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기 사람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1약 10분 분량
결혼식 날짜를 받아놓은 한 남자가 예비 신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메일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비 신부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알고 지내던 여러 여자 친구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냅니다. 단순한 결혼 청첩장이 아닌 연애편지를 말입니다. 이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당연하게도 그의 예비 신부가 이 사실을 알고 불 같이 화를 내며 당장 파혼(破婚)을 선언합니다. 나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모든 여자를 동시에 골고루 사랑하는 것이 진정 파혼의 사유가 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박애주의자(博愛主義者)로 칭찬받을 일이 아닐까?
즉 고지식하게 한 여자만을 편애(偏愛)하지 않고, 모든 여자를 두루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사랑하는 것이 더 의로운 행위가 아닐까?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골고루 좋은 학점을 주고 시상(施賞)을 하는 것과 상위(上位) 성적을 거둔 학생들만 골라 시상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일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실적을 올린 직원에게 더 좋은 대우와 더 많은 보너스를 주는 일이 정의로운 일일까, 아니면 빈둥빈둥 시간만 허비하는 직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에게 골고루 똑 같은 월급을 주는 일이 더 정의로운 일일까?
질문을 좀 더 확대해 봅시다. 하나님은 과연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가?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신가? 모든 인류를 골고루 차별 없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택된 일부만 사랑하시기 때문일까? 조종(弔鐘)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울리는 것일까? 조문(弔文)은 과연 누구에게 올리는 것일까? 그리고 “좋은 소식” 즉 복음(福音)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모두를 위하여. 바야흐로 대선 기간에 접어들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은 국민을 향해서 수 없이 많은 연애편지 즉 공약(公約)들을 쏟아낼 것이고, 그중 일부 사람들에게는 똑 같은 내용의 연애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예컨대,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돕는다면 장관이나 총리 자리를 주겠다는 등의 약속을 남발합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모두가 그 내용을 알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그 후보자를 믿고 따를까?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연애편지라 부릅니다. 전체 66권의 책 중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책이 없을 정도입니다. <요한복음>에도 그 유명한 메일을 열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로마서>의 다음과 같은 메일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니 하나님은 이 메일들을 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감격이 되고 눈물이 흘러나옵니까? 행여 그분의 진정성에 의심이 들지는 않습니까? 과연 그분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일까? 나만을 말이지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하). 이 말씀은 연애편지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의구심에 대못을 박는 일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입니다!
악한(惡漢)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실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는 잔인무도한 성폭행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법부의 관대한 판결입니다. 술김에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이다, 초범이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 가해자가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솜방망이 판결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족 중의 누가 같은 경우를 당한다 해도 같은 판결을 내릴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악한 자를 처벌하기는커녕 그를 의로운 자와 똑 같이 취급하신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재판관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똑 같이 다루는가 말입니다. 이 같은 분노는 단순히 투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돌아온 탕자를 동생으로 둔 모범생 형님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중 과연 누가 그 형을 속 좁은 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누가 ‘가인’의 분노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요?
얼마 전 한 중학생이 자기 집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이유인 즉은 자기 부모님이 다른 형제를 편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학생은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원했던 것이지, 다른 형제까지 모두 사랑하는 부모님의 사랑, 즉 부모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의 연인은 어느 누구의 연인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도 익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여인의 남편이라!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보편적 사랑이라는 것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보편적 사랑에 감동하고 눈물 흘리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노벨상을 아무에게나 다 수여한다면 누가 그 상을 가치 있다 여기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에 크게 감동을 먹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나를 성폭행한 사람도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동은커녕 냉소를 보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오직 신부만을 위하여.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하실까? 과연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신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과연 성경적일까?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즉 “모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왕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참고. 마 22:114). 이 이야기는 물론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초청받은 사람”과 “택함을 받은 사람”이 그들입니다. 임금님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모두를 “초청”합니다. 이것이 임금님이 “모두를 위해 한 일”입니다. 이것이 임금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호의(好意)이자 배려입니다. 그들 모두를 골고루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해둡시다. 하지만 “초청받은 사람” 모두는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청첩장을 가지고 온 우편배달부를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다른 무리에게 눈을 돌렸고, 이 무리는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이들의 숫자는 “초청받은 사람”의 숫자에 비하면 월등히 적습니다만, 임금님은 이들 소수의 무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결국 잔치는 “초청받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임금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대신 채우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모두를 위해 하신 적은 일”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그 아들을 보내신 일이 그것입니다. 즉 세상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믿도록 초청한 것이었습니다(물론 이 일을 결코 적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참고. 요 3:16).
하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그야말로 초청으로 끝이 나버린 것입니다. 왜 세상이 초청장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렸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받는 초청장이라 시시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소도 받고 개도 받는 초청장이라면, 내가 굳이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가는 그 넓은 길을 내가 갈 수는 없다는 특권심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연애편지, 즉 <성경>은 세상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연애편지는 결국 사랑하는 연인(戀人)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것 같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는 연인은 연인이라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연인은 과연 누구일까? 신랑 그리스도의 연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의 신부는 과연 누구일까? 그렇습니다. 교회입니다! 바로 “나”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의 신부, 즉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모두를 위해 적은 일”을 하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여기서 “우리 모두”는 누구입니까? “택함을 받은 사람” 즉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곧 성전이고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즉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야말로 “소수 특권층”에 속해 있다 하겠습니다. ‘이사야’는 이 소수의 특권층을 “칠십 인의 남은 무리”로 칭한 바 있습니다.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이 있었으나, 특별한 아들은 ‘요셉’뿐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야곱’은 아들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를 위한 복음은 없는 것이지요.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복음은 “모든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개도 받고, 소도 받는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선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행여나 돼지들이 그 목에 진주를 걸게 될까봐, 복음을 항상 비유로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신부의 자격과 특권. 그러나 이번 다락방 강론은 다릅니다.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먼 길을 떠나기 전이나, 임종을 앞둔 시점에 유훈(遺訓)이나 유언(遺言)을 남기고 싶어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도 아주 각별하고 중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락방 강론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혹자는 이 부분(13-17장)을 <요한복음>의 지성소로 칭하기도 합니다. 그분은 이곳에서 교회에 관해서, 새 언약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제자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가 지금 이 강론을 숨을 죽이고 듣고 있습니까? “자기 사람들”, 즉 사도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자기 사람들”을 향해서 그동안 숨겨두었던 마지막 유훈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지금 열두 명에 불과한 이 사도들을 “자기 사람들” 즉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사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시 초대교회 창립 회원들인 셈입니다.
내가 만일 이 “소수 특권층”에 속해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뽐내고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엘리야’처럼 불평을 할 것인가? 오늘 하루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 세상에서 VIP 대접을 받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의 교직 경력 30여 년 동안, “왜 나에게만 최고성적 A+를 주십니까?” 하며 항의해 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들 이 “소수 특권층”에 속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우리가 죽어라고 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이 소수에 속하지 못하면, 소수 특권층을 미워합니다. 질투인 셈이지요. 대선 후보들도 이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이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소수 특권층 즉 국민의 1%를 위한 대통령이 아니라, 99%를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외칩니다. 언필칭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외치면서도, 실은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사탄’의 계략을 보는 듯합니다. ‘사탄’도 우리가 소수 특권층에 속해있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이탈하라고 유혹합니다. “너는 더 각별한 존재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너는 한 신랑의 신부로 만족해서는 안 돼. 두 신랑을 가질 수 있어”라고 꼬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지위가 별 것 아니라고 꼬입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마귀가 ‘가롯 유다’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2절). 그리스도와 자기를 동시에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적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입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중혼(重婚)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남편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나를 동시에 똑 같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떻게 화답(和答)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교회에서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해야 할 지체는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