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리아의 향유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1-8약 12분 분량
<성경> 속에는 이런 저런 유형의 방탕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탕자(蕩者) ‘삼손’, 탕왕(蕩王) ‘솔로몬’과 ‘다윗’, 탕부(蕩婦) ‘고멜’이나 ‘사마리아’의 여인(요 4)과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등이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탕자(蕩子) 작은 아들을 놓칠 수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방탕한 작은 아들을 둔 덕분에 덤으로 방탕한 자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 그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를 이름 하여 탕부(蕩父)로 부른 바 있습니다(2011.1.9. 주일설교).
우리가 이 사람들을 탕자 또는 탕녀로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인은 <돌아온 작은 아들 이야기>를 설교하면서 이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이들은 아무나 조건 없이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까지 마구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절제가 없고, 헤프고,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절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절제함이 없습니다.
탕부(蕩婦) 마리아.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멜’을 능가했으면 했지 결코 뒤지지 않을 또 다른 탕부(蕩婦)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감히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더하여 절제의 미덕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무모했고,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일 년 치 월급을 몽땅 교회에 다 갖다 바쳐버렸습니다!
만일 그녀가 결혼을 한 자라면 이혼을 받아 마땅합니다. 배우자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 모든 일을 처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런 경우 이혼사유가 된다고 판결합니다. 실제 그런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미쳐, 하고 한 날 새벽기도다, 예배다, 전도다 하며 가정도 자식도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 사회는 정상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보면 사랑이나 은혜에 대한 보답은 항상 받은 것보다는 덜하고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지만, 자식은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마리아’의 행동은 분명 과격했고, 맹목적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었다 살아난 것도 아니고, 동생이 살아난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렇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보답으로 그녀는 일 년치 월급을 몽땅 털어 교회에 바쳐버린 것입니다!
정신이 온당한 자라 할 수 없겠지요. 그녀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고,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따라가기로 작정했던 ‘룻’만큼이나 정신 나간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광신도”(狂信徒)라 부릅니다. 과연 그날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광신적인 과소비(過消費)라고 그녀를 몰아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이 무슨 쓸데없는 과소비인가!”라며 분노했고, ‘마리아’를 나무랐습니다. ‘요한’ 화자는 이곳에서 ‘가롯 유다’ 한 사람을 특별히 대표적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4-5절).
‘유다’의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도처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널려 있던 그 사회에서, 그 교회에서, 그처럼 엄청난 돈을 구제가 아닌 단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 허비해버리다니 말입니다! 만일 내가 교회의 제정을 맡고 있었더라도 제자들과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니 ‘유다’의 관심사는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좀 더 은밀하고 음흉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는 자신이 맡아있던 교회 헌금을 수시로 횡령하고 있었습니다(6절).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향수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헌금으로 냈더라면 분명 더 많은 액수를 횡령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아깝고 아쉬운 것입니다. 알다시피 좀도둑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둑질은 ‘유다’의 뿌리 깊은 습관이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원인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탐욕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화자가 ‘가롯 유다’를 지칭하며, “예수를 잡아 줄” 인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마리아’와의 대조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선생을 팔아넘겼다면, ‘마리아’는 그보다 두 배 반이나 되는 액수를 연인에게 바쳤습니다. 자기 선생님의 가치를 겨우 은 삼십 밖에 보지 않았던 ‘가롯 유다’! 참으로 쩨쩨한 인간이 아닙니까? ‘유다’가 돈 가방을 움켜쥐고 수시로 횡령하고 있었다면, ‘마리아’는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선생님에게 드렸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위해 선생님을 팔았다면, ‘마리아’는 선생님을 위해 자신을 드렸습니다.
‘유다’는 제자로서 선생을 배반하기 전에, 선생님의 신뢰를 먼저 저버렸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자에게 회계를 맡기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문 지식으로 치자면 그보다는 회계사 ‘마태’가 훨씬 더 났지 않았을까요? 그런대도 예수님은 그를 신뢰하고 맡겼습니다.
‘마리아’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있어 하나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도 함께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3; 막 14:9). 이 말은 온 세상이 ‘마리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하게 하라는 것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그녀의 향기는 온 방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절). 이 구절은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녀의 냄새에 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감동에 젖어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복음서>에 등장할 때마다 예수님의 발과 관련되어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녀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주의 발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눅 10:39). <요한복음>은 그녀가 예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요 11:32). 그리고 지금 이 장면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헌신을 표하기 위해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함에 있어 한 결 같았고 일관되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일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돌출적인 것이 아니었고, 어떤 목적을 지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습관의 열매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습관은 우리가 무엇을 언제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며, 머뭇거리게 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그 향유를 간직해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지금이야. 지금 하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거야.”
<야고보서>는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약 4:13-14). ‘바울’ 사도는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갈 6:10).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이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선하고 좋은 일을 차일피일 미루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히말리아’의 새, “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합니다. 통계를 보면 재능이나 재물을 나누는 일은 평소 하는 사람이 계속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 본 사람이 더 자주, 더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늘 나누는 사람은 더 풍성해지고, 더 넉넉해지게 되는 법입니다. 바로 여기에 나눔의 축복이 있다 하겠습니다. 내 곳간을 퍼낼수록 그 곳간이 비는 것이 아니라, 계속 채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믿습니까? 이 같은 체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없었다면 속는 셈치고 한 번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나의 습관으로 삼아보시기를 권유합니다. 내가 얼마나 넉넉하고, 풍성하며, 그리고 탁월해지는 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을 기억하라는 것은 ‘마리아’의 넉넉함, 풍성함, 그리고 탁월함을 전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넉넉한 부모 밑에서 넉넉한 자녀가 나옵니다. 늘 보고 배우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그런데 어찌하여 ‘가롯 유다’는 같은 선생님한테 배웠는데도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선생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거대한 산이요, 거목(巨木)이며, 큰 숲이 아닙니까! 이 같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좋은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선생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멋진 인생의 선생님으로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인생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해 본 적도, 그리고 늘 가까이 있는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늘 자기 생각, 자기 계획 때문에 선생님의 가르침은 마이동풍이었습니다. 고작 하는 짓이라고는 교회 헌금을 수시로 빼돌려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좀도둑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지요. 이것이 그의 비극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마리아’를 제쳐두고 ‘가롯 유다’를 사도로 택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스승은 각기 반(半) 팔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나를 아끼고, 도움을 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선생이나 ‘멘터’(mentor)가 있습니까? 본인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훌륭한 부모님과 여러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그분들의 좋은 습관이나 기질을 따라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난 뒤에는 또 다른 스승들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좋은 책들의 저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이들 책으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한 선생님을 내 나이 삼십대에 만났습니다! 그것은 정말 행운 중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이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예언자 마리아. ‘마리아’는 감히 선생님을 사랑했고, 그리고 그 사랑을 절제하지 못했고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무절제했고 무모(無謀)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를 탕녀로 불러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 반대입니다. 신중하고, 절도가 있고, 계산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를 현자(賢者)로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마리아’는 무모했을까? 단어 “무모”가 의미하는 바는 문자 그대로, “모략이 없다”, “준비나 계획이 없다”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정된 것이었다(이 구절이 <개역 성경>에는 없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7절).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마리아’의 행동은 실은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고 계획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이 장사(葬事)되는 날을 대비해서 그분의 몸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그려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마리아’의 모습, 즉 선지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림 그려주기는 사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시로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이사야’의 기이한 행동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하겠습니다(참고. 사 20; 렘 13).
이날은 “유월절” 전야(前夜)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유월절인 셈입니다. 과연 ‘마리아’가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녀의 행동은 상징이었고, 예언이었으며, 신탁이었습니다. ‘요한’ 화자조차도 그 모든 일이 성취되고 난 후에야 그 사건의 의미를 회고하듯 써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과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행동은 무모함이 아니라 신중한 통찰력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유월절의 축제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연인(戀人)의 참된 기분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비탄에 잠기신 그분의 기분에 기꺼이 동참한 것입니다(눅 12:50). 그래서 늘 선생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인다면 나 역시 ‘마리아’처럼 선생님의 기분에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사건이 우리에게 격려를 주는 것은 그와 같은 나의 헌신이 진정으로 “그분을 만족시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한 일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그 거룩한 사역에 자신도 동참하고 봉헌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그의 사역에 나를 동참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또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나를 가슴 벅차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성경>을 알고 묵상하는 일에, 그리고 그 말씀을 적용하는 일에 얼마나 시간을 쏟고 있습니까?
나는 세상을 위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예언자요, 선지자입니다. 세상이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세상이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하거나, 그 일을 하는 나 또한 늘 기쁠 수만은 없습니다. 그날 ‘마리아’와 함께 식사 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 왜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이나 선행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지 못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처럼 현실을 따르는 사람들이나, 기독교 사역을 순전히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우리와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제자들로부터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희생정신에 찔림 받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의 시간이나 재능이나 재물로 자신의 다른 과업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는 고집스러움과 불굴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향기를 맡게 하라. 이처럼 하나의 단순한 행위가 세상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두에게 빛이 되고 향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일은 아무리 시시해도 파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다만 한 가지 덧부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는 상(償)을 받기 위해서 구제하거나 헌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새겨진 율법 즉 성령의 법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달라고 떼쓰는 철부지가 아니라, 넉넉하게 주기를 원하는 성인(成人)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가장 아끼는 것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헌신합시다. 지금 그렇게 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