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의사소통입니다. 흔히 말하는 문화충격(culture shock) 정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지고 견딜만해 지는데, 언어장벽만큼은 좀처럼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일이 년 정도 지나면 그런 대로 불편 없이 할 수 있습니다만, 희로애락의 깊은 감정을 자신의 모국어로 하듯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손짓 발짓 해가며 나를 알려보기도 하지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 해 본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문화나 문명을 구분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도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미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앞으로도 세계사의 주역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多言語圈으로 이루어진 복합문화정책을 포기하고 같은 영어 사용권인 영국과 단일 문화권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숨 섞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이처럼 나라마다 언어가 틀릴까? 이 모든 언어들은 모두 어디서 나왔을까? 모든 인류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을까?”
<창세기>의 네 번째 ‘톨레돗’(10:1-11:9)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이나 언어학은 오늘날 이처럼 다양한 언어와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성경>만이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홍수 이후 온 땅에 흩어져 살게 된 민족과 족속들의 계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홍수 이후의 모든 인류는 한 조상, 즉 ‘노아’와 그의 세 아들로부터 나와 온 땅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2) 이렇게 흩어져 살게 된 각각의 민족이나 족속들은 저마다 다른 언어를 가지고 살아갔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네 번째 ‘톨레돗’의 전체적인 구조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노아’의 세 아들과 후손들의 계보(10:1-32)
(2) ‘바벨탑’ 이야기(11:1-9)
이처럼 두 단락은 같은 내용, 즉 모든 인류가 온 땅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도, 일견 상관도 없고, 상호 양립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두 내용을 하나의 편집 단위로 묶을 수 있는 것도, 11:10에서 시작되는 다섯 번째 ‘톨레돗’-‘셈’의 후손들의 계보-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10장만을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로 10:1과 10:32의 두 절의 수미상관적 기능을 들 수 있습니다: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10:1)”;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10:32).”
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단락을 통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긍정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관점을 보더라도 하나의 조상, 한 형제, 그리고 한 인류라는 의미가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온 땅으로 흩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11:1). 그래서 만일 <바벨탑 이야기>가 두 번째 단락에서 이어지지만 않았다면, 네 번째 ‘톨레돗’의 결말은 해피 앤딩 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서로 형제애를 발휘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퍼져 살게 되었다.” ‘아담’의 언약에 이어 ‘노아’의 언약이 그대로 성취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락은 어떻게 인류가 그처럼 다양한 언어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후손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과 남한의 경우처럼 서로 떨어져 오래 살다보면 말이라고 하는 것도 다소 의미가 변질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지구상에 수천 개의 방언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두 번째 단락의 <바벨탑 이야기>가 기능하는 바는 첫 번째 단락과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여러 민족과 다양한 언어의 기원을 다루는데 있습니다. 그것도 인류가 흩어져 살게 된 경위를 아주 부정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인류가 지구상에 흩어져 가는 모습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을 이루어간다는 비교적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은 ‘바벨탑’ 이후 그 동일한 인류가 온 땅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반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편의 상 이를 “바벨탑의 반역”으로 명명하겠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에 비해서 훨씬 짧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아주 강력합니다.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온 땅에 퍼져 가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명령을 거역하고, ‘바벨’이라고 부르는 한 장소에 모여 자신들의 힘을 결집시켜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쳐들어가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계획을 통해서 뜻을 이루고, 그 이름을 더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꿈과 희망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산산이 흩어놓으십니다. 다시는 그들이 단합하여 하나님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는 ‘아담’에게 내려진 죽음의 저주(3:15-19)와 ‘아담’에서 ‘노아’까지 인류를 향한 홍수의 저주(6:1-4)에 이은 세 번째 저주이자 마지막 저주로서, ‘노아’ 이후 인류의 역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반 창조(反創造)의 절망과 혼돈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제 인류는 더 이상 하나의 언어로 뜻과 마음이 통하는 한 가족, 한 형제가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이방인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역사가 이처럼 앞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야기 방식이 <창세기> 1-11장 전체의 구성 원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네 번의 ‘톨레돗’은 모두 밝고 긍정적인 일화로 시작되었다가 한 결 같이 어둡고 부정적인 일화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첫 번째 ‘톨레돗’인 “천지의 계보”에서(2:4-4:26) 아름답고 선한 <창조 이야기>는 ‘아담’의 타락과(3장) ‘가인’의 살인으로 끝이 나버립니다(4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톨레돗’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온 땅에 퍼져 가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5:1-6:8). 그러나 이들의 계보 역시 타락과 혼돈으로 얼룩져 있으며, 사람의 딸들과 신의 아들들의 결혼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다가 종국에는 홍수의 심판으로 끝이 납니다(6-8장).
그러나 홍수는 끝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재창조를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와 언약을 맺고 찬란한 무지개를 그 증거로 내세우면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역시 ‘노아’와 ‘함’의 실수로 그 빛이 바래고 맙니다(9장). 세 번째 ‘톨레돗’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저주하는 이야기로 비극적 종말을 고합니다(6:9-9:28).
이러한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톨레돗’은(10:1-11:9) 시작부터‘노아’의 후손들이 다시 한 번 생육하고 번성해서 온 땅으로 퍼져갔다고 말합니다. 저주받은 ‘함’의 후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의 반역”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역사는 혼미와 어둠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맙니다(11:1-9).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때까지 인류의 역사는 어둠 가운데 내버려져 있게 됩니다.
이처럼 <창세기> 1-11장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구성상의 원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모티브나 주제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깨달음을 간단히 피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7과: 노아의 후손들
7
노아의 후손들의 계보
(10:1-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10:32).
문학과 역사
앞에서도 밝힌 바처럼, <창세기>의 네 번째 새로운 이야기는 두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노아’의 후손들의 계보(10장)
(2) ‘바벨’탑 이야기(11:1-9)
그러나 이 두 단락에서 드러나는 시각이나 입장의 차이가 너무나 대조적이라서 각기 별도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10장의 구조와 구성은 아주 뚜렷합니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나면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 할 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이 서론과 결론에서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10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은 전체 인류를 셋으로 나누는 방식에 따라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각기 일정한 틀을 지니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래 도표를 통해서 일련의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본문은 전체적으로 느슨하기는 하지만 일종의 교차대구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노아’의 세 아들이 등장하는 순서가 ‘셈’-‘함’-‘야벳’이던 것이 이어지는 세 단락에서는 ‘야벳’-‘함’-‘셈’으로 역순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들 세 단락은 각각 족장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동일한 형태의 결론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즉 결론은 각 족장의 후손들과, 언어, 거주지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10:5);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10:20);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10:31). 마지막으로 본문의 전체적인 결론은 서론과 함께 수미 상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과 이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는 중간 세 단락들이 형식상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장 특기할 만 한 내용은 ‘야벳’과 후손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이들 민족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는 가장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화자 역시 이들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나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반면 두 번째로 다루고 있는 ‘함’의 후손들은 ‘바벨론’, ‘이집트’,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로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해서 가장 빈번한 접촉과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관계로 이들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풍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셈’은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선조가 되므로 이들에 대한 기록 역시 상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만 화자가 두 계열의 인류를 열거함에 있어, 버림받은 계열을 선택된 계열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성경 기록 방식이었던 같습니다: ‘가인’과 ‘셋’(4-5장); ‘에서’와 ‘야곱’(37-50장).
전체적으로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모두 70명에 이릅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당시 세계의 모든 인류를 다 망라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숫자 “일곱”의 모티브는 <창세기> 1-11장에서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야벳’의 일곱 아들과(2절) 일곱 손자(3-4절)가 그렇고, ‘함’의 아들 ‘구스’가 또한 일곱 아들을 낳았으며(7절), ‘미스라임’(애굽)도 일곱 아들을 가졌습니다(13-14절). ‘애굽’에 이른 ‘야곱’의 후손이 일흔이었고(46:27), ‘기드온’이나 ‘아합’도 역시 일흔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삿 8:30; 왕하 10:1). 우연인지 몰라도 ‘가나안’의 전승에 의하면 ‘아세라’(Asherah) 신 역시 일흔 명의 아들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성경> 기자들이 큰 무리를 나타낼 때 자주 쓰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내려가 살게 된 이스라엘의 무리 역시 70으로서(46:27; 신 10:22), 화자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이 마치 모든 인류의 축소판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 이름은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과 직접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주변 국가들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비평에 의하면 본문은 <사제(P) 자료>와 <야훼(J) 자료>의 복합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제자료>로 분류할 수 있는 부분은 서론과 결론 및 족보에 관한 기록이며(1절후, 2-7, 20, 22-23, 31-32절), 나머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부분은(1절하, 8-19, 21, 24-30절) <야훼자료>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처럼 두 개의 자료로 정확하게 나누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참고도서 1, 214-215쪽.
마지막으로 본문 내용과 “아담의 계보”나 또는 “노아의 후손들의 계보”(5장 및 11장)와의 유사성에 관한 고찰입니다. 이들 계보들이 모두 사람 이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공통점을 지닌 것 같으나, 그렇게 보기에는 여러 면에서 중대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본문에는 “아담의 계보”나(5:1-32) “노아의 후손들의 계보”(11:10-32)와는 달리, 등장인물들이 얼마를 살았으며 몇 살에 죽었는지 등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둘째, 계보에 실린 이름들 중에서 사람 이름들이 있기는 하지만(예: ‘야벳’이나 ‘니므롯’), 지명이나(예: ‘시돈’이나 ‘스바’), 민족들의 이름(예: ‘루딤’과 ‘갑도림’), 또는 이방족속(예: ‘아모리’나 ‘기르가스’)들의 이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셋째, 조상과 후손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 앞에서 보았던 바처럼,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라는 식이 아니라, “아무개의 아들은 아무개라”라는 식으로 다소 융통성 있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름들이 반드시 후대 그 이름으로 통용되는 족속의 시조가 될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넷째, 자식이나 형제 관계는 고대 세계에서는 혈연관계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조약이나 언약관계를 나타낼 때에도 통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누구의 아들”이라든지 “누구의 아버지” 등과 같은 표현도 반드시 혈연관계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유대관계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로부터 분화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론(1절)
서론은 우리가 그 동안 익히 보아왔던 전형적인 문구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1절상)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족보의 대표로 등장하기는 이곳이 처음이라는 점입니다(다른 곳에서는 모두 “oo의 계보는 이러 하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다”고 언급함으로써(1절후),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10:32)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열국이 나뉘었다”는 진술과 함께, 서론과 결론이 본문 전체에 대한 수미상관을 이루도록 수사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론과 결론에서 각각 홍수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나간 <노아 이야기>(6-9장)를 회고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있을 <바벨탑 이야기>(11:1-9)를 전망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음성학적으로 홍수(‘히브리’어과로 마벨)는 두 번째 단락에서 등장하는 ‘바벨’ 또는 ‘바벨론’(11:9)과 아주 가까워서, 결국 첫 번째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마벨’에서 ‘바벨’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세 단락에서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에 대한 계보를 통해서 민족이나 지역 등의 시조나 기원에 대해서 참고 서적들을 통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Wenham, 216-232쪽(참고 도서 1); Hamilton, 330-348쪽(참고도서 3).
2. 야벳의 후손(2-5절)
두 번째 단락은 ‘야벳’의 후손에 관한 기록과 함께 시작합니다.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2-5절)
서론에서 ‘노아’의 세 아들 중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그가 왜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추측컨대 이들 족속은 당시 이스라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았으며 따라서 접촉이 가장 적었던 국가들이라 자연스럽게 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도 적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소개도 ‘함’족이나 ‘셈’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합니다. ‘야벳’의 일곱 아들과, 이들 중 두 아들로부터 일곱 손자들의 이름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도표).
‘야벳’(Japhet)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의 이름은 후에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멜’(겔 38:6); ‘마곡’(겔38:2; 39:6); ‘마대’(사 13:17; 21:2; 단 5:28; 6:16; 에 6:2); ‘야완’(겔 27:13; 사 66:19); ‘두발’과 ‘메섹’(겔 27:13; 32:26; 38:2-3; 39:1); ‘디라스’대상 1:5); ‘스그나스’(대상 1:6; 렘 51:27); ‘리밧’과 ‘도갈마’(대상 1:6); ‘엘리사’(대상 1:7; 겔 27:7).
이들이 정확히 어떤 민족이나 국가를 지칭하고 있는지 밝히기는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인도-유럽인(Indo-European) 계열에 속하는 아주다양한 민족들의 시조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titans) 족 중의 하나가 그 이름이 ‘야베토스’(Iapetos)라 하여 ‘야벳’을 그리스 인의 시조로 보기도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어떤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야벳’의 첫 아들은 ‘고멜’(Gomer)입니다(선지자 ‘호세아’의 아내와 같은 이름임). 고대 역사가 ‘헤르도투스’(Herodotous)나 ‘스트라보’(Strabo) 또는 ‘플루타크’(Plutarch) 등에 따르면, 이 족속은 원래 러시아 남쪽에서 내려와 주전 7-8 세기경에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킴메르 족’(Cimmerians)으로 불리고 있는 이 족속의 이름은 이들이 거주했던 흑해(Black Sea) 북쪽 연안의 ‘크리미아’(Crimea) 반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이들은 유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갔으며, 정착한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1)프랑스의 ‘골’(Gauls); (2) 스페인의 ‘갈라디아’(Galacia); (3) 영국의 ‘겔트’(Celts); (4) 독일의 ‘게르만’(German). 주지하다시피 이들 세 이름은 모두 ‘고메르’를 이루는 세 개의 자음 G-M-R에서 유래한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이 더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되면 ‘고멜랜드’(Gomerland)가 되고 다시 이로부터 오늘날 영국 서북부의 ‘컴브랜드’(Cumberland), 이탈리아 중북부의 ‘움브리아’(Umbria), 그리고 ‘아이레’(Ireland) 등이 유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멜’의 후손들은, 정확한 경로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아시리아를 거쳐 유럽의 최북단까지 이주해 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야벳’의 두 번째 아들 ‘마곡’(Magog) 역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족속의 왕은 ‘곡’(Gog)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겔 38:2; 39:6.
그러나 ‘마곡’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기는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이 이름이 지명인지 또는 민족의 이름인지조차 분명치가 않습니다. 고대의 어떠한 설형문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흔히 <에스겔서>에 등장한다는 ‘곡’은 아시리아 문헌에서는 ‘구구’(Gugu)로 불리는, ‘리디아’의 왕 Gyges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단순히 추측일 뿐으로서, 이 나라 영토 속에는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지역) 동부 지역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아들 ‘마대’(Madai) 역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 13:17; 21:2; 단 5:28; 6:16; 에 6:2.
‘마대’는 ‘메데’(Medes)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티그리스’ 북부에서 ‘카스피’ 해 사이에 정착해 살던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또 하나의 인도-유럽 민족으로서, 주전 836년 ‘살만에셀’ 3세가 통치하던 시기인 ‘아시리아’ 문헌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전 9-8 세기 경 아시리아의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서 6세기 후반 무렵부터 ‘페르샤’(이란)와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네 번째 아들 ‘야반’(Yavan)은 일차적으로 터키 해안 유역에 살았던 ‘이오니아’(Ionia)계 그리스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헬레니즘 시대) 이 이름은 그리스인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되기도 했습니다(단 8:21; 10:20). 그러나 중동과 그리스 간의 접촉은 주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또한 ‘두로’(Tyre)의 ‘페니키아’ 족속들이나 ‘블레셋’ 족속들과 이미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겔 27:13; 욜 4:6).
한 설형문자 기록에 따르면, ‘다발’(Tabal)과 ‘무스키’(Muski)를 ‘아나톨리아’의 중동부 지역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메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스키’ 족속이 역사적으로 처음 소개되기는 주전 1100 년경으로서, 이들은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티글랏-빌레셋’ 1세 왕과 한 바탕 결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의 수도는 ‘마자카’(Mazaca)로서 오늘의 ‘카이세리’(Kayseri)에 해당합니다. ‘다발’(Tabal)은 ‘길리기아’(Cilicia)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8세기 경 이 두 족속은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운 바 있습니다. 그러나 709 년에는 아시리아의 유명한 ‘미다스’ 왕(King Midas)(아시리아에서는 ‘미타’ 왕)이 오히려 한 편이 되어 ‘키메르’족(Cimmerians)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헤르도투스’는 이 왕을 ‘프리지아’(Phrygian) 족속으로 확인하고 있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프리지아’ 인들은 유럽을 통해 ‘소아시아’로 이주해 왔으며, 반면 ‘무스키’ 족은 동쪽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이후 이 두 민족은 ‘아시리아’로 불리는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페르샤’ 제국은 ‘무스키’와 ‘바달’의 남은 자들을 함께 모아 ‘아나톨리아’ 북동 지역에 19번째 총독 구역을 신설하게 됩니다. 그리스 문헌에서는 이 들을 ‘모스코이’(Moschoi)와 ‘티바레노이’(Tibarenoi)로 부르고 있습니다.
‘야벳’의 마지막 아들 ‘디라스’(Tyras)는 <성경>에서 이곳 외에 <역대기>에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대상 1:5). 다른 문헌에서도 이들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혹자는 이 족속을 13 세기 말 ‘이집트’를 공격한 해양 족의 하나인 ‘투루사’(Turusa)로 확인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에게 해’(Aegean Sea)의 해적이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기원은 ‘소아시아’의 ‘리디아’ 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디라스’를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시기적으로 이들이 ‘키메르’ 족의 침입으로 그 지역으로부터 쫓겨나기 이전의 시기에 관한 기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벳’의 첫 아들 ‘고멜’에게는 ‘아스그나스’(Ashkenaz), ‘리밧’(Riphath), 그리고 ‘도갈마’(Togarmah)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 역시 아주 흥미롭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스그나스’는 ‘바벨론’을 공격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요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땅에 기를 세우며 열방 중에 나팔을 불어서 열국을 예비시켜 그를 치며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 나라를 불러 모아 그를 치며 대장을 세우고 그를 치되 사나운 황충 같이 그 말들을 몰아오게 하라”(렘 51:27).
‘아스그나스’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름은 수도 없이 많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옥한 초생달로 부르는 ‘팔레스타인’ 북부에 정착했던 민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이 이름은 다른 지명이나 족속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아스케니우스’(Ascanius) 호수라든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아스케니’ 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이름은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후에 이들 중 일부는 트로이 전쟁 당시 ‘트로이’ 인이 되어 ‘트로이’의 왕자 Ascenius를 위해서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이후 독일 지역으로 이주하여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독일인을 부르는 다른 이름, ‘아스그나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아스그나스 유대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고멜’의 두 번째 아들 ‘리밧’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들이 흑해와 ‘비투니아’ 근처에 살고 있던 ‘파팔라고니아’ 족(Paphalagonians)의 시조일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유럽’이라는 이름이 ‘리밧’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도갈마’는 <성경>에서 ‘야반’이나 ‘메섹’, 그리고 ‘두발’ 등과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겔 27:13-14; 38:3-6.
고대 아시리아와 ‘헷’(Hittite) 족속의 문헌에서 ‘테가라마’(Tegarama)로 불리는 한 지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리아’와 ‘카니스’(Kanish) 간의 무역로 상에 위치하고 있는 ‘카르케미쉬’(Karchemish) 북쪽의 한 도시와 그 주변을 포함하는 한 지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야완’의 네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이 필요합니다. 우선 첫 아들로 보이는 ‘엘리사’(Elisha)는 아마도 인접 족속들의 문헌에서 등장하고 있는 ‘알라시야’(Alasiya)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키프로스’(Cyprus) 섬을 의미하든지 또는 적어도 그 섬의 일부분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주전 2천 년 중반 경에 이 섬에 그리스 식민지가 수립되었고, 이 사실로 미루어 보드라도 ‘엘리사’가 ‘야반’의 아들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혹자는 ‘엘리사’를 사람 이름이 아닌 지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한 가지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야반’의 또 다른 아들 ‘깃딤’(Kittim) 역시 ‘키프르스’와 동일 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아들 ‘달시스’(Tarsis)도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긴 하지만 그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중해를 따라서 서쪽으로 가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욘 1:3; 4:2). 그리고 이 도시는 ‘솔로몬’ 궁정에 갖가지 호화스러운 물선들을 제공해주는 공급처로서, 품목 중에는 금이나 은, 상아, 그리고 원숭이도 있었습니다(왕상 10:22). 일부 학자들이 ‘달시스’를 ‘스페인’ 서쪽에 위치한 ‘타르테소스’(Tartessos)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구약> 세계의 범위가 그토록 넓게 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입장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에살하돈’(Esarhaddon)이 ‘키프로스’(Cyprus)에서 ‘야만’(Yaman)을 거쳐 ‘다시스’(Tarshish)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제국과 그 왕들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지역에 스페인의 ‘타르테소스’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창세기> 10장 역시 ‘타르테소스’에 있는 ‘페니키아’(Phoenician) 식민국을 그리스의 선조로 그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달시스’가 ‘사르디니아’(Sardinia)의 ‘튜니스’라든지, ‘로데스’(Rhodes)라든지, 또는 ‘아나톨리아’ 서쪽 지역일 것이라는 등의 이런저런 견해들이 제시되긴 했지만 이중 어느 것도 확신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나마 가장 가능한 지역으로 한 때 페니키아 식민지였던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를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세 번째 아들 ‘깃딤’(Kittim)은 일반적으로 ‘키프로스’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러 번에 걸쳐 ‘깃딤’을 단순히 한 마을의 이름이 아닌 민족이나 지역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민 24:24; 사 23:1; 겔 27:6). 그런대 왜 ‘깃딤’이나 ‘엘리사’를 모두 ‘키프로스’로 확인하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에스겔은 이 두 이름을 나란히 등장시키고 있어(겔 27:7), 두 이름이 별도의 지역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합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깃딤’은 단순히 ‘키티온’(Kition) 도시를 의미하고, ‘엘리사’는 ‘키프로스’ 전체 섬을 의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이 역시 썩 만족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 번째 아들 ‘도다님’에 대해서는 여러 <구약> 사본에서 ‘로다님’(Rhodanim)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도’(ד)와 ‘로’(ר)의 두 ‘히브리’ 문자를 혼돈하기 쉬운데서 오는 필경 상의 오류였을 것이라고 쉽게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만, 어느 쪽이 원본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로다님’을 ‘로데스’(Rhodes)의 주민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도다님’을 더 오랜 이름으로 가정한다면, 이는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로 북쪽의 ‘다누나’(Danuna) 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람세스’ 3세의 비문에 ‘이집트’를 침범한 해양 족속들 중의 하나로 ‘Dnn’ 족을 언급하고 있고, ‘호메르’의 서사시에서도 ‘트로이’를 침공한 자들을 ‘Danaeans’으로 일컫고 있기도 합니다. ‘사르곤’ 2세의 비문에서는 ‘야다나나’(Yadanana)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마 그리스 언어를 쓰는 ‘키프로스’ 주민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고대 문헌들에서 ‘Dnn’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다님’과는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야벳’의 후손들이 어떻게 퍼져 갔는지 언급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10:5). 물론 ‘야벳’의 모든 후손들이 다 해양 민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야벳’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함이나 ‘셈’(Shem)의 후손들에 비해서 짧고 간단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 기록이 더 솔직하고 정확한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겠죠.
결론적으로 ‘야벳’의 후손들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로부터 가장 멀리 흩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선지자 ‘에스겔’도 이들이 북장 가장 먼 곳으로부터 온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 내리라”(겔 38:6). ‘소아시아’나 지중해 연안의 섬들은 지리적으로 서쪽에 위치해 있고, ‘시리아’나 ‘아시리아’는 동쪽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이들 모두는 북쪽에 위치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3. 함의 후손(6-20절)
‘함’(Ham)의 후손들은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민족들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보듯이 이들은 고대 세계에서 이스라엘과는 불구대천지 원수지간으로 지냅니다. 따라서 <창세기> 화자도 이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셈’의 족보만큼이나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15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6-20절)
‘함’의 계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네 아들 ‘구스’(Gush), ‘미스라임’(또는 이집트), ‘가나안’(Canaan), ‘붓’(Puth)이 등장하고 있는데(6절), 이들 중 ‘붓’을 제외한 세 사람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이름들입니다. ‘구스’는 서북 아프리카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며, ‘미스라임’은 ‘이집트’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팔레스타인’ 땅의 일곱 원주민들입니다. 이들 이름이 남에서 북의 순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은 때로 아프리카의 ‘소말리아’나 ‘리비아’ 등과 동일시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기 ‘바벨론’, ‘이집트’, 그리고 ‘가나안’에 흩어져 살면서 ‘아브라함’ 이후 ‘바벨론’ 포로 시절까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세 지역은 ‘아브라함’의 전체 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 기자가 ‘함’의 계보를 다루면서 지역적 연관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첫 번째 가계는 ‘구스’의 후손이 살던 ‘메소포타미아’의 북쪽(‘하란’, ‘니느웨’, ‘아시리아’)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남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은 단연 ‘니므롯’(Nimrod)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8절상). 그런데 화자가 ‘니므롯’을 소개하는 방식이 아주 특이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 두 절에서 ‘함’의 네 아들(‘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을 소개한 다음, 이어서 장자 ‘구스’의 여섯 아들 중에서 다섯 명만 언급한 채(‘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 곧바로 다음 세대 즉 ‘라아마’(Raamah)를 통해서 낳은 ‘구스’의 두 손자(‘스바’와 ‘드단’)만을 족보의 형식으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6-7절). ‘구스’의 후손들은 모두 ‘아랍’과 그 인근 지역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스’의 첫 아들 ‘스바’(Seba)는 중요한 교역 장소였음이 분명합니다만(시 72:10; 사 43;3), 이곳이 ‘이집트’ 상류의 한 지역이라든지(‘요세푸스’), 또는 ‘시바’(Sheba)를 잘못 표기한 것이라는 등의 주장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윌라’(Havilah)는 2:11에서 나오는 그 이름과 동일한 단어이기는 하나,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만약 그 어원이 ‘모래’(לןח)를 뜻하는 것이라면 ‘아라비아’의 어느 한 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창 25:18; 삼상 15:7). ‘삽다’(Sabtah)는 이곳과 <역대기>에서(대상 1:9) 유일하게 등장하는 이름으로서, 물론 다른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오늘날의 ‘아바레’(Abare)에 해당하는 ‘아스타보라스’(Astaboras)입니다. ‘라아마’(Raamah)는 <에스겔서>에서 언급하고 있는(겔 27:22) ‘시바’(Sheba)와 관련한 교역 장소일 것인데, 때로 ‘라그마’(Ragmah)로 불리기도 하며, 북 ‘예멘’의 ‘니그람’(Negram) 근처의 한 지역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자 ע가 ‘아라비아’ 문자 g로 음역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아마’를 ‘시바’와 ‘드단’과 연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지역적인 연결 고리일 것인데, 예를 들어 아라비아에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삽드가’(Sabteca)의 지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견해는 없습니다만 혹자는 아라비아의 여러 지역으로 확인하고 있기도 합니다. ‘라아마’의 첫 아들 ‘스바’(Sheba)에 대해서는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로써, ‘욕단’(Yogtan)의 아들과 ‘아브라함’의 손자의 이름이 모두 ‘스바’였습니다(10:28; 25:3). 이 이름은 이스라엘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솔로몬’ 왕 재위 시에는 유명한 무역 장소이기도 했습니다(왕상 10:1-13; 시 72:10, 15; 사 60:6). ‘스바’ 왕국은 주전 1000 년 초기에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그 수도는 ‘아라비아’ 남서 지방의 ‘아덴’으로부터 200 마일 북쪽에 위치한 ‘마리브’(Marib)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단’(Dedan) 역시 ‘라아마’의 아들로서 ‘시바’와 함께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함께 거명되고 있습니다(25:3). 이 역시 중요한 무역 장소였으며(겔 27:20; 38:13), 현존하는 비문(碑文)에 의하면 ‘데마’(Tema)로부터 남서쪽으로 70 마일 떨어진 ‘알-알룰라’(Al-Alula)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정착 시기도 ‘스바’와 마찬가지고 주전 1000 년경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족보는 ‘구스’의 손자 계보이거나 또는 그 다음 세대일 것이나, 느닷없이 앞에서 빠뜨렸던 ‘구스’의 여섯 번째 아들 ‘니므롯’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점입니다(8-12절). 그리고 서술 방식도 단순한 족보가 아닌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니므롯’과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는 과연 어떤 자였을까?; (2)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화자는 그를 “여호와 앞에서 특별한 사냥꾼”이자, ‘아시리아’(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 건설자”로 부름으로써, 이 지역을 아주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을 가리켜서도 “전사”(戰士)(8절), “도시를 건설한 자”(12절), 또는 “특이한 사냥꾼”(9절)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러한 타이틀은 모두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이상적인 영웅이나 왕들에게 붙여준 것들입니다. 흔히 ‘니므롯’을 ‘바벨론’의 수호신 ‘마르둑’(Marduk)이나 또는 전쟁과 사냥의 영웅 ‘니누르타’(Ninurta)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또는 ‘아카드’(Akkad)의 ‘사르곤 1세’(Sargon I)나 ‘아시리아’의 ‘니누르타 1세’(Ninurta I)로 보기도 합니다. 그가 실제 인물이든 아니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는 비문들에 의하면, 이 지역 왕들이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업적이란 것이 토목이나 건설 및 사냥 기술 등과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오늘날의 정치가나 관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두 번째 질문, 즉 ‘니므롯’의 어원에 대해서도 그 기원을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번역하자면 “우리가 반역을 꾀하자”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적절한 이름입니까? 그의 이름은 이어지는 이야기 “바벨의 반역”을 예고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1:1-9). 따라서 우리가 이곳에서 암시 받는 바는 ‘바벨’은 ‘니므롯’ 제국의 중심지였고, 바로 이 자야말로 그 가증스러운 반역을 주도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10절). ‘니므롯’과 관련하여 적어도 세 개의 도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바벨론’(Babylon)-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이 도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로서 ‘바그다드’의 남서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2) ‘에렉’(Erek)-‘우룩’이라는 옛 이름을 지녔던 오늘날의 ‘와르카’(Warka)로서, 이 역시 ‘수메르’의 중요한 도시였으며(주전 3-4천 년)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160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3) ‘악갓’(Accad)-‘아카드’(Akkad)의 ‘사르곤’ 왕조의 수도로서, ‘바벨론’ 북쪽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갈레’(Calneh)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는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 도시가 ‘하맛’(Hamath)이나 ‘아르밧’(Arpad) 등과 함께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암 6:2), 이로 미루어 이 도시가 ‘시리아’의 북쪽 어디쯤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이 도시가 ‘시날 땅’(the land Shinar), 즉 ‘수메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갈레’의 북쪽이 아니라면 남쪽 지역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한 가지 교훈적인 메시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대든 자, 바로 그러한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는 곳이 바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그리스 신화 속의 한 인물이 있다면 다름 아닌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던가요?
‘니므롯’의 행적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이라”(10:11-12). ‘니느웨’(Nineveh)는 ‘아시리아’에서 ‘아수르’(Ashur)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주전 4500 년경에 최초로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유적들은 오늘날 ‘모술’(Mosul) 맞은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르호보딜’(Rehobot-Ir)은 문자적으로 ‘도시 광장’을 뜻하는데, 아마 ‘니느웨’ 외각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라’(Calah)는 오늘날 ‘니므루드’(Nimrud)로서, ‘니느웨’로부터 남쪽으로 24 마일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최초 이 도시가 건설되기는 주전 3천 년 초로 보이나 기록 문헌에 나타나기는 1250 년 이후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9세기 ‘아시리아’의 수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레센’(Resen)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은 ‘아시리아’ 제국 내에서 여러 곳이 있습니다만, 어느 지역도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있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니느웨로부터 남쪽으로 8 마일 떨어진 ‘티그리스’ 강변 오른 쪽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함’의 계보는 ‘미스라임’(이집트)의 후손들로서 ‘가나안’의 반대편 끝 ‘이집트’를 중심으로 살던 족속들입니다: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13-14절). 한 가지 이들 이름과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일곱 명 모두 ‘임’(im)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 아들 ‘루딤’(Ludim)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만(렘 46:9), 이 이름의 단수 형 ‘루드’(Lud)는 ‘셈’의 아들이기도 합니다(10:22). 그리고 이 이름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데(사 66:19; 겔 27:10; 30:5), 모두 ‘리디아’ 족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루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집트’ 근처에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말입니다.
‘아나님’(Anannim) 역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한 지역일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르하빔’(Rehabim)은 통상 ‘루빔’(Lubim)의 다른 표기 방식으로서, ‘이집트’ 서쪽의 ‘리비아’ 족속을 말합니다.
‘납두힘’(Naphtuhim)은 일부 번역본에서 ‘펜타스키나이’(Pentaskinai)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이집트’의 삼각 델타 근처의 한 지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드루심’(Pathrusim)은 ‘이집트 상부’, 즉 ‘카이로’에서 ‘아스완’에 이르는 남부 지역을 뜻하는 ‘이집트’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슬루힘’의 의미를 추적하는 일은 상상에 그칠 뿐입니다. <탈굼성경>에서는 ‘펜타폴리타이’(Pentapolitai)로 번역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나일’ 델타 동쪽의 ‘카시오스 산’(Casios)의 주민을 뜻하기도 하며, ‘소아시아’의 ‘Scylace’를 뜻하기도 합니다. “블레셋이 가슬루힘으로부터 왔다”는 언급은 차라리 ‘갑도림’ 다음에 두어야 옳을 것 같은 것이, <구약>의 여러 곳에서 그들이 ‘갑돌’(Caphtor)에서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암 9:7; 렘 47:4). 그러나 ‘가슬루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결코 단정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블레셋’이 이들 두 이름 모두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블레셋’이 사사기 이후에 등장하는 ‘블레셋’과는 다른 족속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갑도림’의 일부는 ‘가나안’ 남서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전히 혈연관계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갑도림’은 ‘야벳’ 족속의 후손에 속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차례 목도하듯이, 민족들의 목록을 소개할 때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 즉 지리나 언어, 정치 및 사회적인 요소까지 고려하기 때문에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15-20절) 소개하고 있는 ‘함’의 후손들은 ‘가나안’의 열 한명의 아들로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하려고 왔을 때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원주민들의 조상들입니다. 기자가 이들의 이름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도 범상치 않지만, 그들이 살던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한계를 정해주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북서쪽)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남서쪽)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동쪽)(10:19). ‘노아’가 세 아들 중에서 ‘함’을 저주하였다는 사실이나(9:25-26),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18-19장) 등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을 독자들에게 이들 지역을 거명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했던가에 관해서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이들 후손에 관한 기록이 가장 상세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시돈’(Sidon)을 “첫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가장 오래 전에 ‘페니키아’(Pheonician) 지역에 정착했다는 전승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페니키아’ 인들은 스스로를 ‘가나안’ 족으로 불렀습니다. ‘시돈’은 ‘두로’(Tyre)와 ‘베이루트’(Beirut)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헷’(Heth)(또는 ‘힛타이’ Hittites) 족은 족장시대를 전후하여 ‘가나안’에 거주하는 족속으로서, ‘터키’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하둣사’(Hattusas)와는 구별되는 이름입니다.
이어서 등장하고 있는 ‘여부스’(Jwbusites), ‘아모리’(Amorites), ‘기르가스’(Girgashites), 및 ‘히위’(Hivites)의 네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살던 그 땅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여부스’ 족속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서 살고 있었으며,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을 ‘여부스’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예: 삿 19:10-11).
‘아모리’ 족속은 ‘여부스’ 족속과는 달리 <성경> 외의 문헌에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가나안’ 족의 언어에 가까운 ‘셈’족 언어였습니다. 이들 후손들은 ‘바벨론’ 서쪽에 ‘마리’(Mari)나 ‘아수르’(Ashur) 제국, 그리고 ‘가나안’ 북쪽 접경에 ‘아모리’ 왕국들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아모리’는 보다 느슨한 의미, 즉 ‘가나안’이나(수 10:5) ‘요단’ 동편에 사는 주민들을 총칭하기도 하고, 예를 들어 <신명기>에서는 ‘옥’(Og)이나 ‘시혼’(Sihon)을 ‘아모리’ 족속으로 부르고 있습니다(신 3:8)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도시나 해변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아닌 산악에 사는 일부 족속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수 11:3).
‘기르가스’ 족속은 ‘가나안’ 족속의 명부에는 늘 포함되고 있기는 하지만(15:21; 신 7:1; 수 3:10; 24:11),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가릿’ 문헌에서는 이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
‘히위’ 족속도 자주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도 역시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거지는 ‘레바논’과 ‘시리아’ 북쪽 어디일 것으로 추측되지만(수 11:3; 삿 3:3), 혹자는 이보다 훨씬 남쪽인 ‘세겜’(Shechem)이나 ‘기브온’(Gibeon)까지로 보기도 합니다. ‘히위’ 족속이 주로 ‘가나안’의 북쪽에 살았을 것이라는 점은 이어서 등장하는 ‘함’의 나머지 다섯 아들의 후손들이 살던 거주지가 주로 ‘가나안’의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들 이름은 ‘알가’(Arqa), ‘신’(Sin), ‘아르왓’(Arvad), ‘스말’(Sumur), 및 ‘하맛’(Hamath)입니다. ‘알가’는 ‘트리폴리’(Tripoli)에서 북동쪽으로 12 마일에 위치한 지역으로 청동기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주전 20-30 세기경의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로마인들은 이곳을 ‘씨저 로바니’(Caesarea Libani)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만, ‘우가릿’(Ugarit)이나 신 아시리아(N대-Assyrian) 문헌에서 ‘시아눌라’(Siannula)로 부르는 지역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가’ 근처의 페니키아 해변 도시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르왓’은 오늘날의 ‘루아드’(Ruad)로서 ‘비블로스’(Byblos)에서 북쪽으로 50 마일 떨어진 해변으로부터 2 마일 해상에 위치한 한 섬을 가리킵니다. 이곳은 ‘페니키아’의 가장 북쪽 도시로서 주전 10-20 년경에는 가장 번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나(겔 27:8, 11) 기타 신 ‘아시리아’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에서도 이 지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스말’은 ‘아마르나 서신’에서 그 철자가 약간 변형된 ‘스마리’(Zemarites)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위치 확인은 어려워 보입니다.
‘하맛’은 오늘날 ‘오른테스’(Orntes) 상에 위치한 ‘하마’(Hama) 임이 분명합니다. 이 도시는 이 지역에 주전 4천 년 이후 줄곧 이곳에 있어왔습니다. 한 때 이곳 왕은 ‘다윗’과 ‘솔로몬’을 섬기기도 했으며(삼하 8:9-10; 대하 8:4), 그 후에는 ‘여로보암’ 왕이 정복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4:28). 그리고 이곳은 <성경>에서 빈번하게 약속의 땅 북쪽 접경 지역으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민 34:8; 수 13:5).
‘함’의 계보를 마무리하면서 화자가 추가하고 있는 두 절의 언급은 나름대로 그 의미를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18-19절).
이 두 절은 그 자체로서 부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바벨’에서 있을 인류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경>의 여러 곳에서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는 악한 족속으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 족속이 어디로 얼마나 흩어져 갔던, 그들이 차지하던 그 모든 지역을 결국에는 뺏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연유로 해서 ‘가나안’의 지경(地境)을 동서남북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이 거주하기 이전임에도 이처럼 그 지경을 상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는 것도 이곳이 처음이자 상당이 의례적인 일입니다.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가나안’의 지경이 <민수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보다는 다소 부정확하고 애매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참고, 민 34:2-12). 일부 지명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두 본문이 상이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나안’의 가장 북쪽으로 해변 도시 ‘시돈’(Sidon)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변을 따라 가장 남쪽에 ‘그랄’(Gerar)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오늘날의 ‘텔 아부 호레이라’(Tel Abu Hureira)로서 ‘가자’(Gaza)로부터 남동으로 11 마일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자’가 ‘그랄’보다는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왜 이곳에서 ‘그랄’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도 북쪽의 유명한 도시 ‘시돈’에 버금가는 남쪽의 도시로 ‘그랄’보다는 ‘가자’를 언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화자의 판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Wenham, 227쪽(참고도서 1).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와 ‘아드마’(Admah) 및 ‘스보임’(Zeboim)은 <창세기> 19장에서 모두 멸망당한 사해 부근의 도시들입니다. <민수기>에 따르면 이들의 위치는 ‘가나안’ 동쪽 사해(死海) 부근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민 34:12), 이로 미루어 ‘가나안’의 남동쪽 끝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가나안’의 지경이 “라사(Lasha)까지 이르렀다”는 설명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분명 꽤 잘 알려진 도시로서 그 위치가 불문명한 소돔의 소재까지 파악해 줄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지명은 <구약>에서 이곳에서 단 한 번 등장할 뿐으로서, 혹자는 이 이름을 ‘벨라’(Bela)(창 14:2) 또는 ‘라이스’(Laish)(삿 18:7) 등의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랄’을 포함한 소돔 평원의 도시들은 족장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고 있으며(20-21, 26, 13-14, 18-19장), 따라서 ‘가나안’의 지경을 언급함에 있어 일견 불필요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본문의 설명은 이어지는 이야기의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셈의 후손(21-32절)
‘셈’(Shem)의 계보를 가장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선택된 계보이기 때문입니다(21절 참고).
21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21-32절)
그런데 ‘셈’의 계보와 관련하여 화자는 다른 곳에서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 11:10-26). 이와 유사한 기법을 “아담의 계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1-26; 5:1-32.
두 본문이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반복(또는 중첩)은 구약 이야기의 중요한 수사적 기법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는 여러 곳에서 두 개의 단락을 이처럼 중첩의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참고: <홍수 이야기>(6:9-9:29)와 홍수에 대한 예고(6:5-8).
‘바벨’탑 이후에 그리고 있는 ‘셈’의 계보는 ‘셈’에서 ‘아브람’으로 연결되는 족보에 국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편집상의 유사성은 “아담의 계보”에서도 역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4장과 5장).
‘셈’의 계보와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사실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정보를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점은 ‘야벳’의 계보와 비교해봄으로써 쉽게 드러납니다. 예컨대, 21절 및 24-30절의 내용은 본문의 기본 골격에 해당되는 22-30절과 31절에 대한 일종의 보충 자료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엘람’(Elam)은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강자로서, 언어는 셈족을 사용하지 않으나, 문화 및 지리적인 이유 등으로 ‘셈’의 아들로 분류하고 있는 듯합니다. ‘셈족’(Semites)이 ‘엘람’ 지역에 살게 된 것은 주전 3천 년 이후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돌라오메’는 ‘엘람’의 왕이었으며(14:1, 9), 훗날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서 ‘엘람’으로 추방을 당하기도 합니다(스 4:9; 사 11:11).
두 번째 아들 ‘아수르’(Ashur)(또는 ‘아시리아’)는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지명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 그곳에 사는 족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나라의 수도(首都) 이름이나 신(神)의 이름 모두 ‘아수르’였습니다. 그런데 ‘아수르’는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함’의 계보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10:11),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아수르’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족속은 ‘시내’ 산 근처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5:3, 18; 민 24:22, 24; 삼하 2:9; 시 83:9). ‘아수르’에 대한 언급이 특별히 부정적이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계보는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르박삿’(Arpachshad)은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바벨론’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아르박삿’의 마지막 세 글자가(ksd) ‘갈대아’(Chaldeans) 즉 kasdim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바벨론’이 ‘셈’의 아들로서 어딘가 한 번쯤은 나타나야 한다는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이미 앞에서 등장한 바 있으므로(10:10),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과연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르박삿’을 오늘날 ‘이라크’ 북쪽의 ‘아라바’(Arapha)(오늘날의 Kirkuk)와 연계시키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룻’(Lud)과 ‘루딤’(Ludim)(13절)은 둘 다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추측컨대 ‘룻’은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ns) 족속일 것입니다(‘아시리아’에서는 ‘루두’(Luddu)로 알려져 있음). 그러나 이들은 분명 ‘셈’ 족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엘람’ 족속도 아니어서 이런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이들이 ‘티그리스’ 강 상류에 살았던 ‘루브두’(Lubdu)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합니다.
‘셈’의 마지막 아들 ‘아람’(Aram)은 주전 삼천 년 이후부터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라무’(Aramu)로 알려져 있는 한 정착지가 ‘티그리스’ 동쪽이자 ‘엘람’의 북쪽과 ‘아시리아’ 동쪽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아람’ 사람을 ‘길’(Kir)와 연관시키고 있는가 하면(암 9:7), ‘이사야’는 ‘길’을 ‘엘람’과 연결시키고 있기도 합니다(사 22:6). 그러나 ‘아람’이 ‘아르미안’(Armaeans) 족속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천 년 말기부터인데, 이때는 일련의 ‘아르미안’ 부족 국가들이 ‘시리아’ 내에서 주요하게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성경>의 족장들도 이 족속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25:20; 31:20; 신 26:5),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람’의 네 후손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창 10:23).
그러나 이 네 아들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나 다른 문헌에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일부 학자들은 이 자료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우스’(Utz)는 ‘욥’의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기도 합니다만(욥 2:11),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는 ‘우스’와 ‘아람’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같은 암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이곳에서 ‘우스’는 ‘나홀’의 아들이자 ‘아람’의 삼촌이기도 합니다: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창 22:21).
‘훌’(Hul)과 ‘게델’(Gether) 사이의 관계도 23절이 아니라면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스’(Mash)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꼽고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마시우스’ 산(Mount Masius)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길가메쉬 서사>에 등장하는 ‘맛수 산’(Masu mountains)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산은 ‘레바논’에 있는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이 이름을 ‘이스마엘’의 한 아들 ‘마사’(Masha)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긴 목록은(24-30절), 그 배열하는 방식이 ‘함’의 계보를 소개할 때와 유사합니다. 참고: 본문의 첫 번째 단락(10:6-20). 즉 24-25절상의 내용은 11:12-17에서 보다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병행 구절이자 요약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25절하의 내용은 11:1-9의 내용을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아르박삿’의 첫 아들 ‘셀라’(Shelah)가 의미하는 바는 ‘무기’(武器) 또는 ‘미사일’(missile)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으로 이런 의미를 가졌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는 신의 이름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에벨’(Eber)은 ‘건너는 자’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에블라’ 서판에서 ‘에브리움’(Ebrium)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이름이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정작 흥미로운 사람은 ‘에벨’의 아들 ‘벨렉’(Peleg)입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창 10:25). 그 이름과 관련하여 역사적인 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벨렉’은 ‘히브리’어 동사 “나누다”(גלפ)에서 유래한 것인데, 일반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운하”(運河) 또는 “통로” 등의 뜻을 지니게 됩니다만, 단어 그 자체로서는 ‘벨렉’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을 유추해 내기는 불가능해보입니다. 다만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여러 이름들이 예언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이름 역시 ‘벨렉’이 목도하게 될 역사적 사건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 여러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는 다름 아닌 “바벨탑 사건”(11:1-9) 이후의 언어와 민족들이 갈라지고 흩어지는 사건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문학적으로 다음 단락에 대한 예고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벨렉’의 후손에 관한 언급도 이곳에서가 아니라, ‘바벨’탑 이야기 이후에 등장하고 있는 것도(11:18-26) 화자의 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Yogtan)이며(10:25하), 어원은 불확실합니다. 가장 근접한 ‘히브리’ 단어로서 “작다”는 의미를 지닌 Qahtan(ןטק)을 꼽을 수 있을 것인데, 그가 ‘벨렉’의 동생이라는 사실과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아라비아’ 남쪽에 거주하는 일부 부족들은 스스로를 ‘욕단’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욕단’의 아들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10:26-30).
‘욕단’의 첫 번째 아들로 등장하고 있는 ‘알모닷’(Almodad)은 그냥 ‘친구’(modad) 이거나 또는 <칠십인 역>에 의하면 “하나님(El)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셀렙’(Sheleph)은 ‘실프’(Silf)로 불리는 지역의 이름이거나 또는 ‘살프’(Salf) 또는 ‘술프’(Sulf)로 불리는 ‘예멘’ 족속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살마웻’(Hasarmaveth)은 문자적으로는 “죽음의 신 모트(Mot)의 오아시스”라는 의미로서, ‘예멘’ 동쪽에 위치한 ‘하드라마우트’(Hadramaut)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라’(Yerah)는 문자적으로 ‘달’(moon)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남 ‘아라비아’ 지역에서 만신전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합니다.
‘하도람’(Hadoram)은 문자적으로 “하다드 신은 높이 들리다”로서, 한 개인의 이름이거나 또는 한 부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대상 18:10; 대하 10:18).
‘우살’(Uzal)은 ‘아라비아’ 전승에 따르면 ‘예멘’의 수도 ‘산나’(Sanaa)의 옛 이름이었습니다(<에스겔서>에서는 ‘시리아’ 동북의 한 지역으로 확인하고 있기도 합니다: 겔 27:19).
‘디글라’(Diqlah)는 문자적으로 ‘대추야자’를 뜻하며, 아마도 ‘아라비아’에서 야자수를 기르는 한 오아시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발’(Obal)은 일명 ‘우발’(Ubal)로서 ‘호데이다’(Hodeida)와 ‘산나’(Sanaa) 사이에 있는 한 지명이기도 하고, 또는 ‘바누 우발’(Banu Ubal)로 불리는 ‘예멘’의 한 부족이기도 합니다.
‘아비마엘’(Abimael)은 문자적으로 “나의 아버지는 진정 신이라”는 뜻입니다만, <성경> 외의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는 곳이 없어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바’(Sheba)에 대해서는 앞에서 익히 다룬 바 있어(참고, 10:7), 이곳에서는 언급을 생략합니다.
‘오빌’(Ophir)은 성서 시대에 가장 좋은 금을 살 수 있는 곳으로서, 참고: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 가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 히람이 자기 종 곧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매, 저희가 오빌에 이르러 거기서 금 사백 이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왔더라“(왕상 9:26-28);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시 45: 9).
이 금은 분명 뱃길을 통해서 ‘에시온게벨’(Ezion-geber). ‘오빌’의 위치 확인 작업과 관련해서 아프리카로부터 인도에 이르는 여러 지역이 후보 지역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금 생산자” ‘오빌’이 ‘욕단’의 아들 ‘오빌’과 동일한 인물이라면, 본문의 다른 이름들처럼, ‘아라비아’ 남서 지역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윌라’(Havilah) 역시 또 다른 금 생산지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참고, 2:11).
‘요밥’(Yobab)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네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36:33; 수 11:1; 대상 8:9, 18).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욕단’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알려지기로 아랍 민족들입니다(26-30절).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메사’(Mesha)에서부터 ‘스발’(Saphar)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30절), 여전히 분명한 위치 추적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셈’ 계보 역시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마무리 선언으로 끝맺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구절은 첫 구절(1절)과 함께 전체적인 단락에 대한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10:31-32).
교훈과 적용
1. 서론: 민족의 기원(1절)
한 세대 전만 하드라도 <창세기> 10장에서 다루고 있는 민족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목록에 대해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과학적이고도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에 대해서 가장 적대적인 비평가들조차도 본문이 지니고 있는 학문적인 중요성과 정확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참고도서 6, 제 1권, 402쪽.
예를 들어,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저명한 고고학자인 ‘알브라이트’(W. F. Albright) 박사는 이점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참고 도서 15, 514쪽.
성경은 고대 그리스의 저서와 일말의 유사성도 갖지 않은 채, 고대 저서들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다.... 민족의 목록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기록이다... 이 목록은 복잡하기는 하나 현대 세계의 인종적, 언어적 상황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를 잘 보여준다. 학자들은 성경 기자의 지식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헨리 모리스’의 말대로, 오늘날 진정으로 자격 있는 과학자라면 본문을 그들 연구의 지침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고 도서 15, 제 16장.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독자라 하드라도, 본문을 통해서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과 그들의 후손에 관한 족보를 대충 알게 됩니다. 이 족보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흔히 원 역사(prehistory)와 아브라함 이후의 족장 역사 사이입니다.
<창세기> 11장도 족보를 일부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창 11:10-26의 본문은 ‘셋’에서 ‘데라’를 거쳐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와 그 안의 인물들의 수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10장은 다소 다릅니다. 이곳에서도 이름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한 민족이나 국가의 조상들의 이름이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그 자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우리는 이 점을 본문의 신학과 신앙에서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절에 등장하는 ‘깃딤’과 ‘로다님’은 아마 ‘야반’의 두 아들 ‘깃’(Kit)과 ‘로단’(Rodan)에서 유래한 민족들의 이름일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두 개인의 이름, ‘엘리사’(Elishah)와 ‘다시스’(Tarshish)와 함께 대조를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창세기> 10장이 모든 민족들을 다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야벳’의 가계만 하드라도(1-5절) 그의 일곱 아들을 거명한 후에는 그중 단 두 명의 아들에 대해서만 그 후손들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멜’의 세 아들과 ‘야반’의 네 아들. 10장의 나머지 부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 목록이 완전하기보다는 선택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어떻게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그러나 역설은, 우리의 화자가 자신이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오직 확실한 지식만 기록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2. 야벳의 후손(2-5절)
비록 화자가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야벳’의 후손들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제일 적다 하드라도, ‘인도-유럽’ 족속의 선조가 된다는 점에 있어 첫 번째 단락의 기록은 특히 서구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와 유럽은 중동을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어, 한 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나 ‘이란’ 등은 오늘날 서구 국가들과는 불구대천지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의구심은 충분히 이해할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명한 차이는 20세기 이후의 정치․사회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들 국가나 민족들이 언어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한 예로써, 언어학을 제대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인도의 ‘산스크릿’(Sanskrit)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이 언어야말로 인도-유럽 계열의 모든 언어들의 기원에 가장 가까운 언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도 인도-유럽 언어들은 전 세계의 언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 군에 속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럽 언어와 인도-이란을 포함하는 아시아의 언어들도 이 군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두 부류의 언어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은 19 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인도-게르만’ 또는 ‘아리안’(Aryan) 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들 인도-유럽 언어들에 대한 비교 역사학적 연구를 통해서 이들 모든 언어에 대한 계보와 모태 언어에 대한 지식을 확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태 언어란 동 유럽에 거주하는 일단의 족속들이 후기 석기 시대에 사용하던 언어였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기록에 남아 있지도 않은 이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던 족속들이 이주를 거듭함에 따라 이들의 문화나 종교 등과 함께 일련의 변화를 거쳐 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인도-유럽 언어들은 그 지역에 따라 크게 두 개의 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벨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퍼져 간 후손들의 언어를 ‘사템’(satem) 군으로 부르는데, 지역적으로 인도, 아프카니스탄, 이란, 아르메니아, 발칸,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러시아, 체코슬라비아, 폴란드, 독일 일부, 동 프러시아(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어 언어들이 이에 속합니다. 한 편, 서쪽 지역의 언어를 ‘센트룸’(sentrum) 군으로서,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튜칼, 스위스, 루마니아, 웨일즈, 아이레, 스코틀란드, 스칸디나비아, 독일 일부, 네델란드, 벨기에, 영국 등이 이에 속합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긴 하지만, ‘야벳’의 후손이 이처럼 유럽 전체와 아시아 일부 지역까지 퍼져갔다는 사실을 두고 ‘야벳’에 관한 창세기의 예언이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성취되었다고 많은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9:27).
여기서 “창대”란 말이 주로 ‘지적’ 함축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때, ‘야벳’의 후손들이 전 세계에 끼친 문화적, 철학적, 과학적인 영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지적 영향력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의 후원을 받을 때 더욱 강력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함’ 족인 수메르와 이집트가 수 세기동안 이 땅을 지배하다가, 그 뒤를 이어 ‘셈’족에 속하는 아시리아, 바벨론, 그리고 페르시아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알렉산더 치하의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점령했으며, 그 이래 ‘야벳’ 족 국가가 세계 문화를 좌우해 왔습니다.
한편 고대 그리스 인은 ‘야베토스’(야벳)를 그들의 조상으로 인정하였으며 그에 상응하는 문화의 원형을 이어왔습니다. 서구 세계가 그리스 인의 지적, 과학적, 철학적 유산 위에 서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야벳’이 ‘셈’ 가족의 일원으로 동거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결합이 단순한 유기적인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야벳’이 ‘셈’의 영적 생활을 공유하며, 전 인류에 대해서 지적 확장이라는 공로를 끼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점은 ‘야벳’ 족 국가들이 아브라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메시아에게 자신을 위탁함으로써 충분히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예언에 따라 ‘야벳’의 후손이 유럽이나 아시아뿐만 아니라, 러시아 동북 방향으로 ‘베링’ 해협을 지나 ‘알라스카’를 거쳐 북미와 남미 대륙까지 흩어졌다면 ‘야벳’의 후손은 실로 지구의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대가는 없었을까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온 땅에 흩어져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넓은 지역으로 흩어짐에 따라 구심점을 잃어가게 되었으며, 동질성도 점차 희박해져 갔습니다. 사회는 다양해지고, 혼합 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며, 점차 세속주의의 경향도 드러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소위 탈현대화(postmodernism)라는 시대정신도 실은 이때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지적(知的) 은사를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활용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오히려 우준하게 되어 한 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1:22). 그뿐이 아닙니다. 동심원에서 멀어져 갈수록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라”는 인식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갈 뿐입니다. 한 가족이라는 인식이 없으니, 다른 민족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학대하고 학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지금도 이러한 ‘문명 간의 충돌’이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단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훼손되고 결핍되어 있으며, 그러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으려 하는 아둔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
3. 함의 후손(6-20절)
‘함’(Ham)의 후손들은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민족들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보듯이 이들은 고대 세계에서 이스라엘과는 불구대천지 원수지간으로 지냅니다. 따라서 창세기 화자도 이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셈’의 족보만큼이나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함’의 네 아들 ‘구스’(Gush), ‘미스라임’(또는 이집트), ‘가나안’(Canaan), ‘붓’(Puth) 중에서, ‘붓’을 제외한 세 사람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이름들입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기 ‘바벨론’, ‘이집트’, 그리고 ‘가나안’에 흩어져 살면서 ‘아브라함’ 이후 ‘바벨론’ 포로 시절까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세 지역은 ‘아브라함’의 전체 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 기자가 ‘함’의 계보를 다루면서 지역적 연관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함’의 후손에 관한 기록 가운데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구스’의 아들 ‘니므롯’에 관한 언급입니다(8-12절). 이 부분은 문학 장르 상 족보가 아니라 이야기에 속하며, 따라서 전체 단락 중에서 괄호로 묶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10:8)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10:9)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10:10)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10:11)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10:12)
화자는 이어지는 11장에서도 첫 아홉 절을 이와 유사하게 괄호로 처리하면서 <바벨탑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므롯’에 관한 이야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우선 10절에서 그가 그의 나라(his kingdom)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10절의 밑줄 친 부분은 ‘히브리’어로 hk;l;m]m(마므라카)로서 “왕국”(kingdom)을 의미하는 &l'm(말라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117회 등장하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국’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세 번에 걸쳐 “강력한”(mighty) 용사 또는 사냥꾼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영웅”과 “특이한”으로 번역하고 있는 두 단어는 “강력한”(mighty)의 의미를 지닌 동일한 ‘히브리’ 형용사 rwOBG(깁보르)인데, rb'G(가바르; 강하다, 능하다)에서 유래하였으며, 실명사로서 “강한 자” 또는 “용사”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이 사람을 이처럼 특별하게 소개하고 있는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일까요? 그에 관해서 좋은 이야기를 전하려 함일까요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조심스런 독자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니므롯’ 치하의 바벨론 제국은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반역의 제국이었으며(11:1-9), 그 백성들에게 대해서는 독재와 억압의 제국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점과 관련해서 ‘니므롯’이 “사냥꾼”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는 그가 짐승들을 사냥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 사냥 즉 전쟁과 살상을 일삼는 무지막지한 독재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큰 성을 건축한 자”라는 말도 실은 그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왕국을 곤고하게 다져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의 나라”는 하나님을 배제한, 철저하게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가이사’에게 속한 나라임이 분명합니다.
먼 훗날 또 다른 ‘바벨론’ 제국이 그곳에 다시 세워지게 되는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살았던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왕국이 그것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경멸하고 무시하기는 ‘니므롯’ 못지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 기물들과 보화들을 가져다 자신의 신전(神殿)에 보관하였습니다(단 1:2).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바벨론’의 신이 ‘야훼’ 하나님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으며, 세상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범죄 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영원히 그의 심판의 손이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으며, 꿈을 통해서 그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단 4:31-32).
그러나 그 꿈을 해석해 주는 ‘다니엘’을 대하는 ‘느부갓네살’의 즉각적인 반응은 분노와 불쾌함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복음을 듣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그 모든 과학과 기술, 문화와 문명의 업적들도 어느 날에는 이처럼 되어버릴 것이라는 경고와 예언을 그들은 거부하며 조롱합니다.
‘함’의 계보를 마치면서 빠뜨릴 수 없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9:25). 아버지 ‘함’이 저지른 죄 때문에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구절이 특정 국가에서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의 형제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그 아버지의 형제들인 ‘야벳’이나 ‘셈’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나안’ 자신의 형제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만일 전자(前者)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이 예언은 ‘가나안’이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즉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정복하고 난 후에 비로소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자(後者)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보이스’(J. Boice) 목사님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나안’의 형제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왜 ‘니므롯’일까? ‘보이스’ 목사님이 상상해 보는 ‘니므롯’의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참고도서 6(제 1권, 413쪽).
‘가나안’은 나의 삼촌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나의 조카이자 혈육이 아닌가! 이 사람들에게 내려진 저주는 바로 나를 향한 저주이기도 하지. 이건 정말이지 집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자 불명예야. 이건 정말 공정하지 못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암, 정말 그렇고 말고. 나에게 막강한 힘과 기술이 있으니, 이런 불공정한 심판은 거부하고 깨부술 수 있어. 그리하여 오히려 다른 족속들을 노예로 삼아야지 내가 다른 사람들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
이런 반응은 비단 ‘니므롯’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만연한 공통되는 속성입니다. 나에게 가해지는 불공평해 보이는 심판이나 판단에 순순히 승복하고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현대판 ‘니므롯’이자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저주를 피해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분 스스로 우리에게 내리신 그분의 저주를 풀어주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그분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노예가 되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갈 3:13).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만유의 주로 만들어주셨습니다(빌 2:9). 바로 이 길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위대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4. 셈의 후손(21-31절)
‘셈’(Shem)이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장남으로 오해할 경우가 많은데, 기 이유는 <성경>에서 언급되는 순서가 늘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셈’; ‘햄’; ‘야벳’. 이 순서에 따르면 ‘야벳’이 막내, 그리고 ‘함’이 둘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개역 성경>에서도 ‘셈’을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10:21).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에 따르면, 장자는 ‘야벳’이며, ‘셈’이 둘째가 됩니다. 그렇다면 왜 화자가 ‘셈’을 맨 뒤에 소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선조이며, <성경>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노아’의 세 아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범위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야벳’의 계보는 불과 두 세대에서, 그리고 ‘함’의 계보는 세 세대에서 끝나고 있는 반면, ‘셈’의 계보는 본문에서만 다섯 세대까지 이르고 있는가 하면, 바벨 탑 사건 이후 이어지는 계보에서는 ‘아르박삿’을 거쳐 ‘아브라함’까지 이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셈’의 후손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인물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아르박삿’의 아들 ‘벨렉’입니다: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창 10:25). ‘벨렉’은 히브리어 동사 ‘나누다’(גלפ)에서 유래한 것인데, 일반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운하’(運河) 또는 ‘통로’ 등의 뜻을 지니게 됩니다만, 만일 이 단어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떤 사건인지 유추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이스’(J. Boice) 목사님은 사건의 내용과 관련하여 세 가지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고도서 6(제 1권, 416-418쪽).
거주지의 분리와 분할. 첫 번째 이론은 하나님께서 인종과 민족에 따라 그들이 살 거주지와 경계가 어떻게 나누어질 것이지를 ‘에벨’에게 예언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벨’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아들의 이름을 ‘벨렉’(나눔)으로 지었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언급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26).
지각의 대 격변과 분리. 지각의 대 격변과 대륙의 이동을 통해서 현재의 지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 이론은 대륙 이동설이 발표되기 한 세대 전에 이미 제시된 바 있습니다. 이 이론이 처음 제기될 때만 하드라도 너무 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늘날에는 이전만큼 그렇게 반대 의견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언어와 민족의 분리. 이 이론은 앞의 두 이론에 비해서 훨씬 덜 극적이긴 하지만, 문학적이고도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 다름 아닌 “바벨탑 사건”(11:1-9) 이후 언어와 민족들이 갈라지고 흩어지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문학적으로 다음 단락에 대한 예고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벨렉’의 후손에 관한 언급도 이곳에서가 아니라, <바벨탑 이야기> 이후에(11:18-26) 등장하고 있는 것도 화자의 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셈’의 계보는 ‘벨렉’의 아우 ‘욕단’의 13명의 아들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그 계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10:26-30). 이들 족속들은 모두 아라비아 남단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모리스’(H. Morris) 박사는 ‘셈’ 족속이 인류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 도서 15, 517쪽.
셈의 깊은 영적 본성과 관심 때문에 노아는 셈에 대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셈을 통해서 전파되고 보존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유대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등 모든 일신교적인 종교가 셈족을 통해서 전파되었다(다른 모든 세계의 종교는 다 범신론이며 다신교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혈통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셈족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5. 결론(32절)
10장의 결론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서론과 함께 수미상관을 이루면서 전체 내용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10:1);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10:32).
이 기록을 통해서 인류는 하나이고, <성경>은 신뢰할 만한 인류의 역사에 대한 기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가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면, 홍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인류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홍수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 사건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제 이어지는 단락의 주제는 홍수(마불)에서 ‘바벨’이 됩니다.
제 8과: 바벨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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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이야기
(1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11:9).
<바벨탑 이야기>는 비록 짧기는 하지만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서 최고의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웬헴’ 교수는 <바벨 탑 이야기>야말로 ‘히브리’ 이야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Wenhem, 234쪽(참고도서 1).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감동과 흥미를 주고 있는가? 그리고 독자들은 어떤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본문의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본문의 역사와 신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바벨탑 이야기>는 짧지만 ‘히브리’ 이야기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탁월한 모델로 꼽을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의 원리는 <에덴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 또는 <노아 이야기>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교차대구에 해당합니다. 예로써, 처음과 마지막 두 절은 각기 상반된 내용을 기술하면서 이야기의 서막과 결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온 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1절)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9절하)
처음에 하나로 통합되고 질서 있던 그 모든 것이, 이야기의 정점(頂点)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그 지점을 지난 후에는 처음과는 정 반대의 상태를 향해서 달려가면서 깨어지고 혼란스러워 지고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처음과 끝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이야기 속의 두 주인공의 대조되는 행동의 결과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전반부에서(2-4절) 이야기의 한쪽 주인공인 인간들의 대화와 행동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들은 함께 모여서, 도시를 건설하고, 하늘에까지 이를 수 있는 탑을 건설하자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2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3절)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절)
에 세 절을 다시 장르별로 세분해 보자면, 서술과 대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서술(2절); 대화(3-4절). 서술의 내용은 인간들이 “동방으로 옮겨 갔다”는 것에 관한 것이고, 대화의 내용은 “벽돌을 만들어 굽고, 성과 탑을 건설하자”는 것이고 형식 상 “오라, 우리가...하자”는 일종의 권고 형 문장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와 동기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4절).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는(5-8절) 또 다른 주인공,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대화는 전반부에서 본 것처럼, 역시 권고 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자”(6-7절).
이야기의 결론은(9절)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11:9).
이들 내용을 요약해 보면 전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서막과 종막을 포함해서 모두 일곱 개의 장면이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도표 참고):
이야기의 절정은 네 번째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5절). 이 구절은 마치 산의 정상처럼 느껴집니다. 뒤를 돌아다보면 이곳을 향하여 올라오고 있는 인간의 반역의 행위가 보이고, 앞을 내려다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 절정은 <노아 이야기>의 절정과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노아를 권면하사”(8:1). 바로 이 선언으로 인하여 그 동안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오던 일련의 사건들이 그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5절 역시 그동안 진행되어 오던 일들이 반대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성 쌓기가 중단되고, 한곳으로 모였던 인간들은 반대로 각 지역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들 내용을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2막: 인간들의 행위
3막: 인간들의 행위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4-5막: 하나님의 행위
이야기의 형식으로서 교차대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유사반복을 취하고 있다는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는 형식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다음 표에서 보듯이 이야기의 전반과 후반에서 중요한 단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은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수사적인 기법 또한 탁월합니다. 특히 언어의 유희(遊戱)라든지 두운법(頭韻法)의 사용 등이 전체 이야기에 흥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바벨론’과 음성학적으로 아주 유사한 자음(영어로 b와 l 또는 m과 p)을 가진 단어들이 처음부터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바벨론’ 즉 ‘바벨’의 의미를 “원인론적”으로 제공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덴 이야기>나 <노아 이야기> 등에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노아’와 유사한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발음을 갖는 단어들을 처음부터 등장시키는 기법이 그것입니다: <에덴 이야기>의 경우 처음부터 ‘아다마’(흙을 의미함)를 등장시킴으로써, 뒤에 등장할 ‘아담’의 의미를 예고해주고 있는가하면, <노아 이야기>에서도 홍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노아’(쉼을 의미함)라고 지어줌으로써, 곧바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주인공 ‘노아’의 의미를 예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벨’(ל)은 ‘아카디아’어 ‘바브-일루’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혼잡하게 하다”는 의미의 ‘바랄’(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자음 ‘바’()와 ‘엘’(ל)(영어로 b와 l)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청각적인 흥미를 유발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대화와(3절),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대화도(7절) 역시 여러 가지 수사적 비유들을 담고 있습니다. 즉 3절에서 “우리가 벽돌을 만들자”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가 만들자”(nilbenah)의 ‘히브리’어 순서가 7절에서 “우리가 혼잡케 하자”(nabelah)에서 사용하고 있는 세 자음(l, b, n)의 발음순서가 기막히게 역(逆)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학적 교차대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인 “만들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라반’(ן‘ laban)이며, 7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혼잡케 하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바랄’( baral)로서, 이 두 단어에서도 역시 세 자음(l, b, n) 중 두 자음이 역순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음들의 역순은 결국 이 이야기가 드러내려고 하는 근본적인 사상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땅의 인간들은 건축하고, 하늘의 하나님은 파괴하신다.” 여기서 ‘나벨라’(nabelah 혼잡케 하자)는 ‘네발라’(nebalah 경건치 못한 자들의 어리석음)와 음성학적으로 너무 가깝습니다. 결국 ‘바벨’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시 14:1)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은 영원한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게 된 셈입니다.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단위로 묶어주는 수사적인 기법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 예로 ‘장소’를 의미하는 ‘샘’(ם)과 이름을 의미하는 ‘샘’(ם)도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아래 문장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명성”(ם 샘)을 내기 위해서 인간들은 “거기”(ם 샘)에 모였는데, 이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ם 사마임)에 도달하기 위한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오만이었다. 결국 야훼의 심판을 “하늘”(ם 사마임)로부터 야기 시켜서 그들을 “자신의 처소”(ם 미샘)로부터 흩어지게 한 것도 역시 그들의 오만이었다. 이러한 단어들은 2, 4, 7, 8, 9절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면”이라는 단어 역시 ‘바벨’과 음성학적으로 밀접한 고리를 맺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지면”은 ‘페네...하아레츠’(pene...ha'ares) 인데, 여기서 그 처음과 끝 글자 (p와 s)가 하나님의 심판-“흩어버리다”(푸스 pus)-를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일까? <바벨탑 이야기>는 홍수 이야기와는 달리, 유사한 다른 이야기가 근동 문헌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3장에서 보듯이, ‘바벨론’ 문학에서 그 모티브를 취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은 <성경> 본문과 그 외적인 사실들을 통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우선 화자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시날’ 평지를 취하고 있고(2절), 결론에서 그 도성이 ‘바벨론’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9절). ‘바벨론’은 이미 앞에서 한 차례 등장한 바 있으며, ‘니므롯’이라는 영웅이 그 왕국에 존재했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10:10).
그리고 이야기는 분명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곳 평야에서는 자연석이 없어서 화로에 구운 벽돌들을 건축에 사용한 점이나, ‘지구랏’(Ziggurat)이라고 불리는 높고 거대한 성전 탑들이 ‘바벨론’ 내에 많이 세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에테메낭키’(Etemenanki)로 불리는 성전 탑은 그 기초가 가로x세로x높이가 90미터x90미터x90미터나 되는 거대한 탑으로서, 오늘날까지 세계의 불가사의(不可思議) 중의 하나로 간주할 정도입니다. ‘바벨론’의 홍수 설화 ‘에뉴마 엘리쉬’에서도 이 탑의 건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수메르’ 전승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거나 또는 사용하게 될 그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Wenham, 236-237쪽(참고도서 1).
이러한 거대한 건물들은 ‘바벨론’ 문명의 상징으로 주변 다른 문명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벨론’이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로 통하는 문”으로 통할 정도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이 문명에 보내는 찬사와 경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화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하늘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혼돈과 혼란”의 상징이라고 조롱하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속적인 문명의 극치를 보면서, 그것에 굴하지 않고, 그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파하는 새로운 메시지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화자의 심정은,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온 도성이 우상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통분하며” 서있는 사도 ‘바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이 갑니다. 행 17:16.
그의 독자가 ‘바벨론’ 포로이든 아니면 태평성대를 누리던 ‘다윗’ 시절의 일반 백성이든, 메시지는 한결같습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가 어떤 전승을 사용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과 자신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풍자요 해학으로서 시대를 두고두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시편> 기자도 그 중 한 사람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2)
신학과 신앙
1. 서막: 하나의 언어(1절)
<바벨탑 이야기>는 서론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전체 이야기의 배경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수메르’ 문헌에서도 모든 인류는 한 때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한 조상 ‘노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이 서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0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들과는 상충되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곳에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에 걸쳐 다양한 언어와 민족의 분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0:5, 20, 31). 만일 11장의 서론이 10장에 이어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모순되는 진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자료들은 반드시 연대기적 원리에 따라 배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인 의도에 따라 자료를 재배치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화자는 ‘노아’의 계보 이후 지금까지 그의 자료들을 배치함에 있어 세 번에 걸쳐 동일한 구성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설령 두 장이 연대기적 원리에 따라 배치되었다 하드라도, 설명이 전혀 불가능 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영어가 오늘날 국제적인 공용어의 성격을 띠고 있어 마치 모든 인류가 의사소통의 도구로써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듯이, 당시에도 지역마다 민족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하드라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하드라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바벨론’ 시대에서는 그들의 언어가 공용어로, 그리스 시대에는 그리스 어가 국제 공용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 제 1막: 동방으로(2절)
이어지는 제 1막은 인간들의 여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동방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2절).
만일 출발지가 홍수 이후 ‘아라랏’ 산이라고 한다면 ‘가나안’ 동쪽 한 지역에서 남동쪽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최종 정착지는 ‘시날’입니다. 이 땅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을 일컫는 말임에 틀림없으며, 맨 처음에는 ‘수메르’(Sumer)였다가 이후 ‘수메르’와 ‘아카드’(Akkad)로, 그리고 ‘바벨론’(Babylon)으로 불리게 된 지역입니다. 그런데 왜 ‘수메르’가 ‘시날’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이들이 여행하고 있는 방향 즉 동방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다루고 있는 일련의 이야기에서 이 동방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고(2:8), ‘아담’이 범죄 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으며, ‘가인’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습니다(4:16).
이처럼 동쪽 땅은 하나님이 버리신 땅 내지는 저주의 땅을 암시해 주는 복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화자는 혹시 이 점을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무리가 동쪽을 향해서 여행하고 있다는 이 진술은 그들의 여행이 필연적으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제 2막: 우리가 섞자(3-4절)
과연 제 2막이 시작되자 말자 그러한 암시가 마치 멀리서 북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실패와 혼잡”을 의미하는 ‘바벨’이라는 소리입니다. ‘바벨’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지만, 이 여행객들은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 벌써부터 자신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벽돌을 만들자”(nilbenah lebenim); “우리가 섞자”(nabelah); “우리가 우리를 위해...건축하자”(nibneh-llanu)(3-4절). 그들은 서로 권고하며 ‘바벨’, ‘바벨론’하고 외치는 듯합니다. 이들 문장들이 모두 ‘바벨’(또는 ‘바벨론’)이 지니고 있는 자음들(b, l, n)과 동일한 자음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 자체로서 지독한 조롱이자 해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건축자들이 부르는 노래나 함성은 음성학적으로 혼잡과 뒤섞임을 의미하는 ‘바벨’이나(7절) “어리석음”을 뜻하는 ‘네발라’(nebalah)를 연상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을 건축하는 목적이 자신들의 명성을 드날리고 서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인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목적 때문에 그들은 서로 “흩어지고”(baral)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반역의 장소 ‘시날’은 그들의 명성을 드높여준 장소가 아니라, 반대로 실패를 기념해 주는 장소로 길이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건축자들을 향한 비난과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건축 자재에 대한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3절). 자칫 독자들이 놓치기 쉬운 흥미로운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렇습니다: “보라, 저 바벨론 무리들이 건축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자재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사용하는 돌과 진흙이 아니라 구운 벽돌과 역청이 아닌가! ‘바벨론’의 세속적인 과학과 문명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기념비가 될 만한 탑을 건축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오히려 자랑할 만 것은 아닌가? 화자는 그들의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탑을 쌓겠다는 것은, 당시 “하늘”(sky)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하늘 외에도 “천국”(heaven) 즉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에, 순전히 인간 자신들의 노력으로 그곳까지 닿겠다는 생각은 결국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누려보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이야기>의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두 주인공의 비극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3:5; 6:1-4)?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절대 자유와 명성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과 교만이 그 원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자유는 절대 책임을 항상 수반합니다. 그리고 절대 의지에 의해서 끊임없이 통제받고 절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자유는 절대 타락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흉기로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자기 절제와 통제를 완벽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성이나 명예도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실 수 있습니다(사 63:12, 14; 렘 32:20; 느 9:10). 따라서 우리의 명성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때만이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크게 높이실 것이라고 하셨고(12:2), ‘다윗’에게 대해서도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 7:9; 8:13).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의 잘못 된 동기는 또 있습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절후).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담’도 ‘노아’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1:28; 9:1). 바로 이 명령을 무시하고 한 곳에 모여 살겠다고 합니다. 지혜와 힘과 기술을 함께 모아 하나님을 향한 대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극적인 해학과 조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하는바 바로 그것 때문에 반대로 흩어져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제 3막: 하나님이 보심(5절)
장면은 바뀌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이야기는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됩니다. 화자의 번뜩이는 해학과 역설(irony)이 다시 한 번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는데, 인간들이 온 힘을 다 합쳐 쌓아올린 탑의 높이를 언급하는 장면에서 그러합니다. 그 탑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습니까? 하늘에 닿을 정도로 올라갔습니까? 하나님의 코밑에 까지 올라갔습니까? 화자는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이 쌓은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5절).
그토록 온갖 힘을 다해서 쌓아 올린 탑이 하늘에 닿기는커녕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분께서 직접 내려와야 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땅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사 40:22). 인간의 업적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드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한낱 먼지 한 줌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죠.
5. 제 4막: 우리가 섞자(6-7절)
누군가를 조롱하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자. 우리가 성과 대를 쌓아 하늘로 올라가자.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자. 거기서 그들을 흩어버리자.”
하나님은 ‘아담’이 지혜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3:22).” 그리고 그를 동산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바로 그 동일한 모티브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11:6).
6. 제 5막: 흩어짐(8절)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계획을 좌절시켜버렸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흩어짐”(4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고, 거대한 사업은 중단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토록 함께 살고 싶어 했던 그 땅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결말은 영락없이 <에덴 이야기>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합니다. 타락한 ‘아담’이나, ‘아벨’을 죽인 ‘가인’이나 모두 벌을 받고, 살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고 있습니다(3:24; 4:16).
인간들은 이제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오히려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이로 돌변하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함께 일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앞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언어란 이처럼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7. 에필로그: 바벨(9절)
화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겨두었던 마지막 한 마디를 함으로써 이야기의 에필로그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9절). 다시 말하자면 전체 이야기는 결국 ‘바벨’(또는 바벨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사람들에게 ‘바벨’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위대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을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화려한 ‘바벨론’의 문명 앞에 그저 주눅 들어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두 무리의 백성들, 즉 스스로 자신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는 ‘바벨론’ 사람들에게와, 그들의 기세등등함에 기가 죽어 맥없이 살아가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조롱과 멸시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 바벨이 무어냐? 바벨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혼란과 혼잡으로 가는 문이라네!”
‘바벨’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주는 탑으로서, 두고두고 그 땅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마지막으로 두 번에 걸쳐 온 땅의 언어가 혼잡해 지고, 사람들은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9절). 이 마지막 문장은 이야기의 첫 문장,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1절)와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동시에 전체 이야기에 대한 수미상관의 역할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교훈과 적용
“역사를 통해서 변치 않는 두 본성이 있다. 사악한 인간의 본성과 선한 하나님의 본성이 그것이다.” 철학자 ‘헤겔’이 한 말입니다. 이 두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도무지 배우지 않는다”는 헤겔의 또 다른 명언 역시 변하지 않는 진리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철학자 ‘칼 포퍼’(K. Popper)도 역시 이보다 훨씬 후대에 같은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최근 그와의 대담을 다룬 저서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생각의 나무; 2000)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에덴 이야기>의 비극은 ‘아담’의 호기심에서 비롯됩니다. 말이 호기심이지 실은 무제한적인 자유와 지식에 대한 탐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것을 자신도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과연 그가 목적을 성취했는가? 정 반대였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유 의지>마저 날려버리고, 자신의 욕망과, 시간과, 땅과, 육체와, 죽음의 노예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 이야기로부터 무슨 교훈을 얻었을까? <바벨탑 이야기>가 그 해답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것도 없다” 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끝으로 인류의 원 역사(primeval history)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명백백합니다. 앞에서도 계속해서 강조한 바처럼, ‘바벨’탑은 인간의 위업을 드러내는 기념비나 표상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상징이자 기념비가 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마음과 생각이 나뉘고 갈라졌던 인류가 처음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반역의 합창을 부르고 있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오라),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오라),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3-4). 본문에서 밑줄 친 부분 “자 (오라)”는 히브리 원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권유를 뜻하는 이 표현에 대한 번역이 미흡하게 처리되었습니다만,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come, now"라고 번역함으로써 원전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노래 속에는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비전이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1) 새로운 도시; (2) 명성과 명예; (3) 새로운 종교.
화자는 일찍이 ‘니므롯’을 도시 건설자로 규정한 바 있기 때문에(창 10:10-12), 이들의 첫 번째 목표에 대해서는 더 상세하게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건설하려고 하는 도시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인간의 도성, 세속의 도시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대한 역사를 통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세상뿐만 아니라, 하늘에까지 이르게 하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서 하나님이 알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을 전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담’의 이름을 지어주셨고(5:2), ‘아브라함’의 이름도 지어셨으며(17:5), 예수님의 이름도 지어셨습니다(마 1:22). 이들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셨거나 또는 이루실 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서 제거해 버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이르는 성과 대”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보이스’ 목사님은 그것을 세 번째 목표, 즉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참고도서 6; 제 1권, 422-424쪽.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선호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정치 이념이나 종교는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의 역할을 합니다. 김일성 유일사상이라든지 독일의 나치즘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세겜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두 금송아지를 두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으로 예배드리도록 한 것도,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내려가 ‘유다’ 왕을 섬기고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 12:25-29). 용사 ‘니므롯’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인류의 첫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에 관한 지식을 극복할 만한 대안 즉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리스’, 270쪽(참고 도서 5).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서로를 격려하며 부르는 노래는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로다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3-15).
<시편> 기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 2:1-3).
이들의 계획은 과연 성공하였을까? 서로를 격려하고 합심하여 부르는 이 노래가 성공으로 끝났을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자 (오라),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11:7).
그분께서는 반역의 노래에 대하여 조롱과 멸시의 노래로 화답하고 계십니다. 해학과 조롱은 언어의 유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쌓아 올렸던 그 탑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너무나 미미하고 보잘 것 없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기 위해서는 친히 내려오셔야 할 정도였다고 화자는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운명을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사 13:19).
‘예레미야’나 ‘다니엘’ 역시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렘 50-51; 단 2:38). 한 예로써, ‘바벨론’ 왕 ‘벨사살’ 앞에서 손가락이 나타나 곧 멸망할 왕과 왕국의 운명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단 5:25-30).
‘바벨론’이 만일 인간의 교만과 사악함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원은 그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탑과 성을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곳에 살고 있는 의인들은(단 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통해서 익히 알 수 있으며, ‘이사야’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면서도(사 47), 동시에 의인의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 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전파하여 들리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사 48:20).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歸還)이 상징하고 있는 바는 결국 두 번째 출애굽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은 보다 근원적으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합니다.
<신약>은 ‘바벨론’을 가리켜 “큰 음녀”(淫女)이자,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인간의 교만과 사악함의 화신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그곳(또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계 18:4). 그리고 그 멸망을 기대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잠시 후면 영원히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0-22). <스바냐>는 “그 날” 이후의 회복과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이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습 3:9).
무슨 말입니까? 언어가 다시 하나로 통일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 된 언어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과연 역사적으로 성취된 바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행 2:8-11). 그리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벨’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은 그것으로 역사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역사의 종말은 파괴와 흩어짐이 아니라 회복과 건설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는 그 날, 즉 새 창조의 그 날이 바로 역사의 종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