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 생명과 심판의 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19-30약 7분 분량
설명과 해석이 더 어렵고 구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도 힘들지만, 부정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너무 신비하고 기이해서 제대로 실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설명이 더 구차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38년 동안을 병으로 고생하던 이 사람은 지금 누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골고루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가 병 고침을 받은 후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체 없이 당국에 가서 안식일을 어겨가면서까지 자기 병을 고쳐 준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론’은 이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후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착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해서 영적인 치유도 받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역경에서 벗어낫다고 해서 사람이 경건해 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고침을 받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또 고침을 받은 후에도 특별히 나아진 것도 없는 이 사람이 말입니다.
나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더 고약한 사람은 아닐까요?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감사는커녕 더 악의를 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기 때문에 더 화를 내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지요. 선교사 ‘요나’처럼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때문에 화가 나있고 심사가 뒤틀려 있습니다. ‘니느웨’ 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설교를 하라고 해놓고서는, 그대로 하시면 될 것을 반대로 그들 모두를 살려주었으니 말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래서 분통이 터지고 질투가 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격도 없는 녀석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태도인 것이지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 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
신앙이 어려도 한 참 어립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의 책 「일상, 하나님의 신비」에서 신앙이 어린 아이들은 대개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집나간 작은 아들의 형이 그렇고, 포도원에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열심히 일하던 일군들이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고, 반대로 악하고 못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오경>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적어도 <오경> 속에서 하나님은 일정한 공식이나 틀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리와 신학의 틀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유대’인 자신들처럼 말입니다. 안식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어겼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규정을 어기면 안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18절).
그런대도 예수님은 참으로 한가하십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상대방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훤히 알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반응은 살기등등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7-18절). ‘유대’인들의 반응을 통해서 슬그머니 본문의 주제를 끼워넣고 있는 화자의 이야기 솜씨가 놀라울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은 지금 막 “나와 하나님은 곧 하나이니라”고 선언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설마 이들 ‘유대’인이나 ‘요나’처럼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대화중에 화를 내는 것은 그래도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를 내는 것보다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감정 따위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솔직히 어떤 기분입니까? 이 말씀이 시큰둥하게 들립니까? 여느 때처럼 말입니까? 본인의 설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이 한 사람이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질병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모든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은커녕 병 고침을 받은 자조차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왜 이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서 그를 살려주신 것일까요? 그가 먼저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그분의 능력이나 영광과 연관을 지어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얀시’(P. Yancy)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는 현실, 즉 썩어지고 소멸해가며 타락해 가는 이 세상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이사야’가 꿈꾸던 ‘메시아’의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로 되돌아가야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그림이자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므로 나도 그렇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빌 2:6).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가 기도하시므로 나도 기도한다. 그가 긍휼히 여기므로 나도 긍휼히 여긴다.”
이 세상은 고통이나 고난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처럼 신학적인 해설이나 설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과응보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누구 잘못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는지 논쟁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를 보고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나는 이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하니 여러분은 화를 내시겠습니까? 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들 ‘유대’인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자는 말은 그분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분의 사역과 하나가 되자는 것입니다. 문선명처럼 또 다른 예수가 되자는 말은 아닙니다. ‘아담’처럼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자는 말이 아닙니다(참고. 창 3:5).
예수님께서 인격적으로나 일에 있어서나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써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19절).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2),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았으며(1:18), 본 것을 그대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영원한 사랑의 교제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천지 창조도 이러한 사랑의 교제의 결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성자 하나님을 감동시켜 자신을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으며, 성자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순종은 또한 성부 하나님을 감동시켜 그가 하는 일을 성자에게 나타내게 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20절).
교제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순종을 낳습니다. 연인들이 늘 서로를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결혼은 늘 미루어둔다면 그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사랑한다면 하나 되기를 원하고, 또 늘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결혼입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와 결혼했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지겹지 않습니까? 솔직히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그분과 대화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습니까?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경험했고, 낙원에 살고 있습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