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노예가 아닌 친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5:13-17약 7분 분량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어 두 번째 왕으로 일찌감치 점지(點指)가 되어있었습니다. 한편 ‘다윗’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와 선망을 한 몸에 받으며,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선지자 사무엘이 점지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왕족 혈통을 이어받아 왕이 될 인물이었고, 또 한 사람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태양으로 그 명성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현재의 왕 ‘사울’에게 ‘다윗’은 눈에 가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에게 ‘다윗’은 아들의 왕위를 넘보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과 ‘다윗’은 숙명적으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나 부자(夫子)지간에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상대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왕위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 수 년에 걸쳐 그토록 집요하게 쫓아다닌 것도, 그의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 아무런 거침이 없도록 하려는 배려심도 깔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나단의 친구. 적어도 ‘요나단’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자라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계획을 “친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로 하여금 피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에 서기보다는 친구의 편에 선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시절 부모가 싫어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녔던 기억 한 두 개 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만, 이 두 사람은 지금 철없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어디까지 양보하고,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는 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청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단’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진정 왕이 되기 싫었던 것일까? 친구가 자기보다 더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에게 당시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뭐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조용히 미소만 지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저런 재어보고 따져보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그의 결정은 이성적(理性的)이고 합리적(合理的)이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가 내 친구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말하지 않을까?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며,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서로 친구하자며 아주 어린 시절에 무슨 도원결의(桃園結義)라도 맺은 것일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친구를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겠습니다. 이성(異性) 간의 교제라면 또 몰라도 말입니다(두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오늘부터 너는 나의 친구야”라든지, “나는 오늘 너를 나의 친구로 삼았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서로가 의기투합(意氣投合) 해야 할 것이며, 그 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일방통행 식 선포나 선언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친구 삼기를 원하는 쪽은 무엇인가 필요가 있는 쪽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친구를 정치나 사업상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하등 이유는 없습니다. ‘다윗’이 먼저 그렇게 했다면 모를까. 왜냐하면 굳이 갑(甲)과 을(乙)의 관계를 따지자면, ‘요나단’이 갑이요 ‘다윗’이 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쉬운 쪽은 ‘다윗’이지 ‘요나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찌 되었건 친구 사이가 갑과 을의 관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며, 또한 무슨 의도나 목적이 깔려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친구 사이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서로 대등한 관계라야 할 것이고,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사이가 아니라, 쌍방 간 속내를 드러내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이며, 무슨 이득이나 목적을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면 즐겁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친구.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몇 가지만 지적해 볼까요. 우선 친구를 맺는 방식이 일방적입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6절상). 지금 예수님은 사도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너희들은 내 친구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다고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친구를 향해서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14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절).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 친구였지만, 서로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지시했다는 기록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意圖)입니다. 즉 그분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16절). 그냥 친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친구를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목적이 선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친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서는 곤란합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친구를 삼으려 하시는 것일까? 상대방의 자유의사나 자율권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너는 나의 친구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친구가 아니면서 친구인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이들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진정한 우정(友情)이란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과연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요나단’과 ‘다윗’사이에 있었던 두 동등한 인격체 간의 우정뿐만 아니라, 결코 동등할 수 없는 두 인격체 간의 우정, 즉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우정까지도 포함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방식이 이상하고 거북하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수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기계적인 주종(主從)의 관계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개신교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주의 종”이 그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은 인격이 없으므로 굳이 인격체로 대우해 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짐승처럼 살아있는 도구로써 함부로 다루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이와 같은 대접을 각오하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왜 스스로를 “주의 친구”로 인식하려 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격적이며, 역동적이며, 수평적인 친구로 인정하고 사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당(可當)하기라도 한 것일까? 우리 편에서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먼저 인정하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행위를 “은혜”라 부릅니다. 그분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고, 그분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며, 우리의 지식으로 그분을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내가 누릴 수 있는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특권입니다! 나는 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열매. 사도들 말고 하나님께서 친구로 삼은 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인물입니다(참고. 약 2:23; 대하 20:7; 사 41:8). 하나님은 그분의 친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우리는 아무에게나 비밀을 말하지 않습니다. 친구의 특권은 친구의 비밀과 계획을 사전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특권을 행사하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 “은혜”로 친구를 삼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 자식일 수도 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일 수도 있고, 내 부하직원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특권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열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16절).
앞선 설교에서 이 열매를 “그리스도의 열매”라고 했고, 그 열매는 내가 수행해야 할 그 무슨 의무나 책임이라기보다는 나에게 그저 값없이 주어지는 보상이요, 유익(有益)이라고 했습니다. 내 존재를 의미 있게 해주는 보상이자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유익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절). 이와 같은 호사(好事)를 단 한 번이라도 누려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을 기도하든 그대로 이루어지는 호사 말입니다! 그대로 믿고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열매”는 결국 “성령의 열매”인 것이지요.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이 “사랑”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 5:23-24).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능력이자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