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5): 어머니를 부탁해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25-27약 9분 분량
종교인들은 어버이날을 어떻게 지낼까? 모 일간지 신문 기자는 이것이 궁금했던지 성철 스님과 관련된 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연인 즉은 이러합니다. 성철 스님이 출가하고 4년쯤 지났을 무렵인 1940년대 초반 무렵,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夏安居)중일 때였습니다. 이곳에서 전체회의(대중공사라 부름)가 열렸습니다. 회의 안건은 “성철 스님 어머니 면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의 어머니가 아들 면회를 왔기 때문입니다. 장남이 말없이 출가(出家)한 후, 속을 태우던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이곳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不遠千里) 진주에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이를 알고도 내다보지도 않고 참선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동료 스님들이 보다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지요. 회의의 결론은 이랬습니다: “아무리 생사를 걸고 정진하는 수도승이기로서니, 어머니가 저 멀리 남쪽 끝 진주에서 이곳까지 찾아오셨으니 마냥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선방을 떠나야 한다.” 결국 성철 스님은 대중의 의견을 따라 어머니를 만났는데, 대뜸 “뭣 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느냐?”며 쏘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도 보통 단수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니 보러 온 거 아이다. 금강산 구경 왔지.” 덕택에 아들 손잡고 금강산 유람을 마친 성철 스님 어머니 왈, “보고 싶던 아들 손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 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 졌제.” 성철 스님은 이렇게 동료 스님들 덕분에 효도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에 관한 상식입니다. 즉 불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부모와 맺은 인연도 끊고 출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보자면, 기존의 가족을 버리고 새 가족(종교 공동체)의 인연을 맺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녀님이나 신부님들도 이점에서 있어서는 스님들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갑니다. 한 수녀님은 SNS에 딸을 수녀로 보낸 한 어머니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글의 제목은 “묵주기도를 잊어버렸다. 가르쳐주고 가거라”입니다. 그 어머니가 얼마나 딸이 보고 싶었으면, 묵주기도를 핑계로 이런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딸이 종교에 귀의(歸依)하여 어머니를 거의 만나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역시 새 가족을 위하여 이전의 가족 관계를 가볍게 여긴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그분은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셨을까?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두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그리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어린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부자 청년에서 거지 ‘나자로’에 이르기까지, 로마 백부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 이르기까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서 문둥병 환자에 이르기까지, 세리(稅吏)에서 ‘나인’ 성 과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사랑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만, 이들 두 사람과 예수님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19:26), 즉 이 복음서의 실제 저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참고. 21:20, 24). 대개 한 사람의 임종(臨終) 시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직계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머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아버지 ‘요셉’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부재(不在)가 오히려 우리의 주목을 끌 정도입니다. 도대체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 여인. 화자는 이 질문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대신에 그는 다른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십자가 곁에 함께 있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25절). 의심의 여지없이, 도합 네 명의 여인과 한 사람의 제자가 그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면에 대한 ‘요한’ 화자의 증언과 <공관복음>의 증언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공관복음> 사이에서도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누가복음>은 이들 여인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단순히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라고만 전하고 있습니다(눅 23:49상). 그것도 이들이 십자가 바로 곁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참. 눅 23:49하).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몇 명이나 있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멀리서 바라보던 여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고 합니다(막 15:40). 그러나 <마태복음>은 ‘살로메’에 대한 언급은 없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전합니다(마 27:56).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추측할 수 있는 바는, 당시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동행했던 여인들이 꽤나 많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참고. 마 27:55). 이들 중 일부는 ‘요한’ 화자의 전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곁에서, 그리고 나머지 여인들은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듯싶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 곁에 과연 몇 사람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훗날 이들 여인들이 누가 십자가에 더 가까이 있었는가를 놓고 경쟁하듯 서로 다투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신앙과 사랑은 자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다만 ‘요한’ 화자가 특별히 네 명의 여인들 이름을 거명하며 소개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이들 간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추측입니다. ‘마태’는 이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마 27:55). 사랑하지 않고서는 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두려움을 멀리 쫓아버린다고 합니다(참고. 요일 4:18). 이들 네 여인은 예수님을 진정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사회가 범죄자로 낙인찍은 사람을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 당국 즉 세상으로부터 단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로부터도 신성모독(神聖冒瀆)의 이단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한 자입니다. 이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아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그와 한 무리 행세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베드로’가 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바 있습니다. 자신은 결코 예수와 한 무리가 아니라고 세상을 향해 하소연하지 않았습니까! 흔히 사도 ‘베드로’를 가리켜 무모하고 단순하다고 합니다만, ‘갈릴리’ 촌뜨기 여인들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이 여인들은 무모했고, 단순했으며,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를 지켰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 누구나 듣기만 하여도 눈가에 눈물을 촉촉하게 적시게 만드는 단어, 우리의 가슴을 늘 죄책감으로 사로잡히게 하는 단어, 그 단어가 바로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그 어머니가 어찌 아들의 죽음을 그냥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대신 달려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들 곁에서 애통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세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화자는 오히려 침묵으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분명 목격자로서 최후의 장면을 지켜보았을 텐데, 자신이 듣고 보고 또 느낀 바를 극도로 자제하고 절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한 가지, 즉 자신을 제외한 목격자가 네 사람의 여인이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하필 네 여인인가? 또 다른 네 명의 남자 목격자와의 극적인 대조를 위함은 아니었을까? 다름 아닌 네 명의 로마 병사들 말입니다!
사실 화자는 직전에 이들 네 명의 로마 병사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네 명의 여인들의 심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들 네 명의 병사들이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죽어가는 한 죄인의 속옷을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이 무관심과 무신경의 극치를 말입니다! 누가 죽었으며, 그리고 왜 죽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분이 남긴 속옷이 관심사일 뿐입니다.
네 여인의 관심사도 그것이었을까? 그 옷의 주인이 아니라 그 속옷이었을까? 이 분의 유품을 가져가기 위해서 지금 이들 네 병사 곁에 모여 있는 것일까? 목격자이자 증인인 이 제자는 네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참고. 25절).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기막힌 대조입니다. 즉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고 제비뽑아 서로 가지려고 법석을 떨고 있을 때, 이 여인들은 그저 안타깝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기막힌 대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들의 관심사는 그 속옷이 아니라 그 옷 주인, 즉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아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새 가족. 로마 병사들의 행동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면(참고. 24절), 이들 다섯 사람 즉 예수님을 사랑했던 네 여인과,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한 제자의 행동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는 행동으로 규정함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예. 요일 4:18). 허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는 절정의 장면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의 하나로 꼽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참고. 26-27절).
예수님께서는 성철 스님의 “하안거”와는 비교도 안 될 고통과 시련을 겪는 와중에서도 죽기 전에 꼭 확인해 두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를 내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그분은 종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멀리하고 배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기존의 가족을 버리고 새 가족을 취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새 가족 안에 이전의 가족을 포함시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지금 그것을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새로운 가족 즉 교회는 태초의 소명, 즉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명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창 1:28).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해줄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