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4): 너희에게 평강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19-20약 12분 분량
우리는 이제 <부활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를 보고 있습니다(연극 무대로 치자면 서막과 제 1막에 이은 제 2幕에 해당됩니다). 무대의 배경은 여전히 ‘예루살렘’입니다만, 시간은 안식 후 첫날 저녁, 즉 부활절 저녁입니다. 이야기의 서막(序幕)이 부활절 새벽의 어두운 동굴 무덤 안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었다면, 제 1막은 부활절 아침 동굴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같은 날 저녁, ‘예루살렘’의 모처(某處)(아마도 어느 제자의 집이었을 것입니다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참고. 눅 24:33).
각 장면마다 시간과 장소가 다를 뿐만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도 다릅니다. 서막의 주인공은 사도 ‘요한’과 ‘베드로’였으며, 제 1 막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그 주인공이었고, 이제 여기에서는 아마도 모든 사도들을 포함한 일단의 제자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눅 24:33). 각 무대의 시간이 다르고, 장소도 다르며, 등장인물들도 다릅니다만, 세 개의 무대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되는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사건과 관련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무엇일까요?
닫힌 문들. 사실 이 질문은 ‘요한’ 화자가 전하려고 하는 <부활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목적을 하나의 ‘모티브’를 통하여 그려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참고로 이 경험은 이들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수가’ 성 여인에게도 필요했던 그 경험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조우”(遭遇), 즉 “만남”(encounter)입니다. 사실 만남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만남 가운데 최고의 만남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수가’ 성 여인은 이 한 번의 만남으로 소위 대박, 즉 인생 역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이 극적인 만남을 대박의 기회로 활용했다고 해야겠습니다. 이 여인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이 엄청난 만남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요한’ 화자는 그저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20:10). 아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니요! 이 두 제자의 만남은 ‘수가’ 성 여인이 경험했던 그 만남과는 격이 다릅니다. 이 두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대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다니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이 여인은 제자들에게 돌아와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과 함께, 그날 아침의 감동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20:18). 사실 그날 아침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엄청난 소식을 전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 여인들이 더 있었습니다(참고. 마 28:8). 그런데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참고. 막 16:11). 그날 아침 이 소식을 들었던 제자들은 누구였을까?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도 함께 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또한 이해하기 힘든 대목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일한 체험, 동일한 만남이 어쩌면 이처럼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요? 한 편에는 여인들의 흥분과 감동과 환희가 있다면, 다른 한 편으로는 사도들의 덤덤함과 무신경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합니다. 네 <복음서>가 전하는 사뭇 다른 <부활 이야기>들이 진정 참된 증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누군가 없는 사실을 꾸며내려 했다면, 각 이야기들은 마치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며, 제자들의 반응 또한 이처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자들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그들은 지금 두려움으로 문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사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이때쯤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돌아와서 그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도 했을 것입니다(참고. 눅 24:35). 그리고 당연히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여인들도 함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배적인 분위기는(‘모티브’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어둠과,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만(참. 롬 10:17),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 들에게는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 대한 기억만이 지금 이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 모두는 여전히 어둠과 혼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 닫힌 문들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옛날 ‘가데스바네아’에서 ‘여호수아’나 ‘갈렙’같은 용사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모두들 자폐증의 문에 갇혀, 그들끼리 이대로 영원히 살아갈 것 같은 모습입니다.
샬롬! 그런데 이 어둠을 뚫고, 이 불신과 자폐(自閉)의 문들을 뚫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나타나십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입니다! 도대체 그분께서 꼭꼭 걸어 잠근 문들을 뚫고 어떻게 들어오신 것일까요?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는 이 질문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닫힌 문들을 뚫고 왜 다시 나타나신 것일까?”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평강”(eijrhvnh, 에이레네)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250회 이상 등장하는 ‘히브리’ 단어 ‘샬롬’(!l,v,)을 번역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사실 ‘샬롬’은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사말, 즉 “안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여느 날이 아니기 때문에 각별합니다. 이날은 부활절이며,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샬롬’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로 기대하던 바가 바로 ‘샬롬’이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 저녁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샬롬’은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내가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닫힌 문입니까? “닫힌 문” 사이로 들어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닫힌 문이 기능하는 바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장치입니다. 그들 모두는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샬롬’은 부활절의 인사로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그분이 전하는 인사말은 문학적으로 “닫힌 문” 즉 두려움과 대척점에 서서, 그 문을 열고, 두려움을 날려버리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겠지요.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까? 그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때 제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 말씀에 따르면, 지금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유대’인들은 전자(前者)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두려움마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전하는 ‘샬롬’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입니까? <구약>에서 ‘샬렘’은 “화목제물”(和睦祭物)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그림 가운데, “화목”(和睦, propitiation)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목은 성전(聖殿)에서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화목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하나님과 우리, 즉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원수로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그 화목을 이룹니까? 아들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理想), 즉 ‘샬롬’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태가 가능하게 되었을까? 어린 양과 염소와 어린 아이와 암소가,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 우리 서로 대화하자”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이들의 선의(善意)에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곰과 독사가 크게 감동을 받아 평화조약이라도 맺은 것입니까? 아! 대한민국이 그 모든 선의를 가지고 인내하며, 대화하고, 경제지원을 해주고,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면 김정은이 감동을 받아 핵무기를 포기하고 대한민국과 평화조약을 맺을까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샬롬’은 약자(弱者)의 선의(善意)나, 희망이나, 또는 애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즉 강자(强者)의 힘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힘과 의지였습니다. 이는 동물 왕국(animal kingdom)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는 이 평화도 염소나, 송아지나, 어린 아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사자가 그 식성(食性)을 바꾸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즉 육식(肉食)이 아니라 초식(草食)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독사의 독이 더 이상 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 제국에서도, 동물 왕국에서도, 화목 즉 ‘샬롬’은 힘없는 자가 아니라 힘센 자가 이루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중에서 누가 화목을 이루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에게 평강을” 하실 때, 이는 곧 “내가 그것을 다 이루었노라”는 말씀입니다(19:30). 즉 “내가 세상과 싸워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6:33). “내가 세상과 마귀를 굴복시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화목제물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바친 것입니까? 그분이 굴복시킨 세상입니까, 아니면 마귀입니까?
힘 센 자가 약한 자에게 조공이나 제물을 바치는 법은 없습니다. 갑이 을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도, 짐승도 다른 그 무엇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그분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희생(self-sacrifice)을 통하여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을 이루신 것입니다(J. Stott).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b).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즉 ‘샬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화목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의 두 당사자가 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을 맺을 때, 전쟁의 책임이나 보상 등과 관련한 내용들을 그 규약 안에 담습니다. 이때 그 내용은 패전국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승전국이 일방적으로 만듭니다. 패전국이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승전국의 재량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강화조약을 맺으실 때에, 요구하신 화평의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로마서>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평강. 여기서 “누리자”라고 번역한 이 대목은 정말 탁월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누리는 것은 이제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면, 이제 더 이상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샬롬”을 전하시면서 상처 난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것도 이전에 다락방 강론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이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사도 ‘바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제자들은 비로소 확신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고 죽으신 세상의 구세주시다.” 그리고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20절). 이 또한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론에서 이미 약속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즉 그분은 다시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놓겠다고 하셨습니다(14:18; 16:20-22).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원천입니다(예. 사 25:6-9; 54:1-5; 61:1-3). “기쁨”은 또한 부활절의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