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8과
이집트 방문(3)
김태정 목사창세기 46:1-47:31약 121분 분량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3)
이야기의 구성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셉’ 형제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절정이라고 한다면, 이곳 여덟 번째 에피소드는 오히려 반(反) 절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본문은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야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노예의 땅이자 “출애굽”의 땅이 될 ‘이집트’로 “반 출애굽”을 단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함께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야곱’의 결정은 올바른 것이었을까? 그의 결정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사백년 후에 빠져 나올 그 땅을 왜 들어가고 있을까?” 화자는 이 문제를 어느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해서 결정적인 답변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즉 화자는 이 여행이 ‘야곱’ 개인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환상(幻想) 즉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이야기 벽두에서부터 밝혀놓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야곱’에게 환상의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요셉 이야기> 전체적으로 처음이자, <창세기>에서는 마지막인 셈입니다. 계시의 형식은 일종의 구원 신탁(神託)으로서,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그에게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3절).
이와 같은 신탁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연상시켜주는 것으로서, 이제 ‘야곱’을 통해서 성취하실 것입니다: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3-4절). 이 약속의 마지막 부분은 특히 이번 세 번째 여행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이번 여행이 한시적인 것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종착지는 ‘가나안’이지 ‘이집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신탁을 받은 ‘야곱’의 지금 모습은 <구약>의 다른 선지자와 어깨를 겨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절 그의 모습과도 전혀 딴 판입니다. 예컨대, 형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축복을 빼앗아내던 시절이나, ‘얍복’ 강에서 천사와 싸워 그의 인정을 받아내던 당시의 ‘야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식들이 전해주고 있는 복음의 소식, 그리고 그 복음을 확증이라도 해주듯 ‘이집트’ 왕이 보내온 엄청난 선물들을 보고서야 ‘이집트’로 내려가겠다는 결심을 굳힙니다만, 여전히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의 마음과 육체는 심히 떨리고 연약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그 많은 약속들은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진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6, 8).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먼 미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집트’로 따라 내려간 그의 자손의 수가 칠십 명(이는 완전수이자 거룩한 숫자 아닙니까!)에 이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12:2; 46:3). 이들 칠십 명의 이름들은 훗날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주요 족장이나 부족들로서, <창세기>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될 첫 번째 세대가 될 자들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이들 이름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초점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 첫 장면이 아들 ‘요셉’과의 감격적인 재회입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야곱’은 마치 꿈을 꾸듯, 환상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장면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마침내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하염없이 울고 또 웁니다. 살아있는 아들의 모습,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야곱’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죽음에 관한 그의 태도마저 바꾸어 놓아버렸습니다. 이전에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 그가 외쳐대던 절규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음부로 내려가게 하는도다”(참고. 37:35; 42:38).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 죽음마저 이제는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46:30하). ‘요셉’의 부활로 ‘야곱’은 이제 죽음마저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요셉’보다 더 큰 ‘요셉’, 즉 그리스도의 부활로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벧전 1:3; 빌 1:21-26).
‘야곱’에게 있어서야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만, ‘요셉’은 다릅니다. 지금 그는 다른 문제를 걱정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부모를 포함한 대가족을 ‘이집트’로 이주시켜 아무 걱정 없이 살게 해줄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가족이 한꺼번에 외국에서 몰려들 때, 이를 바라보는 ‘이집트’인들의 심사가 결코 편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제들을 불러 왕을 대면하러 갈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은 그저 목축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이집트’에 무슨 직업이나 양식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가축을 먹일 방목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46:31-34).
‘요셉’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형제들의 말에 안심을 했음인지 이들에게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방목지 즉 ‘고센’에 있는 땅에 살도록 허용을 해줍니다(47:1-6). 그 뿐 아니라 형제들 중 일부로 하여금 왕궁 소유의 가축을 관리하도록 임명하기도 합니다. 이 대목에서 화자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고 있지는 않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임에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요셉’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덕분인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39:3, 21, 23).
이어지는 장면은 왕이 ‘야곱’을 접견하는 자리입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실은 ‘야곱’이 왕을 접견하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는 ‘요셉’의 부축을 받아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축복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47:7). 왕은 정중하게 ‘야곱’의 나이를 물어봅니다. ‘야곱’은 이미 130 살이 되었으며, 아들 ‘요셉’이 그 나라 최고의 지위에 올라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세월동안 아주 험악한 시간”을 보냈다고 대답합니다.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만, 사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법도 합니다. 인생은 무엇이며, 성공은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월 동안 그가 경험한 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부모와의 생이별, 불행한 결혼 생활, 그리고 최근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의 이별, 등등 결코 순탄하지만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예언자이자 선지자입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바로’ 왕을 축복하고 왕궁을 떠납니다(47:7-10).
왕이 ‘야곱’에게 베풀어준 호의(好意)(47:11-12)는 왕 자신은 물론 그의 백성들에게 그대로 되돌아 올 것인즉, 이에 대해서는 ‘이삭’이 일찍이 예언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펼치고 있는 구호정책이 그것입니다. 물론 현대 독자들의 눈에 비친 그의 구호정책이란 것이 백성을 향한 선정(善政)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착취(搾取)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돈이나 땅과 가축 심지어 자유마저 팔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선한 통치자가 아니라 아주 간교한 악덕 사채업자나 다름없습니다. 백성의 어려움을 최대한 이용하여 왕실의 배를 채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의 관습이나 법에 따르면, 부자가 가난한 자를 그냥 구제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하다면 가난한 자의 친척이 그를 돕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친척의 땅을 사주고 그를 하인이나 종으로 삼음으로써 도와주도록 하고 있습니다(레 25:13-55). <구약>에서 이러한 행위를 자비라 부릅니다. ‘이집트’ 백성이 ‘요셉’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47:25). 따라서 우리가 ‘요셉’의 행위를 평가할 때 이러한 맥락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가 자신의 몸이나 땅을 부유한 친척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노예가 된 자도 희년이 되면 자유인이 되고 그 땅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바로 이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땅을 자신의 것으로 영구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다릅니다. 그는 ‘이집트’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하였고, ‘바로’의 꿈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충실하게 수행한 것뿐입니다(42:36). 그러니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은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것입니다(참고. 28:14; 12:8; 18:18; 22:18; 26:4).
‘야곱’의 여행이 그의 개인적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것이니만치, 화자는 이야기의 말미에 다시 한 번 반복 강조하고 있는 바, 이번 여행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위로 돌리게 될 것이 아니라, 실현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번창하게 될 것이었습니다(17:6; 28:3; 35:11). ‘아브라함’이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그가 죽기 전에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문제에 집착했던 것처럼(24:1-9), ‘야곱’ 역시 임종 시에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집트’가 아닌 약속의 땅에 묻어주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 즉 “내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46:4).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그토록 온갖 계책과 술수로 평생을 일관하던 ‘야곱’이 이제 임종을 맞아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46-47장)은 ‘야곱’과 그의 온 가족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 두 방문이 양식을 구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문이었다면, 이번 방문은 그곳에 오랜 기간 동안 정착하기 위한 방문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방문은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내용 상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대신에 ‘요셉’이 ‘야곱’의 유골을 묻기 위하여 훗날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당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집트’ 방문 기록에서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야곱’으로 하여금 ‘이집트’로 가라고 독려하는 환상(46:2-4)
(2) ‘야곱’과 함께 여행에 동참하는 그의 온 가족의 명단(46:8-27)
(3) ‘이집트’를 엄습한 대 기근의 결과(47:13-26)
이들 새로운 내용은 이번 방문이 얼마나 중요한 여행이 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이라 해서 이전의 에피소드들과 유사한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세 번의 방문 모두 ‘야곱’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42:1-2; 43:1-14; 46:1), 각 에피소드는 ‘요셉’과 그의 가족이 만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42:6-24; 43:26-45:15; 46:28-47:12), ‘야곱’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42:38; 45:28; 47:29-31).
본문의 단락 구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Wenham의 견해를 따랐습니다(도표 참고). 도표에서 보듯이 본문의 구조 역시 느슨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선 처음과 마지막 단락은 언약과 그 성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려워 말라”(46:3; 참고. 15:1; 21:17; 26:24; 35:17)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 참고. 12:2; 17:6, 20; 18:18; 21:13, 18)
(3)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참고. 28:15, 20; 31:3)
(4) “나는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참고. 26:24; 28:13; 32:10)
(5) “내가 다시 너를 불러내리라”(46:4; 참고. 15:14; 12:1, 7; 13:15)
(6)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참고. 35:11; 16:16, 20; 28:3)
(7) “내가 내 열조와 함께 누우리라”(참고. 23:1-20; 25:8-1035:29)
두 번째와 여섯 번째 단락은 모두 길고, 그 내용에 있어서 이야기의 주된 흐름에서 다소 이탈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야곱’의 자손들의 목록이라든지(46:8-25) ‘요셉’의 활동에 관한 서술 (47:13-26) 등이 그러합니다.
이어서 세 번째와 다섯 번째 단락은 ‘야곱’이 ‘요셉’과 ‘바로’ 왕을 만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짝을 이룬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단락은 구조의 중심축으로서, ‘바로’ 왕이 ‘야곱’의 자식들로 하여금 그 땅의 가장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지나간 이야기들에 대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첫 단락은 ‘요셉’이 그의 애비로 하여금 ‘이집트’로 내려오도록 초청했던 사실과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특히 5-7절에서 ‘야곱’의 ‘이집트’ 여행과 관련해서 동원하고 있는 표현이나 묘사는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그리고 있는 이주(移住)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참고. 12:5; 31:18; 36: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12:5); “그 모은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 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31:18);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36:6).
또한 이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야곱’의 자식들이나 아내들의 이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도 <창세기>의 이전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익히 숙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29:31-30:24; 34:1-31; 35:16-21; 41:45, 50-52). 더 나아가 ‘요셉’의 신변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라든지, ‘바로’ 왕과의 관계라든지, 또는 그가 기근에 대처하는 방식(46:29-47:26) 등을 볼 때에도 그가 이전에 왕의 꿈을 해몽해주던 장면이나 왕이 그를 최고 감독자로 임명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41:15-57). 결론적으로 본문은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면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전체 이야기의 구성이나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본문은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 진영은 본문 내에 존재하는 자료의 특성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야곱’ 자손의 목록(46:6-27)이나 시간이나 연수에 관한 언급(47:27-28) 등은 전통적인 “사제 자료”에 속한다고 하겠는데, 주지하다시피 “사제자료”의 관심사는 족보나 연대기 등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왕과 대면하는 장면(47:7-11) 역시 “사제 자료”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그 이유는 그 내용이 이미 앞에서 ‘요셉’이 왕에게 소개했던 사제적 내용(47:1-6)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환상(46:1-5)에 관한 내용은 자연스럽게 “엘로힘 자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 즉, 이곳에서 ‘야곱’이나 ‘야훼’ 하나님 대신에 “엘로힘 자료” 특유의 문학적 상수(常數)인 ‘이스라엘’이나 ‘엘로힘’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언급은 “엘로힘 자료”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한 “꿈”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대체적으로 “야훼 자료”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예: 46:28-47:6, 12-26, 29-31). 그리고 본문의 최종 편집도 “야훼 저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요셉 이야기>는 세 번의 “이집트 여행”을 다루고 있으며, 이중 본문은 마지막이자 절정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체의 여행의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종 편집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결론적인 강조를 위해서 일견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 반복적인 내용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현현에 관한 언급이라든지(46:1-5), 열두 지파의 목록(46:6-26)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편집 방식은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보는 바처럼, “야훼 자료”의 전형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야곱’의 임종에 관한 언급(47:29-31)은 “야훼 자료” 특유의 서술로서, 이어지는 이야기 즉 48-50장에 대한 서곡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도입 부분, 즉 하나님의 현현에 관한 언급(46:1-5)도 <창세기>에서 “야훼 자료”의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는 다른 현현에 관한 서술들(12:1-3; 15:13-16; 26:23-25; 31:11-18)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 내에서 자료의 최종 편집은 “야훼 저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는 족보 등과 같은 “사제 자료”들을 함께 포함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현현(46:1-4)
첫 장면은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중에 그가 본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걸맞게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문학적 상수들(용어나 표현 등)도 <구약>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내용들도 추가되고 있습니다(추후 설명 참고).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1-4절)
‘야곱’의 이번 여행은 옛날 ‘아브라함’이 고향 ‘우르’를 떠났던 그 여행이나(12:1-3), 형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떠나던 그 사건(28:1-22), 또는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던 그 사건(31:3-54)만큼이나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 경우마다 하나님의 현현이 그 여행을 가능하게 했고 촉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번 현현의 장소는 ‘이삭’의 거처 ‘브엘세바’입니다(참고. 26:23-25). 따라서 이번 현현을 대하면서 이전의 그 모든 현현 사건들이 연상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 역시 ‘야곱’에게 하나님의 현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으며, 특히 그가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인이 없이 그 땅을 떠난다는 것은 곧 불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의 현현은 단순히 ‘야곱’의 인생에 있어 단순히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만이 아닙니다. <족장 이야기> 전체적으로 이번의 현현은 이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다음 번 현현은 ‘모세’ 시대에 이르러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현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절정을 맞고 있으며, 이전의 그 모든 극적인 현현 사건으로부터 일련의 모티브들을 이끌어내고 있음을 봅니다(예, 15:1-21; 17:1-12; 22:1-18).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그동안 그가 들었던 그 모든 약속들과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그 모든 약속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과 관련해서 화자는 ‘야곱’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도 ‘이집트’ 여행과 관련해서 화자가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참고. 42:5). 그의 출발지는 그가 살던 ‘헤브론’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37:14), 그가 희생제사를 드렸던 ‘브엘세바’는 ‘헤브론’ 남쪽 40 여 킬로미터 지점으로서, 그 땅의 실질적인 남쪽 경계를 지칭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24:2).
이곳에서부터 ‘이집트’에 이르기까지는 초목이 거의 없는 사막이 펼쳐진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도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31:54). 이제 사막을 건너야 하는 본격적인 여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필요로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족장들이 제단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2:7, 8; 13:18; 22:9; 26:25; 33:20; 35:1, 3, 7).
제사와 관련해서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일반적인 제사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만, 좁게는 “화목제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레 3장), 이는 대개 서원이나 또는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는 이 두 가지 동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희생제사는 간혹 신탁(神託)이나 예언의 전조(前兆) 내지는 예비적 단계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민 23:1, 14, 29; 시 50:5; 사 6:6).
아닌 게 아니라 그날 밤에 하나님의 현현이 임합니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문학적 상수들은 ‘야곱’을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야곱아”;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 한 밤중에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장면이 그것입니다(15, 18장). 또한 ‘야곱’을 두 번씩이나 다급하게 부르는 대목도 <아브라함 이야기>의 절정, 즉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황급하게 두 번씩 부르던 장면과 중첩(重疊)되고 있습니다(22:11). ‘아브라함’ 역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반응했으며, ‘사무엘’도(삼상 3:4-10), ‘모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출 3:4).
하나님의 현현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엘, la)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엘로힘, !yhiOla)이니.” 이 표현은 <야곱 이야기>에서는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28:13; 31:5, 29, 42, 53; 32:10), 지나간 순간들을 회고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만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출애굽 이야기>를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모세’가 현현을 체험하는 순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구원의 신탁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외에 또 하나의 친숙한 표현은, “두려워 말라”입니다(예. 사 7:4).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나(15:1) <이삭 이야기>에서(26:24) 모두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인데, ‘야곱’은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리(12:10-13), ‘이집트’로 내려가는 문제를 놓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아들의 초청을 받아 놓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그는 환상을 보기 전에 이미 ‘이집트’를 향하여 출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집트’로 내려가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던 것은 방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자식을 보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 발생하는 일견 모순되고 상충되어 보이는 현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고민과 혼란스러움을 아시는지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을 떠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고, “큰 민족과 나라”에 대한 언약은 ‘이집트’에서도 계속 이루어질 것임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3절하). 후손에 관한 이 약속은 세 가지 “아브라함 언약” 중의 하나로서 후손에 관한 약속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참고. 12:2; 17:20; 18:18; 21:18). 다만 이전의 약속에 비해 새로운 점이 있다면, 나라와 후손에 관한 약속이 “그 땅”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는 다짐도 족장 언약에서 또 다른 친숙한 주제, 즉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참고. 26:24; 28:15, 20; 31:3, 5, 42; 39:2-3, 21, 23). 이 동일한 약속은 훗날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 번 들려줄 것입니다(출 3:12; 수 1:5).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다짐, “내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는 앞선 다짐에 대한 강조 내지는 확약이 담긴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야곱’이 ‘가나안’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15:13-16에서 보았던 것처럼, “출애굽”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 다짐의 말씀은 다시 한 번 과거의 언약을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출애굽”을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출 3:8, 17).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독특하게 새롭게 선보이는 하나님의 현현은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절)는 예언입니다. 이 약속은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현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새로운 대목입니다. 이 약속은 ‘야곱’이 ‘요셉’이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서, 늙고 쇠약한 ‘야곱’으로서는 아마 가장 듣고 싶어 했던 약속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집트 여행(46:5-27)
여행. 두 번째 장면은 상대적으로 깁니다. 이는 ‘이집트’를 향한 ‘야곱’의 여행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장면 대부분은 ‘야곱’의 후손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만, 첫 세절의 설명은 여행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5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5-7절)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부 용어들은 <대홍수 이야기>에서도 사용한 바 있어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1) “들어가다”//“들이다”(a/B, 보)(6-7절; 6:18-20)
(2) “후손들”//“씨”([r'z, 제라)(6-7절; 7:3)
한편 6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즉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여행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표현과 아주 유사합니다(참고. 12:5; 31:18; 36:6). 이와 같은 병행관계 내지는 대응 관계를 통해서 이들 이야기들이 신학적으로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은 마치 ‘노아’가 홍수를 피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든지,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라든지, ‘야곱’ 자신이 ‘가나안’으로 이사한 것, 또는 ‘에서’가 ‘에돔’에 거주하며 지냈다든지 하는 등등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야곱’에게 보낸 “수레”(5절)는 앞에서 ‘바로’ 왕이 일찍이 ‘요셉’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한 것으로서, 그는 이것을 ‘야곱’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45:19, 21; 45:27).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두 번씩 언급하고 있는 “자손”(6-7절)은 <족장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칠십 명의 자손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셨으며, 훗날 먼 미래에 이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시킬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3-4절).
여행자들. 두 번째 장면의 나머지 부분은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칠십 명의 자손들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은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출 1:5; 신 10:22). <성경>에서 숫자 “칠십”은 때때로 큰 무리나 가족을 나타내기 위한 완전수로 사용하고 있기도 한데(참고. 출 24:1, 9; 삿 8:30; 12:14), <창세기> 10장에서도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이 칠십 개의 나라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족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록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목록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처럼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따라서 목록에 나타나고 있는 이름들은 이스라엘 부족이나 지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이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Wenham). 그렇게 보는 데에는 각 이름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의미에 따라 크게 세 무리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아마 자식이 태어날 때 부모가 지어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세 무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짐승의 이름; (2)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이름; (3) 하나님이나 그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이름. 그리고 이 목록이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은 이들 이름 속에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 대신에 ‘엘’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사기>와 같은 오래 된 책에서도 나란히 이 목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 이름은 ‘야곱’의 자손 개개인의 이름으로 보이며, 이중 33 명은 ‘레아’로부터, 16 명은 ‘실바’에게서, 열네 명은 ‘라헬’로부터, 그리고 일곱 명은 ‘빌하’에게서 난 자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최종 편집자는 이들 이름이 정확하게 ‘이집트’로 이주해 온 ‘야곱’의 자손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지했을 것인데, ‘엘’과 ‘오난’(14절) 등은 ‘가나안’에서 이미 죽었으며(38:7, 9), ‘요셉’의 아이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났음을(41:50-52)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후대 독자들을 위함인지 목록 중간 중간에 이에 관한 사실을 주석으로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12, 20, 26-27절). 이렇게 볼 때,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자손은 도합 66 명이었습니다(26절). 그러나 만일 ‘디나’를 그 무리 속에 포함시키고(15절), ‘요셉’의 ‘이집트’ 여행을 ‘야곱’의 여행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면, 전체적으로 70 명이 ‘야곱’과 함께 ‘이집트’를 방문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27절).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목록에 등장하고 있는 각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개괄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목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역시 ‘야곱’의 장자와 그의 아들들입니다.
8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8-9절)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며(29:32; 30:14; 35:22-23), 흥미롭게도 ‘야곱’의 장손(長孫)과 ‘아담’의 장손이 동일한 이름 ‘에녹’을 지니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둘째 아들 ‘발루’(aWLP)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스론’은 ‘유다’의 손자의 이름이기도 한데(46:12), 그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갈미’는 ‘아간’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한데, “포도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원래 어떤 장소 또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약어(略語)로 추측하기도 합니다(참고. 사 5:7).
둘째 아들 ‘시므온’의 자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10절)
‘시므온’의 장자 ‘여무엘’(laeWmy)의 의미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날”로 이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야민’(@ymiy)은 “행운” 또는 “오른 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핫’(dh'a)의 의미 역시 분명치 않은데, 그의 이름이 <민수기>(26:12)나 <역대기>(대상 4:24)와 같은 병행 목록에는 빠져있어, 그가 일찍 죽었거나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야긴’(@ykiy)은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참고: ‘여호야긴’(왕하 24:6); ‘야긴’과 ‘보아스’(왕상 7:21).
‘스할’(rj'x)은 색깔과 관련된 단어로서 아마 “흰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울’(lWav)은 이곳 외에도 37-38절에서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또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아들 ‘레위’의 세 아들은 11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11절)
그의 첫 아들 ‘게르손’(@/vr]G)은 “종”(鍾) 또는 “거기 나그네가 됨” 등의 의미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핫’(th;q)은 ‘우가릿’어 ‘아카드’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만, 역시 그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혹자는 “집회” 또는 “순종”을 의미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므라리’(yrir;m)는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단어가 ‘마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면 “쓴”, “쓰라림” 등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의 다섯 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12절)
이들 다섯 아들 즉 ‘엘’과 ‘오난’, ‘셀라’, ‘베레스’, 그리고 ‘세라’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29:35; 38:3-4, 29-30; 46:9). ‘베레스’의 두 번째 아들 ‘하물’(lWmj)은 “남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레아’가 직접 낳은 다섯 번째 아들은 ‘잇사갈’입니다(30:18). 물론 ‘잇사갈’의 출생 이전에 ‘레아’와 ‘라헬’의 두 여종으로부터 다른 자식들이 먼저 태어났습니다만, 화자는 이들보다 ‘레아’의 자식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13절)
‘돌라’([l;/T)는 “벌레” 또는 “진홍색” 등을 의미하는데, 후자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에 유래에 대해서는 이 족속이 후에 염료 사업에 종사하게 된 것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부와’(ha;WP)는 “염료 식물”의 일종으로서, 이 역시 이 족속이 염료 무역에 종사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욥’(b/y)은 ‘야숩’ 즉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다”의 약어로서, “또 다른 자식을 허락하다”는 의미입니다. ‘시므론’(@/rm]v)은 어떤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며, “파수” 또는 “감시”를 뜻하는 ‘사마리아’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은 ‘스불론’(@WlWbz)이며, 그의 세 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14절)
‘세렛’(dr<s)은 “두려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분명치 않으며, ‘엘론’(@/lya)은 “상수리나무”를 의미합니다. ‘얄르엘’(lael]j]y)은 “하나님을 기다림” 또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다음은 ‘레아’가 낳은 여섯 아들과 그 후손 33명에 관한 요약입니다.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15절)
‘레아’의 딸 ‘디나’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디나’는 이곳 외에도 30:21에서 등장한 바 있는데, 그를 이곳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34장에서 ‘디나’ 이야기를 다룬 바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은 ‘가나안’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목록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유다’의 손자 ‘헤스론’과 ‘하물’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이들 역시 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목록(16-18절)은 ‘레아’의 몸종 ‘실바’에게서 난 자손 열여섯 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자손은 각기 자신들의 몸종 ‘실바’와 ‘빌하’가 낳은 자손들보다 그 수에 있어 두 배에 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레아’의 자손의 수가 33명(15절)인데 그녀의 몸종 ‘실바’의 자손은 16 명(18절)이며, ‘라헬’의 자손이 14명인데 ‘빌하’의 자손은 7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바’의 첫 번째 아들은 ‘갓’으로서(참고 30:11), 그로부터 7 명의 자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16절)
‘갓’의 첫 아들의 이름은 ‘시뵨’(@/yp]x)으로서, “지켜본다”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나 분명치 않습니다. ‘학기’(yGij)는 “(하나님의) 축제”의 준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축제의 절기에 낳은 아들은 특별히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수니’(ynIWv) 역시 “운 좋은 날”, “기분 좋은 날”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분명치 않습니다. ‘에스본’(@/Bx]a)은 ‘아랍’어 ‘아사바’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용맹스럽다”, “노동하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리’(yri[)는 “주의 깊은”, “조심스러운”을 의미합니다. ‘아로디’와 ‘아렐리’는 모두 그 의미가 분명치 않습니다.
‘실바’의 둘째 아들은 ‘아셀’(30:13)로부터도 7명의 자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17절)
‘임나’(hn:m]y)는 “큰 행운” 또는 “하나님의 분깃” 등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스와’(hw:v]y)와 ‘이스위’(ywIv]y)는 서로 번갈아 사용되던 이름 같은데,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닮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브리아’(h[;yrIB)는 “탁월하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세라’(jr'c)는 ‘엘세라’의 준말로서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으며, “번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벨’(rb,j)은 “친구” 또는 “동무”를 뜻하며, ‘말기엘’(laeyKil])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의미입니다.
‘실바’의 자손은 이처럼 도합 16 명으로서, ‘레아’의 자손 33 명의 절반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18절)
세 번째 목록(19-22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라헬’의 후손들로서 ‘요셉’과 ‘베냐민’ 및 그들의 자손들입니다.
19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롯이니, 22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19-22절)
‘라헬’로부터 ‘요셉’과 ‘베냐민’이 탄생한 이야기와 ‘요셉’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30:24; 35:18; 41:50-52).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면, ‘베냐민’이 ‘이집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매우 어린 나이였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이 때 이미 열 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목록은 원래 다른 목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화자는 이를 이곳에 포함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합니다.
‘벨라’([l'B)는 “어린 낙타”를 의미하고, ‘아스벨’(lBev]a)의 의미는 분명치 않으나, 혹자는 “긴 윗 입술”을 의미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게라’(ar;G)는 “신의 기념품”에 대한 약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아만’(@m;[}n)은 문자적으로는 “즐거움”을 의미하는데, 이 역시 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히’(yjIIa)는 ‘아히’ 또는 ‘아히람’의 약자로서 역시 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스’(var)와 ‘뭅빔’(!yPim)에 대해서는 본문 파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훕빔’(!yPij)은 그 의미가 불분명하며, ‘아롯’(D]r]a)은 “곱사”를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역시 분명치 않습니다.
이어서 ‘라헬’의 몸종 ‘빌하’의 후손들로서 도합 일곱 명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3단의 아들 후심이요 24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서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명이라(23-25절)
‘단’과 ‘납달리’는 30 장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참고. 30:6, 8). ‘후심’(!yviWj)의 의미는 명확치 않습니다. ‘야스엘’(laex]j]y)은 “하나님이 그에게 분깃을 허락하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니’(ynIWG)는 “메추라기” 등과 같은 날짐승을 뜻합니다. ‘예셀’(rx,y)은 ‘엣짜렐’의 준말로서 “하나님이 빚어 만드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렘’은 “하나님이 (어미에게 한 아들을) 보답하시다” 또는 “하나님이 (죽은 아이를) 대체시키셨다”는 의미의 단어에 대한 준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록의 마지막은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칠십 명의 자손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의 목록입니다.
26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며느리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이집트에서 요셉에게서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합이 칠십 명이었더라(26-27절)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70” 명은 문자적 숫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완전수로 이해함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숫자가 의미하는 따라서 ‘야곱’의 모든 식구가 그와 함께 여행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가족이 마침내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냈음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3. 야곱과 요셉(28-34절)
세 번째 단락에서 화자는 첫 번째 단락에서 시작한 ‘야곱’의 여행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되고, 그의 평생소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야곱’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30절). 아들과 아버지의 이와 같은 극적 만남은 전체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데, ‘야곱’의 고백이나 ‘요셉’이 눈물 흘리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정작 이야기는 오히려 절정에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내용은 짧고 서술 방식 역시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기만 합니다. ‘요셉’은 오히려 이제 곧 있을 또 다른 만남, 즉 그의 형제들과 ‘바로’ 왕과의 대면을 더 걱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이제 곧 있을 왕의 접견에 대해서 사전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있는 모습니다.
이 장면에서도 여전히 ‘유다’가 가족의 재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43:3-10; 44:14-34).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28절)
흥미롭게도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에 팔자고 제안하여, 부자(父子)간에 생이별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유다’가 이번에 재회를 하는 일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참고. 37:26-27). 아마 ‘유다’의 기별을 들은 ‘요셉’이 ‘고센’으로 아버지를 맞으러 오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29절)
그런데 ‘요셉’이 수레를 갖추어 그 아버지를 맞으러 올라온다는 기사는 쓸데없는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참고. 22:3), 이번 여행이 그만큼 중요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혼자 수레를 끌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왕의 행렬에 버금가는 위엄과 규모를 갖춘 여행이었습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맞이하다”(ar;q, 카라)는 항상 일반 백성을 접견하는 왕의 행차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번의 만남은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분명 그러한 측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29절 후반의 문장,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의 주어가 분명치 않습니다. 혹자는 ‘야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요셉’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 전 ‘베냐민’을 안고 울었듯이(45:14), 이제 그 아비를 만나 다시 한 번 동일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목을 안고 울고 있음을 시사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얼마동안을 그렇게 붙잡고 울었을까요? ‘야곱’의 입에서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절)
이전에 우울한 절망적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리라”(37:35; 42:38; 44:39)며 습관처럼 내뱉던 절망의 한숨이 이제 ‘시므온’의 노래(눅 2:29)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여행의 목적은 달성되었고, 이제 평안히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가족의 안위와 정착입니다. ‘바로’ 왕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도 좋다는 윤허를 내린 바 있으며(45:16-20), 이제 그들이 도착했다는 통보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31절)
가족의 정착을 위해서 ‘요셉’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던 부분은 가족의 생업입니다. 즉 가족 모두 목축업에 종사하는 목동들로서, 이번 여행에 가축들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왕에게 그렇게 말할 것이고, 식구들이 왕을 알현할 때에도 그렇게 말하도록 사전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32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32-34절)
‘요셉’은 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염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왕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즉 가족들을 각종 정부 관리 등으로 특채하는 등의 권력 남용의 비리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의 형들은 어릴 적부터 가축을 치는 유목민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것임을 왕에게 확신시켜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이집트’로 내려올 때 가축들을 끌고 왔다고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아무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왕을 안심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방목을 할 땅 정도라는 점만 설득시키면 될 것입니다.
이정도면 왕은 분명 그들에게 ‘고센’ 땅에 정착하도록 허락을 해 줄 것입니다(34절). 이전에 왕이 이들 가족을 초청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정착해 살라고 지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만(45:16-20), ‘고센’에 대한 언급은 ‘요셉’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45:10).
‘고센’을 언급하면서, ‘요셉’은 목축업에 대한 ‘이집트’ 인의 혐오감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는데(34절), 정말 ‘이집트’ 인이 그러하다면, ‘요셉’이 왜 그토록 ‘고센’ 땅을 강조했는지 선뜻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집트’ 문헌에는 목축업에 대한 ‘이집트’ 인의 혐오감에 대해서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특정 직업이 아니라, 정착 민족으로서 유목민족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이런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짚시’ 족들에 대해서는 대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셉’이 기대했던 바도 바로 이와 같은 유목민족에 대한 혐오감을 역이용하여 왕으로 하여금 ‘고센’과 같은 제국의 변방에 이들 유목족속들이 살도록 허용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적중하게 될 것입니다.
4. 야곱의 자식들과 왕(47:1-6)
왕이 ‘요셉’의 형제들을 알현하고 있는 이 장면은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곳으로서, 왕은 이들에게 ‘이집트’에서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줍니다. 왕의 알현답게 ‘요셉’은 먼저 형들의 이름을 왕에게 소개한 다음, 이어서 왕과의 알현이 끝납니다. 왕은 높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새로 이주해 온 이들을 어떻게 대접해 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요셉’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요셉’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46:31-32), 왕에게 형제들의 도착을 알립니다.
1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1-2절)
그의 형제들이 ‘고센’ 땅에 있다는 사실은 그냥 흘러버리듯 지나가는 말로 해버립니다. 의도인 즉은 형제들이 그냥 그곳에서 살도록 윤허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형제들 중 다섯 명만 왕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시켜주는 이유도 그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이 예견한 대로 왕은 그들의 직업에 대해서 물어보며, 형제들은 이미 동생으로부터 받은 지침에 따라 각본에 있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3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3-4절)
그리고는 아주 공손하게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가나안’에 닥친 심각한 기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거류하고자 왔다”는 이들의 설명은 아마도 ‘요셉’이 써준 각본에는 없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시에 상당히 함축적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들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15:13),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여행을 긴 억압의 세월로 인식하며 회고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이민자로 살았던 자신들의 경험 때문에, 훗날 그들 가운데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 필요를 마련해주라는 율법의 요구를 받기도 합니다(예. 출 22:21; 23:9; 레 19:34; 신 10:19). 아무튼 이들은 ‘요셉’보다 더 상세하게 그들이 ‘고센’ 땅에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적중했고 간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고센’ 땅 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정착해 살 수 있도록 윤허를 내리고 있습니다.
5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5-6절)
더 나아가 왕은 이들에게 왕의 가축을 관리하는 일까지 맡깁니다. 이 직업은 ‘이집트’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서, 예컨대 람세스 3세는 삼천 명 이상의 외국인들을 고용하여 그의 가축 떼를 돌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의 가축을 돌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정식으로 이 나라의 정부 관리로 채용되었음을 뜻하며, 동시에 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왕에게 직접 아뢰었으나 왕은 자신의 명령을 ‘요셉’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의례적인 것으로서, 제국의 대왕이 자신의 결정을 칙령을 내리고자 할 때 그의 최고 신하 즉 총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 결정은 형제들이 떠난 후에 이루어진 일일 것이며, 사사로운 명령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왕의 명령으로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5. 야곱과 왕(7-10절)
왕은 ‘요셉’ 형제들을 알현한 후에 ‘야곱’을 알현합니다. 형제들과의 만남이 공식적이며, 다소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번 장면은 보다 친밀하고 느긋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이나 ‘야곱’의 답변 태도 등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7-10절)
‘야곱’은 그의 자식들이 왕에게 자신들을 소개할 때, “주의 종”(3절)이라는 표현 대신 그냥 자연스럽게 “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9절). 또한 ‘야곱’의 자식들이 왕의 호의나 선처를 간청하였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왕이 ‘야곱’의 호의를 입고 있는 형국입니다. ‘야곱’이 그를 축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을 만날 때 한 번, 그리고 왕궁을 나올 때 한 번입니다(7, 10절). 그리고 왕은 그냥 존경의 표시로 ‘야곱’의 나이를 물어보았습니다. 왕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야곱’의 나이가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돌아온 ‘야곱’의 답변은 왕의 공손한 질문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총리를 아들로 둔 아비의 답변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불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 나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고달픈 세월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험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냉소에 가까운 답변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 늙고 병약하여 남의 부축을 받으며 왕 앞에 와서 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지금 더 이상 남의 축복을 가로채는 자가 아니라, 축복을 근원이자 복을 빌어주는 자입니다. 단순히 그의 가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바로’ 왕을 포함한 온 땅의 모든 족속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바로’ 왕도 ‘야곱’의 이와 같은 신분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 그와 그의 자식들을 공경과 예우를 다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당연히 그로부터 축복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28:14).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축복의 성취는 ‘요셉’의 기근정책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47:11-27).
6. 구원자 요셉(11-27절)
여섯 번째 장면은 그 길이에 있어 두 번째 장면(46:5-27)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이야기의 진행과는 무관한 긴 내용의 일탈(逸脫)을 꾀하고 있으며, 이들 내용은 원래 전후 문맥을 이루는 내용과는 상관없는 별도의 전승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들입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 46:8-25의 본문 즉 ‘야곱’의 후손들의 목록과, 이곳 여섯 번째 장면의 13-26절에서 다루고 있는 “구제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본문의 전후에 두 기사(記事)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요셉’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한 일에 관한 것입니다. 즉 앞의 기사(11-12절)를 서론이라 한다면, 뒤의 기사(13-26절)는 요약 내지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혹자는 13-26절의 본문이 원래 별도의 전승에 속한 것으로 후대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언제 본문 속에 삽입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본문을 <야훼 전승>으로 간주하고 있기는 합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기근의 결과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긴 했습니다만(예. 41:56), 이제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기근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펼치는 구제정책은 다름 아닌 “야곱 언약”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4). 따라서 이 단락에서 ‘요셉’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점은 지극히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그에게 와서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라고 감사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요셉’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설명하던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렇게 볼 때 13-26절의 본문은 <창세기>의 핵심 단락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 역시 처음부터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11절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11절)
이 구절은 일견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바로’ 왕의 명령(47:6)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비록 미미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로’의 칙령에서 다소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사유재산 즉 영구적으로 거주할 곳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이들 형제가 단순히 이민자 이상의 권리를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이들에게 ‘고센’이 아닌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명칭은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라암셋’ 근처의 ‘고센’ 땅에 대한 후대의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일종의 유사반복으로서, ‘요셉’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들을 이루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12절)
이제 13-26절 사이에서 ‘요셉’의 본격적인 구제 활동을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단락은 그 길이에 있어 여섯 번째 장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구제정책을 보여주는 주된 목적은 당시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으며, ‘이집트’가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기근의 심각성을 세 단계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이집트’ 백성이 자신들이 가진 돈으로 곡식과 교환함(13-14절)
13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13-14절)
(2) ‘이집트’ 백성이 가축을 담보로 곡식을 구함(15-17절)
15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17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15-17절)
(3) ‘이집트’ 백성이 그들이 가진 땅과 자신의 몸을 팔아 곡식을 구함(18-26절)
18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19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20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21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23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18-26절)
이리하여 결국에는 제사장들을 제외한 모든 ‘이집트’ 백성들이 왕실의 소작인이 되어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쳐야 했으며(24-25절), 이러한 상황은 화자 당대에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26절).
바로 이 대목이 성서고고학자들이나 ‘이집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곳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이집트’ 역사에서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극심한 기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치세(治世)에 관한 기록이나 연대기도 있을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요셉’의 치세와 관련한 연대기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다 하더라도,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 역사적 근거를 가진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점과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Wenham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도서 1, 448쪽).
7. 야곱의 임종(28-31절)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장면은 ‘야곱’의 임종에 관한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장면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언급함으로써(27절), 언약의 중요한 한 요소가 이미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언약의 나머지 요소, 즉 “그 땅”에 관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이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28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28-31절)
혹자는 이 장면이 다음 에피소드(48-50장)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우선 이 장면과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시간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 후에”(48:1).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창세기>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보아왔듯이, 이 단락의 문학적 기능은 일종의 전이구절입니다. 즉 현재 단락에 대한 요약적 마무리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다음 단락에 대한 예고 내지는 배경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법은 <창세기> 화자에게 친숙한 것으로서,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직전의 이야기는 그 마지막을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예고 내지는 배경이 될 만 한 내용으로 마무리한 바 있습니다(예. 4:25-26; 5장; 6:5-8; 6:9-9:29).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장면은 나머지 장들(48-50장)에 대한 서론 또는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야곱’이 ‘요셉’에게 요구하고 있는 행동, 즉 아들이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넣어 맹세를 시키고 있는 내용은 자신의 유골을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 묻어달라는 요청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임종을 맞아 그의 하인더러 그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넣어 아들 ‘이삭’의 배우자에 관한 맹세를 받아내는 장면이 그것입니다(24:1-9). 두 이야기 모두에서 서원(誓願)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족장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이삭 이야기>(27:1-40)에서는 다소 다릅니다. 즉 ‘이삭’은 마지막 유언을 임종 시가 아닌 죽음을 한동안 앞둔 어느 시점에 ‘에서’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27:41).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세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요셉’이 그 형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묻어줄 것을 맹세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으로 미루어 볼 때, 일곱 번째 장면은 이번 에피소드의 결론으로서 별개의 장면으로 다루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야곱아, 야곱아!
<계시록> 21장은 온갖 상징과 은어들을 다 동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보석의 이름만 해도 우리가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진기한 이름들이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곽(城郭)의 기초를 꾸미고 있는 보석의 종류만 해도 열두 가지나 됩니다: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 그리고 열 두 개의 성문은 모두 진주로 되어 있으며, 성에 이르는 길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 주위로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매 달 열두 가지 열매를 맺으며, 그 나무 잎들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재(藥材)입니다. 더욱 달콤하고 황홀한 소식은 그곳에는 저주가 없고, 눈물이 없으며,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영원히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소식은 나도 그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하-5)
이것은 단순히 삶에 지친 인생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아닙니다. 실제 존재하는 시공(時空)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만 한 번도 경험 해 본 적이 없는 시공이기에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며,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탓도 있겠지요.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수표인 것입니다. 이 보증수표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아보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 ‘이집트’의 ‘바로’ 왕이 보낸 온갖 진기한 선물과 그의 전용 마차와 마부와 말들 역시 왕 자신이 ‘요셉’을 통해서 ‘야곱’과 맺은 약속에 대한 보증수표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야곱’에게 ‘이집트’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버금간다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야곱’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야곱’은 우리가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그 보증수표를 직접 눈으로 목도하고, 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집트’의 영광과 황홀함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에 그러한 호사(豪奢)를 언감생심 단 한 번이라도 누려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요.
사실 ‘야곱’ 당시 ‘이집트’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의 발상지답게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수학, 천문학, 수리학, 농학, 건축, 의학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학문과 예술의 총본산이자 용광로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들었으며, 도시는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성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으로 오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야곱’에게 ‘이집트’는 약속의 땅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가족이 ‘이집트’에서 더욱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집트’는 이방인의 땅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온갖 종류의 신들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 땅은 그야말로 온갖 신들의 총 집합소로 볼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타락한 종교의 완벽한 예로 꼽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더구나 ‘이집트’는 ‘아브라함’ 이후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 12:10-20). ‘야곱’도 이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훗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장래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그의 자손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하신 바도 있습니다(창 15:13).
그래서 ‘야곱’은 지금 두려운 것입니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기는 가야 할 것 같은데 두렵고 떨립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지난 이백여 년을 지켜온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닙니다. ‘야곱’의 당시 나이 이미 130입니다(참고. 47:9). 이 나이에 무슨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으며, 무슨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이제 곧 삶을 마감할 나이에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벧엘’에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이곳이 그분께서 약속하고 지정해 주신 “그 땅”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굳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분의 언약은 이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런 저런 의문과 의심을 품은 채,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온 가족을 이끌고 내려오긴 했습니다만, 정말 국경을 넘어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되돌아가야 합니까?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때에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가장(家長)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목장의 목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역전(歷戰)의 용사입니다. 이전에도 이처럼 두려워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형을 속인 대가로 그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그랬고, 그로부터 이십 년 후 그 형을 다시 만나야 했을 때 ‘얍복’ 강가에서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번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두 번씩이나 체험한 바 있습니다. ‘브엘세바’ 국경에 서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인생의 위기 때마다 버릇처럼 해오던 그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1절). 기도와 예배입니다! 그는 이제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면 그분은 반드시 나타나시고 응답하신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히브리서>도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야곱’은 바로 이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이전에 ‘벧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 구성원들로 하여금 “집안에 있는 모든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꿔 입도록” 했을 것입니다(참고. 35:1-7). 둘째, 감사입니다. 무엇보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자기들을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구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간구해야 할 내용인 즉은 이번 이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분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으며, 그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힘주어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28:12-15). 그러기에 지금 ‘이집트’를 떠남에 있어 하나님의 그 약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야곱’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감당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이 무슨 빚이라도 졌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분 스스로 먼저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과 언약입니다.
나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먼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기도의 용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올 때 모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에 그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을 압박하고 밀어붙였습니다. ‘느헤미야’를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느 1). 그는 하나님에게 마치 그분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잊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9하).
얼마나 효과적인 기도입니까!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분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약속하신 그 무엇이 있습니까? 그분의 기억을 환기시켜드립시다. 그리고 그분을 밀어붙입시다. ‘아멘’입니까?
두려워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처럼 용감무쌍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얍복’ 강에서 ‘야곱’이 했던 것처럼 그분을 심하게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행여나 기도하다 ‘야곱’처럼 환도 뼈라도 부러질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나 할까 반신반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야곱’ 역시 이전에 한 번 하나님을 이겨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경험을 믿고 한 번 밀어붙여보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번에도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나아오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하시면서 말입니다(2절). 마치 잠결에 ‘야곱’의 고함소리를 듣고 놀라 벌떡 일어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니면 이제야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깜짝 놀라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놀라시던 그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사울’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항상 우리를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참된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요 10:3),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4). 그분은 언제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주신 적이 있으며, 나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야곱’은 즉각적으로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르시는 분이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니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3절). 하나님이 나의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라면, 마땅히 나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나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존재임을 믿습니까?
‘야곱’의 하나님은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내용인 즉은 ‘야곱’이 어디로 가든 하나님께서도 그와 함께 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 동일한 약속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계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3-4절상).
‘이집트’가 두렵고 위험한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야곱’과 그의 후손은 앞으로 힘든 시기를 거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겠고, 육체적으로 노예가 되어 고달픈 세월을 보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때로는 가깝고 쉬운 길을 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을 택하시기도 합니다.
‘야곱’이 그 모든 여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까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이후 무려 사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을 잊지 않고 지금의 출발지에 다시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절하).
끝까지 충성하라. 이제 우리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브엘세바’의 예배가 어떻게 끝났는지 물어볼 차례입니다. ‘야곱’ 공동체가 교회에 모여 회개했고, 자신을 청결하게 드렸으며,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셨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이집트’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배가 어떻게 끝이 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셨다면,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순종하여 내려갔습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 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곧 그의 모든 자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6-7절).
우리가 무슨 동기로, 무슨 목적을 가지고, 무슨 기도와 간구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나아오든, 주님의 약속과 응답은 한 결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 하리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 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 39).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을 살도록 하시며, 죽음의 통로를 반드시 통과하도록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그리고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14:1-2)
2. 칠십 명
이름들. 잘 알지도 못하는 집안의 족보를 읽는 일은 여간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족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 족보임에 틀림없습니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기까지 나열되어 있는 그 이름들을 일일이 읽어 내려가는 일은 고역임에 분명합니다. 이들 이름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흥미는 고사하고 무슨 의미조차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족보(族譜)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말은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그의 후손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두 칠십 명입니다. 이들 이름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족보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 곳은 <창세기> 제 4장으로서, 우리는 이곳에서 ‘가인’의 후손 여덟 명에 대한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 5장에서는 ‘아담’의 계보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가인’의 계열이 아닌 ‘셋’의 계열로서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도합 십대에 이르는 후손들의 이름을 읽게 됩니다. 더 나아가 제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햄’과 ‘야벳’의 후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 홍수 이후 전 지구상에 흩어진 인류의 조상들입니다. 이어서 제 11장에서는 ‘셈’의 아들 ‘아르박삿’을 통해서 태어난 후손들로서 ‘아브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중에 <창세기>의 중간쯤에서 ‘이삭’의 아들 ‘에서’로부터 태어난 자손들과 왕들과 족장들의 목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36장).
지금까지 언급한 다섯 장을 통해서 통틀어 약 이백 명의 이름들이 등장한 바 있으며, 이제 이곳 46장에서 다시 칠십 명의 이름을 더 만나게 됩니다. 과연 이들 옛 이름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하필 칠십 명입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듯이 이름을 잘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서 타인과 만나고, 교제하며, 또 인격적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또한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에게 나아갑니다. 이점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을 하나님 자신이 직접 붙여주었던, 또는 부모가 지어주었든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 이름을 통해서 기억하고 또 부르신다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그리고 ‘고레스’ 왕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3).
이렇게 볼 때, ‘야곱’의 후손으로 등장하고 있는 칠십 명의 이름들도 오늘 우리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중요하고 의미 깊다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어 이들은 단순히 물건이나, 추상적인 개념이나, 집단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닮은 인격적 존재로서, 그분과 대화하고 꿈과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천히 확실하게. 그렇다면 화자가 70 명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들 이름이 증거하려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토끼와 거북 이야기>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 여러 형태로 패러디가 되어 원래의 교훈과는 영 다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만, 본래의 교훈은 단 한 가지, 즉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가 승리한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교훈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영어 금언이 하나 있습니다: “Slow and steay wins the race.” 이 잠언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칠십 명의 이름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후손들의 숫자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책에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점과 관련해서 이미 앞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참고. <신학과 신앙>.
우선 칠십이라는 숫자에 주목해 봅시다. 이들 칠십 명의 이름들은 오늘 우리가 단숨에 읽기에는 그 숫자가 많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야곱’의 후손치고는 아주 미미하고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불러내실 때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 그리고 얼마 후에 그를 장막 밖으로 불러내어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다시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창 17:4). 그리고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확장되고 확대되고 있습니다: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7-18)
하나님의 이 약속이 그로부터 기백 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이 첫 아들 ‘이스마엘’을 낳을 때 그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아들 ‘이삭’은 그보다 더 나이든 백 살 때였습니다. ‘이삭’은 그의 나이 60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전부입니다. 물론 ‘야곱’의 대에 이르러 12명의 아들이 태어나고, 그들로부터 손자들이 태어나서, 가족을 “두 떼”(32:10)로 나눌 정도로 후손의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 사실입니다. 칠십 명까지 늘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 있은 이후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215년이나 걸렸습니다. 한 나라는커녕 한 고을도 이루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큰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로부터 430년이 흐른 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어른만 60만을 이룰 정도로 이미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녀들 숫자까지 합친다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수백만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 토끼의 뜀박질이 아니라 거북이의 걸음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느리지만 쉼 없고 확실한 걸음 말입니다. 그분은 기초를 다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사람에서 칠십 명이 되는데 걸린 시간이 215년이었는데, 그 후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에 칠십 명이 수백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방식은 적어도 영적 영역에 있어서는 표준 모델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조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며, 쉽게 잘 포기해버리는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은 없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생을 이제 막 출발하려는 젊은이나, 또 늘 시작은 하나 제대로 한 번도 무엇인가 이루어내지 못한 사람 모두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 성공 방정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왜 거듭난 자 즉 “위로부터 태어난 자”는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 합니까?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 품속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 신생아도 반드시 교회의 품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교회는 어머니 품속과 같다는 것이지요. 어머니는 자식을 낳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하게도 낳은 자식을 장성한 자로 키웁니다.
<성경>의 모든 책들이 한 결 같이 교회를 향해서 말하고 있음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지요. 특히 <신약>의 모든 <서신서>들이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있는 바도 다름 아닌 “성숙과 성장”입니다. 거듭남이나 태어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교회의 성숙보다는 양적 성장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에는 시간과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지속적이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이집트로.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야곱 교회”처럼 말입니다. 화자는 칠십 명이 모두 하나 같이 ‘야곱’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갔다고 전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46:7, 27). 이들 모두에게 ‘이집트’ 여행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만, 모두가 가장(家長) ‘야곱’의 결정을 따라 함께 행동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지난 이야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말이 한 가족이지 도저히 가족이라 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며 지난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습니다. 분열하고 갈등하며, 그리고 때로는 무관심과 서로에 대한 의심으로 일관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몰아닥쳤을 때에는 각자는 자기 살 길을 찾느라, 가족의 해체(解體)는 더욱 가속화되고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이집트’로 가기로 마음을 모은 것입니다. 이 결정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이백여 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사실도 그러하려니와,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떠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더욱 불가능한 선택으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땅을 떠날 것인가?”
기로의 순간에 ‘야곱’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찾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온 가족을 대동하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1절). 사실 조금 직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섭리의 손길을 펼치신 바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언약의 증거들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이집트’의 ‘바로’ 왕이 보낸 왕의 전용기와 각종 진기한 선물을 말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야곱’은 왕의 약속과 그 보증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보증은 더 큰 보증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즉 왕 중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믿음과 신뢰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떠나기로 작정했고, 이곳 ‘브엘세바’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에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이 예배에 한 사람 빠짐없이 참석했을 것이며,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진지하지 않았던 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는 난생 처음으로 하나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절하고 애절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위한 기도이긴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 모두를 위한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하나가 되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했던 그 이상의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무려 400년 이후의 일, 즉 “출애굽” 이야기까지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노인이나 젊은이나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예언자가 되었으며, 장래 일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꿈과 이상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족마다 다른 꿈과 이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된 하나님의 꿈과 이상이자, 하나님의 꿈과 이상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신약>은 기막힌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기관(organization)이 아니라 유기 생명체(organ)라고 말합니다. 만일 교회가 조직이나 기관이라면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바대로 그 조직에 속할 수도 있고 탈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한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옮겨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한 몸 또는 한 가족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가족은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고,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있어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형제나, 또는 자매가 됩니다. 부부 간에는 이혼이 있을 수 있으나 혈연관계는 그 어떠한 법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한 몸이라면 신체의 각 부분은 한 몸에 항상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받아 각기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합니다. 모든 지체가 항상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목표를 가지고 한 길을 여행하는 동반자임에 분명합니다. 때로 몸의 일부가 사고로 절단되거나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만, 설령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내 새로운 신체의 한 부분으로 이식되거나 접합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브엘세바’의 예배를 통해서 ‘야곱’ 교회는 이제 하나의 가족으로, 한 몸으로, 새롭게 진용을 갖추어 ‘이집트’라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제 그들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야곱’ 교회를 개척하시는 목적이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사역을 위하여 그들은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개척교회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먼 훗날 하나님께서 다시 ‘가나안’ 개척교회를 하라고 하실 때, 그만한 역량과 의지를 갖출 수 있을까? 그들이 없는 동안 다시 이방의 땅이 되어버릴 이곳을 빛의 자녀로, 하나님의 군대로, 그리고 심판자로 침노해 들어올 수 있을까?
가나안의 평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동안 ‘야곱’ 교회가 ‘가나안’에서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 상상해 보면 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제 ‘헤브론’을 떠나 ‘이집트’로 옮긴다고 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교회로 달려와 담임 목사 ‘야곱’의 옷소매를 붙잡고 울며 하소연했을까요?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떠나야 된다고 했을 때, 멀리 ‘브엘세바’에 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을까요? 아니면 교회가 사라졌으니 ‘헤브론’ 지역 땅 값 올라가게 되었다고 더 좋아들 했을까요? 자기들만 알고, 자기네들끼리만 뭉쳐 살던 얌체 족속들이 사라져 속이 후련하다고 했을까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근처에 교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사를 가는지 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살고 있었을까요?
내 미래는 내 과거의 행적을 통해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게 감사할 제목이 없다면, 내일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내 소명과 직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내일도 그것을 찾아 구하러 다닐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없다면, 내일도 그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죽기 살기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내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나의 주님과 대화를 놓쳤다면, 내일도 그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좋은 소식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는다면, 내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꿈이 없다면, 내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무슨 목표를 가지고,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제대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꿈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그 꿈을 과연 이룰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면 그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사역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정적이라면, 지금 당장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리고 지금 당장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그냥 살아갈까요? 아니면 함께 기도하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우리의 ‘이집트’ 사역을 설계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까요? 목표는 원대하되 행동은 구체적이고 세부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단순히 설교의 마무리를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결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집트’로 내려가야 합니다! 채비를 합시다!
3. 再會: 야곱과 요셉
부모님의 교육열로 인해서 내 형제들은 일찍부터 시골의 부모님 곁을 떠나 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 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시골에서 마산, 부산, 그리고 서울로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 년에 두 번씩 방학이 되면 모두 시골집으로 돌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나도 역시 당시 칠원 초등학교에서 3 학년까지만 다니다가 마산에 학교로 전학을 해서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큰 어머니 집에서 지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살았으니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하루는 하도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학교도 빼먹은 채 몰래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고향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집 근처에서 내려 집이 있는 골목 어귀로 들어서며 골목 안자락 끝에 있는 집 대문을 향해서 걸어가며 나는 흥분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곧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기대였겠지요. 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엄마”하고 부르며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도 당연히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속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반가움보다는 놀라는 표정이 더 역력했습니다. 특히 그 때 안방에 누워계시던 아버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 학교는 어떡하고 지금 이 시간에 집에 왔느냐며 호통을 치시면서 나를 당장 되돌려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계시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와 보시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트럭에 실려 다시 마산으로 혼자 돌아와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얼마나 서러워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내 어머니도 속으로 많이 우셨겠지요. 아마도 그 때 그 경험 이후로 나는 세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자제하고 억제하는데 익숙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움. 그리움은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부모님과 친구들을 떠나 객지에서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나,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그리움과 고독의 맛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데에 이력이 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밴쿠버’에 유학을 가서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 둘째 아들 녀석도 요즈음도 가끔 우리더러 그곳에 이민 와서 같이 살자고 합니다. 가족이 그리운 것이지요. 온 가족이 함께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답니다. 이처럼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인 듯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수시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본 적 있습니까?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된 적은 없었습니까?
‘요셉’은 어땠을까요? 모르긴 해도 <시편>의 고백대로, 매일 밤 그리움의 눈물로 침상을 띄었을 것입니다. 나이 열일곱에 노예로 팔려와 이름도 없는 노예로 겪었을 온갖 인생 역경도 역경이지만,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역경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고향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살던 그 좋았던 시절,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그 시절, 눈에 아른 거리는 동생 ‘베냐민’의 모습 등이 떠올라 어려움은 그 무게를 더했으리라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총리가 되었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왕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까지 두어 행복한 가정까지 두었음에도 그리움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그리움을 훔쳐볼 수 있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 풀이하자면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입니다. 그의 말대로 지난 과거의 모든 좋았던 그 시절과 고난을 다 잊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즉 첫 아들을 보니 지난 그 모든 과거가 새록새록 그리움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역설 아닌 역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 풀이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입니다. 그가 비록 ‘이집트’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등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잃어버린 좋았던 그 시절을 잊을 수는 없다는 또 다른 역설일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 년을 정말 외롭게 살았으며, 지금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노예를 어느 누가 다정하게 내 가족처럼 감싸주었겠으며, 한 나라의 총리를 어느 누가 쉽게 다가가 친구처럼 신변 잡담을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는 동창도, 고향 친구도, 부모 형제도 없습니다. 그는 정말 가족이 그리웠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주던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이 더욱 그립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두 번째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물어보았던 것도 아버지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43:27). 나중에 마침내 형제들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밝히는 자리에서도 가장 먼저 아버지의 소식을 물어봅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45:3).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형제들을 재촉합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 올라가서 아뢰기를...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 오사...나와 가깝게 하소서...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45:9-11). 우리는 그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 년만의 해우가 아닙니까!
재회. 이처럼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던 그가 형제들이 기근 때문에 양식을 구하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감옥에 가두어야 했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에게 복수를 하려 함이 아니라, 형들 역시 차가운 감옥에서 자기가 겪었던 고독과 외로움의 세월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심장이 녹고 양심이 되살아서 그들의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고백하게 하려함이었습니다. 과연 ‘요셉’의 의도는 적중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나중에 동생 ‘베냐민’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거나 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43:30). 이처럼 그는 다정다감하고 심장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여왔던 그리움은 그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던 불쏘시개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형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갑고 무뚝뚝하게 복수의 일념에 불타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45:14-15). 이러한 그가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의 목을 얼싸안고 한 참 동안 울었다”(46:29)는 사실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눈물을 훔치려 하지 쏟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남자라면 더욱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교육까지 받아가며 자라왔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 서툰 장애자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쳐다보며 환희의 찬송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대개 하늘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거나, 아니면 가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왜입니까?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가요?
그러나 <성경> 속의 인물들은 같은 동양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데도 우리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이며 솔직합니다. 그들은 슬픈 일이 있으면 크게 울었고, 기쁜 일이 있으면 반대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다윗’만 하더라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었을 때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감정에 보다 솔직하고 충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베토벤 작곡의 “song of joy”를 서로 마주보며 한 번 불러보는 것이 어떨까요?
환희. 이날의 재회에 기뻐 눈물 흘렸던 자는 ‘요셉’ 만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도 있습니다. 이십 년 만에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애타게 아들을 그리워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절).
그는 지금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한(恨) 맺힌 인생을 살아왔는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불행을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했으며,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개 한이 많은 사람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예컨대, 잠시 후 ‘바로’ 왕을 만나게 될 텐데 그의 나이를 묻는 왕에게 불손하게도, “나이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한을 여지없이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사라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회의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이 없다”는 말은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왔던 쓰라린 맹독(猛毒) 같은 한을 다 날려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록 과장이긴 하겠지만, 얼마나 기뻤으면 “지금 죽어도 좋다”고 까지 환호하겠습니까!
부모인 내가 ‘야곱’처럼 환호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일까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소리 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간절히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의 성공 아니겠습니까! 세상적인 성공은 말 할 것도 없고, 신앙적이고 영적인 성공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부모의 염원을 잘 모릅니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환호하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를 가슴 아프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욕되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부모를 인생의 실패자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습니까? 자식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면, 나 역시 ‘야곱’의 환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야곱’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야곱’처럼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부모에게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야곱’은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편애와 무관심으로 자녀들을 화나게 했고, 무관심으로 자녀 교육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그와 같을 수 없습니다. 자식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면, 내가 성공한 부모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성공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에베소서>의 권면을 깊이 묵상하며 실천해 가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자식과 함께 얼싸안고 기쁨의 열매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야곱과 왕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도 있다고 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정치인이 되는 일이 그렇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정치에 대한 냉소에서 나온 말이긴 하겠습니다만, 일단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략(謀略)과 술수(術數)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정직과 신뢰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기독교 인 정치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들 합니다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또 하나 정치판에서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제 2인자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흔히들 제 2인자가 되는 일은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2인자는 공식적으로는 차세대 지도자가 될 사람이지만, 자칫 제 일인자의 눈에 벗어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입니다. 이는 부모 자식 간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선의 역사에도 이와 같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정치가. 그러나 ‘요셉’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동시에 현명하고, 지혜롭고, 신중하고, 거룩한 정치가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돋보이고 있는 곳이 바로 본문 이야기입니다(46:28-47:12). 그가 가족들을 ‘이집트’로 초청하여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하기 까지 기울이고 있는 노력이나 사전 준비 작업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신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가족들을 만나 앞으로 그가 할 일에 대해서 미리 알려줍니다. 앞으로 왕을 만나게 될 것이며, 왕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사전 교육을 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신 먼저 왕에게 가서 가족들이 왔으며, 현재 ‘고센’에 임시 머물고 있다고 아룁니다. 다음으로, 그의 형제들 중 다섯 명만 골라 왕을 알현(謁見)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왕에게 ‘이집트’에 정착을 윤허해 줄 것을 간청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를 왕에게 알현시킵니다. 마침내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 ‘라암셋’에서 살아도 좋다는 왕의 윤허를 받아냅니다(47:11).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킴에 있어 ‘요셉’은 어느 누구 한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지 않고, ‘이집트’ 사람들의 원성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왕의 신하들에게 불안이나 염려를 심어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는 실로 영적 분별력과 정치적 지혜를 골고루 갖춘 자의 하는 일이 이와 같은 것이라는 역할 모델을 잘 수행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야곱의 축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러 번의 만남을 볼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절정은 역시 왕과 ‘야곱’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늙고 남루한 한 ‘히브리’ 촌로(村老)와 사치와 화려와 절대 권력의 상징 ‘바로’의 만남은 그 자체로서 극적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둘이 만나는 장면을 화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47:7-10)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야곱’이 왕을 축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왕을 알현할 때 한 번, 그리고 왕을 만나고 나오면서 또 한 번입니다. 이 축도(祝禱)는 단순히 의례적인 인사가 아닙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내려주는 축복입니다.
이 장면이 주는 대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무엇보다도 축도를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지금 누가 누구를 축복해 주어야 합니까? 불쌍한 나그네, ‘이집트’ 인 모두가 혐오하는 떠돌이 목동이 ‘이집트’ 신의 아들 ‘바로’ 왕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닌가! 오백여 명에 달하는 왕자와 공주, 그리고 이삼백 명에 이르는 왕비를 거느린 절대 강자 ‘바로’가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분명 두 사람의 역할이 전도(顚倒)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히 7:7)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지금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는 그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축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서 복을 주옵소서”(창 14:19).
우리가 이 원리를 ‘야곱’과 ‘바로’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면, ‘야곱’이 왕을 축복해 주고 있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화자의 의도인 즉은 ‘야곱’이 왕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이 정해놓은 지위나 서열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도 이점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가 아무런 거부감이나 저항감 없이 ‘야곱’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야곱’에게 나이를 물어보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47:8). ‘야곱’은 자기 나이 백삼십이라고 답합니다(47:9). 세상에서의 나이를 따져보아도 ‘야곱’이 왕보다는 훨씬 연장자(年長者)로서, 축복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암시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도 ‘야곱’이 가진 그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만나는 사람을 축복하고 축도해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이 우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한 앉은뱅이가 그들에게 구걸을 하려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행 3:6). 그렇습니다. 나는 “복음의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고후 4:7).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4:6). “생명에 이르는 냄새(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2:16).
야곱의 증거. 내가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보배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세상과 이웃을 축도하고 축복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나 아닌 어느 누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축도는 예배 마지막에 목사가 하는 것이 원칙 아닌가요? 왜 하나님의 백성은 이상하게도 <성경>을 신뢰하기보다는, 전통이나 관습이나 느낌이나 사회통념이나 전설이나 신화를 더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소위 평신도들의 모임이 늘 축도나 축복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으로 끝나는지 모를 일입니다. 왜 목장 모임의 마지막에 목자는 양들을 위한 축도로 끝내지 않는 것일까? 왜 양들은 목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그를 위해 축도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무지이고, 완고함입니다. 더 나아가 자의식(自意識)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답변에서 이와 같은 자의식의 결핍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일견 매우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의 겸손함은 ‘이집트’ 왕을 기분 좋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왕께서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말속에 진실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인생을 나그네 길로 비유한 것은 올바른 인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언약이 내 생전에 모두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게 되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참고. 히 11:13-16).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이처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그가 정작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다소 어둡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그의 자의식이 결핍된 것이 아닐까 하는 평가를 내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백삼십이라는 자신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고 있으며, 그 짧은 세월에 비하면 겪어온 세월이 험악했다고 말함으로써, 일견 자신에 대한 연민(憐憫)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도취(自己陶醉)만큼이나 부정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자기연민이 자신을 파괴하는 질병이라면, 자기도취는 타인을 파괴하는 질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를 해주었을 그가 겨우 이정도 증거밖에는 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운 대목으로 남습니다.
더 나은 증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야곱’보다 더 나은 증거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감성과 기분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나의 이성과 믿음이 나에게 무엇이라 말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을 축복하고 축도해 줄 책임과 권리를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사도이며,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부족합니다. 이것을 단지 믿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당장에 말입니다.
5. 요셉과 기근
과연 ‘요셉’을 경건한 정치가나 유능한 행정가로 부를 수 있을까요? 그가 유능한 행정가일지는 몰라도 경건한 정치가로 부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야비한 독재자 내지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안토니오’를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전형적인 악덕 상인의 행태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펼치고 있는 구호정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백성을 향한 선정(善政)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착취(搾取)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땅에 기근(饑饉)이 와서 칠 년이나 계속되자, 가난한 자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돈이나 땅과 가축 심지어 자유마저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선한 통치자가 아니라 아주 간교한 악덕 사채업자나 다름없습니다. 백성의 어려움을 최대한 이용하여 왕실의 배를 채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대도 여전히 그를 선한 정치인, 유능한 행정가로 부를 수 있을까요? 그는 오히려 북한의 김정일이나, ‘나치’의 ‘히틀러’, 또는 구(舊) 소련의 ‘스탈린’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통치자 요셉. 아닌 게 아니라, ‘요셉’에 관해서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로 가득 찬 책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브린크’(John T. Brink)라 불리는 한 사업가는 그의 책『이집트의 요셉과 그의 국가 경영』에서 ‘요셉’을 아주 혹평하고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창세기> 47장의 “요셉과 기근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이야기에서 ‘요셉’은 지나칠 정도로 미화되어 있으며, 그를 <성경>의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포장하기 위한 음모마저 엿보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나 유대교 진영에서 “기근 이야기”는 너무 민감한 내용이라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이를 상세하게 잘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요셉’은 아주 약삭빠르며 권력 지향형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그 꿈을 해석해주고 다가오는 국가적 재난에 대비할 지혜를 갖춘 경영인을 준비하도록 조언해 줄 준비를 미리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법은 독재자들이 취하는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수순(手順)이라는 것입니다. 즉 첫째, 마치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잘못된 정보를 흘립니다. 다음으로 임박한 국가적 재난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적절한 인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브린크’의 주장인 즉은, ‘요셉’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국가 경제를 통제하고 이를 통해서 재난을 조장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도 ‘요셉’이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41:44).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요셉’은 모든 정보를 통제했고, 여론을 조작했으며, 당연히 국가 생산성은 떨어지고, 경제는 쇠퇴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린크’가 가장 크게 ‘요셉’을 비난하고 있는 대목은 ‘요셉’의 소위 구제금융 정책에 관해서입니다. 그는 이 정책이 무기력한 백성을 착취하는 아주 사악한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합니다. 그는 심지어 훗날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가 되게 된 것도 ‘요셉’이 지금 ‘이집트’ 백성을 노예로 전락시킨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브린크’는 ‘요셉’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 그는 정말 <창세기> 47장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요? 예컨대, 그는 ‘요셉’이 강제 인구분산 정책을 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다음 구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47:21). 아닌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도 이전이나, 인구 분산을 통한 도시의 재정비 등과 같은 국가적 사업은 독재자가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고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활용하는 방식이기는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방 토후 세력의 발효를 막고, 전통이나 혈연에 기반을 둔 기성(旣成)세력의 결집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성경> 이해 수준은 실로 한심한 수준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새롭고 정확한 번역은,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노예로 삼았다”(예: RSV; NIV; NEB; Jerusalem Bible)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비인간적 처사이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요? 이와 같은 인식 역시 <구약>의 관습이나 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즉 ‘요셉’의 구호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약>에서 말하는 구제법(救濟法)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에 따르면,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구제해 줄 때 아무나 나서서 그냥 도와주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하다면 가난한 자의 친척이 그를 돕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친척의 땅을 사주고 그를 하인이나 종으로 삼음으로써 도와주도록 하고 있습니다(레 25:13-55). <구약>에서 이러한 행위를 자비라 부릅니다. ‘이집트’ 백성이 ‘요셉’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47:25). 즉 이 백성은 ‘요셉’을 향하여 원성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요셉’의 정책을 평가할 때 이러한 맥락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가 자신의 몸이나 땅을 부유한 친척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노예가 되었다 하더라도, 희년(禧年) 즉 50년이 되면 자유인이 되고 그 땅도 되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바로 이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땅을 자신의 것으로 영구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다릅니다. 자신의 것으로 취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집트’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하였고, ‘바로’의 꿈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충실하게 수행한 것뿐입니다(42:36). 그러니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 즉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것입니다(참고. 28:14; 12:8; 18:18; 22:18; 26:4).
청지기 요셉. ‘요셉’은 실로 경건한 정치가였으며, 유능한 경영인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고 그의 사후(死後) 여러 세대에 걸쳐 다른 왕들이 통치할 때에도 나라는 강성했으며, 풍요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이점에서 ‘요셉’은 오늘날의 독자들로부터도 거룩한 청지기로 칭송을 들어 마땅할 것이며, <성경>도 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셉’의 통치를 통해서 일련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 권력은 타락하고 독재로 흐르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을 독재자로 규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요셉’이 끝까지 선한 청지기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으며, 그 또한 매사를 하나님께 하듯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만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독재자나 부패한 왕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정국가(神政國家) 이스라엘이 그 역사상 진정으로 신정국가(神政國家)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민주인민공화국” 북한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민주인민공화국”이 되어 본 적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권력이 부패하고 절대 권력화 하기 쉽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권력이 한 개인이나 조직이나 또는 당(黨)에 편중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요셉’이 통치하던 시대에 백성들이 그 앞에 나아와 감사하며 종이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고 있습니다만(참고. 47:25), 이와 같은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것으로서 오늘 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정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둘째, ‘요셉’의 통치로부터 얻게 되는 두 번째 경계나 교훈은 “사유재산 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사유재산(私有財産) 제도는 중요한 성경적 원칙이며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큰 축복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십계명”에서도 “이웃의 재산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5).
혹자는 초대교회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참고. 행 2:44-45)다거나, 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의 소유를 판 돈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놓고(참고. 행 5:1-11),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음 구절이 이를 증거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행 4:4). 본문에서 ‘요셉’이 ‘이집트’ 모든 백성들의 재산과 심지어 신체적 권리마저도 국가에 귀속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만, 이 역시 지극히 제한적인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어느 정부나 국가도 <요셉 이야기>를 근거로 개인의 재산이나 신체를 제한하거나 국유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은 정치가 ‘요셉’의 일관성과 관련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 내내 흔들리지 않은 자세와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로마서>는 그의 통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6. 이집트와 이스라엘
공정치 못한 하나님. 하나님은 과연 모든 사람에게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집트에 거주하게 된 이스라엘에 관한 언급을 읽을 때는 더욱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절). 왜 이 구절이 하나님의 공평(公平)하심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기근(饑饉)의 결과를 놓고 볼 때, 두 민족 즉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서로 상반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닥쳤던 7년 동안의 기근으로 ‘이집트’ 모든 백성은 재산과 땅을 잃어버리고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 반면(25절), 굴러들어온 이방인 ‘히브리’ 족속은 그 땅의 주인으로 정착하여,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27절).
엇갈린 운명은 그뿐 만이 아닙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7절). 이 말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거주하는 동안 유례가 없을 정도의 인구 증가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그 땅에 거주하던 430년 동안 칠십 명에서 수백만으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땅의 주인 ‘이집트’ 족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가 ‘이집트’ 인들의 근심거리가 될 정도였으며, 이에 ‘바로’ 왕이 직접 나서 가혹한 인구 감소 정책을 펼쳤으며, 마침내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 까지 합니다(출 1). 이스라엘이 이처럼 억압과 차별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게 된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편애(偏愛)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이 공평무사(公平無私) 해야 한다는 일종의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다른 아이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며 공정하지 못한 처사입니까? 부모가 가업이나 유산을 다른 자식이 아닌 친자식에게 물려준다 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멀었다고 비난합니까?
사람들은 툭하면 하나님의 선택(選擇)이나 예정(豫定)을 윤리․도덕적인 차원으로 격하(格下)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거듭남” 즉 “새 생명의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 윤리나 도덕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남의 자식이 아무리 착하고, 선하며, 거룩하다 할지라도 내 자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아무리 망나니짓을 해도 내 자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제쳐두고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분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능적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보다 더 건장해서도 아니고, 더 거룩하기 때문도 아니며, 힘이 더 세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자식으로 선택해서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육신의 부모 사랑과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내가 낳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意志)로 이스라엘을 선택했으며, 사랑하겠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이지적인 선택”이라는 ‘스콧트 펙’(S. Peck) 박사의 말도 이런 점에서 타당하다 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스라엘이 ‘이집트’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를 관통하는 핵심 어구(語句)로서, 책 전체를 통해서 적어도 열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견 명령처럼 들리는 이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의지를 담은 “언약”입니다. 언약이라 함은 “피로 맺은 약정”을 말합니다. 즉 사활(死活)이 걸린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생명을 가진 생명체와 더불어 세우신 언약입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과 땅의 짐승들을 향해서 처음 이 언약을 세우셨으며(1:22), 다음 날 즉 여섯째 날에는 인간과 더불어 같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1:28). 우리는 이 언약을 “창조 언약”으로 칭할 수 있을 것이며, 일명 “창조 명령” 또는 “문화명령”으로도 부른다고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언약”은 대홍수 이후에도 계속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배에서 나온 모든 생물과 ‘노아’와 그 가족들과 더불어 같은 언약을 세우십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중에 번성하라 하셨더라”(9:7).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대홍수를 일으켰던 바로 그 문제입니다. 즉 “죄”가 다시 세상에 들어온 것이지요. 정말 신기한 것은 홍수에서 살아남은 단 여덟 명의 의인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가족은 다시 홍수 이전의 상황, 즉 “생육과 번성”이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적대적인 악조건의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 가족이, ‘야곱’ 가족을 지배하던 ‘이집트’라는 환경에 놓이게 된 것과 같은 처지에 노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할 때, ‘이집트’ 즉 “죄”도 함께 번성해 가게 될 것입니다.
“문명과 문화가 과연 죄의 결과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들이 죄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특히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과 기술 및 예술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해 갔습니다만(참고. 창 10:10-12; 11:1-9), 그 본질은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항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멕의 노래”가 그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그의 노래는 무자비한 피의 복수를 정당화하고, 자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의 복수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배로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라멕’이 자랑스럽게 노래하고 있는 바처럼, 자신에게 단순히 상해(傷害)를 입힌 자를 살인으로 되갚아주는 것입니다.
과연 이와 같은 문화 속에서 생명이 번성하고 번창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언약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의 정상적인 관계조차도 왜곡되고 변질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즉 “창조언약”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약속 외에도,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죄의 결과는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하나는 피조물에 대한 선한 청지기, 즉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포기하고 무자비한 착취와 지배로 나아간 것이고, 또 하나는 정반대로 피조물을 경배하고 두려워하는 숭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참고. 롬 1:25).
특히 “바벨탑 사건”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은 완전히 무위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해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써 다시 “창조의 언약”을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약간 다른 어조이긴 하지만 동일한 그 언약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17:2);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17:6).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언약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그리고 끊어질 듯 말 듯 그 맥을 겨우 이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죽했으면 ‘아브라함’ 스스로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섰겠습니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마엘’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었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마저 사후(事後) 허용(許容)하는 방식으로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언약”의 수혜자 속에 포함시켜주셨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17:20).
그러나 정작 약속의 씨앗은 ‘이삭’ 단 한 사람뿐이었으며, 다시 그로부터 단 두 명의 아들 ‘야곱’과 ‘에서’가 나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적통(嫡統) ‘이삭’이 단 두 명의 아들을 낳을 동안에, 그의 배다른 형 ‘이스마엘’로부터는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나서 그야말로 왕성하게 퍼져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일견 약속 밖의 후손들이 “언약”의 축복을 더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르긴 해도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스마엘’과 ‘에서’에 이르기까지 대략 이백여 년의 기간 동안에 후손들은 수천수만에 이르렀을 것인데(참고 25:12-18; 36장), 같은 기간 동안 ‘야곱’의 후손은 겨우 칠십여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참고. 46:27).
오늘 우리도 ‘야곱’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교회나 기독교인의 수는 항상 소수(小數)이거나 열세(劣勢)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출세, 명예나 부(富)의 축복도 언약 밖의 백성들이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모짜르트’를 바라보는 ‘살르에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솔직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이 누리는 그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답답할 정도로 느립니다. 내 생전에는 기도가 결코 응답받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언약과 축복이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어야 합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들이 너무 열악하고 형편없어 보이는데도 나는 과연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에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절).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불과 칠십 명의 무리에서 수백만의 인구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장소 ‘가나안’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열악하고 적대적이었던 이곳 ‘이집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벧엘’에서 ‘야곱’에게도 그의 조상들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꼭 같은 “언약”을 들려주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35:11). 그 약속이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에서, 그리고 지금 당장이 아닌 무려 43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질 줄을 그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참고로 우리나라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는 요즘처럼 우리가 제법 먹고살 만 한 때가 아니라, 못 먹고 힘들던 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육과 번성”은 단순히 물리적인 숫자에만 국한되는 약속은 아닐 것입니다. “인격과 영혼”의 “생육과 번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매사가 그러하듯, 인생의 교훈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뼈에 사무치도록 배우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첫 사례를 ‘아담’의 반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창조의 언약”을 받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가 그 언약의 축복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배우게 된 곳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던 ‘에덴’ 동산이 아니라, “반역” 이후 동산에서 쫓겨난 동방의 땅, 즉 “가시와 엉겅퀴”가 온 몸을 찔러대던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땅을 치고 한탄하며, “언약”의 소중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승리를 거둔 곳이 완벽한 ‘에덴’ 동산이 아니라, 황량한 ‘유대’ 광야였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한 것은 항상 정치적인 억압이나 경제적인 궁핍이 함께 하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지난 60-70 년대에 그랬고, 중국 교회도 공산 치하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성장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집트’나 ‘시리아’, ‘터키’ 등과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 왜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은커녕 쇄락하고 도태되어가고 있습니까? 이들이 ‘이집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 신약 교회가 “생육과 번성”을 거듭하기 위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 옛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귀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자면, <신약>의 “창조 언약”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이것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우리는 영적 자식을 계속 낳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계속 살아남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 태어난 상태 그대로 아직 기저귀를 찬 채, 똥오줌 못 가리고 누워만 있습니까? 지금 우리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나안’입니까 아니면 ‘이집트’입니까?
7. 야곱의 마지막 날들
죽을 날이 가까우매. 내 나이 육십이 지나고 직장에서 정년퇴직이 가까워 옴에 따라 평소에 없던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정년 이후의 삶과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상념(想念)이 그것입니다.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서야 내 하기 나름이겠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을 것이며, 그래서 다소 우울하고 침울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도 같은 심정이었던 가 봅니다. <시편>에 ‘모세’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기도문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0, 12)
흔히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들 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한 호언(豪言) 내지 허세(虛勢)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우리의 ‘모세’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무상과 그 허무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니다(참고. 10절).
그러나 그는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인생은 칠십부터야”하며 허세를 부리고 있지도, 그렇다고 “인생은 허무해”하며 장탄식(長歎息)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허무와 절망을 하나님에게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즉 인생의 한계를 알고, 그로부터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참고. 12절).
우리 누구나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 정도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원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지혜가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지혜를 구하고 있는 ‘모세’의 태도는 그 자체로써 이미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지식이 있다 해서 누가 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유한하며, 따라서 우리가 해 아래서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부질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대 실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획한다는 것들이 실은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동안을 위한 것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26, 28, 31)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기까지 하다는 암시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그 점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잠간 만요! 주님께서 어쩌면 그렇게 한가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의식주 문제를 어찌 가볍다 하시는지요? 요즘 하루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기나 하는지요? 새나 백합화나 들풀들이 무슨 노후 걱정이 있겠으며, 자녀 등록금 적정을 할 필요가 있겠으며, 은행 빚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새도, 꽃도, 들풀도 아니거든요! 그런대도 이 모든 것들이 한낱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이생의 걱정거리라니요! 너무 심하신 말씀 아닌가요?”
그분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알아. 네가 무엇을 늘 걱정하며 살아가는지. 하지만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지. 지식은 걱정을 낳겠지만 지혜는 준비를 하는 것이지. 지혜는 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 준비 없이 생명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분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지금 ‘야곱’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보렴. 그는 지금 ‘이집트’에서 평생 구하고 원하던 것들을 대부분 다 얻은 셈이지. 재물이며, 자손이며, 노후의 보장하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말일세. 그런데 그가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땅에서 영원히. 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자신에게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는 하나님의 언약, 즉 “그 땅”에 관한 그분의 약속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온 이후 ‘야곱’의 최대 관심사는 “그 땅”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서 돌아가기는 이제 무망(無望)하게 되었으니, 죽어서라도 그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아들 ‘요셉’에게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30절). 여기서 조상의 묘지는 ‘가나안’의 ‘막벨라’ 동굴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왜 “그 땅”에 묻히고 싶어 했을까? 그에게 조상의 묘가 있는 ‘가나안’의 ‘막벨라’ 동굴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어디에 묻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전능자 하나님께서 어디든 계시지 않겠는가? 이처럼 죽어서 어디에 묻히는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소망은 단순히 조상의 선산(先山)에 묻히고 싶다는 죽어가는 한 늙은이의 부질없는 소망도 아니며, 묘지를 잘 쓰면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미신 때문도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그 땅”은 “미래의 땅”이고 “역사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와 동행하고 대화하셨으며, 그와 그의 후손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결코 과거 추억의 땅으로만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땅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땅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땅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지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그 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름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 내린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시공(時空)”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망라하고 있으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의 가치나, 위치나, 지위는 내가 이루어낸 그 무엇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해주신 지위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즉 내 존재의 가치는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소망도 바로 그 통치 안에 자신의 미래를 영원히 맡기겠다는 믿음의 발로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선지자요, 현자(賢者)요,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얻기를 원했던 “지혜로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앞둔 자의 지혜로움이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만도 아니고, 인생무상과 부질없음을 깨닫는 것만도 아니며, 그래서 마음을 비움으로써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자 함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마음”이란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 아니라, 도리어 채우고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이 결코 가볍다거나 부질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의 강조는 “먼저”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란 먼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것을 말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 통계 조사를 보면 평화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연평도 무력 도발 사건 이후 국민들의 대북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보다 수개월 전에 발생했던 천안 함 피격 사건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영 딴판입니다.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북한의 행동을 규탄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은 싫다는 응답 또한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은 싫다는 것이지요. 이는 평화라고 하는 지고(至高)의 가치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나 신념의 결핍에서 오는 모순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는 “전쟁이 싫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이고, 전쟁에 임할 때는 임전무퇴(臨戰無退)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각오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는 그동안 6․25 사변 이후 육십여 년의 휴전 상태를 거치면서 평화가 저절로 오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살아온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하나님의 나라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 나라를 가꾸고 지키는 것이 모든 일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가치라는 것입니다. ‘웹스터’(Webster) 영영 사전에서 “제자”에 대한 정의를 보면, “제자란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로 되어있습니다. 나는 과연 그분의 제자입니까? 나는 무엇을 대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까? ‘야곱’처럼 나의 영원한 미래, 즉 “그 나라”를 대비하고 있습니까?
조상들과 함께. ‘야곱’이 “그 땅”에 묻히기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30절상). ‘야곱’의 이 말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동의적(同意的) 표현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열조에게로 돌아가다”는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창세기> 화자는 그가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쓰고 있으며(25:8), ‘이삭’이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35:29).
하지만 “열조에게로 돌아가다”는 표현의 이면(裏面)에는 “열조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가다”는 암시가 내포되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하자면 ‘야곱’도 <신약>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과연 <구약>의 백성들도 “부활”을 믿고 있었는지 <성경>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여러 곳에서 <구약>의 인물들이 “부활”을 어렴풋하게나마 믿고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참고. 삼하 12:22-23; 시 49:10-15; 시 73:23-26; 욥 19:25-27). <구약>과 “부활 사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들이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본문들을 통해서도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본문에 대한 독서와 연구를 권하는 바입니다.
‘야곱’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즉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는 약속이 단순히 자기 생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까지도 계속 유효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우리가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 즉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히 13:5; 수 1:5하)는 약속이 우리 생전뿐만 아니라 영원히 유효할 것으로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하나님의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야곱’의 일생에 대해서 아주 주목할 만 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즉 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마쳤다는 전언(傳言)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 장면을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위로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39-40)
우리는 받았으나 그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더 좋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까지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남겨두어야 했던 하나님의 약속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구조를 일곱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교훈과 적용을 위해서 각 단락으로부터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처음 두 단락이 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 ‘야곱’에게 ‘이집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내가 만일 ‘야곱’이라면 “이집트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3. 본문 47:27을 묵상하고 깨달음을 나누어봅시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지 토의해 보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마련해 봅시다.
4.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에 대응되는 구절을 <신약>에서 찾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면 “새 이스라엘” 교회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우리 교회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지 실천 방안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다음 한 주를 위한 구체적 실천 계획과 방안을 놓고 기도합시다.
6. <히브리서> 11:39-40을 먹고, 되새김 해봅시다. 그리고 나눕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