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6과
요셉 가족:이집트 방문(1)
김태정 목사창세기 42:1-38약 96분 분량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42:6)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야기는 이제 ‘이집트’의 ‘요셉’에게서 ‘가나안’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습니다. 나이든 ‘야곱’은 양식을 위해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제들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양식을 위해서 원근각처에서 모여든 수없이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들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조만간 두 당사자들 모두에게 20년 전의 쓰라린 과거를 기억나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감상의 일차적인 과제는 우선 37장과의 비교 연구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점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자기에게 머리 숙여 절하고 있는 형들을 바라보며 이전에 그가 꾸었던 두 꿈을 기억합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하던 첫 번째 꿈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던 두 번째 꿈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첫 번째 꿈은 성취된 것 같은데, 두 번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열 명밖에 없으며, 나머지 한 개의 별과 해와 달 즉 ‘베냐민’과 ‘야곱’과 그의 아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서있는 자들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했던 자들입니다.
“내 동생과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을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신분을 밝히면 형들이 사실을 말해줄까? 이들이 여전히 나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다소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형들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 씌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형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혐의를 부인하며 자백한 사실은 ‘베냐민’과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과연 형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동생과 아버지를 어떻게 ‘이집트’로 오게 할 수 있을까?
궁리 끝에 그는 ‘시므온’을 인질로 붙잡아 두고 나머지 형제들을 돌려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시므온’은 이전에 자기를 노예로 파는 일에 주모자 역할을 했던 자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인질로 삼아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들 형제들에게 이십 년 전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함으로써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려는 것입니다. 즉 이십년 전에 자기를 ‘이집트’에 팔아넘겼던 것처럼 이번에는 ‘시므온’을 이곳에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구출하러 올 것인가에 관한 선택입니다.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비단 두 상황만이 아닙니다. 곤경에 빠진 피해 당사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역시 그러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 이십 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요셉’이 어떻게 했는지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42:21).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지금 그의 형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그야말로 인과응보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2);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야곱’이 듣는 보고 내용은 어떻습니까? 이 또한 이십 년 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가장 핵심적이며 충격적인 내용은 빠뜨린 채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파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십 년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파악하고는 절규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베냐민을 또 빼앗아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 그 때나 지금이나 이들 형제들에게 절규하는 아버지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아버지의 충격은 더욱 커질 것이며, 그들의 원하는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실로 진퇴양난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과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 이들이 ‘요셉’이나 ‘야곱’에게 정직하게 이전의 잘못을 시인한다 해도 과거의 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더욱 ‘야곱’의 충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설령 애비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간다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는 것 외는 달리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기고, ‘시므온’까지 팔아넘긴 이들이 ‘베냐민’마저 ‘이집트’로 데려가 돈을 받고 넘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으며 비교적 자유스럽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형들을 통해서 쓰라린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을 때 북받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으며, 자기를 팔아넘긴 그 형들이 자기 계획대로 ‘베냐민’을 과연 데려올지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그의 두 꿈이 이루어질 것인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감상의 이차적인 과제는 37장과의 비교 연구를 뛰어넘는 보다 큰 주제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언약” 내지는 “섭리”일 것입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야기 속의 인물들 모두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요셉’은 그의 꿈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형제들 역시 지금 그들에게 닥친 일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과응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상황인식은 아직은 불확실할 뿐입니다. ‘요셉’이 지금 목격하고 있는 상황은 그의 두 꿈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형제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자의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 있어서, ‘요셉’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그 많은 방문객들 중에서 자기 형들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가 꾼 두 번의 꿈을 해석하며 천명했던 대 원칙, 즉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라”(41:32)는 원칙이 ‘요셉’ 자신이 꾼 두 번의 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은 일종의 예언적 꿈으로서, 다른 모든 예언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참고. 신 18:22; 사 8:16-17; 41:22; 히 2:3). 그러므로 어느 독자도 ‘베냐민’이나 ‘야곱’이 조만간 ‘이집트’에 오고 말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요셉’의 형들이 보여주고 있는 뉘우침의 모습은 언젠가 모든 가족이 용서와 화해의 극적 결말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징조이기도 합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제 42장에서 ‘야곱’ 가족사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참고. 37:2). 지난 이십년 동안 ‘야곱’은 그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 ‘요셉’을 잃은 슬픔을 안고 나머지 열한 명의 아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십년 동안 ‘요셉’은 온갖 풍상과 질고 끝에 마침내 ‘이집트’ 최고 수반의 자리에 올라, 지난날들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51절).
화자는 ‘이집트’에서 ‘요셉’의 삶과 경력을 세 개의 막(幕)에 걸쳐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각각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39:1-20; 39:21-40:23; 41:1-57). 제 1막에서, ‘요셉’은 ‘이집트’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총무이자 수석 비서가 되었으며, 제 2막에서는 궁중 내 감옥의 죄수들 중에서 수석 총무가 되었고, 그리고 제 3막에서 마침내 한 나라의 총리로 등극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이어지는 이야기도 세 개의 막(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각 장면은 ‘야곱’ 가족의 세 번에 걸친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요셉’을 미워했던 형들에 관한 이야기이며(42:1-38), 두 번째 방문은 이들이 막내 ‘베냐민’을 대동한 여행이며(43:1-45:28),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은 이들 모두와 ‘야곱’까지 포함된 것입니다(46:1-47:12). 이 세 장면을 통해서 이야기는 음악에서의 “점점 더 세게”의 기법처럼 장면이 진행될수록 극적인 감동이 그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 첫 번째 이야기는 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분되며, 약간 변형된 동심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5절을 하나의 독립된 장면, 즉 “이집트 여행”으로 간주한다면, 이러한 동심원적 구조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즉 첫 장면(1-4절)과 마지막 장면(29-38절)의 등장인물은 ‘야곱’과 그의 자식들이며 배경은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 모두 ‘베냐민’을 보내기 싫어하는 ‘야곱’의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4, 38절), 행여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야곱’의 태도와 관련된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 내에서 이 두 구절과 44:29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6-17절, 18-24절)은 ‘야곱’의 아들들의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는데, 두 장면 모두 ‘요셉’과의 대면을 다루고 있으며, ‘요셉’이 이들을 아주 철저하게 심문하고 조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당연히 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특히 37장과 41장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야곱’이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가야만 하는 상황은(1-3절) 41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곱 해 흉년에 관한 내용(41:54-57)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한 나라의 총리로서 그의 형들로부터 절을 받고 있는 장면 역시 앞의 이야기로부터(41:41-50)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형들로부터 절을 받으면서 ‘요셉’이 지난 날 그가 꾼 꿈을 생각하였다는 언급(6, 9절) 역시 지난 날 그의 “꿈 이야기”(37:5-11)를 기억나게 합니다. ‘요셉’과 그 형들의 대화중에 형들이 오래 전에 죽은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나(13절), 이 일에 대해서 자신들의 과오를 뒤늦게나마 뉘우치고 있는 모습(21-22절) 또한 지나간 이야기(37:14-36)를 기억나게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옥에 가두는 모습은(17절), 마치 지난 날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되돌려주고 싶다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참고. 39:20-40:23).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야곱’의 비통한 절규(36-38절)는 그가 아들 ‘요셉’을 잃은 슬픔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37:33-35). 더 나아가서 이 장면은 구성 상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이집트’로 불러 내리려는 요셉’의 의지는 그를 한사코 보내기를 거절하고 있는 ‘야곱’의 태도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베냐민’을 오도록 하기 위해서 ‘시므온’을 감옥에 인질로 붙잡아 두기까지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시므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베냐민’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지독한 편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42장은 <요셉 이야기>의 핵심 부분이지만, 이 부분을 하나의 독립적인 별개 전승으로 다루어서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자료와 편집. 42장에 대한 자료비평의 입장은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1) 본문의 기본 골격은 “엘로힘 자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만 27-28절, 및 38절 만이 “야훼자료”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2) 여러 “야훼자료”들이 본문 전체에 흩어져 있는 양상이다(예: 2-3절상, 4절하, 5, 7, 9절하, 10-12, 27-28, 38절).
後者의 입장이 근거하고 있는 바는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 바 문학적 반복(doublet)입니다. 즉 주로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야훼 자료”는 ‘히브리’ 문학의 특징 상 동일한 내용에 대한 반복적 서술이 자주 등장할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입니다. 예컨대, 27-28절의 내용 즉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여러 자루 중 하나를 풀어보는 이야기는 35절에서 여러 자루를 한꺼번에 풀어보는 이야기에 대한 전형적인 반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8절을 “엘로힘 자료”가 아닌 “야훼 자료”로 구분하는 것은 이 구절에서 42장의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하나인 ‘시므온’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는 43:1-10의 본문에서도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참고로 두 번째 방문 이야기(43-44장)는 “엘로힘 자료”에 속하는 첫 번째 방문 이야기에 병행하는 “야훼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그렇게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 곳에서(38절, 43:1-10) ‘시므온’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것은 자료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야곱’이 ‘시므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므온’은 ‘레아’의 아들이지 ‘요셉’이나 ‘베냐민’처럼 ‘라헬’의 자식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43장은 논리적으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42장의 마지막 구절(38절)에서 볼 수 있는 ‘야곱’의 비통한 외침은 하나의 에피소드의 결론으로 삼기에 충분하며, 이는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기법이기도 합니다(예: 27:45; 29:14; 30:24; 34:31; 37:35; 45:28). 그리고 두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자루를 풀어보는 이야기”(27-28절; 35절)도 반드시 동일한 이야기의 반복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첫 번째 장면에서 조성된 긴장과 서스펜스가 두 번째 장면에 이르러 극적인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즉 ‘가나안’ 귀향길에 형제 중의 하나가 자루를 풀어보고 그 안에 돈이 든 것을 발견하였으니 그가 절도 혐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염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집에 돌아와 각자의 자루를 풀어보니 모든 자루 속에 돈이 다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앞으로 있을 두 번째 방문에서 절도죄로 체포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 이 두 사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두 사건의 선후를 놓고, 두 번째 기록(35절)이 후대의 편집적 삽입이라고 하는가 하면(Redford, Westermann), 반대로 이 구절이야말로 원 이야기의 핵심 부분인 것이 ‘야곱’이 이를 통해서 ‘시므온’이 팔린 것으로 단정 짓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5절에 이어 36절에서 그의 절규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장면에 대한 자료비평적 입장이 어떠하든 42장은 이전 장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 단일 전승으로서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야곱의 독촉(1-4절)
첫 번째 장면에서 ‘야곱’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로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화자는 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면서 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이집트’로 내려 보내는 일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1-2절)
‘야곱’은 지금 자식들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함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왜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느냐는 것이겠지요. 이 단락에서 ‘가나안’에도 기근이 들었다는 화자의 언급은 없습니다만, “온 땅에 기근이 덮쳤다”는 앞 이야기의 진술(41:57)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이야기의 연결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야곱’이 여전히 가장으로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의 이런 모습은 이전에 그의 딸 ‘디나’가 ‘세겜’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 보여준 우유부단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도 사실입니다(참고. 34:31).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 가면 그는 다시 한 번 특유의 유약함을 보여주게 될 것인데, 아들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이집트’로 재차 보내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입니다(36-38절).
“서로 바라보다”(ha;r, 라아)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대로 이해하자면, “싸움에서 서로 노려보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만(왕하 14:8; 대하 25:17, 21), 이곳에서도 과연 그러한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집트’에 양식이 많이 있다는 사실, 즉 ‘야곱’이 알고 있는 정보를 자식들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본문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만약 자식들이 이 사실을 정말 몰랐다고 한다면, ‘야곱’은 그들을 ‘가나안’으로부터 구출해주는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편 ‘요셉’은 ‘이집트’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또 다른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이를 예고라도 하듯 화자가 ‘야곱’의 자식들을 “요셉의 형”으로 부르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보여줄 이들의 역할을 암시해 주는 진술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3절)
그러나 ‘야곱’의 아들은 ‘요셉’을 제외한다 해도 열한 명입니다. 그런데 왜 열 사람인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가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식을 가져오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우리는 다음 절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4절)
‘야곱’ 자신은 너무 늙어 가지 못했을 것이며, 막내아들 ‘베냐민’은 왜 보내지 않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편애”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에게 진정한 아내는 ‘라헬’이며, 진정한 아들은 당연히 ‘요셉’과 ‘베냐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애비의 권위에 순종하여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2. 요셉과 형제들: 첫 대면(5-17절)
두 번째 장면은 ‘요셉’과 그 형들의 첫 번째 대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요셉’과 그의 형들을 여러 각도에서 대조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대조적인 모습은 무엇보다도 ‘요셉’과 형들이 처해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온 땅의 지배자로, 그의 형들은 양식이 필요해서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수없이 많은 무리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상황에 처해 있는 상대가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상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서, ‘요셉’이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반면에 그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이러한 차이를 바탕으로 형들의 본심, 즉 그들이 아직도 이십년 전과 같이 무정하고 잔인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새로운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일종의 전이구절로써 두 장면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5절)
화자는 이곳에서 비로소 ‘가나안’에도 기근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내용 상 앞 단락의 마지막 구절(41:57)에 연결됨이 마땅하며, 42:1-4과 함께 읽을 때, 누가 그리고 왜 ‘이집트’에 내려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들 일행 중에 ‘야곱’과 ‘베냐민’이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요셉’이 자기를 찾은 형들의 방문 목적을 시험해 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들을 “‘야곱’의 아들들”로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로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슨 특별한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만, 다른 곳에서 ‘이집트’ 방문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있는 점은 주목해 볼 만 합니다(참고. 43:6, 8, 11; 45:28; 46:1, 2, 29, 30; 47:27; 45:21; 46:5, 8; 50:25). 하나의 조그만 씨족 내지는 부족으로 ‘이집트’를 찾는 이들의 모습은 먼 훗날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양식을 구걸하기 위해 몰려오는 ‘셈’족의 한 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있었다”는 표현은 “반(反) 출애굽”의 모티브로서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은 기근을 피하여 그 땅으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12:10; 26:1).
두 번째 단락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장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6절)
이 장면은 ‘요셉’의 “꿈”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의 꿈이 일부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요셉’의 두 직책을 그의 “두 번의 꿈”과 연계시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의 정치적인 직함은 “총리”(fyLiv, 샬리트)이며, 경제적인 직함은 “양식을 파는 자”(ryBiv]M'h, 함마샤바르)입니다. 동시 ‘샤바르’(rb'v)는 ‘셰베르’(rb,v,: 양식, 곡식)에서 유래했으며, “곡식을 사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20회 등장하고 있으며, ‘칼’형과 ‘니팔’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곡식을 사다”는 의미이며(창 42:2; 42:7; 43:2, 4); (2) ‘히필’형에서는 “곡식을 팔다”는 의미입니다(창 42:6; 신 2:28; 잠 11:26; 암 8:5-6).
그의 형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는 장면에서, ‘요셉’의 첫 번째 꿈 즉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이 그 앞에서 절하는”(37:9) 꿈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형들이 곡식을 위하여 그를 찾아오는 장면에서, 두 번째 꿈 즉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 절하는”(37:7) 꿈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V. Hamilton). V. Hamilton, 519쪽.
‘요셉’ 자신도 ‘바로’가 꾼 두 번의 꿈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정하셨으며, 속히 행하시리라는 징조”라고 해석해 준 바도 있기에(41:32), 이 장면 역시 동일 선상에서 이해한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자리에는 ‘요셉’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해와 달”, 그리고 ‘베냐민’ 즉 “열 한 별” 중의 하나가 빠져 있다는 점에서 “요셉의 두 번의 꿈”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꿈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지나간 일들을 다시 회상해 볼 수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지나간 일들이라 함은 피차 기억하기 싫은 과거지사로서, 20년 전 ‘가나안’에서 ‘요셉’의 형들이 저질렀던 그 일을 말합니다(참고 37장). 화자는 이를 일련의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7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7-8절)
이 두 구절이 37장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지는 다음 두 구절과의 비교를 통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32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알아)보소서 하매, 33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37:32-33)
화자는 두 본문에서 동일한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요셉’의 형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본문의 핵심어는 “알아채다”, “인식하다”, “주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나카르’(rk'n)입니다. 이 단어는 7-8절 사이에서 처음에는 ‘히필’형으로, 다음에는 ‘힛트파엘’형으로, 그리고 다시 ‘히필’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알았으나”, “모르는 체 하고”; “알아보지 못하더라.” 이 단어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38장)에서도 사용된 바 있습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 하였더라”(38:25-26).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모른 체하다”(התנכר, 핫나카르)는 37:18에서 사용한 바 있는 동사 “(죽이기를) 꾀하다”(התנכל, 핫나칼)와는 마지막 철자만 다르다는 점에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로, 두 자음 ר과 ל는 각기 영어의 R과 L에 해당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과거의 일을 다시 들추어내는 화자의 의도는 상당히 암시적으로 보입니다. 혹시 ‘요셉’이 그답지 않게 자신의 신분을 숨겨가면서까지 형들을 시험하고, 심문하는 등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려 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형들이 그런 식으로 대접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서 自業自得이라는 점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화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요셉’의 인격에 대한 단세포적인 접근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격이란 양단 논리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자의 침묵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하겠으며,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요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앞으로 있을 형제들 간의 세 번의 극적인 대화중에서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절)
마치 정치 청문회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전체 대화의 핵심은 그들 사이에 놓인 본질적인 혈연의 문제를 포함해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과거사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대화가 갖는 역설은 ‘요셉’이나 일반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요셉’의 형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요셉’이 형들에게 씌우고 있는 “간첩죄” 혐의가 그것입니다. 간첩 이야기나 간첩 혐의를 씌우는 이야기 등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출애굽>의 배경에도 이스라엘이 주변국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바로’가 있으며(출 1:9-10), ‘암몬’ 왕 ‘하눈’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다윗’이 조문객을 보내자 자기 나라를 염탐하러 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삼하 10:3).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온 것이 군사적 기밀을 알기 위한 것이므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간언하고 있습니다(삼하 3:25).
‘요셉’은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죄목(罪目)은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틈”(hw:r][, 에르와)은 문자적으로 “수치”, “나체”, 또는 “헐벗음” 등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이 표현 역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는데, 이전에 그는 “옷이 찢기고 벌거벗긴 채” 동굴 속에 던져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37:23-24). <구약>에서 “나체”는 “수치”를 의미하며, “누가 누구의 나체를 본다”는 표현은 “성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며, 특히 그 상대가 가족인 경우에 근친상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레 20:17). 참고로, ‘함’은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본 죄로 저주를 받은 바 있기도 합니다(창 9:22).
혹시 ‘요셉’은 자기 형들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이와 같은 근친상간의 패륜과 맞먹는 것이었음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의 화자는 아주 이례적으로 등장인물의 속마음까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이전에 꾼 꿈을 생각하면서 형들을 추궁하고 있다는 설명이 그것입니다(9절상). 적어도 이 진술에 따르면 ‘요셉’은 지금 감정 조절에 실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일견 균형을 잃고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들 ‘므낫세’를 낳고는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했고(참고. 41:51),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낳고는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참고. 41:52). 과거를 용서하고 현재에 만족해했던 그가 형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쓰라린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를 분노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10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10-11절)
이들의 자기 변론은 네 개의 짧은 반박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문장은 접속사나 관계 대명사로 연결됨이 없이 독자적인 기능을 하고 있어, 이런 방식의 구문(構文)을 ‘asyndeton’이라 합니다. 예: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I came, I saw, I conquered); “웃고 악수하고, 헤어지라”(Smile, shake hands, part).
마치 일련의 목소리가 상호 공명을 이루어 반박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네 개의 문장은 구조적으로 부정문-긍정문-긍정문-부정문의 교차대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처음과 마지막 문장은 동일한 자기부인(自己 否認), 즉 “우리는...아니니이다”는 시적 수미상관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 선언”의 효과를 절정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며 인정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간첩이 아니며, 곡물을 사러 왔을 뿐이며, 다 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확실하다”(“정직하다”)(כן,켄)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후 아버지 ‘야곱’에게 했던 거짓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37장의 에피소드를 회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들의 주장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치 망치로 대못을 박듯 종전의 주장을 세 번에 걸쳐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12절); “너희는 정탐꾼들이라”(14절);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16절). ‘요셉’은 왜 이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심문하는 방식은 마치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식의 뒤집어씌우기 입니다. 피의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고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처음 한 두 번은 강력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다가도 끝내 항복하고 맙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수사는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하).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의 형들은 이번 방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까지 술술 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정직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13절)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싶어 ‘요셉’은 그토록 집요하게 형들을 추궁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는 고도로 숙달된 고문 전문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형들의 고백에서 그가 관심을 가질 만 한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되었는데, 막내에 관한 내용입니다. 형들이 이복동생인 자신에게 그토록 몹쓸 짓을 했다면, ‘베냐민’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까? 아직 사실 유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궁금증은 일단 풀렸으며, 남은 일이 있다면 진실 여부를 가려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는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형들의 고백을 짐짓 듣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같은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14절)
그러나 이 구절은 13절과는 논리적으로 연결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즉 막내에 관한 이야기와 간첩 혐의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장면을 ‘요셉’이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일시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북받쳐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은 형들의 진술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 위하여 하나의 시험을 고안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시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15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15-16절)
시험 문제는 막내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또한 맹세 또는 언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이 표현은 전형적인 히브리 식 언약,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하노니”(삼하 15:21)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표현이 본문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바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것은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자신이 제출한 시험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조치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17절)
즉 형들을 감옥에 가둔 조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수감시키다”(#s'a, 아사프)는 문자적으로, “모으다” 또는 “거두어들이다”는 의미로서, 다른 곳에서 같은 의미로 수차례 사용한 바 있는 단어 ‘나탄’(@t'n)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참고. 40:3, 4, 7). ‘아사프’는 ‘요셉’과 발음이 유사하여 이곳에서 또 한 번 언어의 유희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리하여 그가 가두었다”는 발음은 “그리하여 요셉이”의 발음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요셉’의 이 조치는 보복성이 짙은 행동임에 분명합니다. 이전에 자신이 ‘이집트’의 감옥에 갇힌 것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형들 때문이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그 형들이 빚을 되갚아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형들의 편에서 보자면, ‘요셉’이 정말 자기들을 간첩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음에 분명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삼일”이 주는 의미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일과 관련해서 삼일 간의 시험을 거친바 있습니다(22:4).
3. 요셉과 형제들: 두 번째 대면(18-24절)
‘요셉’과 형들의 두 번째 대면은 단순히 여백 채우기 수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등장인물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보다 훨씬 신사적이며, 동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형들의 안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또한 처음 계획도 바꾸고 있습니다. 원래 ‘베냐민’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모든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이번에는 ‘시므온’만 남겨두고 모두 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다시 한 번 “가나안에서 있었던 일”(37장)을 기억나게 해줍니다. ‘요셉’의 형들 역시 지난 시절 처음에는 ‘요셉’을 땅 굴속에 쳐 넣어 죽이려 하였으나, 생각을 바꾸어 지나가는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생명은 보존시켜 준 바 있습니다.
변화는 형들에게 더욱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난 시절 ‘요셉’에게 행했던 일을 두고 반성하고 후회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도 자신들의 지난 잘못 때문일 것이라는 고백도 쏟아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형들을 이처럼 변화시켰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 화해(和解)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우선 ‘요셉’의 태도변화 즉 그의 두 번째 계획부터 살펴볼 차례입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18절)
형들을 옥에 가둔지 사흘 만에 ‘요셉’은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설명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어 두 번째 계획으로 나아가게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혹시 형들을 옥에 가둔 것이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형들을 두렵게 만들어 자신들의 지난 행적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혹시 열 명 중에 아홉은 남겨두고 한 명만 돌려보내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아예 나타나지도 않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반대로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아홉을 양식과 함께 돌려보내면 더 많은 양식을 보낼 수 있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요셉’이 무슨 생각으로 처음 계획을 바꾸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의 동기는 아주 지고(至高)하고 순수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너희는 생명을 보전하라.” 그는 간첩 혐의자들을 살려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형들에게 이 말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며, 그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약속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담보이자 보장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요셉’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형들의 모습과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요셉’의 모습 말입니다!
대조는 이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족장들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도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족장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족장들은 훌륭한 역할모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만나면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서,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20:11; 참고. 12:12), ‘야곱’도 ‘세겜’ 땅에서 ‘디나’ 문제로 이방인들의 복수를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34:30). ‘요셉’의 소명은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일임에 틀림없지만(45:7; 47:25; 50:20), 그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가는 종교적 책무는, <구약>에 따르면,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 1:7; 전 12:13; 레 19:14; 신 6:2, 13).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요셉’이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욥 29:12-13; 잠 31:20).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19절)
이어서 ‘요셉’은 왜 그들을 방면하는지 처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돌아가서 막내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20절)
하지만 열 명 중에서 누가 남을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이 의도하는 바는 이들에게 그가 받았던 고통을 단순히 되갚아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시 년 전에 그들이 저질렀던 일을 돌아보도록 하려했던 것이 아닐까요? 과연 그의 의도는 그대로 적중되고 있습니다.
21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21-22절)
이들의 대화는 단순히 이전에 있었던 일(37:12-30)을 다시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요셉’이 형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는지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당시 일을 기록하고 있는 37장은 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준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당시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추측해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은, 그가 울면서 형들의 선처를 애걸했다는 점입니다. ‘요셉’이 겪었다는 “마음의 괴로움”(hr;x, 차라)은 일단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 예컨대 출산의 고통이나 적의 침공을 받고서 느끼는 극단의 공포심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35:3; 신 31:17; 왕하 19:3). 지금 형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요셉’이 당시 겪었던 그 고통과 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동시에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의 섭리, 즉 인과응보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합니다.
‘르우벤’도 그들의 고통에 쐐기를 박듯 한 마디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 <창세기>는 살인한 자가 받게 될 “피의 복수”에 대해서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창 9:5). ‘르우벤’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형제들 중 아무도 장자인 자기에게 ‘요셉’의 일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려준 것 같지는 않으며, 그 역시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유괴 당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도, “유괴죄” 역시 살인죄에 맞먹는 중형(重刑)으로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출 21:16).
‘르우벤’의 이 말은 ‘요셉’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지금 처음으로 ‘르우벤’은 나머지 형제들의 음모에 가담하거나 공모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르우벤’이 아닌 둘째 형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요셉’이 ‘라헬’의 둘째 아들 ‘베냐민’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레아’의 둘째 아들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두고 싶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Sternberg).
이 모든 형제들 간의 대화가 ‘요셉’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설마 ‘요셉’이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통역관을 그들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23절)
‘요셉’과 형들의 두 번째 대면은 단순히 여백 채우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다루고 있다고 이 단락의 벽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요셉’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고(24절)
그의 눈물입니다. 감격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여러 차례의 눈물, 즉 ‘베냐민’과의 극적인 상봉에서 흘리게 될 눈물(43:30),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해서 인질로 남겠다고 자원하고 나설 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흘리게 될 눈물(46:29), 그리고 아버지 ‘야곱’을 포함한 온 가족의 상봉에서 흘리게 될 그 모든 눈물의 서막에 해당하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이제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는 등 여전히 형제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여전히 형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형들의 회개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대 화해는 궁극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4. 가나안 귀환(25-28절)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요셉’ 형제들을 다루고 있는 이 짧은 단락은 전체 이야기에 신비감과 함께 극적 요소를 더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의 속마음에 대해서 더 깊은 통찰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행동 때문입니다.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25절)
왜 그는 각 사람의 자루에 돈을 넣게 한 것일까? 형제들에 대한 배려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형들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우려 함일까? 이십 년 전 형들이 돈을 받고 기꺼이 자기를 팔아넘긴 그 상황을 재현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즉 이번에도 이전에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형제 ‘시므온’과 돈 중에서 후자를 선호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여러 가능성 중에서 굳이 한 가지 만을 선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의 의도는 아주 복합적이었을 것입니다(Westermann).
‘요셉’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나중에 자루 속에 돈이 든 것을 발견하고 형제들은 두려움으로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27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27-28절)
그들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 위에 임했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일을 ‘요셉’이 일부러 꾸민 짓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매사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받아들이게 했을까? 무엇이 이 뜻밖의 사태를 하나님의 진노로 받아들이게 했을까? 추측컨대, ‘요셉’과의 두 번째 대면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양심이 되살아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Wenham). 형제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문자적으로 “정신이 나가다”입니다.
5. 귀환 보고(29-38절)
마지막 장면은 ‘가나안’ ‘야곱’의 집입니다. 이야기는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귀환 보고를 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29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29-34절)
이 장면을 보다 흥미롭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보고 내용과, 동일한 내용에 대한 화자 자신의 진술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6-24절). 그리고 동시에 이들 형제가 오래 전에 ‘요셉’의 옷을 아비에게 보여주면서 보고했던 내용(37:32-35)과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있어 ‘시므온’을 ‘이집트’에 남겨두었다는 사실은 이전에 ‘요셉’을 잃었던 그 일이 재현되는 것과 사실상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42:36).
이 장면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그 사람, 그 땅의 주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30, 33절). ‘요셉’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를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들은 결국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요셉’의 꿈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 내용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의를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가족사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다고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만, 화자의 진술 내용은 이들의 보고와는 사뭇 다릅니다.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가족에 관한 내용을 먼저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11절 참고).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 즉 ‘베냐민’에 관한 내용을 털어놓았다는 점은 가능한 한 가장 마지막에 슬쩍 언급하고 지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요셉’ 앞에서 진술하였다고 ‘야곱’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요셉’과 대면 중에는 그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가장 나중에 슬쩍 언급함으로써 듣는 이의 충격을 완화시켜 보려는 상투적인 의도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의 내용을 바꿀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보고 내용에서 아예 빼버릴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그들이 삼일 동안 구금을 당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19, 24절). 또한 ‘시므온’을 두고 온 점에 대해서도 그가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간청에 못이겨 영빈(迎賓)의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그들 모두를 죽이겠다는 ‘요셉’의 경고(20절)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하지도 않았던 약속, 즉 그들이 이 나라에서 마음대로 “왕래하며 무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꾸며내기도 합니다(3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자루에서 돈을 발견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야곱’의 의심과 두려움을 완화시켜보려는 이들의 노력은 과연 성공을 거두었을까? 그렇지 못합니다. 자식들의 보고를 듣는 내내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뭐라 하든, ‘시므온’이 함께 오지 않았어. 그리고 이제 ‘베냐민’마저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화자는 ‘야곱’의 이러한 반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전에 일견 일탈(逸脫)과도 같은 한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앞에서 일차 언급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루에 든 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35절)
이 구절은 구문 상 34절과는 일정 시간이 흘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자루에 든 돈을 발견하고 ‘야곱’은 물론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미 앞에서 적어도 자기들 중 한 사람의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27-28절). 그런데 왜 이 장면에서 다시 놀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본문의 관계를 자료비평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참고. “문학과 역사”), 보다 최근의 자료비평 진영의 입장은 35절을 단지 27-28절에 대한 요약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보다 흥미로운 견해는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놀라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Sternberg). 즉 ‘야곱’의 자식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로 인정한 바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크게 임할 것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자루 하나가 아니라 모든 자루 속에 다 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놀라고 있는 이유는 분명치가 않으며, 그래서 더 끔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므온’이 사라진 자리에 돈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야곱’의 판단입니다. 어딘지 수상쩍고 수수께끼 같은 자식들의 보고, 난데없는 돈다발의 출현, 이 정황들을 곰곰이 분석해 볼 때, 점점 확실한 그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아이들이 ‘시므온’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이 분명해. 이놈들은 지금 일부러 놀라는 척 하고 있으며 무엇인가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해.”
그러나 이런 생각을 그대로 발설하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일 것입니다만, 화자는 ‘야곱’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오고갔을 것이라는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
‘야곱’이 그의 자식들을 비난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자식들에 대한 그의 의심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현재 자식들에 대한 그의 의구심은 이전에 ‘요셉’이 죽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 37장). 그 당시 그는 자식들의 보고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야곱’과 그의 자식들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은 이전에 ‘요셉’과 그의 형들 사이에 있었던 것만큼이나 깊고도 넓다 하겠습니다. 당시 분열과 대립의 피해자가 ‘요셉’과 ‘야곱’ 자신이었다면, 이번에는 ‘야곱’ 혼자 그 모든 아픔과 상처를 다 감당해야 할 판입니다. 그의 울부짖음은 이전에 ‘요셉’을 덮쳤던 그 운명과 지금 ‘시므온’에게 덮친 그 운명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야곱’의 비난은 타당한 것이고 이해할 만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이 그러한데 어느 아들이 감히 나서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반박할 수 있겠으며,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르우벤’의 반응은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화가 난 모습이며, 그의 제안은 무모하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37절)
어쩌면 그의 제안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두 아들을 담보로 맡겨두겠다는 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야곱’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어떻게 ‘르우벤’의 두 아들 즉 자기 손자들을 잡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손실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나 보상이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롯’의 제안과 흡사합니다. ‘롯’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에 묵고 있는 손님을 해하려 하자 대신 그의 두 딸을 주겠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19:8). 지극히 관대하지만 동시에 아주 어리석은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한 생명을 살리는 대가로 두 생명을 죽이겠다는 발상입니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이는 무모한 발상이며 감정의 과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의구심만 더 키웠을 뿐입니다. ‘야곱’은 어쩌면 이들이 ‘요셉’은 물론 ‘시므온’까지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단호히 ‘르우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38절)
그는 ‘르우벤’ 뿐만 아니라 이들 형제 모두에게 울부짖듯 말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그의 두 아들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야곱’은 ‘베냐민’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베냐민’을 “너희들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내 아들”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라헬’과 그의 두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편애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의도했던 아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양식이 더 필요하며, 나머지 자식들이 ‘이집트’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베냐민’만은 보낼 수 없습니다. ‘야곱’에게 있어 ‘시므온’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베냐민’이 형들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베냐민’ 없는 인생은 지옥의 삶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절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20년 전에 ‘요셉’을 잃었을 때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35:37)고 절규하던 모습을 기억나게 해줍니다. ‘요셉’이 없는 지금 ‘베냐민’은 그에게 있어 사실상의 첫 아들인 셈입니다. 대 화해를 위해서 아직도 넘어야 할 산, 즉 회개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의 절규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하나님과 양심: 기근
해 시계. 도대체 양심이란 무엇일까? <성경>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인간이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정부는 1811년 이후부터 “연방 양심 재단”(the Federal Conscience Fund)이라는 것을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익명의 기부자들이 보내온 범칙금을 바탕으로 조성된 것인데, 범칙금이라고 하는 것이 정부가 부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양심에 따라 부과하여 납부한 것으로서 그 종류도 각양각색입니다. 예를 들어, 한 군인이 전역하면서 기념품으로 몰래 들고 나온 담요에 대해 훗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보낸 담요 값이라든지, 우표를 붙이지 않고 보낸 편지에 대해서 나중에 보낸 우표 값이나, 누락된 세금, 그리고 한 과부가 우연히 죽은 남편의 책을 뒤적이다가 그가 정부 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나중에 되갚은 공금 등이 있습니다. 현재 양심 재단에 모인 돈 액수는 수백만 불에 이른다고 합니다.
양심을 소재(素材)로 한 문학 작품도 不知其數입니다. 유명한 <햄릿>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주인공 ‘햄릿’은 극중에서,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 ‘클라우디우스’(Claudius) 왕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를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양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쉐익스피어’의 또 다른 원작 <리차드 3세>의 가장 사악한 주인공 ‘리차드 3세’조차도 때로는 양심의 문제로 다음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 양심은 수천 개의 혀를 가지고 있구나
그 모든 혀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한 결 같이 나를 악당이라 저주하고 있구나
<리차드 3세>, 5장 3막
그러나 그는 양심의 고발에 굴하지 않고, 그에 대항하여 이겼노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양심아, 물러가라. 리차드가 돌아왔도다”(5장 3막). “리차드가 옛날로 돌아왔다”(Richard's himself again)는 표현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보다 폭넓게는 “실망, 공포, 질병 등에서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과연 양심이란 무엇일까?” ‘햄릿’이나 ‘리차드 3세’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양심을 “해 시계”로 부르기도 합니다.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지만,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시계 말입니다. 한 밤중에 성냥불을 켜서 “해 시계”를 보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대중없습니다. 밤 아홉시가 되기도 하고, 자정이 되기도 합니다. 양심은 마치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정치적 입장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충고는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양심은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고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변명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스’ 목사님은 양심은 마치 서커스의 곡예부리는 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개가 조련사의 호각에 따라 매 번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데서 착안한 비유로 보입니다. 즉 호각을 한 번 불면 두 발을 들고 일어섰다가, 두 번째 호각 소리에는 주변을 맴돌다가, 세 번째 호각 소리에 드러누워 죽은 체 하는 등, 시시각각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 본문은 바로 이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만, “야곱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라면, ‘요셉’의 형들은 먼저 자신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 내지는 “양심의 고발”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가해자의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양심의 고발”은 회개를 위한 첫 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복음을 들려주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 시계”가 어떻게 다시 재깍거리며 작동할 수 있을까? 빛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양심이 어떻게 “고발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지난 세월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 즉 동생을 팔아넘긴 사실을 놓고 얼마나 후회하고 뉘우쳤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놓고 얼마나 씨름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십중팔구 ‘리차드 3세’처럼 양심을 묻어놓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 스스로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의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이들은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구원이 필요한 영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 잠자는 양심이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이들은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까? 어떻게 말을 달리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서커스 조련사가 개를 훈련시킬 수 있을까? 당근과 채찍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둘을 적절히 번갈아 가며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만, 이번에 그분의 손에 드신 것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입니다. “기근(饑饉)의 채찍”입니다.
그분께서 ‘야곱’을 통해서 울리시는 첫 번째 경고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참고. 1-2절). ‘야곱’의 질책은 익살스럽기조차 합니다. 이들 형제들이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다는 표현이 그렇고, ‘애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들 형제들이 “애굽의 풍요”에 대해서 들었을 때 보인 반응이 이처럼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일시에 쳐다보는 장면이 익살스럽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양 속담에, “교수형 집행인의 집에서 밧줄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이들이 “애굽의 풍요”에 대해서 들었을 때,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내심 깜짝 놀라 서로를 응시했다는 것이겠지요. ‘야곱’의 질책이 그들의 잠자던 양심을 일깨웠나 봅니다. 그들이 한 행동, 즉 지나가던 상인들을 통해서 동생을 팔아넘긴 그 나라의 이름을 이십 년 전만에 다시 들었을 때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그동안 아비에게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왔던 그 이름을 이제 다른 사람 아닌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듣게 되었을 때, 각자의 양심은 화들짝 놀라 깨어 일어나 서로의 양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르우벤’을, ‘르우벤’은 ‘시므온’을, 그리고 ‘레위’는 ‘스불론’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집트래, 이집트 말이야.” 양심은 이제 이들 모두를 겁에 질려 떨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 이들이 ‘이집트’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을 보면서, 양심이 아직 완전히 죽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집트’를 언급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역시 ‘리차드 3세’처럼 깨어난 양심을 다시 깔아 뭉긴 채 나머지 인생을 지금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첫 번째 채찍이 바로 “기근”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나안’에서 자족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황금 연못”을 떠나 새로운 연못 즉 ‘이집트’를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집트’가 어떤 곳입니까? 그들이 가장 가기 싫은 곳입니다.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다음과 같이 되 뇌이고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 이집트람.” 그곳에 누가 있습니까? 그들이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를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가 혹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조차도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나안’은 물론 ‘이집트’에서조차 몇 년 채 계속된 가뭄으로 곡식은 물론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곳에 그냥 눌러 앉아 있어도 죽기는 매 일반입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서양 속담에 “궁(窮)하면 하지 않을 수 없다”(Needs must when the devil drives)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마귀가 내몰면 어쩔 수 없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속담도 다음과 같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Needs must when God drives.”
하나님께서 이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방탕한 여인 ‘고멜’의 경우 역시 하나의 고전적인 예로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다만 ‘고멜’의 경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이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멜’은 남편 ‘호세아’를 내버리고 연인을 따라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호 2:5).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갈구했던 이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준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남편 ‘호세아’였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하지만 바람난 여자가 이를 알 리가 없습니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9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1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2:9,11-1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근 대신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호세아’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아모스’ 선지자도 역시 환난과 기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6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9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6-7, 9-10)
이처럼 온갖 종류의 재앙이나 환란이 하나님의 채찍으로 제대로 기능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이스라엘이 제대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고를 경고로 받아들이지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기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실은 영적인 기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데서 오는 기근이었습니다. 왜 듣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입을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입을 닫으셨을까? 그들이 듣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훈계와 질책을 듣기 좋아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신화(神話)가 하나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서점가에 넘치는 수없이 많은 자기 개발 관련 책이나 상담심리 관련 책들이 한 결 같이 이 신화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채찍대신 당근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러한대도 왜 하나님은 당근 대신 채찍을 즐겨 사용하시는 것일까? 왜 이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주는 대신 싫어하는 것을 주려했던 것일까?
아무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바대로 해주셨습니다. 즉 그분의 입을 닫아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떡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만, 떡만으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떡이 없어도 영원히 살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신 8:3)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구했습니다.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구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애타게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목말라 합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것 때문입니까?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과 양심: 말씀
곤장과 돌멩이. 흔히 <돌아온 탕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3-20상)
이 탕자 역시 ‘고멜’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초하여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환난을 통해서 회개에 이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만나고 있는 환난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그가 회개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채찍”은 물질적인 환난 즉 배고픔이었습니다. 탕자는 이 배고픔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배고픔과 같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환난이 늘 같은 효력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곤장이나 돌멩이”의 體罰이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육체적 상처는 아물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심한 충격 요법을 필요로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두 번째 충격 요법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배고픔 때문에 ‘이집트’로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라면 말입니다. 이들이 필요한 양식을 얻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허기를 채우고 나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더 강력한 충격 요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6-7절). 이 장면에서 특기할 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태도, 즉 “가혹한”(hv,q, 카셰) 언사(言辭)입니다.
한낱 “엄한 소리” 즉 “가혹한 언사”가 어떻게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될 수 있을까요? 영어 권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곤장(棍杖)과 돌멩이는 내 뼈를 부수지만
말로는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네
하지만 이 노래 가사는 틀린 것입니다. 우리네 속담은 이와는 다르게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양 빚을 갚는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 말의 위력을 간파한 지혜의 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깊고도 오랜 상처를 남기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언어적 폭력일 것입니다. 그래서 비평이나 비난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고 진실을 담은 것이라 해도, 당하는 자의 편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좌절감과 함께 적개심마저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때로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필자는 중학교 재학 시절 한 국어 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에 나를 나무라면서 내 아버님을 인격적으로 모독했던 사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항상 그 때 수업시간에 받았던 수치심과 증오심도 함께 되살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비수같은 말. 그래서일까요?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수단에 앞서 “말씀”의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아주 자상하게 우리를 좌불안석(坐不安席)하게 만들면서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위력과 관련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요셉’이 형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사용한 더 큰 충격 요법, 좌우에 날선 칼은 다름 아닌 비정하고도 가혹한 “언어의 칼”이었습니다. 그것도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일종의 추측성 혐의입니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절하).
혹자는 ‘요셉’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양식을 구걸하러 온 형들에게 도움은커녕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형들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 너무 가혹하고 비정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요셉’이 형들을 보자마자 자기 신분을 밝히고 무조건 도움을 주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는 너무 감상적이고 순진한 태도는 아닐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요셉’을 통해서 더 큰 일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요셉’의 형들은 보통이 넘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아주 마음이 단단하고 강퍅한 자들입니다. 단순히 물질적 도움 얼마를 받았다고 해서 감지덕지(感之德之)하여, 지난날을 뉘우치고 돌아설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하에 천문학적인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는데도 적화통일의 꿈을 버릴 것이라고 징후는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들 형제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수 년 전, ‘디나’가 ‘세겜’ 족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누이동생의 복수를 한답시고 동네 전체를 살육하고, 약탈해버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열한 기만술로 그렇게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아버지 ‘야곱’조차도 아들들의 행위를 일컬어 악취와 구역질이 난다고 했겠습니까(34:30). 형제 중의 장남 ‘르우벤’이라는 자는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간통을 했습니다(35:22). 셋째 아들 ‘유다’는 어떻습니까? 며느리 ‘다말’을 창녀인 줄 알고 잠자리를 같이 하여 아들까지 낳게 했습니다(38장).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합심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37장). 이런 사람들이 곤장 몇 대 맞았다고 해서, 배고플 때 식량 지원 얼마 받았다고 해서, 뉘우치고 돌아설까요?
이제 우리의 관심을 ‘요셉’에게로 돌려봅시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족장 이야기>에서 족장들은 단순히 족장이 아니라, 군사적 영웅이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요셉’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를 혼자 내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늘 그와 함께 하셨고, 그와 대화하셨으며, 그를 보호해 오셨으며, 그를 죄 짓는 자리에 두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형들과 대면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요셉’의 “과격하고 가혹한 언사”는 복수심에 불타서 터져 나오는 ‘요셉’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탁(神託)으로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요셉’의 언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가 비정하다거나 가혹하다는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견해가 지니고 있는 감상적이고도 낭만적인 태도를 배격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화자가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요셉의 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절).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요지인 즉은 지금 이 대면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따라서 ‘요셉’의 “가혹한 언사”도 원래 대본에 없는 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원 대본에 없는 돌출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제어하지 않았다면, 즉 그가 일순간 하나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뜻에 따랐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결코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파악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햄릿의 쥐덫. 형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고 ‘요셉’의 억지 주장에 무엇인가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과거지사를 떠올렸을까요? 마치 살인자가 체포된 후, 현장 검증을 통해서 과거 살인 행적을 재연할 때, 이전에 그가 저질렀던 끔찍한 범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리한 독자라면, ‘이집트’ 왕궁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 장면이 이십여 년 전에 ‘가나안’에서 보았던 한 장면과 ‘오버랩’되고 있음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37장). 그 때 ‘가나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세겜’에서 양 떼를 치던 형들이 자기들 앞에 화려한 채색 옷을 입고 우쭐거리며 다가오는 ‘요셉’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필경 자신들의 비행(卑行)을 아버지에게 알려줄 “정탐꾼”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어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9, 14절). 이 얼마나 극적인 아이러니입니까! 형들이 자신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일 때, ‘요셉’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가 형들을 찾아 온 것은 단순히 형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형들 역시 똑 같은 모습으로 자신들을 향한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을 뿐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10-11절).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 속에 내던졌고, 마찬가지로 ‘요셉’은 지금 그 형들을 감옥 속에 가두어버립니다(17절).
너무나 가혹하고, 부당하며, 억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일이 메마른 땅처럼 단단한 형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에야 비로소,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들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뉘우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절).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쉐익스피어’의 <햄릿>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이 희곡은 양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 때문입니다. ‘햄릿’이 그의 삼촌이자 새로운 국왕의 죄악상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사용한 방식이 지금 ‘요셉’이 사용하고 있는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할 것입니다. ‘햄릿’은 삼촌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를 독살했음을 믿고 있으며, 복수를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립니다. 과연 그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틀림없을까?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없습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진실을 말해줍니다만, 여전히 그는 망설입니다. 만일 내가 틀렸다면 어쩌지? 만일 그가 아무 죄가 없다면 어떡하지? 마침내 그는 한 연극을 계획하게 됩니다. 연극의 내용인 즉은 그의 아버지가 꿈속에서 알려준 삼촌의 범죄 사실을 배우들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재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연극 제목을 “죄 덫”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 연극을 통해서 삼촌의 양심을 사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과연 왕은 연극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왕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와 외칩니다: “나에게 빛을 다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 내 죄악이 역겹고, 그 냄새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형제를 살인한 이 죄악 위에,
태초의 저주가 있을지니
<햄릿> 3장 3막
지금 ‘요셉’과 그의 형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 장면 역시 그 의도에 있어 <햄릿>의 “쥐 덫”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이들은 제 삼자로서가 아니라, 마치 살인자가 훗날 현장 검증에서 자신의 범행을 재연하듯, 하나님이 기획하고 연출하신 이 희곡을 직접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클라우디우스’처럼 마침내 회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상처와 달리 부당하고 억울하게 입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우리를 괴롭힙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나, 예배 시에 설교를 통해서나, 학교에서 선생님의 질책을 통해서나, 또는 동료의 무심코 내뱉는 말 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럴 경우 대개 우리는 발끈 화를 내거나,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성숙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나 ‘햄릿’의 삼촌처럼 나를 돌아보아 회개케 하는 영적인 “쥐덫”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주시는 것은 그 자체로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토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대항하거나 반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3. 하나님과 양심: 고독과 채찍
피상성의 질병.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 <영적 성장의 지름길>에서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가 ‘피상성’(皮相性)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경박스러움도 결국 ‘피상성’이라는 단어 하나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피상성”이란 한 마디로 “대충대충”과 사촌간입니다. 반대로 치열함이나, 끈기나, 일관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은 이처럼 피상성의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일까? 왜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사랑을 함에 있어서나, 업무 처리를 함에 있어서나 끈기와 치열함으로 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끝내고 마는 것일까?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일종의 미덕쯤으로 여기는 우리네 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들은 한꺼번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고, 제한된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등의 부담을 늘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도 현실입니다. 예컨대, 여러 작품에 겹치기 출연하는 연예인일수록 인기나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대충대충 살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도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특히 두려움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랑에 빠져 나 자신을 완전히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또는 나의 사랑이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과거 사랑의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일수록 더욱 크게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처음부터 기피하게 됩니다.
영적생활에서 피상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어떤 목적이나 구체성이 없는 기도, 구체적인 적용이나 결단이 없는 예배나 설교, 체계적인 연구나 묵상이 없는 <성경> 읽기, 구체적 책임이나 돌봄이 없는 성도간의 교제 등일 것입니다. 영적생활 역시 일상생활의 한 부분 내지는 연장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피상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우리네 경구가 결코 과장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떤 형태의 훈련이 가장 적합할까? 이들 질문에 대해서 흥미롭게도 두 가지 상반되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작은 공동체 훈련” 즉 소위 말하는 “소그룹 운동”일 것입니다. 대형 교회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작은 공동체 운동”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소그룹”인가? 이곳에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자신을 드러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계속해서 자신을 숨긴 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서 이 모임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갈등 가운데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계속 남아서 모임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입니다. 사실 건강하고 활기 찬 모임이라면 참석하는 개개인에게 이러한 선택의 도전에 직면하도록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목장은 과연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만날 때마다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국(時局)이나 세상이나 타인에 관한 겉도는 이야기로 나에게 쏟아지는 도전을 피해가려 합니까? 이런 점에서 소그룹 지도자의 기술과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입니다.
고독의 훈련. 영적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처방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에서 말한 첫 번째 것과는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것으로서, “공동체 훈련”이 아닌 “고독”(孤獨)의 훈련일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 훈련”이 수평적 관계, 즉 인간 상호간의 피상성을 깨부수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면, “혼자 있기”는 수직적 관계, 즉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관계를 허물기 위한 것입니다.
“고독”이라! 이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그분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혼자 있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사람들은 서로 깊이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하면서도 늘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 합니다. 그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혼자 외롭게 남겨져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고 두렵습니다. 신경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에게 권하는 충고 중의 하나도 “절대 혼자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울증 환자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환자를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고독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고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이나 성장을 원하는 자라면 홀로 하나님과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로잡는 그 모든 잡다한 일상이나 사람들, 심지어 가족마저 떠나, 그분하고 단 둘이 독대(獨對)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쩌다가 한 번이 아니라,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필자도 힘이 닿는 한, 거의 매일 하루의 십일조를 따로 떼어서 하나님과 보내고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과 성경 연구를 통해서 그분을 만나고, 대화하고, 간구하고, 또 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자 말자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3년을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은 이후 그의 삶의 진로를 정함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요한’은 ‘밧모’라 불리는 섬에서 하나님과 홀로 지내면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계시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 역시 ‘시내’ 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홀로 지내면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고래 뱃속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리고 ‘엘리야’는 홀로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하고 똑똑하게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고독의 사역. 그렇다면 ‘요셉’의 형들에게도 이와 같은 “홀로 있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를 위해서 감옥만큼 더 적절한 장소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세 번째 단락의 장면은 ‘이집트’ 감옥입니다. 이 감옥 속에 ‘요셉’의 형들이 내던져져 있습니다. 이들이 겪어야 할 고초가 아직도 더 남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근이라는 자연적 재앙에 이은 가혹한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양심이 여전히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옥에 홀로 남겨졌을 때, 비로소 자신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독”이 그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자신들의 죄를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도 자신들이 동생에 대해서 한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죄책감은 느꼈을 터이지만, 그 때마다 애써 양심의 고발을 억누르고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기간은 단지 삼일에 불과했는데도, 어쩌면 이 기간 동안 이들 각자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해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요셉’ 앞에 섰을 때,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이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 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 값을 치르게 되었도다”(21-22절).
물론 이 대화는 이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고받던 대화는 아닙니다. 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요셉’ 앞에 서서 그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일입니다. 곡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도 좋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은 인질로 남겨 두고 가야 한다는 조건부 석방 소식이 그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고통스럽게 쏟아내고 있는 양심의 고백이 이전과 무엇이 다릅니까? 비로소 내면의 소리를, 양심의 고발을, 입으로 소리 내어,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다른 ‘이집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과오나 범죄에 대하여 이토록 공개적으로 간증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다소 과장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독의 훈련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독대(獨對)하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시련 때문이든, 기도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든, 아니면 습관 때문이든, 고독의 훈련은 신앙인의 양식(糧食)이자 호흡입니다. 그리고 독대를 통해서 그분으로 하여금 잠자는 내 양심을 일깨우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만일 고독의 훈련이 여기서 끝나면, 깨어난 양심은 이내 잠자리로 되돌아가버립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공개적인 간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동체 모임이나 예배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배나 작은 공동체 모임이 진실로 역동적이고 치유의 능력이 있으려면, 바로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공개적인 결단과 간증의 헌신을 하도록 촉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 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려오면서, 본인이 이점에 대해서 항상 강조하고 촉구해왔지만, 제 아내의 경우 단 한 번 그렇게 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헌신의 간증을 드린 분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성경공부 후에도, 침례를 받은 후에도, 예배를 드린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결단이나 의지 표명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일까요? 부끄럽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이럴 진대 어떻게 새롭게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헌신과 결단을 촉구할 수 있겠습니까?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습관을 고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고쳐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회개해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까? 공개적으로 선언하십시오! 결단하고, 간증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걸어가십시오! 그리하여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독의 훈련이 주는 유익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을 그저 눈감고 기도하는 정도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묵상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묵상은 기도뿐만 아니라, 독서를 포함하며, 더불어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분주한 가운데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또는 길을 걸어가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마치 십일조를 드리듯 의무사항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하루의 일과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놓아야 할 사역이자 일과입니다. 참고로,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구분해 놓았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루의 아침과 저녁; 일주일의 하루; 한 달의 처음과 마지막 날; 한 해의 네 절기; 등등.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마음대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오래 동안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절대 다수가 대학생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절대적인 지식의 양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성인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문∙사회∙철학 분야의 지식은 말 할 것도 없고, 전공 지식도 해가 거듭할수록 발전과 진보를 보여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저학년 때 배운 것은 고학년이 되면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할 정도입니다. 꾸준한 반복과 연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도 별로 좋지 않으면서 노력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식마저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공부는 단순히 지식만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우수한 학생의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식의 분량은 독서 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늘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학습 능력입니다. 학습 능력이란 함은 이해력, 논리와 추론 능력, 즉 습득한 지식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학습 능력 또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반복과 훈련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 매일 묵상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매주 당면하는 설교나 <성경>공부 준비를 위해서라도 다른 여러 책들을 함께 읽어야 하며,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은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기록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한 것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칩니다. 감히 말할 수 있거니와, 필자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이런 훈련을 통해서 사고력과 논리력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교수로서, 목사로서, 가르치는 소명에 즐겨 순종하다보니 그것이 본인에게 큰 배움의 기회로 기능해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필자는 최근 들어 <욥>의 한 구절을 수시로 되뇌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이 약속은 비단 영성의 영역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 예로, 필자의 경우 이제 대학에서 정년을 몇 년 남기지 않은 시점임에도 연구 활동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고 번성해 가고 있는 것을 그것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독대도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시편>은 여러 곳에서 “야훼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섰을 때, 그분 역시 우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집트’ 감옥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과 마주 앉아 변론한 것도 바로 이를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그분은 나와도 이처럼 변론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4. 하나님과 양심: 은혜와 회개
요셉의 두 얼굴. 위대한 진리는 대개 양면성 내지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20세기 초 과학계를 놀라게 했던 “빛의 이중성”에 관한 발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빛은 입자(粒子)이면서 동시에 파동(波動)이기도 하다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발견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비친 ‘요셉’은 어떻습니까? 다음 모습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 서서 결박하고”(24절). 그는 울고 있습니다. 감격과 사랑의 눈물입니다. 형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형들의 회개에 가까운 고백과 간증을 듣고 흘리는 용서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혼자 무대 뒤에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돌아와 형들 앞에 다시 앉았을 때, 그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심문관으로 돌변합니다. 그들 중 하나를 끌어내어 결박해 버립니다.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형들에게는 ‘요셉’은 일관되며 전혀 모순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렵고 무서운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일 뿐인 것이지요. ‘요셉’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용서하고 싶어 하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역시 두 얼굴을 가지신 분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죄와 불순종으로 찌들어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두려운 심판관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나에게 닥치는 갖가지 시련이나 환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가 아니라, 因果應報나 또는 自業自得에 따른 가혹한 처벌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습니다.
뜻밖의 횡재.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베푸는 “호의”(好意)나 “자비”(慈悲)는 어떻습니까? ‘요셉’이 형들의 자루에 넣어준 돈 말입니다. 당시 ‘바로’의 왕궁이 있던 ‘멤피스’는 지금의 수도(首都) ‘카이로’입니다. 이곳에서 ‘야곱’이 살고 있던 ‘가나안’의 ‘헤브론’까지는 대략 400 킬로미터로서 걸어서 적어도 3주는 족히 걸릴 거리입니다. 곡식이 든 자루를 나귀 등에 가득 싣고, 먼 귀환 길에 오른 이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이제는 살았구나.”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을까? 하지만 ‘시므온’을 남겨두고 오는 것이 미안하고, 어딘지 불안하다다는 느낌이었을까? 그래도 원하던 곡식까지 얻어 이렇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자비를 베풀어준 ‘이집트’ 총리가 그저 고맙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이들 모두는 이제 더 이상의 충격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뜻밖의 횡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뜻밖의 횡재”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누군가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식 자루를 풀었더니 그 속에서 돈이 나온 것입니다. 그 돈은 그들이 곡식을 사려고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 돈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뜻밖의 횡재”, 그들은 좋아라고 환호했습니까?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28절하).
도대체 왜 이들이 이처럼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흥미로운 발견 하나 지적합시다. 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거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29장에서 <야곱 이야기>가 처음 시작된 이래,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나머지 자식들이 하나님을 거명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자연의 재앙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에도, 낯선 ‘이집트’ 총리 ‘요셉’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당할 때에도, 간첩죄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에도, 그 모든 일들을 단 한 번도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참으로 달라진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애에 이제 무엇인가 하나의 극적 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첫째, 이들은 “뜻밖의 횡재”를 “횡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간에 묻는 질문,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는 질문이 아니라, 실은 한탄과 절망이 섞인 울음인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의 지난 잘못을 결코 잊지 않고 되갚으시는구나!” 이들의 생각은 과연 옳은 것입니까? 주변 정황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찾아온 “뜻밖의 횡재”가 횡재가 아니라, 정말 죄에 대한 처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루 속에 든 돈은 ‘요셉’이 그들에게 베푼 선물이자 은혜였습니다. 그야말로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참고. 43:23). ‘요셉’은 그 돈으로 형들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떨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잠언서>에서도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잠 28:1)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잠언에도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말합니다. 빛에 대한 어둠의 반응이 바로 그러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둘째, ‘요셉’의 형들은 횡재를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재앙이 단순히 “자연의 인과응보”에 따라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운명의 여신”이 장난을 친 것도 아니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그 일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야훼’께서 직접 간섭하고 섭리한 결과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상황 인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인식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자를 그냥 두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여 대가를 치르도록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해서 <레위기>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레 26:36).
자비와 회개.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안다면,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이들 형제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자신들에게 베푼 ‘요셉’의 호의를 어찌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루 속에서 돈을 발견하고 모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설령 이들이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값없이 주는 선물”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가르침 중의 하나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공짜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없습니다. 대개는 사라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에 대해서는 값을 치르지 않고 살아갑니다. 공기, 태양, 잉태와 탄생,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 등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습니까? <성경>을 제외한 그 모든 세상 철학이나 종교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현혹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르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복음은 우리에게 찾아온 “뜻밖의 횡재”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아무 보상도 없이 자루 속에 돈을 넣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을까? 왜 곡식에 더하여 돈까지 얹어주었을까? 왜 용서에 더하여 은혜까지 덧입혀 주었을까?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만일 조금이라도 무슨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은혜는 결코 은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과연 무슨 의도가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사랑과 은혜에 무슨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은 어딘가 불완전하며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설명해 보려는 부단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랑을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등의 범주로 나누어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펙’(M. Scott. Peck) 박사님은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면서, 모든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M. Scott Peck. <아직도 가야할 길>. 신승철 이종만 역. 서울: 열음사, 1991.
우리는 이 정의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에는 정신적 성장이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목적이 있다고 하면 탐탁치 않게 여깁니다. 둘째, 사랑은 하나의 순환적 과정입니다. 타인을 성장시킴으로써 결국 나 자신을 성장시켜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을 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사랑이 하나의 순환적 과정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가는 것이므로 사랑은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도 됩니다. 타인의 정신적 발달에 기여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인류에 기여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없으며, 또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자가 타인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로 훈련시킬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는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노력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것도 무척 힘든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펙’ 박사님의 정의에 따르면, ‘요셉’ 역시 의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요셉’의 의도와 관련해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그렇습니다. 형들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조건이자 동시에 사랑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과연 ‘요셉’의 의도는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채찍이 아닌 따사로운 햇볕이 그들의 외투를 벗겼습니까? 아니면 그의 의도는 묵살되었거나 경멸을 받았습니까? 적어도 한 가지 점에 있어 그들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비록 자신들의 지난 과오에 대하여 ‘요셉’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야곱’에게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33-34절). 일어난 모든 일을 낱낱이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아버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보기는 그들의 생애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큰 주제인 “화해”를 향한 첫 걸음인 것을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본문 이야기의 마지막에 ‘르우벤’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더욱 진일보 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이 ‘시므온’을 ‘이집트’에 붙잡아두고 있고, ‘베냐민’마저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야곱’이 절망하며 울부짖을 때, 그는 장남으로서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약속하면서, 그 담보로 자신의 아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37절).
가족 간의 화해, 아버지와의 화목을 위해 아들을 내놓는 ‘르우벤’의 행위는 하나의 상징 내지는 비유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내놓은 아들은 일종의 ‘peace child’ 즉 “화목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화해를 위해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롬 5:1).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화목제물”을 내놓아야 할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원래 전쟁 중에도 지는 약자 즉 지고 있는 편이 먼저 화평을 제안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도저히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을 주도하셨고, 화목제물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신비와 자비와 사랑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와 화목하셨는데도 여전히 내가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여전히 화목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내가 겪고 있는 기근은 없습니까?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나 학대는 없습니까? 죽음보다 두려운 외로움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셉’과 그 형들을 살펴봅시다.
5. 다 나를 괴롭게 함이로다
필자가 잘 아는 동료 교수는 개인적으로 능력도 많고 실력도 있습니다. 아마 여러 조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면, 훌륭한 연구 성과들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분입니다. 미국 유학 당시에도 그는 유명 대학에서 수학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훗날 노벨상을 받기도 했던 유명한 교수로부터 좋은 훈련도 받은 바 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젊은 나이로 모교 교수로 부임하여 열정과 꿈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 환경이 그의 의욕을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알다시피 지방대학 연구 환경이라는 것이 아주 열악할 뿐만 아니라, 연구비 수혜도 만만치 않으며, 더욱 그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의 연구실에 입학해 들어오는 대학원생의 자질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수준도 될까 말까 하는 지적 수준밖에 가지지 못한 대학원생들을 가르치며, 연구를 수행하려하니 제대로 된 연구 논문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그래도 참고 가르치려 했으나, 점차 해가 갈수록 지치고 짜증만 납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서서히 의욕도 열정도 식어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원인과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와 주지 못하니 연구가 계획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노와 원망과 질책을 학생들에게 쏟아 냅니다. 연구실 밖에서 동료 교수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수시로 자기 학생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 모든 불행은 내 탓이 아니라 그들 탓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을 두고, “똑똑한 내 탓이 아니라 못난 학생들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방금 말한 교수보다 더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연구뿐만 아니라, 신경 써야 할 교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큰 꿈과 의욕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갔고, 매 주일 예배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헌신과 간증이 이어지는 등 교회는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금방이라도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처음의 열기는 식어지고, 성장은 멈추면서, 나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하였고, 잘못된 원인을 교인들에게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주 열심인데, 교인들이 영 움직여 주지 않고 열의가 없다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태도는 필자의 설교에 반영되기 시작했는데, 설교의 내용도 처음 시작할 때의 격려와 희망과 꿈에서 점차 비난과 원망과 냉소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정이 식은 교인들을 자극하고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혹시 나는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내 인생의 불행이 내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주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삶은 苦海다. ‘예루살렘’ 성문 곁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요 5:5). 그는 무려 삼십팔 년을 그 연못가에 누워 기적이 일어나 자기의 병이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못의 물이 솟아오를 때, 누군가 자기를 들어 그 물속으로 집어넣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동안 아무도 그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이 먼저 기적의 수혜자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정한 사람, 냉혹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기본 전제가 이랬습니다. 그의 마음의 창문에 비친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 병자와 똑 같습니다. 그의 절규를 들어봅시다: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하). 아무도 내편을 들어주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자식들이 그토록 바라던 좋은 소식은커녕 雪上加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가지고 온 곡식 자루 속에서 돈이 나오지를 않나,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고 오지를 않나, 애지중지하던 막내 ‘베냐민’을 ‘시므온’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지를 않나, 주변이 온통 원수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상).
사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삶은 고해(苦海)다.” 석가(釋迦)는 사해(四海) 가운데서 삶을 가장 큰 苦海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이란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것이 악한 “세상” 때문에 비롯된 것이든(참고. 요 15:19), “육체의 정욕” 때문에 비롯된 것이든(참고. 갈 5:19-21), 또는 그야말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의 소행이든(벧전 5:8),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원수들임에 분명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의 절규는 진실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주변에 온통 원수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두”가 그를 해롭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모든 일에” 하나님도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 그렇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나타나셨던 “벧엘의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족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3-15)
그가 지금 “벧엘의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분께서 다시 나타나셔야 하겠습니까? 다시 새로운 약속으로 ‘야곱’을 달래주어야 하겠습니까?
‘야곱’은 어쩌면 “벧엘의 하나님”을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두”가 그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침묵을 불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나는 정말 제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대 정말 힘이 듭니다. 왜 나는 제대로 살려고 하는데, 세상과 사람들은 온통 나를 대적하고 있습니까? 나는 제대로 하는데 왜 세상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까? 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까? 정말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 이 세상에 정말 나와 같은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칠천 명의 남은 자들. 나는 어떻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능력과 용기를 갖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기도로 이스라엘의 온 땅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가 하면,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에서도 기도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여 이들이 세운 제단을 모두 불태워버렸고, 이 일 후에 거짓 선지자들 모두를 도륙해 버렸으며, 다시 그의 기도로 기근이 끝났습니다.
이와 같은 영웅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분이 한껏 고무되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까? 용기백배하여 더욱 왕성하고 활기찬 사역을 이어갔습니까? 기적과 능력이 계속 그와 함께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호렙’ 산의 한 동굴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의 왕 ‘아합’과 사악한 왕비 ‘이사벨’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든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목숨을 연명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부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14)
그의 불평의 요지인 즉은,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내편이 되어줄 주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과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불평입니다.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는 ‘야곱’의 원망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그 유명한 “칠천 명의 남은 자”들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강조인 즉은 ‘엘리야’와 같은 자가 무려 “칠천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와 같은 자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 즉 “소수의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the faithful minority)이라는 자신의 메시지로 삼고 있습니다(롬 9:27).
나는 어떻습니까? 오늘 나도 주님과의 “좁은 길” 여정에서 ‘야곱’이나 ‘엘리야’처럼 항상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두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할 그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없다면,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가 다시 제자를 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모두 나를 괴롭게 할 뿐이로다”고 외치는 오늘의 ‘야곱’이나 ‘엘리야’에게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34누가 정죄하리요?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대답은 무엇입니까?
37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창세기>나 <족장 이야기>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본문으로부터 이끌어 낸 일련의 설교-하나님과 양심-들은 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2.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에게 사용한 일련의 채찍들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어떤 채찍들을 어떤 순서로 사용하셨을까요?
3. “고독”을 하나님의 은사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나는 그것을 은사로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각자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은사를 나누어봅시다.
4.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으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