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3과
하나님의 선하심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21:43-45약 11분 분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역사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역사에 관한 연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고, 또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 인가」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 만 한 책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아래 책들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도움을 될 것입니다: E. H. Carr.「역사란 무엇 인가」. 김택현 옮김, 서울: 까치, 1997; 이원설. 「기독교 세계관과 역사발전」. 서울: 혜선 출판사, 1990.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해서 한두 가지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화자는 이 점에 대해서 지나치리만치 단순하고 흑백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과격하다 못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가 대변하고 있는 입장은 <모세 오경> 전체를 지배하는 한 가지 역사관, 즉 “신명기 사관”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중심 세계관입니다. 이를 근거로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에게 있어 역사의 과정은 아무 의미 없는 순환과 반복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며, 그렇다고 지상에서 인간 세상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한 끝없는 진보도 아닙니다. 역사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들에게 약속하신 바, 그 언약을 이루어 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언약의 축복을,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언약의 저주가 내려졌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늘 신실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항상 믿음직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통한 역사의 교훈이라면 이스라엘이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집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지금까지의 책 내용 전체에 대한 신학적 결론 내지는 요약을 담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본문이 미완료형의 구문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과 이후의 단락들과는 구별되는 문학적으로 하나의 독립적인 단위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전 단락은 41-42절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지니고 있으며, 본문은 “그 때에”라는 부사절로써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내용과 주제. 세 절에 불과한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으며, 「땅과 율법」에 관한 <신명기> 특유의 역사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으며(신 1:8), 이스라엘은 가서 그 땅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결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맹세도 동시에 하셨습니다(신 1:34-35). 그리고 왜 ‘모세’와 광야의 세대가 그 땅을 얻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이유도 아울러 설명해 주셨습니다(신 4:21-22). 즉 하나님께서는 그 땅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서원을 하셨으며, 하나님의 이 서원이야말로 <신명기> 설교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참고: 신 6:10, 18, 23; 7:8, 13; 8:1, 18; 9:5; 10:11; 11:, 21; 19:8; 26:3, 15; 28:9, 11; 30:20; 31:7, 20, 21, 23; 34:4.
<여호수아>는 서두에서부터 바로 이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한 땅을 얻게 하리라”(1:6). 하나님의 두 가지 서원 가운데 첫 번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책의 제 1부는 이 약속을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더 나아가 <신명기>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향한 설교에서 그 땅에서의 ‘안식’에 대한 주제를 추가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신 3:20). <여호수아>는 이 주제 또한 그대로 이어받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이러 가로되”(1:12-15).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을 위하여 ‘요단’ 서편을 향한 진군이 시작된 것입니다. 단순히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전쟁과 갈등이 없는 삶, 즉 ‘샬롬’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여호수아>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샬롬’의 삶을 대표하는 두 가지 상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제사를 확립하는 것이고(신 12:9-12), 다른 하나는 그 땅에서 ‘아말렉’ 족속을 전멸시켜 그 이름을 그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신 25:19). <여호수아>의 마지막 두 장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끝나고 있음도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땅과 안식-이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책의 제 1 부의 결론은 그 땅에 전쟁이 끝나고 안식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11:23). 그리고 본문 44절은 이 주제를 절정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21:44상)
따라서 이 구절에 이르러 <여호수아>의 신학적 주제는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를 <신명기>의 신학적 속편이라고 볼 때, 이제 남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요단’ 동편 지파들을 그들의 기업으로 돌려보내는 것일 것이며, 이어지는 단락(22:1-6)이 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화자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함으로써 새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43절)
이것이 그의 현실인식이자 역사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은 그의 선언과는 상반되는 상황 가운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그리고 <사사기> 또한 그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13:1-6, 13; 15:63; 16:10; 17:12-13; 참고, 삿 1:19, 21, 27-35).
따라서 이들 구절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나 불성실함입니다. 요지인 즉은, 아직도 그 땅의 많은 지역에서 이방인들이 주인 노릇을 하며 살고 있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과 화자의 선언 사이에 왜 이런 괴리가 있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 기술(記述)은 모든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반된 현실을 반영하는 다양한 사료들이 있다고 하드라도, 필요한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역사 기술에 더 가깝습니다. 어떤 사료들을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는 달라질 것이며, 그 작업은 순전히 역사가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본문과 13:1-7 및 <사사기> 1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본문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다 이루셨고 책임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불성실하였고, 화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13:1-7; 삿 1).
현실이 이러한대도, 화자는 무슨 의도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실 위와 같은 선언은 단순히 ‘여호수아’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이스라엘의 정치 현실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하여 싸우고 있을 때이든,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할 때이든, 또는 남쪽 유대 왕국이 멸망하고 그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조차도, 이스라엘은 그 모든 일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비극의 책임은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보다 확대하자면 <창세기> 1-3장의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타락 이전의 그 모든 것들은 선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모든 악하고 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하나님께서 한 국가나 개인이 잘못 사용한 자신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훈련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책임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 다룬 책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만, J. Stott의 두 권의 책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신 결과는 안식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44절)
<오경> 특히 <신명기>에서 안식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그것은 적이나 전쟁이 없는 평화, 즉 ‘샬롬’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1:12-18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샬롬’은 12장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정복 전쟁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식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출 33:14). 그동안 이 책의 제 1부와 2부가 공히 동일한 결론, 즉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모두 소탕하심으로써 그의 약속을 이루셨다는 선언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실로에서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19:51)
44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바도 역시 이들과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여 전멸시켰습니다. ‘이집트’의 노예가 이제는 이 땅의 주인으로 신분이 바뀌어 스스로 자신의 인생과 운명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이러한 현실 인식은 인생의 한 면만을 바라본 것뿐입니다. 적들은 여전히 도처에 상존하고 있고, 전쟁의 위협은 늘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안식이 깨어질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안식을 미래에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땅에서 평화롭게 안식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좁게는 이 책 3부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관련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대답은 당연히 <신명기> 역사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땅과 율법의 관계 바로 그것입니다. 앞으로의 전쟁도, 지금 누리고 있는 안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렸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소명이자 목표입니다. 화자는 이 단락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45절)
즉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하나님의 공동체는 역사를 바라볼 때 항상 하나님의 역사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바울’은 신실함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우리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러면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바울’ 역시 <신명기>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언약의 역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약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언약도 아니며, 인간과 자연 사이에 맺은 언약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은 언약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항상 두 얼굴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우리는 현실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며, 따라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세계관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판이합니다.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에 따르면, ‘필립 얀시’는 그의 책 「Reaching for the Invisible God(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에서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이 그의 저서 「The Creators(창조자들)」에서 밝히고 있는 유대-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세상의 시작과 끝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단지 이 세상의 문제로부터 해탈을 위해 고행하고 수행합니다.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의 문제들을 숙명으로 달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구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처럼 일그러진 세상에 저항하며 살아가려합니다. 시간도 중요하고, 역사도 중요하며, 각 개인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 사도가 외치고 있듯이 완전한 구속 그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세월을 아끼라”는 그의 메시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실은 시간을 구속해내라는 것입니다. 즉 악한 이 세대에서 그것을 구출해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구속에서 구출해 내셨듯이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이 <신명기>에서 이어져온 신학적 주제에 대한 대단원의 결론이라는 진술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그 주제는 무엇입니까?
2. 역사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일련의 세계관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나의 세월과 시간은 누구의 노예가 되어있습니까? 이번 한 주 나는 그것을 어떻게 구출해 낼 계획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