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9과
셈의 계보
김태정 목사창세기 11:10-26약 15분 분량
제 9과: 셈의 계보
9
셈의 계보
(11:10-26)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11:10)
<창세기> 序幕에서 제 4막에 이르기까지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전체 지구와 온 인류였고, 따라서 이곳에서 다룬 모든 사건들은 전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의 범죄나, 대홍수, 그리고 ‘바벨’탑 사건들이 모두 인류의 역사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들입니다. 시기적으로 이 기간을 원 역사(原歷史)로 부릅니다.
그러나 제 5막에서 화자의 관심사는 특별한 한 가문, 즉 ‘셈’(Shem)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한 계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소위 족장시대(族長時代)가 열리게 됩니다.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자면, 제 5막 이후가 후반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반부가 어떻게 끝났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혼돈과 무질서의 절정으로서 인류역사의 종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절망과 어둠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 창조(反創造)의 절정, 즉 창조의 첫 날 이전의 상황, 즉 “땅은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는” 상황으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그 동안 무대를 밝히던 화려한 조명도 모두 꺼지고, 그 위에서 오가던 그 많은 사람들도 뿔뿔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이제 소품들만 여기 저기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을 뿐입니다. 고요와 어둠. 이것만이 그 동안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관객들에게 남은 전부입니다.
그러나 연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서 은은하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한 줄기 섬광이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무대의 한 귀퉁이에 서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여기저기서 조명이 들어오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다시 바빠지면서 무대는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창세기> 후반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으며, 그 분위기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에 걸 맞는 빛과 희망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이 빛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둠과 혼란 속에서 그냥 흘러갔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곳은 <태초의 이야기>와 <홍수 이야기>에 이은 세 번째의 창조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셈’의 후예 ‘아브라함’은 ‘아담’과 ‘노아’에 이은 세 번째 ‘아담’으로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족장 이야기>가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 역사의 여러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전체 인류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족장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대부분 그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사-출생, 결혼, 집안싸움, 죽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서 우리는 보다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신학적 메시지나 교훈들을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족장 이야기>의 본격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만, 이곳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아브라함’은 다름 아닌 ‘노아’의 장자 ‘셈’의 후예라는 점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이 새로운 ‘톨레돗’ 즉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두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셈의 후예(톨레돗)는 이러하니라”(11:10); “데라의 후예(톨레돗)는 이러하니라”(11:27). 이 본문이 다루고 있는 계보는 ‘셈’에서 ‘데라’까지 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새로운 단락을 이루고 있다는 또 다른 특징은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라는 세 아들을 낳았으니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이었더라”(11:26).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이러한 표현, 즉 족보의 마지막 사람이 세 아들을 낳았다는 표현은 ‘노아’의 계보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습니다: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5:32). 그리고 이 두 사람 모두 아담처럼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락이 다음에 이어지는 “데라의 계보”(11:27-32)와 전혀 연결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데라 이야기>는 분명 새로운 것으로 다루고 싶다는 것이 화자의 의도로 여겨집니다. 본문이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이룬다는 사실은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26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즉 한 계보의 마지막 인물에 이르러서는 그 계보를 수평적으로 소개하는 방식, 즉 세 아들을 두었다는 식의 표현은 “아담의 계보”를 다루었던 5장에서도 본 바 있습니다. 그 계보의 마지막 인물은 ‘노아’로서 그가 세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5:32).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두 구절을 제외하고 나면 특별히 편집적인 삽입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족보 내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인물이나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계보를 이어가는 방식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로운 반복뿐입니다:
갑은 몇 세에 을을 낳았고,
갑은 을을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다만 족보의 처음과 마지막 인물인 ‘셈’과 ‘데라’의 경우에는 이러한 반복되는 표현에서 약간 일탈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셈’의 경우에는 그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는 표현을 추가하고 있는가 하면(10절후), ‘데라’의 경우에는 그가 칠십 세에 세 아들을 낳은 후 몇 년을 지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26절).
“셈의 계보”를 <창세기> 내의 다른 계보와 비교했을 때 일련의 흥미로운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선 “아담의 계보”(5:1-32)에 있는 각 인물에 대한 세 번째 표현(밑 줄 친 부분)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갑은 몇 세에 을을 낳았고,
갑은 을을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도합)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
또 한 가지 “셈의 계보”가 단순하고 무미건조하다는 점에서 “아담의 계보”(5:32-6:8)나 “이스마엘의 계보”(25:12-18)나 “에서의 계보”(36:1-8)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들 짧은 계보는 항상 다음에 긴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계보”가 <대홍수 이야기>로 연결되고 있는 것처럼, <족장 이야기>(11:27-50:26)도 역시 각 족장에 관한 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짧은 계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셈의 계보(11:10-26):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2) 아브라함의 이야기(11:27-25:11):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3) 이스마엘의 계보(25:12-18):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4) 야곱과 에서 이야기(25:19-35:29):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5) 에서의 계보(36:1-43): “에서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6) 요셉 이야기(37:2-50:26): “야곱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렇게 볼 때 각 계보는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한 서막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예를 들어 “셈의 계보” 역시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에 대한 서막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담의 계보”와도 밀접하게 연결이 되고 있으며, 특히 본문 중에 대홍수에 관한 언급을 삽입시킴으로써 “셈의 계보”를 원 역사의 사건들과도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결국 본문의 문학적인 기능은 <창세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시켜 주는데 있습니다.
본문의 자료나 전승과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은 ‘메소포타미아’ 문헌과의 연계성입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에벨’이나 ‘스룩’, ‘나홀’, ‘데라’, 및 ‘벨렉’ 등의 이름들은 이 지역에서 지명이나 사람 이름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의 족보-홍수 이야기-홍수 이후 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서술 방식에 있어 두 문헌이 너무나 닮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수메르’ 왕조의 계보를 보면 일부 왕들은 홍수 이전에 천문학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통치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홍수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홍수 이후 왕들의 통치 기간이 다소 짧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긴 통치 기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왕이 아니라 대부분 평민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전체 기간도 훨씬 짧다는 점 정도입니다. 분명 두 문헌 사이에 일단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단언키는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본문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 또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사제 문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본문이 “아담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던 것인지, 또는 이 계보를 모방하여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신학과 신앙
“셈의 계보”는 두 번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본문과 ‘노아’의 세 아들의 계보를 다루고 있는 본문입니다(10:21-31). 우리는 두 족보에서 두 가지 정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본문에서는 ‘셈’의 첫 아들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본문에서는 더 많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이곳에서 ‘셈’의 후손들은 ‘셈’에서 ‘아브람’까지 모두 10대에 걸쳐있습니다. 앞의 계보와 비교해 볼 때 인물의 수가 두 배, 즉 다섯 명에서 열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은 ‘르우’, ‘스룩’, ‘나홀’, ‘데라’, 그리고 ‘아브람’인데, 이중 첫 세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에서도 장소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꼭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화자가 이들 족보에 나타나고 있는 일부 인물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 조상으로 알려지고 있는 ‘에벨’(히브리와 발음이 유사함)은 ‘아담’의 14대 손으로서 이 족보의 한 가운데 즉 일곱 번째에 ‘에녹’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벨’에서 ‘아브람’까지 다시 7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아브람’은 ‘셈’의 10대 후손이 되며, ‘아담’으로부터 계산하면 20대에 해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70인 역을 따른다면(누가복음 3:36처럼)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게난’을 넣어야 하므로, 그럴 경우 ‘아브람’은 ‘아담’의 21대 후손이 됩니다. 그 결과 이들 족보에서 각별한 세 인물 ‘에녹’과 ‘에벨’과 ‘아브람’은 모두 7내지 10으로 나누어 질수 있는 세대에 속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정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셈’이 첫 아들을 낳은 해가 그의 나이 100세, 즉 홍수 후 2년이 경과했다는 언급과 관련한 문제입니다(11:10). 앞의 기록에 따르면(5:32),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때는 그의 나이 500세가 된 후였고,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는 600세였습니다(7:6). 그렇다면 홍수가 나던 해에 ‘셈’의 나이는 102 살이 아니고 100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일부 학자들은 성경의 숫자는 대략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예로써 ‘야벳’을 노아의 첫 아들로 본다면 노아가 500세 되던 해에 태어났고, ‘셈’은 둘째 아들로서 약 2년 후에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럴듯한 견해이기는 하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운 주장입니다.
족보와 관련한 더 큰 문제점은 고대의 대표적인 세 번역본들이 각기 다른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도표).

우선 가장 뚜렷한 차이로 들 수 있는 것은 <칠십인 역>에서는 새로운 한 인물 ‘가이난’을 추가하고 있는데, 단순한 필경 상의 오류가 아니라면, 아마도 두 가지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셈’에서 ‘데라’까지의 전체 족보를 10대로 조절함으로써 ‘아담의 계보’(5장)와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셈’에서 ‘아브람’까지 세대 수를 가능하면 길게 늘이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칠십인 역에 따르면 ‘가이난’과 그의 첫 아들 ‘셀라‘는 모두 같은 나이에 첫 아들을 낳았고(130 세), 그 후 같은 수명을 누렸는데(330 세), 이는 상당히 의도적인 후대의 편집으로 보입니다.
이 도표에서 발견하는 또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 역>은 공통적으로 첫 아들을 낳은 나이와 관련해서, <마소라> 사본의 기록으로부터 숫자 100을 더하고 있고(‘나홀’과 ‘데라’의 경우는 예외이긴 하지만), 이후 살았던 나이와 관련해서는 100을 오히려 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칠십인 역>보다 <사마리아 오경>에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가장 간단한 설명으로써 역시 필경 상의 오류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도표에서 <마소라> 사본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람’은 ‘아르박삿’이 태어난 지 290년 뒤에 태어났고, 10대에 걸친 그의 모든 조상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습니다. ‘셈’의 경우만 하드라도 ‘아브람’이 태어난 지 35년 뒤에 죽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각 인물의 나이에 100(또는 50)을 더함으로써 각 세대 간의 시간을 늘리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 역>의 두 사본에서 그런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예로써 <칠십인 역>에 의하면, ‘아브람’과 함께 살았던 조상들의 수는 3대로 그치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만일 각 세대에서 첫 아들을 낳은 이후 살았던 나이를 좀 더 과감하게 줄이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들게 될 것인데, <사마리아 오경>의 기록이 바로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록에 따르면 ‘아브람’이 태어날 때 생존해 있었던 인물은 그의 아버지 ‘데라’뿐입니다. 그리고 ‘데라’가 이후 생존해 있었던 수명을 135살에서(마소라) 75살로 줄이게 되면(<사마리아 오경>), ‘데라’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기 전에 이미 죽었습니다(참고, 11:32).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세 번역 본 중에서 <마소라 사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 족장들의 수명과 관련해서, 비록 5장의 “아담의 계보”에 비해서 상당히 짧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역사적 기록으로 다루기에는 엄청난 기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들 중 일부 족장들의 수명은 후대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짧아지긴 했습니다. 예로써, ‘아브라함’은 나이 86세에 첫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고, 175세에 죽었는가 하면 이삭도 180세에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이 족보에 소개하고 있는 숫자들은 사실적인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상징적인 숫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직 구체적인 상징이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셈’의 계보가 홍수 이전의 “아담의 계보”에 비해서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격하게 줄어든 인간의 수명입니다. ‘셈’의 600세를 기점으로 해서 ‘데라’에 이르러 300세 정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성경>에는 두 번에 걸쳐 침묵기가 있습니다. 침묵기란 하나님의 계시나 특별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은 시기를 말하는데, 한 번은 흔히 <신구약> 중간기로 알려진 400 년의 기간으로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스가랴’ 이후 침례 ‘요한’의 탄생에 이르는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철저하게 침묵하셨고, 아무런 예언이나 계시가 없습니다. 또 한 번의 기간이 바로 본문이 다루고 있는 시기로서, ‘바벨’탑 사건으로 민족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진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시기 까지를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화자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23절에 걸쳐 ‘셈’과 ‘아브람’에 이르는 그의 후손들의 족보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물론 이 계보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 시기를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쇠퇴와 타락을 거듭하다 급기야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를 당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셈’은 홍수 이전과 이후를 이어주는 전환기적인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는 역사적 진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언약”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1:28; 9:1). ‘바벨’탑 이후 새로운 인류의 역사가 ‘셈’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셈’의 순종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이르면(11:26) 무대는 드디어 <족장 이야기>를 위한 모든 준비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는 그 동안 우리가 꾸준히 관찰해 왔던 <창세기>의 전반부(1-11장)를 통해서 이미 기반을 다져놓은 상태입니다.
즉 서막인 제 1장에서 화자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 세계의 본성에 대해서 그리고 있고, 이어지는 <에덴 이야기>(2-3장)를 통해서 가정의 의미와 인간의 범죄, 그리고 그 범죄로 인한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분열과 소외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인류의 역사는 오랜 세월을 이어갑니다. 아마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점차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고 보실 수가 없을 정도로까지 타락하게 되었다고 화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5장). 오직 ‘노아’ 한 사람만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대홍수는 이러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반 창조의 절정이었습니다(6-9장).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들만이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의 조상이 되었고(두 번째 ‘아담’), 이어지는 10장에서 인류의 족보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웃 민족들과 지정학적으로 구별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는(11:1-9)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이름과 지식과 힘을 뽐내려 하다가 오히려 저주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홍수 이후 생육하고 번창하면서 온 지구를 뒤덮을 줄 알았던 그 인류가 다시 한 번 소멸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으로 온 인류의 언어가 나누어지고 혼란과 혼돈이 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벨렉’(10:25) 이후 불과 다섯 세대 만에 세 번째 ‘아담’, ‘아브라함’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인내와 자비를 깨닫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어지는 12:3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바로 이 한 사람을 통해서 다시 모든 인류가 복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 짧은 “셈의 계보”는 마지막 인물 ‘데라’의 후손으로 ‘아브람’을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기록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진노를 늘 능가해 왔습니다. 그분은 한 가계를 삼대 내지 사대까지 벌을 줄 수도 있지만, 천대에 이르도록 자비를 베푸십니다(신 5:9; 7:9). 우리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고 생소한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눅 3:34-36).
연습과 토의
1. “셈의 계보”가 <창세기>의 제 5막으로서 갖는 문학적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형식적인 특징이 있습니까?
2. “셈의 계보”가 <창세기>의 제 5막으로서 갖는 신학적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형식적인 특징이 있습니까?
3. 이 과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