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재는 <우리 교회 넷트웍>의 <교회학교>에서 교회 회원을 위한 교재로 만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훈계하며, 책망하고, 바르게 하며, 또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 쓰신 그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이것이 바로 성경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계시며 우리 또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를 하고자 하는 자는 힘들지만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변화 받기를 원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보 전달에 있다기보다는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와 같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는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전달함에 있어서 법조문이나 신문 기사처럼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한 방식이 아니라, 시나 노래로 아름답게 부르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등으로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즉 문학이라는 그릇을 빌어서 그분의 의도를 전달하고 계십니다. 신학이라는 내용이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진리들이 얼마다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교훈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 또한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공부의 이중적인 목적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공부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는데, <성경>이 현재의 본문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와 배경과 관련된 연구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비평적” 연구라고 부릅니다. 결국 성경공부를 하는 우리의 종합적인 목적이 삼중적임을 알게 됩니다. 신학과 문학과 역사가 그것입니다. 필자도 본 교재를 작성함에 있어 이러한 기본자세에 입각해서 쓰려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다만 필자의 신학적 지식이나 문학적 소양이 천학비재 하여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점도 아울러 밝히는 바입니다.
본 교재는 제 1부에서 <요한복음>의 “문학과 역사와 신학”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인데, 이는 이 책 전체에 대한 서론적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어서 나머지 부분은 <요한복음>의 구조에 따라 다음 네 부로 나누어서 해당 본문에 대해서도 “서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1) 문학과 역사, (2) 신학과 신앙, (3) 교훈과 적용, (4) 연습과 토의 등의 순서로 진행할 것입니다:
제 1부: 서론-<요한복음>의 역사와 문학과 신학
제 2부: 서막(Prologue)
제 3부: 표적설화-예수님의 공적 사역
제 4부: 수난과 부활설화-예수님의 제자사역
제 5부: 결말(Epilogue)
모쪼록 본 교재가 <요한복음>을 보다 잘 이해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함에 있어 좋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 태정
참고도서
본 교재는 아래 소개된 책들을 참고하여 집필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보다 깊은 연구를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소개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해서 및 성경공부
1. 브루스 말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정옥배 역. 서울: IVP, 1995.
2. 데이비드 홀베르타, 「요한복음」.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3. 메릴 테니, 「요한복음서 해설」. 김근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4. 불트만, 「요한복음서 연구」. 허혁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9.
5. Barclay, W. John. The Daily Study Bible. Welch: 1975.
6. Beaseley-Murray, R. G.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Publishers, 1985.
7. 레슬리 뉴비긴, 「요한복음 강해」. 홍병룡 역. 서울: IVP, 2001.
8. Boice, James M. 「John」Vols I-V. Baker Books, Grand Rapids, Michigan, 1985.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9. 어빙 젠센, 「요한복음-성경공부교재」. 최삼경 역. 서울: 아가페, 1988.
참고서
10. 김태정, “회중교회를 위한 요한복음의 이해” 석사학위논문.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6.
11. 김득중, 「요한의 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1994.
12. 모리스, L. 「요한신학」. 홍찬혁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3. 브라운, R. 「요한공동체의 역사와 신학」. 최흥진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14. 라이겐, R. 「문학에서 본 성경」. 유성덕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15. 죤 스토트,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한화룡. 정옥배 역. 서울: IVP, 1993.
16. 멕아더, J.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이춘이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17. 프란시스 쉐퍼, 「기독교문화관」.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학습목표
<요한복음>에 대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공부를 통해서 기대하고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적어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각 장별 중요 구절을 암송한다든지,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적어도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겠다는 등의 기대가 그것입니다. 일련번호를 매겨서 본인이 기억하기 쉽도록 기록해 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1.
2.
3.
4.
5.
목 차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는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크게 네 개의 단원으로 나눌 수 있다고 서론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공생애 이야기>와 <수난 및 부활 이야기>는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단락을 포함하고 있는데, <공생애 이야기>는 소위 “기적설화”와 관련된 담론 및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수난 및 부활 이야기>의 주 내용은 흔히 “수난설화” 및 “부활설화”로 불리는 것들입니다. 이들을 다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단락 구분은 ‘비슬리-머레이’(참고문헌 1)를 참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은 제 3부, “예수-생명과 심판의 중보자”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 1부: 서론.....................................................................................................................9
제 2부: 서막-로고스 송(1:1-18)......................................................................37
제 3부: 표적설화-공생애(1:19-12:50)........................................................76
어느 누구도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지는 않습니다. <성경> 읽기는 필연적으로 본문에 대한 “해석”을 내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 읽기에 해석이 필요한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저작 배경과 현대 독자들 간에 존재하는 시공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성경> 해석에 기본 전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자신의 사상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eisgesis),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exgesis). 그러나 아무도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결국 편견 없는 <성경> 해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올바른 해석은 아무런 해석적 관점을 갖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및 타인의 해석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사람들은 <성경>이 출현한 이래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읽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해석”(interpretation)을 해왔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경>을 끊임없이 “비평”(criticism)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 해석”은 “성경 비평”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평”(criticism)에 대한 <웹스터 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술이나 문학 작품들의 장∙단점들에 대해서 지적(知的)으로나 논리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시도는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적 가설, 그리고 그것들을 진행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등을 평가하는 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라 <성서 비평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생겨난 여러 비평 방법들을 소개하고 각 방법들의 특징과 장∙단점들을 평가하는 학문의 한 영역.”
결국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서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성경 비평”의 역사를 개괄해 보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비평적 관점에서 연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습니다만,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적어도 기독교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아주 초보적이긴 하지만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 형성의 역사나 비평 방법들의 역사에 대한 상세한 공부는 별도 교재에서 다루게 될 것이니만치, 이곳에서는 개괄적 도표와 이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도표에서 보듯이, 역사적으로 아주 다양한 성경 비평 방법이 있어왔고, 각 방법은 나름대로 독특한 방법론과 관심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사비평” 즉 “통시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저자(내지는 편집자)에 대한 것이었다면, “공시비평”의 관심사는 주로 <성경> 본문 그 자체에 있음을 도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문학비평”의 관점이 고조되면서 독자 연구 중심 즉 “독자비평”에 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독자비평”의 주된 관심사는 저자나 <성경> 본문보다는 독자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독자비평”은 “역사비평”의 반대 편 끝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독자비평”의 추세는 본문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앞으로 “성경 비평”이 나아가야 할 길은 그동안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제반 비평 방법들을 총망라하는 일종의 “종합적 비평”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종합적 비평”의 전제는 따라서 “역사비평”의 제 방법론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이 바탕 위에 20 세기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공시비평”의 제 방법-정경비평, 사회학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들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 <서론>에서 <요한복음>의 역사와 신학과 문학이라 함은 <요한복음>에 대한 “종합비평”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복음>이라는 전체 숲을 조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하나 하나에 대한 역사와 신학과 문학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비단 <요한복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필자의 모든 교재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역사
<요한복음>의 역사라 함은 이 책이 단순히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역사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위에 제시한 도표는 비단 <구약>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약>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전제에 따라 <요한복음>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 결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참고도서(5 및 7)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자료 및 양식
네 복음서들을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많은 공통점과 동시에 차이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들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표현 방식에 있어서나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공통적인 자료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고, 상호 차이가 있는 부분은 서로 다른 전승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당시에 어떠한 전승들이 존재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교회가 복음서 탄생 이전에 이미 여러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흔히 <Q 전승>으로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 모음>이나,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 즉 <수난 전승>,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 즉 <부활전승> 등이 그들입니다. <요한복음>도 화자(또는 편집자)가 이러한 공통적인 자료들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별도의 자체적인 전승들 중에서 취사선택을 통해서 편집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2. 편집
1) 저자(또는 편집자)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또는 편집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는 <성경> 자체의 증거와 <성경> 외적인 증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 ‘요한’ 저작 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처럼 “역사비평”에서는 “실제 저자”(real author)가 누구인가가 큰 관심사가 되고 있지만 “공시비평”의 “서사비평”이나 “독자비평” 등에서는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알 수 있다고 해도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저자에 대한 관심이 본문에 대한 이해나 해석을 위한 것일진대, “실제 저자”에 대한 미미한 지식으로 본문 해석을 통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본문 자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저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하며 타당할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을 통해서 구성해 볼 수 있는 저자를 “내포저자”(implied author)라고 부릅니다.
“내포저자”는 본문의 서사에 내포 또는 암시된 가상적인 저자로서 이야기에서 표현되는 저자의 성격, 관점, 태도, 가치관 등의 총체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즉 실제 인물이기보다는 추상적 실재를 지칭하는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상적이며 문학적인 저자로서 실제 저자에 의해서 창조된 저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이 내포저자에 대한 이해야말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 전체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내포저자”란 이야기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저자의 성격과 의도”라고 할 수도 있으며, 본문에 의해서 재구성된 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본문의 이야기 안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타나기보다는 숨어 있습니다. “실제 저자”는 다수이거나 또는 공동체일 수도 있지만, “내포저자”는 대개 단수입니다.
그렇다면 “내포저자”는 “서술자”(narrator) 또는 “화자”(話者)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화자는 본문에서 등장하는 해설자를 말합니다. 그는 실제 저자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거나 또는 다른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종종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를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서술자 또는 화자로 등장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으며, “내포저자”의 사상이나 견해를 대변하는 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복음서>에서는 “내포저자”와 “화자” 간의 구분은 없으며, 따라서 화자는 “내포저자”의 사상이나 견해를 그대로 대변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화자는 “내포저자”의 대변인이거나 화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는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때 말하는 자는 저자가 아니라 서술자 또는 화자입니다.
2) 독자
이처럼 본문과 관련해서 삼중 저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독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실제 저자”는 “실제 독자”와, “내포 저자”는 “내포 독자”와, 그리고 “서술자”는 “피서술자”와 연관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제 독자”는 이야기의 실제적 대상자를 말하며 “실제 저자”와 마찬가지로 개인 또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실제 독자”는 “실제 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저자에 의해서 의도 된 이상적 독자 즉 “내포 독자”(implied reader)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내포 독자”는 “내포 저자”와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내포 저자”의 모든 가치관과 의도를 파악하고, 그가 사용하는 문학적 기교, 비유적 표현, 암시, 유머 등 저자의 모든 이해하는 “이상적 독자”(ideal reader)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포 저자”가 예상하고, 의도한 독자입니다. 본문 중에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가 있는 한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내포 저자”와 마찬가지로 실제 등장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피서술자나 다른 등장인물을 빌어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직접 나타나는 독자는 아닙니다. “내포 저자”가 실제 인물이 아니며 가상적 실재이듯이, “내포 독자” 역시 실제 인물이 아니며 저자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저자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며 저자의 의도대로 행동하려는 이상적 실재에 불과합니다. <복음서>에서 “내포 저자” 또는 “화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리자요 해석자이므로, 그가 어떤 “내포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피서술자”는 본문 안에서 서술자의 이야기를 듣는 대상자를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피서술자”는 ‘데오빌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복음서>에는 피서술자가 누군지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3)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
<요한복음>의 “내포 저자”는 누구이며, “내포 독자”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해답들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가상적으로 ‘요한’ 공동체가 “내포 저자”이자 동시에 내포 독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이 공동체는 과연 어떤 공동체였을까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공동체가 만일 존재했다면 그 삶의 자리가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해 놓은 것으로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참고도서 8과 9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내지는 ‘요한’ 공동체의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대’교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살펴보는 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은 ‘유대’교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성전의 멸망은 성전 중심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 계급의 종말을 가져왔고, ‘유대’인들의 신앙행습은 성전중심에서 회당중심으로, 제사장 중심에서 ‘랍비’ 중심으로 옮아갔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멸망 이후 ‘랍비’들이 개최했던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이들 지도자들은 당면한 민족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를 계속 보존하고, 백성들의 신앙교육을 지속시켜가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작업은 ‘유대’교가 당면한 내적인 위험인 와해와 분열을 막기 위해 그 결속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는데, <구약성서>를 정경화(正經化)시킨다든지, 모든 ‘유대’인들을 위한 달력을 제정함으로써 ‘바리새 적’ 유대교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노력의 일환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종교적 위협, 즉 이교도, 특히 기독교의 선교적 확장에 적절히 대처하여 ‘유대’교 자체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자연히 이들의 예배형태에도 반기독교적인 요소들이 포함되게 되는 바, 그 한 예가 회당예배에서 도입하던 소위 <18 기도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중 12번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에겐 소망이 없게 하시고 오만의 지배를 우리 사대에 당장 근절시키시오며, 이교도들과 ‘미님’(minim = 이단자)들을 일순간에 멸하시오며, 그들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 도말하시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문의 목적은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유대’인들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일종의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미 기독교로 개종은 했으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한 채 회당예배에 참석하고 있던 소위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the cryptic Christians)을 색출해 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회당예배에서 이 기도문을 다 같이 암송하고, 회중은 함께 “아멘”하게 되어 있는데, 숨어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대목에서 주저하게 될 것이므로, 이들을 쉽게 색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유대’교가 취했던 이 두 번째 정책이 기독교, 특히 ‘요한’ 공동체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암시를 <요한복음> 본문에서 적어도 세 번이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9:22)
(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12:42)
(3)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16:2)
이들 구절들은 ‘유대’ 당국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 곧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축출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라는 암시로서, 예수님 자신의 생전에 있었던 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회당으로부터 축출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처형까지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중 고위층 회원 가운데서도 은밀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 12:42). 이렇게 볼 때, 초기 기독교인들, 특히 ‘요한’ 공동체가 ‘유대’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처럼 보입니다.
4) 요한 공동체의 형성 과정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발전해 갔을까요? 그리고 이 공동체가 자신과 어떠한 형태로든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당시 다른 종파나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을까요?
이들 질문은 <요한복음>의 해석, 특히 “교회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요한’ 공동체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알려져 있지만, ‘마틴’(Martyn)과 ‘브라운’(Brown)의 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틴’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발전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이 기간 동안 ‘요한’ 공동체를 포함하여 적어도 네 무리의 역할을 감지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기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초기 시대(‘유대’ 전쟁 이전으로부터 80년대에 이르는 시대). 이 시기는 ‘유대’인 회당 공동체 안에서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던 시기로서 기독교의 태동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역할은 주로 수동적인 것으로서, 예를 들면 그는 제자들을 부르기 위해 전혀 주도적인 행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그를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요 1:35-49). 이 시기는 분명 “유대 전쟁” 이전의 시기로서, ‘요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직 그들의 유산으로부터 이탈 혹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던 자들이며, 나중에 회당으로부터 출회를 당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초기에는 아직 이방 선교에 대한 관심도 없었으며, 이원론(二元論)에 대한 암시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일단의 기독교적 유대인”들로서 회당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자들입니다.
(2) 중간시대(아마도 80년대 후반). 이 시기는 회당 내 ‘메시아’ 그룹에 속하던 일부 ‘유대’인들이 회당으로부터 축출 당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서서히 독립적인 기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자, ‘유대’ 당국은 이 단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회당 안의 ‘유대’인들과 새로운 ‘메시아’ 그룹간의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세 부류로 분화하게 됩니다:
㉮ 절대적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6:68)
㉯ 부분적으로만 믿는 무리들(2:23 이후)
㉰ 전혀 믿지 않는 무리들(7:12, 47)
‘요한’ 공동체의 출현은 이 중 첫 번째 무리들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시기는 대략 회당 안에서의 박해가 심해지기 시작하던 때부터로 보면 될 것입니다(9:22, 34; 12:42; 16:2). 그들의 죄목은 당연히 유일신 사상에 대한 거부였을 것입니다(5:12). 이때부터 이들은 스스로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와의 구속사적 연속성 대신에 이원론적 사고가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참 이스라엘”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후기 시대. 이 시기는 회당으로부터 독립해 나온 ‘요한’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과 정체성을 회당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기독교 무리들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정립하던 단계였습니다.
이들 무리 중에는 크게 세 무리가 있었는데, 첫째로 회당에 그대로 남아있던 “숨어있는 기독교인들”(the Crypto-Christians)로서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모세’의 제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습니다(6:66; 9:28). 두 번째 무리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로서 예수의 말을 믿지만, 그 말씀으로 자유롭게 된 자는 아닙니다(8:31). 이들은 또한 “우리 아버지는 한 분 뿐이라”(8:41)고 말하는 “유일신론자” 들이며, 예수님은 단지 그들이 믿어야 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셋째로는 “다른 양”들입니다. 이들은 ‘요한’ 공동체와는 분리되었지만 다른 종파에 속한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요 10).
‘브라운’은 ‘마틴’의 이러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복음서>에서 ‘요한’ 공동체 외에 적어도 여섯 무리의 분파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세 무리는 불신자들(세상, 유대인들, 침례요한의 제자들)이며, 나머지 세 무리는 다른 기독교인들(숨은 기독교인들, 유대교 기독교인들,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로서 ‘요한’ 공동체의 기준에서 보면 불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가) 세상. ‘요한’에게 있어 세상은 주로 빛을 거절하는 자들입니다(물론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구절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29; 3:16; 4:42; 6:33, 51; 10:36; 12:47; 17:21). 그 이유는 빛을 영접하는 자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어둠의 자식들이 거주하는 세상(12:35-36)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에(9:39; 12:31) 세상은 예수와 상반됩니다(14:17; 16:8-11; 16:20). 세상은 또한 예수와 그를 따르는 자를 배척합니다(7:7; 15:18-19; 16:20).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기를 거절하며(17:9), 그보다 세상을 이겼으며(16:33), 이 세상의 임금을 몰아냈습니다(12:31; 14:30).
(나) 유대인. ‘요한’은 또한 여러 곳에서 세상과 ‘유대’인들을 동일시합니다. 즉 세상의 임금은 ‘사탄’이며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마귀입니다(8:44).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라는 언급이 때때로 적대적이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언제나 적대적입니다.
(다) 침례요한의 추종자들. ‘요한’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침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관련된 많은 부정적 진술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빛이 아니라든지(1:9), 그는 예수보다 앞서지도 않은 자라든지(1:15, 30), 그는 신랑도 아니라든지(3:29), 예수는 흥해야 하겠고 그는 쇠해야 한다든지(3:30), 또는 그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는 진술(10:41) 등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당시 ‘요한’ 공동체 내에 예수님이 아닌 “침례요한”을 아직도 믿고 따르는 무리가 있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라) 숨은 기독교인들. 이들은 예수님께 마음이 끌려 믿기는 했으나, 회당으로부터 축출을 당할까 두려워 공공연히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12:42-43). ‘요한’은 이들을 경멸했습니다.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소경 이야기>(9장)를 통해서 이들을 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 공동체는 선택의 기로에서 믿음을 거절하고 떠났던 자들을 거의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그들의 견해로 해서 그들은 회당의 적대적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마) 그릇된 유대기독교 공동체. 이 공동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유독 ‘브라운’만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들 역시 ‘요한’ 공동체가 적대적인 감정을 보였던 무리로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는 했으나 그에 관한 온전한 믿음은 아직 소유하지 못했던 자들을 말합니다. 그 첫 예로, “오병이어”(熬餠二魚)의 기적(6:60-66)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관한 강론을 듣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7:3-5에 있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로서 예수님의 기적을 대중적인 영광과 관련지으려 했던 무리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바) 사도적 기독교인들. ‘요한’의 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무리로서는 <복음서> 내의 ‘베드로’와 그 외 사도들(‘안드레’, ‘빌립’, ‘도마’, ‘유다’, ‘나다니엘’)로 대표되는 무리입니다. 이들의 신앙에 관한 중요한 암시 중의 하나를 6:60-69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베드로’로 대표되는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무리의 존재에 대한 보다 분명한 증거는 <복음서>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대조되어 나타나는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와의 의도적인 구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13:23-26; 18:15-16; 20:2-10; 21:20-23; 19:26-27).
이들에 대한 ‘요한’ 공동체의 태도는 호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6:60-69). 이들은 분명 앞에서 언급한 다른 기독교인들과는 구분됩니다. 이들은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이며(13:6; 14:5, 8, 22), 예수께서 끝까지 사랑하는 자 속에 포함된 자들이며(13:1), 예수께서 위하여 기도를 했던 자들입니다(17:9, 20). 이들은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으며(20:19, 24; 21:2),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던 자들입니다(21: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공동체와 비교해 볼 때, 이들은 기독교 지각의 충만함은 보여주지 못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난 받으실 때 흩어졌으나(16:32) 사랑받는 제자는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고(19:26-27),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으며(18:17, 25), 그렇기 때문에 후에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그 사랑을 재확인 받고 회복될 필요가 있었던 무리들이었습니다(21:15-17). 그러나 ‘요한’ 공동체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전에(13:23), 그가 죽임을 당할 때(19:26-27) 곁에 있었고 그의 빈 무덤의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20:8-10). 이들은 ‘브라운’이 쓰고 있는 바처럼, 사도들의 기독교인들보다 더 우수한 “기독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요한’ 공동체의 신학적 특징을 김득중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하나의 통일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상이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상이한 여러 그룹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고, 상당한 기간에 걸쳐 발전하면서 요한 문서를 저작, 수정, 편집한 공동체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우선 역사적으로 이 공동체가 예수를 메시아로 믿던 소수의 유대인으로 또는 기독교적 유대인으로 남아 있었던 바, 모세의 제자들인 동시에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다가 유대교 당국자들이 기독교에로의 개종을 금지하기 위해서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는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요한의 공동체 안에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르 고백하지 않는 은밀한 기독교인들(cryptic christian)과 더이상 ‘유대’인 혹은 “기독교적 유대인”(Christian Jews)으로가 아니라 “유대적 기독교인”(Jewish Christians)으로 자기정체를 밝히는 사람들로 구분되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교 당국의 출교 결정은 오히려 ‘요한’ 공동체의 형성과 결속을 촉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신학 사상적 측면, 즉 기독론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 공동체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지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기독론을 신봉하다가 차츰 영지주의의 구세주 신화(the Redeemer Myth)의 영향을 받아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고등 기독론(the higher Christology)을 주장하는 데로 발전했는데(1:1-18; 3:13, 31; 8:58; 17:14 등등), 나중에 공동체 내의 일단의 극단주의자들이 너무 예수님의 신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그의 인간성과 육체성을 부인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기에 이르자, ‘요한’ 공동체는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것을 다시 ‘요한’ 문서의 형성 과정에서 살펴보면, 첫 단계에서는 사도 요한 또는 “사랑하는 제자”가 전해준 전승 자료를 토대로 기초 문서가 작성되던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로는 공동체 내의 지도자 중 하나가 “사랑하는 제자”의 설교나 교훈을 토대로 복음서의 초안을 작성하던 단계이고, 마지막으로는 가현설의 위험에 직면해서 그 이단적 교훈을 경계하기 위해서 요한 일서가 기록되고 요한복음의 초안이 반 가현설의 관점에서 새로운 자료에 의해 보충되고 재편집되던 단계일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복음>의 신학
앞서도 말했지만 요한복음은 Murray의 말대로 마치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멜기세댁’처럼 여러 가지 점에 있어 아주 신비한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에 대한 현재까지 이루어진 제반 역사 비평적 연구 결과들은 여전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미궁 속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주제이자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여타 주제들,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성령론, 그리고 선교론도 이 주제의 여러 측면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기독론을 우선적으로 요약하고, 이 주제에 따라 나머지 주제들을 차례로 간단히 언급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독론
기독론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란 누구인가?”에 관한 설명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독론의 중요한 특징은 예수님에 대한 이중적인 명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메시아’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입니다. 학자들은 흔히 전자를 예수님의 인성이 강조되는 “저급 기독론”(a low christology)으로, 후자는 그의 신성이 강조되는 “고등 기독론”(a high christology)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서> 안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나 화자의 서술을 통해서 공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저자의 고백(20:31):
(2) ‘마르다’의 고백(11:27)
(3) ‘나다니엘’의 고백(1:49)
1) 메시아
‘메시아’ 예수에 대한 문제는 <복음서>의 서론이 끝나자마자 1장 나머지 부분의 중심 주제로 등장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찾아 적어봅시다.
이어지는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이 주제는 중심 대화가 되었고, 여인이 궁극적으로 알게 된 사실은 그녀의 대화 상대자가 ‘메시아’라는 사실이었습니다(4:25-26).
이 문제는 수시로 사람들의 태도를 극명하게 갈라놓을 만큼 큰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7:40 이후). 이 문제가 왜 <요한복음>에서 그처럼 중요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위에서 상고해 본 바처럼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초기의 ‘요한’ 공동체의 회중들은 주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러나 율법이나 다른 신앙의 행습에 있어서는 ‘유대’적 전승을 그대로 존중하고 따랐으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오직 예수만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초기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점은 <요한복음> 기록 당시 독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 때문에 ‘유대’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9:22; 12:42),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까지도 했었다는 사실(16:2)에서도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중요한 신앙 고백은 거의 예외 없이 “예수가 그리스도시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공동체의 초기 단계에서는 ‘메시아’ 기독론적 명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 가장 특징적인 기독론은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명칭이 네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빈도를 통해서도 곧 알 수 있습니다: (1) <마태복음>(23회); (2) <마가복음>(4회); (3) <누가복음>(6회); (4) <요한복음>(107회).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적어도 시기적으로 ‘요한’ 공동체가 초기의 ‘유대’인 기독교인 중심의 회중에서 점차 이방 기독교인들의 수가 늘어가던 후기일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 김득중의 저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게 되고,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면서, “우리에게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19:7)라고 말한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고등기독론을 갖게 된 것은 공동체의 회중이 점차 ‘헬라’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불가피한 현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영지주의의 영향도 어쩔 수 없이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어나 기타 언어권에서 쓰고 있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아들”로 이해하여 예수님을 그냥 하나님의 피조 된 아들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해서 다음에 상세히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만, 이런 태도는 지극히 편협하고 제한적인 지식을 노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2. 구원론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구원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론은 불가분 구원론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구원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는 “생명” 또는 “영생”입니다. 다음을 읽어봅시다: 3:16-17; 10:9-10. 따라서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3:36; 5:39-40.
1) 생명(영생)
‘요한’에게 있어 생명이나 영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 또는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가 말하는 영생에 관해서 가장 독특한 설명은 17:3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 구절에서 말하는 “지식”은 단순히 ‘헬라’적인 의미의 “지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적인 의미의 “체험적인 만남 또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고, 눅 1:34.
2)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요한’에게 있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3:3, 5, 15-16). 물론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왕국”이라는 용어와 함께 오직 세 번 밖에는 등장하지 않는데(요 3:3, 5; 18:36), 그것은 이 단어가 모두 “생명” 또는 “영생”으로 대치된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모두 123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7번; <마가복음>, 20번; <누가복음>, 46번.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생명 또는 영생으로 대치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생명이란 개념이 하나님 나라에 비해서 구원의 내면적인 측면,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은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요한복음>에서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분히 미래적이며 종말적인 것임에 반해서 생명의 개념은 보다 현재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가리켜 실현된 종말론 또는 현재적인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영생은 믿는 자들에게 약속된 어떤 미래적인 약속이 아니라, 믿는 순간부터 주어지는 현재적인 실제이요 소유를 말합니다(3:36; 5:24; 6:47; 6:54; 10:28). 이는 ‘요한’ 특유의 기독론, 즉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말로 정리해 봅시다.
3. 종말론
1) 현재적 종말론
거듭 강조하거니와 ‘요한’에게 있어 구원 또는 영생은 지금 현재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내 안에서 성취된 하나의 사건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있어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나는 세상과의 분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것입니다(5:24-25). ‘요한’의 이러한 사상은 죽은 ‘나자로’를 놓고 ‘마르다’와 예수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11:25-26). 실제 ‘나자로’는 ‘마르다’가 생각했던 것처럼 먼 미래에 살아 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교에서나 <공관복음>에서 만나는 영생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2) 미래적 종말론
이처럼 <요한복음>이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17장에서 보듯이 ‘요한’의 관심사가 단순히 과거나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적 소망도 갖게 하고 있음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미래적 종말론의 요소를 보여주는 본문들은 많이 있습니다(예: 5:28; 6:39-40, 54, 12:48 등). ‘브라운’은 <요한복음>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이유에 대해서 당시 박해받고 있던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요한복음> 내에는 종말론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며, 어느 하나를 위해서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면을 강조하느냐 하는 문제는 독자들의 실제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4. 성령론
1)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성령님의 명칭이나, 사역의 시기나, 그리고 역할과 관련해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고린도서>와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 선교론
이를 위해서는 본문에서 직접 다루게 될 것입니다.
6. 교회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과 교회와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이 주제를 제일 마지막으로 다루는 이유는 가장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내포 저자”이자 동시에 “내포 독자”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요한복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내릴 수 있는 ‘요한’ 교회의 특징은 대략 아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신약>의 이상과 정신에 가장 충실하려 했던 교회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1) 영광과 새 질서의 공동체
(2) 빛과 진리의 공동체
(3) 사랑과 희생의 공동체
(4) 선교와 연합의 공동체
우리는 이들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본문 연구를 통해서 차례로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문학
문학 형식으로서의 <요한복음>은 뛰어난 한 편의 설화적 통일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의 논의는 대부분 ‘라이겐’의 <문학에서 본 성경>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도서 13.
“설화”(說話, narrative)는 “이야기(줄거리)”(story)와 “수사”(discourse)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양한 “구성”(plot)을 지니고 있습니다: (1) 플롯의 진행성; (2) 플롯의 충돌; (3) 플롯의 확대; (4) 구조적 통일성. 이 위에 제반 “수사”(discourse)의 요소들이 일련의 ‘모티브’들과 함께 잘 배합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지적이고, 교훈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서적 즐거움도 아울러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1. 구성의 진행성
<요한복음>의 구성(plot)이 진행적이라는 것은 이 책의 전체 개요가 주인공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의 신성한 기원에 대한 진술로 시작하여, ‘침례요한’의 예비적 사역, 예수님의 초기 사역, 주요 순회 사역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수난(재판과 죽음)과 부활의 순으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플롯의 진행적인 움직임은 자주 언급되는 “그의 때”와 관련하여 추적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언급에서 시작하여(2:4; 7:30; 8:20), 점차 때가 오고 있다는 진술로 나아가다가(4:21; 5:28), 급기야는 그의 때가 왔다는 진술들이 그의 사역의 말미에 주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12:23; 13:1; 17:1).
이것은 분명 기승전결(起承轉結)이 뚜렷한 이야기입니다. 매 단계마다 예수님의 삶은 잘 계획되고 통제된 것으로서,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절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플롯’의 구조면에서 볼 때 이는 분명 주인공의 궁극적 승리로 끝나는 U자형의 희극적 형태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U字型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와 반대되는 구성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성경>의 전체적인 구성은 이중 어떤 것입니까?
2. 구성의 충돌
설화적 구조의 또 다른 요소는 플롯 충돌의 점진적 강화와 절정을 향한 움직임입니다. 처음의 이야기는 일종의 중립적인 사건들, 즉 <가나의 기적>, <니고데모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신하의 아들의 치유> 등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극단적인 충돌을 야기한 사건들, 즉 <안식일의 치료 행위>, <생명의 떡과 관련한 논쟁>, 그리고 <초막절의 논쟁> 등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으로 그를 죽이려는 공공연한 음모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조에도 예외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 <성전 청소 사건>(2:13-16)이 예가 될 것입니다.
3. 구성의 확대
<요한복음>은 또한 확대의 원리에 따라 진행되다가, 다시 압축되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지명도가 처음에는 좁은 ‘갈릴리’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가, 점차 그 명성이 온 ‘유대’ 전역으로 알려지면서, 당대에 가장 유명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 되면서 거대한 군중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인기와 함께 반대 세력 또한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증대하게 되고, 따라서 그의 활동은 다시 제한되다가 마지막에는 그의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며, 부활 후에도 역시 그러합니다.
4. 구성의 통일성
<요한복음>의 구조적 통일성의 또 다른 측면은 신앙과 불신앙의 충돌입니다. 화자는 언제나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그와 접한 사람들이 나타내는 일련의 반응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신앙은 주로 세상과 유대인들, 곧 종교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을 충돌시키는 화자의 의도는 곧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이기도 합니다(20:31).
설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처럼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면 작은 이야기 단위들 역시 그러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등장하는 사건은 항상 이어지는 설교와 한 단위로 묶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영생의 물에 관한 설교(4장); 안식일에 치료한 사건과 자신의 신적 권위에 대한 설교(5장); 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6장); 나사로의 소생과 부활의 설교(11장).
이와 유사한 기교는 또 있습니다. 즉 두 사건을 하나의 설교로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는 설교(8장)는 거대한 횃불이 타오르는 것이 제사 의식의 일부가 되는 초막절 사건(7장)과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9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9장의 사건은 또한 8장의 세상의 빛에 관한 설교와 연관되며, 회당으로 축출 당한 장님 되었던 자는 이어지는 10장에서의 거짓 목자와 선한 목자의 설교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을 축출한 유대 회당의 지도자들이야말로 거짓 목자의 본보기로 제시하고자 하는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구성이란 일종의 고속도로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도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만 뻗어 있다면 운전자는 이내 지겨움을 느낄 것이고 쉽게 졸음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에 길이 굽어 있기도 하고, 다리도 나타나며, 순탄하던 길이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면서 터널과 연결되는가 하면, 터널을 빠져나왔다 싶어 안심하다가 이내 전방에 갑자기 한 쪽 길이 막히면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속도를 늦추게 만드는 등, 운전하기가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합니다. 구성의 다양한 요소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요소를 통해서 독자들은 끝까지 긴장과 흥미를 늦추지 않고 작품을 읽어 내려갑니다.
5. 수사적 요소
이러한 구성과 더불어 수사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고속도로 주변의 여러 경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이 보이다가, 산이 나타나고, 형형색색의 여러 꽃들이 위도를 달리하면서 운전자를 스쳐 지나가는 효과를 상상해 보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작은 단위의 각각의 설화는 일련의 흥미로운 수사적 기법들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바, “오해”나 ‘숫자나 상징’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오해의 ‘모티브’는 세 단계에 걸쳐 전개됩니다. 즉 예수께서 선포를 하시면, 구경꾼 중 하나가 그 말에 대한 오해를 표현하며, 예수님이 자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하는 패턴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수사적 패턴은 최소한 9번 등장하고 있습니다(3:3-8; 4:10-15; 4:31-38; 6:47-58; 7:33-36; 8:21-30; 8:31-47; 8:56-58; 11:11-15). 이들 오해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오해”는 구경꾼들이 상징적 해석이 필요한 곳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발생하며, 이는 성경적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숫자의 패턴 역시 <계시록>에서처럼 빈번히 등장합니다. 숫자 3이 한 예로서, 세 번의 유월절과 세 번의 다른 축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의 세 번에 걸친 증거, 예수님에 대한 세 번에 걸친 유죄 판결,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세 번의 말씀, 예수님의 부활 후의 세 번의 출현 이야기,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세 단계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숫자 7 ‘모티브’ 역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의 기적 설화, 일곱 번에 걸친 “내가...이다”의 선언, ‘그리스도’에 관한 일곱 번의 증언들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에 관한 일곱 번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버지의 증언(5:37; 8:18)
(2) 아들의 증거(9:14; 18:37)
(3) 그리스도가 하는 일의 증거(10:25; 5:36)
(4) 성경의 증거(5:39-46)
(5) 침례요한의 증거(1:7; 5:35)
(6) 제자들의 증거(5:39-46)
(7) 성령의 증거(15:26; 16:14)
이처럼 <요한복음>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설화의 양식과 구조 뿐 아니라 이야기의 연쇄적인 전개에도 관심을 갖게 합니다. 한 이야기의 내적 구조가 신학자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고,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재료를 재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요한복음>을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이 재료의 순서 또한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이야기의 직선적 전개에 대한 문학적인 연구 역시 이 책의 신학적 주제들을 도출하고, 교회를 위한 “이상과 정신”으로 적용함에 있어 중요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지 해석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2. “성경 해석학”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알려진 성경 비평의 제 방법들의 특징과 방법론 및 관심사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역사비평”, “공시비평”, 및 “독자중심 비평”의 차이점들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설화(또는 서사)란 무엇이며, 그 구성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설명해 봅시다.
5. “서사비평”은 공시비평의 한 방법론입니다. “서사”의 저자와 독자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요한복음>의 “실제 저자”와 “실제 독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라면 왜 그런지 설명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