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경>의 오용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11약 10분 분량
<성경> 해석을 놓고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전제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데 대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성경>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대하여 예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성경 해석상의 차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 즉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과 이 <성경>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이 두 영역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 하는도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37-42, 44절)
예수님의 진단인 즉은 ‘유대’인들은 <성경>의 목적을 곡해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성경을 목적으로. 첫째, <성경>의 목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이 읽는 이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일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도 ‘유대’인만큼은 못하지만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인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나 성경공부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 번 <성경> 공부 시간마다 본문의 “문학과 역사”, “신학과 신앙”, “교훈과 적용”, 그리고 “연습과 토의”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배우고 연구합니다. ‘유대’인들의 성경공부 방식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 역시 본문의 “문학과 역사” 그리고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여기까지였습니다. “교훈과 적용” 그리고 “연습과 토의”가 없었습니다. 즉 “오래된 <성경> 본문이 오늘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구절을 오늘 어떻게 재해석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성경> 본문을 화석(化石)처럼, 박제품(剝製品)처럼 여겼습니다. <성경>의 일점일획(一點一劃)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 본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여러 권의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었으며, 그래서 여러분들로부터 적어도 <성경> 지식에 관한 한 존경과 찬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나 <성경> 지식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구원합니까? <성경>입니까? <성경>을 아는 지식입니까?
이 대답과 관련해서 우리가 9장에서 배우게 될,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소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어둠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한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그의 눈이 떠졌는지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9:11). 참으로 간단명료한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의 간증이 아니라 나중에 그 예수를 만났을 때 그가 보여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고백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9:38).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셨으며, 그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유대’인들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났으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라는 인물을 알고는 있었으나 믿지는 못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성경>에서 예수라는 인물을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었으며 완성된 계시였고, 닫힌 문이었습니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9:29). 안타깝게도 그들은 <구약>이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조명해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실수는 오늘날 <신약>의 백성 사이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닫힌 책, 즉 완성된 책으로 대하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겠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내용과 관련해서 더 이상의 하나님의 계시는 없다는 것이 신약 교회의 믿음이고 신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수단에는 “현현”(顯現; manifestation)이나 “감동”(感動; inspiration)만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조명”(照明; illumination)도 있습니다.
현현과 감동을 <성경>이 완성되기까지의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다고 한다면, 조명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현과 감동이 <성경> 저자나 기자들에게 필요한 계시였다면, 조명은 <성경> 독자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조명의 계시 덕분에 <성경>은 더 이상 닫힌 책이 아니라, 열린 책이 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 시대나 장소에 따라 그렇게 기능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소위 “근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계시는 무한정 열려있으며 항상 새롭게 추가될 수 있다는 “신비주의자” 내지는 “은사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근본주의”와 “신비주의”는 일견 신학의 양 극단 즉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지만, 두 극단은 서로 만난다는 역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해석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근본주의에 가깝다 할 수 있겠습니다.
과도한 문자주의. 바로 여기에 ‘유대’인들의 또 다른 실수 즉 두 번째 실수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다름 아닌 “문자주의”(文字主義) 내지는 “자구주의”(字句主義)가 그것입니다. 물론 문자주의가 전혀 무익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중세 ‘맛소라’ 학자들이 <히브리 성경> 사본을 편집할 때, <성경>의 일점일획에 기울인 그들의 노력은 실로 경탄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폭넓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과도한 문자주의에 집착하게 되면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문자주의의 폐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정 한 구절에 너무 과도한 신학 사상을 쌓아올린다든지, 문학적 수사(修辭)로 해설해야 할 부분을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사실과 일치시키려 한다든지, <성경>의 특정 번역본을 다른 번역본에 비해 비교 우위에 두는 등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복잡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유대’적 규정들도 문자주의의 폐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이해와 관련해서 ‘유대’인들의 실수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성경>의 목적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그들을 구원하는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과도한 문자주의에 빠져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적 집착에 빠져버렸습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매일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까? 그분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기는 하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이는 마치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 없는 성탄절을 즐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탄절에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단 현대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첫 성탄절에도 예외 없이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던 여관 주인 이 바로 그자가 아닐까요? ‘헤롯’ 왕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여관 주인은 ‘마리아’가 배속에 그리스도를 품고 직접 찾아왔습니다만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헤롯’은 동방의 현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했음에도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 역시 그들의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 알려주고 있음에도 그를 찾으려 나서지 않았습니다.
정작 이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왕도,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무수한 군상들도 아니었습니다. 이들 역시 먹고 사는 일에 코가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이 세상은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었고,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에 예수를 만난 유일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비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천사를 만났습니다. 또 있습니다. 동방의 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그 별을 보았습니다. 스타 즉 성탄절의 주인공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명해야 할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늙은이,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우주의 왕, 영광의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줄을 서야 한다면 방금 소개한 이들은 맨 마지막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왕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줄이 하도 길어서, 또는 왕이 너무 바빠서 평생을 기다려도 기회가 올까말까 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므온’과 과부 ‘안나’는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이였습니다. ‘시므온’이 주를 만나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 ‘안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눅 2:37). 이들 모두 사회적인 지위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 왕을 만날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누가복음>은 ‘시므온’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눅 2:25). 그리고 ‘안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7).
대답은 이것입니다. 즉 이들 모두는 자신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왔을 때 겸손하게 영접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그리고 <시편>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시 55:6)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과연 그를 찾고 있으며, 찾고 있다면 왜 입니까?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대답하고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