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복하기를 바라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12-17약 10분 분량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요 13-17)과 산상 수훈(마 5-7)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기야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같을 수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두 강론 모두 핵심은 “행복”입니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네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나니.”
아, 그분은 “자기 사람들”이 행복해 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군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기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 같은데도, 그냥 간과하고 지내온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내 가족의 행복 때문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주님도 같은 심정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지내온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헌법의 기본 정신은 개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법에 따라 상응하는 벌을 주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적 욕구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국가까지 나서서 행복 추구를 지고(至高)의 권리로 인정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우리는 막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권리로 주장한다고 해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해서 국가나 정부가 그것을 마치 연금 주듯 나누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일하는 회사나, 학교나, 정부가 마치 월급 주듯 꼬박꼬박 내 통장에 행복을 넣어준 적이라도 있었습니까?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지요.
간혹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그대로 믿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공약(公約)이 그야말로 공약(空約)이 되어버릴 때쯤이면, 크게 실망하면서 다음 선거 때가 되면 이번에는 이전의 후보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후보에게 같은 기대를 걸어봅니다. 마치 브랜드만 믿고 물건을 샀다가 써보니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아, 다음에는 다른 브랜드의 상품을 사는 것과 같은 행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재주로, 무슨 권리로 자기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분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 건데. 그분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
이 약속 믿어도 괜찮을까요? 나중에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라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하다가 영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지는 않을까요?
이것을 알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서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보증을 설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실없는 소리로 무시하거나, 아니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 보거나입니다.
그러나 잠깐 믿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보상해 달라는 요구를 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즉 구매자의 실수로 상품이 파손된 경우는 보상을 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물건을 조작하다 파손되거나 고장이 날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고 사전 주의를 발합니다. 매뉴얼로 치면 상품을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 숙지해두어야 할 주의사항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6절).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시니, “이건 정말 치명적으로 중요한 매뉴얼이야”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중요할까? 난데없이 주인과 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주인이고 너희들은 종이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뻔한 내용 아닙니까! 즉 “산(山)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이에요. 조금 덧붙이자면, 자신의 위치나 신분을 망각하지 말라는 요청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니, 누가 이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제자들 중 누가 예수를 종으로 부리고 있기라도 했습니까?
한 번은 예수님께서 주인과 종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10)
무슨 주인이 이렇게 매정하고 야속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온 종에게 무슨 칭찬이나 감사는커녕, 돌아오기가 무섭게 주인의 저녁 식사 상을 차리고,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수종을 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종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대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종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말합니다. 아주 비천하고 무익해서 달리 무슨 가치 있는 일을 맡을 능력이나 재능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인 밑에서 견딜 수 있는 종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비유 속의 이 종도 얼마나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섬기며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대하는 주인의 태도가 그와 같은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주인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대하는 기본 전제가 바로 그러하다. 나와 너희들 간의 관계가 그러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나는 하나님이고 너희들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종이 주인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인의 선처만 바랄 뿐이지요. 시키는 쪽은 주인이지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는 늘 내 대학원생들에게 시키는 편이지, 내 학생들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주객이 전도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분과 나의 관계도 그렇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절).
지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머리가 그렇게 똑똑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분의 말씀인 즉은,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잘했다 못했다 평가도 그분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내가 무슨 상을 바랄 처지도 아닙니다. 그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아,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착각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인 행세를 해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명령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시기에 해놓지 않으면, 마구 야단치고, 욕하고, 토라져서 한동안 그 주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종이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요? 권위가 무너진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는 일,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을 폭행하는 일, 취객이 경찰서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일 등은 그 사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라 할 것입니다. 종이 주인 행세하는 교회도 결코 정상적인 교회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행하면. 만일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주인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고 그 종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함께 식사를 나누자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처럼 불필요한 일을 하시는 것일까? 다시 한 번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절).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겨준 것은, 주인이 종을 위하여 저녁상을 차려놓은 것은, 모범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롤 모델의 역할을 한 것이지요. 주인이 종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종을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종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는 초청이자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청은 행복한 삶으로의 초청이고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하).
흔히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우리는 “행하는 것만큼만 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7:17).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는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그의 교회를 향해서 질타한 바 있습니다(참고. 고전 4:15). 자신의 수고와 눈물로 키운 제자들을 향한 그의 심정이 절절이 베어 나오는 구절인데, 직접 자신의 수고로 전도하여 양육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의 심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고통이자 수고이지만 동시에 축복이지요. 그러므로 “알고 행하는 것이 축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순종의 축복 말입니다. 그 순종의 결과가 쓰디 쓴 실패로 끝났을 경우에도 여전히 축복으로 남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본인의 체험입니다.
나에게도 철저하게 잊어버리고 싶은 내 인생의 한 시점이 있습니다. <창조교회>를 개척하여 7여 년 동안 사역하던 시기가 바로 그 시기입니다. 처음의 기대와 흥분과는 달리 날로 조금씩 성장해 가던 교회가 몇 년이 지나자 성장은 멈추고, 분위기는 침체해지기 시작하고, 젊은 교인들은 졸업 후에 직장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유학을 가고, 나는 울분과 좌절로 툭하면 신경질을 부리며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설상가상 어떤 제자는 우리 부부를 향해서 비난과 실망을 쏟아내며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교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계속 유지되었다면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를 떠났던 어린 제자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키우면서, 실로 인생의 절반을 넘게 돈 후에, 나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생활 중에 가장 강렬하게 그리고 가장 오래 동안 추억의 앨범 속에 내가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선배로서, 지도자로서,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비로소 이전에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고백합니다. 그 젊은 시절, 인생의 진로나 직업 선택이나, 이성 문제로, 방황하고 흔들릴 때, 곁에서 질책하고 훈계해 준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사실 그들의 칭찬과 감사는 그들이 나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생님이자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해주고 계신 것이라 믿습니다. 아, 그러니까 정말 무익하고 쓸모없는 이 종이 나의 선생님이 이천 년 전에 하신 대로 한 번 따라 해봤더니, 당연하게 해야 할 그 일을 해봤더니, 이처럼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방금 비유에 나오는 주인처럼 그의 종에게 당연한 일을 했다며, 계속 하던 일을 하라고 압박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치고 넘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갈릴리’ 해변 가에서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함께 구워먹자고 식사에 초청하시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쉼과 안식과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것으로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너에게 보답하리라.”
나는 정말 가진 재능이나 은사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나에게 주인 직업이 하나 있습니다. 가르치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것을 갈고, 닦고, 기르고, 연습하고,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주님의 흉내를 내어봤더니, 주님은 나의 행위가 동전 세 닢을 헌금함에 넣은 늙은 과부에 버금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선생님,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에게 자기를 따라 해 보라고 초청하십니다. 초청을 받아들여 택함을 입은 그분의 사도, 즉 “자기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초청 받은 자”로 인생을 마무리 하시겠습니까? 매일 먹고 사는 문제에 코가 꿰여 하늘이 아니라 땅을 내려다보면서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