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랑과 신랑 친구(II)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3:22-30약 9분 분량
한 미국인 목사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스펜스’(Spence)라는 미국인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아주 인기 있는 설교자였으며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분이 섬기던 교회는 많은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인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웃 교회에 젊고 유능한 목사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용모는 준수했고 설교 또한 훌륭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를 좋아했으며 그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주일 밤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스펜스’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서 보니 앉아 있는 교인이 몇 사람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어느 한 집사님이 일어나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모두들 이웃 교회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내가 ‘스펜스’ 목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펜스’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머금고는, “우리 모두 그 교회로 갑시다” 하며 교인들과 함께 그 교회로 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본인 또한 언제 이 일을 그만둘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주지하고 계시다시피, 나는 선생이나 교사로서의 은사는 있을지언정 목사로서의 은사는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지식과 열정을 지닌 젊은 사역자가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꿈과 이상으로 똘똘 뭉쳐, 제 2의 개척을 시작할 때까지 만이라도 교회의 터전이나 세워놓고 갔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나마도 여의치 못할 경우, ‘스펜스’ 목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 모두 더 좋은 교회로 옮겨 가서 하나님 나라의 부흥에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나는 다른 사역을 찾아 나머지 인생을 보냈으면 합니다.
‘스펜스’ 목사님이 그 후 담임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목회를 영영 그만두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여기 정말 그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 목사입니다. ‘요한’ 목사 역시 그의 교인들이 추구하던 세 가지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잘나가는 이웃 교회 목사를 시기하거나, 교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거나, 건물을 확장하거나, 또는 새로운 음향기기를 설치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교회 문을 닫고, 당회장 직도 사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오늘날 대형교회의 유명 목사님들처럼 자신의 아들을 교회의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은퇴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삶을 누리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일러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칭송한 이유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능력에 찬 사역이나 설교와 같은 “위대한 높아짐”이 아니라, 반대로 “위대한 낮아짐” 즉 겸손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그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안도감(安堵感)과 만족감으로 지극히 평화롭고 기쁨에 찬 모습입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하). 이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 후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과 흡사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전해준 우울한 소식, 즉 일부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시위대에 갇혀 있는 그를 더욱 괴롭게 하려는 의도로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세상을 달관한 자의 초연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나 ‘시므온’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삶의 비결을 터득할 수 있었을까? 어디서 이런 고요함과, 평안함과, 자족감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 그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함으로써, 인생의 “고해”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역설적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예로, ‘라헬’과 ‘야곱’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겠느냐(창 30:1-2)
‘야곱’의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창세기> 화자는 훗날 아들을 보게 되는 ‘라헬’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창 30:22-23)
“요한 교회”의 불평하는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로부터 들은 말도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예수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대형 교회의 유명 목사님들을 부러워할지언정, 시기하거나 질투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교회”의 담임 목사나 교인들은 “요한교회”를 우습게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인 것이지요.
소위 영적 분별력 또는 영적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괜히 무슨 신령한 영적 은사를 가졌노라 은근히 자랑할 일이 못된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처럼 은사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것을 받지 못한 자란 없으며, 어느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시기하거나 질투할수록 인생이 더욱 고통스러워 지는 쪽은 상대가 아니라 나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비극적 주인공 ‘살르에르’가 그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모짜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인정만 했더라도, 그의 인생은 그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역시 훌륭한 작곡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모짜르트’의 은사를 시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시시하거나 변변찮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은 자신의 목회 사역 내내 이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교회”가 근처에 들어섰을 때에도, 불편해 하고 시기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하).
신랑 친구. “침례 요한”이 기쁨으로 사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인지를 안 것이 첫 번째 비결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비결은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 “신랑 친구”(shosben)일 뿐이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랑친구가 하는 일이란 신부 집에 함 들고 가서 돈 뜯어내는 것이 고작이지만, ‘유대’ 사회에서 “신랑 친구”의 역할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식을 주선하고, 준비하며, 결혼 잔치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결혼식장에 신랑과 신부를 데리고 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첫날 밤 신부가 든 방문 앞에서 호위 역할을 하면서 신랑 외의 다른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리고 한 밤중 신랑이 오면 그의 음성을 확인하고 난 뒤에 비로소 문을 열어주고는 자신은 안도와 흡족함으로 그곳을 떠납니다. 본문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29절).
나는 여태 단 한 번이라도 신랑친구의 역할을 자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가 직장 동료이든, 가족의 구성원이든, 제자이든, 그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도록 주선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태 그런 적이 없었다면 나는 인생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를 놓치고 살아온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보지 못한 여인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 1:3-4);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심정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그보다 더 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 식구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바울’처럼 신랑친구의 역할을 자임해 본 자가 아니라면, 이런 즐거움과 가슴앓이를 결코 맛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신랑에 대한 시기나 투기로 전율해 본 적은 없습니까? 행여나 신랑 친구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신부 방문 앞에서 버티고 서서 낯선 자는 물론 신랑마저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본 적은 없습니까? 신부와 신랑이 첫날밤을 보내는 것을 시기와 투기로 지켜본 적은 없습니까?
얼마 전 여의도 순복음 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은퇴한 조용기 목사님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서운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교회가 목사의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하나님의 것이니 서운해 할 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2010년 신년을 맞이해서 순복음 교회는 21개의 지 교회를 모두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내 인생에서나 교회에서 아무런 책임 있는 역할을 맡지 않으려 하는 것도 심각한 정신 장애로 보아야 하지만, 매사에 주연(主演) 노릇만 하겠다는 발상도 과대망상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분명 과대망상의 정신 질환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