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6과
새 질서(3): 새로운 탄생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23-3:36약 110분 분량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본문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긴 강론(講論)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강론의 대상은 ‘니고데모’로서, 본문의 제목도 그의 이름을 딴 <니고데모 강론>이 적절할 듯합니다. 강론의 핵심 내용은 “거듭남” 즉 “새로운 탄생”에 관한 것으로서, “새로운 질서”라는 주제 하에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세 번째 에피소드가 될 것입니다.
화자는 각 에피소드마다 예수님을 다른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인 “가나의 혼인잔치”(2:1-11)에서는 “창조주”로(2:3-4), 두 번째 에피소드의 유월절 ‘예루살렘’에서는 ‘유대’교의 성전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으로 그린 바 있습니다만(2:13-22), 이곳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랍비’로서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젊은 ‘랍비’ ‘예수’가 ‘유대’교의 나이든 ‘랍비’ ‘니고데모’를 가르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대조는 수사학적으로 일종의 “해학”(諧謔)에 속하는 것으로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수사학적 기법은 이 외에도 여럿 있습니다: “오해”; “빛과 어두움의 모티브.” 이들 수사학적 기법들을 통해서 화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독서 과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본문 속에는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이 없다는 점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인 “성전숙정”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진정한 기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표적”과 “믿음”에 관한 언급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를 향한 교훈이 있기도 합니다.
본문은 또한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에서 가히 기독교 헌장 제 1조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16절)을 담고 있으며, 이어지는 18절과 더불어 “복음의 양면성” 내지는 “복음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유념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이중성”이라 함은 다른 말로 “복음의 축복과 저주”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항상 양면성을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씩 예를 들어봅시다.
문학과 역사
흔히 “니고데모 강론”(the Nicodemus discourse)로 잘 알려진 본문에서 강론의 실질적인 내용은 3:1-21의 본문으로 국한할 수 있습니다만, 일견 주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내용이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서론(2:23-25); (2) ‘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3:22-36)
서론은 일종의 배경설명으로서, 마치 2:1이 1장과 2장의 다리 역할을 했던 것처럼, 2장과 3장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서론>은 “니고데모 강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3장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대화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12절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데에는 12절에서 이인칭(二人稱)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강론이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3-21절은 그 양식에 있어 일종의 묵상으로서, 그 내용은 “인자”와(13절), 그의 “죽음과 부활”(14-15절),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복음의 축복”(16절)과,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복음의 저주”(17-21절)에 대한 선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일 <서론>을 “니고데모 강론” 속에 포함시킨다면, 본문은 크게 두 개의 병행구조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단락 1(2:23-3:21): 니고데모 강론
2) 단락 2(3:22-36):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사역
그런데 각 단락은 다시 구조적으로 일종의 시적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각 단락을 양식상의 특징에 따라 비교해 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특히 두 단락에서 독백(또는 해설)으로 된 마지막 부분은 내용적으로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학자들은 3:31-36이 3:13-21에 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3:31-36은 내용적으로 볼 때, “인자”의 사역에 관한 것으로서, 침례 ‘요한’의 사역을 다루고 있는 직전의 대화 내용(3:25-30)과는 연결이 부드럽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두고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3:31-36의 본문을 아예 침례 ‘요한’의 사역에 관해서 처음으로 다루고 있는 1:19-34 본문에 바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두 개의 단락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잘못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단락은 신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신학과 신앙
1. 니고데모 강론(2:23-3:21)
배경(2:23-25).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일견 불필요하게 보이기까지 한 이 단락은 실은 이어지는 “니고데모 강론”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문학적 서론의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3절)
우선 화자가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에서 핵심 내용으로 다루게 될 “니고데모 강론”이 “성전 숙정” 사건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유월절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단락의 문학적 배경과 기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가나의 혼인> 이야기와 <성전 숙정>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바 있는 단어 또는 모티브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표적”과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 주제가 곧바로 이어질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대화에서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게 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기적의 목적 즉 표적이 믿음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두 구절은 일견 이러한 진술과는 상치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구절은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으로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4-25절)
예수님께서도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가진 자들”을 믿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표적을 통해서 얻게 된 믿음이 가짜라는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은, 예수님을 알아가며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시작에 불과할 뿐이며, 그 자체로써 불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화자가 “니고데모 강론”을 앞두고 표적에 기반을 둔 믿음이 적절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하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이 단락은 전체 본문에 대한 문학적 서론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 강론”의 핵심 주제는 “거듭남”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입니다. 이 대화를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전”의 배경 하에서 이해해 보면, “침례”의 선행 조건으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이야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나 예수님은 이들을 피하여 산으로 떠나셨습니다(6:14-15, 25-27). 만일 이 경우에서도 앞에서와 같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주의 만찬”이라는 “성례전”의 배경 하에서 이해해 보면, “주의 만찬”의 선행 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은 역시 진정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경우 모두 단순한 “표적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3:13-21; 6:32-40, 51-58)에 오히려 역행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표적 믿음”의 판단 기준은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화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25절하). 이 해설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유대’ 문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일곱 가지가 있다: 죽음의 때; 위로의 때; 심판의 정도; 개인적인 보상의 정도; 다윗 왕국의 회복의 때; 세상 왕국의 멸망의 때; 사람의 마음.
여기서 말하는 일곱 번째 비밀 즉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우리 모두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성경>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우리네 경구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는 화자의 선언이 의도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은 이어지는 “니고데모 강론”의 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대화(3:1-12). 모든 문학의 텍스트는 “역설”이라고 합니다. 화자는 유명한 “니고데모 강론”을 예의 뛰어난 역설과 대조 및 사실적인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니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1-2절)
우선 사실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자가 “유대인 지도자”라는 점과, 그리고 그가 “밤”에 찾아왔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표현은 역설(逆說)과 대조(對照)의 효과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라 함은 지혜와 경륜을 갖춘 자일 터, 그가 새파랗게 젊은 예수님을 찾아와 “선생”으로 칭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밤”에 찾아왔다는 사실은 현재 그가 처해 있는 이중적인 위기 상황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예수님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서는 곤란하다는 인식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서, 그의 영적인 무지에 대한 암시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어둠”은 항상 “빛”과 대척점에 서있는 개념으로서 영적 무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참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11:1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13:30).
혹자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29-42절), 정 반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참고. 7:50; 19:38-40). 그러나 화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미래운명이 아니라 현재 그가 보여주고 있는 영적인 한계일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소위 “표적 믿음”의 한계를 대변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교정 내지는 처방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유명한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생”(重生) 즉 “거듭남”에 관한 선언입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절)
예수님은 3절과 5절에서 “거듭남”에 대해서 각기 다른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3절에 등장하고 있는 “거듭남”은 문자적으로 “위로부터의 태어남”(begotten from above)을 의미하며,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begotten of water and Spirit)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위로부터의 태어남”은 “거듭남”에 대한 초자연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런’(B. Milne)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설명하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런, 100쪽.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단지 각성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의 문제이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시각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이다...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은 필연적으로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이며, 성실하게 복음 전파에 종사하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기도하는-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간섭해 주실 것을 간절히 요청하는-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두 번째 표현 즉 “물과 성령에 의한 거듭남”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들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물과 성령”을 연결 짓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이 둘을 각기 구분해서 별도 취급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이 둘을 동일한 실체로 이해하려는 방식입니다. “물과 성령”을 각기 다른 실체로 구분해서 이해해 보자면, “물”은 침례 ‘요한’의 “침수 침례” 즉 청결과 회개의 침례를 의미하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롭게 함” 즉 “재창조”의 사역을 말합니다.
두 번째 해석을 ‘니고데모’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 ‘바리새’인으로서 침례 ‘요한’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회개의 물 침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 즉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별 의미가 없어졌으며, 따라서 “물과 성령”을 동일한 실체로 받아들여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물과 성령”이라기보다는 “물 즉 성령”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듭남”에 관한 강론에 대해서 ‘니고데모’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전형적인 “오해” 그것입니다(4절).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에 대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보였던 “오해”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주제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때, 아주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으며,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오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오해에는 아랑곳 하지도 않으시겠다는 듯이, “육과 영”의 대조를 통해서, “거듭남”의 초자연적인 특징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6-8절)
<요한복음>에서 “육”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서, 인간의 유약함 내지는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사 31:1-3; 요 1:13). “성령의 사역”에 관한 8절의 비유적인 표현은 현실 세계에서 하나의 예를 든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성령”의 불가사이 한 사역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바람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볼 수도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대변자이자 대표자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오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은 답변이라기보다는 질책이자 비난에 가까운 것입니다:
10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0-12절)
처음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가 알거니와”로 질문을 시작한 것을 마치 되받아 치듯 예수님 역시 “우리가 아는 것”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니고데모’가 말하는 “우리”가 무지한 세상을 대변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는 그분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빛의 증인” 즉 교회를 대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12절의 “너희” 역시 ‘니고데모’로 대변되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일”은 문자적으로 “거듭남”에 관한 대화(3-8절)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일”은 아직 그에게 말하지 않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구속 즉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묵상과 해설(3:13-21).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대화는 끝이 났지만, 화자는 자신의 해설로 대화의 주제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그 양식에 있어 독백 내지는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니고데모’의 질문, 즉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나이까?”(4, 9절)에 대한 화자 자신의 답변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답변을 듣고 있는 대상은 ‘니고데모’가 아니라 모든 독자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대변하는 자라면, 화자의 해설을 들어야 할 대상이 세상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답변 역시 예수님의 그것처럼 여전히 선문답을 하듯 애매모호함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주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절)
느닷없이 “인자”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자가 내려왔다”는 것은 그의 초자연적 기원 즉 신적인 기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인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화자가 이곳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밝히고 있는 의도나 배경이 궁금한 것입니다. 추측컨대, 화자가 속해 있던 소위 “요한 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스스로 선지자로 자처하는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며, 이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자들이 “말씀”을 떠날 때 이런 일은 항상 반복된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일 것입니다. 즉 “말씀”이 아닌 초자연적 계시나, 전통이나 관록, 또는 지위나 연륜 등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적이고도 신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교회 안에서 항상 있어왔던 일입니다.
이어지는 두 절은 그 양식에 있어 초대교회의 “선포”(kerygma, 케리그마)에 해당합니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그리고 그 기능에 있어서는 13절의 “인자”에 대한 보충설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인자의 수난(受難)을 예고하고 있습니다만, 수난의 의미를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그 사건이란 <민수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광야의 뱀 사건”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물려죽은 사건을 말합니다(민 21:4-9). 하지만 화자의 방점(傍點)은 이들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순종과 구원에 있습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9).
인자가 “들린다”는 표현은 그분이 “영화롭게 된다”는 표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12:23; 13:31). 선지자 ‘이사야’도 “종의 노래”에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게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바울’ 역시 인자의 “들림”을 그분의 죽음과 영광으로 연결시키면서 동일한 사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8-9). 흥미롭게도 ‘셈’ 계열의 문헌에서 “들림”을 “죽음” 심지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예가 다수 알려져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도 “들림”을 “죽음”과 “영광”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바로가 사흘 안에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창 40:13상);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창 40:19). “인자의 들림”에도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 즉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용해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신자의 “영생”이 바로 그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가장 압축적으로 요약하자면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일 것입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인자의 인격과 사역”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과 관련해서 위 세 절(13-15절)이 “인자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어지는 구절은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을 여기에 추가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고백적 요약으로 볼 수 있을 것인즉, 복음에 관해서 알아야 할 모든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복음의 유래나 기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대상은 역설적으로 전혀 수혜 자격이 없는 불순종한 세상이며, 복음의 내용은 당연히 독생자로 불리는 인자 즉 그리스도이며, 복음의 목적은 영생에 있습니다. 하지만 영생은 모든 자가 아니라 믿는 모든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서, 따라서 믿음은 복음의 선물이자 동시에 복음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흐르는 배경음악과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 ‘이삭’을 내어 놓은 일화(창 22장)를 연상시켜주면서, 그 사건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또한 복음서 전체적으로 이곳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의 불순종을 뚜렷하게 대비시키면서, 인자의 성육신과 수난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와야 했으며, 왜 그가 죽어야만 했는가?”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또는 세상이 하나님을 그토록 철저하게 모르고 있지만 않았다면, 성육신 사건은 불필요한 것이었겠지요.
우리는 앞에서 믿음은 복음의 선물이자 조건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복음에 조건이 있다는 말은 복음이 그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 두 가지 상반된 가능성을 불가분 내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양면성 내지는 이중성(二重性)이 있으며, 화자는 이를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17-21절)
화자는 먼저 복음의 “축복”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17절). 인자가 온 것은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자의 성육신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의 모든 사역이 이를 위함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자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즉 복음의 요구사항 또한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복음의 요구를 거절할 때 구원은 심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은 곧 분리와 정죄를 의미하며, 바로 여기에 복음의 “저주”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나머지 18-21절 사이에 가감 없이 아무런 애매모호함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복음의 양면성에 관한 본문의 해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막> 중에서 1:10-12에 소개한 바 있는 모티브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풀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빛이 비취는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그 속성상 어두움을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바로 이 점이 빛의 이중성입니다. 뜨거운 빛은 양초를 녹아내리게 하지만, 반대로 진흙은 단단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어떤 사람의 마음은 녹아내리게 만들어 빛 속으로 나아오게 만들지만,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은 단단하게 만들어 빛을 피해 달아나게 합니다.
2. 예수님과 침례 요한(3:22-24)
인자의 침례 사역(22-24절). 두 번째 단락의 첫 세절은 예수님의 침례 사역에 관한 보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절이 기능하는 바는, 첫 번째 단락의 세 절(2:23-25)이 그랬던 것처럼 전체 단락에 대한 배경의 역할입니다: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22-24절)
하지만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기나 장소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한 가지 가능한 경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눈 후 그곳에서 ‘유대’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는 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혀 별개의 에피소드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문제는 화자에게 있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베푸셨다는 “침례”가 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이어지는 4:1-2의 기록과 함께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침례 사역은 시기적으로 ‘침례 요한’의 사역과 겹치고 있으며, 오히려 ‘침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침례와 관련해서 본다면, 예수님은 ‘침례 요한’보다 더 성공적인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는 왜 베푸셨으며, 화자는 그 내용을 왜 소개하고 있습니까? 한 때 일단의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요한 공동체”와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 간의 알력과 경쟁을 반영하고 있는 본문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본문이 <공관복음> 기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전승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침례 요한’의 침례를 인정하셨으며(막 11:30), 그 스스로도 그에게 침례를 받은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스로 침례를 받으셨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 역시 ‘침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회개의 침례”를 수행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같은 사역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분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마 3:2; 4:17)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침례를 베푼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었다고 화자는 덧붙이고 있습니다(4:2).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침례 사역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이 침례를 훗날 기독교 교회가 베푸는 침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그분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거듭남”과 관련해서는 “물과 성령의 침례”를 강조하셨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참고. 3:3, 5).
<요한복음>에서 ‘침례 요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증인”으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그의 투옥에 관해서 짧게 소개하고 있는 24절이 전부입니다. 그의 투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 특별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상세는 정보는 <공관복음>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마 14:1-12; 막 6:14-29; 눅 3:19이후). 화자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침례 요한’이 아닙니다. 따라서 화자가 ‘침례 요한’을 소개하는 것도 오직 “말씀의 증인”으로서 언급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서 ‘침례 요한’의 투옥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공관복음>에서 제공하고 있는 정보에 추가적으로 더하고 싶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즉 24절을 통해서 볼 때, 예수께서 광야의 시험을 받으신 이후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힐 때까지, 두 사람의 사역이 시기적으로 겹친 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마지막 사역(3:25-30). 이처럼 예수님과 ‘침례 요한’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침례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사역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5-26절)
논쟁의 핵심은 “정결예식”(kaqarismov", 카다리스모스)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침례 요한’의 침례 예식과 유대인의 전통적인 침례 예식 간의 상대적인 우월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침례 예식과 ‘침례 요한’이 베푸는 침례 예식 간의 상대적인 우월성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지금 ‘침례 요한’의 제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 ‘유대’인이 예수님의 제자로부터 침례를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예수님의 침례가 ‘요한’보다 더 큰 인기와 성공을 거두고 있던 시점에서(참고. 26절, 4:1), 두 사람의 논쟁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자신의 침례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을 것인데, 실제로는 예수님의 침례가 더 큰 인기와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에게로 가서 예수님이 거두고 있는 놀라운 성공에 대해서 보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아마도 불평과 함께 부러움 내지 일말의 질투심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제자들의 보고에 대해서 ‘침례 요한’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선 그의 답변은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도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보편적인 원리 선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침례 요한’의 대답은 즉각적이며 간단명료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공적이고도 능력에 찬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도 훗날 ‘빌라도’ 앞에서 이 원리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19:11상). ‘빌라도’가 자기를 살리거나 죽일 권한이 있다고 윽박지르기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침례 요한’의 이 선언은 적어도 그의 제자들에게는 새롭거나 놀랄 일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자신과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규정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1:19-23).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비유를 곁들여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8-29절)
여기서 그가 스스로를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신랑과 신부일 것입니다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신랑의 친구 역할 또한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신랑은 많은 친구들 중에서 특히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두 친구를 선택해서, 결혼식 진행을 보살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 두 사람은 결혼 당일 신부를 신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뿐 아니라, 결혼 첫날밤 신랑과 신부가 合宮할 때까지 신방(新房)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신랑으로부터 “승리의 환호”가 들리면 이들도 함께 고함치며 즐거워합니다. 합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데 대한 환호인 것이지요. 신랑 친구들의 사심 없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침례 요한’의 비유를 ‘알레고리’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우리 독자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新婦)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사 62:4-5; 호 2:14-20),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름 아닌 교회라고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5:25-27; 계 19:7; 21:2, 9-10; 22:17).
마지막으로 ‘침례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증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절)
자신의 사역의 성격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나는 결코 그리스도의 상대나 경쟁자가 될 수 없으며, 단지 그의 친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친구의 추종자나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이제 옛 시대는 가도 새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의 증거(3:31-36). 이 본문은 두 번째 단락의 마지막 본문으로서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 본문(3:13-21)과는 그 형식에 있어 시적 유사병행을 이루고 있으며, 화자 자신의 묵상과 해설을 담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단순한 유사 병행 이상입니다. 오히려 “인자”에 관한 계시의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선 그는 “땅과 하늘”의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탁월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의 마무리 발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31절)
그가 그리스도와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땅에 속한 모든 것들”입니다. ‘침례 요한’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그들의 예언을 말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자” 즉 “만물 위에 계신 자”의 증언은 당연히 하늘에서 그가 듣고 본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32절)
우리는 서막에서 “태초 이전에 무엇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만, 이 구절 또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은 태초 이전에 삼위의 하나님이 계셨고, 그들 간에 사랑의 교제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19-2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32절의 전반부가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그의 성공적인 사역에 관한 진술이라면, 후반부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비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사실 이 구절은 26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 즉, “그가 침례를 베풀매 모든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는 언급과는 다소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33절에서 이러한 긴장은 다소 완화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33절)
사실 예수님 이후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은 늘 성공과 좌절의 순환을 보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순환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이 늘 절반의 성공만을 거둘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적인(그 신비한 이유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결과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입은 자가 증거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33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화자가 여기서 “증언을 받는 자”라고 말할 때, 사용하고 있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완료형입니다. 즉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증언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인치다”(sfragivzw, 스프라기조)는 동사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봉함하다, 밀봉하다(마 27:66; 계 22:10); (2) 소유나 적합성을 판정하기 위하여 날인하다, 인을 찍다(고후 1:22; 엡 1:13; 4:30); (3) 입증하다, 증명하다(요 6:27).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는 세 번째로서, 환원하자면 “증언을 받은 자”가 증거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신실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증거하라고 주신 바로 그것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해 보이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두 절에서 이를 다시 강조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34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34-35절)
의미인 즉은, 인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나 <성경> 화자들에게 동일한 분량으로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각자가 받은 예언의 분량이나 내용이 달랐다는 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신약>의 경우에, ‘바울’과 ‘베드로’의 서신들이 그 수나 내용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는 아무 제한 없이 성령을 주셨으며, 그런 점에서 그분의 계시는 완전하고 완벽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화자의 마지막 선언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절)
즉 그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 권위입니다. 영생과 저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사람 속에 있는 것
우리나라 영화중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래 전에 ‘헐리웃’에서 만든 영화 <The good, the bad, the ugly>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것 같은데, 아무튼 두 영화 모두에서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에도 “좋은 믿음, 나쁜 믿음, 추한 믿음”이 있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면, 화자는 그동안 세 번에 걸쳐 “표적”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의 잔치”에서 보여주신 “포도주의 표적”입니다. 비록 이 표적을 그날 잔치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알아채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를 알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채찍의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화를 내며 그가 무슨 권위를 이런 행동을 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23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반응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의 “믿음”에서부터, ‘예루살렘’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믿음”,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전적인 불신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수준이나 정도가 다양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에도 “좋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나쁜 믿음” 내지는 “추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어떤 믿음이 “나쁜 믿음” 또는 “추한 믿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의 믿음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24-25절).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그토록 사람들이 자기를 믿기를 바라고 계시는 주님께서 정작 그들이 믿는다고 하니 그들을 믿지 않는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인 문제입니까?
사람의 마음. 하나님이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때 무엇이 보일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속을 아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우리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바와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연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평소에는 아주 조용하고 선한 이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를 줄 전혀 몰랐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한 은행 직원이 회사 돈 수백억을 횡령하여 국외로 도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족 모두를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평소 그는 아주 착실하고 근면한 사원으로서 주변 사람들과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내 주변에서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수없이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한 결 같은 한탄을 쏟아냅니다: “저 친구 정말 그럴 줄 몰랐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외는 아무도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생각을 살피시며(롬 8:27),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행 15:8).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우리와 다른 그림을 그리신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란 고작해야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뿌연 형체 정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 실제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이 대해서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를 알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9-32)
마음의 행로. 정말 우울하고 음침한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모르지 않습니다. 멀리 <에덴 이야기>까지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주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 24, 26, 28)
사도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다고 판단했던지 준엄한 하나님의 포기 결정을 세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결정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절대적 자유의지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 편에서 보자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렇습니다. 소극적 직무태만에 이은 적극적 범죄의 결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십자가의 표적. 바로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오늘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통해서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내 속이 정말 이럴까? 내가 정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표적 믿음”은 과연 “나쁜 믿음”일까? 나쁘다거나 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믿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단지 각성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 즉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시각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중생”은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선물이자 은혜인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태어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입니다. 나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런 나의 믿음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과연 나를 신뢰하고 계실까요?
2. 한 밤중의 방문객 “거듭남”에 관한 설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이 중요한 주제의 신선감(新鮮感)을 오히려 감소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식 설교를 향한 여행>이라는 책에서 ‘유진 로우리’(E. L. Lowry)가 들려주는 설교를 거의 전문 그대로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까 합니다. 그의 설교는 소위 “이야기 식 설교”의 훌륭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어 여느 설교에 비해 아주 감동적이며,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거리는 어두웠고 황량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는 그렇기를 바랬습니다. 한 고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어둠에서 어둠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도시의 큰 간선도로는 결코 이용하지 않고, 오직 외진 곳으로만 다녀서, 어느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치는 사람 같습니다.
그가 한 밤중에 어둠에서 어둠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사람은 지금 친구들과 함께 어느 마을에 머무르고 있는 예수님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이 동네 유지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자신이 지금 이 순회 설교자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알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은 잠자다 말고 이 사람의 방문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밤중에 낯선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행하시는 이런 기적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래 겨우 이 이야기 하려고 한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는 사람을 깨우려고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칭찬인지 아니면 인정한다는 말인지조차 분명치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서 그렇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이 무슨 동문서답(東問西答)입니까? 무슨 불교 식 선문답(禪門答)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 ‘니고데모’의 인사말과 예수님의 답변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다시 다루어 보도록 합시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행하는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실 낯선 방문객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밤에 무엇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당신은 ‘니고데모’의 칭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최소한 친절하게, 그리고 다소 겸손하게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정도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사실 아주 퉁명스럽고 예의가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제가 이 설교를 마친 후에 여러분 중에 누가 제게 와서, “목사님, 오늘 당신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는 오늘과 같은 설교를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로부터 무슨 대답을 듣기 원하십니까?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또는 최소한 “얼마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뭐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글쎄요, 서울에서 대구까지 KTX를 타면 대략 2 시간 정도는 걸리죠.” 이 답변은 그 자체로서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답변이 당신의 언급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니고데모’의 인사말과 예수님의 답변은 겉보기와는 그렇게 동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말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필경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자칭 선지자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일련의 설정된 규범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자신이 선지자임을 주장하는 일종의 환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하고, 예언자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말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합산해 본 결과, 예수님은 정말 선지자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그곳으로부터 여기에 올 수 없다. 이해의 점수를 합산하여 신앙의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니야. 관찰이나 연구 조사를 통해서 신앙이나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네.” 정말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길입니다. ‘니고데모’의 관찰과, 그 관찰에 입각해서 연구한 결과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똑똑했고 정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여러 차례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설교도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 공부도 꽤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틀림없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된 대답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시도해 본 경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한 가지 논쟁거리에 대해서만 답변을 해주어도, 그 사람은 세 가지 네 가지 더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따져듭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왜 하필 유대인이었나요?” “기적은 다른 종교에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진리라고 우겨대는 것입니까?”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창조적인 교사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한 학생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빌라도를 찾아가서 그를 꾸짖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믿지 않던 ‘빌라도’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성으로 따져보니...” “아니야,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어.” 불행하게도 ‘니고데모’는 그리 대단한 시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유(隱喩)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주의적인 편견에 의해 눈이 가려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늙었습니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나이 때문에 자궁은 고사하고 택시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환기시켜 주려고 애를 쓰고 계신 반면, ‘니고데모’는 해부학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대로 불지만 너는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그리고 네 얼굴을 가로지르는 미풍은 느낄 수 있지?” 하지만 ‘니고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오 가련한 니고데모여,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나쁜 표현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 나서 이제는 아무런 참신함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더 이상 종교적인 의미해 국한해서 쓰고 있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어느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교단의 활동이 왕성한 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목회한 교회는 단지 수년 만에 성도의 수가 배가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자기 집 주위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 속에 그의 부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인은 자기 남편과 친한 한 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남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로 하여금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휴식을 취하도록 권면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마 매 주일마다 반나절이라도 여가를 보내도록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일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 친구 목사님은 그렇게 했고, 심지어 그에게 장례식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이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의 이혼은 교단 지도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교단 총회장이 직접 그 목사님을 돌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총회장은 그 목사님을 올바른 방향으로 교정해 주었는데, 그를 이번에는 성공의 기회가 전혀 없는 조그만 교회로 보냈습니다. 물론 사례비도 상당히 감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그곳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도 수나 예산은 두 배 넘게 늘었으며, 야심에 찬 교회 건축도 계획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새 여성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님은 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만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대로 한 번도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두 번째 부인이 이 목사님의 친구를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 목사님이 듣게 된 말은 이전에 첫 부인으로부터 들었던 것과 꼭 같은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내 남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그가 독서하면서 쉴 수 있도록 권면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목사님의 두 부인이 한 결 같이 가졌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이 목사님에게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열정이나 지식에 결핍되어 있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정말 헌신된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의 부인들이 그로부터 발견한 것은 다른 종류의 “결핍”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을까요? 그것은 실존적 공허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죄책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행하거나 행하지 못해서 오는 죄책감이 아닙니다. 자신이 되어야 할 그 본질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니고데모’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방금 소개한 목사님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느 정도의 성공이 요구됩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너는 거듭나야 한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헌신된 사람도,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똑똑하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자신을 태어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생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선물입니다.
오, 가련한 ‘니고데모’! 올바로 살기 위해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자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동해 갔습니다. 오, 가련한 목사님! 성공에서 성공으로 달려가면서, 승리를 추구하면서, 마침내 상을 집으로 가져오기를 희망하면서. 오, 가련한 ‘요한 웨슬러’! 지친 말 위에 타고서, 온 세상의 전도대회를 전전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평화를 얻기를 갈망했습니다. 오, 가련한 ‘마르다’! 부엌에서 손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람들의 칭송과 인정을 한 몸에 받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복된 선물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람은 임의대로 분다
너는 그것을 다스릴 수 없어
너는 그것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없어
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것조차 알 수 없어
바람은 임의대로 분다
그리고 너는 오직 그 소리만 듣고,
너의 얼굴에 부딪쳐 오는 미풍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물론 네가 빨리 달리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턱을 간신히 고정시키지 않으면,
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이 하나님의 영의 은혜를 듣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니고데모’야 포기하라. 열심히 애쓰는 일을 포기하라. 김 목사야 포기하라. ‘마르다’야 포기하라.
바람은 임의대로 분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부드러운 미풍이.
그리고 이것은 약속이다.
한밤에 찾아온 모든 낯선 손님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3. 광야의 뱀

기독교의 유별남이 무엇입니까? 즉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행하게도 ‘니고데모’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만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예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만(4, 9절), 예수님의 대답은 五里霧中이었으며, 여전히 그는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같은 질문을 되 뇌이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내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인가?”
동기는 달랐지만 예수님을 찾은 어느 부자 청년도 처지는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 막 10:17-27).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부르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에게 다짜고짜 십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일러줍니다. 그 청년은 그까짓 것들은 이미 다 지켰노라고 호언장담입니다. 이제는 그가 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는지 짐작이 갑니다. 자신의 의(義)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네가 가진 모든 재산을 이웃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충고입니다. 그 청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걱정스럽기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기들을 향해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제자들은 충격 가운데 묻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예수님의 대답인 즉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막 10:27).
왜 이렇게 예수님의 강의는 어렵기만 합니까? ‘니고데모’도, “부자 청년”도,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마저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요즈음에는 형편이 좀 나아졌습니까?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세상의 지식이란 지식은 다 접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넷티즌’들은 “거듭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까? 현대판 ‘니고데모’나, “부자 청년”이나, “그 제자”들은 없습니까? 지식이나 정보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어만 가고,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쉽기만 한데, “거듭나는 법”이나 “천국에 이르는 길”을 아는 사람도 덩달아 늘어가고 있을까요? 오히려 영적 문맹율(文盲率)이 더 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련한 ‘니고데모’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13-21 사이의 본문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이상하게 끝이 났지만, 이번에는 화자 자신의 해설과 독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약속. “너는 거듭나야 한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니고데모’는 거듭나기 위해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적․영적 자산,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을 총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책임 소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 과연 이 말씀이 명령처럼 들립니까? 다음과 같은 질문은 어떻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여야 물속에서 숨을 쉬며 볼 수 있을까요?” 대답은 무엇입니까? “물안경을 쓰고, 산소 통을 매야 해.” 이것이 명령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건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조건은 내 편에서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너는 거듭나야 한다.”는 명령이나 요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니고데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은혜”라 부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 3:5).
치명적인 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위해서 할 수 일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를 <민수기>에 등장하는 “광야의 뱀” 이야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지금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페트라’가 있는 ‘에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민수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4-9)
하나님을 원망하다 뱀에게 물려 죽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自業自得이라 해야 할 것이나,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처방전이라고 내놓은 것이 한 마디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자에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낫는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된 치료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몸에 독이 퍼졌으면 이를 제거할 무슨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온 몸에 퍼진 독만 제거하겠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뱀의 독은 그들의 영혼에 까지 퍼져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거입니다. 영혼의 독, 즉 “죄”라고 하는 맹독(猛毒)을 치료할 처방전은 없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거론할 의도였다면 차라리 그들로 하여금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금식하며, 회개토록 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새 삶을 살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함으로써 온 몸에 퍼진 독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뱀에게 물리지 않은 사람들은 새 마음 새 뜻으로 조신(操身)하면서 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뱀에게 물려 온 몸에 독이 퍼진 자들이나, 뱀에게 물려 죽은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 역시 좋은 해결책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잘못을 유야무야(有耶無耶)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무슨 말입니까? 이 <전도서>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일상의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돈이 없어 이웃 가게로부터 늘 외상으로 사먹던 한 실업자가 어느 날 가게 주인에게 와서 이제 취직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제대로 돈을 주고 사가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동안 밀린 외상값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가게 주인이 뭐라 하겠습니까? 밀린 돈부터 갚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제대로 된 거래를 해가기 위해서 이 사람은 이전의 빚을 모두 갚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살인자가 법정에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앞으로는 절대 살인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를 무죄방면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바르게 살겠으니 이전에 저지른 모든 잘못들은 없었던 일로 해 주십시오.”하고 말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그래, 알았다.”하시면서 지난 모든 일들을 없었던 일로 해 주십니까? <전도서> 기자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그리고 미래의 것이든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이스라엘이 “장대에 걸린 놋뱀”을 제쳐두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놋뱀 아래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기도는 정말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기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처방 같지만, “광야의 뱀” 모조품이나 기념품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면 어떨까요? 무슨 상징물이나 기념물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만,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사람들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 囚衣를 찾겠다는 광적인 열정은 중세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옷에 무슨 신통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열정적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광야의 뱀” 모조품을 만들어 지니고 다니거나 예배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제시하신 유일한 처방은 “장대에 걸린 놋뱀”을 그냥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냥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 “놋뱀”을 향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고, “놋뱀”의 형상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닐 필요도 없으며, “놋뱀”이 아닌 다른 처방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지극히 간단명료한 처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장대에 달린 광야의 놋뱀”은 다른 아닌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 자신” 임을 그려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었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하자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시인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 즉 간증과 전도까지를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와 삶을 통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구원에 대해서 공동체 예배 시에 간증하고 고백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고 계신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그렇게 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의 예배 시에 그렇게 합시다. 초청과 헌신의 시간에 그렇게 합시다. 주님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구든 만나서 “예수님이 내게 행하신 구원”에 대해서 입으로 시인해 봅시다. “예”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결단합시다.
4. 3장 16절-하나님이 사랑하사

필자가 목사가 되기 위해 치른 안수(按手) 고시 과목 중에는 5분 정도의 즉석 설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자의 설교 자질이나 그의 신학적 입장을 들어보아야겠다는 의도일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 고시 위원회에서 제시한 <성경> 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구절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고시위원들이 왜 이 구절을 선택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른 구절은 몰라도 이 구절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외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자가 이 구절을 제대로 전달 또는 증거 하지 못한다면, 목사로서는 고사하고 교인으로서의 자질도 의심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슨 역설입니까? 나의 설교는 영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횡설수설이었습니다. 주어진 5분의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겨우 설교를 끝내자 고시 위원들의 비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왜 그처럼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조차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창피스러워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왜 나는 이 구절을 제대로 설교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복음을 제대로 증거 하지 못했을까? 너무나 유명한 구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구절, 그래서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떻습니까? 오늘날 세상 속에서 복음이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설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처럼,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마른하늘에서 천둥치듯 문맥의 전후 상황이나 배경과 상관없이 갑자기 등장한 선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유명한 복음의 “대 헌장”은 16절뿐만 아니라 3:13-21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한 밤중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이었고, ‘니고데모’는 두 번에 걸쳐서 “거듭남”의 의미나 방법에 대해서 물은 바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거듭날 수 있겠나이까”(4, 9절). 이 본문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화자 자신의 답변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3장 16절은 전체 답변에 대한 요약적 선언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그 속에 포함된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서 복음의 총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세상”; “독생자”; “영생과 멸망”; “믿음.” 이제 이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합시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각기 <요한복음> 3장 16절의 주어와 동사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하나님”이 복음의 주체이자 기원이라고 한다면, 그분의 “사랑”은 복음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요일 4:7)는 사실은 아마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사도가 말하는 “그 큰 사랑”은 “위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에로스’나 ‘필리아’ 등을 사용하지 않고 ‘아가페’라고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유난하고 각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덧붙여 설명하자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 아무도 이해조차하기 어려운 무한하고 신비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사도는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달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어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찬송가도 솔직히 그러하다고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찬송가 404장)
이 찬송가는 “성도여 찬양하세”라는 후렴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위대하고, 신비하며,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동일한 찬송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용서하셨네
그 이유란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하늘의 별처럼 혼자 고고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장16절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나니.” 두 번째 동사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사랑을 혼자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차지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질 수 있게 되었으며, 볼 수 있게 되었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며, 무한하며, 주는 사랑일 뿐만 아니라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이이기도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방탕한 아내 ‘고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말도 안 되는 이와 같은 명령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앞날이 창창한 젊은 신부나 목사를 불러 사창가 한 창녀와 결혼하라고 지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래도 결혼을 하면 이 여인의 이전 생활이 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짓궂게도 이 창녀가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닐 것이고, 애비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음란한 자식들”을 셋이나 낳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심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연극입니다. 연극의 제목은 <호세아와 고멜>이며, 두 주인공은 각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을 맡아 연기하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는 지시대로 했고, 과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보게 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la[er]z]y), 즉 “흩어버리다” 또는 “뿌리다”입니다(호 1:4). 딸의 이름은 ‘로 루하마’(hm;j;rU aOl), 즉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다”입니다(호 1:6).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로 암미’(yMi[' aOl), 즉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호 1:9). 이들 세 자식들의 이름은 한 결 같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두 부정적이고 저주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남편이 아내가 밖에서 음행하여 낳은 “음란한 자식들”을 내 자식으로 대우를 해주겠습니까?
이야기의 끝이 여기까지라면 연극의 결말치고는 너무 싱겁고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기에도 미흡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개입하여 연극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음란한 자식들”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어서 내 자식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르엘’을 ‘이스르엘’로, ‘로 루하마’를 ‘루하마’(hm;j;r)로, 그리고 ‘로 암미’를 ‘암미’(yMi[)로 바꿀 것입니다. ‘루하마’는 “긍휼이 여김을 받다”이며,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첫 아들의 경우 바뀐 이름은 이전과 같은 ‘이스르엘’이지만,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즉 이전에는 부정적인 의미의 “흩어버리다”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씨를) 뿌려 심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 1:10)
그런데 ‘고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난 ‘고멜’은 어떻게 할까요? 이 여자도 다시 데려다 살아야 합니까? 정말 어처구니없지만 그렇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호 3:1)
지금 이 여인의 처지가 어떠합니까? 여전히 이전의 미모와 화려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많은 정부(情夫)들을 거느리며, 그들로부터 온갖 명품과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선물 공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여인의 처지는 비참 그 자체입니다. 젊음도 가고, 미모도 가고, 그 많던 놈팽이들도 다 떠나고 없습니다. 더욱 한심하게도, 마지막으로 그녀를 데리고 놀던 한 놈팽이는 온갖 단 맛 다 빨아먹고서는 그녀를 노예로 팔아넘기고는 도망을 가버린 듯합니다. 지금 ‘고멜’은 ‘예루살렘’ 성문 앞 시장 바닥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수치와 두려움으로 떨며 서 있습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목에 두른 가격표가 유일한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사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가 이 늙은 퇴기에게 定價를 지불하려 하겠습니까? 누군가 턱도 안 되는 가격, 은 한 냥을 먼저 제시합니다. 그저 먹겠다는 것이지요. 다시 누군가 조금 나은 가격을 제시합니다. 이번에는 은 다섯 냥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매 가는 점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다섯 냥에서 일곱 냥, 일곱에서 다시 열 냥... 결국 ‘호세아’가 가장 높은 가격인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삽니다(호 3:1). 사람 좋은 ‘호세아’는 얼른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서는 군중 속으로 데리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면 ‘고멜’은 다시 ‘호세아’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이제 그녀는 ‘호세아’가 돈을 지불하고 산 노예에 불과합니다. 노예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안 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신실함으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정말 대책 없는 신실함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 하리라(호 3:3)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결단합시다.
5. 3장 16절-독생자를 세상에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주목하게 되는 한 쌍의 단어는 “세상”(kovsmo", 코스모스)과 “독생자”(uiJo;n to;n monogenh, 휘온 톤 모노게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이 각기 복음의 기원과 복음의 동기라면, “세상”은 복음의 대상(對象)이며, 복음을 필요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생자”는 말할 것도 없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세상. 여기서 화자가 지칭하는 “세상”은 라틴어에서 언급하는 “자연”(自然, natura)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즉 자연주의자(무신론자든 범신론자든)의 ‘야훼’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세상”이 의존적이며 한시적인 것이라면, “자연”은 자존적이며 영원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가치 의존적이라면, “자연”은 가치중립적입니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므로 자신의 존재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 묻는 자도 없고 누가 물어본들 “대답할”(respond)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창조주를 향해서 대답해야 할 의무 즉 “책임”(responsibility)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류 또한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야 하는” 즉 “책임지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세상은 “세상 사람들”과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세상은 어둠 속에 “구속”(拘束)되어 있으며, 그래서 새로운 “구속”(救贖)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19, 21-22)
질서와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어야 할 세상이 분열과 와해(瓦解)의 과정 속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인 것이지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입니다. 그 세상을 하나님께서 그냥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즉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랍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질시와 분노를 이해할 만합니다.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형의 기분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동생이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나가 몇 년을 허랑방탕하면서 탕진하고서는 갈 곳이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신 나간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붙잡고 좋아하며,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귀환 파티를 열어주고 있으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실컷 두들겨 패서 내쫓아도 속이 풀릴까말까 한 판인데 말입니다. 그동안 아버지 뜻에 따라 죽어라고 일만 한 보상은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마태복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을 한 비유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신 나간 포도원 주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동네를 돌아다니며 포도원에서 일 할 품꾼을 찾아 시간 당 얼마씩 주기로 계약을 하고는 그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품꾼 중에는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한 사람도 있고,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들어와 일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일이 모두 끝난 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할 때 그들이 일을 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 같은 액수의 품삯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누가 보아도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특히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죽어라고 일한 자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괜히 아침부터 들어와 열심히 일한 것이 억울하기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의로운 ‘유대’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며, 천박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저 무지한 족속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쪽입니까? 작은 아들입니까 또는 큰 아들입니까? 아침부터 포도원에서 죽도록 일한 자입니까 또는 해질 무렵에야 들어와 품삯만 챙긴 자입니까?
내가 누구든, 어느 쪽에 서든, 하나님은 결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분 스스로도 불평하는 포도원 품꾼들에게, “나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고, “내가 내 돈을 가지고 마음대로 쓴다고 해서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일축해 버립니다(마 20:15). 참 어이없는 답변입니다. 결코 논리적인 답변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되묻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신다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저버린 것도 역시 그분의 뜻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롬 9:19)
지극히 논리적인 질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비논리와 억지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아예 말문을 막아버리는 대답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만합니다. 토기장이가 각기 다른 목적과 용도를 위하여 다른 토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무슨 말입니까? 귀하게 쓸 용도로 만든 토기는 내팽개치고, 천하게 쓸 요량으로 만든 토기를 오히려 요긴하게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렇게 할 일이지 왜 지금 와서 원래의 목적과 용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고 있느냐 이겁니다. 억지와 비논리와 불공평의 절정이자 극치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하는 일에 논리적이지 못하며, 공평무사함을 보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지, 논리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에게 무슨 논리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또한 공평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있고,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받아야 할 자가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사랑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받는 자의 자격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만이 아닌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의 본질입니다. ‘헤세드’란 <룻기>에서 배운바 있듯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긍휼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독생자. 그래서일까요?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오늘날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사랑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왜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상한 것이기 때문입니까? 사랑이 갈등과 분열 대신 화평과 안녕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까? 사랑이 이 세상을 살만 한 곳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전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증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9)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16절상).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봅시다. 왜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을까? “세상”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물어봅시다. 왜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셔야만 했을까? “세상”이 그분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독생자”는 진정 하나님이 “세상”에 내어준 가장 위대한 ‘헤세드’의 선물이며, 복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독생자”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최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놓을 더 이상 좋은 선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 하겠느냐(롬 8:32)
하나님 자신도 ‘아브라함’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 바 있습니다(창 22). 그리고 ‘아브라함’이 요구대로 아들을 바치려 했을 때, 하나님은 감동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마찬가지로 자식을 내놓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 나라 어머니라면 결코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놓을 수 있는 그들이니 말입니다. 선물의 가치는 선물을 주는 자가 그것을 얼마나 아끼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쓰다가 남은 것을 준다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주거나, 또는 여러 개 중의 하나를 선물로 준다면 받는 자도 크게 감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고서도 빈축을 사기 십상입니다: “뭐 이 따위 것을 선물로 주나 그래?” 그러나 <빌립보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이자 심장”입니다(빌 2:5-6). 하나님은 자기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 그 자체를 아예 드러내보이셨다는 것이지요. 이점에서 “독생자”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독생자”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독생자”는 갑자기 허겁지겁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마련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오래 전부터 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선물입니다. 오래 전이라 함은 창세 이전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그날 ‘모리아’ 땅에 아들 ‘이삭’ 대신 어린 양 한 마리가 이미 준비되어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위안을 받는 ‘아브라함’의 심중을 풍유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생자”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복음”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화자는 서두에서부터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 한 바 있습니다. “독생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필립 얀시’는 한 소녀의 재치 있는 답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한 여자 아이가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지 묻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할머니, 그것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 일화는 ‘필립 얀시’가 편집한 <Students' Bible>의 <요한복음> 서막의 설명 부분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큰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감사하노라”(고후 9:15). 나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놓으신 것처럼 나는 무엇을 내놓고 있습니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독생자” 즉 나의 진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지금 당장 내놓으시다. 결단합시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깁시다.
6. 3장 16절-믿는 자마다 영생을
하나님이 복음의 주체,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의 동기, 세상이 복음의 원인과 대상, 그리고 독생자가 복음의 내용이라 한다면, 영생은 복음의 목적이 되는 셈입니다. 이 목적이 달성되기 위해서 통로 즉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과 영생을 말할 때, 이 믿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믿음. 과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히 11:6). <요한복음>에서도 “믿음”은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전체적으로 무려 98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마가복음>에서 불과 18번,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55번 등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 숫자는 엄청나게 많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 화자는 그가 이 책을 쓴 목적도 독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화자가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믿음. 과연 그 실체나 본질이 무엇일까? 어떻게 그 믿음이 나를 영생으로 인도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 믿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믿음에 관한 혼란과 오해부터 불식시키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이 단어를 사람들에 대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 간이나 국가 간에 맺어지는 약속이나 계약 또는 조약들은 반드시 쌍방의 날인을 담은 문서로 된 합의문을 필요로 합니다. 상대방의 선의(善意)를 믿고 단순히 구두약속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꼭 무슨 악의(惡意)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서 합의문은 서로를 구속시키는 보장 장치로 보면 됩니다. 결혼 서약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단순히 “선의에 기초한 소망” 내지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믿음에 의지하기보다는 그저 지금 당장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더 선호합니다. 이런 태도는 불신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 유명한 신학자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믿음에 대한 오해나 변질은 심각했습니다. 소위 “실존철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 실존주의자들에게 믿음이란 진실(眞實)이나 또는 사실(事實)과 관련된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희망 사항”이나 “막연한 기대” 또는 “그랬으면 하면 바램” 정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에 관한 이런 세속적 왜곡이나 변질을 단호히 거부하며,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성경적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는 여기서 “실상”(uJpovstasi“, 휘포시타시스)과 “증거”(e[legco”, 엘렝코스)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상”이라 함은 구체적인 그 무엇 즉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서, 믿음은 “실체”(substance)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막연한 기대나 희망사항”에 대한 “대체”(substitute)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evidence)라는 단어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바는, 예컨대,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준 유언장과 같은 것입니다. 또는 어떤 경기나 공연의 입장권에도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것 없이는 소유할 수 없거나 관람할 수 없는 보증이나 입장권과도 같은 것이지요. 다시 한 번 <히브리서>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 말씀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입장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상(償)과 바꿀 수 있는 일종의 교환권 같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의 대상.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가 결코 믿을 만 한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지요.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 앞에서 선을 행하고, 이웃을 돕기도 하며, 나름대로 그럴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존재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애완견이 사람의 옷을 입고, 온갖 재롱을 다 부린다 해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개는 여전히 개에 불과합니다.
내가 믿어야 할 사실은 또 있습니다. 나의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사랑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16절상). 사람이 간혹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고, 때로 사랑하는 조국이나 연인을 위하여 죽을 수는 있겠으나, 반역자나 죄수(罪囚)를 위하여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참고. 롬 5:7-8). 그것은 정말 무가치한 죽음이며 그야말로 개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내놓으신 일은 무모하거나 무가치한 짓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세상이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의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방금 말한 두 가지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믿어야 할 진리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나의 믿음이 그런 수준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어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수준이 아닙니다. 3장 16절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아니라, 한 인격체 즉 “독생자”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믿음을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독생자”야말로 복음의 내용이자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은 폐쇄적이며 배타적입니다. “독생자”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사실이나 사건도, 그 어떤 행위도 영생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독생자”를 믿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 속에서 잉태되고 자란 그 무엇입니까? 아니면 “독생자”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자연적인 노력이나 훈련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입니까? 이 질문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만, ‘칼빈’(J. Calvin)의 교리에 따르면 믿음 역시 초자연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기 위해서 내가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내가 기여한 바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거듭남”과 “믿음” 사이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거듭남”이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마치 겨자씨나 밀알처럼 싹이 트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등 생명 현상을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밀알이나 겨자씨로 비유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 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믿음”을 이처럼 생명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를 갖다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믿음”; “산 믿음”; “약한 믿음”; “강한 믿음.”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9)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
“믿음”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현상이라면, 그것을 자라게 하고 튼튼하게 해야 하는 일이 나와 전혀 무관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쩌면 전적으로 그 책임을 나에게 위탁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자(孔子) 선생도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 않았습니까? 子曰 身體髮膚는 受之父母하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요, 立身行道하여 楊名於後世하여 以顯父母가 孝之終也니라(자왈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하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요. 입신행도하여 양명어후세하여 이현부모가 효지종야니라).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부모님이 주신 육체를 감사하면 작은 것 하나라도 함부로 자르지 않았다는 것은 조상들이 어렸을 땐 댕기를 길게 묶고, 크면 상투를 틀었던 것에서 미루어 한낱 머리카락이라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지를 교훈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히브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 5:11-6:3)
나는 이 믿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어떻게 행사하고 있습니까?
7. 3장 16절-멸망치 않고 영생을
복음의 빛과 그림자. “복음”이 갖는 역설은 그것이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에 대해서 열려있지만 오직 “독생자”를 통해서만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믿는 자에게만 열려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후)
우리는 이것을 복음의 이중성(二重性) 또는 복음의 “빛과 그림자”로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망”과 “영생”이 그것입니다. “영생”이 빛 즉 복음의 축복을 대변한다면, “멸망”은 그림자 즉 복음의 저주를 대변한다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바로 이와 같은 복음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6절에 비해 유난히 “심판”과 “정죄” 그리고 “행위”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17-21절)
물질세계에서 빛이 기능하는 바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만, 두 가지 지극히 대조적인 기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광합성을 통한 “생명의 창조”,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살균과 소독을 통한 “멸망과 죽음”입니다. 빛은 그 속성상 어둠을 밝히는 것이지 어둠과 동행하거나, 또는 어둠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광합성은 허공이나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통로 즉 엽록체(葉綠體)라는 매개체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살균과 소독은 어떻습니까? 빛의 진로 앞에 무엇인가 장애물을 놓지만 않으면 됩니다.
“독생자의 빛”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영생”을 창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무엇 즉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통로는 곧 “믿음”(pivsti", 피스티스)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믿음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自力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들 질문은 이 구절의 핵심을 놓친 질문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믿음의 결과만을 그저 담담히 진술하는 데 있습니다. 굳이 이들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셨고, 그 때 우리 또한 믿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우리의 책임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믿음과 영생”이 이처럼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책임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불신과 심판” 역시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사람은 심판과 멸망을 받게 되는가? 스스로 믿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저주이자 그림자입니다.
독생자의 이름. 누구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독생자”의 이름 즉 ‘예수’(Jesus)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준 바처럼, “구원자”입니다(마 1:21). 따라서 “구원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논리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야훼’(Jehovah)이며,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예수’인데, 이 두 이름의 영어 단어 첫 두 글자가 똑 같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아주 흥미로운 우연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여전히 생소할 뿐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아랍’ 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들은 ‘야훼’ 하나님의 존재나 그를 믿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특히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혐오감마저 드러냅니다.
‘로마나 칸’(Romana Kahn)이라 불리는 저의 제자도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저와의 성경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슬림’이었던 그녀는 <창조 이야기>나 <아브라함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며, <성경>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더 어렵습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래서 일부러 <요한복음>을 교재로 선택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라는 이름으로 도배를 해놓다시피 한 이 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요한복음>을 읽는 동안 그녀는 ‘예수’의 이름을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이름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이름”(the Name) 때문에 ‘로마나’는 걸려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건만,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로마나’를 통해서 입증된 셈입니다. “독생자”의 이름에 걸려 넘어진 자는 ‘로마나’와 같은 ‘무슬림’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역시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통해서 “독생자”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지식은 허상이요 헛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특권이자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영생과 심판의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과 심판에 대해서 말할 때,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내일 거기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생이나 심판은 우리가 죽어서 맞이하게 될 체험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의 초청을 받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든지 “때가 되면 믿겠습니다.” 정도입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들은 죽어 지옥에 가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비하(卑下)한 바 있습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한 번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이나 심판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이야 말로 구원받을 만 한 때요, 바로 지금이야 말로 은혜 받을 만 한 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나’ 역시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그녀는 복음의 초청을 받았을 때, “다음 기회에 다시 공부하겠다”고 말하면서 빠져나가버렸습니다. 나 역시 이런 그녀를 향해서 그렇게 하라면서 점잖게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실수였습니다. 1871년 10월 8일 ‘시카고’의 한 교회에서 행한 주일 설교에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 목사님도 똑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목사님은 <마태복음> 27장 2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빌라도’의 질문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무디’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면서 회중들에게 이 본문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씨름하다가 다음 주일까지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훗날 이 일이 자신의 생애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영생과 심판이 먼 미래의 그 때 거기서 이루어질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임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이 과연 무엇입니까? 영생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렇다면 심판은 어떻습니까? 나중에 나에게 임할 그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 역시 나중에 임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절)
따라서 ‘빌라도’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었습니다. 자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결정을 유보한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자초(自招)한 것입니다. 구원에 마치 DMZ와 같은 중립 지역 내지 중간 지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가 ‘로마나’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까요? 그녀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 심판 아래 놓여 있으며,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그 심판 아래 놓여있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해서 같은 입장을 유지하는 한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 중에 아직도 “내가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하랴?” 하며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원의 문제에 있어 내일이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8. 두 교회 이야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두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요한교회”와 “예수교회”였습니다. 두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각각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교회는 모두 같은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를 전하고 증언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개척 시기로 볼 때 “요한교회”가 “예수교회”보다는 아마 몇 년 앞선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교회”는 개척하자말자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곧바로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참고. 눅 3:7). ‘요한’ 목사의 사역은 실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성공적인 사역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침례를 받더니”(마 3:5). 그의 교인 중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군인, 부자, 세무서 직원, 유대 관원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교회”를 개척한 예수님도 실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목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가 환생한 것으로 믿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 왕”(tetrach)이었던 ‘헤롯’ 왕도 ‘요한’ 목사를 궁중에까지 불러들여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교인으로 등록을 할 정도였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이처럼 “요한교회”가 교세(敎勢)를 확장하며 소위 대형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을 무렵, “예수교회”가 새롭게 개척이 되어 근처에 들어섰습니다. 담임 목사 예수님의 목회 비전이나 목적 그리고 신학적 입장은 ‘요한’ 목사와 똑 같았습니다. 그러니만치 두 교회는 이제 힘을 합쳐 이전보다 더욱 활기차게, 더욱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요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교회”를 더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교회”가 “요한교회”를 누르고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요한교회”는 성장이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교회 등록 교인들마저 “예수교회”로 옮겨 가는 통에 교세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수평이동이 오늘날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두 교회의 명암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한 사람은 성공하는 목회자로 급부상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한 목회자로 이전의 명성이 점점 쇠락해 가기 시작합니다.
만일 내가 ‘요한’ 목사이거나 그의 추종자라면 기분이 어떨까? 본인은 매달 “우리 집 교회”를 올 때마다 “노화동 교회”를 지나칩니다. 그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 교회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우리 집 교회”를 바라보는 기분이 과연 어떨까?”하고 상상해 봅니다. 아니면 반대로 이런 상상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근처에 누군가 젊고 패기에 찬 젊은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우리 집 교회” 식구들이 모조리 그쪽으로 몰려간다면, 황 목사님이나 장 전도사님이나 여러분들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본인이 근무하는 경북대학교에는 대학 교회를 위시해서 CCC, IVF, SFC등 여러 선교 단체들이 있습니다. 모두 대학선교라는 동일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조직들입니다. 대학에 교회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목적을 지닌 단체들이 여럿 있으니 대학 선교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상호 협력과 격려를 위하여, 그리고 유익한 정보를 나누기 위하여 매주 목요일 정오 대학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합의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모이는 교인들의 수를 보면 늘 이삼십 명에 불과합니다. 각자 자신들 만의 사역에 바쁜 탓에 잘 모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선교단체들은 대학교회가 주도가 되어 교인들을 전도하고 흡수해 가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대학교회는 나름대로 교회가 주도가 되어 제반 사역을 수행해 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선의로 봐 준다 해도 마치 이들 각 단체들은 일종의 ‘제로 섬’(zero sum)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 역시 경쟁교회인 “예수교회”가 급성장해 가는 것이 탐탁치만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주변의 동료 ‘유대’인들과 자신들이 하는 사역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25절). 논쟁의 주제는 ‘요한’ 목사가 수행하고 있던 “침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교회”의 교인들과는 같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지 않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사는 침례에 대한 무슨 교리나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의 목사 ‘요한’에게 찾아와서 늘어놓는 불평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선생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니라”(26절). 그들의 불평인 즉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오지 않고 인근 “예수교회”로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인 예수님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그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뭐 이런 것이겠지요: “목사님, 당신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목사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 야단도 좀 치고, 절대 우리 교회 근처에서는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문 닫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요한’ 목사의 “팬클럽” 회원들입니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소위 “요사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특정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위한 “사모”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박사모”; “노사모”; “이사모”; 등등. 이들 회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의 맹목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친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의 신변이 위협을 받거나 또는 명예가 실추될 만 한 일이 발생하면 거의 이성을 잃은 듯이 막가파식의 대응과 보복을 합니다. “사모”의 대상이 정치인일 경우 이들은 민족이나 국가, 정의나 대의명분보다는 그 정치인을 우위에 놓습니다. 수년 전 아세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북한의 응원단이 그들의 지도자 김정일에게 보여준 바 있는 태도가 그와 같습니다. 이들은 김정일의 초상이 그려진 현수막이 빗물에 젖었다고 눈물을 흘리고 발을 동동 구르는 등 거의 발작 수준의 증상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지금 “요사모”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요한’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요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마)보다는 ‘요한’ 목사의 카리스마를 더 중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기보다는 “요한교회” 교인으로 등록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맥 형성이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교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최신 음향 기기나 교육 시설 등이 신생 “예수교회”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요사모” 회원들의 행복의 조건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사람(person); (2) 소속(position); (3) 소유(possession).
불행의 씨앗들. 그러나 “요사모” 회원들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조건들 때문에 오히려 고통과 괴로움을 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선생에게 쪼르르 달려와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26절). 시기심과 질투심의 발로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행복의 조건들이 오히려 인생을 더 큰 “고해”(苦海)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내 인생 뿐만 아니라 남의 인생까지도 말입니다.
예컨대, “소유”(possession)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만은 않은 듯합니다. 항상 남과의 비교로 고통은 오히려 더해갑니다. ‘엘리자벳 엘리엇’(Elizabeth Elliot)은 고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나 또는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갖게 되는 것.”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대도 <성경>은 온통 이 소유의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가인’, ‘레아’와 ‘라헬’, ‘요셉’의 형들, ‘사울’ 왕, ‘요사모’ 회원들 모두 다른 사람에게는 있으나 자신에게는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늘 인생이 괴롭고 불만족스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도 한 때는 “예수교회”의 열성 회원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을 금지시키려 했습니다(참고. 막 9:38). 시기심이 발동한 결과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을 때, 그를 시기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동기라는 것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복음이 널리 전파될수록 당국은 ‘바울’을 더욱 학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참고. 빌 1:14-17). 투기심도 이정도면 가히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person)에 대해서 거는 기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사야>가 토로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절망적인 수준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말은 “판단할 가치조차 없다” 또는 “고려할 만 한 가치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대도 우리 대부분은 이 가르침을 무시하다가 큰 낭패를 당하며, 그 수렁에서 한동안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인생을 고해라고 합니다만,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의 대부분이 실은 인간관계 때문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간에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교인은 목사에게, 목사는 교인에게 실망과 배신감과 고통을 안겨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요사모” 회원들도 언젠가는 그들의 목사에 대해서 깊은 실망을 느끼고 “요한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일이 훗날 “예수교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즉 “예사모” 회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자(牧者)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전날 밤 깊은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 기도할 때조차도 함께 동참하기는커녕 태평스럽게 단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한 번도 “실망스럽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들이 한 시도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고 책망하시긴 했지만, 이는 실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으므로 실망할 이유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지금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 피차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나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믿었던 사람 때문에 실망하여 배신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소속”(position) 즉 지위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 내지는 보험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종의 도피성인 셈입니다. 닫힌 사회일수록 이 세 가지 인연의 벽은 높고도 강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이들 세 가지 인연으로 맺어진 모임이나 단체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이들 단체들의 송년회를 알리는 현수막이나 안내판이 전국 곳곳을 도배하다시피 해놓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산간벽지의 한 초등학교조차도 동창회만으로는 부족했음인지 제 몇 회 무슨 반 동기회까지 조직하여 송년회를 가질 정도입니다. 본인이 살고 있는 경산시 남산면에도 아무개 종친회로 부족했음인지 아무개 종친회 남산면 청년회 지부도 있습니다.
왜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임이나 단체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것일까? 왜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 혼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벌일 때에나, 무슨 사업을 시작할 때에나, 무슨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하기보다는 항상 주변에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고질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모임이나 공동체를 통해서 그렇게 하려 합니다. 출신이나 성분, 소속이나 지위가 치명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이 조직 속에 나를 두려고 안달인 것이지요. 그것을 얻기 까지 만족이 없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도피성이 있습니까?
9. 신랑 친구
하지만 이들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스펜스’(Spence)라는 미국인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아주 인기 있는 설교자였으며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분이 섬기던 교회는 많은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인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웃 교회에 젊고 유능한 목사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용모는 준수했고 설교 또한 훌륭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를 좋아했으며 그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주일 밤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스펜스’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서 보니 앉아 있는 교인이 몇 사람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어느 한 집사님이 일어나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모두들 이웃 교회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내가 ‘스펜스’ 목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펜스’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머금고는, “우리 모두 그 교회로 갑시다” 하며 교인들과 함께 그 교회로 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본인 또한 언제 이 일을 그만둘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주지하고 계시다시피, 나는 선생이나 교사로서의 은사는 있을지언정 목사로서의 은사는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지식과 열정을 지닌 젊은 사역자가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꿈과 이상으로 똘똘 뭉쳐, 제 2의 개척을 시작할 때까지 만이라도 교회의 터전이나 세워놓고 갔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나마도 여의치 못할 경우, ‘스펜스’ 목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 모두 더 좋은 교회로 옮겨 가서 하나님 나라의 부흥에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나는 다른 사역을 찾아 나머지 인생을 보냈으면 합니다.
‘스펜스’ 목사님이 그 후 담임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목회를 영영 그만두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여기 정말 그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 목사입니다. ‘요한’ 목사 역시 그의 교인들이 추구하던 세 가지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잘나가는 이웃 교회 목사를 시기하거나, 교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거나, 건물을 확장하거나, 또는 새로운 음향기기를 설치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교회 문을 닫고, 당회장 직도 사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오늘날 대형교회의 유명 목사님들처럼 자신의 아들을 교회의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은퇴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삶을 누리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일러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칭송한 이유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능력에 찬 사역이나 설교와 같은 “위대한 높아짐”이 아니라, 반대로 “위대한 낮아짐” 즉 겸손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그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안도감(安堵感)과 만족감으로 지극히 평화롭고 기쁨에 찬 모습입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하). 이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 후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과 흡사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전해준 우울한 소식, 즉 일부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시위대에 갇혀 있는 그를 더욱 괴롭게 하려는 의도로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세상을 달관한 자의 초연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나 ‘시므온’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삶의 비결을 터득할 수 있었을까? 어디서 이런 고요함과, 평안함과, 자족감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 그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함으로써, 인생의 “고해”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역설적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예로, ‘라헬’과 ‘야곱’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겠느냐(창 30:1-2)
‘야곱’의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창세기> 화자는 훗날 아들을 보게 되는 ‘라헬’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창 30:22-23)
“요한 교회”의 불평하는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로부터 들은 말도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예수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대형 교회의 유명 목사님들을 부러워할지언정, 시기하거나 질투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교회”의 담임 목사나 교인들은 “요한교회”를 우습게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인 것이지요.
소위 영적 분별력 또는 영적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괜히 무슨 신령한 영적 은사를 가졌노라 은근히 자랑할 일이 못된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처럼 은사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것을 받지 못한 자란 없으며, 어느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시기하거나 질투할수록 인생이 더욱 고통스러워 지는 쪽은 상대가 아니라 나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비극적 주인공 ‘살르에르’가 그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모짜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인정만 했더라도, 그의 인생은 그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역시 훌륭한 작곡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모짜르트’의 은사를 시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시시하거나 변변찮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은 자신의 목회 사역 내내 이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교회”가 근처에 들어섰을 때에도, 불편해 하고 시기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하).
신랑 친구. “침례 요한”이 기쁨으로 사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인지를 안 것이 첫 번째 비결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비결은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 “신랑 친구”(shosben)일 뿐이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랑친구가 하는 일이란 신부 집에 함 들고 가서 돈 뜯어내는 것이 고작이지만, ‘유대’ 사회에서 “신랑 친구”의 역할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식을 주선하고, 준비하며, 결혼 잔치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결혼식장에 신랑과 신부를 데리고 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첫날 밤 신부가 든 방문 앞에서 호위 역할을 하면서 신랑 외의 다른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리고 한 밤중 신랑이 오면 그의 음성을 확인하고 난 뒤에 비로소 문을 열어주고는 자신은 안도와 흡족함으로 그곳을 떠납니다. 본문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29절).
나는 여태 단 한 번이라도 신랑친구의 역할을 자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가 직장 동료이든, 가족의 구성원이든, 제자이든, 그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도록 주선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태 그런 적이 없었다면 나는 인생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를 놓치고 살아온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보지 못한 여인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 1:3-4);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심정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그보다 더 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 식구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바울’처럼 신랑친구의 역할을 자임해 본 자가 아니라면, 이런 즐거움과 가슴앓이를 결코 맛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신랑에 대한 시기나 투기로 전율해 본 적은 없습니까? 행여나 신랑 친구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신부 방문 앞에서 버티고 서서 낯선 자는 물론 신랑마저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본 적은 없습니까? 신부와 신랑이 첫날밤을 보내는 것을 시기와 투기로 지켜본 적은 없습니까? 얼마 전 여의도 순복음 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은퇴한 조용기 목사님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서운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교회가 목사의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하나님의 것이니 서운해 할 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2010년 신년을 맞이해서 순복음 교회는 21개의 지 교회를 모두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내 인생에서나 교회에서 아무런 책임 있는 역할을 맡지 않으려 하는 것도 심각한 정신 장애로 보아야 하지만, 매사에 주연(主演) 노릇만 하겠다는 발상도 과대망상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분명 과대망상의 정신 질환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짧은 한 구절에서, “생각하다”(fronevw, 프로네오)는 의미의 동일한 어근(語根)을 지니는 그리스어 단어가 네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밑줄 친 부분).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건전하고 올바른 생각과 판단”입니다. 이 단어는 그 의미와 함께 영어 단어에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phrenetic(狂亂의, 광란자); phrenitis(腦炎); phrenology(骨相學). 이 모두 뇌(腦) 작용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구조와 단락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두 개의 단락이 시적 병행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 단락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또한 본문이 이전의 본문들과 연결되는 방식을 논의해 봅시다.
2. 본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구절은 무엇입니까? 암송해 봅시다.
3. 나는 3장 3절을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나에게 일어났던 가장 큰 기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언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4. “너는 거듭나야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는 명령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행동을 예고하는 약속입니까?
5. 복음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6. “침례 요한”의 사역을 다루고 있는 본문으로부터 나를 위한 교훈과 적용을 이끌어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