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2과
기 근
김태정 목사창세기 12:10-12:20약 38분 분량
그 때에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가뭄이 너무 심해서, 아브람은 이집트로 내려가 살았습니다(12:10).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흘러야 할 이 땅에 웬 가뭄입니까? 생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가뭄이 그 땅에 수시로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창세기>에서만 수차례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조차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일까요? 과연 ‘아브라함’은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까?
영웅의 반응은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한 제단(祭壇)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던 직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가 단순히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더 좋은 곳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두고 믿음이 부족한 탓이려니 하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가족을 이용하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믿음의 조상으로 봐주기에는 곤란합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던 가나안에 가뭄이 웬 말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가 없거나 있어도 가뭄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지.” 이 질문은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영국의 ‘버트란트 러셀’ 경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에서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질문 하나는, “과연 ‘아브라함’과 같은 약삭빠르고, 자기 실속만 챙기며,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도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만일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라면 이런 질문은 적절한 것입니다.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때 신학적 주제나 신앙적 교훈이 그의 행동을 중심으로 이끌어져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면 상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무대 뒤의 주인공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다름 아닌 이 모든 이야기의 저자이자 동시에 등장인물이기도 한 ‘야훼’ 하나님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때 질문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문학과 역사
본문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두 번째로 등장하는 단락이지만, 실은 전체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첫 번째 단락은(11:27-12:9) 이야기의 배경이자 서론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라’가 ‘아브람’을 잠시 떠나 이집트의 “여궁”에 들어가 살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생애에 단 한 번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의 생애에서도 마치 후렴처럼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족장 이야기>에서 일종의 전형(type) 내지는 예시(foreshadowing)의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20장; 26장.
이 사건이 전형(典型)이 된다함은 이를 통해서 주인공의 인물됨이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예시(豫示)가 된다함은 이후에 일어나는 유사한 이야기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일관된 신학적 주제와 신앙적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예시화”는 <구약>의 설화문학의 한 기법으로서, 일련의 유사한 이야기 중에서 앞에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뒤에 일어날 사건을 예시하고, 예증해 주는 효과를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심 주제가 더욱 발전되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통일되고 목적론적인 역사관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그리하여 처음 일어난 사건은 마지막 사건을 예시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문 이야기는 그 내용에 있어, 후에 그가 남방 땅 ‘그랄’에 가서 겪게 되는 이야기나(창 20장), 그의 아들 ‘이삭’ 또한 그곳으로 이주하여 겪게 될 이야기와(창 26장) 매우 닮은 점이 많습니다. 더 나아가서 후에 ‘야곱’과 ‘이스라엘’이 겪게 될 순례 여행과 출애굽에 대한 예시가 되기도 합니다(창 41-출 12). 따라서 본문의 해석을 시도할 때 하나의 독립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시적인 사건으로 다루면서 신앙적 교훈을 이끌어내야 할 것입니다(참고. 서론).
본문 이야기가 전하려는 신학적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야기는 10절과 함께 시작하고 있는데, “기근”(饑饉)이라는 단어가 문장의 처음과 마지막을 마치 괄호처럼 에워싸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이 왜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0절).
단락과 구조. 따라서 본문의 또 다른 제목으로 기근을 선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시작은 분명하지만 단락의 끝을 어디를 잡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견해를 소개할 수 있는 바, (1) 12:10-13:4, (2) 12:10-13:1, (3) 12:10-20 등으로서, 세 번째 견해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각각의 입장의 차이와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에 대해서는 참고도서 1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으며, 연극 무대를 상정한다면 각 무대의 특징이나 등장인물에 따라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게 할 수도 있습니다:
A 해설: 입장(10절)
B 장면 1: ‘아브라함’의 대화(11-13절)
C 장면 2: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현실로 드러남(14-16절)
B' 장면 3: ‘바로’의 대화(17-19절)
A' 결말: 퇴장(20절)
이와 같은 대칭적 구조는 이야기의 전 후반에 등장하는 ‘베델’과 ‘아이’(12:8; 13:3), ‘네게브’(12:9; 13:1), 그리고 ‘이집트’(12:10; 13:1) 등과 같은 일련의 지명들이 구조적 특징을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민담(民譚)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그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제 제기(10절); (2)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도(11-13절); (3) 계획의 실행과 사태의 악화(14-16절); (4) 뜻밖의 개입(17절상); (5) 결말(17하-20절). 이 밖에도 이야기 속에는 단지 세 사람의 주인공, 즉 ‘아브람’과 ‘사라’와 ‘바로’ 만이 등장하고 있으며, 각 장면마다 한 쌍의 주인공들, 즉 ‘아브람’//‘사라’, ‘사라’//‘바로’, 그리고 ‘바로’//‘아브람’이 번갈아 등장하는 등, 민담으로서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본문 이야기가 예시해 주고 있는 미래의 두 이야기, 즉 <아브람과 아비멜렉 이야기>(20:1-18)와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26:1-11) 속에는 구전 문학이 갖추어야 할 이와 같은 소위 “전형적인 요소”들이 보이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이들 두 이야기는 후대의 편집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는 나머지 두 이야기보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 된 일종의 원형(原型)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26장)야말로 오히려 더 원형에 가까우며 나머지 두 이야기가 후대의 편집적 개작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참고. Wenham, 286-287쪽).
자료와 편집. 본문의 자료적 성격은 <야훼 자료>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야훼’ 기자 자신의 편집적인 손길과 이전의 자료가 얼마나 혼재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기도 합니다. 대개 민담은 그 자체로서는 비교적 단순하며 거친 문체를 양식적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전형적인 <야훼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18장이나 24장 등을 읽어보면 상당히 세련된 양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자료비평 분석을 해본다면, 비교적 세련되고 상세한 해설을 곁들이고 있는 17절 정도를 ‘야훼’ 기자 자신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기근(10절)
화자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에 대해서 반복 언급하는 것으로 <아브라함 이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0절)
이와 유사한 표현이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26:1; 41:54, 56; 43:1). ‘아브라함’ 이후 족장들은 그 땅에 기근이 닥칠 때마다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참고. 26:1; 47:4; 룻 1:1). ‘가나안’에서 산발적인 강우(降雨)로 인하여 현대적 관개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이와 같은 일은 반복되었으며, ‘이집트’는 좋은 ‘나일’이 주는 풍요함으로 좋은 피난처가 되었습니다(참고. 신 11:10). ‘이집트’ 문헌에서도 기근으로 인하여 주변 외국인들이 그 땅을 찾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호렘헵’의 무덤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일단의 외국인들이 어떻게 할지를 몰라 이곳으로 왔다...그들 나라는 굶주리고 있다.”
‘가나안’은 구릉지역이며, 이에 비해 ‘나일’ 계곡은 평평한 저지대입니다. <성경>에서도 두 지역 간의 왕래에 대해서 쓸 때, “이집트로 내려가다”(예. 26:2; 43:15)라든지 “이집트에서 올라오다”(예. 13:1; 45:25; 출 1:10)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살기 위해 그곳으로 “이주”했다(rWG, 구르)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이 단어가 암시하는 바는 장기간의 체류로서, 그동안의 ‘아브라함’이 보여 온 생활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집트’에 영구 이주하기로 결심한 것이,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직후라는 점입니다(적어도 문맥상으로 보면 그러합니다).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점은 그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주인공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강조하려는 듯 보이는데,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고 다시 한 번 반복 언급하고 있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입니다. 그의 행동은 이어지는 <족장 이야기>나 <출애굽>에서 유사한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근으로 야기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2. 피신(11-13절)
첫 번째 장면의 무대는 ‘이집트’ 국경입니다. 무대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말하고 그가 가진 계획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11-13절)
‘사라’의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언(無言)의 동의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기근을 피하여 ‘가나안’을 떠나 왔지만, 새로운 위기가 ‘아브라함’을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낯선 곳의 새 이주자로서, 그를 지지해 주고 보호해 줄 가족 공동체 같은 울타리가 이제는 없습니다. <성경>도 이주민이 이주한 곳에서 종종 겪는 약탈(掠奪) 등과 같은 신체적 위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출 22:21; 23:9). 이방인이라는 신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나안’에서나 ‘이집트’에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왜 유독 ‘이집트’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집트’와 ‘가나안’ 주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사라’의 뛰어난 미모에 관한 언급인데, ‘아브라함’은 ‘사라’가 나이 65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인 사이에서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단순히 나이 든 남편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화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참고. 14-15절).
‘아브라함’의 두려움인 즉은 ‘이집트’인들이 빼어난 미모를 지닌 ‘사라’를 그냥 둘리가 없으며,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이나 친척도 없으니, 누구든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데려다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내놓은 묘안은 사람들에게 ‘사라’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소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혈연관계로만 따진다면 ‘사라’는 그의 누이가 맞기는 합니다(우리는 이 사실을 ‘데라’의 계보를 통해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사실상 ‘하란’ 등과 같은 고대 근동 지방의 상류 계층에서는 신랑과 신부는 결혼을 통해서 법적으로 형제나 누이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Hamilton, V. P., 제 381-382쪽.
역사적이고도 법적인 사실 여부가 어떠하든,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로 부름으로써 얻고자 했던 바가 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처럼, 누구든 ‘사라’와 결혼하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를 허용해 주리하고 작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는 아내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함은 물론 더 나아가 경제적인 실속까지 챙길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대화를 통해서 볼 때(참고. 13절), 이 같은 해석도 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곧 이어 벌어지는 사태(15-16절)에서 보듯이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습니다. 간음에 대한 동양인들의 태도는 현대인들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더 엄격했던 것이 사실이라(참고. 20:2-9),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가 간음을 저지르도록 순순히 방임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왕이 ‘사라’의 문제로 ‘아브라함’을 꾸짖을 때,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이 내심 바랐던 바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구혼자(求婚者)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실제로는 아내를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면서, 짐짓 결혼을 승낙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Cassuto).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컨대, 누이 ‘리브가’를 내놓기를 주저했던 ‘라반’이나(24:55), 여동생 ‘디나’의 결혼을 반대했던 ‘야곱’의 아들들이 있습니다(34:13-17).
앞서 밝혔듯이, 남편의 계획에 대해서 ‘사라’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은 암묵적으로 동의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대응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에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녀의 침묵은 조금 후 ‘바로’가 ‘아브라함’을 꾸짖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의 침묵과 묘한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악화(14-16절)
이 두 번째 장면의 주역은 ‘아브라함’과 ‘바로’의 “고관들”이며, 상대적으로 ‘사라’와 ‘바로’의 역할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아브라함’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바대로 ‘이집트’인들은 ‘사라’의 미모에 혹했고, 아무런 어려운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14절)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라’의 미모가 왕궁에 까지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사전 계획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이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가 버린 것입니다.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15절)
이 말은 결혼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서, ‘바로’가 그녀를 데려다 결혼 예식을 치렀다는 것으로서, 간통과는 구별됩니다(참고. 20:2-4; 34:2; 38:2; 신 22:1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모든 형태의 결혼을 포괄적으로 의미하기도 합니다(참고. 25:1; 34:9, 16; 레 21:7, 13; 신 20:7). 따라서 이 문장에서 ‘바로’가 취한 행위가 정확하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기는 합니다. 예컨대, ‘사라’가 단순히 ‘바로’의 규방(閨房)의 일원(一員)이 되었다는 것인지, 또는 신하들이 그녀를 ‘바로’ 왕에게 데려갔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 후자(後者)의 경우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만, 화자는 이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집안에 재앙이 내렸다든지(17절), ‘바로’ 자신의 언급(19절)을 통해서 추측해 볼 때, ‘바로’는 사실 상 ‘사라’를 간음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에게 뜻밖의 횡재가 따라 왔습니다. 마치 그의 선택이 잘 된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16절).
결혼의 대가로 신부 집에 결혼 예물을 주는 것은 당시 일종의 관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예. 24:52-53; 출 22:16-17; 삼상 18:22-28). ‘아브라함’이 받은 선물도 ‘바로’가 ‘사라’의 오라비에게 준 일종의 선의(善意)의 선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등장하는 선물의 목록 중에서 “노비”(원문에는 “남종”과 “여종”으로 되어있음)가 짐승 들 사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기도 합니다. 정 반대의 견해도 있는데, “암수 나귀”와 “낙타”가 오히려 후대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특히 낙타의 경우, 이를 가축으로 이용하게 된 시기는 일러도 주전 2000년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분명 연대기적 착오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선물의 목록 중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낙타도 포함되어있었다는 언급은 ‘아브라함’이 받은 선물의 규모와 내용이 대단했음을 시사한다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후 또 한 번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 속여 큰 부를 얻게 되며(20:14-16), 그의 아들 ‘이삭’ 역시 같은 속임수로 큰 횡재를 누리게 됩니다(26:12-14).
<아브라함 이야기>의 처음 두 장면은 여러 면에서 <아담 이야기>(2-3장)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사라’나 동산 중앙의 나무에 대해서 “(보기에) 아름답다”고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2:9; 12:11), 이를 보고 “취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3:6-7; 12:15-16).
4. 개입(17절)
세 번째 장면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야기 속으로 직접 개입하고 있으며, ‘아브라함’과 ‘바로’의 직접적인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분노한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일종의 면피(免避)성 질문을 연거푸 쏟아낸 후에, 그를 추방해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이집트’ 밖으로 추방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신지라(17절)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야기는 반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내린 “재앙”([g'n, 네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간혹 이 단어는 피부 질환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예. 레 13-14; 왕하 15:5), <성경>에서는 이를 심각한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리시는 형벌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피부 질병을 앓은 문둥병자가 치유를 받은 후에는 속죄제를 드리게 한 이유도 바로 이 질병이 범죄의 결과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입니다(참고. 레 14:13). 주인이 정혼한 여종과 간음을 한 경우에도 동일한 제사를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19:20-22). ‘바로’ 왕이 이와 같은 간음을 저질렀으니 그에게 내린 재앙도 피부질환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5. 추방(18-19절)
‘바로’가 ‘아브라함’을 소환(召喚)합니다. 그의 질병이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참고로 ‘아담’이 범죄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를 때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18-20절)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이 세 번에 걸친 수사적 질문 속에 ‘바로’의 분노와 실망감과 배신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에덴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와’를 향해 물으셨던 질문이며(3:13), ‘가인’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4:10).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거짓말에 대해서 꾸짖을 때도 같은 식의 질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20:9; 26:10).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한 족장들의 거짓말에 대해서 이방의 왕들은 항상 충격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들의 충격과 분노는 즉각적인 추방의 명령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같은 결정은 범죄 행위에 대한 사법적인 선언으로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예. 3:22; 4:11; 11:6; 20:7). 짧은 비난성 질문이 있은 후, ‘아브라함’에 대하여 선고를 내리는데, 이 역시 불과 네 개의 ‘히브리’ 단어만을 포함하는 짧고 간결한 선고입니다: “여기”; “아내”; “데리고”; “가라.” 다시 한 번 ‘바로’의 분노를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대가는 국외 추방이 고작입니다. 아내로 인하여 ‘이집트’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또 그로 인해 사형에 해당될 정도의 심각한 범죄 간음을 저지른 ‘바로’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받은 처벌은 지나치게 가볍다 하겠습니다. 이방 왕의 관대함이 오히려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그가 복수를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왕의 비난이나 질책에 대해서 묵묵부답으로 대응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형식은 국외 추방의 내용이 어찌 되었건 추방은 추방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묘사할 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출 3-11). 두 경우 모두 ‘바로’ 왕의 최대 관심사는 골치 덩어리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기근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주 극심하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화자는 마치 노래하듯 <아브라함 이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10절). 그리고 바로 이점이 첫 번째 에피소드의 시작과 다른 점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창세기> 2장 이후 처음으로 ‘야훼’ 하나님의 명령과 주도적인 개입으로 시작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두 번째 에피소드는 화자 자신의 해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앞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서 명령하고, 주도하고, 약속하시던 그 하나님은 무대 뒤로 숨어버리신 듯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 기근이 무대를 지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땅에 가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더러 가서 살라고 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흘러야 할 땅입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일시적인 가뭄이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생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가뭄은 곤란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재난 대비 매뉴얼도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선택. 이런 뜻밖의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가뭄으로 찌든 “약속의 땅”에 남아, 온 가족과 가축을 굶겨 죽이느니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의 ‘나일’을 선택했습니다. 적어도 화자가 암시하는 바는, ‘아브라함’이 그곳에 일시적으로 피신을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눌러앉아 살기 위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 영구(永久) 이민을 간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번성하고 번창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에서 해왔던 것처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어쩌면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훨씬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을 법도 합니다. <시편> 기자의 솔직한 고백대로, 누가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하겠으며, 음부에서 주께 감사하겠습니까(시 6:5)?
사실 약속의 땅 후보지로 치자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 땅”에는 수시로 가뭄이 몰아닥쳤으며, 그 때마다 족장들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야 했습니다(참고. 26:1; 41:54, 56; 43:1). 그런 점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피난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집트’를 약속의 땅으로 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 온당하다 할 수 있을까? 즉 그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결과를 놓고 보자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로 톡톡히 대가를 치른 후, 결국 원래의 땅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해보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교훈의 요지인 즉은, “하나님의 백성은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환경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의 시험에서 승리해야한다”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음 두 주석의 해당 본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Warren W. Wiersbe. 「순종하여라」. 김원주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2) Henry Morris. 헨리 모리스.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1991.
신앙적 교훈으로 삼기에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론은 다소 주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선택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주인공은 다름 아닌 기근입니다. 그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우리의 영웅 ‘아브라함’마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이는 마치 침례 ‘요한’이 감옥에서 그 믿음이 흔들렸던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화자 역시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서둘러 ‘이집트’로 떠나는 것에 대해서 비난도, 지지도 보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자는 그의 독자들을 향해서 “왜 좀 더 솔직해지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듯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난하고 공격해 보라고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는 말입니다. 이 중요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침묵과 그에 따른 직무유기(職務遺棄)가 더 돋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인생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명령하고, 황홀한 약속을 남발하셨던 그분이 지금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기근만이 맹위를 떨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질문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화자 자신도 이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0절).
‘아브라함’은 초인(超人)도 아니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神)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할 수도 없고, 설령 안다 해도 미래의 결과를 바꿀 능력도 없습니다. 결국 선택의 책임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를 약속의 땅으로 지정해주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아브라함’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보다 적절한 질문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까?”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그분이 기근을 적극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관한 것이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아브라함 이야기>뿐만 아니라 <오경>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 전지전능한 화자는 성급하게 해답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그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라고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피신. 두 번째 장면의 무대는 ‘이집트’ 국경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심각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나 싶었는데, 또 다른 위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환경의 위협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협입니다. 생명의 위협입니다(11-13절).
그런데 두 번째 위기는 주로 ‘아브라함’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아내 때문입니다. ‘사라’가 너무 아름다워 이곳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아내를 납치해갈 것이 분명합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아브라함’은 궁여지책을 마련합니다. ‘사라’가 아내가 아니라 누이 동생이라고 속여 생명을 부지하려는 생각이 듭니다.
이방인이라는 신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나안’에서나 ‘이집트’에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왜 유독 ‘이집트’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민자들이 낯선 곳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역시 언어일 것인데, ‘이집트’와 ‘가나안’ 주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점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집트’를 더욱 낯선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사라’의 뛰어난 미모에 관한 언급입니다. 나이 65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처녀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느꼈다는 사실입니다(14-15절). 이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만,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미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난할 듯싶습니다.
‘이집트’와 같은 객지, 그것도 남의 여자를 예사로 빼앗아 달아나기로 악명 높은 그곳에서, 매혹적인 아내를 데리고 여행하는 남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기를 보호해 줄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상황에서 아내를 지키려 하다가는 필경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에서 ‘롯’이 그와 함께 동행 했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염려 끝에 마음속에 떠오른 한 가지 묘안이 사람들에게 ‘사라’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소개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혈연관계로만 따진다면 ‘사라’는 그의 누이가 맞기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생각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란’ 등과 같은 고대 근동 지방의 상류 계층에서는 법적으로도 신랑과 신부는 결혼을 통해서 형제와 누이가 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Hamilton, V. P., 제 381-382쪽.
역사적이고도 법적인 근거가 무엇이며 어떠하든, 이런 결정을 내림으로써 ‘아브라함’이 성취하고자 했던 바가 있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즉 그가 기대했던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누구든 ‘사라’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허용해 주리하고 작정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 대가로 목숨도 부지하고 경제적인 실속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악화. ‘아브라함’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일이 더 꼬이게 됩니다.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집트’ 사람들은 ‘사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이제 모든 일은 ‘아브라함’이 계획했던 대로 진행될 참이었습니다. 아무나 나타나서 ‘사라’를 데려다 아내로 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사라’의 역할은 수동적이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생각이나 의견이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어떤 형태로든 남편의 뜻에 동의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침묵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의 대신들이 ‘사라’를 보고 ‘바로’의 궁으로 데려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결혼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서, ‘바로’가 그녀를 데려다 결혼 예식을 치렀음을 암시합니다. ‘바로’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9절상) 이 일은 분명 간음에 해당되는 것이며, ‘바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브람’과 ‘사라’ 모두 이 일에 고의적으로든 아니든 개입한 당사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나중에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겪게 될 유사한 사건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이때에도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하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잠자리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20:3-4).
‘바로’가 과연 ‘사라’와 잠자리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브라함’에게 있어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아내를 잃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바로’가 ‘사라’를 취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완강하게 거부하며 버텼을까? 순순히 응하여 그녀를 보내 주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화자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그의 조카 ‘롯’이 납치되었을 때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참고. 14:14-16). 그가 ‘롯’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터라, 화자의 침묵은 ‘아브라함’의 “편의주의”식 윤리 의식을 꼬집고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하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첫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던 영웅적인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야비하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죽고 없다면 위대한 국가고, 무수한 후손들도, 다 헛된 구호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가 죽고 없다면 약속의 땅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기근으로 굶어 죽든, ‘이집트’에서 아내 때문에 목숨을 잃든 하나님의 언약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보다 쉽게 이루어지도록 미력이나마 보태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편이 윤리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말입니다. 약속과 상황, 믿음과 윤리 사이의 갈등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삶의 한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약속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인가? 선택은 십중팔구 현실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택한 결과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선택이 잘된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아브라함’에게 뜻밖의 횡재가 따라 왔습니다(16절). 대개 이런 경우 나라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겠습니다. 어렵게 내린 선택의 결과가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내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과연 그럴까? 이 모든 횡재가 과연 하나님의 축복 때문일까? 화자는 다소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성공은 아내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받게 된 보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는 식의 어조입니다. <잠언서>는 두 종류의 부(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거나(잠 10:22), 아니면 불의하게 얻은 것입니다(잠 10:2). 가난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한 결 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부유함에 대해서는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래서 교회는 “성공신학”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르긴 해도 ‘사라’와 같이 당하기만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약삭빠르고 잔재주가 많으며 다른 사람들을 잘 이용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의 편에 서있는 불공정하고 불의한 존재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대개 이처럼 약삭빠른 자들의 편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일종의 자연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도 이런 세상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거나, 있다고 해도 불의하거나 또는 무기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아주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게도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실망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박국>의 노래가 그 대표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 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 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기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그를 더 찾게 하는 효과가 있기도 합니다.
개입. ‘사라’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실 것인가? 이것이 독자들의 의문이자 항의입니다. 지금까지 그분은 그렇게 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인가 하고 묻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면 그분은 자신의 언약을 지킬 의도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늘 그렇듯이 오로지 자연법칙이나 정글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고 말 것입니다. 약속도 섭리도 없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시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대답이라도 하듯 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강력한 자연법칙을 일시 유보시킵니다(17절).
여기서 이야기는 갑자기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해밀턴’은 이와 같은 극적 반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는 ‘아브라함’이 주도하고 지배하던 역사에서 하나님이 주도하는 역사로 전환하고 있다.” Hamilton, V. P., 384쪽.
‘바로’ 왕에게 쏟아지는 큰 재앙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분명 수백 년 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 땅을 탈출하려 할 때, ‘이집트’의 또 다른 왕 ‘바로’가 하나님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며 한사코 떠나는 것을 거부하다가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되는 출애굽 사건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출 7-12).
이제 ‘사라’는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라는 사건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때문에 큰 부를 얻게 되었는가 하면, ‘바로’는 그녀 때문에 큰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그녀는 이 모든 일의 촉매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 덕분에 부자가 된 것은 배가 아프긴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 치더라도, ‘바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런 일을 당했으니 오히려 억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법이 이렇습니까? 범죄 시 고의성(故意性) 유무는 형량을 결정할 때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구약>의 도피성 제도도 고의성이 없는 살인에 대해서는 보호해주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아무 것도 모르고 죄를 지은 ‘바로’에게 이처럼 큰 재앙을 내리다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오히려 그 모든 일을 꾸민 ‘아브라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처사는 아무리 보아도 공평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격한 법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될 때에라야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법을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이며, 부패와 갈등만 만연하게 되는 법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처사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바로’의 범죄 유무가 아니라 법 집행의 형평성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바로’에게도 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죄를 구분하고 있는데,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가 그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나 고의적으로 짓게 되는 죄를 말하는 것으로서, ‘아담’의 범죄가 그 첫 사례이자 대표적인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소극적으로 행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롬 1:18-32).
이상의 두 경우가 모두 고의성이 있는 범죄로 구분한다면, 고의성이 없는 범죄를 들 수 있겠는데, ‘바로’의 경우가 이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범죄 행위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속죄의 길을 열어놓고 있는데, <레위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제사제도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레 1-7).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 행위,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앞에서 ‘아브람’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저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12:3).
추방. 하나님이 침묵하는 곳에 세상의 왕 ‘바로’가 심판자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분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18-19절). 세 번에 걸친 수사적 질문, 즉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이 질문 속에 ‘바로’의 분노와 실망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감정이 어찌 ‘바로’에게만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정의와 공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감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당사자 ‘아브라함’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이처럼 무책임하고 얌체 같은 짓을 한 자는 마땅히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공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바로’는 믿음의 영웅 ‘아브라함’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간음이나 간통이 옳지 않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그래서 ‘사라’를 즉각적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그 대가로 ‘아브라함’에게 준 그 모든 재물과 노예와 가축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아’를 죽였으며, ‘아합’은 포도밭을 가지기 위해서 밭주인 ‘나봇’을 죽였습니다(왕상 21).
관용이나 관대함에 있어서도 세상의 왕 ‘바로’가 ‘이스라엘’의 왕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세상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12:3) 오히려 낭패를 보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냉소적이 되고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사라’ 자신은 어떻습니까? ‘바로’가 그들을 추방할 때 재물과 함께 호의로 선물했던 이집트 몸종 ‘하갈’에게 어떻게 대했습니까? ‘하갈’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들을 낳아 사랑을 받자 질투로 그녀를 학대하다가 결국 ‘이스마엘’과 함께 내쫒아 버렸습니다(16:6).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그분 역시 ‘바로’의 공분(公憤)에 동참하고 계신 것일까? ‘아브라함’에게도 형평의 원리에 재앙을 내려야 한다는 기분일까?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연속적으로 퍼 부어대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상당히 절제된 수사적 질문들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나무랄 때 물었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3:13).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도 역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4:10). 이제 하나님이 ‘아브람’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자가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은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침묵”입니다. 자신을 향해서 쏟아지는 비난과 질책에 대해서 무엇이라 변명했으며 대꾸했는지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추측컨대 그는 비참한 기분으로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어서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는 아내와 함께 국외 추방의 수모를 당합니다. 마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던 것처럼 말입니다(3:23). 그러나 이들 부부가 받은 처벌은 놀랍게도 그 잘못에 비해서 너무나 미약합니다. 체면을 좀 구긴 것 외에는 손해 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되어 그 땅을 떠나고 있습니다.
가축과 노예를 데리고 ‘바로’를 떠나 다시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이 장면은 실은 400 년 후 그의 후손들이 경험하게 될 <출애굽> 사건을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이루는 구성상의 원리는 기근-순례-노예-귀환의 형식입니다. 이 같은 원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는 이 같은 순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출애굽과 훗날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역할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내리는 초자연적인 재앙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다릅니다. <출애굽>에서 ‘바로’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재앙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저항하며 ‘이스라엘’을 내보내기를 거부합니다만, 본문에 나타나는 ‘바로’는 ‘아브라함’과 그의 하나님에 대해서 호의적이며, ‘아브라함’을 꾸짖는 모습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꾸짖는 하나님을 연상시켜주기까지 합니다(참고, 창 3). 윤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창세기>에 나타나는 이방의 왕들은 모두 족장들보다 훨씬 우월합니다(참고. 12, 20, 26장).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 역시 이들 왕들이 한 수 위에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예시(또는 예표)는 또 있습니다. <이사야서>가 예언하고 있는 바처럼(사 40-55), 두 번째 <출애굽> 즉 ‘바벨론’ 노예 생활로부터 귀환이 그것입니다. ‘이사야’는 고토 회복을 <출애굽>과 ‘아브라함’의 소명과 함께 비유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사 41:8-9, 18-19; 43:1-2, 14-16; 48:20-21; 49:8-12; 51:2-3, 9-11; 52:3-12).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두 시점에서 이 백성이 겪게 되는 운명은 ‘아브라함’이 일찍 체험했던바 그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에 대한 예표론적인 해석은 ‘마태’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이라는 대 기근을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로 피신해갔던 예수님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출애굽>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2:15).
교훈.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교회 역시 동일한 체험을 하고 있다고 ‘바울’은 쓰고 있습니다(고전 10:1-12). ‘아브람’이 ‘이집트’에 있었고, 주님 역시 ‘이집트’에 있었다면, 신자들 또한 주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 안에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이기 때문입니다(롬 4, 히 11:8-19). ‘바울’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바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 경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고전 10:11). 그리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나에게 지금 닥친 기근은 무엇입니까? 그 기근을 피하기 위한 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나의 선택에 대해서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젖과 꿀이 흐른다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기근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이집트’가 오히려 더 나은 후보지가 아닐까요?
2. ‘아브라함’과 ‘바로’ 왕의 윤리의식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두 번째 에피소드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언약>과 관련하여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