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빛이 어둠에 비취되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6-7약 9분 분량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될까? <로마서>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35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의 상상과 이해를 초월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인 것이지요. <욥기>의 핵심 주제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셔서 일장 훈시를 하고 계십니다(참고. 욥 38-41). 그분의 훈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께서 ‘욥’에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 아니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계시(啓示)의 역설이자 신비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말할 때, 대체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독단”(獨斷)과 “독선”(獨善) 등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조(自嘲)와 냉소(冷笑)로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감히 그분의 뜻에 대적할 수 있겠느냐?”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엘리’의 태도가 이와 같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그에게 와서 장차 ‘엘리’와 그의 집안에 내릴 하나님의 저주를 알려주자,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하).
누가 그분의 의지를 꺾을 수 있으며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대단한 믿음의 표시인 것 같습니다만, 이와 같은 태도는 실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자유란 결코 한 가지 방식에만 제한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실 때, 어떤 한 가지 방식만을 고집하시거나 집착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실 때, 나와 한 마디 상의함도 없이 단독으로 처리하실 수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나의 의지에 반(反)해서 일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와 상의하기도 하며, 내 생각을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일관성이 없으며, 변덕스럽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획일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격적이라 함은 가변적(可變的)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늘 열려있다는 말이지요.
기적의 요구. 예수님의 기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상의하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무소불위(無所不爲)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구할 뿐입니다. 그분께서 나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내 믿음이 그분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점 ‘요한’ 화자에게 있어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기적 이야기 중에서 적어도 여섯 개의 이야기 속에서 주님은 한 결 같이 “믿음의 시험”을 명시적(明示的)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컨대, “가나의 결혼”에서 포도주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여섯 개의 빈 항아리를 물로 채워야 가능했던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2:1-11).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아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믿음을 먼저 시험하십니다. 자기 집으로 와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아비의 요구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4:50). 믿고 가보라는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화자는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더라”(4:5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앉은뱅이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의지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요 5:6-8).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먼저 물으심으로써, 최소한 그의 의지를 시험하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어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믿음의 요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들의 믿음이 아니라 사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6).
이제 우리는 여섯 번째 기적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무슨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하실 것인가? 그분의 기이한 행동과 함께 주목해 봅시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6-7절). 이 무슨 뚱딴지같은 행동이며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적은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왜 그냥 그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하신 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 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 근처를 지나치실 때, 두 맹인이 길 가에 앉았다가 큰소리로 자비를 구하자 단순히 그들의 눈을 만지심으로써 볼 수 있도록 해주신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도 유명해서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참고. 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왜 그분은 이처럼 사람들의 분노와 미움을 자초(自招)하고 계신 것일까? 무슨 자학증(自虐症) 환자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적어도 이 소경에게는 믿음의 시험이었으며, 기적의 조건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결코 눈을 뜰 수 없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은 아닌 듯하니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그곳에 가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왜 그럴까? 왜 믿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느껴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한 번 ‘베팅’(betting)에 내 모든 것을 다 걸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지구상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 그토록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할까?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복음의 명령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잃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체면과 명예, 재산과 시간, 취미와 특기 등 말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도 같은 생각이었던 같습니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봅시다.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 5:10-12)
‘나아만’은 왜 화가 났을까? 왜 선지자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그의 요구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었으며, 그대로 따라 했다가는 내 자존심과 명예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나라의 대장군이 일개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처럼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일곱 번 씩이나 말입니다. ‘나아만’은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교인들의 면면을 보면 ‘나아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정말 힘들고 복잡한 것이었을까? 정말 창피스러운 것이었을까? ‘나아만’의 종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3-14)
맹목적 믿음. “맹목적(盲目的) 믿음”이라 함은 말 그대로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 소경의 믿음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는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은 것입니다. 눈이 멀었으니 보고, 따지고 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 이유, 그 처지가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절하).
그가 여전히 눈이 먼 채로 어떻게 ‘실로암’ 연못가로 걸어갈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의 손을 이끌어 데리고 갔는지, 아니면 맹인 특유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여 물어물어 찾아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그곳을 찾아갔는가가 아니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네 눈을 씻어라”는 그 말에 순종하여 눈이 먼 채로, 즉 맹목적으로 찾아갔다는 점입니다. 지성과 이성을 겸비한 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가 바로 이와 같은 맹목적 믿음일 것입니다.
눈언저리에 진흙을 잔뜩 붙이고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한 편으로 가련하고, 측은해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참으로 한심하고, 미련하며, 어리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주변의 이웃들, 종교인들, 그리고 사도들의 모습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바로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不滅의 神이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죄인으로 죽었다는 선언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 모두에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누가 믿게 될까?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는 자가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누구를 믿게 하십니까? 믿으려 하는 자를 믿게 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순환 논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믿음과 구원의 인과 관계에 대해서 더 이상의 나은 해답은 없을 듯합니다. 복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암의 능력. 화자가 본문에서 친절하게 주석을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실로암’(Silwavm)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는 <칠십인 역>에서 ‘히브리’어 ‘실로’(j'Lov)를 ‘그리스’어로 음역(音譯)한 것입니다. ‘요한’ 화자에게 예수는 “영적인 실로암” 즉 “보냄을 받은 자”(ajpostevllw, 아포스텔로스)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즉 그 맹인이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을 때, 시력을 회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이자 이미지입니다. 즉 그의 눈을 회복시켜 준 것은 ‘실로암’의 물이 아니라, “영적 실로암”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실로암’ 즉 ‘실로’라는 점은 ‘야곱’의 예언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hloyv)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예수님의 기이한 행동과 어처구니없는 요구는 결국 맹인의 믿음을 세우고 도와준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예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매일처럼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요구와 권면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내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나는 무슨 말씀을 들었으며, 무엇을 행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