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4):
김태정 목사약 8분 분량
내게 주신 자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어떻게 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문가와 비 전문가가 보여주는 차이는 무엇인지, 본인이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비전문가에게 딱 들어맞는 두 단어가 생각날 뿐입니다. 지난 번 “세월 호 대참사”에서 대한민국이 목도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둥지둥”; “우왕좌왕.” 사건 규모에 비해 피해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도 바로 재난에 대처하는 대한민국의 비 전문성 때문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나의 비 전문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곧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재난 매뉴얼. <마태복음>의 “감람산 강론”이나 <요한복음>의 “다락방 강론”은 영적인 영역에서 재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일종의 “비상 매뉴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매뉴얼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숙지하고 있으며, 매뉴얼에 따라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 속에 그냥 묻어둔 채 살아갑니까? “책은 읽지 않으면 그냥 나무에 불과하다”는 서양 금언이 기억납니다. 나는 물건을 사면 사용 매뉴얼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귀찮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의 평소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 지금 재난과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교회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금 그분은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일견 참으로 한가하며, 위기 해소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작 기도라니요! 이것도 그분의 매뉴얼에 포함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참으로 한심한 매뉴얼이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 갑판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승무원들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두 장면 모두에서 허둥지둥하거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침착하고 고요하게 요령에 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타이타닉’ 호에서는 체념과 포기를, 이곳 다락방에서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이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세상의 강력한 힘 앞에 제대로 힘도 써 보지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위기 시에 사태를 해결함에 있어, 기도만큼 수동적이며 무기력한 대처방법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나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것은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경험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것을 기억해 내기가 어렵다면 그만큼 나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문제가 와도 그저 “세월이 약”이겠거니 하며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도에 대한 나의 기대도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흔히 “기도 좀 해 주세요”는 그저 관심 좀 가져달라는 완곡한 요청으로, 그리고 “기도 하겠습니다”는 “네, 알겠습니다”는 정도로 가볍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면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정성을 다해 기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점 나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 기도란 말은 그저 공허한 종교적 수사(修辭)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중심적 우주. 다만 기도에 예외적인 경우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죽기 살기로 치열하게 기도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걸린 경우입니다. 나는 전체 기도 시간 중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 씁니다. 내 가족은 나의 분신이며, 희망이며, 내 이름이자 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땀이 피가 되도록 말입니다. 이러한 나를 누가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이 우주에 자기중심적이 아닌 존재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태양계의 각 행성의 중력(重力)은 각자의 중심(中心)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구상에서도 물체는 항상 아래로 떨어집니다.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달의 중력이 지구를 향해 있었다면 달은 애초에 지구에 충돌하여 소멸해 버렸을 것입니다.
<아직도 가야 갈 길>에서 작가 ‘펙’(M. Scott Peck) 박사는 사랑도 이와 같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라는 단어에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여 사랑에도 여러 형태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낭만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우리는 이를 불륜이라 부릅니다); 등등. ‘헬라’ 사회에서는 사랑의 상대가 누군가에 따라, “이성간의 사랑”(eros), “형제나 동기간의 사랑”(philos), 그리고 “신적 사랑”(agape)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펙’ 박사님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이 같은 정의에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아무튼 사랑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주장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다소 거슬리기까지 합니다. 사랑이란 희생적이고, 이타적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목적이란 타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확대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의 성장에도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본인의 경우를 돌아보면 이분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나는 교단이나 연구실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가르칠 때, 먼저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비록 허구이긴 합니다만, 영화 <블랙>에서 두 주인공 ‘미셀’과 ‘시하이’가 보여주고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받는 자가 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는 자가 받는 복은 더 크고, 영속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이란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는 강박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야.”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빌 4:1).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며 쏟아 부은 헌신과 희생이 결국 자신의 유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고백인 것이지요. 그 유익이란 단순히 미래에 그가 누릴 보상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다시 예수님의 기도에 주목해 보기로 하지요.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1-5절)에 이어, 사도들을 위한 기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매 절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는 “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참고. 6-19절).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하십니다(참고. 6, 7, 9, 10절). 그러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9절).
아, 이 기도는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인류의 스승이자 세상의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님마저 이 같은 기도를 하시다니!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이분도 예외가 아니라니.
하지만 판단은 잠시 유보하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지요. “나는 과연 내 열(熱)과 혼(魂)을 다 바쳐 기도하고 있는 내 분신(分身)이나 면류관이 있는가?” 나는 어머니가 되어본 적이 있는가? 스승이 되어본 적은 있는가? 이번 “사월 호 대참사”를 겪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은 한 마음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왜 일까요?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묵묵부답(黙黙不答)일 뿐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염려가 되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날 뿐입니다. 왜일까? 예수님의 대답인 즉은 그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 손 떼가 묻는, 내 정성과 땀이 베여있는, 나와 같은 영적 유전자를 가진, 내 자식이고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바울’만큼 고초를 많이 겪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자신이 개척한 그 교회의 영적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고초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인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 장학금을 받아 지금 ‘하버드’ 대학에 연구원으로 가 있는 제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 끝 부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 댁에도 예쁜 꽃들이 피었겠지요? 따뜻한 창가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맛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으며 커피 마시던 그 때가 너무 그립습니다. 선생님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이 제자는 이제 나의 영광이고 면류관입니다.
나의 면류관은 또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본인과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또 다른 한 제자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편지 끝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내가 그의 영적 아버지라는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나를 그리워하며, 나를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는 자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가 가슴에 절절이 와 닿을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