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0과
언약의 회복: 아이 성을 불사르고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8:1-29약 29분 분량
제 10과: 언약의 회복
10
언약의 회복:
아이 성을 불사르고
(8:1-29)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으니(8:28a)
한국의 대표적인 토종(土鐘) 오페라로 자리 잡은 <명성황후>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한국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공연되었을 때,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웬만한 작품들은 아예 공연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그곳의 문화 풍토를 고려해 보면, 이 작품의 성공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관중의 대부분이 우리와는 문화적 토양이 전혀 다른 미국인들이라는 점에서 그 작품의 진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성공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두 사람의 “무모한 신념”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이 작품의 연출자입니다. “한국에서도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공연을 어떻게 세계 예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까?” 기자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창작 분야에서 실패를 두려워해서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자신의 세계에 미친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 오페라가 뉴욕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국내의 한 중소기업 사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전 직원들의 재산까지 담보로 잡아 공연에 필요한 일체의 재정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모험을 할 수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의 답변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작품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연출자야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불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연출자보다 더 미친 사람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출자의 모험심과, 한 번 약속했던 것을 끝까지 지켜내었던 한 사업가의 헌신이 대한민국의 토종 오페라 <명성황후>를 전 세계에 알리는 거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승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승리자가 약속의 땅에서 첫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이 패배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아이’ 즉 “황폐(또는 폐허)의 땅”에서 ‘아이’가 “폐허”가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폐허” 즉 초토화(焦土化)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은 ‘아간’의 범죄,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이’가 ‘아이’가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애도의 예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인’의 예배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겠지요.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자신의 거룩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모든 더러운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이 백성은 한 편으로는 울면서, 또 한 편으로는 울분과 고통 가운데서 ‘아간’과 그의 온 가족들을 돌로 쳐 죽이고, 그 위에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 “‘아간’의 돌무덤”을 쌓습니다(7:26).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누룩은 제거되었지만, 이 일로 공동체는 모두 실의와 절망 가운데서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7장의 마지막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후). 바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은혜를 보이실 때인 것입니다. 알렉산더 휫트(Alexander Whyte)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실수는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많아지는 법입니다. <여호수아서> 8장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 즉 언약의 회복과 그에 따른 ‘아이’ 성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회복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8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라기보다는 7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지난 과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7장이 언약의 파기와 관련해서 “‘아간’의 운명”에 대해서만 그려놓고 있지, 이후 이어지는 ‘아이’ 성이나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죽은 후에 ‘아이’ 성은 어떻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본문은 특별히 이 두 질문 가운데 첫 번째 것에 대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아이’ 성에서 패배한 후에 이스라엘이 드리고 있던 예배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7:6-12).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배드리는 자가 진정과 신령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으로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가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끝에 무슨 희망에 찬 신탁이 아니라, 저주의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본문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정상적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본문의 시작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7:10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8:1상)
이 두 선언 사이에 길고도 지루한 범죄자 ‘아간’의 색출과 그에 대한 공개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즉 예배가 재판에 관한 이야기로 일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재판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구원의 신탁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탁은 전투에 관한 지시사항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주로 매복에 관한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 이처럼 본문은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형식에 있어 <사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벤야민’ 지파 간의 전쟁 이야기(삿 20:18-48)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통적인 내용이나 양식을 아래 표에서처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를 위해서 <여호수아> 본문의 범위를 7장까지 확대해 보면, 두 이야기에서 등장하고 있는 “애가”(哀歌)의 양식 또한 밀접하게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 7:6-9; 삿 20:23, 26-27. 당연히 두 이야기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가를 초래한 원인 즉 이스라엘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도 동시에 등장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 7:2-5; 삿 20:19-25.
자료와 편집. 이처럼 <여호수아서> 7-8장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료비평 진영에서는 이 두 이야기를 <아간 이야기>와 <아이 이야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7장은 ‘아간’의 범죄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어(7:1), 소위 <아간 전승>으로 불리는 자료에서 그 내용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7장의 나머지 이야기도 그의 범죄와 연관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이 성 전투>에 관한 것입니다( 7:2-12). 그러다가 다시 이야기는 ‘아간’에 관한 내용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7:13-26). 이 부분은 그 내용에 있어 분명 <아간 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일 이 전승이 있기라도 하다면). 그리고 중간에 끊어졌던 <아이 전승>은 다시 8장에서 그 내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8:1-29). 이곳에서 주된 내용은 “매복과 위장 도피” 및 ‘아이 성’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사사기> 20:18-48의 본문과 비교해 본 바 있습니다(도표).
요약하자면, 7-8장은 구조와 형식에 있어 <아간 전승>이 <아이 성 전승> 사이에 끼어들어 그 내용을 양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각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살펴보면 이 설명이 타당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원인론적 설명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간 전승>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6).
<아이 전승>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8:29).
두 전승에서 강조하는 지명이나 지역도 다릅니다. <아간 전승>에서는 ‘아골’ 골짜기이고, <아이 전승>에서는 ‘벧엘’입니다. 그리고 <아간 전승>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냉소적인 것을 봅니다. 특히 ‘아간’이 ‘유다’지파라고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이 전승의 기록자는 아마도 ‘유다’지파와는 상당히 적대적인 지파, 예를 들어, ‘베냐민’이나 북쪽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울’에 이어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두 지파간의 알력과 충돌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우월성에 대해서도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전승의 원 배경과 기원, 그리고 이들의 결합과 편집 과정 등에 관해서는 일일이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Butler, 81-82쪽.
우리가 만나는 최종 본문은 분명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신학과 신앙
1. 신탁(8:1-2)
본문은 구원의 신탁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끝났던 예배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1절)
구원의 신탁 속에는 약속과 명령이 함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독자들에게 예의 친숙한 표현이자 모티브들입니다. 즉 독자들로 하여금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2)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3) “네 손에 주었노라.”
이들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믿음과 순종에 관한 또 다른 모티브의 등장입니다: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2절)
‘여리고’ 왕에 관한 언급은 지난 이야기(6장)에는 없었습니다. 그를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적어도 지금 이스라엘에 있어 ‘아이’ 왕이 여리고 왕보다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을 것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공격 명령과 함께 이번 전투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 또한 뒤따르고 있습니다. 원래 <신명기> 20장에 따르면 단지 ‘가나안’의 주민들만 멸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의 주된 관심사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데 있으며, 만일 가나안 주민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땅 주민들 외에 별도 ‘헤렘’의 목록을 작성하는 데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나중에 이스라엘이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승리를 위해서 이런저런 맹세나 서원을 하면서 ‘헤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새로운 목록을 추가하거나 새롭게 해석했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신 21:2; 삼상 15:3, 9-10). 예컨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물건과 가축”을 ‘헤렘’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의 다른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신 2:35; 3:7). 그러니까 ‘헤렘’의 대상과 관련해서 2절에 등장하고 있는 이 새로운 명령은 이스라엘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으며, 과연 이스라엘이 이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음을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27절).
2. 작전(8:3-9)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이 친숙한 표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로 시작하고 있다면(8:1상), 두 번째 단락은 “이에 여호수아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8:3상). 두 표현 모두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중요한 수사적(修辭的일)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이’ 성 공략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작전은 간단하지만 ‘여리고’ 작전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여리고’ 작전에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강조되었습니다. 문이 굳게 닫혀 아무도 출입하는 자가 없고,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성벽이 단순히 법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과 함께 나팔 소리와 고함 소리에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여리고’에서는 어떤 무기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에서는 매복과 협공이 주된 군사 작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둘로 나누어 한 조는 매복조로, 다른 한 조는 전투조로 나누어 일종의 유인전(誘引戰)을 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두 가지 방식을 알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방식; 인간의 계획과 전략.
3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5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 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6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7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3-7절상)
둘째, 이것은 다소 미묘한 것이긴 하지만 ‘여리고’ 전투에서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하람’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6:17). 그러나 ‘아이’ 성 전투에서는 그런 명령이 없습니다. 다만 완곡한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8:12). <아이 성 이야기>에서도 ‘헤렘’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어디까지나 두 군대의 대면이 끝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8:26).
그런데 이 미묘한 차이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 번째 차이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 성 이야기>에서는 전리품과 관련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 버렸습니다. 즉 ‘여리고’에서 금지되었던 그 행동이 ‘아이’ 전투에서는 허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이’ 성에서는 전쟁 노획물과 가축을 마음껏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8:2, 27). 달리 말해서 ‘아간’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에서 허락받은 일을 ‘여리고’에서 행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아간’이 저지른 행동은 범죄 행위였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노획물을 탈취하는 것을 허용한 ‘아이’ 성 이야기는 <신명기>의 내용과 크게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1)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오직 그 육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신 2:34-35); (2)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진멸하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진멸하였으나, 오직 모든 육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신 3:6-7). 이 두 기록은 똑같이 ‘헤렘’의 대상이 된 도시나 성읍의 가축과 노획물을 탈취하는 행동이 정당한 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참조, 수 11:11-14).
다만 ‘아이’ 성에서 허용되는 일이 ‘여리고’에서는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해밀턴’(V. Hamilton)은 이 질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승리의 결과로서 얻은 노획물에 한정되며, 노획물 자체는 결코 승리의 목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다소 애매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Hamilton, 56쪽(참고도서, 3).
‘아이’ 성 전투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전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다른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전투에 필요한 군인의 수가 삼천이 아니라(7:4) 삼 만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8:3). 이 말은 앞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의 삼천 명이면 충분하다는 자신만만 보고에 대한 수사적 ‘조롱’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방식에 관한 강조일 뿐, 전쟁의 주인공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임을 동일한 ‘모티브’를 사용해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7하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8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8:7하-8절)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직접 수행하고 계신다는 모티브는 또 있는데, 여호수아가 그날 저녁 이스라엘과 함께 잤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9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3-9절)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자 이스라엘의 탁월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즉 ‘임마뉴엘’의 상징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날 저녁 함께 자면서 백성들을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며 보냈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이 지난번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성 이야기>는 그 전후에 있는 다른 사건들과도 여러 면에서 평행되는 요소들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1-11장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두 번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민수기> 13-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정탐꾼 이야기”이고(신 1장),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등장하는 “금송아지 이야기”입니다(신 9장). <아이 성 이야기>를 포함해서 이들 세 이야기는 거의 동일한 양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의 두 “정탐꾼 이야기”는 그 유사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Hamilton, 56-57쪽(참고도서 3).
(1) 정탐꾼을 보내고 나중에 그들의 보고를 들음(신 1:22-25; 수 7:2-3).
(2)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패배가 있을 뿐이다. 추적자가 도리어 추적당하는 자로 처지가 역전됨(신 1:43-44; 수 7:4-5).
(3) 패배에 대한 통곡이 따름(신 1:45; 수 7:6-9).
(4) 이스라엘의 행동은 야훼의 진노를 초래함(신 1:34; 수 7:1).
(5) ‘야훼’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심(신 1:42; 수 7:12).
(6) 범죄자들이 죄를 고백함(신 1:41; 수 7:20-21).
(7)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범죄자들을 제거해야 함(신 1:46-2:16; 수 7:24-26).
(8) 걸림돌을 제거하고 ‘야훼’는 다시 약속과 명령을 주심(신 2:18-25; 수 8:1-2).
(9) 이스라엘이 적군의 공격을 받음(신 2:32; 3:1; 수 8:14-16).
(10) 공격을 물리침(신 2:33; 3:3; 수 8:21-23).
(11) 적군에 대하여 ‘헤렘’을 적용함(신 2:34; 3:6; 수 8:26).
(12) 적군의 가축을 노획물로 취함(신 2:35; 3:7; 수 8:27).
이들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식과 일련의 요소들은 <사사기>에서도 13회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 요소들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에 이은 “회복”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일종의 “신학적 윤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인 즉은 “축복은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은 저주를 자초하게 되나, 다시 회개의 고백은 용서와 구원의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3. 승리(8:10-2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신 그대로 전쟁을 수행합니다. 다시 한 번 화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순종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0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11그와 함께 한 군사가 다 올라가서(10-11절상)
전쟁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작전 지시대로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듯하고, 끝난 시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하루 종일 걸린 듯합니다:
이와 같이 성읍 북쪽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쪽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13절)
이처럼 화자는 전투의 시작과 진행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밝히고는 있습니다만, 분명치 않은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일예로, 매복한 군사의 수가 삼 만인지 오천인지가 분명치가 않습니다(참고, 3절 및 12절). 아무튼 매복과 기습 작전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처음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교만했던 대가로 패배하여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면”(7:5후), 이번에는 ‘아이’ 성의 왕과 군사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을 차례입니다. 지난 번 승리에 도취하여, 성을 온통 비워두고 거짓 도망치는 이스라엘을 쫓아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나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5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16그 성읍에 있는 모든 백성이 그들을 추격하려고 모여 여호수아를 추격하며 유인함을 받아 아이 성읍을 멀리 떠나니, 17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14-17절) 화자는 17절에서 ‘아이’와 함께 ‘벧엘’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를 본문 변조 내지 오류의 전형적인 예로 보아야 할지, 또는 의도적인 강조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아이’ 성 뿐만 아니라 ‘벧엘’도 정복했음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상할 수 있는 바대로 이 추적은 대참패로 끝날 운명입니다. ‘아이’ 왕은 지금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전투에 개입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친숙한 표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19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18-19절)
다만 ‘여호수아’가 손에 든 “단창”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장검(長劍)도 아닌 단창을, 그것도 대낮이 아닌 한 밤중에, 그리고 성 다른 편 숲속에 매복해 있는 군사들이 이 단창을 신호로 공격을 개시했다는 사실이 납득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굳이 이 전투를 <출애굽>(17:8-13)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아말렉’ 간의 전투와 비교해 보자면 나름대로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아이’ 성의 전투에서 ‘여호수아’가 단창을 든 손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은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이 두 장면은 리더십이나 순종 등과 관련한 일련의 공통적인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예상대로 전투는 ‘아이’ 왕의 대참패로 끝납니다. 마지막 두 절이 이를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2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23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22-23절)
4. 승리 이후(8:24-29)
네 번째 단락은 일종의 후기(後記)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대충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가 순종의 모티브입니다:
25그 날에 엎드려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26아이 주민들을 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25-26절)
그리고 두 번째는 후대(後代)를 위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전쟁 후에 이스라엘이 세운 또 다른 기념비, 즉 ‘아이’ 성의 돌무더기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29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28-29절)
이스라엘은 시대를 두고두고 두 개의 돌무더기 즉 “아간의 돌무더기”와 “아이 성의 돌무더기”를 지켜보게 될 텐데, 교훈즉인 즉은 “하나님의 땅과 그의 공동체는 결코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조차도 이를 어길 경우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신탁(8:1-2)
실수를 하면 우리는 종종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는 지난 일에 대한 좌절과 실망으로, 그리고 또 하나는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 된 해답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두 가지 모두를 날려버릴 수 있는 해결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과거의 실패에 언제까지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노래한 것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신탁이었습니다. 특히 ‘아이’ 성의 실패와 관련해서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호 2:15)
약속대로 이스라엘이 일단 그 진영을 깨끗이 하자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구원의 신탁을 선포하십니다. 약속과 함께 새로운 소명과 비전을 담은 것입니다. 약속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아주 친숙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네 손에 주었노라.” 우리가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아, 이제 일이 제대로 풀리겠구나”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늘 먹던 음식, 늘 다니던 길, 늘 앉던 자리, 늘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온 공동체가 불안과 근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이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실의와 불안에 빠졌을 때, 늘 들려주는 자장가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를 <성경>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조카 ‘롯’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양보하고 난 뒤 배신감과 허탈감에 빠져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2)
심한 풍랑을 만나 흔들리고 있는 배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또한 동일한 것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요 6:20)
실망이나, 두려움이나, 정신적 스트레스조차, 이들 모두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7). ‘사마리아’ 여인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이 여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모르긴 해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그를 배척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혹시 유대 땅으로도 갔을까요? 나는 어떻습니까? 늘 내 자신의 문제로 고통과 갈등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현”(顯現)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그저 묵상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照明)해 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십니다”(히 4:12).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주장과 소원과 결정들을 다스리고 인도해 주십니다. <잠언서>는 말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잠 3:6). 우리가 매일처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장을 푼 채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는 반드시 지시가 따릅니다. 즉 그분의 약속에는 반드시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아이’ 성에 속한 모든 재물들은 이스라엘의 것이 됩니다. ‘아이’ 성을 처음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은 너무 주제넘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패였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지 주제넘게 행동함으로써 취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2. 작전(8:3-9)
이번에 그들이 믿어야 할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지시 사항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전투에 나갔다가 대 참패를 당했으니, 이번에도 ‘여리고’에서처럼 무슨 다른 신비한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무한하게 구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위어스비’ 목사님이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작전은 ‘여리고’에서 사용하셨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을 사용하셨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방법 즉 인간의 계획과 전략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둘로 나누어 한 조는 매복조로, 다른 한 조는 전투조로 나누어 일종의 유인 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밤에 ‘길갈’로부터 ‘아이’ 성까지 24킬로를 행군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중에서 삼만 군사를 뽑아 성읍 서편 뒤에 매복시켰습니다(8:3-9). 그리고 성읍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오천 명을 매복시켰는데(12절), ‘벧엘’은 ‘아이’에서 약 3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점입니다. 복병을 이처럼 멀리 떨어지게 배치함으로써 ‘벧엘’로부터 오는 기습을 막을 수 있게 하였는데, 그것은 또 다른 ‘전방’(前方)을 열어 놓은 셈입니다. ‘아이’ 성 주변의 고지대는 바위가 많은 지형이기 때문에 복병을 매복시키기가 용이합니다. 그리고 매복은 야밤에 이루어졌습니다. 계획은 간단하지만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나머지 군인들을 이끌고 북쪽으로부터 ‘아이’ 성을 정면 공격할 예정이었는데, 지난 번 전투 때처럼 짐짓 도주하는 흉내만 내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이’ 주민들이 당할 차례입니다. 지난 승리에 도취하여 자기네들 성읍은 내버려 둔 채 이스라엘을 쫓아 달려 나올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여호수아’의 단창을 든 손이 높이 올라가면 매복해 있던 군사가 성읍으로 들어가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 사람들은 양편에서 오는 이스라엘 군대의 중간에 끼어 모두 전멸할 것이고, 이스라엘의 나머지 군대는 ‘벧엘’로부터 올지 모르는 원군(援軍)을 맞아 싸울 것입니다.
훌륭한 지휘관 ‘여호수아’는 그날 밤 군사들과 함께 잤습니다(9절). 그들을 격려하며, 혼자 있을 때는 기도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필경 전략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 계획 없이 그저 기도만 하고 있거나, 아니면 기도 없이 계획만 세우고 있는 지도자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승리(8:10-23)
‘여호수아’의 이른 기상을 주목합시다(8:10). 밤새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며 기도해본 경험이 있는 자라면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늦잠자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머리속에 해야 할 일이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전의 새벽을 맞아 다시 한 번 새벽 기도를 드렸을 것이며, 기도 후에 맞이하는 아침은 결코 다른 날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드디어 작전개시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전략은 지난 번 전투에서 경험했던 실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했던 결과로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7:5후)면, 이번에는 ‘아이’ 성의 왕과 군사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을 차례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교만 때문입니다. 마음이 한껏 부풀대로 부풀어 있어, 성을 텅텅 비워두고 거짓 도망치는 이스라엘을 쫓아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대참패입니다. 단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고 사로잡혀 죽었습니다(22절).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성의 모든 주민들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성의 왕도 ‘여호수아’의 칼에 찔려 죽고, 죽은 후에도 그의 시체는 해가 질 때까지 나무에 매달려 수치를 당함으로써 두 번 죽은 꼴이 되었습니다. 다시 그 시체는 성문 어귀에 내던져지고, 그 위에 큰 돌 무더기가 쌓여졌습니다.
4. 승리 이후(8:24-29)
이번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두 개의 돌무더기를 기념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아간의 돌무더기”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 성의 돌무더기”입니다. 전자가 이스라엘의 것이라면, 후자는 이방인의 것입니다. 두 경우 다 자연사(自然死)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 때 아닌 죽음을 맞이했던 자들의 것입니다. 저주로 내버려진 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두 얼굴이 있다고 했습니다. 축복과 저주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그 백성 즉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 이방인과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헤렘’외는 다른 운명이 없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이 성의 돌무더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아이 성의 돌무더기”가 주는 교훈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아간의 돌무더기”와 함께 이스라엘도 ‘헤렘’이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믿음이 ‘여리고’를 허물었다면, 불순종은 언약의 백성을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그리고 회복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신학적 윤회(輪回)입니다. 축복은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은 저주를 자초하게 되나, 다시 회개의 고백은 용서와 구원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아이’의 패배는 승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 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까? 승리가 아니라 패배의 연속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예배와 간구를 드립시다.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 모두 탁월한 삶을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를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 5:15)
연습과 토의
1.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의 공통점과 유사성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토의해 봅시다.
2. 두 이야기는 각기 기원론에 관한 진술로 끝나고 있습니다. 각 이야기의 교훈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내가 결단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을 헌신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헌신과 관련하여 다음 한 주를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