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 계명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34-35약 10분 분량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표지나 상징들을 사용합니다. 십자가로 된 목걸이를 하기도 하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 범퍼 뒤에 물고기 형상이나 기독교 방송국 주파수를 보여주는 스티커를 붙이거나, 거실 벽에 성화나 성구(聖句) 또는 십자가를 걸어두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음식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며, 교회에서 찬송과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가 교인임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 크게 부담스러워 하거나 거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가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의 제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끝까지 지니고 다니라고 주신 가장 중요한 표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 표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의 명령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4-35절).
이 명령은 하나의 조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순종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표지판을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요점은 그리스도인이면서 이러한 표지를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기독교인이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주 고약한 표지판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명령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우선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믿음의 가정이라고 했으니 한 가정 내에서 부모나 자식 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가족 또는 가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가정에는 남편과 아내가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그분의 신비한 섭리로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도록 계획되어 있었습니다(엡 1:4-5). 이 가정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울’은 힘주어 설교하고 있습니다(엡 5:21-6:4).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미워할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억압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교단이나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갈등이나 분열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불사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종교개혁 시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갈등이나 미움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갈등,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 개신교와 러시와 정교회 사이의 갈등,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은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한 교회 내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옷 로비 사건으로 국회 청문회에서 서로 비난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모두 한 교회, 한 선교회에서 동역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본인이 오래 전에 대학교 내에 침례교회를 개척했을 때, 가장 반대하고 핍박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침례교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지방회 가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인정하기 어렵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비종교인들을 상대로 향후 종교를 가질 의향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응답자의 70% 정도가 그럴 의향이 없다고 답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탈현대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고사하고, 짜증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갖가지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교회나 사찰의 행태의 결과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만일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다른 하나님의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이 오르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도 이 점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즉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할 말이 있다. 나의 권위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권리를 주겠는데, 어떤 사람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보이는 사랑을 토대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말인데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즉 다른 그리스도들을 사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거나 판단한다고 해서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주신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집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할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한 가지 주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주님에게 나아가 용서와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봅시다. 내가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자기합리화인가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세상은 우리를 위선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그 판단의 잣대를 자기 자신이 우리를 향해서 쓰신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그분의 자비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새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판단할 아무 근거나 이유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인 간의 사랑을 궁극적인 기독교 변증, 즉 복음 전도의 능력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복음의 주장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도 없고 거짓으로 판명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훼방꾼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정말 깜짝 놀랄 일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어떤 교리나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나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그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가만 가지고 복음을 판단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단들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서신>이나 <요한서신> 등을 읽어보면 그들을 멀리하라고까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들은 일단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켜도 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사실 이단들이 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지대합니다. 극단적인 신비주의나 현실 도피적인 종말론에서부터 극단적인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 소위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회악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본인이 사는 단지 내에 안식교회에 출석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고 인사성이 아주 밝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부부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들의 의도는 선하고 착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만, 과연 이들과 성경공부를 함께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식교의 교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 교단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옛 계명”은 이스라엘의 ‘쉐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쉐마’를 떠올리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즉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설령 이단에 속한 교인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와 견해를 달리하는 기독교인들이나 더 나아가 타 종교인들과 함께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은 물론이고 훌륭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오히려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며, 교조적인 종교인들이야말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며 긴장과 갈등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주범입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의 다음과 같은 충고는 기막힌 생활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본문에서 관심의 대상은 이단이나 믿지 않는 이웃이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가족들을 사랑해야 하는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한계를 정해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34절). 이 한계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 박사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책을 한 권 쓴 바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분이 참된 사랑에 대해서 정의내리기 전에,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서 여러 장에 걸쳐서 예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한 가지 특별히 본인의 마음이 끌렸던 구절이 있었는데, 사랑은 단순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펙’ 박사는 그것이 곧 사랑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느 술주정뱅이가 가족을 내팽개치고 늘 술에 저려 살면서 이튿날 술이 깨면 가족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가 그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펙’ 박사는 사랑은 “의지적인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아무런 감정이나 느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으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매 순간 선택해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느낌이나 감정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제가 저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그 달콤한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27년이 지난 지금 그 감정이나 기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황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나는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서 다른 여자가 아닌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건강할 때나, 아파 병원에 누었을 때나, 수술로 몸이 찢어져 있을 때나, 늘 동일한 선택을 합니다.
영화 <Love Story>에서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 그의 사랑하는 남자 친구에게,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을 때 용서하고 싶은 감정이나 느낌이 전혀 없음에도, 나는 미움보다는 용서를 의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쉐퍼’ 박사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쉬운 시작입니까!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