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1): 골고다로 가는 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17약 9분 분량
채무 보증을 섰다 그 빚을 떠안아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것입니다. 나도 한 친척의 은행 빚 보증을 섰다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월급이 차압당하고, 재산 차압을 하겠다는 내용의 법무부 장관 소인이 찍힌 두툼한 편지가 우리 집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남 보기에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정년퇴직이 되어서야 겨우 청산을 다 했습니다만, 지나놓고 보면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는 것이지요.
연대 빚 보증은 우리의 오랜 문화와 관습이 낳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후진적인 제도였습니다. 지금은 법으로 천만 원인가 하는 액수 이상은 보증을 못하도록 정해놓았다고 합디다만, 그동안 이 제도로 가정 파탄이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많았습니까! 정말 억울한 노릇이 아닙니까? 남이 진 빚을 내가 값아 주어야 하다니 말입니다. 그런대도 은행이나 사채업을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빚보증을 서주는 본인조차도 이 말도 안 되는 제도를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아무도 이래서는 안 된다 하며 전 사회가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는지 참 궁금합니다. 정작 빚을 진 당사자야 보증인 덕분에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책임을 아는 자라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 아닙니까? 자존심을 상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특히 自意識이 강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내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하면 참 견디기 어려운 노릇일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나, 무슨 거지 건성이 몸에 밴 자가 아니라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 창피하게 여길 줄을 압니다. 그것도 큰 재산상의 피해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채무가 돈이 아니라, 예컨대, 군대 생활을 대신 해주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내 처자식 책임을 져 주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아니면 내 부모님의 아들 노릇 좀 해달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이 모두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코웃음 칠 게 뻔합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자 자존심입니다. 부탁하는 쪽이나 부탁을 받는 쪽이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罪)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즉 감옥 형(刑)을 선고받은 사람이 자기 대신 가서 옥살이를 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게 가능하기라도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 누군가 바보 천치 같은 자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나선다 해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건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소위 대속(代贖), 즉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 것으로 삼아, 대신 옥살이를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시몬의 십자가. 그런데 여기 빚보증을 섰다 대신 갚아준 사람만큼이나 억울해 할 사람이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바로 그입니다. <공관복음>은 그가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마, 27:32; 막 15:21; 눅 23:26). 지방에 있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온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들 세 <복음서> 모두, 이 사람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너무 힘들고 지쳐 있으니, 로마 병정들이 대신 근처에 있는 그를 불러다 지고 가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죄인도 아닌 사람이 죄인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으니 정말 황당하고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그냥 구경 차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곤욕을 치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하다 마주 오는 차선에서 난 교통사고를 구경하다 내가 사고를 당한 것보다 더 재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이 같은 치욕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입니다. 하등 부끄러워하거나 억울해 할 일이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시몬’은 연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 그 일을 행해야 했습니다. 내가 만일 ‘시몬’이었다면 ‘골고다’로 가는 내내 불평과 원성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정말 재수 없는 날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 사람 ‘시몬’이 대역(大逆) 죄인인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관광객 중 아무도 ‘시몬’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골고다’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날 ‘시몬’에게 그 길은 정말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런데 말입니다. 누군가 실제 그 짓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말입니다! 당연히 믿을 수 없습니다. 당장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자체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누군가 내 죄를 대속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어렵습니다. 너무 좋아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했다”는 그 좋은 소식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지요. 이건 논리적으로도 말도 안 되지만, 인간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소식인 것이에요. 도대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을 어떻게 알았으면 감히 그 따위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요, 인과응보(因果應報) 아닙니까? 즉 자신이 행한 일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복음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만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유난을 떨지, 웬만한 종교에서는 인간을 죄인 취급하는 자체를 죄악시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힌두교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한 힌두교 스승이 행한 연설을 소개하면서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힌두는 여러분을 죄인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고, 불멸의 행복에 참여한 사람들이며,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들입니다. 땅 위의 여러분, 신들이 죄인이라고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주장합니다. 즉 만일 인간이 범죄한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주장입니까! 인간의 존엄에 대한 대 헌장(憲章)으로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이 주장은 우리의 자존감을 한껏 높여주는 권리장전과도 같은 것입니다. 빚을 졌으면 본인이 갚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것은 인간 본연의 권리이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일이 아닙니까! 중보자가 내 대신 책임을 질 이유도 필요도 없으며,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신세를 입은 것이 없으니, 내가 굽실거릴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대속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정말 현실에서 “대속의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정말 나의 잘못이나, 불행이나, 또는 고통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거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려 한 적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담’이나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그리고 ‘하와’는 뱀이 자신을 대속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나 역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면, 최소한 환경만이라도 나를 대속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나는 끊임없이 대속의 제물(祭物)을 찾기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최근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얼마 전 문창극 장로라는 분이 한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두고 홍역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日帝) 강점 36년의 원인이 조선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인데, 언론은 그의 강연의 일부만을 발췌하여 그를 친일(親日)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가진 자로 매도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총리 후보에서 낙마(落馬)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대한민국 사람의 절대 다수는 조선의 멸망의 원인을 조선의 책임이 아닌, 일제의 책임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일제를 대속 제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오늘날에도 나라에 무슨 일이 터지면, 크든 작든 국민들은 대통령부터 먼저 찾습니다. 그가 그 시각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만일 그 시각에 그가 다른 장소에서 무슨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면, 금방 비난과 원망이 쏟아집니다. 이 국민이 대통령을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알아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희생양이 필요할 뿐입니다.
자신의 불만을 잠재워 줄 대속의 희생양 말입니다.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삼는 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갑니다만, 진짜 양을 대속 제물로 삼는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일 것입니다.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것도 그렇고, 또 양이 무슨 죄입니까? 그런데 알다시피 이 말도 안 되는 희생 양 제도의 원조(元祖)는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왜 하나님이? 물론 대속은 “구원”(救援)이라는 전체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대속 하나만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의 대속의 행위는 그분 스스로 그 모든 잘못된 것에 대하여 궁극적인 책임을 지시겠다는 결단의 표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영원한 대속 제물로 내놓으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더 이상의 대속 제물이, 더 이상의 희생 제사가 필요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끊임없이 핑계 거리를 만드는 그 수고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건 말도 안 돼!” 하며 여전히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안식을 누릴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나의 자유에 속하겠습니다만, 그전에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처럼 어리석고, 비이성적이며, 무모한 일을 한 것일까? 심술궂게도 나를 그분 앞에 발가벗겨 수치스럽게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알다시피 ‘아담’은 그가 한 일을 깨닫고서는 부끄럽게 여겨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지 않았습니까(참고. 창 3:7-8).
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왜 그랬는가?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유명한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참으로 통찰력 넘치는 답변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 에피소드의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기획에서부터 제작과 연출 및 출연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기획이나 제작 그리고 연출까지는 좋은데, 출연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주연으로 말입니다.
옛날 이 땅의 임금님들은 나라에 가뭄이 들면 자신이 부덕(不德)해서 그렇다며, 죄수의 복장을 하고 기우제(祈雨祭)를 드렸다고 합니다. 가뭄이 왜 자기 탓이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백성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만하면 그는 악한 왕이 아니라 선한 왕임은 분명합니다. 왕이 기우제를 드린다고 해서 하늘이 무슨 감동을 받겠습니까만, 백성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크게 감동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 나라님이 우리를 이처럼 극진히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우리의 근심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시는구나.”
가장(家長)은 자신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베드로’처럼 당황하여 “어찌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기려 하십니까?” 하며 거부하는 것이 그나마 체면을 지키는 일일까? 아니면 염치 불구하고 때 묻은 발을 내놓아야 할까? 어느 쪽이 그분의 위험한 도박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