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승천과 재림 사이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1-3약 10분 분량
하늘에서 집 채 만 한 바위 덩어리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다른 곳도 아닌 내 집 앞마당에 말입니다. 기절초풍을 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러시아’ 한 지역에서 실제 일어난 상황이었습니다. 운석 파편들이 지구 중력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마찰로 차가운 돌덩어리들이 불덩어리로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이 사고로 그 지역은 초토화되었으며, 주민 수 천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한동안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운석 폭탄의 규모가 ‘히로시마’ 원폭의 사십여 배에 달했다고 하니 그 피해를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지질학계에서 중생대(中生代)의 그 많던 공룡들이 갑자기 사라진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 가운데 “운석 멸종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론이긴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에 피해를 입은 러시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지구 종말이 왔다고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과연 지구 종말의 날이 이와 같을지, 아니면 이보다 더 충격적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종말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날에는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목도했던 것과 같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대 격변만 일어날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살후 1:7하).
이 표현은 물론 ‘유대’ 묵시문학의 하나의 전형(典型)이긴 하지만,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자연적인 광경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날에 하늘에서 운석이 아니라, 예수님과 천군천사(千軍天使)들이 내려오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넋을 잃고 두려움으로 벌벌 떨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날에 사람들은 어디로 피해 달아나야 하며, 과연 피난처가 있기라도 할 것인지,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누구에게 몸을 의탁해야 할 것인지, 정말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종말의 날에는 그래도 피할 동굴이라도 있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方舟)라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나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 한해서였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그 엄청난 격변을 피할 수 있었을까? 사전 정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의 ‘메뉴얼’대로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즉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메뉴얼’대로 따라하지 않았던 ‘롯’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함께 사라졌지요.
이중고(二重苦).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만일 종말의 날까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교회와 의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이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고통일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세상과 함께 겪게 될 대 격변의 고통일 것입니다.
이 무슨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까? 교회가 세상의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이미 예고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롯’이나 ‘노아’는 사전 정보 즉 ‘메뉴얼’에 따라 종말의 날을 예비하고 준비하면서, 허무와 말초적인 세계관으로 가득 찬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겪어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나 그날이나 세상은 늘 이렇게 조롱하며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하지만 의인이 겪게 될 고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신과 반역으로 가득 찬 그 세상이 받게 될 고통을 함께 겪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날에 겪을 고통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별의 슬픔”일 것입니다. 연인이나 가족 간의 이별 말입니다. 그것도 잠시 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이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보지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롯’도 종말의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사위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여덟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머지 모든 친척들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그래도 나는 살아남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하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입대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아닙니까! 적어도 헤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남은 자나 떠나는 자나 생지옥의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근심하지 말고. 이날 다락방의 분위기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세상을 떠나실 예수님, 그리고 세상 속에 남겨질 자기 사람들. ‘베드로’가 침울한 분위기를 깨고 서로 헤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결단하고 다짐하지만, 예수님은 크게 감동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을 일축하고 곧 떠나겠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온 방은 두려움과 근심으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고아”로 남게 될 것입니다(18절). 그리고 염려가 현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엄청난 시련이 몰려올 것이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혼돈과 무질서로 요동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절망과 두려움과 혼란의 바다 한 가운데서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롯 유다’를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도피와 회피 말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다’의 선택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강이나 높은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거나, 자신의 연구실에서 목을 매달거나, 약을 먹거나, 연탄을 피워놓는 등의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소심하고 심약한 사람은 이와 같은 선택조차 사치스러울 뿐입니다. 그저 ‘욥’의 아내가 충고해주었던 바대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욕설을 퍼붓는 일이 고작일 것입니다. 본인도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일이 힘들거나, 뜻대로 안될 때, 기도가 제대로 응답받지 못할 때, 이 같은 일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여전히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살고 있는 것이지요.
또 다른 선택이 있습니다. 즉 이렇게 노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0-11).
이 노래는 물론 사도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고요의 바다”를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풍랑으로 요동치는 배 안에서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이 노래는 시인이 부른 것입니다. ‘노아’와 같은 성숙한 시인이 그의 방주 안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이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부정 명령문(否定 命令文)이긴 하지만, 명령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약속이나 위로로 들립니다. 즉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약속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가까운 사람에게 해주는 위로나 권면의 말이 아닙니다: “괜찮아, 다 좋아 질 거야.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그러나 과연 걱정하지 않는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일까? 누군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내 근심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 그렇다면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요동치는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편안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고통의 원인을 아는 지식일까? 고난을 헤엄쳐 나가는 지혜일까? 친구의 체험이나 간증일까? 역사적 교훈일까? 아니면 정치인들일까?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매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지금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나란히 언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명령은 허풍이나 과장도 아니고, 오만이나 독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슨 새로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믿음 속에 거하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많은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것도 그가 보여주었던 그 지속적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롬 4:18). ‘아브라함’의 믿음의 힘이 되었던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었다면, 이들 제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소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제 곧 죽게 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줄 수 있는 그 소망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다시 와서 그들을 데리고 간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
이 사실 때문에 함께 계셔야 할 그분이 오히려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지상에서의 삶 너머에 있는 영광스러운 거주지가 없다면, 지금 이들이 잠시 “고아”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 대가는 영원히 집 없는 고아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한 약속을 한지 수 세기가 지났지만, 그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집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혹자는 입주자의 신분이나 업적에 따라 방의 크기나 등급이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유대’ 사상입니다(참고. <에녹 2서-비밀의 책>). 또 어떤 사람은 많은 방들은 천국으로 가는 여러 단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초대 기독교 신학자 ‘오리겐’은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일정기간 머물면서 일련의 훈련과 가르침을 받은 후에 그 다음 단계의 방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런 뜻으로 “방이 많다”고 하셨을까? 그분의 진의는 단순하고도 간단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한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집이나 여관은 그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은 그분의 마음만큼이나 넓고 커서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다 들어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방의 상태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 상태란 단지 그분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브루스 밀런’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거기에 하늘나라가 있다.”
이 엄청난 축복, 즉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들이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것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환멸이나 절망 때문이라면, 예수님의 이 약속, 즉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셨다는 약속을 믿고 ‘샬롬’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힘든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될 수만은 없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즉 현실을 이기고 극복하는 양념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그러니까 나의 주님께서 하늘에 마련하고 있는 나의 처소는 현실에 대한 도피성(逃避城)이 아니라, 현실을 이기고 풍성하게 살아가게 하는 ‘인센티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임산부가 복중(腹中)의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아기 옷과 침구와 방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마련하듯이, 나의 주님께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와 같은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더 이상 무슨 위로나 격려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