고, 살아있는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피를 튀기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예배를 그려보라! 이는 오늘날 많은 <구약> 신학자들의 저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들 책들은 “구약 신학”을 논함에 있어 <레위기>를 <오경>의 핵심에 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즉 이들은 “종교적 제의”야말로 고대 사회의 핵심 가치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사실 종교적 제의를 포함해서 제반 의식들은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다. 식탁 예절만 하더라도 나라마다 다르다. 한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식탁 매너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대 간의 차이도 있다. 젊은 세대의 행동 방식은 노인 세대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예배의 형태 또한 교단에 다라 많은 차이가 나기도 한다. 찬양의 형태도 그렇다. 한 교단에서 허용되는 박수치기나 율동 등이 다른 교단에서는 금기 시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의식(儀式)의 형태나 모습은 관습으로 굳어지고 전래(傳來)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관습은 한 사회의 의무사항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예컨대, 복장(服裝)의 경우만 해도 장례식이나 결혼식에서 각기 달라야 한다. 평소 내가 혐오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내가 그의 죽음을 아무리 고소하게 여길지라도 적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예복을 갖추고 가야 한다. 교회나 회당 예배 시간 중에는 모자나 선글라스를 벗어야 한다. 북미(北美)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만나 칠면조 고기를 함께 나누어먹는 시간이다. 내가 이를 원하든 않든 사회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종의 규범이나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들 관습들을 거부한다면 사회는 나를 무뢰한 취급을 할 것이다.
기념식도 그렇다. 각 나라는 지키고 기념해야 할 국가적 날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3.1절, 4.19, 6.6 현충일, 8.15 광복절, 등등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가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각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조상의 기일(忌日)이 그것이다. 교회라면 부활절을 결코 생략할 수 없다. <레위기>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제사나, 정결 의식이나, 종교적 기념일, 절기 등을 다루고 있다. 현대 독자는 이들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기본적 가치가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해와 해석.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나 절기 등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이해는 별개의 문제이다. 고대 이스라엘 인 중에서 지금도 살아남이 각종 제사의 의미나 차이와, 왜 그러한 차이가 있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레위기>는 여전히 난해한 책이다. 특히 각 제의나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으므로, 이 책은 오늘날 더욱 어려운 책으로 남아있다: 예컨대, 문둥병 환자가 병이 나았을 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레위기>에 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즉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을 제의들이 오늘날에는 신비나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나 다른 사회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통해서 일말의 통찰력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20여 년 동안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레위기> 등과 같은 <구약>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어졌고, 학자들 사이에 상당 부분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5. 내용
5.1. 제 1부: 제사법
제사장의 임명에 관해서는 <출애굽>에서 이미 다룬 바 있지만, 실제 <레위기>(8-20장)에 이르러서야 임직식이 행해지고 있다. 제사장의 임직과 관련해서 다양한 제사가 필요한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은 여태까지 없었다. <레위기>에서 이들 각종 제사들을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책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책의 제 1부는 이 도표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1부는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제사를 드리는 자(예배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다: 제물은 어떤 것을 드려야 하며, 예배자가 할 몫은 무엇이며, 제사장이 해야 할 몫은 어떤 것인지 등등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제사장과 관련한 제사의 규정들을 담고 있다. 예컨대, 바쳐진 제물의 부위(部位) 중에서 어떤 부위가 제사장의 몫인지를 구분해주고 있다.
제 1부의 구조를 희생제사의 종류 별로 구분해 보면 아래 여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단락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제목과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1. 번제.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태운다는 의미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다른 희생 제사의 경우, 제물의 일부만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남기거나 때로는 예배자들과 나누어 가지기도 한다.
번제에 관한 규례는 제 1장의 처음 두 절에서 제사에 관한 일반적인 지침이 있은 후, 세 개의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다: (1) 3-9절; (2) 10-13절; (3) 14-17절. 이와 같은 구분 방식은 <레위기>에서 자주 만나는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들 세 단락에서 번제에 합당한 짐승의 종류나 상태,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장의 역할 등을 규정하고 있다. 짐승의 종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에 한하며, 그 상태는 아무런 흠이 없는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야생 짐승이나 상처가 난 짐승은 드릴 수가 없다.
예배자는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按手)하고, 짐승을 도살하되, 그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아론’의 아들들)은 짐승의 피를 모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을 뜬 짐승을 모두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운다. 이때 예배자와 제사장의 역할 구분이 중요한데, 제사장만이 짐승의 피를 다룰 수 있으며, 제단에 접근할 수 있다.
번제의 핵심은 짐승을 죽여 제단 위에서 태우는데 있다. 이는 그 짐승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까? 단순히 드리는 자의 너그러움을 드러내는 행위일까? 그러나 그 이상이다. 드려지는 짐승은 드리는 자를 위한 “속죄”(贖罪, atonement)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4절). 즉 예배자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짐승은 곧 나 자신이거나 나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예배자는 하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속죄란 일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은 말하는데, 성경적 의미의 속죄는 인질을 붙들고 있는 납치범에게 지불하는 엄청난 액수의 몸값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피해를 입은 자에게 지불하는 일종의 보상(報償) 같은 것으로서, 보상액도 실제 입은 피해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다(참고. 출 21:30; 잠 6:35). 즉 <구약>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의 기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보상액으로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짐승을 대신 받으신다는 것이다.
번제가 갖는 효력에 대해서 <창세기>에서 두 가지 핵심 제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양을 받으신 경우다(22장). 하나님을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 언약”, 즉 “온 땅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이다(창 22:8). 또 하나 더욱 인상적인 사례는 대홍수 이후 ‘노아’가 드린 번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비록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는 상존할 것이지만(창 6:5; 8:2), 그렇다고 그로 인해서 인간을 다시 물로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번제가 올리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악한 속성을 드러낸 바 있어(출 16-17, 32장), 그 때마다 번제를 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번제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경우에 해당한다기보다는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의 죄성(罪性)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준종이나 헌신의 의미도 담고 있기도 하다.
2. 소제. 소제(素祭, the cereal offering)란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서, 종종 가난한 자가 번제(燔祭) 대신에 드릴 수 있는 제사였다. 그러나 대개 짐승을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는 것이 상례였다. 소제 역시 번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긴 하지만, 번제와는 달리 제물의 일부만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 그런 점에서 소제는 제사장의 수입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소제는 밀가루나 또는 구워서 만든 빵의 형태로 드릴 수 있었다.
3. 화목제. 화목제(和睦祭, the peace offering)는 번제와 마찬가지로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다만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는 때로 하나님 앞에서 서원(誓願)을 행할 때이거나, 또는 고기를 겻들인 식사로 무엇인가 기념할 때였다. 서원을 하는 경우는 대개 심한 병을 앓고 있을 때이거나, 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일 것이다. ‘한나’의 기도를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한나’는 ‘실로’의 성전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며, 이 때 가족은 희생 제물을 드렸을 것인데, 특히 그녀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제물은 넉넉하게 드렸을 것이다(삼상 1:24).
이 때 드린 제사는 아마 화목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자가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제사가 바로 화목제이다. 짐승의 일부는 태우되,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었으나, 일부는 예배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레 3:3-4; 7:31-35). 이 제사 역시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사였으나, 제사의 주된 목적은 축하(또는 기념)하기 위한 것이지 죄의 구속이나 속량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제사도 즐거움 가운데 드린 것이었다.
4. 속죄제. 속죄제(贖罪祭, the sin offering)는 <레위기>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이다. 그리고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아주 다양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저지른 죄나 또는 태만죄(怠慢罪)에 대한 속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외도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경우, 피부병을 앓았을 경우, 또는 제사장으로 임직받았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제사의 절차는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다른 제사에서는 짐승의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물로서 제단 사방에 뿌리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속죄제의 경우는 죄인의 직위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즉 피의 일부를 번제단이나, 성소 안의 향단(香壇) 뿔에 바르거나,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는 지성소 안의 언약궤에도 바르기도 했다.
피를 바르거나 뿌림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죄로 오염된 제단이나 언약궤를 청결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레위기>에서 죄란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성막을 오염시키는 실존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오염된 장소에서는 머물 수가 없다.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막은 그 자체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하는 가시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막은 그야말로 빈껍데기일 뿐이다.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지속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적인 세척제(洗滌劑)이다.
그러나 피가 하는 역할은 그 이상이다. 피는 죄 사함을 담부해준다. 속죄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 여러 곳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이라는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4:26, 31, 35; 5:10, 13; 4:20). 피를 제단에 뿌리는 일이 어떻게 죄 사함의 효력을 나타내게 되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제단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제사장과 같은 중재(또는 중보)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속건제. 속건제(贖愆祭, the guilt offering)는 다른 제사들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되어있다. 아마도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 않았거나, 또는 제사장의 임직과 관련해서는 별 상관이 없는 제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제사에서 드리는 제물은 다른 제사와는 달리 단 한 종류의 짐승 즉 숫양만이 허용되었다.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는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들을 부지중에 더럽혔거나, 서원을 갚지 못했거나, 거짓 맹세를 했을 때였다. 이 제사를 드린 실제 사례들은 피부병을 앓고 난 사람이나(레 14:12),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이 죽은 사람 곁에 있음으로써 그 서원을 어긴 사람이 드린 경우였다(민 6:9).
6. 제사장을 위한 지침들. 제사장을 위한 이들 지침들은 그 순서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앞에서 다룬 내용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내용들이 주제별로 등장한 바 있다: 즉 먼저 “향기로운 제사”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1-3장), 다음으로 죄 사함에 관한 제사가 뒤를 잇고 있다(4:1-6:7).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횟수에 따라 순서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가장 빈번하게 드리는 제사인 번제와 소제가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속죄제와 속건제 순이다. 다만 의무사항이 아닌 화목제의 경우는 맨 나중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달라진 것은 그 순서만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관심의 대상은 제사를 드리는 자, 즉 일반 회중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제사장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단락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6:9, 14, 20, 25). 그리고 그 내용도 주로 제물의 어떤 부위를 이들 제사장이 가져가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예외. 7:23, 29).
5.2. 제 2부: 제사장 제도
책의 제 2부는 제사장의 임직과 그 제도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도표의 노란 색으로 칠한 부분).
비교적 긴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단락은 규례와 율법을 다루고 있는 그동안의 이야기로부터 일탈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부분이야말로 <레위기>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다. <오경>을 사실 상 ‘모세’의 전기(일대기)로 본다면, 이 책의 각 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표현, “그리고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는 쓸데없는 반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경>이 ‘모세’의 전기임을 수시로 상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의 제 2부에서 다루는 내용, 즉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 임직에 관한 내용도 또 다른 관점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인간 중재자의 역할이 그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출애굽기> 28-29장에서 다룬 바 있는 일련의 지침들을 상세하게 어김없이 수행하고 있다. <출애굽기> 25-31장에서 다룬 바 있는 또 다른 일련의 지침들, 즉 성막 건설이나, 성막 구기들, 그리고 제사장의 복장(服裝)들에 관한 지침들은 이미 수행된 바 있다(출 35-40). 그러나 ‘아론’의 임직에 대해서는 여태 다룬 바 없다. 이 부분을 <출애굽기>가 끝날 때까지 다루지 않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과연 황금 송아지의 제작을 주도한 ‘아론’은 제사장의 직분을 누릴 수 있을까?”
<레위기> 제 2부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해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론’마저도 용서해주셨다. 사실 <레위기> 전체는 ‘아론’의 임직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그동안 소개한 일련의 제사 제도도 결국 ‘아론’의 임직에서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를 사전에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제사들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제사장의 항시적인 의무 중의 하나인 “규칙적인 제사”를 드리는 일이다. 제사를 드리는 일은 제사장의 주된 임무이며, 그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대표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책의 제 1부; 참고. 위 도표). 제사장의 또 다른 기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가르치고 교훈하는 일이다. 제사를 드리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기능이라고 한다면, 백성을 교훈하는 제사장이 수행하는 수평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변한다(책의 제 3부; 참고. 위 도표). 이 책의 10장 이후의 내용은 ‘아론’의 두 번째 기능과 관련한 것들이다. 즉 거룩과 정결 예법에 관한 제반 종교적이고 윤리ㆍ도덕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 두 기능과 관련한 내용 사이에 ‘아론’의 임직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책의 제 2부; 참고. 위 도표).
그리고 ‘아론’의 임직을 다루고 있는 책의 제 2부는 다시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첫째 날의 ‘아론’ 임직(8:1-36)
(2) 여덟째 날의 ‘아론’의 임직: ‘아론’의 첫 번째 제사(9:1-24)
(3) ‘아론’의 아들들의 제사: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 첫째 날. ‘아론’의 임직 식은 ‘모세’가 대제사장의 지위와 직분에 걸맞는 화려한 의복을 ‘아론’에게 입혀주는 것으로 시작된다(8:1-13). 그러나 아직은 그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일반 백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을 위한 일련의 제사를 아직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아직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짐승의 피를 다루는 문제라든지, 짐승을 제단 위에 놓고 태우는 일 등이다(8:14-21). 그러나 화목제에서 짐승의 피를 다루는 방식은 아주 유별나다. 즉 피의 일부를 ‘아론’의 귀뿌리와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에 바르고, 나머지는 제단 위에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행위는 <출애굽기> 24장에서 그리고 있는 장면과 유사한 것으로, 이 경우에는 짐승의 피를 백성과 제단 위에 뿌리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이 같은 행동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연결시켜주는 것으로서, <출애굽기>의 경우는 이스라엘 전체에 관한 보편적인 행위라면, <레위기> 8장에서는 ‘아론’ 한 사람에게 대한 구체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2. 여덟째 날. 그러나 일주일 후 상황은 달라졌다. ‘모세’가 아니라 ‘아론’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아론’이 그 자신과 백성을 위한 제반 제사를 주도하고 집행한다. ‘모세’는 제사의 끝에 그가 새로운 제사장을 대동하고 성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모세’가 ‘아론’을 성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불이 나와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태움으로써,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백성은 이를 보고 소리치며 엎드렸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9:24).
3. 나답과 아비후. 위 두 장면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명령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수행하였으며, 하나님은 이를 인준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 번째 장면은 처음 두 장면과는 완전히 다른, 무시무시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처음 두 장면에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어조나 어휘는 이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10:1-2). 도대체 이들 두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진노하신 것일까? 이들이 취중에 임무를 수행했던 것일까(참고. 10:9)? “다른 불”이란 과연 어떤 불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같은 질문들은 본질을 흐리게 할 뿐이다. 그 원인이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두 사람의 행동은 ‘모세’나 ‘아론’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수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셨다(10:3).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며(10:11), 따라서 매사에 신중하고 철저해야 하는 각별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5.3. 제 3부: 정결과 부정에 대한 규례
제사장의 의무 중의 하나는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이다(참고. 10:10). 따라서 제 3부에서는 정결함과 부정함의 차이를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아래 도표 참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 속죄일과 같은 날에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16장).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속되는 명령,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제시된 규례들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룩에 관한 원리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현대 독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예컨대, 어째서 독수리나 도마뱀이나 곰팡이나 여인의 월경이 부정한 것으로 분류되는데, 염소나 메뚜기나 대머리는 괜찮은 것일까? 제 3부에서는 이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분류 방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는 시도가 무수히도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 설명을 일일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다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일련의 결론 정도만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결(淨潔)이란 위생학(衛生學)적인 관점에서 청결(淸潔)과는 거리가 멀다. <레위기>에서의 정결은 종교적인 차원의 것으로서,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상태를 뜻한다. 부정한 사람이나 사물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오직 정결한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존재이시므로, 누구든지 정결하지 못한 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왔을 때는 멸망을 면할 수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든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나아올 때,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이다(출 19:21; 28:35; 30:21-21; 레 8:35; 10:7; 16:2, 13). 한 마디로 “정결”이란 “예배에 합당함”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1. 부정한 음식. 이처럼 정결의 의미를 “예배에 합당함”으로 이해한다면, 11장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 짓는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희생 제물로 드릴 짐승은 집에서 기른 가축 중에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정결하지만 야생 동물은 제물로 드릴 수는 없다(예. 사슴). 그 이유를 ‘다윗’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삼하 24:24). 정결한 야생 동물을 제물로 드릴 수 없는 이유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들은 양이나 염소나 소나 새들이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모두 초식성 동물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정결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따라서 식용으로 삼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따라서 같은 새라도 육식(肉食)을 하는 일체의 다른 새들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제물은 물론 먹는 것도 삼갔다(레 11:13-19). 정결한 짐승에 대한 정의(定議)는 보다 엄격하다: 이는 양이나 소처럼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낙타나 돼지나 토끼 등은 이 같은 정의의 절반만 만족시키고 있으므로, 정결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1:2-8). 수중(水中) 동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것들이 정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물고기를 집에서 기르지는 않았으므로, 물고기는 제물에서 당연히 제외시켰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음식과 관련해서 일련의 규율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비단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가령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뱀이나 개구리나 달팽이 같은 것들은 먹지 않지만, 일부 국가들에서는 이들을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이스라엘에 보여주는 음식에 대한 규례들은 단순히 관습이나 호ㆍ불호(好ㆍ不好)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구약>은 이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면, 그들 역시 먹는 음식에서도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기를 먹는 매 식사는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가 된다.
둘째, 이들 음식 규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타락 이전에 ‘에덴’ 동산에서의 채식(菜食) 위주의 이상(理想)을 상기시켜준다. 채식이라는 대 원칙은 대홍수 이후에는 고기를 피 채로 먹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육식을 허용함으로써 다소 완화되었다(창 9:3-4). 음식에 관한 <레위기>의 규율은 먹을 수 있는 짐승의 종류에 제한을 두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자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는 짐승들은 주로 육식을 하는데, 이들 육식 동물은 피에 관한 대 원칙을 알 리가 없을 것인 즉, 당연히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정결과 부정의 차이를 구분하는 성경적 원칙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인 것이다. 가장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죽음으로 야기되는 것이며, 따라서 정결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그 시체는 각별히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레 11:24-40). 한편 하나님은 완벽하고 풍성한 생명의 원천으로서, 죽음을 시사하는 그 어떤 것도 가까이 가져올 수 없다. <레위기> 12-15장의 제반 규례들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가 바로 이 생명과 죽음에 관한 대원칙이다.
2. 출산으로 인한 부정. 피를 생명의 원천이라 할 때, 어떤 형태의 피 흘림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산이나 월경 시에 흘리는 피도 예외일 수 없다. 여인들은 이 기간 동안에는 성소에 출입할 수 없다(12:4). 그러나 이 기간이 끝나면,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과 성소가 깨끗하게 되었음을 확인시킨다.
3. 부정한 피부병.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피부병은 전통적으로 나병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구약> 시대 근동 지역에 나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오늘날 이 병의 정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록 이 병이 습진과 같은 피부병이라 해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함은 물론이다. 피부가 벗겨진 맨 살은 완벽하고도 온전한 생명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는 옷이나 식기 등에 피는 곰팡이 등도 죽음을 연상하는 것들로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제 13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해서 백성들은 제사장을 불러 정결한지 또는 부정한 지에 대한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제사장은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사가 아니라 검열관이기 때문이다.
4. 정결 의식. 피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회중으로부터 격리되어 마치 이방인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 다시 회중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까다로운 의식을 거쳐야했다. 이 의식은 제사장이 병을 고쳐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자가 충분히 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는 만족할 만 한 판단을 받게 되면, 그 자신이 일련의 제사 의식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의식은 제사장을 안수하는 경우처럼 한 주간 지속되었다. 정결 의식에 포함되는 일련의 행위는 예컨대, 부정한 것을 날려 보낸다는 상징으로 새 한 마리를 날려 보내고, 일련의 희생 제사를 수행하고, 이 과정에서 짐승의 피를 그 사람 위에 바르는 절차 등이 있다. 이 모든 절차를 거친 후에 비로소 그는 이스라엘의 회중으로 받아들여진다.
5. 유출병. 유출병은 일종의 성병(性病)으로서, 임질이나 매독 등으로 인하여 성기(性器)로부터 액체나 고름 등이 유출되는 병을 이른다. 이 병은 피부병보다는 덜 심각하지만 어쨌든 부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병 때문에 사람이 부정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기로부터 액체나 피가 유출된다는 것은 온전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상징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는 없다. 피부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이 완치된 후에야 회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이때에도 일련의 절차를 거쳐야 함은 당연하다.
6. 대 속죄일. 이스라엘의 달력 중에서 가장 거룩한 날이 바로 대 속죄일이다. 이날은 종교 달력으로 7월 10일인데 요즘 달력으로는 10월 초가 된다. 이 날을 제정한 근본 목적은 죄와 부정함으로부터 오염된 성막을 청결하게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처럼, 죄와 부정함은 마치 사악한 증기처럼 거룩한 제단이나 성소 등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성막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희생 제물의 피로 묻히거나 또는 뿌려서 정결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실 수가 없다(16:16, 19). 결국 이스라엘은 성막을 오염시킴으로써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15:31), 이는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에서 이미 본 바 있다(16:1; 참고. 10:1-3). 이와 같은 대참사를 피하기 위하여 대 속죄일의 행사가 필요한 것이다.
대 속죄일의 행사에서 주목을 끄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속죄제인데, 대 제사장은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이 제사를 드려야 한다. 속죄제와 관련한 일상적인 절차는 제 4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예컨대, 짐승의 피로써 성막 뜰에 있는 제단이나 성소의 향단에 바르는 절차가 포함된다. 그러나 대 속죄일에는 대 제사장이 그 피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그 안에서 세 번 뿌리는 절차가 추가된다(16:11-19). 이렇게 함으로써, 오염된 성막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지성소는 성막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로서,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으며, 따라서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지성소 안에 향을 피우고 특별한 복장을 한 후에 들어가야 한다(16:2-4, 12-13).
두 번째 요소는 소위 희생양이다. 이 경우 양 두 마리가 필요한데, 한 마리는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일반적인 속죄제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마리는 소위 희생양으로 부르는 것으로서, 제사장이 이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여 진중 밖 광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이다. 즉 희생양은 백성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떠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영영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금식이다. 이날은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안식일로서, 이날 온 백성은 금식을 하고,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16:29-31).
7. 요약. 지금까지 소개한 <레위기>의 정결 법에 따르면, <레위기>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세계관의 양상을 띠고 있는 듯하다. 즉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시간과 공간마저)은 정결과 부정의 두 잣대로 구분하고 있으며, 또한 정결에서 부정에 이르는 스펙트럼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아래 도표 참고):
5.4. 제 4부: 거룩의 실천
<레위기>의 나머지 열한 장은 그 내용에 있어 앞선 내용들과는 다소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다룬 내용들이 주로 제사와 정결법이라는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제 4부의 내용은 보다 넓은 주제들, 즉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살인; 간음; 근친상간; 등.
현대독자들에게는 윤리․도덕적 주제들과 종교적 주제들은 상호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으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국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거룩의 문제와 별도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한 개인이나 성소는 물론 그 땅 전체를 오염시키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하였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그 땅이 범죄자를 토해내거나(18:18; 20:22) 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공동체로부터 끊어내 버리는 것이었다(17:9, 14; 20:5). 범법자가 갑자기 또는 원인도 알 수 없이 죽어버리는 경우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부정(不淨)한 것에도 경중(輕重)의 정도에 따라 일종의 스펙트럼이 있었는데, 자연발생적인 피부병과 같은 비교적 가벼운 것에서부터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은 심각한 것들이 있다(정결의 정도에 대한 위 도표와 그림 참고).
그렇다면 11-16장에서 다루고 있는 종교적인 정결에 관한 문제와 17장에서 다루고 있는 윤리ㆍ도덕적인 부정(不淨)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생명이나 죽음과 상호 얼마만큼의 연관성을 갖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 쪽 극단에 죽음이 있고, 다른 한 쪽 끝에는 생명으로 가득 찬 하나님이 있다(다시 한 번 위 도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표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제사장은 성소에서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건강한 자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흠이 있는 짐승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할 수 없다(21:17-23; 22:19-25).
또한 살인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공격이나 파괴 행위로서, 당연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도 생명의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대체하는 행위로서, 부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성(性)은 자손 증식을 위한 하나님의 주신 능력으로서, 잘못 사용할 경우 심각한 오염을 가져오는 부정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 제 3부와 제 4부 사이에는 이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큰 간극(間隙)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종교적인 영역과 윤리ㆍ도덕의 영역에서 정결과 부정의 척도가 결국 생명과 죽음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했으므로, 이 두 영역의 관계를 아래 도표로써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제사 장소 및 제물의 피. 성막 밖에서의 제사는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칫 이 제사가 우상 숭배 즉 염소나 귀신 등을 위한 제사로 둔갑할 위험성이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17:7). 이곳에서는 또한 짐승을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참고. 창 9:3-4; 레 11장). 피를 먹는 행위는 생명에 대한 경시로서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2. 부적절한 성 행위. 이는 부정한 행위로서 ‘가나안’ 땅이 그 원주민을 토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면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18:24-28).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적절한 성 행위란 주로 근친상간이다(18:6-17). 하지만 우상 숭배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교합 행위도 모두 저주의 대상이다(18:20-23).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위반하는 반생명적인 행위로서, 그 땅과 성막과 공동체를 오염시킨다.
3.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구절은 <레위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로 꼽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19장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도덕적 권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도덕적 권고들이 정결이나 거룩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가장 핵심 요체로서 인간이 이를 따라야 할 모범이기도 하다: “거룩하라 이는 내가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완벽한 생명 그 자체이시므로, 인간의 행동도 이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반대의 모든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일련의 목록들이 이 질문과 관련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처벌. 1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련의 죄는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는 심각한 것들이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아주 가혹한 형별들은 이 같은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다. 설령 범죄 행위가 동료 인간의 눈길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0:5-6, 18-21).
5. 제사장의 거룩.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레위기>의 기본 정신이다. 부정한 자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제사장과 같은 거룩한 자는 부정한 대상, 특별히 시체를 멀리해야 한다. 당연히 제사장과 같은 지극히 거룩한 자는 자신의 부모 장례식에도 참석해서는 안 된다(21:11). 일반 제사장의 경우는 대제사장에 비해 그 금기 정도가 다소 낮기는 했으나, 여전히 기본 정신 즉 거룩한 백성은 부정한 것들을 피해야 한다는 대 원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했다(21:1-9).
6.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 거룩한 백성, 예컨대,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 만이 거룩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 즉 제사로 바쳐진 짐승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누가 제사장으로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이들 문제를 22장에서 다루고 있다. 다시 한 번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바, 즉 구별되고 정결하며 거룩함의 원칙이 그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유출 병이나 피부병 또는 사체(死體)와의 접촉 등으로 부정하게 되었을 때,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22:1-9). 일반 백성의 경우는 그가 제사장의 노예로 있거나, 과부로 지내는 제사장의 딸의 경우처럼 제사장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22:10-16). 고기는 제물로 바쳐진 것에 한해서 먹을 수 있다. 이 장은 따라서 허용되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짐승에 대한 규례로 마무리하고 있다(22:17-30).
7. 기념일과 축제. 큰 가족의 기념일 외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경우는 국가적인 축제나 기념일이 있을 경우로서, 이때는 모든 남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적절한 희생 제사를 드린다. 이 장에서의 초점은 일반 백성이 이 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있다(도표 참고).
8. 성막 안의 빵. 황금 촛대와 그 맞은편에 놓인 테이블을 포함한 성막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출애굽기>(25:23-40)에서 그림으로 보여준 바 있다. 이 테이블 위에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조각의 빵이 있다. 그리고 황금 촛대는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빵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왜 이곳에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소출이나 축제와 연관 있는 23장에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이스라엘 여인과 이집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한 아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건에 관한 에피소드를 왜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지도 분명하지가 않다(24:1-9).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레위기>은 무슨 규례집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의 일대기라는 점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참고. 8-10장). 마지막으로 “동태복수법”(24:17-22)에 대해서는 제 4장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9. 거룩한 해. 거룩한 “날”과 거룩한 “주일”에 대해서 다룬 다음(23장), 이어서 거룩한 “해”에 대한 언급이 뒤따르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안식년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출 23:10-11). 안식년의 정신은 가난한 자나 야생 짐승들을 위하여 농경지를 휴경(休耕)하는 것이다 <레위기> 25장에서는 이 안식년의 정신을 보다 폭넓게 다루고 있다. 즉 매 칠년 마다 안식년 외에, 매 50년마다 희년(禧年)을 제정하였다. 희년에 땅은 또 다른 방식으로 휴경을 맞이하게 되는 바, 이 때 땅은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빚으로 남의 노예가 된 사람은 자유인이 되었다. 희년의 정신은 어느 누구도 영원한 노예로 남아있을 수 없으며, 또한 땅이나 재산이 소수 특정인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은 희년을 기념함으로써, 자신들이 한때 ‘이집트’의 노예였으나 하나님께서 해방시켜주셨음을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이다(25:25).
10. 축복과 저주. 고대의 조약문이나 법조문은 대개 일련의 축복과 저주로 마무리하고 있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도 이와 같은 패턴을 따르고 있다. 축복의 내용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미래에 무엇을 가장 고대했는지 알 수가 있다: 풍년; 적의 공격으로부터 승리; 하나님의 임재(26:3-13). 그리고 저주 속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질병; 기근; 전쟁에서의 패배; 그 땅으로부터 추방(26:14-39). 아닌 게 아니라,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그 땅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그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26:43). 이처럼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내용으로 25장과 26장이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 서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위기나 환난에 빠졌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나중에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보답을 해드리겠다는 맹세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서원의 형태는 각양각색이었던데, 자신을 드리거나, 자신의 자녀들이거나, 하나님을 섬기겠다거나, 또는 희생 제사를 드리겠다는 등이다(예. 창 28:20-22; 삿 11:30-31; 삼상 1:11). 이곳에서 다루는 내용은 서원을 바꿀 경우에 관한 지침과 그 대가에 관한 것이다.
<레위기>의 역사
<레위기>에 관한 역사적 질문은 <오경> 전체의 역사적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저작이나 편집 및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것들이다. <오경>에 관한 역사비평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 책의 저저와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오경>의 역사비평적 연구에 대해서는 본 저서의 제 1부 <총론>에서 다룬 바 있다.
저자와 저작. <레위기>의 기록 연대와 저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모세’ 저작 설; (2) 후기 편집 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이유로 후자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 <레위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배의 규례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의 예배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 둘째, ‘모세’ 시대라고 가정할 때, 희생 제물은 이스라엘이 사막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레위기>는 양이나 염소 등의 가축, 즉 정착 생활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짐승들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레위기>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각종 규례들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이 책의 배경(처음 독자의 삶의 자리)은 광야가 아니라, 정착 왕국 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레위기>의 신학
이 책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즉 어떻게 그 관계를 맺으며, 그리고 어떻게 그 관계를 유지시킬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다섯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1) 거룩(하나님의 초월성); (2) 임재(하나님의 내재성); (3) 언약; (4) 희생제사; (5) <레위기>와 <신약>.
1. 거룩 (Holiness; Transcendence)
<레위기>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어는 “거룩”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9:2). 하나님과 그분에게 속한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것은 결국 그렇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레위기>는 전 우주에 걸쳐 “성과 속(聖과 俗”)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 하겠다.
거룩의 의미.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구별되어 있음”( 카도쉬)을 뜻하는데, 특히 종교적이고도 제의적인 의미에서의 구별을 뜻한다: 성소; 성막; 제기; 땅; 등. 따라서 어원 상 윤리ㆍ도덕적인 요소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참고로 <성경>은 ‘가나안’ ‘바알’ 종교의 성전 창기(娼妓)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데쉼”(제의적인 남창)(왕상 15:21); “크데쇼트”(제의적인 창녀)(호 4:1).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성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즉 “거룩”은 그분의 이름인 것이다: “거룩이라는 이름의 야훼”(참고.20:3; 22:32). 따라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근거도 그분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이 이름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transcendent being)가 되. “거룩”이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본성이라면,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신비이자 “능력”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드러내는 능력”인 것이다. 이 거룩함이 외부로 드러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삿 4:4-5).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미가 1:3-4)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실 때, 항상 구름과 흑암으로 스스로를 둘러싸신다(시 97:2-3).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타죽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계속 우길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또한 “질투”하시는 분이다(신 4:24‘ 겔 36장). 그분의 투기심은 자신의 독특함에 대한 당연한 요구이며, <십계명>의 제 1계명이 이에 대한 당연한 요구다(출 20:3). 즉 그분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기를 바라며, 다른 어떠한 신들도 그와 동등한 대우를 받거나, 심지어 대우의 일부라도 그와 나누는 것조차 싫어하신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행태는 과연 온당한 것이지 되돌아보게 한다. 예컨대, 신부와 승려가 상호 교환방문하여 설교나 설법을 한다거나, 수녀와 여승들이 함께 찬송가와 찬불가를 부른다든지, 석가탄신일과 부활절에 서로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의 모습이 그것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식이 이 길 밖에는 없는지, 행여나 이 같은 모습이 이 책에서 경고하고 있는 혼합주의나 신성모독으로서, 저주나 멸망의 가증스러운 행위는 아닌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24:10-23).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장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당연히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이나 장소 역시 구별된다. 이러한 구별에는 물론 그와 가까운 정도에 따라 거룩함의 정도 또한 달랐다(도표 및 그림).
거룩한 짐승. 짐승 역시 사람이나, 장소처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이분법적인 구분이 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 중에서 구별하여 제사에 드렸다(1:2; 22:19-29). 이스라엘은 이들 중에서 일부를 먹을 수 있었다. 육식을 하거나, 시체를 먹는 짐승들은 아주 더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구별되었다.
지금까지 다룬 정결에 관한 규례와 대상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결 기간. 거룩한 ‘야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부정(不淨)한 자는 일정 기간 정결 기간을 거쳐야 했는데, 부정의 정도에 따라 정결의 기간은 달랐다:
(1) 하루: 죽은 시체와의 접촉; 정상적인 성행위(11:27-28, 31; 15:16-18).
(2) 40일: 남아 출산 여인
(3) 80일: 여아 출산 여인
(4) 무제한(完治 時까지): 성병; 피부병, 등등.
이 기간 후에 해당자는 일련의 정결 예식, 즉 “성화”(聖化)의 과정을 거친 후에,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편입되었다(참고. 27:14-27). 이스라엘이 이처럼 거룩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접 국가들이 행하는 일체의 우상숭배나, 부도덕한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켜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의 종교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룩한 예배. 이스라엘의 예배 형식이나 내용 또한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즉 (1) 모든 형태의 마술, 주문, 점등을 금지해야 하며(19:3, 26; 20:6, 27), (2) ‘몰렉’ 제사 등과 같은 가증스러운 행위를 삼가야 한다.
거룩한 신체. 육체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한 규례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석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에 관한 것으로서, 대표적인 정결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1) 시체는 불결한 것으로(11:24-28, 39-40)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
(2) 제사장은 장례식 참석을 금한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척 외는 죽은 자와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21:1-4). 대제사장은 그나마도 금지한다(21:10-12).
거룩과 하나님의 율법.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은 윤리ㆍ도덕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종교적인 영역에 속한 구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윤리ㆍ도덕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거룩한 삶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야훼라” 내지는 “나는 너희 하나님 야훼라”언 언급을 빠뜨리지 않기 때문이다(참고. 18-22장). <레위기>에서 드러나는 율법의 두 정신은 “공의”(예. 24:20)와 “사랑”(참고. 19:18)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 즉, 결국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념이라 할 것이다.
2. 임재 (Presence; Immanence)
본질적 두 속성-초월성과 내재성. <레위기>의 두 번째 주제는 <출애굽>의 핵심적인 주제인 ‘임마뉴엘’(immanuel), 즉 하나님의 “임재”이다. 이는 장막(帳幕) 건설과 관련한 하나님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26:11상).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만나겠다고 말씀하셨다(1:1). 장막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증명한다(9:23; 16:2).
지성소. 성막 중에서도 특별히 지성소(至聖所)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당연히 아무나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를 어길 경우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제사장들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참고. 10:1-7). 다만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 ‘아론’만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지성소에 들기 전에 향(香)을 피워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16:12-13).
희생제사와 기념일. 희생 제사를 포함한 모든 행위는 “야훼 앞에서” 행해야만 했다. 또한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먹을 때도 항상 거룩한 장소(예: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야 했다.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축일(祝日)이나 기타 기념일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특별히 구별된 날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에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막으로 나아와야 한다(23장).
율법의 낭독. 대제사장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백성은 이를 듣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3. 언약 (תירב; Berith)
어원. 어원학적인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 먹다(barah): 계약의 두 당사자가 계약 체결 시에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계약을 먹다”는 의미에 가장 가까운 예를 <신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찬(聖餐)에서 찾을 수 있다.
(2) 자르다(birit): 이 단어를 사용할 경우, “계약을 자르다”(cut the covenant)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계약을 체결하는 다른 방식을 암시하는 것인데, 한 편으로는 동물을 절단하는 저주를 나타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약에 따르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창 17장).
(3) 묶다(baru): 이 단어의 명사형이 ‘비리투’(biritu)인데, 계약의 “구속” 내지는 “속박”(bond)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정의. 이와 같은 어원론적인 접근을 통해서, ‘팔머 로벗슨’(P. Robertson)은 그의 저서「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계약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는 약정”(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으로 정의하고 있다.
형식. 고대 근동지방에서 군주와 봉신 국가 사이에 맺었던 정치 및 군사적 “종주언약”(從主契約)의 형식과 흡사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총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의미. 언약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의 경우처럼 혈연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수립이므로, 그에 따른 의식(儀式)과 지속적인 교제(交際)가 필수적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편에서 볼 때,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臨齋) 속으로 초청을 받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죄로 오염된 인간은 그대로는 거룩한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제사(祭祀)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거룩을 위한 사전 절차로서, 죄인은 이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한 “대속”(代贖, atonement)을 치르는 제도이다.
내용. “율법”(the law)과 “땅”(the land)은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 율법과 땅의 관계는 因果의 관계로 볼 수 있다(참고. <신명기>; <여호수아>). 즉 이스라엘은 “그 땅” 즉 언약의 땅에서 신정국가(神政國家)로서의 탄생을 맞이하였고, 그 땅에서 교회(즉 공동 운명체)를 이루어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은 은혜이자 축복이다. 동시에 위기(危機)와 저주(咀呪)의 통로일 수도 있다. 즉 율법을 준수하면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고, 이를 어기면 땅이 그들을 버릴 것이다(참고. 레위 26). 이스라엘은 그 땅을 무제한적으로 소유할 수도 없었고, 쉼도 없이 경작해서도 안 된다. 땅도 안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예: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종국이 어떠했는지는 타락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 희생제사: 형식과 내용
위에서 밝힌 바처럼, 언약과 제사는 필수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제사는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제도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제사; (2) 제사장; (3) 성막; (4) 성막 기구들; (5) 절기들(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대 속죄일; 장막절; 안식년; 희년).
4-1. 제사법
일반적인 사항. 일부 예외적인 경우, 즉 이스라엘 모두를 위한 제사(속죄제)나, 가난한 자가 작은 새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을 몰려놓기까지의 의식은 모든 제사가 다 동일하다.
일반 백성. 첫째, 제물을 성막 문 앞으로 가져옴. 제물은 자신이 직접 기른 동물이나 곡식으로서, 바치는 자의 생명을 상징함. 제물의 가치는 극상품이라야 함(흠 없는 수컷, 또는 고운 가루, 최상의 첫 열매). 둘째, 희생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함. 이 때 죄에 대한 고백 여부는 불확실하나, 속죄일의 의식이 죄의 고백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16:15), 죄에 대한 회개와 고백이 분명히 매일의 희생제사의 한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셋째, 희생 제물이 가축일 경우 짐승을 도살하는데,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본인이 직접 이처럼 끔직한 도살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사장. 제사장의 역할은 제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존함(1:7; 6:12, 13)과 동시에, 희생제물을 받아들이는 몫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제사 의식에 대한 교육이나 제의를 집전하는 것이다. 특별히 제의 집전과 관련해서는 본문 6:8-7:38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단락에서 보여주는 제사의 종류나 내용은 각 제사의 순서만 달리하고 있을 뿐, 앞선 단락(1-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참고. 1-5장). 앞 단락에서는 제사의 목적에 따라 순서를 정해놓은 것 같다: (1)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서의 제사(1-3장); (2) “죄의 용서”를 대변하는 제사(4:1-6:7). 그러나 이어지는 단락(6:8-7:38)에서는 각 제사의 빈도(頻度)가 순서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인 듯하다. 번제와 소제가 속죄제와 속건제에 앞서 등장하고 있고, 그리고 선택 사항에 드는 화목제가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른 점은 또 있다. 즉 누구를 위한 제사인가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락(1:1-6:7)은 일반 백성이 제사를 드릴 경우에 관한 것으로, 희생 제물의 종류나 선택 그리고 제사의 절차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단락(6:8-7:38)은 제사장이 관심의 초점이다. 즉 대부분의 지침들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따라야 할 것들이고(예. 6:9, 14, 20, 25), 제사장에게 돌아갈 제물의 몫이 어떤 부위인지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4-2. 제사의 종류
크게는 다섯 가지, 작게는 일곱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각 제사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의미 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각 제사의 절차보다는 의미일 것이며,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 결과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일반 백성을 위한 다섯 가지의 제사는 이 책의 첫 번째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다(참고. 1:1-6:7): (1) 번제; (2) 소제; (3) 화목제; (4) 속죄제; (5) 속건제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1:1-17). 희생 제물을 통째로 제단 위에서 태운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다른 제사의 경우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나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누어 가진다. <레위기>는 제 1장에서 번제에 합당한 짐승의 종류와,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의 역할을 세 단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1:3-9, 10-13, 14-17).
첫째, 희생 제물은 가축 중에서 택해야 하며, 아무 흠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야생 동물이나, 또는 가축 중 흠이 있는 것은 바칠 수가 없다. 둘째,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 위에 안수를 하고, 도살을 하되,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받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을 뜬 부위들을 제단 위에 올려 태운다. 셋째, 일부 <번역본>(NIV, NRSV)에서 다소 모호하지만, 번제에서 제사장과 제사 드리는 자의 역할 구분이 분명하다. 즉 제사장만이 짐승의 피(생명을 상징하는 거룩한 대상)를 다룰 수 있고, 제단에 접근할 수 있다.
번제의 핵심은 짐승을 죽이고, 그 전부를 태우는데 있다. 이는 하나님께 그 짐승을 통째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바치는 자를 위한 대속이 되기 때문이다(참고. 1:3, 4). 번제물 머리 위에 손을 얹는 행위도 역시 같은 의미이다. 즉 그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짐승은 나를 대신하고 있다.” 번제에서 희생제물의 효력이나 기능을 예시(例示)해주는 두 대표적인 사례를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참고. 창 9, 22장).
소제(素祭; The cereal offering)(2:1-16). 이 제사는 가난한 자에게 번제 대신에 허용된 제사로서 곡식을 제물로 드릴 수 있으나, 주로 번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였다. 이 경우 역시 번제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번제의 경우와 다른 점은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제물은 제사장의 수입원으로 기능하였으며, 곡식은 날 것이든 또는 구운 빵이든 모두 가능하였다.
화목제(和睦祭; The peace offering)(3:1-17). 이 제사는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또 다른 형태의 제사로서, 개인적인 맹세(또는 서원)나 또는 축하할 만 한 일이 있을 경우 드렸다. 누구나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때,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대개 다음과 같은 서원(誓願)을 하기 마련이다: “오, 주님. 만일 저에게 ...을 해 주신다면, 저는 ...을 해드리겠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참고. 삼상 1:11).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했으며, 이 때 가족이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을 때, 처음에 드리던 것보다 더 풍성한 제물을 드렸다(삼상 1:24). 이 같은 제사가 바로 화목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화목제는 제사 드리는 자가 제물인 고기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다. 짐승의 일부는 태우고, 나머지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었으며,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사 드리는 자와 그의 가족과 때로 그의 친구들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레 3:3-4; 7:31-35). 이 제사 역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짐승을 태우는 주된 목적은 대속이 아니라 축하이다. 따라서 화목제는 즐거움의 자리이다.
속죄제(贖罪祭; The sin offering)(4:1-5:13).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가 바로 이 제사다. 여러 경우에 속죄제를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핵심 관심사는 비고의적인(非故意的)인 범죄나 또는 태만 죄(怠慢罪)에 대한 속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범죄와는 상관없는 경우도 있는데, 예컨대, 출산이나, 피부병이 발생했을 때나, 심지어 제사장 직을 위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제사는 절차 상 번제나 화목제와 근본적으로 다른데, 짐승의 피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피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이는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를 뿌리는 행위는 그 피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다른 모든 제사에서는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림으로써, 이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속죄제의 경우 죄인의 사회적 신분(예: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일반 평민)에 따라 피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장소가 다르다. 예컨대, (1) 피의 일부를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거나, (2) 성소 안 향단 뿔들에 바르거나, (3) 번제단 밑에 쏟거나, 또는 (4) 번제단 뿔에 바르거나 등이 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는 지성소 안 언약궤 위에 뿌리기도 했다.
이처럼 피를 뿌리거나 바르는 행위가 의도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겠다. 첫째, 정결이다. 즉 죄로 오염된 제단이나 언약궤를 청결하게 하려함이다. <레위기>에서 죄란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서 성막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임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없는 성막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둘째, 피는 정결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즉 죄의 용서이다. 이 제사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급이 이를 증거한다: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4:26, 31, 35; 5:10, 13). 하지만 제단에 피를 뿌리는 행위가 어떻게 죄 사함의 효력을 가져오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추측컨대, 제단이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인 제사장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속건제(贖愆祭; The guilt offering)(5:14-6:7).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가 바로 이 제사다. 아마 그 빈도가 가장 낮았거나, 또는 제사장의 위임과 관련해서 적절한 용도를 찾기 어려워 다른 제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제사와 달리 짐승은 “숫양”(ram)만을 허용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보상”(reparation)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할 경우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저지른 신성모독의 행동이나, 서원을 행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거짓 맹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사람은 피부병으로부터 회복한 사람(14:12), 또는 ‘나실’인의 맹세를 어긴 사람(민 6:9) 등이 될 것이다.
요약. 지금까지 설명한 다섯 가지 제사의 특징과 차이들을 정리해 보면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4-3. 제사의 의미(목적)
모든 제사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예물(선물)(gift); (2) 속량(대속)(expiation); (3) 하나님과의 교제(화목)(communion).
예물(선물). 제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의식으로서, 제물은 그분에게 드리는 선물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제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ןברק)가 “바침”(presentation) 또는 “바쳐진 물건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예컨대, 본문은 “번제”가 “야훼께 드리는 화제(火祭)” 또는 “야훼께 드리는 선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참고. 1:9).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에게 나아가는 백성은 항상 예물을 준비하고 나아가야 했던 것이고, 왕이 신에게 나아갈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제” 역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선물”(창 43:11) 내지는 “조공”(왕상 5:1)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선물은 당연히 일정 가치를 지니는 것이 마땅하며, 특히 드리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정한 대가를 치렀다는 의미가 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이스라엘이 그들을 사기 위하여 지불했던 금액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속량(대속). 제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이 기능이다. 즉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알게 모르게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처벌을 면제받기 위하여 대속의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대속 제물로 가축용 짐승을 사용했다. 이 같은 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대속의 상징은 희생제물(양이나 소 등)의 머리 위에 범법자가 손을 얹는 행위가 그것이다.
대속과 관련하여 다양한 제사의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범죄에도 경중(輕重)이 있음을 알려준다(민 15:27-31). 예컨대, 율법은 고의적인 범죄와 우발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때로는 죄가 너무 중하여 제사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또는 죽음의 형벌을 부과했다.
대속의 또 다른 측면은 범법자의 신분에 따라 처벌 정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공동체 내에서의 영적 지위나 신분이 높을수록 당연히 처벌의 수위가 높았는데, 이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인 듯하다(참고. 4:1-21). 그러나 정치ㆍ사회적인 신분은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참고. 4:22-35). 제사의 방식도 이러한 지위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제사장이나 지도자의 대속을 위한 제사는 성막 안에서 행했으며(참고. 4:5-7a, 16-18a), 이 경우 희생 제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었던 반면, 일반 회중을 위한 제사는 성막 문 앞에서 행했으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6:19, 22).
교제. 희생제사는 식사이기도 하다. 이는 제사에 짐승과 함께 곡식이나 소금, 기름, 포도주 등을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참고. 7:12-13).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셔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제사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이방제사에서나 보이는 사상으로서, 일견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 그러나 <구약>은 여러 곳에서 제사를 “하나님의 식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레 21:6, 8, 17, 21; 민 28:2; 겔 44:7).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을 주목한다면, 그분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식사로서의 제사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신약>에서 성찬(聖餐)의 의미도 이 같은 교제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5. <레위기>와 신약
<레위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는 “거룩”이다: (1) 거룩한 하나님; (2) 거룩한 사람(제사장); (3) 거룩한 장소(성막); (4) 거룩한 행위(희생제사).
이 주제와 관련해서 <신약>이 말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희생 제사나, 성막이 필요한가? <신약>의 성도 즉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레위기>는 <신약>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히브리서>는 <레위기>에 대한 주해서로 불릴 만큼 <레위기>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진리들을 선포하고 있다.
제사장. <구약>의 인물 중에서 ‘멜기세덱’만큼 신비스러운 인물도 없을 것이다. <창세기>는 그를 ‘살렘’(훗날의 ‘예루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창 14). ‘아브라함’이 동방 네 왕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축복해주며,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다(창 14:17-20). ‘가나안’ 인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알려주지 않지만,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는 <시편>(110편)에서 하나님께서 “내 주”(누군지 분명치 않지만)에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시 110:1, 4).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왕과 제사장 직분은 각기 다른 사람이 맡도록 구분되어있었으나, ‘멜기세덱’은 이 두 직책을 통합해서 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말하는 “내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자, 왕이며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므로 ‘아론’의 제사장 직보다 더 높고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참고. 히 7).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히 3:1-2). 그리고 <레위기>레서 규정하고 있는 대제사장 직분의 기능과 역할이 그분 안에서 더욱 확장되고 확대된다. 그분의 과거 지상(地上) 사역뿐만 아니라, 현재 천상(天上)에서의 사역이 한 예가 될 것이다(히 3-5, 7-10).
그렇다면 교회 즉 <신약>의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제사장이 필요한가?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서열을 잇는 왕이자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막. 성막은 보이지 않으며, 어느 한 곳에 편재해 계실 수 없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체적 장소이다. 오직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 거룩한 장소는 시대를 따라 변천해왔다. 족장 시대의 단순한 한 “제단”에서, ‘모세’에 이르러는 “성막”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으로, 그리고 마침내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 이름 즉 ‘임마누엘’이 의미하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요한복음>은 이를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고 말하고 있다(요 1:14).
이분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성전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 인가?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영원히 대신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참고. 요 16-17). 사도 ‘바울’도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희생제사. 희생제사는 삼중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중 한 기능이 “대속”이다. 희생제사에서 드리는 짐승은 대속 제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양과 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히 10:4). 희생제사는 단지 장차 올 참되고 영원한 제사, 즉 그리스도가 드릴 제사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드릴 제사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 없게 되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희생제물은 그 자신으로서, 그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희생제물이기도 하다(히 9:11-10:18). 모든 인류는 그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언약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롬 3:23-28; 요 6: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성도는 여전히 거룩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다. 희생 제사가 아닌 영적 제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가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이기도 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선언이라 하겠다. 비록 <레위기>의 각종 의식법은 <신약>에서 더 이상 적용되지 않지만(마 15:10-20; 막 7:14-23),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성도로 하여금 이 같은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동기이자 근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2. <레위기>는 어떤 종류의 책인가? 이 책의 문학 양식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이 책에 등장하는 수 없이 많은 규율이나 계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법전”(law code)으로 부르기보다는 “이야기”(narrative)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본문에서 찾을 수 있을까?
3. <레위기>의 구조에 대해서 복습해 보자. 신학적 주제에 따라 크게는 두 부분으로, 작게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4. <레위기>가 <오경> 내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이 책이 다섯 권의 책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보자.
5. <레위기>에 등장하는 모든 제사를 열거해보고, 그 의미와 목적, 그리고 절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모든 제사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삼중적인 의미는 무엇이며, 각 제사의 차이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자.
6. <레위기> 제 1-7장까지 읽고 제사와 관련하여 아래 도표를 완성해 보자(완성된 도표는 교재 내용 중에 있다).
7. <레위기>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신학적 이상은 철저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람은 물론 짐승이나, 심지어 시간이나 절기마저 정결(淨潔)하거나 부정(不淨)한 것으로 구분된다. <레위기>의 핵심 주제인 “거룩”의 정도에 따라 아래 도표를 완성해 보자.
8. 교회, 즉 <신약>의 성도와 다음 각 항목들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1) 제사장; (2) 제단, 성막, 성전; (3) 제사.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81-91.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232-251.
4. Temper Longman III, How to Read Exodu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9.
5. Temper Longman III, Old Testment Essentials:Creation, Conquest, Exile and Retur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4, pp 91-115.
6. Victor P. Hamilton, Handbook on the Pentateuch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pp 231-300.
제 6장: 민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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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영화 <이집트 왕자>(The Prince of Egypt)의 절정이자 압권은 역시 “홍해탈출”이었다. 이 장면은 “When you believe”라는 주제곡으로 절정의 감동을 더해주었는데, 이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당시 미국에서 현존하는 최고 가수라는 칭송을 듣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휘트니 휴스턴’은 안타깝게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이미 타계하였음.
이 노래는 그 해 제 71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 진 바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출애굽> 제 15장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주제곡의 가사는 영화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신학적 주제와도 잘 어울린다 할 수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셋째 달 1일에 언약백성으로서의 필요한 모든 제도와 의식을 갖춘 한 국가로서 태어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행진한다. 여행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이지, 광야(廣野)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그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만일 지름길을 택한다면, ‘시내’ 산에서 “그 땅”까지 가는데 불과 며칠, 그리고 ‘에돔’과 ‘모압’ 길로 간다 해도 보름이 채 걸리지 않을 이 거리를 무려 38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다 이스라엘 제 1 세대는 단 두 사람을 빼고 이 기간 동안 모두 죽어갔다.
왜 이처럼 자유를 향한 탈출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이 났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민수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그 주제가의 제목은 어떤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아마도 “When you do not believe”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제목대로라면 <민수기>는 출애굽을 믿음으로 경험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는 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는 불평과 반역에 관한 이야기이다. 불평과 반역의 대상은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과 ‘모세’이다. 불평과 반역의 무리 중에 소위 지도층에 속한다는 ‘미리암’과 ‘아론’이 있는가 하면(12장), ‘고라’도 있고(16-17장),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도 있으며(13-14장), 그리고 이제 곧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은 이스라엘의 제 2세대조차도 ‘바알-브올’의 우상 숭배에 빠지고 있다(25장).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이고도 대표적인 반역은 출애굽 제 1세대의 반역을 꼽아야 할 것이다(참고. 13장). 이들은 “그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거인(巨人)들이 살고 있다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스스로 메뚜기처럼 위축되어, 두려워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자들이다.
결국 이들은 배역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원하던 바대로 광야에서 죽어갔고(단 두 사람만 빼고),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던 그들의 자녀들이 “그 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의 진행 상황을 관찰해 보면, ‘모세’의 언약은 성취를 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질을 해버린 것이다.
과연 이야기의 요지는 무엇일까? <민수기>에 드러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적어도 이 책만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민수기>의 독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수기>의 문학
1. 제목
그리스 식 이름. <민수기; Numbers>로 알려진 책의 제목은 <칠십인 역>이나 <벌게이트> 번역본에서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책의 제목이 주는 이미지는 그야말로 숫자나 인구조사에 관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산문적 형태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의 관심이나 흥미를 끌만 한 특별한 내용은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의 여러 곳에서 인구조사나 숫자와 관련한 일련의 목록들이 잔뜩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참고. 1; 3:15-31; 7:10-83; 26:5-51; 28-29; 31:32-52). 신학자 ‘웬햄’(G. Wenham)도 숫자로 가득한 이 책에서 무슨 유머나, 마술이나, 제사에 관한 계명 등과 같은 요소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민수기>라는 이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민수기>의 신학에서 이점을 배우게 될 것이다).
히브리 식 이름. 이 책의 ‘히브리’ 식 제목, “광야에서”는 ‘헬라’ 식 제목보다는 더 적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제목 역시 무슨 특별한 정보를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모세의 네 번째 책>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시내’ 산에서 ‘느보’ 산에 이르는 ‘모세’의 마지막 40년의 여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고별 설교를 마친 다음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설교의 내용은 <오경>의 마지막 책, <신명기>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개의 상이한 제목, “광야에서”와 “민수기”는 실은 전혀 상관없는 제목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 양식
<민수기>는 문학적 양식에 있어, “이야기”인가, “일지”(日誌)인가, 인구조사에 관한 보고서인가, 제사나 예배에 관한 율법인가? 이들 질문은 <민수기>의 양식을 판단함에 있어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만큼 이 책 속에 다양한 양식들이 혼재해 있음을 뜻한다. 예컨대, 신학자 ‘밀그롬’(Jacob Milgrom)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양식을 구분해 내고 있다: (1) 이야기(4:1-3); (2) 시(21:17-18); (3) 예언(24:3-9); (4) 승전가(21:27-30); (5) 기도문(12:13); (6) 축도(6:24-26); (7) 풍자시(22:22-35); (8) 외교문서(21:14-19); (9) 민법(27:1-11); (10) 제의법(15:7-21); (11) 신탁(15:32-36); (12) 인구조사 목록(26:1-51); (13) 성전 기록물(7:10-88); (14) 광야에서의 여행 노정(33:1-49).
이처럼 다양한 양식은 현대 독자들에게 양식 구분은 고사하고, 본문을 이해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짧은 본문 속에서 이 양식에서 저 양식으로 옮겨가고 있는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고통을 상상해 보라! 따라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들 다양한 양식들이 각기 그 자체로서 무슨 의미나 목적을 가진다기보다는 “신학 화 된 역사서”로서의 <오경>의 한 부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수기>의 문학 양식을 논할 때, <오경> 내의 다른 책과의 관계에서 다루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양식들은 나름대로의 고립된 문학적 상황을 반영하기 보다는 <오경> 전체의 문학적 틀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밀그롬’이 <민수기> 21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詩)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21장 전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다른 양식을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민법(民法)이나 제의법(祭儀法) 역시 “율법”(律法)이라고 하는 한 양식의 부분으로 보아야 함이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아주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만날 수 있다.
3. 구조
<민수기> 안에는 이처럼 다양한 양식이 혼재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구약> 중에서 가장 구조 분석이 어려운 책으로 꼽힌다. 아마도 이 책만큼 다양하고, 파편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적 양식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어, 책 전체적으로 볼 때 주로 이야기(narrative)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교훈과 율법, 신탁(信託) 등의 장르들이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 마다 나름대로의 다양한 구조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문학 양식에 따른 구분; (2) 연대기적 구분; (3) 지리적 구분; (4) 신학적 구분.
문학양식에 따른 구분. ‘밀그롬’(Jacob Milgrom)은 <민수기>의 대표적인 두 양식인 이야기(N)와 율법(L)에 착안하여 아래와 같은 시적 대조반복의 구조를 제안한 바 있다:
이 같은 구조 분석은 통찰력 넘치는 발견임에 분명하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이야기로서 <민수기>의 진행적인 구성에 대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는 이야기와 계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람’의 시(22-24), ‘헤스본’의 노래(21:27-30), <여호와의 전쟁기>(21:14-18) 등과 같은 다양한 장르들이 얽혀 있어, ‘밀그롬’의 구조 분석은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대기적 구분. <오경>의 전체적인 연대기(年代記)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은 38년 9개월이다. 이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노정을 장소별로 정리해 보면 아래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3) ‘가데스’에서 ‘모압’ 평원까지 6개월(20:14-36:13; 33:38 및 신 1:3).
하지만 이 도표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표의 목록이 반드시 시간 순으로 되어있지 않고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수기>는 1장 1절에서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2년 2월 1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이어지는 9장 1절에서는 이보다 한 달 앞선, “애굽에서 나온 다음 해 정월”(“둘째 해 첫째 달”; 2년 1월)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10장 11절에서는 다시 “둘째 해 둘째 달 스무 날”(2년 2월 20일)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시간표를 되돌리고 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다른 두 날짜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일까?
지리적 구분. 아마도 가장 뚜렷하고도 손쉬운 구조 분석 방식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달하기까지 머문 세 장소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들 세 장소는 다음과 같다(아래 지도 참고):
(1) ‘시내’ 광야(20일)
(2) ‘바란’ 광야(38년)
(3) ‘모압’ 평원(6개월)
이들 세 장소를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여행기와 율법 수여에 관한 내용이 반복 등장하는 패턴을 볼 수 있다:
신학적 구분. 더욱 간단한 구조 분석 방식은 ‘올손’(Olson)이 제시한 바처럼, 책 전체를 전반과 후반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책의 전반부(1-25장)는 광야에서 모두 죽어간 출애굽 제 1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후반부(26-36장)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제 2세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같은 구분 방식을 굳이 신학적 구분이라 부르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과 후반은 내용적으로 시적 유사병행의 패턴을 보여주면서, 이를 통해서 책 전체의 신학적 메시지를 이끌어내기에 용이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도표 참고):
4. 내용
<민수기>의 내용 분석은 편의상 지리적 구분에 따라,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1) ‘시내’ 산; (2) ‘가데스-바네아’; (3) ‘모압’.
4.1. 제 1부: ‘시내’광야
제 1부는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시내’ 광야에서의 준비 과정과(1:1-10:10), (2) ‘시내’에서 ‘가데스’ 평야에 이르는 여정이 그것이다(10:11-12:16)(아래 그림). 이 단락에서 소요된 기간은 20일이다.
(1) 준비
첫 번째 인구조사(1:1-46). 책의 이름이 <민수기; Numbers>가 된 것도 두 번에 걸친 인구조사(1장과 26장) 때문이다. 이 두 번의 인구조사가 표면적으로는 유사하게 보이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곳에서 실시하는 첫 번째 인구조사(1:1-46)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조사의 대상도 전투 가능한 장정, 즉 나이 20세 이상의 남성의 숫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요단’ 동편에서의 승리로 ‘가나안’ 입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상황에서(21장 참고), 두 번째 행하는 인구조사는 그 땅을 열두 지파에게 나누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레위족의 임무(1:47-4:49). ‘레위’ 족속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제의와 관련한 책임을 맡았으며, 이들 중 한 지파가 제사장 직분을 맡았다. 나머지 ‘레위’ 족속이 수행한 기능은 이중적이었다: 한 편으로는 종교적 경찰의 기능으로서 자격이 없는 일반인이 성막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스라엘이 행군 시에 성막을 조립하고 분해하고 운반하는 일을 담당했다(참고. 1:47-4:49). 그 일은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막이 부정한 세상이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막이 소위 부정을 탈 때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어김없이 드러났으며, 그 일에 관여된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런 점에서 ‘레위’ 인들은 둘 사이를 가로막는 일종의 완충지 내지는 칸막이에 해당한다 하겠다(그림 참고).
제사장은 성막의 동쪽 끝, 즉 성막 입구에 포진해 있다가, 이스라엘이 행군 시에는 ‘레위’ 족속이 성막의 각 기구나 비품들을 분해하여 진영의 한 가운데서 나머지 열 한 지파의 보호 하에 행군을 하게 된다(그림 참고).
거룩한 성막(5:1-6:27).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레위’ 지파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아무나 성막 주변에 가까이 못하게 하여 성막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일이다(1:51; 3:10). <레위기>에서 보듯이, 거룩과 부정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민수기>의 이어지는 두 장에서 다루는 문제가 바로 거룩과 정결함에 관한 것이다(참고. 5:1-6:27).
무엇보다도 일체의 부정(不淨)한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사람이 어떻게 부정하게 되는 지에 관해서는 <레위기> 12-15장 사이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부정한 자는 정결하다는 인정을 받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진(陳) 밖에서 별도의 장막에 거주해야 한다(5:1-4). 국가적으로 겪을 수 있는 부정함은 이웃에 끼치는 재산상의 손해와 관련된 분규가 있다(5:5-10). 간음은 살인이나 우상숭배에 버금가는 심각한 죄악으로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다. 간음의 의심을 받은 자는 일정한 의식을 거친 후에야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5:11-31).
주검, 특히 사람의 죽음 또한 심각하게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에 관한 문제는 제 6장에서 다루고 있다. “나실인”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반 백성 중에서는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술이나 포도주를 금하며, 머리를 깍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나실인”은 ‘삼손’을 들 수 있다: 삿 13-16). “나실인”이 고의든 부지불식간이든 자신의 맹세를 어겼을 경우 부정하게 되었으며, 정결을 회복하기 위한 일련의 의식을 거쳐야 했다(참고. 6:6-12).
결국 <민수기> 5-6장은 이스라엘을 부정에 빠뜨릴 수 있는 예상되는 모든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조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정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실 수 없으며, 이스라엘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그 땅에 대한 약속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얼마나 심각하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6장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제사장의 축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봉헌(7:1-8:26). 거룩과 정결에 관한 이야기는 제 7장에서 봉헌(奉獻)에 관한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성막과 성막 기구들과 그리고 사람(제사장들)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곳에서 다루는 내용은 한 달 전에 성막을 처음 세울 때 있었던 일련의 이야기들을 회고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 다루는 내용은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여타 지파들이 ‘레위’ 지파에게 어떻게 성막을 이동시킬 수레를 마련해 줄 것이며, 제사에 필요한 짐승이나 기구들을 어떻게 드릴 것인지 등이다. 각 지파는 정확하게 같은 분량을 드렸으며, 이 사실은 각 지파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고도 연합 된 책임을 짐을 의미한다.
이어서 제 8장에서는 ‘레위’ 지파의 봉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8:5-26). 이 부분은 제사장의 봉헌에 관한 내용보다는 훨씬 짧고 간단하다(참고. 레 8-9). 이 단락 전체를 통해서 ‘모세’의 역할은 계속 강조되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요, 중보자이기도 하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명령하신 내용을 하나도 어김없이 실행하고 있다.
준비 완료(9:1-10:10). 이어지는 두 장(9-10:11)에서도 이와 같은 기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지침을 온전히 다 수해하였다. 이번에는 유월절 축제를 기념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이번에 기념하는 유월절은 그들이 이집트를 떠난 이후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이 축제는 앞으로 매년 지켜질 것인데, 그 때마다 과거 출애굽 당시를 기념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유월절을 기념하며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시내’ 산이나 광야가 아니라 약속의 그 땅, ‘가나안’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유월절을 기념하는 일이 지고로 중요하여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죽음이 임할 수도 있지만(9:13), 주검이 초래할 이스라엘 진영 내의 부정(不淨)함은 예배나 제사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부정한 자는 이 기념 축제를 한 달 정도 유예할 수밖에 없었다(9:1-14). 이와 같은 조치는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선의(善意)를 보장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밤낮으로 성막 주위를 감싸고 있는 불기둥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9:15-23).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은 나팔을 만들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행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10:1-10).
(2) 가데스를 향하여
희망찬 출발(10:11-36). ‘시내’를 떠나 ‘가데스’를 향한 여정은 밝고 희망차게 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난 지 약 일 년 후,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한다. 여정을 위한 모든 준비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대로였다(2-4장). 행군 내내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진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10:33-36). 그야말로 모든 징조가 좋았다.
세 번의 불평(11:1-12:16). 그러나 처음의 희망 찬 징조는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모세’의 리더십과 여행의 어려움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 때문이다. 화자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를 보여주고 있다(11:1-12:16). 가장 짧지만 맨 먼저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세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공통적인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백성의 원성(11:1); (2)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11:1); (3) ‘모세’의 중재와 중보(11:2); (4)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이름(11:3).
이스라엘의 불평은 <오경>에서 그리고 있는 여행 때마나 드러나는 고정 메뉴와도 같다. 예컨대,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 번의 불평 에피소드는 <출애굽기>에서 홍해에서 ‘시내’산까지의 여행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과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음을 다음 표를 통해서 비교 확인해 볼 수 있다(도표).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두 병행되는 기사를 통해서 보듯이, 상황은 갈수록 점차 악화되고 있다. <출애굽>에서 ‘미리암’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출 15:20-21), <민수기>에서 그녀는 ‘모세’를 향한 모반(謀叛)에 앞장을 서고 있다(민 12).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말렉’ 족속은 패하지만, 이곳에서 정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민 14). 보다 특기할 만 한 차이는 불평하는 백성을 대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출애굽>에서는 하나님은 음식과 마실 물에 대하여 불평하는 백성에 대하여 노하시긴 하지만 이들을 처벌하지는 않으신다. 오히려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며, 이에 대한 어떤 후유증도 없다(출 16). 그러나 <민수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긴 하지만,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동시에 내리기도 하신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민 11:33). 마찬가지로 물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에게 ‘모세’가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여 공급해주지만, <출애굽>에서는 이 일로 인한 후유증이 ‘모세’에게 일어나지 않았지만(출 17), <신명기>에서는 ‘모세’는 이 일로 인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된다(민 20). 왜 이처럼 동일한 백성, 동일한 불평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르게 반응하시는가?
<오경>을 ‘모세’의 일대기라고 할 때, ‘미리암’과 ‘아론’의 불평은 특별히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가족 구성원 간의 사소한 분쟁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화자의 의도는 그게 아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기도 한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모세’는 단순히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일대 일로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자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자이다(12:8). 그는 분명 선지자 그 이상이다. 이점은 <출애굽>에서도 분명하게 한 바 있지만(출 33:7-23),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으며, <오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신 34:10-12).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고 ‘아론’이 그녀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리는 대목은 이 이야기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모세’와 가장 가까운 자도 죄와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켜주는 장치이다. ‘모세’ 역시 그러함을 그의 비극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 역시 실패했고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4.2. 제 2부: ‘가데스-바네아’
두 번째 단락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남쪽 접경 지역인 ‘가데스-바네아’에서 보낸 38년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책의 범위는 13-19장에 해당한다(아래 그림 참고).
정탐꾼들(13:1-14:45). 세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운명의 ‘가데스-바네아’에 도달한다(13:1). 이곳은 ‘가나안’의 남쪽 접경이다(민 34:4). 이제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각 지파에서 한 명 씩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그 땅을 탐색하도록 지시한다. 탐색을 마치고 돌아온 스파이들은 그 땅에 대한 생생한 소식을 전한다. 땅은 풍요롭고, 부유하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식도 함께 전한다. 이 소식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며, 출애굽의 목적을 부인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14:4). 이스라엘은 이제 황금 송아지 사건 이후(출 32), 가장 큰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연히 격노하셨고, 이스라엘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모세’와 새롭게 시작하려 하신다(14:12; 참고 출 32:10). 이 대목에서 ‘모세’의 중보는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신다(14:20). 그러나 용서는 범죄에 대한 처벌마저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를 경감시켜 줄 뿐이다. 불충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재앙으로 죽고(14:37), 광야에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하던 백성들은(14:2) 소원대로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었다(14:32; 26:64-65). 이들 부모들이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던 자신들의 자녀들은 역설적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14:3, 31). 그러나 그나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에 그렇게 될 것이다.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은 이후 이스라엘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수시로 회자(膾炙)되고 있다(참고. 신 1:19-40; 시 95:10-11; 106:24-27).
희생 제사의 약속(15:1-41).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곧바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이제 곧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절망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어 등장하는 본문은 희생 제사에 관한 것이다(15:1-41). 도대체 이 내용이 이곳에 등장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학자들은 편집상의 오류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수기>에서 가장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대목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제사에 관한 이 본문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이 희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그 땅을 이스라엘에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희생 제사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 그날 그 땅에서 드릴 제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1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15:18). 그날에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양이며, 염소며, 숫 양이며, 밀가루나 기름이나 포도주 등의 온갖 종류의 제물(祭物)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본문이기도 하다.
물론 제사에는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속건제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정탐꾼 사건이나 안식일을 어기는 것과 같은 의도적이며 악의적인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오직 처벌이 있을 뿐이다(15:32-36). 그래서 이스라엘은 옷단 귀에 술을 달아 이처럼 지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15:39).
계속되는 반역(16:1-18:32). 하나님의 희망에 찬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이 약속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대한 도전과 반역이 그것이다(16:1-18:32). 반역의 주모자들은 ‘고핫’이며, 공범자들은 ‘다단’과 ‘아비람’과 그 외 250명의 중간 지도자들이다. 이들의 도전과 공격은 두 방향에서 오고 있다. ‘레위’ 지파이면서 ‘모세’의 사촌이기도 한 ‘고핫’은 ‘아론’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고, 나머지는 다소 정치적인 것으로서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땅 바닥을 갈라지게 하여 이들 모두를 삼켜버리게 한다(16:1-35).
이 사건으로 백성은 두려움으로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항의하며 대든다(16:41). 하나님은 격노하셨고 백성들 가운데서 또 다른 역병을 일으켜 14,700명이 죽고, ‘아론’의 중보와 제사로 겨우 끝이 난다. 이 사건으로 ‘아론’의 대제사장 직분은 다시 한 번 공고하게 되었으며, 사건이 있은 다음 날 그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17:7). 물론 각 지파의 수장들도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기적적으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17:8). 다시 한 번 이 백성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울며 이렇게 하소연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17:12-13).
오직 제사장만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명백하고도 지엄한 사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임무와 권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요약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18장). 즉 ‘레위’인들의 책무는 앞서 밝힌 바대로, 일반인들이 무단으로 성막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경비하는 것이다(18:1-7). 그리고 제사장의 수입의 원천은 희생제물과 모든 생물의 처음 태생이다(18:8-20). ‘레위’ 자손은 성막 경비의 수고로 이스라엘로부터 십일조를 받는다(18:21-32).
붉은 암송아지(19:1-22). <레위기>에서 주검은 가장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는 어떠한 형태의 더러움도 지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동안 이스라엘 공동체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온갖 형태의 죽음이 일상사가 되다시피 했다(참고. 13-18장). 온 공동체가 오염되었고 부정하게 되었다. 속죄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레 4), 하지만 이 제사에는 많은 비용이 들고 또 길고 까다롭기도 하다. 좀 간단한 약식 제사를 드릴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19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에 관한 내용이다. 대속으로 드린 암송아지의 재를 물에 섞어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뿌림으로써 정결을 대신하게 했다.
4.3. 제 3부: ‘모압’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락은 ‘가데스’에서 ‘요단’ 동편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압’을 향한 여정을 다루고 있다. 책의 범위는 20-36장까지이다(그림).
마지막 여정(20:1-22:1). 이 마지막 여정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그렇지만, ‘아론’과 ‘미리암’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이 기간 동안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미리암’의 죽음에 대해서는 20:1에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는(20:2-13) 여러 면에서 <출애굽>의 ‘므리바’ 사건과 흡사하다(참고. 출 17:1-7). ‘모세’는 ‘므리바’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을 위하여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했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말은 해피엔딩 이었다. 그러나 이곳 ‘신’ 광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 밖에서 죽음으로 끝을 맺을 맺는 비극적 결말이다(20:12). 도대체 왜? 이번에는 무슨 연유로 이스라엘의 충성스러운 지도자들이 이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이해야 했던가?
이 질문에 대하여 이런저런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불행하게도 명쾌한 해답은 없다. 혹자는 ‘모세’와 ‘아론’의 교만이 그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음 두 구절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0-11). 다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입장은 두 사람의 불순종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명기>도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민 20:24후).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보아도 두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정확하게 따랐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을 모으고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지시하셨지,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참고. 22:8). 이와 같은 차이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어김없이 철저하게 수행해야 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면 결코 사소한 잘못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론’의 두 아들이 성소에서 허용되지 않는 불로 제사를 드리다 죽음을 자초한 일을 떠올린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 레 10:1-2). 아무튼 <오경>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신명기>에서는 ‘모세’의 잘못이 아니라 백성의 잘못으로,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언급이 있기도 하다(신 1:37).
‘아론’의 죽음이 등장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20:22-29).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땅의 주민들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뒤를 잇는다(21:1-3, 21-35). 이들 승리는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정복을 예고해주는 사건들로서,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승리를 보고 ‘모압’ 왕은 충격에 빠진다. 자연스럽게 “발락과 발람 이야기”가 이어지는 세 장(22-24장)의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참고로 이야기의 분량은 <민수기> 전체 분량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길고 상세하다.
그러나 아직도 이스라엘의 불평과 반역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이스라엘은 음식에 관하여 불만을 터뜨린다(21:4-9). 그동안 <오경>을 읽어온 독자의 편에서 보면, 이번 이야기는 지난 앞선 여행에서 있었던 두 번의 이야기에 비해 크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참고. 출 16; 민 12).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번에는 역병이 아니라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어 죽이게 한다(21:6). 이번에도 이 백성을 구한 것은 ‘모세’의 빛나는 중보의 기도이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청동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나을 것이라는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다.
모압 평원(22:2-36:13). <출애굽기>에서 <민수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바뀐 여행 경로나 숙영지(宿營地)는 이곳 ‘모압’ 평야에서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이곳은 ‘요단’ 동편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는 접경지역이다. 지난 두 번의 여정 모두 일련의 공통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 미래에 대한 약속; 그리고 배교와 심판. 이들 모두 일찍이 족장들에게 준 언약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지만, 이제 특별히 <민수기>의 마지막 남은 몇 장에서 언약의 희망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발람’의 예언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참고. 23-24장).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 <민수기>에서 이곳만큼 더 강조하고 있는 곳도 없다. 그러나 ‘발람’의 예언에 앞서 <성경> 전체적으로 가장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발람’의 예언에 신뢰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발람’은 당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점쟁이다. 그는 ‘모압’ 땅 북쪽 600 킬로미터 떨어진 ‘브돌’이라는 곳에 살았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에서 ‘모압’ 평원으로 진군해 오는 것을 보고 이를 저지하고 저주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 ‘발람’을 부른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갈 수 있다고 하면서 짐짓 경견한 체 하나, 실은 비싼 복채를 받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면 가도 좋다고 허용하신다. 이 일은 ‘발람’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점은 ‘발람’과 당나귀 사이의 희극적인 대화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당나귀도 알아보았던 천사의 현현을 당대 최고의 복술가라는 ‘발람’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니 말이다! 하나님께서 당나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말씀하실 수 있다면, 이 돈만 쫓는 이방 점쟁이를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해서 어찌 말씀하실 수 없겠는가! <발람 이야기>의 문학적 구조는 마치 시적 유사 병행처럼 두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단락은 서론과 세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의 핵심은 ‘발람’의 축복의 신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는 그대로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인 즉은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재확인이다. 다시 한 번 “아브라함 언약”을 요약해 보자면 사중적인데, (1) 후손에 대한 약속(‘발람’의 첫 번째 축복의 핵심, 23:10), (2)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약속(‘발람’의 두 번째 축복의 핵심, 23:21-23), (3) 땅에 대한 약속(‘발람’의 세 번째 축복의 첫 부분, 24:5-7), 그리고 (4) 열방에 대한 약속으로 이는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신탁에서 암시되고 있다(24:16-17). 이 왕은 이스라엘의 적대국들과 화평을 이룰 뿐만 아니라, 적대국들 사이에서도 화평을 맺게 할 것이다(24:18-24).
국가적 배교(25:1-18). ‘발람’이 ‘모압’ 평지를 내려다보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하고 있을 때, 산 아래 평야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을 쫓아 음란을 행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 아래서 이스라엘이 황금 송아지를 그들의 신으로 섬기며 난장을 벌이고 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모세’는 ‘시내’ 산 정상에 올라 두 돌 판에 새긴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있었다. 두 사건이 닮은 모습은 이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응과 그 결과에서도 닮은 점은 너무나 많다(도표):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이스라엘은 지난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희망적인 요소가 있다면 지난 번 황금 송아지 사건의 경우 대제사장 ‘아론’이 배교의 주동자였다면, 이번에는 그의 손자 ‘비느하스’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질투와 열심 때문이다.
두 번째 인구조사(26;1-65). 큰 재앙이 있은 후 실시되는 두 번째 인구조사는 다시 비치는 새 희망의 전조다. 출애굽의 제 1세대가 거의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인구조사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숫자는 601,730명으로 처음 인구조사 때의 603,550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도 아니다. 이번의 인구조사로 가장 큰 인구 감소를 겪은 지파는 ‘시므온’으로서 처음의 59,300(1:23)에서 22,200(26:14)으로 줄었다. 이처럼 ‘시므온’이 큰 인구 감소를 겪은 것은 직전의 ‘브올’의 배교 사건에서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25:14). 두 번째 인구조사를 희망의 전조라고 하는 것은 이 인구 조사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지파 별로 나누기 위함이라는 데 있다(26:53-56).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당연한 전제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이 인구조사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땅과 축제(27:1-29:40). 희망의 메시지는 또 있다. 땅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그 땅에서 축제를 어떻게 지낼 것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계명과 서원(誓願)의 규례 등이 바로 그것이다(27-30장). 같은 맥락에서 ‘슬로보핫’의 딸들이 제기하는 상속에 관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 땅의 정복이 임박해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27장). 마찬가지로 그 땅에서 행할 일련의 축제들, 그리고 제사에 드릴 엄청난 양의 제물들에 관한 언급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28-29장).
이곳에서는 제사장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하며, 그리고 이들이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물들에 더하여 백성이 가지고 오는 온갖 종류의 제물들도 드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 해 동안에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의 종류와 양은 다음과 같다: (1) 수송아지 113 마리; (2) 숫양 32 마리; (3) 어린 숫양 1086 마리; (4) 일 톤가량의 밀가루; (5) 일천 병의 포도주와 올리버 기름! 이들 계명은 결국 <민수기> 15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른 계명들과 함께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여 그곳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에 대한 무언의 약속이기도 하다. 아래 도표에 나타난 축제와 제사에서 사용하게 될 제물의 종류와 양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다(도표).
서원에 관하여(30:1-16). 위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곳에 언급한 제물들은 제사장이 드리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일반 백성도 세 번의 큰 국가적 축제에는 참석할 수 있는바, 유월절과 오순절과 그리고 장막절이다. 일반인은 이 때 자신과 함께 가족의 구성원들도 참여시킬 수 있으며, 성전에서 자신이 직접 제물을 드릴 수도 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서원(誓願)의 제물을 드릴 때이다. 즉 그는 어떤 질병이나 출생 등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서원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일단 서원한 것에 대해서는 이를 취소하거나 무를 수가 없다. 이는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녀의 아버지나 남편이 그녀의 서원을 듣자 말자 이를 거부했을 경우에만 예외로 인정될 수 있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서원한 것에 대하여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신 23:21-23; 전 5:4-6).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여 약속하신 서원을 지키기 위함일진대, 이스라엘 역시 자신이 약속한 서원을 지킴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미디안을 물리침(31:1-32:42). ‘브올’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배교에 빠지게 한 것은 ‘미디안’이다. 이 일로 이스라엘 편에서 24,000명이 처벌을 받고 죽었다(25:9). 이곳 31장에서는 ‘미디안’이 받은 처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형을 집행하는 자는 이스라엘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31:1-2).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른 바, “성전”(聖戰)의 개념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신명기>의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에 관한 기사는 사후 처리 과정에 관한 기사에 비하면 아주 짧다. <민수기>의 주된 관심사가 거룩에 있는 만큼, 전쟁에 참여한 장정들과 그들이 죽인 시체들을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쟁은 하나님의 지시로 수행되긴 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인 원수들로 인해서 오염되었으며, 따라서 진영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한 주간 동안의 정결 기간이 필요했다(31:19-24). 장정들은 전리품의 일부를 가져와 자신을 위한 대속물로 삼았다(31:50). 본문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이란 그 명분이 어떠하든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부합할 수는 없다. 전쟁은 필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악한 것이다.”
전투가 끝나자 ‘르우벤’과 ‘갓’ 지파는 요단 동쪽 편에 정착해 살기를 원한다(32장). 하지만 ‘모세’는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던 이 지역을 또 다른 위험으로 간주한 바 있다. 이 땅은 약속의 땅밖에 위치한 곳으로(34장), 이 두 지파의 요구는 ‘모세’로 하여금 지난 날 ‘가데스-바네아’에서 있었던 정탐꾼들을 기억나게 했다. 그러나 두 지파는 ‘모세’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에 병사들을 파병해 도울 것이라고 약속한다. ‘모세’는 이 약속에 만족해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허락한다.
31장과 32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가나안’ 정복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한 전조(前兆)이다. 이스라엘은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는다. ‘르우벤’과 ‘갓’ 두 지파가 약속의 땅밖에서 정착지를 허락받았다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더 이상 확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점이 <민수기>의 남은 장들이 전해주는 메시지이다.
이와 같은 확신은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거쳐 온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참고. 33장). 이 목록은 이스라엘의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멀고 험한 여정을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다면, 그 땅 안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들일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자신들이 저지른 배교와 불순종의 행동이다. 만일 그 땅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 땅을 그들을 버릴 것이다(33:56).
가나안 접경(34:1-15). 약속의 땅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언급했지만 정작 그 접경 지역은 어디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제 34장은 <구약> 전체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그 지역을 알려주고 있다. 남쪽 접경은 ‘요단’ 강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그 모든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나(참고. 271쪽의 지도), 북쪽 접경은 다소 애매모호하다. 북쪽에 위치한 그 모든 지역들의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 땅의 미래(34:16-36:13). 그 땅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은 이미 앞선 몇 장을 통해서 그려볼 수 있다. 첫째, ‘모세’는 그 땅을 기업으로 나눌 자들을 임명하고 있다(34:16-29). 그리고 이어서 ‘레위’인들의 성읍과 도피성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35장). 도피성을 제정한 목적은 그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함이다. 주검, 특히 악의적인 의도에 의한 주검은 그 땅을 오염시키며, 하나님은 오염된 땅에서 지낼 수 없다. 살인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주검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버리는 것이다(35:33-34).
마지막으로 36장에서 ‘슬로보핫’의 딸들이 다시 등장한다. 이미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해결되었고, 원하던 바를 얻어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다시 등장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이들이 속해있는 ‘므낫세’ 반 지파가 장차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같은 문제가 그 땅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땅을 유업으로 받은 ‘슬로보핫’의 딸 중의 하나가 다른 지파의 남자와 결혼하면, 그 땅은 그 남자가 속한 지파의 소유가 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지파 간 분배된 땅은 지파들 사이에 뒤섞여 혼잡하게 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땅을 소유한 ‘슬로보핫’의 딸들은 같은 지파 내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하였다(36:9).
이처럼 사소한 문제들조차 규약으로 만들어 밝혀놓은 것은 그 땅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창 13:15; 17:8). ‘가나안’ 정복은 이제 당연한 일로, 그리고 곧 실현될 임박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것이 <민수기>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확신하는 점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하나가 있다.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규례들을 제정하는 등 여전히 활력에 차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31:2). 이스라엘은 이제 ‘모세’의 영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지금 여기 아직 살아있다. 바로 여기에 <민수기>의 긴장이 있다 하겠다.
<민수기>의 역사
저작과 편집. <민수기>는 ‘모세’의 단일 작품일까 또는 후대의 편집의 결과일까? <오경>의 네 번째 책으로서,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잇고 있는 <민수기>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무관할 수가 없다. 즉 이 책이 ‘모세’의 단일 저작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소위 일련의 편집의 산물인지에 관한 것이다. <오경>의 즉 “모세 저작 설”과 “편집 설”이 그것이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앞선 총론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본문 중의 구절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답하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다.
우선 “모세 저작 설”과 관련해서 볼 때, 이를 지지(支持)할만한 내적인 증거는 단 한 곳밖에 없다: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3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모세’야말로 이 책 전체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한 수령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모세’를 일인칭(一人稱)이 아닌 삼인칭(三人稱)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를 삼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고대 문학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문학적 관습이라고 변론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를 삼인칭으로 지칭한다 해서 그가 이 책의 실질적인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 후대의 “편집설”과 관련한 주장은 <민수기> 내에서 ‘모세’ 이후의 글로 인정되는 많은 자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컨대, <여호와의 전쟁기>에서 발췌한 짧은 시가 있는가 하면(21:14-15),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의 정착 활동에 관한 기사(32:34-42)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은 ‘가나안’ 정복 이후 후대에 삽입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모세’가 책의 직접적인 저자가 아니라는 본문의 근거는 또 있다.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구절은 ‘모세’를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구절이다(참고. 12:3). 만일 ‘모세’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면, 어떻게 자신이 스스로를 추켜세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대의 편집을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다. 즉 인구조사에 관한 1장과 26장의 기사는 분명 <민수기>와는 독립적으로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자료였음에 틀림없으며, ‘모세’는 다만 이들을 활용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발람 이야기> 역시 후대의 편집적 삽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해석적 입장. 하지만 <오경>의 역사와 관련해서 수차례 언급했던 바처럼, 우리의 입장은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연구 결과를 존중하되, <오경>에 대한 “공시비평적”(共視批評的) 입장과 더 나아가 독자중심 비평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민수기>의 해석에 임한다는 것이다.
<민수기>의 신학
<민수기>의 신학 역시 <오경> 내의 다른 책들과 불가분의 연장선상에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슨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오경>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오경> 전체를 ‘모세’의 일대기(一代記), 즉 한편의 이야기로 바라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물론 <오경>이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완벽하게 갖춘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완(未完)의 책으로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민수기>가 <출애굽>이나 <레위기>에서처럼,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책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 역시 <오경>의 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이 접속사는 <오경> 내에서 각 책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단어이다. 특별히 <민수기>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출애굽>의 속편으로 불러 마땅하다. 따라서 <민수기>에서도 <오경>의 공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이 당연히 반복해서 등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두 책 모두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율법들이 뒤섞여 있으며, 이는 ‘모세’의 생애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책 모두 국가의 미래가 걸린 큰 위기(危機)를 다루고 있다: <출애굽>이 소위 황금 송아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민수기>는 열두 정탐꾼들의 불신(不信)을 다루고 있다. 이 두 번의 위기 모두 ‘모세’의 빛나는 중재(仲裁)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신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이야기의 결말은 낙관적이다: <출애굽>이 성막 건축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臨齋)를 보증해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가 하면, <민수기>는 ‘발람’의 예언을 통해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예고해주고, 절기와 땅의 유업(遺業)에 관한 규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해주고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비극적인 소식이 있다. 구름 한 조각이 없는 쾌청한 하늘이 아니라, 한 조각 어두운 구름이 그 하늘에 떠있다. ‘모세’가 그 행운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비극은 곧 “출애굽” 제 1 세대의 비극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탁월한 지도자 ‘모세’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는 어떠한가? 이 세대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모압’ 평원에서 “그 땅”을 목전(目前)에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자동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여전히 아직은 성취되어야 할 미래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제 1세대는 왜 하나님의 약속을 누려보지 못하고 모두 죽어가야만 했을까? 그러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과연 그 약속을 누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이 <민수기>의 신학적 주제들을 도출함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스라엘
<민수기>의 주 무대는 사막(沙漠)과 구릉(丘陵)으로 뒤덮인 광야(廣野)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장장 38년의 세월을 보낸다. 과연 이 여정(旅程)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처럼 중요한 인생의 황금기를 허송세월(虛送歲月) 했던 것일까? 행여나 하나님께서 이 모진 고해(苦海) 같은 인생을 사전에 예비해두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책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더란 말인가? 이들 질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거룩한 군대.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셨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즉 이스라엘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제사장이란 “다리를 놓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일여 년을 ‘시내’ 산에서 머문 이유도 제사장 나라로서의 제반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참고. 출 19-민 10). ‘시내’ 산은 그런 점에서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마냥 머물 수만은 없다.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며칠이나, 몇 달, 또는 몇 년이 아니라, 무려 40여 년이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원했던 원하지 아니했던,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던 아니하셨던, 이스라엘은 그 긴 여정 동안 수없이 많은 난관과 적대자들을 만나 치열한 전투와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오합지졸(烏合之卒)로 남아서는 “그 땅”의 약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강한 “군대”(軍隊)로 거듭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체성을 덧입힌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군대”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 “거룩한 군대”가 행군과 전투를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조직과 체계와 규모를 파악하고 정비하는 일일 것이다. <민수기>의 처음 10장이 바로 이에 관한 기록이다(이스라엘의 행군이 10:1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음을 주목하자). 우선 두 번의 인구조사(1:1-46; 26:1-65)는 군대의 규모, 즉 실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인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조사는 제 1세대가 수행할 광야에서의 전투를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 조사는 제 2 세대가 ‘가나안’에서 수행할 전투를 위한 것이리라. 광야에서의 행군도 언제든지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직과 대형(隊形)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그림 참고, 274쪽).
이와 같은 진영(陣營) 구조가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이 진영 한 가운데에 있고, 바로 그 주변을 가장 가까이서 레위의 네 지파가 둘러싸 호위하고 있으며, 그리고 나머지 열 두 지파가 각 세 지파 씩 ‘레위’의 네 지파를 동서남북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고대 근동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배치가 전쟁을 위한 진영 형태라는 점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즉 전쟁의 총 사령관 하나님의 장막이 사방에 호위무사(이 경우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와 나머지 12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전체 진영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행군 방향은 동쪽이며, 동쪽의 세 지파가 전위부대(前衛部隊)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중 ‘유다’ 지파가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행군(行軍) 시, 진영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그림 참고, 274쪽).
‘모세’도 이 모든 조직과 배치가 결국 적과의 전쟁을 위한 것이며, 전쟁의 최고 사령관은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민 10:35).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나님의 군대 즉 “거룩한 군대”이며, 하나님께서 최고 사령관으로서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직접 전쟁을 지휘할 것이므로, 이스라엘의 대명사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강한 군대의 특징은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사기(士氣)에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한 이상(理想)이었다.
광야 세대.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 군대는 ‘시내’ 산에서 첫 출정(出征) 이후, 가는 곳마다 연전연패(連戰連敗)를 거듭했다. 승리가 아니라 패배가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끊임없는 불평과, 반역과, 의심이 이 군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게도 다른 사람 아닌 ‘미리암’과 ‘아론’이 반역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모세’의 형제이자 군대의 또 다른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세’의 특별한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다(민 12장). ‘모세’에 대한 시기심(猜忌心)과 질투심이 직접적인 반역의 동기였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우회로(迂廻路)를 선택했다. 즉 ‘모세’가 이방 족속 ‘구스’ 여인과 결혼한 문제를 들고 나와 그의 지도력에 훼손을 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세’가 무슨 연유로 이 같은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이 두 사람의 행위는 온당치 못하며, 위선적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모세’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12:6-8)
‘모세’에게 반기(反旗)를 든 사람은 이 둘 만은 아니었다. 역시 ‘레위’ 지파인 ‘고라’가 있고,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이 있다. 당연한 조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동조자들 모두를 불에 태우고, 땅을 갈라 그 속에 쳐 넣어버리셨다(16장).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아론’ 자신은 어떠했을까? 그 역시 다른 지파의 두령들로부터 대제사장 직분을 놓고 거센 저항과 반대를 받게 될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유명한 “싹 난 지팡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그의 권위를 지켜주신다(참고. 17장).
이스라엘 군대의 문제는 이들 지휘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광야 생활 38년에 대한 직접적이고, 가장 큰 원인은 그 유명한 “스파이 에피소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참고. 13-14장). 알다시피,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보고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이며, 회의(懷疑)와 불신(不信)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는 군대 전체로 번졌으며, 마침내 원망과 불평으로 돌변했다. “광야 세대” 즉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으로 인구조사에 포함된 모든 장정들이 다 한 목소리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말리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쳐 죽이려했다. 성막의 존재, 즉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 군대를 버리시겠다고 공언하셨다. 광야 군대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일견 ‘모세’는 이 모든 실패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수기>는 왜 ‘모세’도 예외가 될 수 없는지 한 사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참고. 20:1-13). ‘가데스’ 광야에서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게 했던 에피소드를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별 것도 아닌, ‘모세’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10-11절).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부분을 문제 삼아 ‘모세’를 거부하신 것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절). 하나님의 설명인 즉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이유치고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모세’는 <신명기>에서 그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를 자신의 고별 설교에서 밝히고 있다(참고. 신 3:26).
새로운 세대. 이스라엘 군대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가데스’ 광야를 떠나 ‘요단’ 동편 ‘모압’ 평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군대는 이전의 군대가 아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를 통해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군대다. 광야 군대를 이루던 제 1세대는 모두 사라졌고,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새로운 군대가 이전 군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의 불평이나 원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를 언급하고 있는 <민수기> 26장은 이 책에서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루는 곳이다.
이 새로운 군대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땅, 즉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 군대가 ‘모압’ 평원에 이르는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하다. 그들 앞에 ‘아모리’ 족속의 ‘시혼’ 왕국과 ‘바산’ 왕국 ‘옥’과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으며, 더욱 위협적인 적 ‘모압’ 왕 ‘발락’이 있다. 특히 ‘발락’은 점쟁이 ‘발람’까지 동원하여, 이스라엘이 ‘모압’ 땅을 지나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일까! 하나님은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서 저주가 아닌 축복의 메시지를 주신다(24:17-19). 그러나 새로운 군대라 해서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발람’을 통한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발락’은 소위 미인계(美人計)로 이스라엘을 파괴하려 한다. 그의 음모는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의 유혹에 빠져 이방신을 섬기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 ‘비느하스’가 신속하게 개입하여 이들 범죄 한 이스라엘 인들과 그들의 ‘모압’ 여인들을 잡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내었다(참고. 25:7-8).
두 번째 인구 조사는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가나안’에서의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인구조사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겠다. 광야 제 1세대를 포기하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과는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현이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먼 길을 돌아 ‘모압’ 평원에 도달하였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한 전쟁을 수행하게 될 참이었다(신 1:1-8). 여기서부터 <신명기>의 내용이 이어질 것인바, 이 책은 광야 생활에 대한 ‘모세’의 회고(回顧) 설교로 시작하여, 새로운 땅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가고 있다.
2. 하나님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이어 하나님의 두 속성, 즉 초월성(超越性)과 내재성(內在性)에 대한 주제들을 계속 발전시켜가고 있다. 예컨대, 3장과 4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이라든지, 행군 시 성막과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의 위치에 대한 언급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책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각종 제사법이나, 절기, 기타 성막 기구(器具)들에 관한 설명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민수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발견이 있는바, 하나님의 본성이 이스라엘과의 대조(對照)나 대비(對比)를 통해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거룩.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一貫)된 거부감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잘 드러나 있다. 예컨대, <디모데후서>는 이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
여기서 13절은 사람들이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구절 중의 하나인데, 이는 이 구절을 전후 문맥을 떠나서 읽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함께 읽어보면, 13절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끝까지 인내하고 참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일관성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매사에 일관되고 신실하시기 때문에(거룩한 그분의 속성에 관한 한에 있어서), 우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 역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그런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정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광야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이러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군대의 불신과 불평을 끝까지 참고 견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렸으므로, 하나님 또한 이스라엘을 버리셨던 것이다. 광야 제 1세대 중 단 두 사람(‘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그 땅을 밟은 사람은 없다(참고. 26:26-35). ‘모압’ 땅을 밟은 사람은 없다. 광야 제 1세대의 광야 여정은 그야말로 죄로 점철된 것이었고, 하나님은 끝까지 참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임재. ‘올손’(Olson)이 제시한 바대로, <민수기>는 제 26장에서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책의 전반부(1-25장)는 광야에서 모두 죽어간 출애굽 제 1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후반부(26-36장)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제 2세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반부가 이스라엘의 과거 이야기, 즉 실패와 반역과 좌절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미래 이야기, 즉 약속과 소망과 승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제 1세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바처럼, ‘갈렙’과 ‘여호수아’가 살아남았고, 광야 제 2세대 중 단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참고. 26장 이후). 이들 제 2세대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모압’에 이르는 동안 치른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으며(참고. 28장), ‘모압’ 여인들로 인한 우상숭배로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참고. 32장).
하나님은 이전에 ‘시내’ 광야에서 구세대와 맺은 언약을 갱신하면서, 당시의 규례와 계명들을 재천명(再闡明) 하신다(참고. 34장). 하지만 강조점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미래 ‘가나안’ 땅에 있다. 이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재 헌신(再獻身)으로서, ‘가나안’ 정복에 대한 전제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약속이 있다 해서 미래의 위험이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 2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읽을 수가 있다. 즉 그분이 달라지셨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바꾸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 자신의 이름에 치명타를 받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왜 마음을 바꾸신 것일까? 이전 세대에 대하여 했던 것처럼 언약을 그냥 폐기처분하지 않고, 왜 새롭게 갱신하려 하시는가? 왜 끊임없이 반항하고 반역하는 이 백성과 함께 하기를 고집하실까? 자기 백성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약>은 이 주제를 절정(絶頂)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수기>의 이야기는 <신약>의 전주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 절정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역사를 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잡아 죽였으며, 종국에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 속에 희망을 남겨두셨다. 그 희망은 곧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3. 광야
이스라엘의 광야는 지리적으로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에 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구원”과 “정복” 사이에 있다. <오경>의 다섯 책 중에서 <창세기>를 제외한 나머지 책에서 이 “광야”는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광야”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무대이지만, 신학적으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주제는 비단 <오경>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서 핵심 주제가 되기도 하다.
“출애굽”의 일차적인 결과이자 목적은 자유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노예에서 또 다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왕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노예가 되기 위함이다. ‘바로’의 “구속”(拘束)이 강압적이고 타의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속”(救贖)은 구원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섬길 새로운 왕은 ‘야훼’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섬길 때만이 단순한 자유와 해방이 아닌 광복(光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시내’ 산에서 ‘바로’ 왕의 노예는 ‘이스라엘’이 되고 국가가 된다. 단순한 독립국가가 아닌, “언약 국가” 또는 “신정 국가”가 된다. “십계명”과 부속 계명들은 “신정 국가”의 주권(主權)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신앙적이고, 정치․경제적 인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장장 사백여 년을 노예로 살아왔던 자가 성숙한 시민이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율법과 계명”, “인구조사”, “진영의 조직과 배치”, “성막과 기구들”, “제사장과 레위인들”, “불기둥과 구름 기둥”, “토지 분배” 등.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으로서, 철저한 사전 준비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육화(肉化)될 수 있다.
광야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야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 외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고난을 통해서 성숙을 배워야 했다는 말이다. 그 광야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그런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4. <민수기>와 신약
<신약>이 <민수기>를 언급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후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선조가 광야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2) 예수 그리스도가 두 번째 ‘모세’이자 그보다 더 나은 자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교훈을 위하여. 첫 번째 목적과 관련해서 <신약>에서 가장 길게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고린도전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민수기>를 상기시키면서, 특별히 우상숭배와 성적(性的) 타락을 경고하고 있다: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3-11)
<히브리서>는 <민수기>의 다른 사례를 들어 그의 독자들에게 불순종과 반역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6-19)
그리고 <유다서>는 ‘발람’의 실수와 ‘고라’의 반역과 같은 일들이 <신약> 교회에서도 항상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화 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모세보다 더 나은 자. <신약>은 또한 <민수기>의 ‘모세’ 대한 예표론적(豫表論的) 해석을 가하여 그리스도를 두 번째 ‘모세’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2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2-6)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모세’처럼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였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靈的) ‘만나’, 즉 영생을 주었다고 말한다(요 6:48-51).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들어 그것을 바라본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처럼, 그리스도가 놋뱀이 되어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이와 같이 광야의 제 1세대 이스라엘과 이후 모든 믿음의 세대 간에는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유사한 체험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믿음의 백성들에게 자극과 교훈과 권면이 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민수기> 당시 제 2세대 이스라엘이 당면했던 것과 똑 같은 위기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은 “가나안 정복”, 즉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광야 여정(旅程)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광야는 곧 고해(苦海)로 가득 찬 인생일 것이며, 동시에 소망을 이루게 하는 훈련의 장소와 시기가 될 것이다. 어떻게 이 인생을 풍성하게 누릴 것인가?
연습과 토의
1. <민수기>는 책의 이름으로 적절할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적절한 제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2. <민수기>의 신학적 주제는 이 책의 문체(文體)와 구조(構造)등을 통해서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3.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 도착하여 일여 년을 보낸다. 약속의 땅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은 그 이후에 시작된다(참고. 민 1:1-10:10).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으며, 이 기간과 장소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4. 첫 번째 인구조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1:1-4:49). 왜 이 조사가 필요했으며,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5. 첫 번째 인구조사에서 레위 자손에 관한 인구 조사는 별도로 언급한다(3-4장). 그 의미는 무엇일까?
5. 인구조사가 끝난 이후 시내 산을 떠나기까지의 주요 내용은 무엇이며,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참고 5-10:10)?
6. <민수기>의 주요 무대는 ‘시내’ 산에서 ‘모압’ 평원에 이르는 ‘가데스’ 광야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대부분의 광야 세월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왜 이곳에서 그처럼 긴 세월을 보냈을까? 그 원인이 될 만한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나열해 보자(10:11-18:32). “광야”가 이들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을까?
7.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겪은 두 번의 큰 국가적 위기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정탐꾼 사건(13-14장)과 ‘모압’에서의 배교(25장)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다른 점은 무엇일까?
8. 모세와 아론은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9. <민수기>는 두 번째 인구조사를 기점으로 신학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첫 번째 조사에 비해 무엇이 달라졌으며, 강조점은 무엇일까? 두 번의 인구조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언약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자. 두 번째 인구조사의 대상은 누구이며, 이 세대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10. <신약>은 <민수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신약>이 <민수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92-119.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252-269.
4. Temper Longman III, Old Testment Essentials: Creation, Conquest, Exile and Retur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4, pp 79-90.
5. Victor P. Hamilton, Handbook on the Pentateuch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pp 302-364.
제 7장: 신명기
12
신명기
‘유대’인들이 회당(會堂)에서 교재(敎材)로 사용하기 위하여 한 권의 책을 선택해야 한다면 <신명기; 申命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이 책은 비단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사상과 관습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구약>의 어느 책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신명기>의 교리는 <구약>의 토대가 된다. 선지자들은 <신명기>의 가르침을 그들의 설교에서 상기시켰으며, <신명기>의 분명하고도 명료한 요구들을 가지고 동 시대의 사람들에게 도전했다. 왕들은 <신명기>의 높은 이상을 상기했으며, 요직의 관리들은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신명기>의 진리들을 되풀이 강조했다. <시편>은 위대한 찬양과 경배와 고백과 중보의 노래들 속에 <신명기>의 메시지를 엮어 넣었다. 이스라엘의 지혜 교사들, 즉 짧고 함축적인 말로 백성을 교회했던 그 중개자들은 <신명기>의 주제들을 인간의 행동과 사회적 일상사의 실제적인 문제에 적용했다.
<신명기>는 또한 기독교인의 삶과 사고를 개발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은 <신명기>의 독특한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그의 공생애(公生涯)나 사적인 영역에서 사용하셨다. 예컨대, 유대 광야에서 가혹한 시험을 받으면서 ‘사탄’을 물리치는 도구로 <신명기>를 사용하셨으며, 부자 청년으로 가장 으뜸 되는 <구약>의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서는 <신명기>를 인용하셨다.
초대교회도 <신명기>의 교훈이 가장 핵심적인 것임을 똑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신명기>는 <신약>이 가장 자주 인용했던 <구약>의 책이다. <신명기> 인용문은 27권의 <신약> 가운데 무려 17권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신명기>를 참조한 본문은 80여 군데나 된다.
<신명기>가 선지자나, 왕이나, 예수님에게나,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래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명기>의 중요한 메시지를 연구할 때, 우리는 ‘모세’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므로”, 이 말씀은 머나먼 이스라엘에서, “그 때 거기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한 바 있다.
<신명기>의 문학
1. 제목
헬라어 제목. “두 번째 율법”(δεοτερονομιον)을 뜻하는 ‘그리스’어 제목은 <신명기> 본문, “이 율법 서를 등사하여”(17:18)에 근거하여 붙인 것이다. 영어 제목 Deutronomy는 이 단어를 음역(音譯)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제목이 책의 내용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오경>의 앞선 책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앞선 책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에게 계시한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모세’가 동일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설교의 형태로 그의 백성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제목. 이 제목 역시 본문의 첫 문장에서 따온 것으로서, “이것들이 그 말씀들이다”. 이는 ‘모세’에게 주신 교훈이라는 의미로서, <신명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풀어준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율법을 직접 설교하는 경우란 거의 없지만, 그들의 사역은 율법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신명기>에서 선지자의 원형(原型)으로 등장하고 있는 ‘모세’(18:15-22)가 그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종종 ‘모세’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왕국의 건설(17:14-20), ‘가나안’ 정착(33:6-29), 추방, 그리고 고토(故土) 회복(28:64-68; 30:1-3)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하지만 ‘모세’의 주된 관심사는 먼 미래가 아닌 당장의 현실에 있다. 즉 ‘모압’에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요단’을 건너, “그 땅”을 정복하고 나누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래서 그는 큰 열정과 함께 다급한 심정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을 요청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결코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될 것이며, 동일한 실수를 반복해서도 안 될 것이다.
2. 양식
<신명기>는 문학적 양식(樣式)에 있어 설교(說敎)인가? 이야기인가? 법전(法典)인가? 종주계약서(宗主契約書)인가? ‘모세’의 자서전(自敍傳)인가? 시와 노래인가?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기 전에, 먼저 <신명기>에 등장하는 제반 양식부터 차례대로 고찰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설교. 일찍부터 학자들은 이 책이 선지자적 설교로서의 수사(修辭)와 문체(文體)로 가득 차 있음을 간파했다. 설교의 특징은 절박하고, 열정적이며, 반복적이다. 이 책 속에는 세 개의 설교가 등장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각 설교의 상대적인 분량이나 적절한 안배(按配)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수없이 많은 율법(律法)들이 설교 속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율법을 어떤 원칙과 어떤 순서로 각 설교 안에 배치했는지, 알 길이 전혀 없다. ‘모세’가 설교 중에 율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율법의 고상함이나 우아함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목적은 단 하나, 즉 청중들을 설득하여 그 율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지난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과거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에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명기>의 양식(樣式)을 “예언적 설교”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싶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세’의 설교는 “고별설교”에 가깝다. 이는 이전 시대 ‘이삭’이나 ‘야곱’의 임종 시 침상 주변을 지키고 있던 자손들에게 행한 임종 축복 기도를 연상시켜주는가 하면(참고. 창 27:27-29, 39-40; 49:2-27), ‘모세’ 이후에는 ‘여호수아’나 ‘다윗’의 고별 설교(수 23:2-24:27; 왕상 2:2-9)와 연결시킬 수 있다. 이들 고별설교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선 설교자 자신의 생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행위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가올 앞날에 대한 기대와 예언을 언급한 후에, 자녀들(또는 후대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충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고별설교의 길이나 깊이에 있어 ‘모세’의 설교는 <성경> 속의 여타 고별설교를 압도한다. 그런 점에서 ‘모세’의 설교는 고별설교의 전형(典刑)으로 삼을 만하다.
설화. <신명기>의 많은 부분이 ‘모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의 설교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설화”(說話;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용해되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선 책 <민수기>는 이야기로서는 일종의 미완(未完)의 책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수기>는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 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수기>를 읽은 독자는 ‘모세’의 운명을 놓고 긴장감 내지는 불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가 언제 ‘느보’ 산에 올라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놓고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책 <신명기>를 펴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모압’ 평원에 머물러 있고, 이들을 향한 ‘모세’의 고별설교가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세’는 자신이 약속의 땅 밖에서 죽게 될 것임을 드러낸다(1:37). 임박한 그의 죽음은 책 전체를 통해서 흐르고 있는데, 당연히 그의 설교 속에도 이와 같은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다. ‘모세’는 그의 청중들에게 그려주고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에는 자신은 들어갈 수가 없다. ‘모세’의 죽음에 관한 언급은 책의 끝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있다: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신 32:49-50). 그리고 각 부족들에게 축복의 신탁을 전한 후,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34:5-6).
자서전. <신명기>는 책의 마지막을 ‘모세’에 관한 “묘비명”(墓碑銘)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34:10-1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명기>는 ‘모세’의 전기(傳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모세’의 생애 중 마지막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오경>의 다른 책들은 ‘모세’의 초기 생애를 다루고 있는 자서전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내용을 ‘모세’의 일대기 정도로 이해한다 해서 무슨 특별한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신명기>의 경우에는 이 책을 ‘모세’의 전기로 취급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은 불가피해 보인다.
주종계약. <신명기>는 또한 주전 2000년 당시 근동지방에서 친숙했던 주종계약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그 양식에 있어 법전과 계약서 사이를 오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신명기>는 그 분량에 있어 고대근동의 주종조약보다 훨씬 길다는 점이다. 아래 도표는 <신명기>와 고대 법전과 조약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 도표에서 보듯이, “역사적 서언”(historical preview)에서 다루는 내용은 계약 당사자 사이에 얽힌 최근의 역사적 사실들이다. 특히 큰 나라가 작은 나라(신하 국가)에 대하여 베푼 호의(好意)를 뽐내고 자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컨대, 신하국가의 배반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왕국으로서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등의 호의를 말한다. <신명기> 역시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시내’ 산에서 약속의 땅까지 인도해 오셨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과 <신명기>는 그 형식이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명기>는 조약으로서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약에서 필수적인 의무사항은 신하국가의 절대적인 충성이다. 예컨대, 신하국가가 섬기는 국가에 대하여 조공(租貢)을 바친다든지, 도망 친 범죄자를 본국으로 송환해 준다든지, 새로운 왕위 계승자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등의 의무사항을 말한다.
두 당사자 사이에 일단 계약이 맺어지면 계약 문서는 성소(聖所)에 보관을 하되, 정기적으로 공개 낭독을 해야 한다. 이는 봉신 국가의 책무를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신명기>에도 이와 같은 모티브가 내재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참고. 신 27, 31장).
그리고 계약의 증인이 필요한데, 대개 그 나라가 섬기는 신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증인으로 삼는다. 하지만 <신명기>에는 이들 신들의 목록이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이스라엘은 오직 단 한 분의 신, 즉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기 때문이다(5:7; 6:4).
조약문서의 끝에는 축복과 저주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증인으로 열거한 신들이 이를 책임지고 행사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축복의 내용은 봉신국의 충성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장수(長壽), 국가의 번성, 풍년 등을 담고 있고, 반면 불순종과 반역의 대가는 온갖 종류의 저주가 다 포함되어있다. 대개 법전의 경우라면 축복이 저주에 앞서 등장하지만, 조약의 경우에는 저주가 축복에 앞서 등장하며, 그 분량도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신명기>의 경우에는 법전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축복이 앞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약의 경우처럼 상대적인 분량에 있어서는 저주가 축복을 앞서고 있다.
시와 노래. 마지막으로 <신명기>의 양식과 관련해서 “시와 노래”를 간과할 수 없다. <신명기>의 마지막 세 장에서 마치 색인(索引)처럼 등장하고 있는 “모세의 노래”(32장), “모세의 축복”(33장), 그리고 ‘모세’의 죽음과 장사(葬事)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아래 도표 참고). <신명기>의 주된 내용이 율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문학적 형식 내지 방식은 “시와 노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 세기 전 대주교(主敎) ‘로스’(R. Lowth)에 따르면, 고대 지중해 연안 세계에서 사람들은 법조문을 축제 때 시나 노래로 불렀다. 율법의 딱딱하지만 귀중한 내용을 시와 노래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익을 우리는 우리의 일상 체험을 익히 통해서 알고 있다. 노래 가사에 멜로디를 붙이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즉 멜로디 없이 가사를 다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흔히 율법 책으로 알고 있는 <신명기>도 ‘모세’의 지시에 따라 ‘레위’ 사제들이 축제 시에 노래로 선포했을 것이다:
9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31:9-11)
21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31:21-22)
고대 근동 언어가 회화적(繪畵的)이고 청각적(聽覺的)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신명기>를 가리켜, <성경> 중에서 가장 예식적인 책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유월절” 등과 같은 거국적 축제를 준비하면서, 이 율법 책을 읽었다(예. 수 5). 한 마디로 <신명기>는 세 번의 “유월절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출 12); (2) ‘신’ 광야에서의 유월절(민 9); (3) 약속의 땅에서의 유월절(수 5).
이들 유월절 이야기가 훗날 ‘유대’나 ‘사마리아’의 <유월절 시집>의 전승이 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아마도 가장 초기의 <신명기>의 문학적 형식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신명기> 32장을 “모세의 노래”로 칭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시와 노래의 힘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수 세기를 두고 초기의 시와 노래는 ‘레위’ 인들을 통해서 전해져 갔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종교 교육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요시야’의 개혁 운동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글로 기록이 되었을 것이며, 이중 <신명기>가 정경화(正經化) 작업의 중심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신명기>는 정경화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시에 음악적인 전통은 그대로 전수되어 오늘날까지 소위 <마소라 사본>에 반영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신명기> 해설 책들은 <신명기>가 지닌 이 같은 음악적 요소(박자와 리듬)을 무시하고 있다(어디 <신명기> 뿐이겠는가!).
요약하자면, <신명기>의 문학적 형식은 “시”라 할 수 있다. 그것도 교육적 목적을 지닌 시이다. <신명기>의 구조가 전체적으로 매우 정교하고 잘 짜여 진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3. 구조와 단락
개요. <신명기>의 구조를 밝히려는 노력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학 장르-설교, 예언, 조약, 시와 노래, 이야기-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는다. 예컨대, 이 책을 ‘모세’의 설교 모음집으로 보게 되면 전체적으로 세 편의 설교가 각각 네 장과, 스물네 장, 그리고 두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위 도표 참고).
각 설교는 양적인 면에서 전혀 안배가 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또 각 연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율법들을 어떤 원칙하에 어떤 순서로 배열했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많은 청중이 그렇게 길고도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연설에 처음부터 끝까지 귀 기울일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세 편의 설교. 약간의 가감(加減)을 하고 나면 <신명기>의 개요는 종주 계약(從主契約)의 양식을 따라 세 편의 설교와 세 개의 부록(appendices)으로 구분할 수 있다:
11 단락 구조. <신명기>를 열한개의 구조로 나누는 방식은 ‘유대’인들이 <오경>을 3년에 걸쳐 일독(一讀)하는 전통을 따는 것인데, 이 일정에 따르면 <신명기>는 11주 만에 읽기가 끝난다. 이에 따라 책의 단락을 열한 개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1:1-3:22; (2) 3:23-7:11; (3) 7:12-11:25; (4) 11:26-16:17; (5) 16:18-21:9; (6) 21:10-25:19; (7) 26:1-29:8; (8) 29:9-30:20; (9) 31:1-30; (10) 32:1-52; (11) 33:1-34:12.
그리고 각 단락의 제목은 그 단락이 시작하는 문장의 첫 단어로 삼는 것은 히브리 식 전통이다.
교차대구적 구조. <신명기>의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은 교차대구(交叉對句)에 있다. 현재까지 전체적인 단락의 수에 따라 다양한 교차대구가 알려져 있다.
(1) 일곱 단락의 교차대구: 이 구조는 성막이나 이스라엘 성전 안에 배치한 일곱 가지가 달린 성막의 황금 촛대를 본받아, 예배에서 읽는 낭독 본문을 일곱 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단락의 범위에 따라 두 가지 유형의 교차대구(1과 2)가 알려져 있다(도표 참고)
(2) 다섯 단락의 교차대구: 또 다른 교차대구는 <오경>이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었다는 논리를 따라, <신명기>의 구조도 이 같은 형식을 따라 다섯 개의 단락을 가진 교차대구를 제안한 것도 있다. 본 교재에서는 아래 다섯 단락으로 이루어진 교차대구 형식을 내용 분석의 모델로 삼을 것이다:
이 구조에 따르면, 처음과 마지막 두 단락(A와 A’)은 하나의 문서로 다룰 수 있을 것인데, 두 단락은 동일 인물 ‘여호수아’로 연결되어있다(‘여호수아’는 <신명기> 내에서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있다). 내부의 두 구조(B와 B’) 역시 하나의 문서로 읽을 수 있을 것인데, 두 단락을 잇는 공통 요소는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관한 내용이다. 축복과 저주는 이스라엘이 각각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행하는 독특한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내용 역시 <신명기> 내에서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있다(참고. 11:26-32; 27:1-14). 마지막으로 대칭구조의 중심(C)에 <신명기>의 핵심 내용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흔히 “신명기 법전(法典)”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핵심 행동 양식을 다루고 있다.
이들 다섯 개의 단락은 각기 다섯 개의 작은 단락들이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어, 이 책은 전체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문학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추후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아주 정교하게 균형 잡힌 <신명기> 구조가 시사하는 바는, 이 책의 양식과 기능을 설명함에 있어 다른 모델을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음악이나 서사시 등이 이처럼 정교한 예술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명기>를 처음 편집할 당시에 이 책의 양식 역시 시적인 형식을 띄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와 같은 대칭적 구조와 크고 작은 대칭적 구조는 ‘유대’인들의 가지 달린 촛대를 연상하게 한다. 즉 다섯 단락의 각 가지는 다시 대칭구조를 이루며, 그 안에서 작은 가지는 또 다른 작은 대칭 구조를 계속 이루면서, 물결이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나가듯이, 외연(外延)을 학대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지면 관계 상 처음 두 단락만의 교차대구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단락 A(1-3장):
a 설교: 그 땅에 들어가라(1:6b-8)
b 분배: 이스라엘 백성(1:9-18)
c 전쟁: 이스라엘의 전쟁(1:19-2:1)
d 정복을 위한 진군(2:2-25)
c’ 전쟁: ‘야훼’의 전쟁(2:26-3:11)
b’ 분배: ‘요단’ 동편의 땅(3:12-17)
a’ 설교: 그 땅을 취하라(3:18-22)
(2) 두 번째 단락 B(4-11장):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수하라(4:1-40)
b ‘모세’가 세 성읍을 구분함(4:41-43)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라(4:44-6:3)
d 이스라엘아 들으라(6:4-7:11)
e 순종하면 축복이(7:12-26)
e’ 불순종하면 멸망이(8:1-20)
d’ 이스라엘아 들으라(9:1-29)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라(10:1-7)
b’ ‘야훼’께서 ‘레위’ 지파를 구분하다(10:8-11)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행하라(10:12-11:25)
이처럼 아주 정교하게 균형 잡힌 구조는 시나 음악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청각적이며, 시각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히브리’ 언어의 회화적(繪畫的)이고 음악적인 요소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점은 <신명기>의 초기 양식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즉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명기>를 처음 편집할 당시에 이 책의 양식 역시 시적인 형식을 띄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4. 내용
4.1. 제 1부: 외곽구조-역사적 회고
<신명기>의 전체 구조를 위 도표에서처럼 교차대구적 구조에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첫 번째 다룰 내용은 교차대구를 이루는 두 개의 외곽 구조(A/A’) 중에서 첫 번째(A)에 해당하는 1-3장의 내용이다(도표의 노란 색 부분).
그리고 이 부분은 일곱 개의 소 단락이 모여 다시 작은 단위의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으며, 형식에 있어 책 전체의 구조를 닮고 있다:
a 설교: 그 땅에 들어가라(1:6b-8)
b 분배: 이스라엘 백성(1:9-18)
c 전쟁: 이스라엘의 전쟁(1:19-2:1)
d 정복을 위한 진군(2:2-25)
c’ 전쟁: ‘야훼’의 전쟁(2:26-3:11)
b’ 분배: ‘요단’ 동편의 땅(3:12-17)
a’ 설교: 그 땅을 취하라(3:18-22)
이와 같은 구조는 다시 그 앞과 뒤에 두 번의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다: (1) 1:1-6a; (2) 3:23-29. 이중 첫 번째 전환점은 일종의 표제(表題) 내지는 제목(heading)으로서, <신명기>와 <민수기>를 이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한편 두 번째 전환점은 내용 상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리더십의 전환에 관한 것으로, <신명기> 전체의 두 번째 외곽구조(A’)(31-34장)에 대한 서론의 기능을 하고 있다.
처음 세 장에서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시작하여 ‘모압’ 평원에 이르는 40여 년의 이스라엘의 여정을 회상하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시내’ 산을 ‘호렙’ 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수시로 권면의 목적으로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점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회고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첫 번째 설교의 분위기야말로 책의 나머지 부분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첫 번째 단락(a)에서 ‘모세’는 지난 일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아래 여덟 개의 사건을 선별해서 들려주고 있다:
(1) 1:9-18: ‘모세’가 자신의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부관급 지도자들을 임명하여 사역의 책임을 나눈 일(참고. 출 18:13ff; 민 11:10ff)
(2) 1:19-46: ‘가나안’ 땅 정탐을 위하여 스파이를 보낸 일(민 13-14)
(3) 2:1-8a: 이스라엘이 ‘에돔’ 지역을 우회한 일(민 20:14-21)
(4) 2:8b-25: 이스라엘이 ‘모압’ 지역을 통과한 일(민 21:4-20)
(5) 2:26-37: 이스라엘이 ‘헤스본’의 왕 ‘시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민 21:21-32)
(6) 3:1-7: 이스라엘이 ‘바산’의 왕 ‘옥’과 전투에서 승리한 일(민 21:33-35)
(7) 3:8-22: ‘요단’ 동쪽 땅을 분배한 일(민 32)
(8) 3:23-2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는 ‘모세’의 권면과 그 자신은 거부당하는 일(민 27:12-14) 물론 이 두 사건은 별개의 일이기는 하다.
위 여덟 항목 중에서, 처음과 마지막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일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모세’는 자신이 짊어진 사역의 일부 내지는 전부를 내려놓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짐을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가 안게 될 것이다. 나머지 다섯 개의 사건은 일종의 국제적인 것으로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중 하나는(세 번째 항목) 잠재적인 것이었지만, 나머지 세 항목(항목 4-6)은 실제 당면했던 사건이었다.
‘모세’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단순히 그 일을 반복해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과 해설을 더하고 있다. 당연히 <민수기>에는 없던 새로운 통찰이나 관점이 추가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이는 ‘모세’ 자신의 것이거나 또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일 수 있다).
전환 구절 1(1:1-6a).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 다섯 구절은 책의 표제에 해당하며 교차대구에서 빠져 있다. 그리고 제 6b절에서 시작하는 첫 번째 설교의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다.
a: 그 땅에 들어가라(1:6b-8).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40년 전에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 땅 밖에서 머물고 있으며,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씀도 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이제 청중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모세’는 그의 첫 번째 설교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 그는 자신과 책임을 나누어질 일단의 지도자들을 임명했던 사실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동료 사역자들을 임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 즉 그들의 후손이 하늘과 별만큼 많게 될 것이라는 약속(창 15:5)이 일부 성취된 것임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b: 그 땅의 이스라엘(1:9-18). 이 단락의 주제는 모세를 도울 부관급 지도자들 지파별로 뽑아 세우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세’는 이곳에서 두 개의 사건을 묶어 놓고 있다. 하나는 ‘시내’ 산 도착 이전에 있었던 일로서(출 18:13-27), <신명기>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참고. 신 1:13-17).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의 사건에 관한 것으로서(민 11:14-17), 본문 9-12절 사이의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시간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일어난 두 사건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니만치, 이곳 <신명기>에서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역할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칠십 인의 두령을 뽑으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의 불평을 듣는 쪽이었다: “나 혼자서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 11;14).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설교를 듣고 있다: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신 1:9).
c: 이스라엘의 전쟁(1:19-2:1). ‘모세’가 선택한 세 번째 회고담은 그 유명한 정탐꾼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회고담에도 <민수기>와는 다른 ‘모세’ 자신의 해석이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세’는 정탐꾼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상기시키면서, <민수기>의 주장과는 달리 실패의 책임을 이스라엘에 돌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신 1:37; 참고. 민 20:12). 이 같은 관점은 이 책의 다른 곳에서도 두 차례나 더 등장하고 있다(참고. 3:26; 4:21). 이 사건과 관련해서 <민수기>와 차이를 보이고 대목은 또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모세’가 보여주었던 그 위대한 중보의 기도(민 14:13-19)가 이곳 <신명기>에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정탐꾼 이야기와 관련해서 가장 충격적인 차이는 <민수기>와 <신명기> 기사가 정탐꾼을 보내자는 제안을 한 주체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돌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민 13:1-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신 1:22-23)
이와 같은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기는 하다. 즉 ‘모세’가 그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각색하여 참담한 실패로 끝난 정탐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기보다는 백성에게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세’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호하고 책임을 면제해 주려고 했을지는 의문이다. <사마리아 오경>에서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즉 위 두 기사를 하나로 묶되, <신명기> 기사를 <민수기> 기사 앞에 두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탐 제안을 먼저 한 쪽은 이스라엘이었고, ‘모세’가 이를 좋게 여겨 하나님에게 아뢰었더니, 하나님께서 이를 승인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충되는 두 기사를 큰 무리 없이 조화롭게 설명하고 있다. 아마 <사마리아 오경>의 편집인은 왜 쓸데없이 그와 같은 명백한 모순을 방치해 둘 수 있겠느냐는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사무엘상> 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즉 이스라엘이 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사무엘’에게 말하자, ‘사무엘’이 이를 하나님에게 아뢰고, 하나님은 백성의 요청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정탐꾼 이야기와 관련하여,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모세’는 그 이야기를 41-45절에서 회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곧바로 마음을 바꾸어, 그 땅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었다. 당연히 결과는 패배로 끝난다(참고. 민 14:39-45). 이 패배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재 확인해주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광야 40년”의 저주와 심판을 내리신다.
d: 정복을 위한 진군(2:2-25). 이스라엘의 진군은 계속된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에돔’과 ‘암몬’, 그리고 ‘모압’ 세 지역이 그들이 통과해야 하는 땅이다. 그 첫 번째가 ‘에돔’ 땅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민수기>와 대조를 이룬다.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민 20:14-21), ‘모세’는 이곳을 통과하기 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땅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묵살당하고 이스라엘은 이 땅을 우회(迂回)하여 진군해야 했다. 그러나 <신명기>는 이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다음과 같은 전혀 새로운 기사를 더하고 있다: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2:5). ‘에돔’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두 기사는 전혀 대조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모압’을 통과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군사적 충돌은 피하라고 명령하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 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2:9). 이스라엘 편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을까? 당연히 심리적 공황 상태가 오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닌 주변 족속들에게도 땅을 주셨다니! 이 점과 관련해서 유사한 신탁을 전하고 있는 <아모스>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담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 하였느나”(암 9:7). 선지자의 말인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해방을 누릴 때, 주변 다른 민족들도 같은 경험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일부 <성경> 사본에는 10-12절을 괄호로 처리하고 있거나, 또는 문단을 들여 새로운 단락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이거나 수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12절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을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2:12).
c’: 야훼의 전쟁(2:26-3:11). ‘에돔’과 ‘암몬’ 다음으로 이어져야 할 ‘모세’의 화고담은 당연히 ‘모압’에서 있었던 일련의 에피소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민수기>는 “발람 이야기”를 포함해서 길고도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서 겪었던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길고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신명기>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대신에 ‘요단’ 동편에서 이스라엘이 치른 두 전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헤스본’과의 전쟁이다. <신명기>는 이 나라 왕 ‘시혼’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2:30). 하나님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 족속들에게는 각기 거주할 땅을 주셨지만, ‘시혼’에게는 강퍅한 마음과 굳은 심령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굳게 하신 이가 여럿 더 있기는 하다: 이집트의 ‘바로’ 왕이 있고(출 9:12; 10:1, 20, 27; 11:10), ‘여호수아’에 대항했던 ‘가나안’ 족속들이 있다(수 11:20).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다 자멸을 자초한 자들이다. 이들의 운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결정조차 통제하고 좌우하신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즉 그 마음의 뜻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할까!
두 번째 전쟁 상대는 ‘바산’의 왕 ‘옥’이다. <민수기>는 이 전쟁에 대하여 단 세 구절로 언급하고 있는 것에 반해, <신명기>는 열한 구절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이 나라의 왕 ‘옥’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앞서 2:10-12나 3:11의 경우에서 보듯이, 후대의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아직도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3:11a).
b’: 요단 동편의 땅(3:12-17). ‘시혼’과 ‘옥’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민수기>에서 이미 기록한 바 있다(민 21:21-35). 이곳에서 다시 그 사실을 회고하는 이유는 ‘요단’ 건너편의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옥’과 같은 거인(그의 침상의 길이가 무려 4미터가 되는)을 물리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그 땅의 거인 ‘네피림’을 물리치는 일은 문제도 없을 것이다.
a’: 그 땅을 취하라(3:18-22). 이 시점에 ‘요단’ 동편 땅을 두 지파 반, 즉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하는 일은 ‘가나안’ 정복 이후 그 땅에서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를 위한 일종의 사전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3:21).
전환 구절 2(3:23-29). ‘모세’는 정말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을까? ‘모세’의 탁월한 기도는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구원해주었던가! 그러한 그가 이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다. ‘모세’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그 원인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최후 통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26-28).
<민수기>는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한 이유를 ‘므리바’의 반역에서 찾고 있지만(참고. 민 20:2-13), <신명기>에 따르면 그 사건은 단지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일 뿐이다. 결국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을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그리고 있다. <신명기> 전체를 통해서 ‘모세’의 임박한 죽음이 배경음악처럼 흘러나고 있지만, 그가 죽기 전에는 이 백성은 결코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다.
4.2. 제 2부: 내부 구조-설교
책의 제 2부는 교차대구의 두 개의 내부구조(B/B’) 중에서 그 첫 번째(B)에 해당하는 4-11장의 내용이다(도표의 노란 색 부분).
이 단락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를 포함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내부구조(B)는 아래에서 보는 바처럼, 다시 자체적으로 교차대구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수하라(4:1-40)
b ‘모세’가 세 성읍을 구분함(4:41-43)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라(4:44-6:3)
d 이스라엘아 들으라(6:4-7:11)
e 순종하면 축복이(7:12-26)
e’ 불순종하면 멸망이(8:1-20)
d’ 이스라엘아 들으라(9:1-29)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라(10:1-7)
b’ ‘야훼’께서 ‘레위’ 지파를 구분하다(10:8-11)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행하라(10:12-11:25)
a: 야훼의 법을 준수하라(4:1-40). 제 4장에 이르러 설교의 분위기가 역사적 회고에서 권면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도 역사적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제 3절에서 ‘바알브올’ 숭배에 관한 에피소드(참고, 민 25)나, 9-14절에 등장하는 ‘호렙’ 산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언급(참고, 출 19-20) 등을 들 수 있다.
제 4장은 책 전체의 신학적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곳으로, ‘모세’의 각별한 관심사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누릴 것인가에 있다. 성공의 조건에 대한 ‘모세’의 처방은 단순명료하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4:1).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각종 유혹, 특히 거부하기 힘든 우상숭배에 대한 유혹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15-19, 23, 25절).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세’가 우상의 형상을 열거할 때, <창세기>(1-2:4a)에 등장하는 피조물들을 역순(逆順)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자와 여자의 형상; 짐승과 가축의 형상; 새의 형상; 땅에 기는 곤충의 형상; 물고기의 형상; 해와 달과 별들의 형상; 하늘의 모든 천체물들의 형상.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종의 반역 내지는 전복 행위(bouleversement) 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역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도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비록 그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지만(22절), 이스라엘은 살아남기를 바란다(1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당위성은 그분이 질투하시는 신이시며,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이다(24절).
마지막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이유가 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 땅에서 추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방 족속들을 그 땅에서 몰아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똑 같이 하실 수 있다(38, 27절). 그런데 이스라엘의 추방에 관한 이 예언은 ‘모세’ 이후의 편집적 삽입은 아닐까? 모두가 인지하고 있듯이,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추방은 주전 587년 ‘유다’의 “바벨론 유수”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자라면 분명 후대의 인물임이 분명하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아주 짧은 ‘다윗’의 재위 기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자신보다는 강한 주변 국가들의 위협 속에 살았으며, 따라서 언제든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그 땅에서 추방당할 위험은 상존하고 있었다(<사사기>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은 주전 2,000-1,000년 사이에 광범위한 규모의 정복이나 국외 추방 등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이처럼 “사후 예언”(vaticinium ex eventu)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추방이 하나님의 최후통첩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며 소멸하는 불이기는 하다(24절). 그리고 그분 외는 다른 신은 없다(35절). 그분의 음성은 들을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1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시며,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며, 멸하지도 않으시며,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 하실 것”이다(31절). 이 위대한 ‘모세’의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40절).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배교자나 그 땅에서 추방당한 자들도 종국에는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30절). 설령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이 닫히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고집 때문이지,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과 그분의 계명을 잊을 수 있을지라도(9절), 하나님은 그 백성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31절).
b: 세 성읍(4:41-43). 교차대구의 두 번째 단락은 ‘요단’ 동편에 위치할 세 개의 도피성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다(도피성에 관한 주제는 19:1-13에서 여섯 개의 도피성을 다루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모세’는 이 책에서 두 번째로 제 삼인칭으로 나타나고 있다(그가 삼인칭으로 처음 언급된 곳은 1:1, 5에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단락의 주제에 관해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단락이 문맥 상 위치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이 주제가 이곳에 느닷없이 등장해야 하는가? 혹시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의 결과라면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고 의도적이라면, 이 단락이 앞선 제 4장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연결고리를 찾아보자면, 그 설명은 이러하다. 즉 모세’는 그의 첫 번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은 삶과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결론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면 언약의 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저주가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도피성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도피성으로 피신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성을 떠나면 그는 복수의 대상이 되고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도피성 역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4장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분의 계시는 그 자체로서 도피성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설명 방식은 없을까? 그것은 제 2부 전체가 위에서 본 바처럼, 교차대구적 형식(abcdee’d’c’b’a’)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두 번째 단락(b)과 그와 대칭에 있는 단락(b’)이 불가분의 대칭적 관계에 있음을 이해한다면, 나름대로 두 번째 단락(b)의 현 위치가 전혀 잘못된 것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뒤에 보게 되겠지만(12-26장), 때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규례나 계명들이 하나의 단락 속에 묶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들 속에 공통적으로 핵심 단어나 구절, 또는 궁극적으로 공통적인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단락(4:41-43)은 ‘모세’의 처음 설교와 두 번째 설교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단락의 핵심 주제는 전후 두 설교에서처럼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c: 이것이 그 율법이라(4:44-6:3). ‘모세’의 두 번째 설교는 처음 때처럼(참고. 1:1-5), 간략한 장면 소개가 있은 후(4:44-49), 제 5장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의 청중은 “온 이스라엘”이다.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바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들으라는 것이지, 현자(賢者)의 충고나 명상을 들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번째 설교는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한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오늘”이라는 단어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5:1);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11:32).
두 번째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설교에는 두 가지 특기할 만 한 사항이 있다: 첫째, ‘모세’는 그의 청중들에게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 조상들”이 아니라,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다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다(5:2-3). 여기서 우리라 함은 출애굽 당시 아직 유아(幼兒)였거나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말한다. 지금은 이들이 ‘모세’의 청중들이다. 그런데 앞에서는 정 반대로 말한 바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4:31).
이 두 설교는 분명 서로 충돌하고 있다. 과연 하나님은 누구와 언약을 세우셨는가? 바로 여기에 <신명기>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출애굽 제 일 세대와 언약을 세우셨다. 그분은 지금 새로운 언약을 제 2세대와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구약> 전체를 통해서 언약은 하나뿐이다. 언약이 복수(複數) 형태로 등장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따라서 지금 ‘모세’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 옛 언약을 지금 이 세대와 새롭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옛 언약이 미비하거나, 아직 제대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대를 위하여 추가로 새롭게 무엇인가를 더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에게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것을 다 하셨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 한 사항은 이곳에서 십계명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십계명은 출 20:1-17에서 처음 등장한 바 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 십계명이 상당부분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그 차이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개론>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신명기>에서 십계명을 다시 한 번 낭독하는 의미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좋겠다. ‘모세’의 처음 설교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고 있다면, 두 번째 설교에서는 ‘시내’ 산 율법을 회고하고 있다.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법이 불변하며, 영원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나, 살인이나, 탐욕이나, 도적질 등에 관해서 새로운 버전(version)의 뜻을 발표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서 일부 세부 조항들에 대한 각색이나 수정 등은 있을 수 있다. 이는 헌법에 수정 조항들이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십계명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실은 모든 세대에 걸쳐 확고하게 정립되어 수정이나 변경이 있을 수 없다. 예컨대, 십계명에서 탐욕에 관한 조항이나, 부모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빼버리는 것은 우리 헌법에서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조문을 삭제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세대를 위하여 옛 계명을 단순히 다시 한 번 낭독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옛 계명은 지금 나의 계명이 되며, 지금 내 삶과 삶의 방식을 규정짓는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역사를 지금 현재 나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다. 세대는 달라졌어도 법은 하나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주의 성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나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기념하는 것이나, 그 기능하는 바나 목적하는 바에 있어서는 사실상 동일하다 할 것이다. 즉 과거의 사건을 오늘 나의 사건으로 육화(肉化)하는 일을 말한다.
십계명을 낭독한 후,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이 두려워 떨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5:23-27), ‘모세’로 하여금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자 노릇을 해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도 이에 동의하셨다(5:28-29). 흥미롭게도 하나님도 이 백성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그의 계명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5:29). 즉 순종과 순응은 하나님께서 강압적으로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탈무드>에도 이와 비슷한 금언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마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구절들이 기능하는 바는 백성의 중보자로서의 ‘모세’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오직 그만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의 중보자가 있을 뿐이다. 그의 권위는 백성이 원했던 바이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승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백성의 교사이며, 그의 말은 권위를 지닌다.
십계명을 반복 낭독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 됨”의 주제가 이렇게 하여 5장 중반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율법도 하나요, 중보자도 하나이다. ‘모세’의 이와 같은 각별한 지위나 명성은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두 번의 설교를 비교해 봄으로써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두 번의 설교에서 “우리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의 사용 빈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비교해 봄으로써, 중보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첫 번째 설교(1-4장)에서 두 호칭의 사용 빈도는 각각 10회와 28회로서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두 번째 설교에서는 “너희의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1-4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우리의 하나님”은 5-28장 사이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설교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동료 백성으로 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두 번째 설교부터는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자로서의 그의 우월적 지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d: 이스라엘아 들으라(6:4-7:11). 이곳은 그 유명한 ‘쉐마’([m'v])가 등장하는 곳이다(‘쉐마’란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6:4). 사실 이 구절에 대하여 다양한 번역이 알려져 있으나, 어떤 번역본을 택하든 기본 정신은 동일하다. 즉 이 구절은 유일신(唯一神) 사상에 대한 표준 구절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다시 한 번 5장에서 이어져오는 “하나 됨”(Oneness)의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하나의 언약, 하나의 계명, 한 중보자, 그리고 한 분 하나님.”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인가? 한 마디로 <신명기> 6장은 5장에서 다룬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좀 더 풀어 설명한 곳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6장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을 상기시키고 있는지 참고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그분에 대한 사랑은 곧 그분의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는 이곳과 다른 여러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6:5)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6:6)을 나란히 놓고 있다(참고. 10:12; 11:1, 13, 22; 19:9; 30:16). 예수님께서도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다만 이스라엘의 ‘쉐마’는 단순히 ‘야훼’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선언 그 이상이다. 즉 이 선언에는 존재론적(存在論的) 차원의 유일신 사상을 뛰어넘은 의미가 있다. 이 선언이 강조하는 바, 유일하신 하나님은 역사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는 점이다. 즉 역사 속에서 드러난 그분의 행위는 항상 일관되고 신실하셨다는 의미이다. 상황에 따라 달리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여러 신들이 각자 다르게 행동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그리스 신화의 다신론적(多神論的) 세계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3:21-31)에서 이점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즉 구원의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원칙,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로움”에 입각해서 일관되게 행동하시는 분으로서, 그 점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곳에서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이방인에 이것을, 유대인에 대해서는 다른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다른 두 신이 다른 요구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 해결책도 같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쉐마’(6:4)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수학적인 숫자 그 이상이다. 그것은 윤리적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요청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과 우리에 대해서 일관되고 신실하다면,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 역시 그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쉐마’는 다음과 같은 요구를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쉐마’는 선언과 요청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쉐마’의 두 부분, 즉 “하나님은 하나”(4절)라는 선언과 “하나님을 사랑하라”(5절)는 요청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도 그러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청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라는 사실은 그것이 세대를 불문하고 변치 않는다는 뜻이듯이, 그분이 하나라는 사실은 그분이 세대를 불문하고 변치 않으시며,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되며,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정성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자격을 가진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미온적으로 대할 수는 없다. 그분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라는 요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참고. 6:6).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대를 이어서 전수되어야 할 것이다(참고. 6:7-9).
‘모세’가 그 백성에게 일관되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 즉 사랑과 두려움과 순종만이 제대로 된 반응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경험했고, 광야에서, 인도와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 땅도 그분의 은혜로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곳 6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책임을 적절하고 균형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1-9절과 12-19이 이스라엘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면, 10-11절과 20-23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e/e’: 언약의 축복과 저주(7:12-26/8:1-20). <신명기> 7-8장은 책의 제 2부의 교차대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참고. (abcde//e’d’c’b’a’), 이른바 “신명기적 사관”(史觀)의 진수, 즉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을 여과 없이 잘 드러내고 있다. 제 7장이 순종에 따른 언약의 축복을 강조하고 있다면, 제 8장에서는 불순종에 따른 언약의 저주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7장을 어쩔 수 없이 전반(1-11절)과 후반(12-26절)으로 나누어 두 단락으로 삼기는 했으나, 내용 상 딱히 두 단락으로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7장의 후반이 언약의 축복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7장 전체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적절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면(6장의 주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주변 국가들과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 이 같은 관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주변 민족들에 비해 강력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왜소한 난장이에 불과하다. 이웃과의 관계 설정에 관하여 ‘모세’의 충고는 분명하고 명쾌하다. 하나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것이다(7:1-5). 두 번째 충고는 이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7:17-26).
이 같은 충고를 하는 이유는 이중적이다. 이스라엘은 그 규모에 있어 큰 나라가 아니다(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거룩해야 할 소명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7:6).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오경>의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이기는 하나(예. 출 19:6; 22:31; 레 11:44-45; 19:2; 20:7, 26), <신명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즉 이스라엘은 이미 거룩하다는 선언이 그것이다(신 7:6; 14:2, 21; 26:19; 28:9). 그러니까 거룩은 <오경>의 경우 앞으로 성취해 나가야 할 그 무엇이라면, <신명기>에서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그 무엇인 셈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약속의 수혜자이다. 주변 민족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인 것이지 이스라엘의 문제는 아니다(7:8-9, 20-24),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울 일이지(6:6), 스스로 자신의 말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들을 쫓아낼 수 있으리요”한다면(7:17), 그 결과는 불안과 공포와 충격뿐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하지만(6장), 동시에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하며(7장),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8장).
이스라엘은 주변 족속들을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에 대해서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대해주셨는지 기억해야 한다(참고. 8:2). 이 요청은 그분께서 이집트에서 ‘바로’ 왕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기억하라는 요청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7:18). 하나님은 ‘바로’를 낮추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역시 낮추셨다(출 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낮추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8:2).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에 비유할 수 있다(창 22:1; 22:12). 어떤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8:7-10). 이곳 8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광야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대조는 더 이상 생생할 수가 없다. 성공과 풍요에 이른 사람은 그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가 받았던 도움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8:17)고 말하는 모습은 <이사야>야 그리고 있는 ‘루시퍼’의 모습 그것이다(참고. 사 14:12-14; 겔 28:1-10). 천사장 ‘루시퍼’는 바로 이와 같은 교만과 자기 확신 때문에 추락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 같은 치욕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이 ‘모세’의 처방은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셨고(8:14),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셨으며(8:15, 16),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8:18).
이제 ‘모세’의 설교를 듣는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1) 아무 것도 기억하지 말라(참고. 8:2, 16)
(2) 헛된 생각을 품어라(8:14)
(3) 풍요에 탐닉하라(8:13)
(4) 사이비 목자에게 의지하라(8:19)
d’: 이스라엘아 들으라(9:1-29). 이곳과 이어지는 두 단락(9:1-10:11)에서 다루는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 ‘시내’ 산에서 있었던 황금 송아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출 32-34). 사실 이 사건은 일어난 순서로 볼 때, ‘모세’의 첫 번째 설교에서 회고하고 있는 모든 역사적 사건보다 앞서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뒤늦게 이곳, 즉 ‘모세’의 두 번째 설교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편집적 오류는 아닐까?
이 내용이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두 단락(6:4-7:11/9:1-29)이 단락이 교차대구의 대칭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두 단락은 공히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두 단락이 내용적으로도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이, 모두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사소한 차이가 있다면, 앞 단락(d)에서 불순종의 사례로 ‘마사’의 사건(출 17:1-7) 하나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에 비해, 두 번째 단락(d’)에서는 ‘마사’ 에피소드 외에도 ‘다베라’ 에피소드(민 11:1-3)와 ‘기브롯 핫다아와’ 에피소드(민 11:31-34)를 추가로 더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이곳에서 황금 송아지 사건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소 자유롭게 회고하고 있다. 예컨대,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시내’ 산을 내려오기 전에 백성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출 32:11-14). 그러나 <신명기>는 그 일이 ‘모세’가 하산(下山)한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9:18-20). 또한 <신명기>는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의 일로 두 번째로 중보기도를 드린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9:25-29), 그 앞에 그 일과는 상관도 없는 세 개의 다른 에피소드를 삽입하고 있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들로서, ‘마사’ 에피소드, ‘다베라’ 에피소드, 그리고 ‘기브롯 핫다아와’ 에피소드를 말한다. 아마도 황금 송아지 사건과 같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어떤 일회성이나 단발성에 그치는 사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고질적인 문제임을 드러내고자 함일 것이다. 또 하나 ‘모세’가 새롭게 소개하는 정보는 황금 송아지 사건 이후 언약을 새롭게 맺는 일과 관련해서이다(신 10:1-5; 출 34). 즉 ‘모세’는 언약의 두 돌 판을 새롭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무 궤 하나를 더 받았다. 나무 궤에 관한 내용은 <출애굽기>에는 없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모세’가 황금 송아지 사건과 언약의 갱신과 관련한 내용을 이곳에서 들려주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이 내용은 ‘가데스-바네아’ 에피소드(민 13-14)와 더불어 <신명기> 벽두에서(신 1:19—46) ‘모세’가 비교적 소상하고 길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다. 이들 두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바는 우상숭배와 불신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양대 죄악이다(신 9:12). 이 두 사건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겠다고 위협했던 이유가 되었으며(출 32:10), 실제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기도 했다(민 14:23). 이 두 사건은 ‘모세’의 중보적 위치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백성의 불순종과 ‘모세’의 중보라는 틀에서 이 두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9장 이야기는 A-B-A’-B’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A) 백성의 불순종(9:7-17); (B) ‘모세’의 중보(9:18-21); (A’) 백성의 불순종(9:22-24); (B’) ‘모세’의 중보(9:25-29).
이렇게 볼 때, 9:22-24의 단락도 우연히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 같지는 않다. ‘모세’가 차례로 회고하고 있는 과거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세 사례, 즉 (1) ‘다베라’ 사건(민 11:1-3), (2) ‘마사’ 사건(출 17:1-7), (3)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민 11:33-34)은 이들이 발생한 연대순으로 바로잡자면 ‘마사’-‘다베라’-‘기브롯 핫다아와’의 순서로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모세’의 중보의 기도가 없다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있었던 일은 또 다시 일어날 것임을 제 25절은 시사하고 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시겠다 하셨으므로”(25절).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니라(10:1-7). 또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황금 송아지 사건 이후 언약을 새롭게 맺는 일과 관련해서(출 34), ‘모세’가 새롭게 소개하는 정보는 나무 궤(机, ark)에 관한 내용이다. 즉 ‘모세’는 언약의 두 돌 판을 새롭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무 궤 하나를 더 받았다. 이 정보는 <신명기>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내용이다. 혹자는 이곳 <신명기>에서 이 궤의 역할은 하나님의 임재나 그분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약의 두 돌 판을 보관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참고. 10:5). 그렇다면 <신명기>에서 법궤의 의미가 어떤 신비스러움에서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차원으로 변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모세’는 여기서 궤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함으로써, 새롭게 갱신한 언약이 안전하고, 견고하며, 동시에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 궤의 존재는 황금 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 하려했던 이전의 시도와는 충격적인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법궤가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합법적인 상징이라면, 화금 송아지는 불법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이 만든 두 돌 판을 그 궤에 넣었다고 말함으로써 중보자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고, 또 그 궤가 “지금까지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불변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5절 참고).
b’: 야훼께서 레위를 구분하다(10:8-11). 이 단락은 교차대구 내의 대칭관계에 있는 단락 b(4:41-43)처럼 일종의 전이 구절의 기능을 하고 있다. 전이구절이라 함은 이어지는 단락에 대한 신학적 배경을 마련해준다는 말이다. 두 단락에서 핵심 단어는 “구별하다”(ld'B;, 바달)이다. 앞선 단락(4:41-43)이 요단 동편의 세 개의 도피성을 별도 구분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곳에서는 ‘레위’ 지파를 구분하는 것에 대한 설교다. 두 단락에서 차이가 있다면 구분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점인데, ‘모세’가 세 성읍을 구별하였다면(4:41),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10:8). 이 단락의 내용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야훼 ’께서 ‘레위’를 구별하여 그분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하셨다(8절)
(2) ‘레위’는 분깃이 없고, ‘야훼’가 그의 분깃이다(9절)
(3) ‘야훼’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너를 보존하셨다(10절)
(4) ‘야훼’께서 ‘모세’로 하여금 다시 그 백성을 인도하도록 하셨다(11절)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행하라(10:12-11:25). 교차대구의 처음과 마지막 두 단락(a/a’)은 모두 동일한 구절 “이스라엘아, 이제”로 시작한다(4:1; 10:12). 처음 단락의 초점은 ‘야훼’ 하나님의 “기업”(분깃)으로서의 이스라엘에 있고, 두 번째는 가족의 “기업”(분깃)으로서의 “그 땅”에 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깃이요,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분깃이다. 비록 두 번째 단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처음 단락과 다소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즉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요청이다(참고. 10:12).
왜 그래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기업(분깃)으로 선택하였고, “아브라함 언약”, 즉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번창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이루셨기 때문이다(참고. 10:15, 22). 이 단락의 구조는 또 다른 교차대구를 이루면서, 그 중심에 그 땅, 즉 이스라엘의 “기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주제는 앞선 단락(a)에서는 부차적으로 중요한 주제였다:
A10:12-2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야훼를 두려워하라
B 11:1-9 ‘야훼’를 사랑하고 광야에서 그분이 행한 일을 기억하라
C 11:10-12 약속의 땅
B’ 11:13-21 모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하고 섬기라
A’11:22-25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위 구조에서 보듯이, 이 단락 전체는 형식 상 일종의 권면을 설교로서, 내용적으로 권면에 이어 순종의 동기가 교대로 등장하고 있다: 권면(10:12-13); 동기(10:14-15); 권면(10:16); 동기(10:16-18).
이곳에서 각별히 흥미로운 점은 ‘모세’가 백성을 향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권면이다(참고. 10:16). 그러니까 <신명기>와 같은 오래된 책에서조차 진정한 할례란 단순히 육체적 할례만을 의미하지 않고, 마음의 할례를 뜻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특별한 권면은 ‘모. 세’의 유사한 권면과 공명을 이루고 있다(참고. 6:6-8; 11:18-21). 즉 하나님의 계명은 우선 마음에 새기고, 그 다음에 손과 눈과 문과 문설주에 새겨야 한다는 권면을 말한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도 그 특징 중의 하나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법이다(렘 31:33). 결국 새 언약이란 것도 대부분 옛 언약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 언약조차 새롭게 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 교차대구에는 들지 않지만, 11장의 나머지 단락(11:26-32)은 일종의 전환(전이) 구절이다. 즉 앞의 내용과 뒤 이은 내용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세 개의 목록은 이어지는 제 3부에서는 역순(逆順)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세 개의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축복과 저주(11:26-28 과 28장); (2)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한 ‘세겜’에서의 의식(11:29-31과 27장); (3) 하나님의 율법(11:32과 12-26장). 이제 이른바 <신명기>의 법들을 공표할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4.3. 제 3부: 중심 구조-언약 조항
서론. 책의 제 3부는 교차대구의 정 중앙에 위치한 단락 C에 해당한다(도표의 노란 색 부분). 모두 열다섯 장에 달하는 이 부분은 <신명기>의 핵심 단락으로서, 이른바 신명기 법이 이곳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이곳에서만 새롭게 등장하고 있지만, 또 다른 일부는 <오경>의 다른 곳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거나, 또는 이곳에서 새롭게 수정한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들 법들이 왜 이곳 세 번째 단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신명기>는 책의 벽두에서부터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1:5). 그런데 정작 이어지는 내용은 그 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역사적 회고에 이은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점 두 번째 단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단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4:44).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다시 한 번 역사적 회고와 이스라엘의 순종을 촉구하는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제 5장에서 십계명만 한 차례 등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정작 하나님의 계명을 처음부터 소상히 밝히지 않고, 두 번씩이나 역사적 회고로 대신하며, 구체적 내용 소개를 미루어 온 것일까? 여기서 그의 회고담이 하는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 추측건대, 이들 회고담은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것으로서, 실은 그분의 계명, 즉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곳에서(12-26장) 자신의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신 것이다(1-11장).
하나님의 기준은 진공상태에서 마련될 수는 없다. 그분의 은혜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거룩해지기 위해서 이들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거룩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거룩함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 것이다.
형식과 구조. 이 세 번째 단락과 관련해서 독자들을 가장 어렵게 하는 문제는 내적 상호 연관성의 문제이다. 즉 과연 무슨 원칙과 근거로 이곳에 등장하는 율법들을 배치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일련의 법들은 상호 어떤 내적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이런 저런 실로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중에서 신학자 카우프만(Kaufmann)이 제시한 견해가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책의 제 3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율법들은 십계명의 각 계명에 대한 해설 내지는 적용으로 볼 수 있고, 각 계명과 일련의 율법의 내용들과의 연관성은 아래 도표에 정리한 바와 같다:
1. 올바른 예배(12:1-8). 제 12장은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에 대한 적용 사례를 담고 있는 바, 그것은 올바른 예배와 우상 숭배에 관한 교훈과 경고다. 이와 관련해서, ‘모세’는 이른바 “단일 성소”(單一聖所)를 강조하고 있으며, ‘가나안’의 이방 예배를 경고하고 있다. <신명기>의 모든 율법의 기저에는 종교적 배교에 관한 두려움이 흐르고 있다. 이중 가장 끔직한 배교 행위는 가나안의 이방 제사를 따르는 행위이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이전 세대가 직전 ‘모압’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나안’의 이방 제사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따라서 그 땅에 들어가면 모든 ‘가나안’의 신전들과 우상을 파괴해야만 한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참고. 1-5절).
이스라엘은 아무데서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서만 예배와 십일조와 서원과 기타 희생제물을 드려야 한다(12:13). 예배와 관련해서 부차적인 규례는 이것이다: 즉 전통적으로는 고기를 먹는 행위는 제사의 한 부분으로서 화목제사의 경우 일반인은 희생제물을 제사장과 나누어먹을 수 있었으나, 앞으로 새 땅에서는 예배 장소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에는 누구든 제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으되, 다만 그 피 채로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12:15-28). 이처럼 다소 완화된 규정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 ‘가나안’ 신전을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제 12장에서 드러나는 일련의 대조적 표현을 눈여겨 볼만하다. 가장 먼저, “여기”(8절)와 “그기”(7절)의 대조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8절). 그리고 또 다른 대조는 “그들의 신들”(2절)과 “너희 하나님”(4절), “그들 이름”(3절)과 “그의 이름”(5절), 그리고 “잘못된 예배 장소”와 “야훼께서 택하신 장소” 등이 있다.
이 두 번째 대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이곳 12장에서의 진정한 문제는 단일 성소인지 다수의 성소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와 잘못된 예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처음(2-4절)과 마지막(29-31절)에 우상과 이방 제사를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이스라엘 종교 행사의 특징은 즐거움에 있는 것이지(7, 12, 18절), 그 어떠한 무시무시한 죽음의 요소도 없다.
2. 하나님의 이름(13:1-14:27). 이 단락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1) 우상 숭배자의 문제; (2) 거룩한 청지기의 삶.
(1) 우상숭배자의 문제(13장). 제 12장이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라면, 제 13장은 우상 숭배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자(前者)의 경우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우상의 신전(神殿)과 우상숭배와 관련한 일체의 흔적들을 다 없애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유혹이 말도 못하는 ‘앗세라’ 목상(木像)이나 형상이 아니라, 우상숭배자로부터 올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유혹은 거짓 선지자의 신탁을 통해서도 올 수 도 있고(13:1-5), 가족의 일원일 수도 있고(13:6-11), 또는 선동가들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13;12-18). 각 경우 이스라엘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해야만 한다: 그가 누구든 죽여야 한다(5, 9-10, 15-17절). 때로 한 집단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그 집단과의 성전(聖戰)을 통해서라도 처리해야 한다.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사후 회개 등을 통해서 구제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다.
우상숭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세 가지 각각의 경우마다 그 유혹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첫 번째 경우가 거짓 선지자나 꿈꾸는 자로부터 오는 유혹인데(1-5절), 이들은 대개 기적이나 이사를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택한 백성조차도 쉽게 헷갈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들에 대해서 경고하신 바 있기도 하다(마 24:24). 두 번째 유혹 역시 물리치기가 쉽지 않은 것이, 그 출처가 가족의 일원이거나, 친척이거나 또는 내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6-11절). 이럴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참고. 막 8:33). 앞 장에서는 예배와 즐거움과 축제의 장소로서의 가정에 대해서 말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는 가정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 가정이 격려와 위안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거침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가 그것이다. 세 번째로 가능한 우상숭배의 유혹은 일반 시정잡배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이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쉽게 수용해 왔다. 어떻게 집단 전체가 이단에 빠질 수 있을까? 이들 모두가 잘못될 수가 있을까? 사교 집단이 가능할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우리나라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많은가!). 이럴 경우 <오경>은 속죄제 등을 통해서 공동체나 집단의 죄를 사하여 주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기는 하지만(참고. 레 4:13), 그것은 의도적이 아닌 범죄에 대한 경우다. 우상숭배나 배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적이며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2) 거룩한 청지기(14장). 이스라엘은 이미 거룩한 존재이므로,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이 요구와 관련하여 세 영역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에 대한 태도(1절하); 식 습관(3-21절); 소유에 대한 자세(22-29절).
① 먼저 죽은 자에 대해서는 이방인이 보여주는 방식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 ‘모세’의 법이 요구하는 바다(1절하). 즉 자기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미는 것 등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② 두 번째는 음식과 관련된 법으로서, 비교적 길고 상세하게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3-21절). 우선 음식과 관련된 대 원칙은 어떠한 가증한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 <신명기>에서 이 단어는 ‘가나안’ 족속이 먹는 음식을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식용 가능한 짐승과 불가한 짐승의 목록은 ‘가나안’ 족속의 식습관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더 이상은 확인할 길이 없다. 식용 금지된 짐승의 목록은 <레위기>(11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순서와 일치하고 있다:
네 발 달린 땅의 짐승(레 11:2-9; 신 14:4-8)
물고기(레 11:9-12; 신 14:9-10)
조류(레 11:13-19; 신 14:11-18)
날아다니는 곤충(레 11:20-23; 신 14:19-20)
③ 제 14장의 나머지 절반은 십일조 전반에 관한 법으로서, 십일조에는 매년 드리는 십일조(22-27절)와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28-29절)가 있다. 칠년의 기간 동안 이 첫 번째 십일조는 1, 2, 4, 5년째에 드렸으며, 두 번째 십일조는 3년째와 육년 째 되는 해에 드렸다. 그리고 칠년 째 되는 해에는 당연히 아무런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 그 해는 안식년으로서 아무 소출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참고. 출 23:10-11; 레 25:2-7).
그런데 음식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번에는 그 강조점이 고기가 아니라 곡식과 씨앗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동안의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언급(예배드리지 말라, 먹지 말라 등)에서 “하라”는 긍정적인 언급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십일조는 토지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이 원칙이나, 예외적인 규정도 있었던 것이(원거리에 사는 사람의 경우), 돈으로 바꾸어 드릴 수도 있었다(25절). 더 나아가, 순례 중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십일조를 먹는 것도 허용되었으며(23절), 필요시에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사서 자신이 먹을 수도 있었다(26절).
다만 거룩한 절기나 축제는 자신이나 가족만의 것으로 누려서는 안 된다. 이 기간은 문을 열어 가난한 자나, 고아와 과부, 레위 인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악한 친구를 멀리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만(13:17-19), 이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부른다(14:29하).
3. 안식(14:28-16:17). 이 단락은 안식년과 안식과 관련한 일련의 주제, 즉 노예와 첫 태생에 관한 규례, 기타 이스라엘의 축제들에 관한 규례들을 다루고 있다. 일견 이들 각각의 주제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들 모두는 “쉼” 즉 “안식”의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들이다.
(1) 매 삼년. 그 첫 번째 주제가 “매 삼년”마다 이스라엘이 자신이 가진 소유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참고. 14:28-29). 직전의 단락(14:22-27)에서 이스라엘이 매년 드리는 십일조를 다룬 바 있어, 이곳에서는 그 십일조를 드리는 시기와 관련해서 3년째의 규례를 추가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제는 15장으로 이어지면서, “매 칠년”마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15:1). 즉 안식년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다.
(2) 매 칠년. 안식년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출 23:10-11). 그곳에서 강조점은 가난한 자나 짐승들을 위하여 땅을 휴경(休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처럼, 가난한 자의 빚을 탕감해 준다거나(참고. 신 15:1-6), 또는 그들에게 꾸어주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참고 신 15:7). 그러니까 <신명기>에서 안식년은 단순히 땅을 휴경하는 외에 빚을 면제해 주는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땅을 휴경하는 목적은 <레위기>에서도 다루고 있는 바처럼(레 25:1-7), 가난한 자와 그의 가족이 그 땅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는 곡식으로부터 양식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레 25:6).
(3) 노예에 관하여. 12절부터 안식년에 관한 문제에서 노예 해방에 관한 규례로 주제가 바뀌고 있다(12-18절). 그런 점에서 안식의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이 주제는 <출애굽기>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출 21:2-11).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두 기록은 전혀 다르다. 첫째, <출애굽기>는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출 21:2-6, 7-11). 그러나 이곳에서는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신 15:12). 둘째, <출애굽기>에서는 남자 노예는 육년이 지난 후에 놓아주도록 정하고 있으나, 여자 노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출 21:7). 셋째, 만일 남자 노예가 남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선택권이 있으며(출 21:5), 이점 <신명기>에서도 동일하다(15:17b). 넷째, 만일 남자 노예가 남기를 원한다면, 주인은 그의 귀를 뚫어 그 증거로 삼을 수 있다(출 21:6). <신명기>에서도 이점은 마찬가지이다(신 15:17b). 다섯째, <출애굽기>에서는 주인이 노예의 귀를 뚫을 때는 반드시 그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말한다(출 21:6).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이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주인은 노예를 내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선물을 주어야 한다(신 15:13-14). 그러나 <출애굽기>에서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두 책에서 왜 이와 같은 차이들이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노예와 관련하여 <오경>에서 밝히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차제에 알아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우선 이스라엘은 동료 유대인을 노에로 삼을 수 없다(레 25:39b). 이방 족속들만을 노예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레 25:44-45). 단 두 가지 예외적 경우에 한해서 동료 유대인을 노예로 삼을 수 있다: 하나는 극도로 가난한 자가 스스로를 노예로 파는 경우이며(참고. 레 25:39), 다른 하나는 도적질한 것에 대한 피해 보상을 할 경제적 여력이 없을 때, 강제적으로 노역을 해야 하는 경우이다(출 22:3). 따라서 일부 번역본에서 유대인이 노예로 팔리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번역 상의 오류로 보아야 하며, 정확한 번역은 “스스로를 판다”는 것으로 바로잡아야 한다(예. 신 15:12).
따라서 이 책에서 등장하는 노예 법은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유대인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를 사는 주인은 그를 자신의 영원한 부속물이나 소유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기본 정신이 이 법속에 깔려 있다 하겠다. 매 칠년마다 노예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 법은 궁극적으로 안식년 법의 정신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 첫 소산에 관하여. 다음으로 이어지는 규례는 가축의 첫 태생들에 관한 것이다(19-23절). 그런데 왜 이 법이 이곳에 있어야 할까? 첫 태생에 관해서는 이미 12:17에서 다루지 않았는가? 한 가지 흥미로운 관찰은 오직 <신명기>에서만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은 부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15:19). 이 법은 유대인 노예 법과 일종의 대응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15:12, 18). 여기서 지목하고 있는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은 유월절에 희생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들이기도 하다(16:2).
결국 첫 태생에 관한 이 단락 역시 안식이라는 큰 주제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십일조: 매년(14:22)
② 매 삼년 십일조: 매 3년 끝에(14:28)
③ 채무 면제: 매 7년 마다(15:12)
④ 노예 해방: 매 7년 마다(15:12)
⑤ 첫 태생 구분: 매년(15:20)
⑥ 순례 축제: 매 3년 마다(16:16)
이들 내용을 다시 보다 큰 단락으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은 A-B-B’-A’의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A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림(14:22-29)
B채무자의 빚을 면제해 줌(15:1-11)
B’노예 신분을 면제해 줌(15:12-18)
A’하나님에게 처음 난 가축을 드림(15:19-23)
(5) 거룩한 절기(축제). 숫자 3은 <성경>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다.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십일조와 안식에 관하여, 일 년/삼 년/칠 년의 묶음을 볼 수 있고(14-15장),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을 분류함에 있어서도 땅의 짐승/조류/물고기로 삼등분하고 있다(14장). 더 나아가 우상숭배에 관해서도 가능한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면(13장), 짐승을 먹되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규례도 세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12:16, 23; 15:23). 심지어 12장과 16장에서는 도합 여섯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같은 언급이 14장에서는 세 번 등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한 해 동안 기념해야 할 축제(절기)도 세 가지다: 유월절과 무교절(16:1-8); 칠칠절(16:9-12); 장막절(16:13-15).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요약문으로 끝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16:16). 노예를 내 보낼 때에 빈손으로 내보내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15:13),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나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6:17).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푸는 일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병행을 이루고 있다(참고. 15:7-11//16:17). 매 삼년마다 십일조를 저축하여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여행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베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매년 하나님 앞에서 즐기는 축제에 이들과 함께 즐겨야 한다(16:11, 14). 즉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결혼한 자나 미혼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위 세 절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오경>의 다른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참고. 출 12:1-28, 43-49; 23:14-19; 34:18-26; 레 23:1-43; 민 9:1-14; 28:1-29:39). 예컨대, 유월절의 경우 <신명기>와 <출애굽기>는 적어도 네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유월절에 필요한 어린 양의 피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에서는 분명하게 적시(摘示)하고 있지만(출 12), 이곳에서는 생략하고 있다(아마도 유월절이 각 가정에서 기념하는 사적인 차원의 절기에서 성막에서 드리는 공적인 차원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세 가지 정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출애굽기>는 고기를 먹되 삶거나/요리하지 말고, 그냥 불에 구워 먹으라고 명하지만(출 12:9), 이곳에서는 삶거나/요리해서 먹으라고 말한다(16:7).
② <출애굽기>는 유월절 고기로 가축 중에 어린 양을 잡을 것을 명하지만(출 12:3-5), 이곳에서는 소나 양 어느 것도 무방하다고 말한다(16:2). 이와 같은 차이 역시 유월절의 규모와 상관이 있어 보인다. 즉 소규모 가정 예배에서는 양으로 족하겠지만, 공동체 규모의 축제에서는 더 큰 짐승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③ 세 번째로 더 중요한 차이는 <출애굽기>에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두 개의 다른 축제로 다루고 있지만(출 12:1-13; 12:14-20), 이곳에서는 하나로 묶어 다음과 같이 연이어 언급하고 있다: 유월절(16:1-2) ⇒ 무교절(16:3-4a) ⇒ 유월절(16:4b-7) ⇒ 무교절(16:8). 이 절기가 원래 두 개의 다른 절기였는데, <신명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나로 통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4. 부모 공경(16:18-18:22). 이 단락의 핵심은 세속적인 문제나 종교적인 문제를 다룰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이나 왕을 세우는 일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역할이 마치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에 버금간다고 한다면, 이 단락이 십계명의 제 5계명과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할 수는 있겠다.
(1) 이 단락은 먼저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을 임명하라는 지시로 시작하고 있다(16:18). 그리고 세 번에 걸쳐 잘못된 예배에 관한 언급이 이어진다: (1) 나무로 ‘아세라’ 상을 만들지 말 것(16:21); (2) 주상을 세우지 말 것(16:22); (3) 흠이 있는 소나 양을 제물로 드리지 말 것(17:1). 그리고 이어서 우상숭배에 관한 언급과, 이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 방법이 등장한다. 우상숭배에 관한 재판과 처벌은 적어도 두 사람의 증거를 포함해서 철저한 조사를 거친 후에 결정된다(17:2-7). 그러나 사건이 너무 복잡해서 각 지역 재판관이 감당하기에 벅찬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즉 최고 재판 기관에서 다룰 것이다(17:8-13).
(2) 재판관과 지도자들의 임명에 관한 언급에 이어 17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스라엘의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17:14-20). 왕의 임명은 다른 지도자의 선출과는 다르다. 사사나 지도자들은 백성이 선출하지만, 왕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다.(17:15). 하지만 왕에 관한 이야기라면 왕국이 세워질 한참 이후의 문제가 아닌가? 왜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을까? 너무 이르지 않은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도자의 자질이나 역할에 관해서 다루는 이곳에서 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120년의 세월동안 이집트와 광야에서 왕과 왕국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있을 수 있는 가능한 국가적 위험 요소를 익히 알고 있는 ‘모세’가 아닌가! 이와 같은 경험이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왕에 대한 규례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왕의 책임에 대해서 먼저 부정적으로 언급한 후(15-17절), 이어서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18-20절).
문장 구조로 볼 때,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왕에 대한 규례는 12장에서 예배에 관한 규례는 일종의 반복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아주 흡사하다. 즉 훗날 그 땅에 살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12:20);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17:14). 이들의 요구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응하실 것이다: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12: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17:15). 하지만 하나님의 허락에는 조건이 있다: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12:16); “그는 병마와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 것이며”(17:16-17).
이처럼 예배와 공의(公義)에 관한 법을 길게 언급한 후(12:1-17:13), 왕에 관한 규례(17:14-20)를 더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당시 주변 국가에서 왕의 역할이란 결국 종교적 영역에서나 세속적 영역에서 최고 지도자로서, 사제(司祭)와 재판관(裁判官)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였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왕의 두 가지 책임에 관한 언급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신명기> 17장에는 그와 같은 언급이 전혀 없다. 왜일까? 이스라엘은 주변 왕국과는 혁명적으로 다른 형태의 국가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은 왕의 역할과 사제의 역할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신정(神政) 국가로서, 왕의 통치는 세속적 영역에만 국한될 뿐, 종교적 영역은 사제와 선지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3) 이어지는 18장에서 사제(18:1-8)와 선지자(18:9-22)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강조점은 이들의 자질이나 삶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이들의 생활을 지원할 것인가에 있다. 먼저 레위 지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서는 모든 레위 지파에서(1-2절),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들(3-5절)에게로, 그리고 각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들(6-8절)로 나아간다. 이들의 역할에 관하여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들의 특권과 그들에 대한 일반 백성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의존하고 있듯이, 제사장들이나 레위 인들은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길 수가 없듯이, 레위 제사장들 역시 다른 생계 수단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신명기>가 여러 곳에서 레위 인들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들은 법궤를 운반하며(10:8; 31:9, 25), 율법을 보관하고, 왕에게 그것을 가르칠 책임을 지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17:18); “여호와 앞에 선 그의 모든 형제 레위인과 같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나니”(18:7).
(4) 이어지는 관심사는 선지자들에 관한 것이다. ‘모세’는 이들에 관해서 언급하기 전에, 이방 종교에서 소위 신탁(神託)을 받기 위해서 행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 먼저 소개한다(18:9-14). 이 같은 방법은 그러나 이스라엘이 피해야 할 행습이다. 이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지혜나 지식에 의존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의 통로로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다. 선지자는 왕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나올 것이다(18:15; 17:15). 그가 신탁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17:19).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여 이르되”라든지, 또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되” 등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지자는 ‘모세’ 자신과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 아주 이례적으로 ‘모세’가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 지니라”(18:15). 그러니까 ‘모세’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를 위한 선지자의 전형(典型)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주 교만한 인물이거나 일 것이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바로 이 두 번째 ‘모세’를 가리키고 있다(행 3:20-25; 7:37). 이스라엘이 첫 번째 ‘모세’의 말을 경청하지 않음으로써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처럼(신 18:19), 두 번째 ‘모세’를 무시할 때 더 큰 재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회개를 통해서 이 재난을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신명기> 12:1-16:17의 본문을 통해서 기대할 수 있듯이,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직통 통로다. 그러나 18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인제사장”의 교리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드리는 일에 하나님의 종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줄 제사장이 필요하다(18:1-8).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변해 줄 선지자가 필요하다(18:14-22). 사사나 왕과 마찬가지로, 제사장과 선지자 또한 이스라엘이 예우를 갖추어 대해야 할 인물들이다.
5. 살인(19:1-22:8). 이 단락을 흐르는 핵심 주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1) 가장 먼저 다룰 주제는 도피성이다(19:1-13). 원래는 ‘요단’ 동편에 세 개, 그리고 서편에 나머지 세 개를 건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9:9b).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도피성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는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출 21:12-14; 민 35:9-28; 신 4:41-43). 그런데 왜 이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을까? 굳이 설명을 해보자면, 18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조와 대비의 연장선상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8장에서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대비가 있었으며, 거짓 선지자는 사형에 처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살인자와 도피성과 관련하여 두 가지 대비는, 우발적인 살인자와 고의적인 살인자에 대한 다른 대처 방식이다. 이 규례는 ‘가나안’ 정복 이후에 적용할 것이긴 하지만, 그곳에서조차도 이스라엘은 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겠다.
도피성에 거주할 수 있는 기간에 대해서는 <민수기>에서와는 달리(민 35), 이곳에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어쩌면 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는 자체가 “보복하려는 자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라는 암시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19장 첫 번째 단락의 목적은 즉각적이고 불법적인 피의 복수를 자제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2) 두 번째 주제는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범죄에 관한 것이다(14절). 이 문제에 관해서는 27:17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으며, <잠언서>에서도 등장하고 있다(잠 22:28; 23:10). 그러나 이곳에서 이 법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구절이 1-13절에서 다루고 있는 살인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땅의 경계를 놓고 소유자들 사이에 살인까지 부를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일까? 이에 대해서 아래에 소개한 ‘카우프만’(S. Kaufman)의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3) 세 번째 주제는 충분하지 않은 증거나 무고 등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정당하지 못한 판결을 다룬다(19:15-21). 거짓 증거나 악한 증거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엄격하다(19:18-21).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예. 왕상 21:9-14).
위 세 주제가 어떻게 상호 연결될 수 있을까? ‘카우프만’(S. Kaufman)은 이들 세 주제가 살인의 문제와 연결되고 있으며,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고 있다: ① 살인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1-13절); ② 살인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14절); ③ 살인죄 판결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15-21절),
(4) 이어지는 20장의 주제는 전쟁이다. 그리고 이 주제가 19장과 연결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19장이 개인적 영역에서 살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20장은 국가ㆍ사회적인 차원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장의 처음 절반(20:1-9)은 대부분 제사장의 격려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에게 용감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다(2-4절). 그리고 책임 있는 (민간)지도자들이 전쟁에 복무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5-9절).
그런데 이들 목록이 흥미롭다: ①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하지 않은 자; ② 포도원을 만들고 아직 그 과실을 수확하지 못한 자; ③ 약혼만 하고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자; ④ 두렵거나 마음이 약한 자. 여기서 처음 세 가지 면제 사유는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나머지 하나, 즉 두려움이 전쟁 복무 면제 사유가 된다는 것이 좀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공포에 빠져있는 동료와 함께 누가 참호에 들어가 근무하고 싶겠는가! 그런 자는 비전투 요원으로 돌리든지, 또는 아예 복무에서 면제시켜주는 것이 상책일 듯싶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전쟁에 대해서 기록하면서(6-11장), 이와 같은 징집 면제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여호수아> 6-11장은 군사적 승리에 관한 기록이지 징집 면제에 관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단락이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누가복음>에 끼친 영향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누가복음> 9:51-18:14의 본문이 <신명기> 1-26장을 모델로 작성되었다 하여, 이 부분을 “기독교 신명기”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비교의 대상이 되는 두 본문은 <신명기> 20:5-8과 <누가복음> 14:16-20이다. 이곳 <신명기> 본문에 따르면, 결혼은 분명 군 복무 면제 사유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잔치에 초청받은 자가 결혼이나, 기타 사업상의 이유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혼주(婚主)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히 큰 실례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전쟁과 잔치는 종말의 때를 대표하는 두 가지 현상이기도 하다. <성경>은 종말을 “크고도 무서운 주의 날”로 칭하는가 하면, 동시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부르기도 한다.
(5) 20장의 나머지 절반(20:10-20)은 군인들에 대한 언급에서 군사작전에 관한 주제로 옮아간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수행해야 할 상대는 두 부류의 성읍이다. 하나는 ‘가나안’ 지역 밖에 있는 성읍들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 안에 있는 성읍들이다. 전자(前者)의 경우 이스라엘은 먼저 항복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10-15절). 그러나 후자(後者)에 대해서는 철저한 진멸만이 있을 뿐이다(16-18절). 두 경우를 비교해 보면, 전자의 사례는 패배한 상대를 대하는 일반적인 관습에 해당하며, 후자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 수행에 관한 또 다른 지시 사항은 공성(攻城) 작전을 펼칠 때, 그 성안에 있는 나무들 중 일반 수목(樹木)은 필요시에 잘라내도 상관없으나, 과목(果木)은 전쟁 후에 식량이 될 수 있으므로 그대로 두어야 한다(19-20절). 여기 언급하는 두 종류의 나무는 위에서 언급한 두 부류의 성읍(10-18절)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왜 이처럼 구분이 필요할까? 이스라엘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충동적이고 자의적으로 상대나 상대 지역의 자원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행동을 자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요약하자면, 20장은 전쟁에서 복무 면제받을 수 있는 일련의 이스라엘 인의 목록으로 시작하여,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파괴 대상에서 면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으로써 마무리하고 있다: (예) 그 땅의 부존자원들.
(6) 생명과 죽음. 앞의 몇 장에서 다룬 일련의 법들은 그 내용에 있어 가장 비조직적이고, 상호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는 21-25장 사이에서 다루고 있는 법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혹자는 이 속에 포함된 제반 법들을 “기타 법들”로 처리하고 있다. 예컨대, 21장도 이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① 살인자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살인자를 속량하는 법(1-9절); ② 여자 포로를 아내로 삼는 법(10-14절); ③ 장자의 상속권에 관한 법(15-17절); ④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법(18-21절); ⑤ 범죄자의 시체를 장사하는 법(22-23절).
그러나 일견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들 법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 모두 죽고 사는 문제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 암송아지의 목을 꺾는 일, 들에서 피살된 시체, 전쟁 포로로 잡힌 여자가 자신을 포로로 잡은 자의 아내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 등이 모두 그렇다. 임종을 앞둔 애비가 싫어하지만 장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상속권을 넘겨주어 그의 미래의 안녕을 보장해 주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부모라면 자신들의 패역한 아들을 징계를 해서라도 생명의 축복을 누리길 바라겠지만,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을 때에는 그 아들을 죽여서라도 악을 제거하라는 계명 또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시체는 밤새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땅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법들을 21장 한 곳에 배열해 놓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예컨대,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여자와 결혼하는 규례(10-14절)는 이곳보다는 오히려 전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20장에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규례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곧바로 이어지는 주제(15-17절), 즉 결혼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역한 아들에 대한 규례(18-21절)와 나무에 달린 범법자의 시체를 처리하는 문제(22-23절)는 공통적으로 처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의 두 규례, 즉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살인자를 속량하는 규례(1-9절)와 나무에 달린 범법자의 시체를 처리하는 규례(22-23절)는 공동체가 적절히 대처하는 일에 실패할 경우 공동체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타 이들 법들 상호 간의 연관성이나 각 법의 의미 등에 대해서는 ‘해밀턴’(V. Hamilton)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참고도서. 5).
이어서 22:1-8의 본문은 여러 가지 주제가 뒤섞여 있다. 따라서 여덟 절 전부를 과연 “생명과 죽음”의 주제와 관련된 단락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또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말라”(22:5)는 규례는 차라리 “순결”을 다루고 있는 다음 단락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5절은 9-12절 사이 어디쯤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6. 간음(22:9-23:18). 이 단락은 22장의 처음 여덟 절을 제외하면 공통적으로 “순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순결이라 함은 좁게는 육체적인 순결에 국한할 수 있겠으나, 넓게는 모든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시킨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이 단락을 편의 상 다음 네 개의 작은 단락으로 세분할 때, 각각 나름대로 순결이라는 주제와 직ㆍ간접으로 연관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1) 22:9-11; (2) 22:13-30; (3) 23:1-8; (4) 23:9-18. 이들 모두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의 구체적인 적용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혼합하지 말라(22:9-11). 이 첫 번째 작은 단락은 육체적(성적) 순결을 다루고 있는 두 번째 단락의 서문(序文)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 등장하는 짧은 세 규례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되돌리는 일종의 혼합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들이다. 첫째, 두 종자를 함께 뿌리는 일(9절), 둘째,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가는 행위(10절), 셋째, 양털과 베실을 섞어 옷을 만드는 행위(11절)를 말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등장하는 “옷의 술”에 관한 규례(22:12)도 따지고 보면 순결의 주제와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 규례 역시 성적 순결과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옷의 술에 관해서는 <민수기>에서도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다(민 15:37-41).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옷에 술을 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민 15:39).
(2) 성적 순결(22:13-30). 성적 방종은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이 같은 행위에 해당하는 여섯 사례를 들어 불법적인 성 관계를 예시하고 있다: ① 아내에게 불륜의 누명을 씌우려 하는 남편(13-19절); ② 남편이 제기하는 혐의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절차(20-21절); ③ 유부녀와의 간통(22절); ④ 성읍에서 일어난 약혼한 여자의 간음(23-24절); ⑤ 들에서 약혼한 여자에 대한 강간(25-27절); ⑥ 약혼하지 않은 처녀의 성관계(28-29절). 이들 중 처음 세 경우는 유부녀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나머지 세 경우는 미혼 여성에 대한 것이다.
이들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처벌에서 드러나는 세 가지 관점을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관련된 당사자 중에서 누구에게 책임을 지울 것인가? 사례 별로 세 가지 다른 처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① 여자만 처벌 받는 경우(형의 21절); ② 남녀 모두 처벌을 받는 경우가 두 번(22, 24절); ③ 남자만 처벌 받는 경우가 세 번(18-19, 25, 29절).
본문은 부적절한 성 관계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간음과 강간이 그것이다. 간음은 기혼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그 대가는 연관된 두 당사자 모두를 다 죽이는 것이다(21-22절). 그러나 처녀를 상대로 한 강간의 경우는 가해자를 죽이지는 않고, 대신에 처녀의 아버지에게 50세겔에 해당하는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29절).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경우도 자발적인 간음이라면, 두 사람 모두 죽이도록 했다(24절). 그러나 예외적인 규정도 있는데, 약혼한 여자라 할지라도 강간을 당한 경우는 가해자만 죽이고 피해 여성은 무죄로 인정되었다. 이처럼 사례별로 처벌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성경>은 결혼관계를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혼은 두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어떤 것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총회의 순결(23:1-8). 이 여덟 개의 규례는 모두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들어올 수 없는 자에 관한 것들로서, 총회의 정신적이고 종교적 하나 됨이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함처럼 보인다. 육체적 순결보다는 순결을 각각의 규례는 한 결 같이, “하지 말라”는 부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들어오지 못하리라”(23:1); ② “들어오지 못하리라”(23:2); ③ “들어오지 못하리라”(23:3); ④ “구하지 말지니라”(23:6); ⑤ “미워하지 말라”(23:7).
그러나 과연 누가 총회에 들어올 수 있고, 누가 배제되어야 하는가? 그에 관한 뚜렷한 기준이 없어 다소 애매모호한 것은 사실이다. 일단 ‘암몬’과 ‘모압’ 족속이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뚜렷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3-5절). 그런데 ‘에돔’ 사람과 ‘이집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7절)는 언급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연한 것 같지만, 사생아(私生兒)와 성적(性的) 불구자(예.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를 통회에서 배제시킨 것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참고. 1-2절).
(4) 군대 진영의 순결(23:9-14). 이 단락은 다시 육체적 순결을 강조하는 곳인데, 이번에는 전쟁 중에 있는 군대 진영에 관해서다. 밤에 몽설한 자는 일정 기간 진영을 떠나 있어야 하며(10절), 대소변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진영 밖에서 해야 한다(12-13절). 이와 같은 요구는 단순히 위생적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진영이 청결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14절). 총회와 진영은 불가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머지 네 절(13:15-18)은 일종의 기타 규례에 해당한다. 도망친 노예에 관해서는 그가 어느 곳에 살든지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15-16절). 그러나 이 규례는 다소 자극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리고 ‘암몬’이나 ‘모압’ 족속에 대한 대우와 비교하면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참고. 23:3). 그 노예가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암몬’이나 ‘모압’은 총회에 들어오지도 못하는데, 도망친 노예는 자신이 원하는 성읍 어느 곳에든 살 수 있다니 말이다. 그리고 이집트인은 삼대 후 자손부터는 총회에 들여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가! 마지막 두 절(17-18절)은 성전(聖殿) 창기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남자든 여자든 이들이 번 돈은 헌금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7. 도덕질(23:19-24:7). 이 단락 역시 여러 가지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1) 이자를 받는 문제(23:19-20); (2) 하나님 앞에 서원한 재물에 대한 것(23:21-23); (3) 타인의 포도원이나 밭에 들어가 과일이나 곡식을 취하는 문제(23:24-25); (4) 이혼과 재결합(24:1-7). 이들 중 처음 세 규례는 “도적질 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겠으나, 마지막 주제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다.
(1) 이자와 서원의 문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빚 진 자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는 일로 간주되어 금하고 있다(23:19-20).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한 재물은 반드시 갚도록 한 것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도적질 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23:21-23).
(2) 이혼과 재결합. 먼저 이혼에 관한 처음 네 절의 규례는 상당히 많은 논란을 일으킨 본문이기도 하다(참고. 24:1-4). 특히 이 부분은 이혼한 아내가 두 번째 남편이 죽었거나 또는 이혼을 한 후, 다시 이전 남편과 재결합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할 수 없다는 규례는 그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다. 우선 이 구절의 핵심은 “수치 되는 일”이다(24:1). 즉 아내에서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면 남편은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와 이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수치 되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벌거벗음” (hw:r][, 에르와)을 뜻한다. 그렇다면 “수치 되는 일”이란 모종의 간음이나 부적절한 처신을 뜻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 여인은 이혼이 아니라,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즉 그녀는 관계한 남자와 함께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할 것이다(참고. 22:22).
<신명기> 내 다른 곳에서는 이 단어가 “불결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23:14). 문맥 상 이곳에서 이 단어는 대ㆍ소변과 같은 사람의 배설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배설물이 부도적하다거나 비윤리적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이 단어는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성적 탐닉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단락은 남편이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남편은 결혼을 임의로 파기시킬 수 있는 면허권이라도 가진 것일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단락에서 의미하는 바는 이혼은 개 가정사의 문제로서, 법정이나 공공기관에서 일일이 원칙이나 규정을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율법에 이혼이 불법이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이혼한 남자가 재결합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언급도 없다. 여기서 금기하고 있는 것은 결혼한 두 사람이 이혼한 후에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왜 그것이 금지되는지 아무런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재결합이 그 자체로서 간음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문 속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기 때문”이라는 언급에 주목한다(참고. 24:4). 몸을 더럽힌 전처(前妻)와 재결합할 수 없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예레미야>를 읽어보면 이 주장이 타당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 여기서 아내는 이스라엘이며,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우상숭배다. 적어도 <신명기> 24:1-4에서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 남편은 이혼한 전 아내와 재결합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 <신명기>의 이 규례를 어겨가면서까지 수치와 모독을 감수하려 하신다.
하지만 본문의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기 때문”이라는 언급은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결혼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첫 번째 결혼도, 두 번째 결혼도 아닌, 세 번째 결혼에 관한 것이다. 과연 “몸을 더럽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혼과 재결합에 관한 법에 이어서 곧바로 결혼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법적 장치가 등장하고 있다. 즉 결혼을 한 사람은 일 년 동안 아내와 함께 보낼 수 있도록 군복무를 면제해주라는 법이 그것이다(24:5). 이 법은 약혼한 남자를 군 복무에서 면제시켜주라는 이전의 법과 아주 흡사하다(참고. 20:7). 이 두 법을 통해서 볼 때, <신명기>가 아내나 약혼녀의 권익이나 행복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남편이나 약혼자를 군대에 보내고 혼자 지내야 여자의 고독감이나 상실감을 배려해주는 법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여자에게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20:7), 아내나 약혼녀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24:5).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잡히지 말라”(6절)는 법은 일견 문맥에서 일탈(逸脫)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 구절 역시 직전에 다룬바 있는 신혼부부를 최소한 일 년은 떨어져 살게 하지 말라는 5절의 법 정신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맷돌과 그 위짝”이 서로 떨어져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듯이, 신혼부부 역시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참고로 <예레미야>는 신랑과 신부를 맷돌에 비유하고 있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렘 25:10).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채권자에게 금하고 있는 바는 채무자를 향한 갈취(喝取) 또는 강탈 행위이다. 그리고 갈취 행위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채무자로부터 무엇인가를 전당잡는 행위를 말한다. 대개의 경우 전당물은 채권자에게는 큰 가치가 없지만, 채무자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8. 거짓 증언(24:8-25:4). 이 단락은 과거 ‘미리암’이 ‘모세’에 대하여 어떻게 행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참고. 민 12). ‘미리암’은 ‘모세’를 비난하며, 그에 대하여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데 근거 없는 비방이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예컨대, 사회적 강자(强者)가 약자를 부당하게 또는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이는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이곳에서 열거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에 충분한 사례들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이 단락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과 일정 부분 연결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9. 탐심: 이웃의 아내(25:5-12). 25장은 대부분 한 쌍(雙)에 관한 법들로 이루어져있다: (1)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시비에 관하여(25:1-3); (2) 소와 그 주인(25:4); (3) 함께 사는 형제들(5-10절); (4) 서로 싸우는 두 사람(25:11-12); (5) 두 종류의 저울 추(25:13-16); (6) 이스라엘과 아말렉(25:17-19).
이 단락의 주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단락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단락에서 공히 타인의 아내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고 있어, “이웃의 아내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1) 함께 사는 형제들(5-10절).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수혼법(嫂婚法)은 단순히 과부의 재혼에 관한 법이 아니라, 자식이 없는 과부에 관한 법이다. 그리고 재혼의 상대도 낯선 남자가 아닌, 죽은 남편의 동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에는 답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예컨대, “형제들이 함께 살 때”(25:5)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문자적으로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산다는 말인가? 또는 가족 소유의 땅에 함께 산다는 말인가? 아니면 근처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수혼은 장자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만일 다른 동생들이 모두 결혼한 상태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형수와의 결혼은 <레위기>에서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음에도(레 18:16), 만일 결혼한 동생이 아이를 낳은 후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는가? 그럴 경우 그는 모든 상속권을 박탈당하는가? 만일 죽은 남편에게 동생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흥미롭게도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 ‘다말’의 사실상의 남편이 되었으며(창 38), ‘보아스’는 ‘룻’의 먼 친척으로 그녀의 남편이 된 바 있다.
수혼법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결혼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일 수혼을 거절하면 공공의 치욕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결혼을 거절당한 과부는 그 상대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신발 한 쪽을 벗기도록 되어있다. 단지 그렇게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성읍의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해야 한다. 장로들은 과부의 행동을 그냥 지켜보는 참관인이나 조사관의 역할만 하면 된다. 이번의 경우에도 이혼법의 경우에서처럼(24:1-4), 가족 내의 문제로서 법정이나 공적 기관에서 다룰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2) 서로 싸우는 두 사람(11-12절). 이 경우도 가족 간의 분쟁으로서, 한 사람의 아내가 등장하고 있다. 싸움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남편을 구출하려고 그의 아내가 와서 상대 남자의 음낭을 잡았을 경우 그녀의 손을 자르도록 명령하고 있다. 이 법이 과연 실행에 옮겨졌는지, 그랬다면 얼마나 자주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자를 생식 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이와 같은 여인의 행동에 관한 규례가 앞선 여인의 생식 불능에 관한 규례(5-10절)에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보인다.
10. 탐심: 이웃의 재산(25:13-16). 탐심에 관한 주제는 이웃의 아내에서 이웃의 재물로 옮아간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는 것이나 거짓 저울이나 추로 이웃을 속이는 행위는 결국 똑 같이 가증한 일이다. 이들을 집에 두거나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그 같은 가증한 행위를 지속하는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5장의 마지막 단락(17-19절)은 이곳에서보다는 오히려 26장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11. 감사와 순종: 이제 오늘!(25:17-26:19). 이른 바 “신명기 법전”으로 불리는 <신명기>의 중심 구조는 제 26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곳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첫 열매를 드리는 기도문(1-11절); (2) 매 삼년의 십일조를 드리는 또 다른 기도문(12-15절); (3) 이스라엘을 위한 마지막 권면(16-19절). 이렇게 볼 때, 26장은 무슨 법이나 규례를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예배 시에 드리는 제의문(또는 기도문)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선 25장의 마지막 단락(15:17-19)도 이곳에 포함시킴이 더 나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 단락 역시 법을 다루고 있기 보다는 ‘아말렉’의 행위를 상기하라는 교훈 내지는 경고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말렉’에 관하여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 중에서 <출애굽기> 17:8-15의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아말렉’이 이스라엘 중에서 힘없고 약한 자들만 공격했다는 사실이다(25:18). ‘모세’가 굳이 이 사실을 새롭게 추가로 상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역시 앞으로 같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늘 있기 때문에, 사전 교훈 내지는 경고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직전의 단락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지 않은가!
(1) 첫 열매를 드리는 기도문(1-11절). 이 기도문의 상당 부분이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선포해야 할 신조들로 이루어져 있다(5-10절).
(2) 두 번째 기도문(12-15절). 두 번째 또 다른 기도문은 매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위한 것이다(이 십일조에 관해서는 14:28-29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첫 번째 기도문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두 번째 기도문의 초점은 각 개인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밝히는데 있다. 기대하건대, 이스라엘은 순종과 순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님의 기준에 따라 살아왔나이다.” 첫 번째 기도문이 순종의 삶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면(예.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10절)), 두 번째 기도문의 절정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15절).
(3) 세 번째 단락(16-19절).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마지막 도전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이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로 끝났으니, ‘모세’의 도전과 권면도 이 기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기대하면 될 것이다. 즉 처음 두 절(16-17절)은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전제 내지는 길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16-17절). 그리고 19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구현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실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할 것이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오늘...하라”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특히 <신명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절로서, 책 전체적으로 대략 59회 정도 나타나며, 이중 거의 절반이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규례와 법도”라는 구절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표현은 절박함과 시급함을 드러내는 하나의 관용어구다. 하나님의 계시는 살아있으며, 이스라엘은 어떤 형태로든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순응해야 하는 말씀은 먼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먼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미루지 말고, 늘 “지금 이 순간”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대답은 두 가지이다: 감사(5-10절)와 신실한 순종의 삶(13-18)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단락 속에 여덟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동사, “주다”에 주목해 볼 일이다(1-15절). 이스라엘이 주어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단 한 군 데 뿐이며(12절), 나머지 일곱 번은 모두 하나님이 주어다(1, 2, 3, 10, 11, 13, 15절).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그 땅과, 자유와, 축복과, 은혜와, 그분의 말씀과, 그리고 계명들이다.
4.4. 제 4부: 내부구조-언약의 조인
서론. 책의 제 4부는 교차대구의 두 번째 내부구조(B’)에 해당하는 곳이다(도표의 노란 색 부분). 도합 네 장에 달하는 이 단위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마지막 두 장(27-28장)과 짧은 세 번째 설교(29-30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법을 가지게 되었다. 이 법 앞에서 어느 누구도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에 맞는 삶을 살거나, 아니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또한 그 선택에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실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모세’가 언약 조인식을 통해서 이 단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다.
계명이나 법은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자유인이고 따라서 선택의 자유도 가진다. 사랑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모세’는 이제 언약 조인을 통해서 이스라엘 앞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설교하고 있다. 만일 순종의 삶을 선택한다면 그 결과는 축복이다. 그렇지 않고 불순종의 삶을 살겠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저주이다. 그리고 특별히 그 저주란 그 땅으로부터의 추방을 말한다(참고. 29:27). 이 결과는 ‘모세’가 이미 그의 회고에서 밝힌 바 있는 바이기도 하다(참고. 4:27-31). 혹자는 이 단락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특징 하나를 언급하고 있다. 즉 ‘모세’의 두 번째 설교(5-28장)가 임박한 미래와 그리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있다면, 세 번째 설교는 좀 더 먼 미래, 즉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그 땅을 다시 찾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 제 4부의 내용은 아래 도표에서처럼 세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표에서 가장 긴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은 언약의 저주에 관한 단락이다(단락 3). 저주가 축복(단락 2)에 비해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27장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이스라엘은 각 여섯 지파씩 둘로 나누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서서 각기 저주와 축복을 상징하고 있다(27:12-13). 언약의 저주가 선언될 때마다 ‘에발’ 산의 여섯 지파가 ‘아멘’으로 대응하고 있고, 언약의 축복이 선포될 때에는 ‘그리심’ 산의 여섯 지파가 ‘아멘’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27:1-26) 전체에서 축복에 관한 선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온통 저주의 선언뿐이다. 유일하게 축복을 다루고 있는 세 번째 단락(28:1-14)마저도 앞뒤로 저주를 포함하는 두 단락(2/4)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다(도표). 어쩌면 이것이 이스라엘의 미래가 축복보다는 저주 아래 놓여있음을 예고해주는 신명기식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축복보다는 저주가 훨씬 많다는 점은 장차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언하는 “모세의 노래”(32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불균형, 즉 언약 계약에서 저주가 축복에 비해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점은 고대 근동 국가의 주종계약(主從契約)에서 흔한 것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 형식적으로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미래는 결코 밝지가 않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며 현상유지의 삶을 사는데 만족한다면, 이스라엘은 앞날에 대해서 안심보다는 염려를 훨씬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신명기>를 읽어나가면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책의 초반부에서 이스라엘의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던 것이 점차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10:16)는 요구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30:6)로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이 두 구절을 융합할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 여부에 달려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기도 하다.
1. 세겜의 언약(27:1-10). 그런데 왜 하필 ‘세겜’인가? 이스라엘에게 ‘세겜’은 이미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역사적인 조인식을 갖는다는 과거의 그 역사를 오늘 자신의 것으로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지금 언약 조인식이 진행되고 있는 ‘세겜’의 두 산, ‘에발’과 ‘그리심’이 갖는 신학적 의미도 이점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하다. 역사적으로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첫발을 디딘 곳이며,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약속, 즉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들었으며, 그가 첫 제단을 세운 곳이다(창 12:7). ‘야곱’은 이곳에서 땅을 샀으며(창 33:19), 이스라엘은 ‘요셉’의 유해를 이곳에 묻었다(수 24:32). 다시 말하자면, 27장에서 제시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란 다름 아닌 족장들과 맺으신 그분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니다(참고. 신 1:6-8; 34:4). 그분은 단순히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 이상이다.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또한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순종을 이미 알고 계시며, 그래서 하나님의 제단을 저주의 산 ‘에발’이 아닌 축복의 산 ‘그리심’에 세우기를 원하시는 것이다(27:4-7). 하나님의 율법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율법이 파기되면 그분의 마음도 깨진다. 그분의 진노와 구속의 행위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쌍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언약의 조인(27:11-26). ‘에발’ 산에서 치르는 언약 조인 의식은 좀 각별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왜냐하면 고대 근동국가에서는 성소(聖所)에서 조약이나 법조문을 쓰거나 낭독하는 등의 유사한 의식이 있기는 하나, <구약>에서는 이와 같은 의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에발’ 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고 맹세를 새롭게 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이들 법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함으로써,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들조차도 지키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특별히 거명하고 있는 범죄 목록에는 타인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숨길 수 있는 은밀한 것들로서, 예컨대, 우상숭배나, 땅의 경계를 옮기는 행위, 소경을 그릇 인도하는 행위, 성 범죄, 살인 행위 등이 나열되어 있다(27:15-26).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멘”으로 화답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의와 각오를 내보이고 있다.
3. 언약의 축복과 저주(28장). 고대 조약이나 법조문은 대체적으로 축복과 저주의 항목을 끝 부분에 포함시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명기>는 단순히 설교라기보다는 언약의 갱신에 사용된 계약서로 사용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속에 하나님의 법을 충실하게 지킬 것을 권면하는 내용도 있어, 이 단락이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번영과 평화라는 영광의 미래가 이스라엘 앞에 펼쳐져 있음을 본다. 물론 그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28:1).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정반대의 상황, 즉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대 참사가 기다리고 있다. 언약의 그 모든 축복은 무효가 되고,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대재앙에는 기근과, 가뭄과, 역병과, 적의 공격과, 그리고 그 땅으로부터 추방이 포함된다. 이집트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다시 노에로 되돌아갈 것이며, 이집트에서 겪었던 그 재앙들을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축복과 저주는 항상 조건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이스라엘의 선택에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설교자 ‘모세’의 비관론이 작동한 것일까? 즉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보다는 필경 불순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45절 이후부터 저주에 관한 내용의 분위기가 단순히 조건적인 저주라기보다는 예언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추방에 관한 내용이 아주 무섭게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물론 멸망에 관한 예언조차도 조건적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돌이키면 재앙을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희망 섞인 예언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분위기는 ‘모세’의 세 번째 설교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4. 권면: 헌신과 충성에 관하여(29장). 세 번에 걸친 설교의 마지막에 ‘모세’는 이전에 그가 말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집트에서 ‘모압’까지 인도하셨는지를 회고하고 있다(29:1-9). 이제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맺었던 첫 번째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여 있다. 그들 모두는 이제 진심으로 그 언약을 받아들여야 하며,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 땅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황폐하게 되지 않으려면 마땅히 언약의 제반 조건에 동의하고 순응해야 한다(29:16-29).
5. 희망과 결단(30장). ‘모세’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언급했던 그 모든 무시무시한 경고들(28장)이 현실이 되고, 이스라엘이 정말 이방인의 땅으로 쫓겨나는 것이다(30:1). 그러나 설령 그 일이 현실이 되더라도, 이스라엘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인즉,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30:2-3). 정말이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실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30:6).
그러므로 이제 결단의 순간이 왔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만 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5).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생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신들을 섬겨 멸망을 당할 것인가(30:16-18). ‘모세’의 설교는 결단을 촉구하는 말로 결말을 맺는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30:19).
4.5. 제 5부: 외곽구조-전망
서론. 책의 제 5부는 교차대구의 두 번째 외곽구조(A’)에 해당하는 곳이다(도표의 노란 색 부분). 도합 네 장으로 이루어진 이 단위는 네 개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다: (1) 후계자 임명(31장); (2) ‘모세’의 노래(32장); (3) ‘모세’의 축복(33장); (4) ‘모세’의 죽음(34장).
(1) 후계자 임명(31장).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선택하도록 요청했던 ‘모세’는 이제 불행하게도 그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가 왜 지금 이곳에서 죽어야 하는 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치더라도, 이스라엘과 후대를 위한 교훈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 백성을 그 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다(31:7-8).
그러나 ‘모세’와 달리, ‘여호수아’는 선지자가 아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상대로 일대 일로 말씀하진 적이 거의 없다. 그가 이끄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모세’의 설교 속에 다 들어있으며, 그것은 바로 <신명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칠 년에 한 번씩 장막절에 전 국가적으로 <신명기>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지금 그 말씀을 기록하여, 백성들이 잊지 않도록 언약궤와 함께 성소에 보관해 둘 것이다931:9-13, 24-27).
(2) ‘모세’의 노래(32장). 그러나 이 백성은 언약궤 옆에 보관해 둔 언약의 책도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하기 쉽도록 짧게 된 요약문과 같은 그 무엇이다. 그 요약문이 바로 “모세의 노래”라 할 수 있다. 그의 노래는 먼저 하나님의 공의와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32:4-6).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베푸신 그 모든 것들을 노래하고 있다(32:7-14). 그리고 이 사실을 이스라엘의 불충(32:15-18)과 그들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32:19-25)과 연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들의 억압을 제한하시고 궁극적으로 그 백성을 구원해 내실 것이다(32:26-43). 백성을 향한 마지막 말은 이 노래의 말씀과 율법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 이제 ‘요단’을 넘어 차지하게 될 그 땅에서 오래 살도록 하라는 권면이다(32:47).
이제 다시 한 번 하나님은 ‘모세’에게 ‘느보’ 산에 올라, 죽음을 맞도록 말씀하신다(32:49-52). 여기에 동원된 어휘는 <민수기>에서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민 27:12; 20:11-13). ‘모세’는 자신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백성들의 잘못으로 돌린 바가 있다(신 1:37; 3:26). 그러나 이곳에서 하나님은 <민수기>의 설명을 재인용하면서, 그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고 있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 한 연고라”(신 32:51; 참고. 민 20:11, 13).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3) ‘모세’의 축복(33장). 비록 자신은 들어가지 못하지만, ‘모세’는 그의 마지막 축복을 통해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예고해주고 있다. 그의 임종 축복은 그 톤에 있어 아주 열정적이며, ‘야곱’의 임종 설교을 기억나게 한다(창 49). ‘야곱’도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그 땅에서 번성하고 번창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여기 ‘모세’도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임종 설교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모세’는 각 지파를 향한 축복 기도를 ‘시내’산 언약으로 시작하고 있다(33:2-5). 다소 기이한 방식이긴 하지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율법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의 축복은 그 분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지파, 즉 ‘유다’와 ‘요셉’에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모세’는 주로 ‘레위’ 지파를 강조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는 ‘레위’ 지파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33:9-10). 그리하여 이 마지막 임종 기도에서조차 ‘모세’는 <신명기>의 핵심 주제를 잊지 않고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겠다: 즉 그 땅과 율법의 관계가 그것이다.
(4) ‘모세’의 죽음(34장). 마침내 ‘모세’는 ‘느보’ 산에 오른다. 참으로 슬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실망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 그가 그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처음 세 절에 나타나 있다. 아쉬운 듯이 그 땅을 남에서 북으로 바라다보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마지막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34:4).
이 대목에서 <창세기>에서 시작한 ‘모세’의 일대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제 그는 장장 120살의 나이로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로서의 ‘모세’의 은사는 그의 나이의 많음에 있지 않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기억해야 할 으뜸 되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34:10). <구약>을 통 털어 그에 필적한 인물이 없는 것이다.
<신명기>의 역사
1. 개요
<신명기>의 역사라 함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책의 자료와 편집에 관한 제반 과정과 연대기, 동기와 목적, 그리고 배경 등을 포함한다. 이 모든 과정에 대한 연구를 전문적인 용어로 “통시비평”(通.視批評)으로 부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신명기>에 대한 “통시비평”적 연구 내용은 <오경> 전체에 대한 “통시비평”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본인의 <구약개론> 참고.
별도의 소개는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신명기>가 <오경>의 소위 “문서 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의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이곳에서는 저작(또는 편집) 시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2. 기록자와 연대
‘모세’ 이후 <신명기>의 연대 문제는 저자 문제와 분리해서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신명기> 최초의 저자(편저자로 부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는 ‘모세’라는데 이의를 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최초의 설교는 ‘모세’ 이후 여러 편집자들에 의해 수정이나 보완을 거쳤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고전적 문서설. ‘그라프’-‘벨하우젠’의 이론에 따르면, <오경>은 네 개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1) <야훼(J) 문서>; (2) <엘로힘(E) 문서>; (3) <신명기(D) 문서>; (4) <사제(P) 문서>. 이중 D 문서는 <신명기>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오경> 내에서 등장하는 위치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고전적인 ‘벨하우젠’ 이론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수없이 이루어져, 심하게 말하자면 문서 가설은 이제 누더기 신세로 전락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더 이상 일치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 가설을 완전히 폐기처분할 수 없는 것은 “통시 비평”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이룩해 놓은 학문적 업적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통시 비평”은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많은 난제(難題)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당연히 D 문서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도 멀리는 ‘모세’ 당대에 이미 존재했다는 견해에서부터, 가깝게는 왕정 시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신명기 학파”(Deuteronomist)의 작품이라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더 구체적으로 문서의 기원을 ‘요시아’ 18년(주전 621년)에 왕국 서고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즉 이 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던 일꾼들이 “율법 책”을 발견하고, 이 책을 왕 앞에서 낭독했을 때, 왕은 옷을 찢고 회개하였고, 그 결과 대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왕하 22-23장). 일찍부터 학자들은 이 책이 다름 아닌 <신명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의 기원을 J나 E보다 후대인 7세기로 추정하였다.
신명기 학파. 이들 학파의 존재 여부는 단언할 길은 없지만, <신명기>의 신학 사상이 <오경>의 다른 네 권의 책보다는 오히려 <열왕기>나 <예언서>에 더 가깝다는 이유로 학자들은 <신명기>의 저자(또는 편집자)를 “신명기 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3. 목적과 내용
<신명기>의 배경이 무엇이든 책을 통해서 드러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쉐마’로 알려져 있는 6:4-9의 첫 단어, ‘쉐마’(들어라)가 그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신조가 되었으며, 기독교 교육학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불리기도 한다. 더 간결하게는 본문 10:12-13의 내용도 인용하기도 한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신명기>의 신학
<신명기>는 ‘유대’인은 물론 기독교인의 종교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신학의 보물 상자와 같다. 일종의 이념 서적인 셈이다. 만일 이 책의 주된 사상이 소위 “신명기 역사관”으로서, <구약>의 <선지서>에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신명기>의 신학적인 개념들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다 할 것이다.
1. 신조
이스라엘의 신조는 흔히 ‘쉐마’로 부르는 아래 구절의 첫 단어, “들어라”에서 따온 것이다:
4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신조는 <신약>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인간의 가장 근본되는 목적에 대한 대 헌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신명기> 6:5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신조가 드러내고 있는 배타적인 특성은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 사상뿐만 아니라, 그분에 대한 전적인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쉐마’에 뒤이어 등장하는 지침들은 ‘유대’인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며, 오늘날 교회나 신학교에서도 기독교 교육의 대헌장이 되고 있다: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6:6-9)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추론적인 사색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셨고, 그들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셨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경험의 결과이지, 논리적인 결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그분을 알고 있는가?
2. 야훼 하나님
거룩. ‘브라운’(R. Brown)은 <신명기>에 관한 자신의 주해서에서 교회는 <신명기>의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교회가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축으로서 자비와 공의, 또는 사랑과 거룩, 등등이다. ‘브라운’에 따르면 <신명기>의 하나님은 장엄하고, 거룩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한 분 하나님이시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이 이 점에 대해서 불멸의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의 핵심은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관계”이다. 따라서 <신명기>에서 규정하는 “죄”는 이 관계를 끊고, 무시하려는 제반 시도를 말한다. 그것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범죄이든, 이웃에 대한 것이든, 성적인 타락이든,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든, 결국 공통적인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도 결국은 “올바른 관계”라는 사실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행동. ‘라솔’(W. S. Lasor)은 자신의 <구약개론>에서 <신명기>의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개념은 <신명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신명기>에서도 ‘모세’의 역사적인 회고를 통해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행동은 미래 이스라엘의 행동 지침이 되기도 한다:
3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4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5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4:3-7)
만일 이스라엘이 이 같은 지침을 망각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을 멸하실 것이며, “그 땅”에서 추방시켜 열방 중에 흩으실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돌아와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그분은 자비로워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32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34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4:32-35)
3. 선택과 유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택”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이 따른다.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즉 선택(選擇)과 유기(遺棄)가 그것이다. “선택”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하르’(rj'B)는 <신명기>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30회 등장하고 있으며, 기타 <이사야>, <사무엘 상․하>, 그리고 <열왕기 상․하>에 각각 20번과 15번 등장하고 있다. 언약의 정의나 형식과 내용 등에 대해서는 수차례에 걸쳐 이미 다룬 바 있다.
배타적 측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는 새로운 백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분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따로 불러낸 것이다. ‘모세’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의 국가적 실체로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도 아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그리고 이와 같은 선택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그 땅의 민족들을 멸망시켜야 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1-2).
이스라엘은 그들과 어떠한 언약을 맺어서도 안 되며, 자비를 베풀거나 결혼을 해서도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이스라엘의 타락뿐이기 때문이다(신 7:3-4). 그리고 그 땅의 모든 종교적인 상징물조차도 다 파괴하도록 명령 받았다(5절).
이 같은 명령들은 일견 혹독한 과업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만일 ‘야훼’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면, 이와 같은 지침은 반대를 야기 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야훼’의 이와 같은 명령은 그 자체의 정황, 즉 선택이라는 배경 하에서 이해함이 마땅하다. ‘야훼’는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것 외는 다른 어떠한 민족과도 언약을 맺은 일이 없고, 그들에게 헌신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점이 선택의 배타적인 측면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결혼처럼 결혼 당사자는 서로를 향해서 언약을 맺은 것 외는 다른 어떤 상대와도 언약을 맺지 않으며, 헌신해서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신약>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보편적 측면: 모든 민족을 위하여.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결혼과는 다른 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선택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궁극적 목적은 이렇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하).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선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1-2).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심은 그분이 다른 민족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른 민족에게 진리를 전파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타협할 수 없는 관심사에서 비롯된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 목적을 망각해 버린다면, 어느 민족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진리를 반대하고 공격해 오는 어떠한 세력과도 거룩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신명기>의 또 다른 주제 중의 하나인 “단일 성소”(12:1-14)에 대한 계명도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계명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쫒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에서 예배를 드려서도 안 되며(참고. 12:2),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참고. 12:5).
그 장소가 ‘에발’이든, ‘세겜’이든, 또는 ‘예루살렘’이든, 즉 그 장소가 어디이든 이스라엘에게는 배타적인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다. 오직 이와 같은 에배를 통해서만이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 땅의 종교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며, 오직 그렇게 해서만이 열방에게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는 이와 같은 선택의 보편적 측면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선택에 관한 소극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즉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신앙을 오염시키거나 상실하게 만들 수 있는 제반 위험 요소들을 사전에 그들 앞에서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이었다.
‘하렘’ 즉 성전(聖戰)도 선택의 소극적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모든 족속들을 씨도 남기지 말고 진멸해야 했다. 과연 ‘야훼’ 하나님은 이토록 잔인무도하신 분일까? 기독교회도 이 원리를 그대로 오늘날 타 종교와 타 종교인에 대하여 그대로 적용해야 할까? <시편>에서 종종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듯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 이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할까?
4. <신명기> 역사관
<신명기> 역사관(歷史觀)의 핵심도 선택이나 언약의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역사관의 핵심은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다. 즉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반대로 언약을 어기면 저주가 따른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율법과 언약의 준수 사항으로 구체화되어 있으며,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언약을 전면적으로 취소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약속된 축복은 무효가 될 수 있다. <예언서>들은 <신명기> 역사관의 바탕 위에 서있다(참고. <호세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언약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인간의 역사에는 우연(偶然)이란 없다. 그리고 <성경>이 오직 <오경>으로만 이루어져있다면, 역사를 보는 이스라엘의 시각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生死禍福)은 하나님의 축복 아니면 저주의 결과일 뿐이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였던 시각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참고. 요 9:2). 즉 그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이나 또는 그 부모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도 전도 아니라면, 전생(前生)에 누군가 잘못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 역사관은 극단적인 이분법이고, 기계론적이며, 운명론적이다. 그리고 창조주 ‘야훼’ 하나님은 그 속에 제한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신앙이 여러 단계의 발달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신명기> 역사관은 제한적으로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다. 교회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서부터 장성한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 당연히 각자가 들어야 할 교훈이나 메시지도 성숙도에 따라 다른 것을 들어야 한다. <히브리 성경>, 즉 <구약>을 <오경>과 <예언서> 및 <지혜서>로 나누어 설교한다고 할 때, <오경>은 믿음의 초기 단계에 있는 백성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당근과 채찍은 어린아이에게 잘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는 보다 장성한 신앙인들이 정의(正義)와 거룩과 자비로 사회를 바로잡아야 할 책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때로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지혜서>는 세상의 불가사의(不可思議), 즉 악과 고통의 문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창 등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비한 주권(主權)과 섭리(攝理)를 고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고차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서 볼 때, ‘욥’이 세 친구들의 신학 수준이 겨우 <오경>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끝에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성경>을 단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참고. 요 4). 여인의 지식은 <오경>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교육도 조직신학적 접근보다는 성서 신학적 접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조직신학 속에 하나님을 제한시킬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읽은 이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요구하고 있다.
5. <신명기> 법정신
마지막으로 <신명기>의 신학과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주제는 이 책의 “법정신”(法精神)이다. 이 주제를 마지막으로 다루는 이유는 다른 주제에 비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핵심은 이 책의 대칭적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언약의 규례를 담고 있는 12-26장의 내용이다. 보았듯이, 언약의 규례를 담고 있는 12-26장 사이이다. 이 부분은 윤리적으로 탁월할 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 법전”(申命記法典) 또는 “원 신명기”(原申命記; Ur-Deuteronomy)라 칭하기도 한다. ‘요시야’ 왕은 이 법전에 기초하여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것으로 추측된다.
십계명과 판례법들. “원 신명기”의 법정신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십계명”을 포함해서 수 없이 등장하는 여타 계명들 사이의 관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해밀턴’(V. Hamilton)의 구분 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십계명(十誡命); (2) 판례법(判例法).
십계명이 원칙에 관한 선언적 계명이라면, 여타 모든 계명들은 이들 원칙을 일상(日常), 즉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가에 관한 일종의 “사례 법”(case laws)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례 법에서 보듯이, “만일 ...하면”이라는 조건 절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 오늘날 독자의 편에서 이들 판례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훈련은 각각의 사례법이 십계명 중 어떤 계명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필요한 훈련이 있다면, 각 사례법이 “신약시대”에서도 적용 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다.
신명기 법전. “신명기 법전”의 다양한 내용을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중앙집권적 예배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마땅히 ‘예루살렘’이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한 장소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가나안’ 전역에 걸쳐 각 산당에서 지내는 예배와 우상숭배가 극에 달해 있었기, 이를 금지시키기 위해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도 야기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점에 대해서는 아래 두 번째 강조점에서 설명할 것이다). <시편>의 많은 노래가 “성전에 올라가자”는 내용의 노래가 이 당시에 불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는 인도주의적 사회 건설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는 “신명기 법전”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될수록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진리와 같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명기>는 예배나, 십일조나, 추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예컨대, 제사의 경우<레위기>나 <민수기>는 제물(祭物)을 태우고 나머지를 제사장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신명기>는 제사를 드릴 때 ‘야훼’ 앞에서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배의 축제적인 성격, 즉 성도 간의 교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토지소산의 십일조에 대해서도 제사장의 몫을 빼고 난 뒤에는 함께 먹고 즐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맥스웰’(S. Maxwell)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세 명이 모이면 기도하고, 십여 명이 모이면 <성경> 공부를 하고, 이십 명 이상이 모이면, 축제를 벌이라.” 그리고 십일조의 경우도, 매 3년마다 십일조를 모아서 구제(救濟)를 펼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안식년과 희년(禧年)에 대한 강조도 가난한 자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뇌물(賂物)에 대한 경고, 공의로운 재판, 등도 결국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의 사회 윤리는 기독교 윤리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의 법정신은 하나님의 선물인 땅을 소출을 골고루 나누어 극빈자의 양산(量産)을 최소화 하자는 것이었다.
세 가지 법정신. 이와 같은 <신명기>의 법정신을 세 차원에서 요약해 보면 (1) 양식(糧食), (2) 가족, 그리고 (3) 예배가 된다.
(1) 양식: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약자, 예컨대, 가난한 ‘레위’인들이나, 이민자나, 과부 및 고아들의 생존권에 관한 문제였다. 매 3년마다 십일조를 이들 약자를 위해 사용하도록 했다(참고. 14:28; 26:12-15). 그리고 양식과 관련된 몇 가지 규정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앙 성소의 강화에 관한 것이다. <신명기> 개혁(622년?)은 ‘바알’을 숭배하던 지방 산당을 폐쇄하고, 모든 예배를 성전 중심으로 집중시킨 것이다. 지방에 흩어진 자들이 십일조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예루살렘’ 성전은 14:28-29를 근거로 각 지방에 바치던 십일조만은 지방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활용할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둘째, 추수에 관한 규정. 추수하고 남은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약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소유주가 힘써 거두어들인 소출을 깡그리 빼앗을 수는 없었다(23:25-26).
셋째, 고리대금의 금지(24:10-11).
넷째, 저당권에 관한 문제. 즉 채권자는 채무자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해서는 안 된다(24:17)
다섯째, 이스라엘 상호 간에는 이자 수익 사업을 금지한다(15:7-11).
여섯째, 임금을 체불해서는 안 된다(24:14-15).
일곱째, 노예 석방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라(15:12-15).
여덟째, 안식일에 대한 준수. 특히 노예와 근로자에 대한 안식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출애굽의 해방과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5:12-15)
아홉째, 이웃의 재산과 아내를 탐해서는 안 된다(5장).
(2) 가족: 자손을 번성시키는 일은 가문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 즉 동성연애 등과 같은 성의 혼란과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한다.
(3) 예배: 모든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그 분께 모든 것이 되돌아가야 한다. 우상 파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왕 또한 다른 지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자로서, 군림하거나 재물을 축적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17:14-20).
연습과 토의
<신명기>의 ‘헬라’ 식 제목, 즉 Deutronomy(Deutro + Nomos)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이름은 책의 제목으로 적절한가?
<신명기>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은 무엇일까?
<신명기>의 구조를 기억해보자. 교차대구적 구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책의 핵심 주제나 내용은 무엇일까? 이른 바 “신명기 법전”은 책의 어느 부분을 지칭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출애굽기>의 십계명(출 20:1-17)과 <신명기>의 십계명(5:6-21)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판례법의 예를 하나 들고, 그 적용 범위와 유용성에 대해서 토의해 보자.
“성전”(聖戰)의 예는 무엇이며, 오늘날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쉐마”는 무엇인가? 암송해 보자.
<신명기> 역사관의 핵심은 무엇이며, <구약>의 다른 책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신명기> 법전이란 무엇인가? 이 법의 핵심 정신은 무엇인가?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92-119.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270-290.
4. Temper Longman III, Old Testment Essentials: Creation, Conquest, Exile and Retur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4, pp 116-128.
5. Victor P. Hamilton, Handbook on the Pentateuch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pp 366-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