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들과 아버지
김태정 목사약 11분 분량
(31-39절)
매년 벽두가 되면 대통령은 신년교서(新年敎書)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한 해의 시정 목표와 포부를 밝히는 자리입니다. 당연히 교서의 내용과 분위기는 희망과 긍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현실이 녹녹치 않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야당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야당 대변인은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반박하고 비평하며 흠집을 냅니다. 그렇게 되면 교서의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내용까지 희석(稀釋)되어버립니다. 처음에 교서의 내용에 상당히 고무되었던 사람들조차 그 기분이 반감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어느 정당이 집권을 하건 매년 반복되는 현상이며,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닙니다. 소위 정치와 정치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이지요.
목사의 설교도 대통령의 연두교서와 같은 처지에 빠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설교가 끝나고 난 뒤 설교의 내용을 놓고 이런 저런 신학적 평가를 하면서 설교에 흠집을 가하기 시작하면, 감동적으로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조차 그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받게 되는 느낌도 이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강의나 기적을 목격하고 믿고 따랐습니다만, 또 한편으로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 시비나 트집을 잡아 그분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 하는 무리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들을 ‘유대’인으로 통칭하고 있습니다만, 주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이들의 반응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흠집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잡아죽이려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31절).
정치적 올바름. 도대체 이들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가 노련한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ednes)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민한 주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자제하고 회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그는 동성연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서는 안 될 것이며,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드러내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특정 집단이나 단체를 선호하는 발언을 해서도 안 됩니다. 적어도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좋고(好) 싫음(不好)이 분명한 사람은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설교자의 설교는 어떻습니까? 다음과 같은 설교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고로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든 그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는 만세 전부터 우리에게 복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우리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또한 상처받은 데는 없습니까? 괴로움을 받지나 않았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에게 나아오십시오. 그가 당신을 성공과 기쁨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이스라엘의 ‘시드기야’ 왕 시절에 제사장 ‘바스홀’이 하던 설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의 설교에 상처를 받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백성은 오히려 위로와 안식을 느꼈으며, 현실에 더욱 만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바스홀’은 체질적으로 이 같은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직업이 제사장이 아닙니까! 제사장의 최대 관심사는 현상유지와 체제 보존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혁명과 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이 내세(來世)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모습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만일 목사가 교회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며,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한 사람의 성도도 빠져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바스홀’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절 선지자 ‘예레미야’는 정반대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화평이 아니라 협박과 공포로 일관했습니다.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렘 20:4-6)
‘예레미야’는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말했고,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이야기했습니다. 현상 유지가 아니라 영적 혁명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살던 방식대로 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연히 아무도 그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는 제사장 ‘바스홀’에게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통재라, 하나님의 종(從)이 하나님의 종에게 이처럼 무참히 얻어맞을 수 있다니!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스홀’이 기대했던 대로가 아니라, ‘예레미야’가 예고했던 대로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결국 ‘바스홀’의 설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 것이지요. 당장에는 달콤했습니다만, 나중에는 해가 되고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배척당하고 있는 모습 또한 그분의 말도 안 되는 설교 때문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절). 이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설교입니다. 익히 알다시피 “요한 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즉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는 <요한복음>만큼 더 좋은 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막에서부터 이 주제에 대한 선언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또 들어왔습니다.
혹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개인이나 집단과 이에 관한 논쟁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요한복음>의 서막에서부터 깊이 묵상하며, 중요한 구절들을 암송하려고 애써야 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해 왔으며, 지금까지 내가 암송할 수 있는 구절들은 과연 몇 개나 되며, 이들을 상호 연결시키면서 상대를 압도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물쭈물 하다가 압도를 당하는 편입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여기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 선언만큼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 잘 드러내는 선언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과연 여기서 그분은 자신이 곧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
하지만 관점에 따라 ‘유대’인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과민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선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선포가 아니라, “뜻과 의지”에 있어서 하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부부가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할 때 두 사람의 생각이나 뜻이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듯이 말입니다.
특히 이 선언이 나온 배경을 보면 더욱 이와 같은 이해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께서는 지금 양(羊)들의 영원한 안전, 즉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29절).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신자들을 향한 계획에는 아들이나 아버지의 뜻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발언으로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선언을 들은 적이 있었으며, 그 때에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7-18).
결국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선언은 아들과 아버지는 “본질에 있어 하나”(one in substance)라는 선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능력이나 영광”에 있어 동등하다는 선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흉금(胸襟)이자 본심(本心)입니다. 아들을 아버지의 “독생자”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1:14). 본인이 “독생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도 이 구절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였습니다.
기적의 증거. 하지만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것과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항상 같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하는 자들의 반응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막무가내로 내뱉고 있는 이 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이전에 비해서 사뭇 다르다는 생각입니다(참고. 8:58-59). 충돌이나 논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먼저 따져 묻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절).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그야말로 정곡(正鵠)을 찌르는 것으로서, 아주 강력한 논거(論據)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자신에 관한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의 진위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그의 말이나 생각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고 합니다. 누군가를 입학이나 입사시키려할 때, 면접관은 지원자가 직접 작성한 본인 소개서가 아니라 타인이 써준 추천서를 더 신뢰합니다. 노상에서 강도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무관심한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이교도였습니다. 그 사람만이 적절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선한 사마리아 인”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점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행한 기적으로 나를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한 그 모든 기적들이 그분의 말을 지지(支持)하고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대자들은 그분의 기적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33절상).
그들은 지금 예수께서 행한 기적들이 과연 그분의 말을 지지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문제는 그냥 생략하고 넘어가자고 말합니다. 오직 관심이 있다면 어떻게 이 자를 없애는가 하는 것인데, 그의 말을 문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예수님 사후(死後)에 ‘유대’ 공회가 사도(使徒)들을 대하던 것과 같습니다(참고. 행 4:13-20).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날에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이신 행적에 대해서는 경이로움과 존경으로 대합니다. 그분을 인류의 성인(聖人)으로, 스승으로 떠받들고 모시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그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런 저런 기대나 요구 사항이 많으면서도,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에 사는 한 분은 나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목사이면서도 한 번도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경은 하나 믿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이와 같은 지라,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 논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뭐라, 내 행적이 아니라 내 설교가 문제라고? 과연 내 말에 문제가 있는지 한 번 따져봐?”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34-36절).
사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두 번째 논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몰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오지는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의 요지인 즉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언하는 선지자들이나 사사들을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나야말로 아들의 칭호를 받기에 얼마나 더 합당한가!”
더 무슨 말로 논쟁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입니다. 속으로 예수를 잡아 죽일 적개심만 불태우는 것 외는 말입니다(39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매끄럽지 못한, 단도직입적인 그분의 태도와 설교가 죽도록 미웠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는? 우리는 서로를 향한 제사장이면서, 이 시대를 향한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목적은 길 잃고 헤매는 성도나, 하나님 모르고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행 2:37; 30)?
그래서 나와 교회의 존재는 큰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에게요? 위정자들, 세금 떼어먹는 자들, 비 오는 날 몰래 오염물질 내다버리는 악덕기업주, 미성년자들에게 술 담배 파는 비양심적인 상인, 남의 시험지 베끼는 학생들, 남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정품이 아닌 복사판을 사용하는 사람, 영화 불법으로 다운 받아 보는 사람들, 일요일만 교인인 사람들, 낙태로 돈 버는 의사들, 동성애자들, 악덕 변호사들, 부패 공무원들, 다수에 편승하여 한 사람을 “왕따”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야비하고 비겁한 족속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적이고도,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인적(全人的)이고도, 사회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도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시험 삼아 ‘리트머스’ 시험을 한 번 해봅시다. 아래 세 가지 평가 항목 중에 내게 해당되는 것에 o 표시를 하면 됩니다.
(1) 아무도 내가 그리스도인인 줄 모른다. 그래서 나 때문에 논쟁이고 뭐고 있을 이유가 없다( )
(2)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교회에 출석하는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며 모든 사람의 친구로서, 아무도 내가 가진 믿음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다( )
(3) 가는 곳마다 예수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다소 꺼려하는 편이다( )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