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8):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24-26약 9분 분량
榮華를 위하여
(17:24-26)
우리 주변에 이런 저런 분야에서 사람들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바둑의 신동, 피아노 신동, 체조 신동, 등등.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생의 신동”이 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둑이나 피아노나 체조를 배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삶 자체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월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동이라 해도 젊어서는 깨닫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절세(絶世) 미녀였던 미국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노년에 늙어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우리에게 참을성을 가르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짧아질수록 기다리는 능력이 커진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늙어가는 것을 가장 아쉬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미모의 여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가 일흔이 넘도록 살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을 결코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육체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마음과 생각도 바뀌는 법입니다. 누구나 이 나이에 이르면 철학자가 되나 봅니다.
위장된 축복. “삶의 지혜”는 그야말로 살아봄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축복에 관한 깨달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축복이 그냥 민낯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축복은 때로는 가면(假面)을 쓴 모습으로, 때로는 정 반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그것이 진정 축복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축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to) bless”가 피 흘림을 뜻하는 “(to) bleed”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자면, 축복은 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축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불교의 깨달음은 진정 깨달음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기껏해야 절반의 진리만을 터득한 것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불교의 선각자들의 눈에는 넘실대는 바다의 파도와 풍랑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생명들은 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일견 헛되고 험한 고해 즉 고난의 바다는 실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는 축복의 겉모습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귀중한 덕목(德目)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 내가 본 영화 속에 “용기는 두려움을 필요로 한다”는 대화가 나옵니다. 온갖 두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용기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용기가 두려움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을 겪지 않으면 용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겠지요. 나는 몸이 조금만 아파도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덜컹 겁을 냅니다. 하지만 본인의 아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크고 작은 온갖 병을 다 앓아 본 터라, 웬만한 아픔은 아픔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통증 하나도 견디지 못하는 나에 비해, 아내는 매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몸에 인슐린주사 바늘을 찔러댑니다.
희망은 또 어떻습니까? 희망은 삶을 견딜 만 하게 만드는 우리 인생의 윤활유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나, 목표를 다 이룬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이것이기도 합니다. 희망은 역설적으로 정 반대의 처지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다 이루지 못했다 하여 절망하고 좌절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자살은 이룰 것이 더 없는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항상 인내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역시 인생을 살아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삶의 지혜”라 하겠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혈기왕성한 ‘베드로’에게 이런 지혜는 없었나 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이제 곧 그들을 떠나신다고 하니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사지(死地)로 혼자 가시는 것을 어찌 제자가 그냥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함께 따라 가겠다고 나섭니다. 우리는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아직은 사망의 두렵고도 음침한 골짜기를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의 용기는 진정한 용기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선생님은 그에게 인생을 좀 더 살며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38).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떻습니까? 누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흉금(胸襟), 즉 본심(本心)으로 이해했겠습니까(참고. 요 1:18)?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강보(襁褓)에 싸여, 한 어린 미혼모의 품에 안겨 잠들어 누워있는 이 연약한 어린 아이를 누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여겼겠습니까! 사실 인류는 전지전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진정 위장의 대가라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자. “최후의 만찬”(13장)에서 시작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다락방 강론”(14-16장)을 거쳐 “주님의 기도”(17장)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의 마지막 부분(24-26절)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이 부분은 교회를 위한 주님의 두 번째 기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실은 주기도문의 정점(頂點)이기도 하고, 그분이 곧 맞이할 죽음의 최종 목적을 드러내고 있는 곳입니다. 이 기도를 엿듣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렇게 탄성을 발합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것이 그분의 마음이었구나! 이것을 위해서 죽기로 작정하셨구나!”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절). 그것은 교회의 “영화”(榮華)입니다. 교회의 “영화”란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되어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궁극적인 지위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강론의 벽두에서부터 강조한 바 있는데, 그분께서 떠나시는 것도 제자들과 함께 있을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14:2-3). 제자란 주님께서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하고 계신 “그들” 즉 “내게 주신 자들”입니다.
누가 이를 위하여 이처럼 애절하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노예를 위해서 이처럼 애절하고도 한 결 같은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기업체 사장이 자기 회사에 속한 직원과 그 가족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 알게 하리니. ‘요한’은 일찍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1:14). 하지만 이 기도의 방점(傍點)은 지금 여기가 아닌, 장차 그곳에 있습니다. 확인을 위하여 2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절). 그러므로 이 기도는 희망을 말하며, 기다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왜 지금 당장 그것을 누릴 수 없나이까하고 보챌 수 없게 만듭니다.
<요한일서>에서도 같은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나로 하여금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옛적에 한 노예 처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주인마님의 안방에 들어가 비단 옷 한 벌을 훔쳐다가 베옷과 바꿔 입었다는 썰렁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을 비천한 노예로 살면서 입어 본 옷이라고는 베옷뿐이었으니, 비단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것이겠지요. 썰렁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시절 집안에 안 쓰고 있는 오래된 놋쇠 그릇을 어머니 몰래 들고나가 엿가락 몇 개와 바꿔먹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썰렁한 사람은 <성경>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고”(딤후 4:10). 사도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이 자리에 모인 사도들 역시 사랑하는 선생님을 버리고 모두들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만찬의 추억도, 감동적인 설교도, 그리고 애절한 기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들 각자는 실망과 두려움과 그리고 좌절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바다”를 항해(航海)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항해를 통해서 그들은 ‘데마’나 비단 옷을 베옷으로 바꿔 입은 처녀가 갔던 길을 걸어가거나, 또는 주님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거나 입니다. 어느 쪽이든 살아보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거듭 강조하거니와, “왜 지금은 그 영화를 누릴 수 없나이까?”하고 어린 아이처럼 보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 대답조차도 항해를 통해서 얻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힘들고 고달픈 항해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까? 그처럼 힘든 항해라면 누가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를 다시 한 번 주목해봅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또 알게 하리니”입니다(참고. 26절).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독생자를 통해서 교회와 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더욱 깊고도 풍성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발전시켜 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교회의 ‘멘토’(mentor), 즉 보혜사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강의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12-1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16:25).
결론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은 교회가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더욱 자라가고, 깊어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그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으로서, 이는 교회가 볼 수 있고 또한 교회로 하여금 아들의 사랑을 소유한 자로 변화시키는 그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