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유다를 회고하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30약 8분 분량
대개 정상적인 가족이라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자식의 아픔은 부모의 아픔일 것이며, 자식의 기쁨은 부모의 기쁨이 됩니다. 남편의 근심은 아내의 근심이 됩니다. 사제지간(師弟之間)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내 연구실 제자들은 나에 대해서 한없는 신뢰와, 애정과 그리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실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후배들에게 늘 연구실과 지도교수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 연구실은 대학원생들로 늘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나 내 연구실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설령 교수라 할지라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또한 같은 연구실 내의 동료 중에서 누군가 연구를 게을리 하기라도 하면, 집단으로 그를 성토하고 따돌려버립니다. 연구실의 명예를 추락시킨다는 것이지요. 혹시 누군가 내 부모님에 대해서 모욕적이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내 기분이 어떨까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누군가 그렇게 대한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교육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오늘날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은 있으나, 스승과 제자가 없어졌다는 말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선생과 스승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학생과 제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들 차이를 학원과 학교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원은 단순히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이상입니다. 지식에 더하여 인격을 훈련시키는 곳이었습니다.
학원은 학생들의 태만이나 부도덕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이들에 대해서 매를 드는 곳이었습니다. 선생은 분노할 필요가 없지만, 스승은 분노해야 합니다. 선생은 가르치기만 해도 되지만, 스승은 가르친 것을 행하도록 시키고 솔선해야 합니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는 말은 이들 차이가 없어져버렸다는 말이거나, 좀 더 절망적으로 말하자면, 그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말은 아닐까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송아지로 둔갑시켜놓고 예배를 드린답시고 야단법석을 해대던 이스라엘과 대제사장 ‘아론’. 이들을 보고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이 동네 시장바닥처럼 변해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룩한 대제사장과 사제들까지 한 통속이었습니다. ‘모세’나 ‘예수’님이나 아버지를 향한 불의와 모독에 대해서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모세’는 거룩한 십계명 돌 판을 내동이 쳐버렸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회초리를 들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습니다. 시쳇말로 두 사람 모두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지요.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분의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달래고 진정시켜야 옳습니까? 화를 내는 것은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화는 이분을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고 싫음,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그분처럼 명쾌하면서도 딱 부러진 태도를 보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맛이 없어서 내뱉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맛이 없어도 체면을 봐서 그냥 입안에 넣어두고 있겠다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기 때문에 내뱉겠다고 말합니다. 물맛이 가장 없는 온도가 대략 섭씨 20-30도 정도라고 하는데, 이 교회의 온도가 대략 그 정도였나 봅니다. 그 교회는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도, 끓는 물처럼 뜨거운 열정도 없었습니다. 아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기도 싫었습니다.
생전에 ‘예루살렘’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 이들은 예수께서 왜 즐겁게 춤추며 피리불고 있는지, 왜 슬피 울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예루살렘’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 모두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어찌 희로애락의 감정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요한’ 화자는 한 때 그의 동료였던 ‘가롯 유다’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금 심정은 어떠할까요? 나는 딱 두 가지로 그의 심정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노와 함께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심정일 것입니다. 즉 본문을 대하면서 연상되는 화자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동시에 가슴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고 애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바라보면서 마치 물이 끓듯 괴로움으로 요동치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실은 이 같은 감정은 화자 자신이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느끼고 있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예수님에게로 이입(移入)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화자는 실로 냉정한 지성을 지닌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뜨거운 가슴을 지닌 목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얼음처럼 찼으며, 동시에 끓는 물처럼 뜨거웠습니다.
내 자식이 아무런 꿈이나 계획도 없이 그저 식충(食蟲)이처럼 먹고 노는 일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도, 흥미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아직 철이 없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심정도 같은 심정일까요?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부모가 아닙니다. 양부모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내 자식이 수시로 학교를 빼먹고 게임방이나 유흥지 등을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면서 그저 꾹 참고 기다리겠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내 자식이 수시로 “주의 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교회를 빠지거나, 맡은 바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식의 편에 서서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아니면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시겠습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데, 어릴 때부터 적당주의가 몸에 밴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공동체가 따돌려버립니다.
우리 아들 달우가 얼마 전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음악밴드를 하나 조직했습니다. 구성원은 모두 여섯 명인데,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달 모여서 새로운 곡을 하나씩 발표하고, 이들을 모아 매년 한 두 개의 CD를 발간하기도 하며, 유명 여행 잡지에 이들 곡을 소개하면서 글도 써 왔습니다. 억지로 참여한 것이 아니고, 밴드의 취지나 목적에 찬동해서 모인 사람들이니 만큼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며 아주 재미있어 한다고 합니다. 더욱이나 그들의 활동이 점차 알려지면서 KBS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 게스트로 초대받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공연도 하고, 수시로 곡을 만들어주어 금전적인 수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늘 속을 썩인답니다. 매달 곡 하나씩을 발표해야 하니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도 해야 하고, 연습도 해야 하고, CD 발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 친구가 수시로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송국 출연 등과 같이 유명세를 타는 일이나, 돈 받고 공연을 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고 자기 몫도 챙겨간다고 합니다. 이런 약삭빠르고 얌체 같은 친구를 나머지 멤버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런 친구는 어디를 가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친구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그들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당장 눈앞의 유익이 그것입니다. 희생이나 봉사나 나눔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늘 내 일이 우선이고, 내 유익이 먼저입니다. 그는 실로 재치 있고 똑똑한 친구입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을까?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고 있을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있다면 오히려 그 자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극히 작은 것을 탐하다가 정말 큰 것을 늘 놓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야 말로 소탐대실의 전형이 아닐까요? 왜 그는 선생님의 계속되는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일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호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평소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실행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의 다음과 같은 경고는 마치 ‘유다’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유다’는 정녕 예수님마저도 구원하실 수 없었고, 또 구원하시지도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듣고, 보고, 갖추었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요? 그를 구원하고자 제자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할까?
대부분의 교회는 회원이 되기 위해서 소정의 새 신자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끝내자 말자 교회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린다면 교회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새 신자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할까? 구원의 확신 가운데 침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다시 한 번 더 침례를 받아야할까?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늘 어린 아이로 남아있지 말라! 늘 발달 장애자로 살아가지 말라! 신병교육대에서 군대생활을 끝내지 말라!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책임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